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3.03.12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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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왕상 18:15,16)


제목 :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본문 : 열왕기상 18장 15절 - 16절(실제로는 1절부터 16절)
"15 엘리야가 말하기를 "내가 그 앞에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가 오늘 아합에게 나를 반드시 보이리라." 하더라.
16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 

저와 같이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주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기도회 전에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모아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말씀은 열왕기상 18장 15절,16절입니다(두번 반복).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제가 읽기는 15,16절만 읽었지만 실제 오늘 설교의 내용은 1절부터 16절까지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서론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엘리야, 오바댜, 아합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은 마치 오늘날과 같이 배교하고 타락한 상황입니다. 이 때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이 바로 아합왕이었는데 성경은 이 아합왕에 대해서 아주 안 좋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시 아합왕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기 위해서 성경 한 장만 앞으로 넘기셔서 16장 30절을 보시겠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부터 34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주의 목전에서 자기 앞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악을 행하였더라.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을 행하는 것이 그에게는 마치 가벼운 것 같았으니, 그가 시돈인들의 엣바알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가서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하였으며,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에 바알을 위하여 한 제단을 쌓았고, 
33 또 아세라를 만들었더라. 아합이 자기 앞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하였더라.
34 그의 시대에 벧엘인 히엘이 여리코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기초를 놓았을 때 그의 첫째 아들 아비람을, 그가 그 문들을 세웠을 때 그의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해 하신 주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성경은 아합왕에 대해서 자기 앞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악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 우리가 설교를 들었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을 행하는 것이 아합에게는 마치 가벼운 것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교묘하게 하나님을 섬기되 예루살렘까지 가는 수고를 하지 말라는 타협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이 아합왕은 정면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왕이었습니다.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아세라들을 만들므로 자신 앞에 있던 모든 왕들보다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한 악한 왕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은 "그의 시대에"라고 시작하는데 바로 아합왕의 시대에 있었던 한가지 일을 말해줌으로 그 시대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여리코를 건축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에 대하여 이미 경고되었음에도, 아합의 시대에 살던 한 사람이 여리코를 건축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실로 하나님의 말씀이 멸시받고 거부된 시대였던 것입니다. 

본론
1. 오바댜

이러한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삼 년 반 동안 기근을 보내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크릿 시냇가에서 까마귀에게 또 사르밧 과부에게서 부양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의 본문 18장 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게됩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제 삼년에 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내가 땅에 비를 내리리라." 하시더라."

이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타락한 왕 아합에게 보이기 위하여 길을 떠나게 됩니다. 한편 아합왕은 자신의 장관 오바댜와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물을 찾고 있었습니다. 삼 년 반 동안 큰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모든 강들과 시내들은 다 말라버리고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합왕은 땅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의 신임하는 장관 오바댜와 함께 땅의 한 부분씩 물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러한 도중에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게된 것입니다. 잠시 이 오바댜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장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 아합이 그의 궁의 장관 오바댜를 부르더라. (오바댜가 주를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4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들을 멸했을 때,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 명을 데려다가 한 굴에 오십 명씩 숨기고, 빵과 물로 그들을 먹였더라.)"
또 12,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2절의 뒷부분부터 보겠습니다.
"12 ...그러나 당신의 종인 나는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나이다.
13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 내가 어떻게 주의 선지자 백 명을 한 굴에 오십 명씩 숨기고, 그들을 빵과 물로 먹였는지, 내 주께 말씀드리지 아니하였나이까?" 

여러분은 이 오바댜를 보실 때 마음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이 시대의 상황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타락하고 배교하고 어디서도 믿음을 찾아볼 수 없던 아합의 시대에 어려서부터 주를 크게 두려워하는 한 사람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오바댜는 아합에게서 인정을 받고 신임을 받는 장관이 될 수 있었을 정도로 성실하고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큰 기근 가운데 물을 찾아 나서는 일에도 아합왕이 땅의 한 부분을 오바댜에게 위임했다는 것은 오바댜가 그 만큼 왕궁에 충성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오바댜는 다만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를 크게 두려워하여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주고 먹여준 일이 있는 하나님을 인식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왕과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고 모든 나라의 일들을 함께 논의하던 오바댜가 아합이 모르게 주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먹였을 때에는 정말 대단한 결심과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자신은 모든 지휘를 잃을 뿐만 아니라 재산과 가족과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는 무서운 일을 오바댜가 감행했던 것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주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바댜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주님의 일을 남모르게 해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오바댜는 소선지서의 오바댜서를 기록한 선지자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소선지서 오바댜를 기록한 선지자는 현재 본문의 오바댜가 죽은지 훨씬 이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2. 엘리야와의 만남
아무튼 이러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대화들이 오고갔는지를 함께 살펴봄으로 아합의 시대와 같이 타락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겠는가를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오바댜와 엘리