2007.07.3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성령 안에서 걸으라(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걸으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앞으로 저에게 수요설교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저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전체적인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16,17절 성령 안에서 걸으라

오늘 우리에게 미약하면서도 강렬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깊은 마음속에서 가지는 간절한 원함은 바로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원은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먼 훗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이러한 열망이 더 커지고 더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말씀은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하나님의 영은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가 되므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럽고 천연적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생명과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결코 조화되거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욕심"이 동기가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적인 말들로 포장될지라도 여전히 육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떠한 원함이나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심과 성령의 원함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원함은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나의 유익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되 그분의 말씀이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스스로 옳게 보이는 사망의 길로 급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 가고, 멈추라고 할 때 멈추는 것이지만, 육신의 욕심은 유익이 있을 때 움직이고 손해가 있을 때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1928년 일본이 중국 만주에 침략하여 만주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일지사변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일지사변이 일어난 뒤 3개월 간의 전쟁을 통해서 중국은 많은 숫자의 탱크를 잃어버렸고 더 이상 일본군의 탱크와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제 중국군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군 탱크가 지나갈 때 숨어있던 저격수가 총 한발을 쏩니다. "팅" 총알은 탱크의 표면을 맞으면서 소리만 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한 발을 쏩니다. "팅" 역시 소리만 날 뿐입니다. 또 다시 얼마가 지나고 한 발을 쏩니다. "팅" 그런데 갑자기 탱크가 멈추더니 드디어 탱크의 운전수가 도대체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것인지 보기 위하여 탱크의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게 됩니다. 이때 탱크의 뚜껑을 겨누고 있던 저격수는 운전수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당깁니다. 탱크의 운전수는 총알이 날아오든 말든 신경쓸 것 없이 탱크 안에만 있으면 완전히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탱크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탱크의 뚜껑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게 됩니다. 죄와 세상과 사탄과 육신이 연합군이 되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육신의 욕심을 거스르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결단력이 강하고 신념이 굳센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결단이 약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성령 안에서 걷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 18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18절에 보시면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성령 안에서 걸으라." 18절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이 두 표현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종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사람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억지로 오 리를 동행해 주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십 리까지도 기쁘게 동행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감추고 억누르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외적인 말과 행동만을 조심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마음 속의 동기와 의도까지도 주의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교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겸손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법을 따지며 자신의 유익과 손해를 계산하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지치고 피곤하고 복잡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단순한 기쁨과 화평 속에 안식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아닌 많은 좋고 선한 것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몇 주전에 캐나다 동부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는 "안개 속의 숙녀호"라고 해서 배를 타고 폭포 앞까지 가는 관광코스가 있었습니다. 매표소 앞에 봤더니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서 "아이고 이거 한번 타는데 시간 다 가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행 가이드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가이드는 그곳에 일하는 사람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더니 모든 줄을 앞질러서 옆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없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은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가이드의 인도를 받아서 온 저와 다른 몇 분은 일반적인 규칙 아래 있지 않고 특별한 규칙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빨리 "안개 속의 숙녀호"란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까지 가서 시원한 폭포의 물안개를 맞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는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성령님이라는 가이드, 인도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할 때에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가게 되면 율법을 초월한 생명의 성령의 법, 자유의 법에 적용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걸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 19-21절 육신의 욕심의 결과

19절부터 보시면 여러 가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은 성적인 죄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잠을 자야하는 수면욕은 죄가 되지 않지만 질병이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하루 종일 자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하는 식욕도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남용하여 탐식할 때 죄가 됩니다. 성적인 죄악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서 욕심을 부리게 될 때 죄가 됩니다. 간음과 음행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16절에서는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는 모두 순간적인 육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더 좋고 중요한 것들을 버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특징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좋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며, 성령의 특징은 더 좋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20절에서는 "우상 숭배와 마술"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죄악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게 절에 가서 불상에게 직접 경배하지는 않지만 은밀한 우리 마음 속에 수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육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육신의 욕심과 탐심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또한 우상 숭배는 영적인 간음으로서 우리에게 늘 긍휼과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우상 숭배할 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여전히 섬기고 거기에 더하여 많은 축복을 줄 것 같은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지만 거기에 더하여 많은 좋은 것들을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욕심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우상들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우상들이 무가치해지고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0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그리고 21절에 "시기와 살인"의 죄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의 특징은 모두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과 연관해서 짓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증오가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경쟁하고 진노하고 다투고 폭동을 일으키며 파당을 짓고 시기하며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목록들 중에서 경쟁하고 다투고 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자주 범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간음이나 살인이나 우상 숭배와 같이 큼직하고 무거운 죄악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시기하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똑같이 육신의 욕심 가운데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 취함과 흥청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짓는 죄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배움이나 섬김을 가지지 않고 빈둥거리며 흥청대는 것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망치고 자멸시키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2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비결은 단 한가지인데 바로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육신의 욕심을 따라 다른 형제들을 시기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주님의 일들을 섬기는데 나의 육신의 욕심이 첨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오늘날 성령을 따르고 성령에게 심는 사람만이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둘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영존하는 생명은 영원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는가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았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많은 좋은 일들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푯대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사역이나 섬김도 우리의 욕심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섬기는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 해주고 나를 따르는 것을 바라는 것도 육신의 욕심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육신의 욕심으로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썩는 것이 되어 거두어질 것입니다.

** 22,23절 성령의 열매

22절부터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오늘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앞으로 설교를 하게 될 때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랑은 육신의 모조품이 아닌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공한 그리스도인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 입니다. 지식도 있고 열심도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으로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자녀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다스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사람들 가운데 화평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신의 열매는 불화와 경쟁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신 것같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참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참아주셨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문제가 많은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주님이 참으시는 것같이 나도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부드러움입니다. 우리에게 까다롭고 거친 모든 이들에 대하여도 우리는 어린양 같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볼 때 부드러움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는 사람은 거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며 걸림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부드럽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선함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악착같이 달려드는 태도는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처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스스로 보상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나에게 선하게 대하신 것같이 우리들도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데 이것 역시 육신의 열심이나 욕심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온유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겸손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 중 한가지는 우리가 교만하며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우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는 절제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특징이 욕심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육신의 특징이 급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육신은 답답한 상황을 못 견뎌 일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의 열매는 말과 행동을 절제하며 주님께 순종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울은 대언자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했으나 급하게 스스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급하게 왕이 되려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사울을 넘겨주신 기회가 왔을 때에도 절제하였습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고전 9:25).

오늘 우리의 원함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때에 그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는 이러한 열매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할례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은 교묘하게도 영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육신을 따르는 많은 믿는 이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율법을 강조하면서 할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육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성경을 인용할 수 있고 영적인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육신과 성령은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육신과 성령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게는 영적인 모양이 있지만, 성령님께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실제적인 순종과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너무나 명백해서 우리가 금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모든 뿌리가 욕심에 기초하며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하며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익과 손해를 크게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26절에 나온 것처럼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만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걸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심게 될 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존하는 생명과 영광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탱크 밖으로 나와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꾸 가이드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서 기웃기웃 거리며 다니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성령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살 때에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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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1.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고전 8:1-3)

본문 : 고린도전서 8장 1-3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전서 8장 전체와 로마서의 한 부분, 에베소서의 한 부분을 함께 펴볼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바로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잘못된 사랑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듣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 처음 가게되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는 노래를 부르며 환영해 줍니다. 또 세상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노래들이 "사랑"을 주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다니엘이 말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이며(단 12:4), 많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이러한 지식도 가지고 있고 저러한 지식도 있으므로 나는 부유하며 풍부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하고 우쭐대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서로 배반하며 미워하고 불법이 만연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딤후 4:1-5, 마 24:10-12). 이 시대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이며 쾌락적입니다.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다 있겠지만, 전체적인 세상의 흐름은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이 사랑이 점점 메마르고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 사랑은 없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랑"이 실제로는 없으면서도 "사랑"이라는 외침만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며 지옥과 심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죄와 지옥에 대하여 경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멸망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며, 그 길로 더 이상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은 축복의 길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한 편에서 이와같이 이렇게 거짓되고 잘못된 사랑에 반발하여 일어난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또한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랑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높은 기준과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치우치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사랑을 거부하는 동시에 실제로 영혼들을 향한 사랑과 형제사랑마저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란 말만 울려 퍼지고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까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에 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며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도 일반 다른 음식과 다를 것이 없다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우쭐대게 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올바른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높아지며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만에 반대하는 단어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나 스스로를 세워주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지식은 나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에게 유익을 줍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지만 사랑은 우쭐대지 않습니다.

2절에 보시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지식이 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아는 줄로 생각하게 되지만,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때 그는 잘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내 옆의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지식으로 충분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바로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게 됩니다. 그가 지식만 가졌을 때는 몰랐던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분께서 그 사람을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아, 내가 교만하구나. 나는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하여 우쭐대고 있었구나."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식만을 가지고 우쭐대며 스스로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게 됩니다.

**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지식

이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그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들도 많고 주들도 많으나)

6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가지고 있던 지식은 그 음식들이 다른 일반 음식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우상들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가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대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쭐해집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우상들은 실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 음식은 보통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몇몇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좋은 형제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이런 죄는 지어도 되나보다"하면서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습니다.

11절에 보시면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약한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리고 타협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약한 형제를 사랑하므로 진리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내가 올바른 지식을 따라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될 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의 기준은 다만 올바른 지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배려하게 되며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당시에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이미 신전에서 한번 제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심지어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신전에서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묻지 말고 먹으라고까지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고전 10:25).

사도 바울은 내가 고기를 먹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옳고 합당할지라도, 지식이 없는 연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아예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지식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랑을 따라 살아갔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 로마서에서도 언급된 말씀

이와 똑같은 말씀이 로마서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약하여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느니라.

고린도전서 8장에서의 문제가 로마에서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어떤 성도들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다 할지라도 감사하며 먹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또 믿음이 약한 어떤 성도들은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들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신전에서 나온 것인데 어떻게 먹느냐며 채소만 먹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보며 올바른 지식이 없으므로 무식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보면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자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생각 때문에 먹지 못하던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자기들의 양심을 거슬러서 강한 형제들을 무조건 따라서 먹으므로 그들이 약한 양심이 더럽혀지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로마 교회에서는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내가 알고 또 주 예수님을 통해 확신하거니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으되 어떤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하니라."

이것을 다시 말하면 어떤 음식도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도 그 자체로는 먹는 사람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더럽히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그러나 만일 네 음식물로 인해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제 네가 사랑으로 걷지 아니하나니 네 음식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지식으로 인하여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의 형제가 근심하는 것을 보거든 우리는 우리가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지식 안에서 걷기보다 사랑으로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2 우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여 그의 유익을 구하고 그를 세워 주어야 할지니라.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지식은 나를 강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를 강하게 하며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교회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식만을 추구하면 나 홀로 서게 되지만, 사랑을 겸하게 추구하게 되면 교회와 함께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대신 짐을 져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연약함을 못 마땅히 여길 것이 아니라 담당할 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 어떻게 사랑할까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마도 유럽인지 미국인지에 드넓은 초원이 있고, 거기에는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그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여행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 뛸 듯이 기쁘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난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우리 옆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고 사신 귀한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옆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방식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격에 고칠 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실 때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모르는 지식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하신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으려고 하셨다면 우리는 질려서 도망쳐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옆의 형제 자매들에게서 잘못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모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성격들을 발견합니다. 때론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발견하고 바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 가르치고 바로잡으려고 시도하지 말고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잘못된 지식들과 문제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잡기 전에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인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알려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히 엎드리며 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시기 전에 내가 무엇인가 안다고 나의 올바른 지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신앙배경이 어떠한가를 이해해야 하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지식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똑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제시할 때 들으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정말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진리 한 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젊은 부자 청년에게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하시면서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적은 허공에다 진리를 따발총처럼 외쳐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귀한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올바른 지식 위에 믿음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인 우리들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 에베소서에 언급된 말씀

다 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4절과 15절부터 보시면 사도 바울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14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15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무엇을 빌고 있는지 잘 주목하여 보십시오.

16-19절 말씀입니다.

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알려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많은 심오한 지식과 교리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우쭐댈 만큼 많은 지식은 있으나 참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도 사람들 앞에서 지식으로 걷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계속해서 20절과 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안에서 권능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능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식에는 권능이 없지만 사랑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일할 때는 밖에서 내가 일하지만 사랑으로 일할 때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일하십니다. 먼저 사랑이 있는 가운데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권능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형제를 망치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은 많고 사랑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고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결핍되면 그 지식은 형제를 망치게 되고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마땅히 알 바를 모르게 만드는 어두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부하지 아니하며 자긍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지식은 있다 해도 사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분의 제자가 되고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많은 문제들을 다 아시고도 천천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를 우리가 따라오고 소화할 수 있는 만큼 알려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그러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우쭐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을 때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1,2,3,4,5번 순서대로 마구 제시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과연 어떠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시는지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지식은 함부로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주의깊이 듣게 만듭니다. 지식은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며 배려하게 합니다. 사랑이 풍성한 지식은 진리의 권능이 되어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만, 사랑이 없는 지식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하면서 우쭐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성도들은 옳게 행하였으나 형제를 망쳐버렸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성도들은 형제를 업신여기며 논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식과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행동을 변화시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지식은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하지만, 사랑은 먼저 나 자신을 바로잡게 만듭니다.

진리의 지식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지만 나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전달되는 지식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세워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선포되는 진리의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우쭐대지 말고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애통하며 주님께 사랑을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한 것처럼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 것인지를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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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3.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영광의 하나님(엡 1:17-19)

본문 : 에베소서 1장 17-19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19절을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그분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 저는 이 말씀으로 "영광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부제목을 달아보자면 우리가 지난 3주간 설교말씀을 들은 것과 같은 주제로써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라고 달아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다

옛날 옛날에 어떤 농부와 나무꾼과 어부가 한 자리에 모여서 신이 있다면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먼저 나무꾼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보게들 신은 분명히 산에 계셔. 자네들 이른 새벽에 나무하러 산에 올라가 봤나? 아침에 자욱하게 안개 낀 숲 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으면 그 공기만으로 신을 느낄 수가 있어. 어쩔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단 말야. 나도 모르게 내가 저지른 죄들이 막 떠올려지면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거든. 그리고 산신령이라고 들어봤지? 아무튼 신이 있다면 산에 있을 거야."

그러나 어부가 대응합니다. "어허, 신이 있다면 그건 바로 바다의 신이지. 용왕님이라고 들어봤지? 그리고 서양에서는 포세이돈이라고 부른다구. 산신령은 우리나라에만 있는거잖아? 그러니까 바다의 신이 그야말로 진짜 신이지. 신이 있다면 그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파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바다의 신이 분명해.

그러자 잠잠히 듣고 있던 농부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눈을 들어서 하늘을 좀 보게나.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있겠어? 신이 있다면 바로 태양신이지. 아니 빛이 없으면 곡식도 자랄 수가 없고, 산에 나무는 물론이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갈 수도 없단 말이야. 그리고 자네들 공부 좀 해보면 알겠지만 이 바다에 바람이 불고하는 것도 다 태양신이 이 땅을 뜨겁게 만들기 때문이지. 비오는 것도 결국 다 태양신이 하는거야.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태양신 라아라고 부르잖아. 하여간 무식하면 안된다니까."

이렇게 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해봤지만 결국 정답 없이 서로의 생각만을 주고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늘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경험과 관념에 빠져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가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 알게 하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지각의 눈을 밝히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의 권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알게 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기도와 같이 "주님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 영광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친절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하나님의 많은 특징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부분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태초에서부터 영원까지 계획하신 시작이요 결말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의 소원은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으며, 사무엘상 4장에서 비느하스의 아내는 주의 임재를 상징하는 주의 궤를 빼앗겼을 때 주의 영광이 떠났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구구절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라고 외치고 있으며, 이사야 6장에서 스랍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사람의 죄가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피조물에게 영광을 돌린 것에서 시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고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면 이 세상 왕국들을 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다가올 영광을 보시고 십자가의 수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시며 견디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우리가 장차 받을 영원한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은 아주 짧고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 이곳저곳을 살펴볼 때 "영광"이라는 주제는 계속해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 힘이 없고 잠든 것 같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구원 - 영광을 향한 경주로의 초대

사람들에게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멸망이요, 지옥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관점에서 죄의 대가가 형벌이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영광의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인용하는 로마서 3장 2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을 조금 더 풀어서 써보자면,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창조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옥의 멸망에 처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했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화살이 표적을 벗어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영광이라는 표적을 향해 활을 당겼는데 인간의 죄로 인하여 표적에서 빗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만 멸망할 죄인을 지옥에서 건져낸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실격처리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달릴 수 없게 된 우리들의 위치를 회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릴 수 있도록 출발선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끝이나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요 출발인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계획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을 가리켜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벧전 5:10).

또한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자신이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자신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자신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의 위치는 예정을 받은 것만이 아니요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부르심을 받은 것만이 아니요 의롭게 된 것이며, 다만 의롭게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목적은 바로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크고 작게 영광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에 성공하여 재벌이 되어서 그 영광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어 국민의 영웅이 되고 모든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수나 영화배우가 되어 많은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환호를 한 몸에 받는 영광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 뿐 아니라 때론 매우 소박하고 평범하게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우와, 당신은 매우 성실하군요.", "당신은 정말 깔끔하군요.", "당신은 정말 책임감이 강하군요.", "당신은 아주 순수하시군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영광스러워하고 때로는 그러한 영광, 칭찬, 평가를 얻기 위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렇게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악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결승전을 치르지 않은 어떤 우승후보가 벌써부터 금메달을 딴 것처럼 미리 기뻐하는 것같이 아주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것은 장차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시상해 주실 것이지 우리가 아직 이 땅에서 경주하는 동안에 누려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경주를 다 달린 후에 주어지는 것이지 경기 중간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경기를 달리는 중간 중간 관중들을 바라보고 멈칫하고 주춤한다면 그는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일들을 섬기려고 한다면 이렇게 주변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

저는 오늘 말씀의 부제목을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치 자신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지옥과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분명히 인식한 사람만이, 예수님이 필요한 것을 알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 얼마나 절실한지를 분명히 알 때만이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한 젊고 유능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똘똘하고 계산이 빠른 형제였습니다. 또한 이 형제는 아주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한 일주일 하다가 그만두는 일도 이 형제는 일 년이 지나도록 지속하고, 남들이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도 꼼꼼하게 따지고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는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는 무슨 훈련을 받아서 이렇게 된게 아니라 그냥 천연적으로 원래부터 그랬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주 훌륭한 형제였습니다.

이 형제는 스스로 느끼기에 십자가가 별로 필요 없는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무엇을 할 수 없는 육신이어야 십자가가 필요하지, 성경공부면 성경공부, 구령이면 구령, 설교면 설교, 교회봉사면 교회봉사, 아주 다방면으로 교회의 지체들과 비교해 볼 때 그다지 못하는 게 없으니까 육신이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말이 상당히 멀리 느껴졌습니다.

주님을 사랑했던 이 형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깊은 속에 있는 갈망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께서는 이 형제의 기도에 "아멘!" 응답하시고 그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깊은 속에 있는, 영원한 목적이 바로 영광스러운 교회였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그림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가죽옷이라든지, 아벨의 피의 제물이라든지, 유월절 어린양이라든지 하는 많은 예표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예표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그것들이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 죽임을 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는 이 형제에게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아담이 자신의 아내인 이브를 얻기 위하여 죽음의 잠을 통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남편이신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음을 통과하는 모습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유의하여 볼 것은 이 때 아담이 이브의 죄를 씻기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브가 존재하지도 않을 때에, 이브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죽음의 잠을 통과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사람에게 죄의 문제가 없었다할지라도 이미 영원 전부터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계획하고 계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치료책이 아니라,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계획하고 계셨던 영원한 목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스러운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지혜와 영광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타낼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3장 10절과 1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 그 목적은 그분께서 이제 교회를 사용하사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11 이것은 곧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작정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

또한 21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또한 에베소서 5장에서는 25-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5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 같이 하라.

26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

27 또 그것을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를 위해 제시하려 하심이며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다만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오게 하시려고 목적하신 것이 아니라, 단체적으로, 주님의 몸이요, 주님의 신부인 교회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기를 목적하셨습니다.

이제 이 형제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형제의 목적은 다만 "내가 주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얻으시도록 섬겨야지"하는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지"하는 개인적인 이유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형제는 이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얻으시도록 지체들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해야지"하는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기도하고 책보고 성경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던 이 형제는 이제 교회의 지체들과 어울리고 함께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형제에게 왜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알려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자기 자신의 영적인 성장만을 생각하던 이 형제가, 교회의 전체적인 하나됨과 성장을 고려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섬겨야할 일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러한 섬김의 빈자리들을 알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섬기는 힘의 근원은 그의 타고난 성실함과 책임감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많은 일들을 감당하던 이 형제는 어느 날 이상하게도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주님을 섬기고 나서 은혜로 가득 차야할 그의 마음은 오히려 그와 같이 섬기지 않는 지체들에 대한 못마땅함과 정죄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또 자신과 같이 주님의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지체들을 보면서 판단하고 스스로 교만하여 지고 딱딱하며 차가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지체들이 이 형제를 칭찬하면서 하나님께서 귀한 형제를 우리교회에 주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되찾아 자기에게로 가져오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형제는 자신이 지체들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발견하였고, 또 많은 일들을 잘 처리하고 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사람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얻으시도록 더욱 뜨겁게 지체들을 사랑해야할 판에 교회를 섬긴다고 많은 열심을 부리고 나서 오히려 지체들을 향하여 차갑고 비판적이며 못마땅한 마음이 가득한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더욱더 겸손히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모든 일들을 잘 섬기고 나서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쳐오는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해서 열심을 부리는데 왜 지체들을 더 미워하게 될까요? 하나님,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데 왜 주님을 섬길수록 주님의 영광을 훔치는 자가 될까요?"라고 기도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너가 육신으로 교회를 사랑하려 할 때, 너 자신에게서 우러나온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려 할 때, 오히려 교회를 더욱 미워하게 된다. 너가 육신으로 주의 영광을 위할 때, 너의 타고난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때, 오히려 자신의 영광을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 자신 안에는, 너의 육신 안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이 선한 육신이든, 성경지식이 가득찬 육신이든, 성실한 육신이든, 육신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할 수 없다."라고 못박고 계십니다.

또한 로마서 8장 8절에서는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지혜로운 육신이든지 상관없이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히려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한 면에서는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할 수 없는 육신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또 한 면에서는 우리의 육신이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과 경배를 탈취하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무리 좋고 선할지라도 우리가 이 육신을 십자가로 넘겨서 처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양육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꿀꺽꿀꺽 집어삼키며, 이기적이고 교만한 왕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정리

오늘 우리가 처음 읽은 에베소서 1장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17-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그분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의 지각의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 유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하며

19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오늘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고 처음 위치를 회복한 우리들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달릴 수 있도록 선발되어 경기장에 들어온 선수들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광스러운 교회로서, 모든 지체가 주님의 몸으로서 다 함께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경기하는 한 팀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 받으시고 하늘에서 영광을 얻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장차 하늘에서 영광을 얻도록 달려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광을 받을 장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철저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의 영광을 구한다면 장차 하늘에서 받을 보상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구제할 때에 위선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처럼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마 6:2).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잠깐의 칭송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부단히 노력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성취하게 되면 내가 의도하지 않게 우리는 하나님께 돌려져야할 영광을 탈취하여 나 자신을 드러내고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섬길 때에만이 우리는 모든 일을 섬기고 나서 주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침례자 요한이 고백한 것과 같이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육신이 처리된 사람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음에 넘겨진 사람만이 오직 100% 주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을 다시 보시면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지극히 크고 강력한 권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죽은 자로 여기고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권능으로 활동하시며 자신의 일들을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 가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만이 온전하며 모든 일을 다 섬기고 난 뒤에 내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영원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진 섬김과 수고들을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 보인 적도, 사람의 귀에 들려본 적도, 사람의 생각과 마음속에 상상되어본 적도 없는 너무나 과분하고 황송하며 뛰어난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영광을 계획하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신 모든 은혜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 더 깊이 알아가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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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6.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사랑의 하나님(요일 4:7-11)

본문 : 요한일서 4장 7-11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11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9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은즉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

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서로 사랑하라

우리교회는 지난주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믿음의 여러 방면들 중에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까지도 모두 가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들을 때 너무나 큰 감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나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다는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 들을 때 어떤 사람이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는 표시는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이 마음이 많이 남았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새롭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각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믿음의 전진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또 시간이 생길 때마다 책을 읽는 여러 가지 일들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알기 위한 좋은 시도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저는 특별히 제가 소홀히 하고 있던 "사랑"이라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올바른 지식은 자신을 차갑게 만들고, 사랑이 없는 굳건한 믿음은 다른 사람의 양심을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교회에 왔을 때 우리가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는 분명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17살가량 되었을 때 20여명의 형제자매님들과 복음을 전하러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10인 승 차량 2대를 가지고 다녔는데, 때로는 지방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20여명의 형제자매님들이 같이 다니면서 평소에는 서로 친절하고 상냥하고 천사 같던 지체들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는 깨워도 안 일어나고, 누구는 지저분하고, 누구는 눈치도 없이 많이 먹고, 누구는 텐트 정리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고, 누구는 더운데 차 창문도 못 열게 하고, 누구는 모이는 시간도 안 지킵니다. 누구는 말투가 기분 나쁘고, 누구는 고집이 세고, 누구는 혼자 서두르면서 다른 사람 괜히 재촉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형제자매님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나로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들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또 한 구석에서는 "절대로 저런 모습은 사랑할 수 없다!"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작게 든 크게 든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지체를 만나면 쉽게 교제가 되고 금새 친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형제 사랑을 잘 하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편중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5장 46,47절 말씀입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바로 그 일을 하지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저는 제 안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많은 영화와 노래가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온 세상이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이 세상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손해를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피해를 입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때론 멋지게 포장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포장을 풀어버리고 나면 상처를 받지 않으려 하고 결코 낮아지려 하지 않으며 딱딱하고 차갑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결코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수준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린 아이로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 저를 더욱 이끌어 주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저 사람이 이렇게 바뀌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천사 같이 바뀐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형제자매들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셨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일서 4장 7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7절과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사랑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며,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더 풍성해 지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9-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9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은즉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

10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우리의 사랑의 원천은 바로 복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이해했는지에 따라 우리의 사랑의 깊이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로 죽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른 채 방황하며 헛되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재물의 염려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며 살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귀를 닫아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습니다. 사망과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죄의 용서와 구원이란 값없는 선물이요, 공짜로 주어진 은혜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 구원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선물을 주고자 이 천년을 고민하신 하나님께서 갈보리 백화점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라는 상점 앞에서 자신의 독생자의 피를 지불하고 넘치는 용서와 은혜라는 선물을 마련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었습니까? 조건을 걸지 않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하신 사랑이었습니다.

 

다같이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처럼"이란 표현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이처럼"이란 단어를 볼 때, 우리 각자가 느끼는 사랑의 깊이가 각자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만큼 다른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에 아직 요구가 많고, 조건이 많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실한 형제는 게으른 형제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꼼꼼한 형제는 덜렁대는 형제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이 임하여 내가 얼마나 게으른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덜렁대는 사람인지 알려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전히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하나님,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섬세한 사랑으로 이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게으르고 덜렁대는 형제를 조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형제들을 "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꾸려할 때는 참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형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조건 없이 참되게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형제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많은 우리들을 변화시킨 것이 나의 결단과 굳은 의지와 피나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었던 것처럼, 다른 지체들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 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우리의 기도

오늘 우리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우리 안에 흘러넘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문제가 많은 우리를 조건 없이 한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옆의 지체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에 푹 잠기게 하시고 나의 요구와 조건이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지체들을 대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빛을 주셔서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이처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더 알려주셔서 우리의 사랑이 더 온전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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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노아가 만난 하나님(창 6:9)

본문 : 창세기 6장 9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9절 한 구절입니다.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노아

여러분은 성경에서 가장 의로운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특별히 구약성경 가운데서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23:35, 눅 11:51).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예수님의 놀라운 예표가 된 요셉,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탄생시킨 모세, 불의 선지자 엘리야. 우리는 많은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이렇게 세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에스겔 14장 13,14절 말씀인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3 사람의 아들아, 그 땅이 심히 범법하여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내 손을 그 위에 내밀고 그곳의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며 기근을 그 위에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그곳에서 끊으리라.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다른 사람은 구할 수 없고, 오직 자기 혼만 건질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대명사로서 노아를 가장 먼저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창세기 6장 9절에서도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히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아가 살던 그 당시에 타락하고 범죄한 모든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의인이라는 것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 노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저는 세 가지로 요점을 잡아보았는데, 첫째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둘째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셋째는 언약의 하나님,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노아가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살펴봄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럼 첫 번째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에녹의 이야기로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의 세대들이라고 해서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고 죽었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에녹이 등장하면서는 조금 더 부연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1-24절 말씀을 보시면

21 ¶ 에녹은 육십오 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23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있지 아니하더라.

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65년을 잘 살다가 갑자기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부터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갑자기 땅에서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말 그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휴거되었는데,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시점에서 에녹에게 이 땅에 임할 심판에 대하여 계시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서 14,15절에서는 이렇게 에녹이 선포했던 말씀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4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은 에녹도 이들에 관해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또한 에녹이 낳은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가 죽으면 오리라"라는 뜻으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표적으로 세워 그의 죽음과 함께 이 땅에 심판이 임할 것을 대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년도를 한번 계산해 본다면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는지 숫자 계산을 해봤는데요, 잠시 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 보시면 에녹이 65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187년을 살면서 라멕을 낳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잘 보십시오. 26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래서 라멕을 낳기 전까지 187년 더하기 782년을 하니 총 969년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맞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손가락을 찍어놓을 년도는 바로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다는 점입니다.

자, 그리고 28절과 29절을 보시면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이 182년을 살고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한 장 넘겨서 창세기 7장 11절에 보시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태어나서 182년을 살고 노아가 600년을 살았으니 그 수를 더하면 782년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뒤에 산 년도도 782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보여주셨던 그대로 정확히 므두셀라의 죽음까지 그 세대의 사람들을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두셀라가 태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 에녹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계속된 경고의 말씀을 주셨고, 또 므두셀라의 마지막 120년 동안은 의의 선포자인 노아를 통하여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969년인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최고로 장수한 사람의 연수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다고 해서 즉시로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대언자 요나가 못마땅하고 분노하며 말했던 것처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욘 4:2). 만약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범죄한 즉시로 벌을 주시는 분이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처음으로 일생을 헌신할 때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격하여 헌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친구 되고 죄악을 물마시듯 행하고 하나님 없이 계속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를 지금까지 참아주시고 오히려 선하게 은혜로 대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묵상할 때면 주님께 헌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런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답하고 고집 센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분에 넘치는 은혜와 긍휼로 나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로 대하신 만큼, 내가 그것을 발견한 만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저 지체를 사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나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이 나를 향하여 얼마나 큰사랑으로 오래 참으셨는지를 알려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오래 참으신 것에 감격한 만큼 그 은혜가 부어진 만큼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긍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말씀 한 마디로 방주를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만 하늘을 열고 직접 벼락같은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여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모양과 길이와 재료와 창문의 위치를 세세하게 가르쳐주시고 120년 동안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성경의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노아는 말 그대로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이기적이고 사나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꾀를 부려서 남을 속여 빼앗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한 사람 노아가 온 가족과 함께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지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우뚝 솟은 언덕에서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묻습니다.

"이게 뭡니까?", "방주입니다.", "방주요? 그럼 배 말입니까?", "네, 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아니 무슨 배를 언덕 위에 짓습니까? 이걸 여기서 다 만들고 강까지 옮길 작정이세요?"

"아니요,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판의 홍수를 일으키실 겁니다. 그럼 자동으로 배가 뜨겠지요?"

"이 사람 정신나갔구먼, 이거 짓는 모양을 보니 하루 이틀 걸릴 일도 아닌거 같은데 온 가족이 고생이구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실 겁니다. 선생님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세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방주에 들어오고 싶거든 말씀만 하세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이고 됐네요 이 사람아, 정신차려."

시간이 흘러갑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수십 년이 흐르도록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를 짓는다는 소식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다가도 구경꾼들이 좀 모였다 싶으면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온 땅을 뒤덮을 물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입니다! 온 땅이 물로 뒤덮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방주로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배 값은 받지 않습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오세요!"

그러면 방주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깔깔대며 노아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이렇게 120년 간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노아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격려와 위로 없이 이 일을 감당했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찾기 원하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웃고 깔깔대며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해나가기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가 과연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만 맡겨진 일들을 사무적으로 처리하고 있는지를 잘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짐이요, 고생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만약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어떠한 일을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상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격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동행하며 함께 일하기 원하고 계십니다.

** 언약의 하나님

첫 번째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우리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의미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 다시 한 번 노아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7장 5-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행하였더라.

6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임할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7 ¶ 노아가 홍수의 물들로 인하여 자기 아들들과 자기 아내와 자기와 함께한 자기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정결하지 않은 짐승과 날짐승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 중에서

9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이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10 이레가 지나서 땅 위에 홍수의 물들이 임하니라.

이제 방주는 완성되었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날짐승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의 기는 모든 것들의 그것들의 종류대로 종류마다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왔고, 노아는 그들을 방주 안에서 배치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각각 스스로 두 마리씩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웅장하고 멋진 장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방금 읽은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이 들어간 이후에 일주일을 더 기다려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이 얼마나 완고하고 어리석은지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이 닫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후두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폭포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전에 한국에서 일주일 동안 소나기가 내린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낮은 지역의 마을들은 삼일 만에 다 잠겨버렸다고 합니다. 더더욱 노아의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집들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으로 산으로 오르고 어떤 이들은 방주로 달려옵니다.

"쾅쾅쾅", "이봐요! 방주 문 좀 열어주세요!! 가진 재산을 다 줄 테니 제발 문 한번만 열어주세요."

방주의 사방에서 사람들이 두드려댑니다. "제발 우리 아이만이라도 들여 보내주세요!"

사람들은 절규와 통곡으로 부르짖지만 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끝나고 심판의 날이 그들에게 닥친 것입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며 또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 29:1)는 잠언 말씀과 같이 그들은 120년간의 책망에 목을 굳게 하고 갑작스런 멸망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천둥과 번개와 쏟아지는 폭우 가운데 방주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합니다. 물이 차올라서 방주를 물 위로 들어 올린 것입니다. 40일 밤낮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뒤에도 계속해서 방주는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이제 창세기 8장 13-16절을 보시면

13 ¶ 제육백일년 첫째 달 곧 그 달 첫째 날에 물들이 땅에서 마르매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치우고 보니, 보라, 지면이 말랐더라.

14 둘째 달 곧 그 달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 ¶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아가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시작된 날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째 해 둘째 달 십 칠일이었으니, 노아는 약 1년간을 방주 안에서 지냈습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헌물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이렇게 보존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홍수에서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여러 가지 언약을 주시는데 오늘 저는 그 중에서 창세기 9장 1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내가 모든 육체를 홍수의 물들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앞으로 다시는 온 땅을 덮을 홍수의 심판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서 가장 신실하시며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믿을 만한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노아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의 심판을 온 몸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하나님 정말 심판하시는 거 아니죠?" 하면서 믿음이 연약함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믿음 없음을 동정하시며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표를 주십니다.

창세기 9장 12-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2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 대대로 영구히 맺는 언약의 증표가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노니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표가 되리라.

14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모든 육체의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들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고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약속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므로 말씀만 하시면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를 증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정말요?"하면서 좋아하더니 이제 매일 밤 아빠에게 그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 정말 저 자전거 사주실거죠? 정말이죠?" 아빠는 이미 말을 했고 정말 사줄 마음이 있지만 아들은 믿음이 연약합니다. 아빠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미소를 지으면서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 아들은 더욱 좋아합니다. 이제 아들은 매일매일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는 어느 날 자전거 대리점에서 자전거 사진이 들어가 있는 광고지를 얻어다가 아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빠가 이거 사줄거야." 이제 아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합니다. 더 이상 아빠에게 "정말이죠?"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을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사진을 보면서 정말 자전거를 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제야 아빠가 정말 자전거를 사줄 것이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사주겠다고 말을 했으므로 더 이상 뭔가를 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아빠를 믿는 믿음이 연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주려고 새끼손가락을 걸어주기도 하고 직접 자전거의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이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의 믿음이 없음을 도와주십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모두 언약으로 가득 찬 책이며,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의 피를 언약의 피로써, 언약의 증표로써 제시하셨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녀들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또 믿고 있지만 믿지 않는 것같이 살아갈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함을 도와주시고자 주님이 오시는 때에 표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 노아의 날

주님께서는 특별히 주님이 다시 오시는 표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4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나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

41 두 여자가 방앗간에서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42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시각에 너희 주가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43 그러나 이것을 알라.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경점에 올 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자기 집이 뚫리지 않게 하였으리라.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

우리들은 어쩌면 노아의 날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너무나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긴 언제 온다고?"하면서 지내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직접 말로는 "주님이 오긴 언제 오셔?"라고 말하진 않지만 때로 우리의 깨어있지 못한 삶은 그러한 말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주님께서 오래 참으셨듯이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을 때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일하는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오래 참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추수의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흐려지고 약해질 때에, 우리를 내치거나 무섭게 다루지 않으시고 너무나 은혜롭게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과 시대의 표적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노아가 만났던 하나님, 오래 참으시며, 나와 동행하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약속하시고 믿음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우리들도, 노아의 날들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친밀히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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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요셉이 만난 하나님(창 50:15-21)

본문 : 창세기 50장 15-21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입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5 ¶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선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두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오늘 저는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날 "불평 없이 사는게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 설교의 또 다른 제목을 잡아보자면, "불평 없이 살아간 요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37장부터 펼쳐지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예수님의 예표인 요셉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수님의 예표를 하나만 뽑으라면 무엇을 뽑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히 구약성경의 기록들이 예수님 자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구약성경들을 보기 전에 창세기만 살펴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주 많은 예수님의 예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여기에 나타난 빛이 예수님의 예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고후 4:6).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 4:4).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값없이 주어진 생명나무, 아담과 이브를 대신해 피 흘려 죽은 어린양, 그리고 사람의 의를 예표하는 무화과 나뭇잎 대신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옷 등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 특별히 사람들의 인생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 중 이 요셉이라는 인물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으며, 목자였고,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에게 보냄을 받았으나 형제들에게 거절당하여 팔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유다였고, 예수님을 판 제자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같이 옷 벗김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보디발의 집에서 모든 것을 맡은 종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거짓 고소를 당하신 것과 같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요셉은 털 깎는 자들 앞의 어린양처럼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두 강도와 못 박힌 것처럼, 요셉은 두 명의 죄인과 함께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옆의 강도들 중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듯이 요셉과 함께 갇힌 한 죄수는 용서를 받고 한 죄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왕이 되실 것처럼 요셉은 파라오의 부름을 입어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것같이, 파라오는 요셉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으로 예표되는 교회를 신부로 삼으신 것같이 요셉은 이방인 아내를 얻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땅에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곡식과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제 요셉이 두 번째 형제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받아들여졌고, 기근과 궁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예수님의 앞길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펼쳐진 것을 볼 때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히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 요셉의 어린 시절

요셉은 위로 10명의 배다른 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막내인 베냐민만이 친형제 가운데 친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원래부터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이었기 때문에, 또한 라헬이 너무나 간절히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야곱이 노년에 얻은 손자와 같은 아주 귀여운 아들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큰사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요셉에게 더 많은 사랑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특별히 채색 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었습니다. 당시 염색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옷감에 색을 하려하게 집어넣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37장 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화목하게 말도 하지 못하였더라"(창 37:4).

가뜩이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요셉이 너무나 건방진 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이라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먼 훗날 요셉이 어떻게 높아지리라는 것을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5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더라.

6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이 꿈을 들으소서.

7 보소서, 우리가 들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보소서, 내 단은 일어나 똑바로 서고, 보소서, 형들의 단은 둘러서서 내 단에게 경의를 표하였나이다, 하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를 통치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지배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라.

9 ¶ 그가 또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가 또 꿈을 꾼즉, 보소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경의를 표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을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고하매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이 꿈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하니라.

11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하였더라.

 

이러한 꿈, 이러한 비전,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앞으로 요셉이 당할 고난과 역경을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요셉에게 이러한 통치자의 위치를 주시고자 반드시 필요한 고난과 시련을 먼저 주셔서 요셉이 그 위치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다루시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꿈을 주셨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매"(계 11:15).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 5:10).

 

 

** 노예로 팔려간 요셉

이러한 꿈과 비전, 소망과 목적이 요셉에게 주어진 이후로 요셉의 인생은 이러한 영광을 위한 훈련 코스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형들이 양을 잘 돌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기다리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런즉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 어떤 구덩이에 던지고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리라."

 

그러자 장남이었던 르우벤이 그래도 우리의 형제이니 직접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를 파서 던져놓고 굶겨 죽이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르우벤이 나중에 꺼내서 구해줄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르우벤의 계획을 모르는 유다가 요셉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숨긴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오라,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살붙이니라." 이렇게 되어 요셉은 팔리고 팔려서 이집트의 노예가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호위대장이었던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요셉을 발견하지 못한 르우벤과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직접 한번 요셉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요셉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억울함, 분노, 슬픔, 낙담, 자포자기, 불평과 같은 아주 복합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요셉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집에서 귀하게 사랑 받던 아들이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예로 팔려서 부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터뜨린다면 아주 정당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어릴 때 어머니를 데려가시더니 이젠 아버지와 가족들을 다 빼앗아 가시다니요! 하나님 도대체 제가 잘못한 게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들에게 말했더니 미움만 받고 이젠 낯선 땅에 팔려 와서 이렇게 모욕을 당하며 고생하다니요! 차라리 죽는게 낫겠습니다!"하며 따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요셉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셉은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통제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영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9장 2-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더라.

3 그의 주인이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고 또 주께서 그가 행한 모든 일을 그의 손에서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어 그를 섬기매 그가 그를 자기 집을 감독하는 자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의 손에 맡기니

5 그가 그를 자기 집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감독하는 자로 삼은 뒤부터 주께서 요셉으로 인하여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므로 주의 복이 그의 집과 들에 있던 그의 모든 소유에 임하니라.

6 그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자기가 먹는 빵 외에는 자기 소유 중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며 잘생겼더라.

요셉은 종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3절에서는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말씀을 몰랐겠지만 요셉은 이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일한 것이 아니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과 동행하여 주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마다 넘치게 복을 주셨습니다. 어리고 가장 낮은 위치의 종에 불과했던 요셉은 어느덧 자기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 동안의 고통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 코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의 휴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을 한 단계 더 높이 이끌고자 하십니다.

 

 

** 감옥에 갇힌 요셉

17세에 노예로 팔려와 현재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아버지 야곱보다는 아름다웠던 어머니 라헬을 더 닮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매우 잘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 청년 요셉에게 너무나 달콤한 죄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다같이 7-9절을 보시겠습니다.

7 ¶ 이 일들 뒤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말하기를, 나와 함께 눕자, 하였으나

8 그가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 손에 맡겼은즉

9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자가 없으며 주인이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니라.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고 결코 자신의 죄에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하는 말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죄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11-20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이럴 즈음에 요셉이 자기 일을 보러 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안에 그 집 사람들이 하나도 없더라.

12 그녀가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함께 눕자, 하니 그가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가매

13 그가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아감을 그녀가 보고

14 자기 집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함께 누우려고 내게로 들어오기에 내가 큰 소리로 외쳤더니

15 내가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을 그가 듣고는 자기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며

16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옷을 자기 곁에 두니라.

17 그녀가 이 말들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오기에

18 내가 소리를 높여 외쳤더니 그가 자기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하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런 식으로 행하였다, 하므로 그 말들을 들을 때에 진노하니라.

20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감옥에 넣었는데 이곳은 왕의 죄수들이 묶인 곳이더라. 그가 거기서 감옥에 있었더라.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범죄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한번 요셉은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합당하고 적절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차라리 내가 범죄하였더라면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어찌 하나님을 따르고도 이렇게 비참해 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인도하고 계시긴 합니까? 하나님 저와 동행하고 계시는거 맞습니까?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악하게 대하십니까?" 요셉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맡아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죄수가 요셉과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명은 파라오의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요, 또 한 명은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잔 맡은 사람은 포도나무 가지 세 개가 있고 포도송이가 열리기에 거기서 포도들을 따고 포도를 짜서 파라오의 손에 잔을 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빵 맡은 사람은 온갖 구운 음식을 담은 빵 바구니 세 개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새들이 와서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꿈을 해석하여 주었는데, 요셉의 해석대로, 파라오의 잔을 맡은 사람은 삼일 뒤에 직책이 회복되었고, 빵을 굽는 자는 삼일 뒤에 그를 나무 위에 매달아 공중의 새들이 먹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잔 맡은 자에게 직책이 회복될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잔 맡은 자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 요셉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슬프게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정말 억울하게 나의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렸지요. 내가 얼마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형들은 날 구덩이에 던지더니 옷을 다 벗기고는 지나가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어요. 원수도 아닌 형들에게 팔린 그 기분을 아시나요? 그 배신감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또 노예가 되고 나서는 정말 모든 일을 남이 보던 안 보던 성실하게 일했어요. 노예가 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내가 노예가 된 게 너무나 억울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요. 그래서 결국엔 최고 관리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 못된 여자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지 뭡니까...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셨나 봐요."

 

요셉은 충분히 불평으로 가득한 사람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망을 가지고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었습니다. 잘생기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데 갑자기 야위고 흉한 일곱 마리 암소가 나타나서 살진 암소들을 다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꿈이었습니다. 파라오는 놀라서 잠이 깼다가 다시 잠이 듭니다. 한 나무줄기가 있는데 통통하고 좋은 이삭 일곱 개가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늘고 동풍에 바싹 말라버린 다른 이삭 일곱 개가 솟아 나오더니 통통하고 꽉 찬 이삭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파라오가 두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고 나서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와 점술가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때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가 요셉을 기억하고 파라오에게 요셉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41장 25-4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5 ¶ 요셉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파라오의 꿈은 하나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고자 하는 일을 파라오에게 보이셨나이다.

26 좋은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요, 또 좋은 이삭 일곱 개도 일곱 해니 이 꿈은 하나이니이다.

27 그것들을 따라 올라온 야위고 못생긴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요, 또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이삭 일곱 개도 기근이 드는 일곱 해니

28 내가 파라오에게 아뢰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고자 하는 일을 파라오에게 보이셨나이다, 함이 바로 이것이니이다.

29 보소서, 이집트 온 땅에 두루 일곱 해 큰 풍년이 들겠고

30 그 뒤에 일곱 해 기근이 들므로 이집트 땅에서 그 모든 풍성함을 잊게 되고 그 기근이 이 땅을 소멸시킬 것이며

31 또 뒤따르는 그 기근이 매우 심하므로 그것으로 인해 이 땅에서 그 풍성함을 알지 못하게 되리이다.

32 파라오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굳게 정하셨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서 곧 그 일을 행하실 터이니

33 그러므로 이제 파라오께서는 사려 깊고 지혜로운 사람을 골라 그가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소서.

34 파라오께서는 또 이 일을 행하시되 곧 이 땅에 직무 수행자들을 두시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이집트 땅의 오분의 일을 취하시고

35 그들이 다가올 그 좋은 해 동안에 모든 식량을 거두고 그 곡식을 파라오의 손 밑에 쌓아 두어 도시들 안에 식량을 간직하게 하소서.

36 그 식량을 이 땅을 위해 저장하여 이집트 땅에 임할 일곱 해 기근을 대비하시면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라.

37 ¶ 그 일이 파라오의 눈과 그의 모든 신하들의 눈에 좋게 보이므로

38 파라오가 자기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같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을 우리가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여 주셨으니 너와 같이 사려 깊고 지혜로운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릴지니라. 내 온 백성이 네 말에 따라 치리를 받으리니 나는 왕좌에서만 너보다 높으리라, 하니라.

41 파라오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자, 내가 너를 세워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리게 하노라, 하며

42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주고 그에게 고운 아마 옷을 입히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43 자기가 소유한 둘째 병거에 그를 타게 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무릎을 꿇고 절하라, 하더라. 파라오가 요셉을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았더라.

44 파라오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파라오니라. 이집트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손발을 들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또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며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아내로 주니라. 요셉이 나가서 이집트 온 땅을 돌아보니라.

이집트 이름 사브낫바네아의 의미는 바로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 대단한 출세요 인생역전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꿈으로 약속하신 요셉의 본 위치였고, 그 전에 있었던 많은 고난과 역경은 다만 이 위치에서 올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 코스였을 뿐인 것입니다.

 

 

** 가족들을 만난 요셉

이제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요셉에게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와 주변의 온 땅에 7년 간 큰 풍년을 주셨고 또 그 이후 7년간의 큰 기근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집트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땅의 다른 많은 민족들조차 곡식이 없으므로 곡식을 많이 저장해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오게 됩니다. 저기 멀리 있었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 역시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오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과 형제들이 만나는 이야기는 자세히 한다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집에 가시면 꼭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이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임을 밝히고 아버지의 온 가족을 이집트로 불러들입니다.

 

다 같이 창세기 45장을 보시겠습니다. 1-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때에 요셉이 자기 옆에 서 있던 모든 자들 앞에서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를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게 하니라.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릴 때에 그와 함께 서 있던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2 그가 크게 우니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의 집이 듣더라.

3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 하니 그의 형제들이 그 앞에서 불안하여 능히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매

4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하니 그들이 가까이 가매 그가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동생 요셉이니 곧 당신들이 이집트에 판 자니이다.

5 그런즉 이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당신들 스스로에게 노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또 이 땅에 이 년 동안 기근이 있었으나 아직 오 년이 남아 있어 그때에 밭을 갈지도 못하고 수확하지도 못하리이다.

7 하나님께서 큰 구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을 위해 후손을 땅에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이제 나를 여기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분께서 나를 파라오에게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그의 온 집의 주(主)가 되게 하셨으며 또 이집트 온 땅의 치리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그분께 아뢰되,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이같이 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온 이집트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하지 말고 내게로 내려오소서.

10 아버지는 고센 땅에 거하실 것이며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식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 떼와 소 떼와 모든 소유는 나와 가까이 있으리이다.

11 아직도 오 년 동안 기근이 있으리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궁핍을 당할까 염려하나이다, 하소서.

하나님을 뜻을 완전히 이해한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넘긴 형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지도 않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요셉은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의 눈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았고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사한 요셉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본문인 50장 15절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제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온 지 17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인하여 요셉이 돌변할 것이라 걱정하고 있습니다.

 

15-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5 ¶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선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두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를 괴롭게 만들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자포자기하며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요셉과 같이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우리를 모두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만드셨고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역경은 우리를 낮추신 만큼, 아니 낮추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자 허락하시는 영광의 훈련 코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요셉과 같이 불평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이 늘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넘치는 감사 속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주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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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삼손이 만난 하나님(삿 13:5)

본문 : 사사기 13장 5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사기 13장입니다. 사사기 13장 5절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기 시작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저는 “삼손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삼손은

우리는 이번 주 주일설교 시간에 "자기 눈에 옳게 보이는 길로 가지 말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들었고, 특별히 사사기의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아갔던 시대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사사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암울한 책 중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전체적으로 타락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또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하고 바로잡으라고 재판관으로서 세우신 믿음의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함부로 걸어간 기록들을 보게됩니다. 이 재판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사람을 뽑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삼손"을 뽑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삼손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아니 성경 전체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그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입니다. 많은 재판관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시점부터 기록되고 있는 반면, 삼손은 어떻게 그의 부모님이 그를 낳게 되었는지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재판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되지 않고 다만 몇 년 동안을 재판하였는지만 기록되고 있는 반면, 삼손은 어떻게 죽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손은 총 21장으로 구성된 사사기 가운데 무려 4장을 차지할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재판관들은 다만 한 두 구절의 언급밖에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 삼손이라는 인물을 조명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삼손을 통하여 참으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자기 스스로의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간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은 "삼손이 만난 하나님"인데, 만약 누군가가 삼손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삼손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긴 있나요?" 매우 애매한 것 같지만, 성경의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삼손을 분명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삼손이 자신이 살았을 때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수보다 그가 죽으면서 죽인 원수들의 수가 더 많다는 기록을 읽을 때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정복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이처럼 삼손은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삼손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삼손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만큼 하나님을 더 참되게 따르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 삼손의 탄생

먼저 삼손의 탄생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삼손의 탄생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 앞에서 범죄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십 년 동안 압제를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 마노아를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셨고 우리가 읽은 사사기 13장 5절의 말씀과 같이 그 아이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기 시작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모태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삼손으로 보자면 모태신앙 중의 모태신앙 아니겠습니까? 삼손은 단순히 모태에서 신앙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사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삼손의 탄생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예비하심 가운데 이루어졌듯이 우리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우연히 저절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과 계획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삼손의 탄생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난 것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속한 나사르 사람이 된 것같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께 속한 나사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를 향해 놀라운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실 때에는 선한 행위를 위하여, 곧 홀로 선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하도록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입니다.

삼손의 아버지였던 마노아라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처음에 주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만 나타나서 삼손이 태어날 것과 그가 나사르 사람으로서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을 때, 마노아는 하나님께서 그 천사가 다시 한번 더 나타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확실히 듣기 원하는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주의 천사가 하나님인지 모른채 잘못된 대상에게 경배하려 하였지만 이 시대의 영적 수준이 낮은 것을 감안해서 본다면 이 마노아라는 사람은 너무나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마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잘 주의하여 삼손을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 나사르 사람

이제 잠시 나사르 사람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마 "나실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나사르 사람에 대한 명령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민수기 6장을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6장 1절에서 8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자기를 구별하여 나사르 사람의 서원을 하고 자기를 구별하여 주께 드리거든

3 그는 포도즙과 독주로부터 자기를 구별하고 포도즙의 식초나 독주의 식초를 마시지 말며 어떤 포도즙도 마시지 말고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라.

4 그는 자기를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씨에서부터 껍질에 이르기까지 먹지 말며

5 자기를 구별하기 위하여 서원하는 모든 날 동안 자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라.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날들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할 것이요, 자기 머리털을 자라게 할 것이며

6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에는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 것이요,

7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들로 인하여 자기를 부정한 자로 만들지 말지니 이는 그의 하나님의 거룩히 구분하심이 그의 머리 위에 있기 때문이라.

8 자기를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주께 거룩한 자니라.

이 여덟 구절에서 나타난 나사르 사람의 특징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사르 사람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은 씨에서부터 껍질에 이르기까지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머리털을 자르지 말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어떤 시체에도, 심지어 자기 가족들의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포도, 두 번째 머리털, 세 번째 시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또 특징을 찾는다면 이 나사르 사람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한번 구분했다고 해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5절에 나온 것처럼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날들의 기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8장에 나타난 나사르 사람에 관한 율법과 삼손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민수기에 나타난 나사르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나사르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하고 그 기간을 정했던 반면, 삼손은 날 때부터, 아니 이미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나사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다른 나사르 사람들은 큰 결심을 하고 자신을 구별했다면, 삼손을 날 때부터 구별된 원조 나사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이러한 삼손의 인생이 너무나 불행하고 불쌍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다 계획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선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삼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삼손에게 가장 좋고 선하며 삼손이 가장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 블레셋을 칠 기회

이제 사사기 14장에서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할 때가 된 삼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삼손이 딤낫에 내려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고

2 올라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고하여 이르되, 내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았사온즉 이제 나를 위하여 그녀를 데려와 아내로 주소서, 하니

3 그때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을 딸들 중에나 혹은 내 온 백성 중에 여자가 없어서 네가 가서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아내를 취하여 하느냐? 하매 삼손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그 여자가 나를 매우 기쁘게 하니 나를 위하여 그녀를 데려오소서, 하였더라.

4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알지 못하였고 또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칠 기회를 찾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더라.

주님을 위하여 구별되어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할 원조 나사르인, 모태 나사르인인 삼손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4절은 매우 주목할 만한데, 어찌보면 오해하기가 매우 쉬운 성경구절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삼손의 이러한 행동이 주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억지로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도록 시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고 또한 삼손을 통하여 그렇게 하기로 예비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삼손이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삼손의 마음에는 하나님도 안중에 없고,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도 안중에 없고, 원수 블레셋에 대항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러한 삼손을 이용하여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 29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일으켜 블레셋을 치기로 계획하셨으나, 삼손은 자기를 위하여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주관하셔서 삼손이 블레셋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의지와 원함을 하나님께 드려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의 의지와 원함을 고집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나를 그분의 예비하신 길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협조적인 삼손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삼손 자신에게는 어떠한 기쁨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포도원으로 간 삼손

이제 14장 5절,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5 그때에 삼손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딤낫에 내려가 딤낫의 포도원에 이른즉, 보라, 젋은 사자가 그를 향하여 소리 지르더니

6 주의 영께서 그에게 강하게 임하시매 그가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염소 새끼를 찢는 것처럼 그 사자를 찢었으나 자기가 행한 일을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삼손은 드디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설득했다기 보다는 억지를 부려서 부모님을 이겼을 것입니다. 삼손은 부모님을 모시고 자기가 마음에 드는 그 여인이 있는 딤낫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혼자서 딤낫의 포도원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나사르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일 세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포도나무에서 난 어떤 것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사사기에서는 삼손이 왜 딤낫의 포도원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젊은 사자가 나타난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아직 어렸을 때에는 독실한 부모님의 주관 하에 포도를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부모님을 이기고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된 이 삼손은 어쩌면 이제는 또한 자기를 위하여 포도를 먹기 위해 포도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경고로서 젊은 사자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신 것은 삼손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삼손이 잘못 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삼손이 나사르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구별된 자임을 기억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이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포도열매를 먹으려고 시도한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삼손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새끼 염소를 찢듯이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 삼손이 얼마나 멋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근육과 상관없이 주의 영으로 그에게 임하셔서 큰 힘을 발휘하게 해주셨습니다. 삼손은 이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위하여 구별된 원조 나사르 사람 삼손은 여전히 나를 위하여 자기에게 옳게 보이는 길, 자기 스스로 행복하게 보이는 길로 열심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 시체와 꿀

이제 8절과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 얼마 뒤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되돌아 가다가 돌이켜서 그 사자의 사체를 본즉, 보라, 사자의 사체에 벌떼와 꿀이 있으므로

9 그가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가면서 먹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주어 그들이 먹게 하였으나 자기가 그 꿀을 사자의 사체에서 취하였다고 그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나사르 사람의 금지사항 또 한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죽은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자매의 시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까이 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별되어 있으라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에게 경고로 주어졌던 그 사자를 보면서도, 오히려 담대하게 사자의 시체로 다가가서 꿀을 가지고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몰래 먹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님에게도 줄만큼 이 삼손은 아주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는 제멋대로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포도원에 갔던 일이나, 사자의 시체를 만진 일에 대해서 오히려 수수께끼로 장난을 칠 만큼 삼손은 아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삼손은 신혼부부가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풍습에 따라서 친구들 서른 명을 불러서 일주일 간 잔치를 벌였습니다. 삼손은 그의 친구들에게 얇은 옷과 겉옷 서른 벌씩을 내기로 걸고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14절에 보시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함부로 행한 일들에 대해서 농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친구들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삼손 앞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기쁘게 잔치를 해야할 때 계속해서 울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너무나 괴로웠던 삼손은 아내에게 답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친구들은 수수께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18절에 "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그 도시의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하므로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을 갈지 아니하였다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화가 난 삼손은 다른 동네로 가서 서른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그 옷을 빼앗아다가 친구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을 치는 삼손에게 임하여 힘을 더해주셨고,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불통인 삼손을 어떻게든 인도하셔서 원래 계획하셨던 대로 이끌고 계시지만 삼손의 관점은 여전히 자기를 위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도 했지만 결코 삼손 자신에게는 아무런 행복도 유익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잔치에서 삼손은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자신이 범죄한 것을 가지고 수수께끼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아내는 잔치하는 내내 그의 앞에서 울었고, 삼손은 괴로웠습니다. 친구들이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하는 것을 즐거워할 작정이었던 삼손의 기대는 깨어지고 말았고 화가 난 삼손은 원래 살던 자기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자기 딸을 버렸다고 생각한 삼손의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지만, 삼손은 여전히 스스로 옳게 보이는 길, 스스로 좋게 보이는 길로 고집스럽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 라맛레히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서 삼손은 다시 아내를 만나려고 딤낫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고, 장인은 아내의 동생과 결혼하라고 말하며 삼손을 달래었습니다. 삼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삼손은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을 다 태워버렸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그 원인을 제공한 장인어른과 삼손의 아내를 불태워 죽이게 됩니다. 삼손은 또 그 일로 인해서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잡히는 대로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유다로 내려가게 됩니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하여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 나사르 사람 삼손을 한번 보십시오. 그의 인생을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너무나 비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로 내려간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를 모아 올라왔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밧줄로 묶은 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이때 주의 영이 임하시고 삼손은 자신을 결박한 밧줄을 불탄 실과 같이 툭툭 끊어냅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그 자리에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삼손을 통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셨던 대로 삼손을 통하여 자신의 일들을 이루어가고 계시지만, 삼손은 너무나 비참한 가운데 자신의 분노를 내뿜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께 선택된 이 삼손, 너무나 행복할 수 있었던 그의 인생은 그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가엾게 망쳐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삼손은 목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삼손의 입에서 주님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같이 15장 18절과 19절을 보시겠습니다.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주를 부르며 이르되, 주께서 주의 종의 손에 이 큰 구출을 주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손에 떨어져야 하리이까? 하니라.

19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턱의 우묵한 곳을 쪼개시니 거기서 물이 나오므로 삼손이 그 물을 마시매 그의 정신이 돌아와 그가 회복되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엔학고레라 하였으니 그것이 이 날까지 레히에 있더라.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손은 너무나 못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거 맘대로 다하더니 이제 와서 자기가 죽게 생겼으니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 내가 너 진짜 멋있게 사용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죽어라."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삼손에게 물을 주셨고 삼손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인내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주님 더 많이 알아가기 원합니다.

** 삼손의 죽음

이제 정신을 좀 차릴 줄 알았던 삼손은 아직도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6장 4절에 보시면 "그 뒤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이름의 여인을 사랑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해야할 나사르 사람이 계속해서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첫 번째로 사랑해야할 삼손은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영주들은 이 들릴라를 매수하여서 어떻게 하면 삼손의 큰 힘을 제거하고 그를 죽일 수 있을지 알아내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6절에 보시면 들릴라가 이렇게 묻습니다. "원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내게 고하고 또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하여 괴롭게 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라." 아예 대놓고 삼손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 삼손의 마음은 너무나 어둡고 어리석기만 합니다. 자신을 도살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도 너무나 즐겁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어리석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는 사인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어리석게 자기 뜻을 고집하며 걸어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삼손은 거짓말로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말린 적이 없는 푸른 버드나무 가지 일곱 개로 나를 결박하면 된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줄로 나를 단단히 결박하면 된다.", "짜서 만든 천으로 내 머리털 일곱 타래를 엮으면 된다." 삼손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잘못된 것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삼손의 눈은 완전히 가려졌으며 계속해서 어리석은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어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같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자기의 말들로 그를 짓누르매 삼손의 혼이 괴롭게 되어 죽을 지경이 되었더라.

17 이에 삼손이 자기의 온 마음을 털어놓고 그녀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었노라. 만일 내 머리를 밀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내가 약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같게 되리라, 하매

삼손의 힘은 삼손이 말한 것처럼 머리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삼손과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로 하나님께서 삼손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삼손은 자기의 온 마음을 이방 여인에게 주어버렸고, 스스로 나사르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삼손은 머리털을 잃었고, 주님의 임재를 잃었고, 눈을 잃었고 원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21절에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그를 가자로 데리고 내려가 놋 족쇄로 결박하니 그가 감옥 집에서 맷돌을 돌리니라."

참으로 영광스럽고 행복할 수 있었던 삼손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 비참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기를 배신하였고 이제 삼손은 그야말로 모두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삼손은 이때서야 참으로 하나님께 돌이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었노라. 그러나 나는 참되게 나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쳐본 적이 없었노라. 하나님은 나에게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하셨으나 나는 블레셋 여인들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도다."

그러나 자신의 선물들과 부르심에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삼손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참을 만큼 참았다. 너도 인정하지? 넌 정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쓰레기같은 존재야!" 우리가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나사르 사람이 해야하는 세 가지를 전부 어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격이 없는 우리들도 여전히 사랑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시고 항상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삼손을 붙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큰 축제 열었습니다. 자신들의 신 다곤이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드디어 넘겨주셨다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손을 그들 가운데 끌고 나와 모두의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2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그들이 이르되, 삼손을 불러 우리를 위해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감옥 집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기둥들 사이에 삼손을 세우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내가 이 집을 지탱하는 기둥들을 더듬어 찾아서 그것들에게 기대도록 허락하라, 하니라.

27 이제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며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영주들도 거기 있고 지붕에도 삼천 명가량의 남녀가 있더니 그들이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그 집을 지탱하며 받쳐 주는 두 개의 중간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고

30 이르되,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 하며 힘을 다하며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영주들과 온 백성을 덮으니 이처럼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많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삼손의 생애에 있어서 아마도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딱 들어맞는 기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손은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서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삼손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 정리

우리는 오늘 이번 주일설교의 흐름과 맞추어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길로 걸어간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행복해 지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는 것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향한 자신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삼손은 고집스럽게 자기 뜻대로 걸어갔고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삼손이 만약 스스로 행복하려는 길 말고, 스스로 좋게 보이는 길 말고,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에 원하시는 길을 찾고 걸어갔다면 그의 인생은 사사기에 나오는 어떠한 재판관보다도 영광스럽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택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관점과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뜻을 물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제일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일을 시킬 것 같다는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온 우주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선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얼마나 나에게 좋은 분인지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주님 나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더 많이 보여주셔서 내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하나님의 뜻은 참되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뜻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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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1.일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눅 19:1-10)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안녕하세요? 오늘은 2006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에게 이런 뜻 깊은 시간에 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우리 그레이스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신 서충원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수요일 기도모임 때 설교를 해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주일날 예배 때 설교를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제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하는 태도로 듣지 마시고,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구하고 찾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는 결코 마법의 지팡이라든지 뭔가 신비한 힘을 가진 지팡이가 아니었고, 일반 다른 나무 막대기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손에 들려있었을 때에 이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기도 했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한 청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까지 읽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거기를 지나가시더라.

2 보라, 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들 가운데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3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서

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5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

6 그가 속히 내려와 기쁘게 그분을 받아들이거늘

7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주시고 또 저의 입술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누가복음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저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한 형이 있습니다. 또 그 형에게는 식당을 하시는 외숙모가 계셨는데 그 때 그 형이 그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형이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식당에 가서 외숙모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외숙모 오늘 삭개오 이야기 들었어요." 그랬는데 외숙모가 설교시간에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약간 당황한 이 형은 아니 성경에 삭개오가 나오니까 설교를 들은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일본 사람도 성경에 나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중에서도 삭개오의 이름을 듣고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삭개오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누가복음이 어떤 책인지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사복음서라고 불리는데 네 권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지, 어떻게 이 세상을 사셨는지,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복음서를 자세히 읽고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같은 이야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복음서를 기록하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기록되었고 그에 맞춰서 왕의 계보로 시작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므로 아무런 족보나 탄생의 기록이 없이 바로 종과 같이 열심히 일하고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은 읽어버려진 죄인들인 우리들을 찾아 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크리스마스가 있었는데, 여러분 말구유에 놓이신 아기 예수님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의 2장 16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말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찬송가 "저 들을 밖에 한 밤 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이 찬송가에 나오는 목자들도 역시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또한 유일하게 예수님의 열 두 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록해 주고 있는 복음서도 누가복음입니다. 백 마리 양을 가진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산 넘고 물 건너 골짜기를 지나 양을 찾아 기쁘게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복음서도 역시 누가복음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탕자의 비유 역시 누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잃어버린 동전과도 같고, 길 잃은 어린양과 같고,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나갔다가 모두 허비하고 탕진하여 거지가 된 아들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삭개오의 이야기도 바로 10절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가나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전에 이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님을 향하여 아프리카 가나로 가서 복음을 전할 뜻을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가나 말고 동남아 필리핀은 안되겠습니까? 아프리카 가나는 의료시설이라든지 아이들 교육시설도 너무 안 좋고 모기 한번 잘못 물리면 말라리아로 죽을 수도 있다는데요. 필리핀도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한국에서 살다가 아프리카 가려니 쫌 그러네요. 주님 아프리카만은 피해주옵소서."

몇날며칠 오랫동안 이렇게 주님과 씨름을 하며 버티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한국하고 비교가 안되는 하늘에서 살았어. 너 하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니? 내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잃어버린 너를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비천하고 가난하게 되었는지 아니? 내가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동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거 잊어버렸니? 내 사랑을 아직 모르겠니!?"

그리고 그 선교사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잃어버려진 나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을 입으신 하나님!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제가 왜 아프리카에 못 가겠습니까? 한국에서 안락하게 살던 것이 어찌 하늘의 영광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든 보내주옵소서!"

오늘 우리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잃어버린 자

여러분, 이제 2006년 한 해가 지나가고 우리 앞에 새 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새 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 내년에, 또 그 이후에 펼쳐질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는 새 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이곳 캐나다에서는 "Happy New Year"이라고 말하는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돈을 아끼고 많이 벌어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구두쇠라고 놀려도 내 지갑에 또는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을 보면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돈을 조금 못 벌더라도 또 많은 돈을 건강식품에 투자하더라도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젊어 보인다든지 피부가 아기 피부 같다든지 하는 말을 들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기 위해 지치고 힘든 삶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각기 다른 생활의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삭개오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열심히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행복"이란 친구는 그다지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이 몰려옵니다. 이제 좀 편하겠지 싶으면 또 일들이 뻥뻥 터집니다. 우리들은 아주 잠시 약간의 행복을 느끼면,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꿈꾸지만 그 꿈은 어김없이 산산이 깨어지고 맙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지만 또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걱정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인생 길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이별하고 헤어지고 외롭고 혼자 있고 쓸쓸할 때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맞습니까?

제가 일하는 석기시대라는 삼겹살 집이 있는데요, 99% 이상의 손님이 두 명 이상 짝을 지어옵니다. 가끔 혼자 와서 식사하고 가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분들을 보면 솔직히 좀 쓸쓸해 보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그다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밌는 영화도 혼자 보면 재미없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혼자 알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을 때 교회 안에서 신랑신부가 탄생되고 우리 청년부는 멋있는 축가를 준비해서 부른 적이 있었는데요, 신부가 축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 우리 축가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정도구나." 생각을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축가를 부를 때 신랑신부는 몸을 돌려서 우리 청년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방향에 신부 아버지,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신부 어머니는 울고 계셨고, 그것을 본 신부도 같이 울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기쁘고 축복된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릴까요? 바로 이별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시집을 보내는 거니까.

저는 밴쿠버에 온지 약 8개월 되었는데요, 한국에서 이곳으로 출발할 때, 제가 외아들인데 저희 어머니는 1년 간 아들과 떨어진다는 사실에 많이는 아니지만 살짝 우셨습니다.

저는 외아들이어서 어릴 적에 성격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지금도 많이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 있다 보니까 이기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유치원 정도의 나이였는데 한번은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노는데 장난감을 제가 하나도 못 가지고 놀게 했지요. "내꺼야." 그리고 그 친구는 조금 놀다가 재미가 없으니까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지요. 왜 울었겠습니까? 이제 다시 혼자 놀아야 한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 놓느냐면요, 우리 모두가 이별의 상처를 가진 잃어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깊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버림받은 마음, 잃어버려진 마음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찮은 일을 시킬 노예가 부족하거나 또는 힘든 일들을 처리해줄 일꾼이 필요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나눠주고자 자신과 똑같은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나이드신 사모님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응애하고 우는 이유는 바로 "버리운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버리운 마음", 바로 "버림받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행복하고 만족하기 위하여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가져도 결코 채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득의 증대로 만족하지 못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사람의 마음속에 거대하게 뚫려있는 구멍, 그 구멍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이제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제가 노래하나 불러보겠습니다.

나는 인생에 산과 들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내가 얻은 건 공허와 깊은 실망 귀한 세월만 다 보냈네

어느 날 주님이 나를 부르시어 사랑의 품에 안으실 때

나는 주님께 매혹돼 이끌리어 인생의 참뜻 알게됐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마음,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마음,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완전히 만족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 삭개오는 어떤 사람

자, 그러면 이제 삭개오 이야기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 삭개오는 1절에 나온 것처럼 여리고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리고라는 도시는 저 옛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첫 번째로 무너뜨리신 가나안 땅의 거대한 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에 살던 사람들의 큰 죄악 때문에 여리고를 저주하셨습니다. 보통 전쟁을 하고 나면 많은 전리품을 얻는데, 이 여리고는 완전히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리품도 취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기고 금과 은과 옷을 전리품으로 숨겼던 아간이라는 사람은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돌에 맞아죽는 큰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고 명령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초를 놓을 때 장자가 죽을 것이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가 죽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였는데요, 이것은 아합 왕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사람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히엘이 기초를 놓을 때 첫 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왕상 16:34).

이후에 헤롯왕이 이 여리고에 많은 요새들을 짓고 도시를 발전시켰습니다.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분위기라기 보다는 로마식 건물과 로마의 분위기가 더욱 강했던 여리고에 살고 있던 삭개오에 대해서 2절에서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였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라고 하면 그는 곧 죄인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의 앞잡이로서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돈을 빼앗아 로마에 바치고 또 동시에 자기도 부자가 되는 못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가 과거에 일본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에 있었던 친일파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카이사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느냐 틀리냐로 상당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말하자면 민족의 배반자요 변절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단순히 세리였을 뿐만 아니라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의 대명사 아니겠습니까? 삭개오는 당시 여리고에서 아주 악명 높은 세리장이었을 것입니다. 또 부자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뒤에 8절에서 삭개오가 스스로 고백하는 말을 참고해 볼 때 삭개오는 거짓 고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았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동족들에게서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삭개오에게 돈을 뜯긴 유대인이라면 삭개오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온갖 욕을 다 퍼붓지 않겠습니까? 너가 사람이냐부터 시작해서 십원짜리, 이십원짜리, 소, 말, 돼지 등 갖가지 욕이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삭개오에 대한 설명이 한 가지 더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일반 사람들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고 가려져서 예수님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에서는 삭개오에 대한 많은 설명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가지는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삭개오라는 사람은 키가 작은 것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키 큰 사람들은 인기도 많고 사람들에게 대우도 잘 받는데, 키가 작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접을 받습니다. 보통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봐도 키 큰 친구들은 잘 나가는데 작은 친구들은 무시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초대 왕을 세울 때 사울의 키가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컸기 때문에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처럼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며 대우하는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대체로 버릇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기적인 것이 무엇인지, 버릇없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도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잘못되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본성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과나무는 너무나 커서 사과를 백 개 열고 어떤 사과나무는 작아서 한 두 개만 열릴지라도 근본 뿌리는 다 같은 사과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큰 죄인이라서 살인 강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조금 착한 죄인이라서 마음 속에서만 미워하고, 마음 속에서만 살인하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근본은 다 같은 죄인, 죄의 나무인 것입니다.

이 삭개오는 다만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 맺힌 한 잃어버린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 역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지라도 다만 열매가 조금 덜 맺힌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이 삭개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던 삭개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보고, 또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이 삭개오는 결국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큰 배신감과 상처로 아파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어떤 특정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군대를 현역으로 가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청에서 정보통신과라는 부서에 지정을 받아서 시청을 돌아다니며 컴퓨터를 고쳐주는 일을 했었는데요, 하루는 기업지원과에 가서 컴퓨터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고장낸 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어떤 문제인지를 파악하고 앉아서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공익이세요?"하고 질문을 하길래, "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겁니다. 단순히 반말이 아니고 저를 무시하면서 대하는 겁니다. 이건 뭐 나이로 따지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이냐 공익근무요원이냐에 따라서 존대말과 반말이 나눠진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람이란 존재는, 우리 모두는 아주 단순하고 때론 아주 유치합니다. 내가 인정을 받으면 행복하고, 내가 무시를 당하거나 푸대접을 받으면 마음이 상합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높으신 정치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별 것 아닌 걸로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손가락질이야?", "이 사람? 이게 어따 대고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은?", "당신 몇 살이야?" 뭐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한심한 웃음을 짓지만 돌아서면 우리가 다 이렇게 유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말 한마디에 서운해서 더 이상 얼굴을 보기조차 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관심과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활짝 열려버리는 이렇게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강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젠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작은 몸집을 가지고 직접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었던 탓에 삭개오는 세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자기 뒤에 로마 황제를 든든한 힘으로 삼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평소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신출내기 세리가 된 삭개오는 엄청난 성과를 올리며 로마 정부에 많은 세금을 걷어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고소를 해서 세금을 왕창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제 삭개오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슬슬 피해 다닙니다. 물론 뒤에서는 욕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삭개오 앞에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이제 의기양양하게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덧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크고 멋있는 집에서 하인들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세리 마태

이 누가복음에는 세리의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중 두 가지를 삭개오와 연결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5장은 한번 같이 펴보시겠습니다. 27절부터 32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7 이 일들 후에 그분께서 나아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29 레위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푸니 세리들과 또 그들과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의 큰 무리가 거기 있더라.

30 그런데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대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등장했던 한 세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레위였습니다. 이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입니다. 이 세리 마태가 바로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기 갈릴리에서 잘나가던 세리 마태가 갑자기 사표를 내더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대사회에서는 세리라는 사람들이 죄인들이요 민족들의 배반자라고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 세리들끼리는 똘똘 뭉쳐서 아주 긴밀하게 소식들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지신 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와서 자기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유대사회에서는 큰 소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

이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들의 배를 채우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인들인 세리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자기들과 한 편이 되어 바리새인이 될 줄 알았던 이 예수님이 갑자기 세리를 제자로 삼다니, 바리새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또한 세리들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유대민족의 왕따 집단인 세리들에게 이렇게 따듯하게 접근하시는가?

세리 마태는, 아니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마 마태 역시 세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부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의 집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또 많은 세리들이 모였습니다. 또 잔치가 크게 개방되어 있었던지 몇몇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리 마태는 이 잔치를 열면서 그 동안 함께 친하게 지내온 동료 세리들에게 자신이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신이 왜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서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리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의 병이 든 우리들을 고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가 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열이 납니다. 이때 어떻게 해서든 콧물만 막아내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어떻게 해서든 기침을 참으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콧물이나 기침이 아니라 콧물과 기침을 만들어 내는 감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짓말을 조금 덜 하도록 잘 참고, 화를 내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도록 꾹꾹 참는다고 해서 우리의 죄의 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의 병이 치료될 때 콧물도 안나오고 기침도 안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참 의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의 죄인들의 대명사라 불리는 세리들을 먼저 찾아가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 세리의 기도

이제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9장의 바로 앞에 있는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18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9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직전에 먼저 등장하는 이 세리의 기도. 아마 삭개오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라새인과 같이 "나는 이렇게 의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했습니다"하는 기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정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가식으로 다가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정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부끄러운 모습, 어리석은 모습, 지치고 힘든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진실한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키가 작으면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잘 못하면 비웃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실수를 하면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기도하며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아주십니다.

** 삭개오를 찾아오신 하나님

삭개오는 이제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왔고 부자가 되어서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아직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또 아무리 많은 재산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텅 빈 마음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인생의 참 뜻을 알게 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삭개오를 만나주시려고 기나긴 여정의 방문일정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오기까지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기 위해서 거의 6개월 정도전부터 서류와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위험한 일들은 무엇인지 조심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숙지하고, 책도 읽고 인터넷도 보고 여행자 보험도 들고 하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어느새 밴쿠버에 와서 잘 지내고 있지만 여기에 오기까지는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삭개오를 방문하시기까지도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우주를 너머선 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이 땅에 방문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외로움과 뜻 모를 그리움과 공허함에 사로잡혀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려고 직접 사람이 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고 계십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몰려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신 주목적은 바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고생과 수고로 가득한 인생 속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던 삭개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에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삭개오는 이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가 기대하며 예수님을 보고자 하지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가려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뜻하지 않은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가 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이 삭개오는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져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셨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 왜 가다가 멈추셨는지 기웃기웃 쳐다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예수님은 오늘 반드시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너가 초대해 주면 내가 가고 아니라도 나는 갈 곳이 많은데 어쩔거야? 빨리 말해. 나 바쁘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리고에 찾아온 목적은 바로 잃어버려진 너를 찾고 구원하기 위한거야."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은 우리들의 손님이 되시고, 친구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은 9절에서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삭개오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거짓 고소하여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 인생의 변화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언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언제 만족할 수 있으며 언제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여기 누가복음 19장에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돈을 악착같이 긁어모으던 한 사람이, 부당하게 취한 돈을 네 배로 갚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놀라운 변화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 이상 삭개오에게 있어서 행복의 근거는 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인생의 참 뜻을 알게되고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죄를 선택하였고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시 행복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시끄럽게 지낼지라도 사람의 허전한 마음은 완전히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또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우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고자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는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은 잃어버려진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특별한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거절하실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려진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 1:15).

** 초청

다 같이 눈을 감아주십시오.

혹시 이 자리에 나는 아직 한 번도 예수님을 나의 개인의 구원자로 영접한 적이 없다, 나는 오늘밤 눈을 감아서 다시 떠지지 않을 때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100퍼센트 확신이 없다는 분이 계시다면 잠시 손을 들어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눈을 떠보니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10년 뒤에 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기회가 주어질 때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체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원한 삶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할 심판과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의 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된 증거로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감사하게 믿고 받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믿겠다고 결심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기도할 때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의 어떠한 노력이나 의로운 일들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다는 이 간단하고도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또한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이미 구원을 받은 형제자매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지치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날마다 오고가는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항해 중 파도는 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를 세심하게 인도하시고 날마다 동행하시는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주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이 계속해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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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요나가 만난 하나님(욘 4:2)

본문 : 요나서 4장 2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서 4장입니다. 설교의 내용은 요나서 전체가 되겠지만 우선은 요나서 4장 2절 한 구절만 읽겠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아직 내 나라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오늘 저는 "요나가 만난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그리고 교제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 요나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께 까불고 대들었던 대언자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땅의 심장 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요나보다 위대한 이가 여기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요나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구약의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요나가 들어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제가 요나서에서 가장 재밌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 요나는 뭔가 건방진 태도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요나에게 이해시키고 한 마음이 되길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소 거칠고 과격한 사람이었지만 또 한 면에서는 아주 꾸밈이 없고 진솔 담백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는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서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 니느웨로 가라

먼저 요나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는 나중에 요나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3일 동안 걸어야 다 돌 수 있을 만큼 큰 도시였고,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만 해도 십 이만 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사악함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시고 요나를 통하여 경고를 주셔서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3절을 보시면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일어나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요나는 일어나서 욥바로 가더니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려고 배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시 성경 뒤에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뒤에 부록에 보시면 지도 12번 분단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해(지중해)라고 된 곳 오른편에 욥바의 위치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도 13번을 보면 주황색으로 아시리아 글자 위에 니느웨를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과 가까이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갈 때는 굳이 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라는 니느웨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떠나려고 욥바로 가서 배를 탄 것입니다.

 

 

제가 지도에 다시스가 없길래 이곳저곳 찾아보았는데, e-sword라는 공짜 성경검색 프로그램에서 몇 가지 설명을 찾았습니다. 현재의 지명과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제미에슨, 파우셋과 브라운 주석(Jamieson, Fausset and Brown Commentary), 아담 클라크 주석(Adam Clarke's Commentary on the Bible), 등등(TSK) 몇 가지 설명을 찾아보니 지브롤터 해협 옆에 있는 스페인의 한 도시 Tartessus가 아니면, 바울이 태어났던 길리기아의 다소(Tarsus)일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니느웨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 앉았던 것도 아니고 아주 적극적으로 배를 타고 반대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요나서 4장을 보면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요나는 당시에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다스린 나라였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큰 도시였던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해서 용서를 받느니 차라리 멸망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바꿔서라도 니느웨로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열고 음성을 내시거나 주의 천사로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역을 하기 원하십니다.

 

 

 

** 오 잠자는 자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절하고 반대로 나아가는 요나를 돌이키시기 위해 바다에 큰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말씀에 불복종한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설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큰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종교적인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현실적인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온 배가 난리법석입니다. 이때 유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있었다면 유서를 써서 유리병에 담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 요나는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는 배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눈을 꾹 감고 잠을 잡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 저는 죽어도 니느웨 못 갑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우리 민족의 원수들인데 어떻게 회개해서 살으라고 합니까? 다 멸망하게 내버려두세요."

 

 

선장이 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또 무거운 짐이 있으면 바다에 던지려고 배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가 요나를 발견합니다. "오 잠자는 자여, 어찌 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면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리라." 아마 선장은 속으로 "이게 미쳤나, 이런 상황에 잠이 오냐? 넌 믿는 신 없어? 좀 살려달라고 불러봐."하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절에 보면 이제 선원들이 모여서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많은 경우 비나 눈이나 폭풍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가 들거나 배탈이 나면 춥게 다니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이지 죄를 짓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무조건 우리의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이렇게 요나와 같이 자신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과 성령님의 음성을 통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 문제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는데도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아주 분명하게 요나를 지적하십니다.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고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집니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 나라는 어디냐? 너는 어느 나라 백성이냐?"

9절에서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으로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주 곧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노라.

 

 

 

** 고래를 예비하신 하나님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대로 배를 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우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원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마저 사용하셔서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요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요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요나와 한 마음을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큼직한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고기를 고래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류인 물고기냐, 포유류인 고래냐를 가지고 따지고 고래상어나 청상아리다 많은 추측들을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물고기가 무슨 종류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제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폭풍우를 예비하셨고 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아주 다양한 것들을 예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도 하나님의 자상한 돌보심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많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2년이라는 세월이 아까워서 군대를 어떻게든 빠지려고 하는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학력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군대를 뺄 수 있도록 예비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미리 다 계획한 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절묘하게 공익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제가 공익을 끝내고 나서부터는 학력으로 조건이 안 되던 사람들도 신체만 건강하면 무조건 현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에서 예비해 주신 것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저를 더 만나주시고 저를 얼마나 섬세하게 이끄시는지 알려주시려고 많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방만 빌려서 쓰는데도 밥도 잘 주시고 친절히 대해주시는 좋은 주인아주머니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또 월급을 안주는 사장님을 예비해주셨고 그 가운데 모든 월급을 무사히 다 받도록 해주셨습니다. 또 이제는 새로운 좋은 사장님을 주셔서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며 예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처럼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다가 갑자기 일이 생기면 급하기 일을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고 계십니다.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의 이러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을 돌이키고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10절에 보시면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 다시 니느웨로

이제 3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이제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

이제 드디어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최소한 3일을 돌아야 다 다닐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4절에 나온 것처럼 하루 동안만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아주 제멋대로인 대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니느웨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은데, 요나는 하루만 대충 돌면서 저주를 퍼붓고는 나온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이키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 그 더러운 죄 때문에 이제 사십 일 뒤에는 다 망해 버릴거니까 그리들 알어!", "이 저주받은 것들아, 니들 얼마나 가증한 죄를 지었는지 이제 사십 일 뒤에는 그냥 하늘에 불이 떨어지든 땅이 뒤집히든 다 죽을거니까 그리들 알아!" 아마 이런 저주의 뉘앙스로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나가 하루 만 선포하고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아시리아 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아시리아의 왕은 짐승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의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이킨 것을 보시고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실 뿐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셔서 누구든지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이제 겉으로 보자면 요나의 사역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고, 바울과 사도들은 수십 년을 복음을 전하러 다녔어도 이렇게 요나처럼 수많은 사람을 한 번에 회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요나는 하루 만에 어린이만 십이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를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체다 회개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 그러나 요나가 그 일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하여

2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아직 내 나라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이런 멋진 고백을 감사의 눈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면서 하는 이 고집불통 요나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에게 조차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친절은 우리가 잘나고 착하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럽고 가증한 죄악 가운데 묶여있을 때에 조차, 우리가 거칠고 교만하며 어리석을 때에 조차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는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3절에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간청하오니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보면 볼수록 아주 웃기는 대언자입니다. "하나님 거봐요. 내가 이 원수 같은 놈들 그냥 멸망시킬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해 줄지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우리 민족이 죄를 지었어도 이렇게 잔인하고 더러운 놈들을 용서해 주다니요. 저는 분해서 못 살겠습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일제시대에 자신의 부모와 가족을 전부 일본에 잃은 한 사람에게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이 한 면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4절에 보면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주님이라면 "아우 진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가 시키면 하는거지, 진짜 말 많네. 죽고 싶어? 그럼 니 소원대로 그냥 죽어버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요나의 마음을 얻고 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요나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멸망하는 장면을 만끽하기 위하여 도시의 동쪽 편에 앉아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사십 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거짓말하지 마옵소서. 이제 삼십 구일 남았나이다. 삼십 구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소서. 저 원수들을 제발 좀 멸망시키소서."

아주 건방지지만 그러나 진솔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6절에

주 하나님께서 박을 예비하시고 그것이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것이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려 하심이었더라. 이에 요나가 그 박을 심히 기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 볕에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예비해 주셨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우리 하나님은 정말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야 니가 뭘 잘했다고 자꾸 고집이야, 아 이거 진짜 웃긴 녀석이네."하면서 숲 속에서 곰이나 사자를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요나는 그늘이 생겨서 너무 좋아하면서 계속 도시를 지켜봤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삼십 팔일 남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루소서. 우리 민족의 원수를 나의 눈앞에서 멸망케 하옵소서. 믿슙니다. 아멘!"

 

 

7절에 보면 하나님께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르러서 이제 막 시원한 감이 없어지고 해가 막 뜨려할 때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해가 뜨고 그늘이 필요하기 시작한데 때마침 넝쿨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8절에 드디어 해가 뜹니다. 해가 뜰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또 뜨거운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요나 한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대한 폭풍에서부터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교제하시며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제 요나는 기진맥진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은 줄줄 흐르고 뜨거운 동풍에 숨숨 팍팍 막히고 아주 짜증이 머리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요나는 발라당 누워서 "주님 죽여주세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내게 더 낫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9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요나가 응수합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대답으로 요나서는 끝마치고 있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0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하지도 아니하고 자라게 하지도 아니한 박 넝쿨 곧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불쌍히 여겼거든

11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이 넘고 또 많은 가축이 있는 저 큰 도시 니느웨를 내가 아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구약성경이 다만 이스라엘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민족설화라면 이런 말은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나서 자체가 존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을 기록해주고 계십니다.

 

 

 

** 마무리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며, 사람과 함께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뭐가 대단하길래 하나님께서 이토록 공을 들여가며 상대해 주십니까? 우주 저 멀리서 바라볼 때 한낮 점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이 뭐가 이쁘고 뭐가 잘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 주십니까?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송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퍼부어 주고 계십니다. 요나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우를 예비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시고,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작은 벌레를 예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요나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설득하시고 또 알려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만물의 통치자이심에도 불과하고, 먼지와 같고 티끌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땡깡을 다 부리고 고집을 부리더라도 이해가 안되면 따지고 죽겠다고 드러눕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시며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고 용납하면서까지 우리와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진실한 친구보다 뛰어나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고 주님 앞에 합당치 못한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지만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알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소원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섬세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더 많이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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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모세가 만난 하나님(히 11:24-27)

본문 : 히브리서 11장 24-27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니라.

오늘 저는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부제목을 달아본다면 "예일전보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도 삶 가운데 경험하기 원합니다.

 

 

 

** 구약의 대표, 모세

만약 우리에게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을 한 명 뽑으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대언자 중의 대언자 엘리야, 지혜의 왕 솔로몬 또는 모든 현자들의 으뜸인 다니엘. 이러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뽑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모세를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구약과 율법을 언급할 때마다 "모세"를 그 대표로 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요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도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모세라는 사람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작지 않습니다. 모세는 성경에서 그의 탄생부터 인생을 마치기까지 모두 기록된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란을 떠난 75세부터 기록이 되었고, 다윗의 인생은 소년 시절부터 기록이 되었지만, 이 모세의 인생은 그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어떠한 청년기를 보냈고, 어떠한 삶을 살고 인생을 마쳤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일생을 설교 한번에 다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일생들 가운데 몇 가지 포인트를 찍어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 예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의 부제목은 "예일전보의 하나님"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캐나다에 와서 더욱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저의 앞길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도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이 나타나시거나 천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예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히브리서 11장 24절 앞에 있는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그가 특이한 아이인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대로, 이집트 파라오 왕의 압제 가운데서도 그 수가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 왕은 이들의 수가 많아지면 나중에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레위인 아므람과 요게벳을 모세의 부모로 예비하셨습니다(출 6:20). 그리고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특이한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모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임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갈대로 만든 궤를 준비하여 모세를 넣고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부모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손안에 있었습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옵니다. 그리고 부들 사이에 놓여있던 궤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시녀를 시켜 궤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 궤 안에 있던 모세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이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멀리서 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얼른 달려와서 "아이의 유모를 구해와 아이에게 젖을 주도록 할까요?" 묻고 파라오의 딸은 삯을 주면서 자기를 위해 아이를 기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파라오의 딸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사람 모세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위해 부모를 예비하셨고, 누나를 예비하셨고, 파라오의 딸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모세는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언제까지 자기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모세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의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24절부터 다시 보시면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요, 인도자로 예비하신 것같이 모세도 믿음으로 그러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그것을 따라갈 자유도 있고 그렇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빈주의나 운명론과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사람의 뜻으로는 좋든지 싫든지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실 지라도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의 믿음의 결심이 합쳐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그가 스스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했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모세의 선택이 합쳐지는 순간입니다. 자,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야말로 하나님께서는 모세 자신을 예비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재판관이 되도록 다른 모든 환경을 예비해주셨지만 정작 모세 자체는 아직 예비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서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

23 그가 정확히 사십 세 되었을 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더라.

24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부당한 일 당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를 옹호하여 학대당한 자의 원수를 갚아 이집트 사람을 치니라.

25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자기 형제들을 건지려 하심을 그들이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

 

 

정확히 사십 세가 되었던 모세의 이 상태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고 아주 자신 만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려 하셨다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에게 이집트 왕자로서 어떻게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이끌며, 백성을 다스리고, 행정을 처리하며, 재판을 하는지 등을 배우게 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이제 모든 것이 예비된 이 상태에서, 모세는 자신이 드디어 영웅과 같이 나타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고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자손을 때리고 부당하게 대한 이집트 사람을 가서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을 벌이긴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도 개의치 않고 그냥 자기 스스로 좋게 보이는 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자손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다시 멋지게 등장하여 싸움을 중재하고 다스리려던 모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스라엘 자손들조차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파라오도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모세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비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하나님 일에 덤벼든 모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자, 이제 두 번째로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모세는 어느덧 80세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이곳 미디안 땅에서 십보라라는 아내를 맞이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대상 23:15)을 낳았습니다. 모세의 현재 직업은 목자입니다. 하는 일은 아침에 양을 몰고 나가서 풀을 뜯게 하고 오후에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이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시냇물이 없습니다. 무조건 우물에서 힘들게 수십 번을 물을 떠올려야만 양떼가 다 마십니다. 그리고 냄새나는 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아픈 데는 없는지 이곳저곳 살펴주고, 양털 깎고, 양털로 천막 짓고, 우유 짜고, 버터 만들고 아주 고생하는 일만 매일 반복됩니다.

 

 

한때 잘나가던 이집트 왕자가 어느새 시골 양치기 할아버지가 되어있습니다. 재기를 노리고 있던 모세, 언젠가 다시 이집트에 돌아가서 위대한 역사를 이뤄보리라고 생각했던 모세,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 난 예비된 사람이거든."하며 결심을 다졌던 모세도 어느덧 80세가 되고 보니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있는 시편 90에서는 모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실패와 좌절과 수고와 슬픔만이 가득한 모세의 일상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양떼를 모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망이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미래도 없을 것 같은 삶이 되었습니다. "이제 난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치는 건가보다. 내 인생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냥 이집트 왕자로 사는게 좋았을까? 아니야, 그래도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시도했다는게 의미가 있을거야. 내가 너무 건방지고 교만해서 일을 그르쳤지만, 에휴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러분이 한번 모세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모세가 매일 보는 것이라곤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과 듬성듬성 나있는 풀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광경, 그리고 양떼들입니다. 특히 이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은 가시덤불과도 같아서 나무를 베어 탁자를 만들거나 막대기도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태울 때 쓸 뗄 감으로도 쓸 수 없는, 아주 볼품 없고 광야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무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건조하기 때문에 그런 떨기나무들이 건조한 열풍에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불이 붙는 광경도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모세는 아마 그러한 떨기나무를 볼 때마다 "꼭 나 같네."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재도 안 되고 뗄 감도 안 되는 쓸모없는 떨기나무.

 

 

어느 날,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 모세는 역시나 양 떼를 몰고 사막을 돌아 호렙 산에 올랐습니다. 평소 자주 보던 광경대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한가지는 그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타지 않는지 보려고 가까이 다가갑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한 음성이 나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숨겼습니다. 지금 모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나타나셨는가? 그것도 왜 이제야, 나이가 80이 다 되고 나서야 나타나셨나?

 

 

출애굽기 3장 말씀

7 ¶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그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8 내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처소로 이끌려고 내려왔노라.

9 그러므로 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렀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며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나니

10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놀랍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갑자기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뭔가 큰 사건이 벌어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일상 가운데 자주 보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떨기나무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식당의 손님들일 수도 있고 동훈이 동우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또는 사물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하고 대단하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가 만나고 접하는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현재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비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제 세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80세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이 빠진 이 모세를 이집트의 사역지로 파송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일까요? 왜 모세가 아직 40세였을 때, 본인도 열정적으로 일해보려고 하는 그 때에는 침묵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할 수 없을 때까지는 일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내 바라던 소망 다 허사가 될 때 내 아버지 도움은 시작일세."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가 되고 더 이상 아들을 가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섬김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냥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인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지체들, 나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주님과 같이 섬기며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전능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 가운데 어떤 일들은 정말 내가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어떤 일들은 솔직히 주님의 도움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세 또한 그러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배운 이 지혜, 그리고 능력 있는 이 나 혼자만으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어."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러한 교만,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 교만을 완전히 꺾는데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교만하지만,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교만하고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 자체가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일을 하고 나서도 내 마음 속에서부터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할 때 그 앞에서는 "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속에서부터는 "암, 자네가 뭘 좀 아는군. 사람 볼 줄 아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저를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 주님은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자랑할 만하지 못하며 부끄러운 사람인지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은연중에라도 자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정말 마음속에서부터 겸손할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 40년 간 광야학교에서 배운 모세는 참된 겸손, 참된 온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이까?" 대답합니다. 또 "오 내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위에 능하던 모세는 간데 없고,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세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모세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만큼 온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민 12:3).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무엇인가 나쁘게 말할 때 조차 "아멘"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해 비방할 때 "아, 그때는 내가 이집트에서 쫓겨나서 도망간 때였다. 그리고 이혼을 하는 것은 더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지금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적하려고 책 잡는거 아니냐?"하면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만 잠잠하였습니다. 모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멘. 주님 저는 그 당시에 율법을 몰라 이방여인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자격 없는 자를 긍휼로 대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이러한 자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러한 겸손은 사실은 내가 뛰어난데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참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겸손은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빛과 계시가 임하여, 내가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볼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빛을 구하여 참된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전능자로서 이 땅에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 보상하시는 하나님

이제 마지막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두 보상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사망이며 지옥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원래 이르렀어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경주를 달릴 수 있는 상태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영광"일 것입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것들만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사역만을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차 앞으로 임할 영원한 왕국에서 받을 놀라운 영광을 또한 예비해 주셨습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8,9).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보화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영광으로 여기며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기던 모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오늘 우리의 삶에 힘이 없고 주님을 향해 크게 열심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무시 받고 조금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영광으로 보상하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 죄의 쾌락들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 정리

마지막으로 다 함께 고린도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4절에 보면 이 빛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빛을 더 많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7절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모두 질그릇과 같이 약하고 쉽게 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서 뛰어난 권능이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오게 하시도록 질그릇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이제 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느니라.

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탄생과 성장과 일생을 예비하셨고 또한 영원한 영광까지 예비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일상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떨기나무와 같이 볼품없고 평범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영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능히 섬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섬기게 하시려고 모든 능력을 공급하시며 다만 겸손하게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여 따라오도록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아래 겸손하며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우리를 높이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수고와 고생이 너무나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낄 정도의 무겁고 뛰어난 영광으로 보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한 영광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이러한 영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전능한 손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영광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 더욱 넘치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모세와 같이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이집트의 보화들을 거절하고, 잠시 누리는 죄의 쾌락들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대로,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의 상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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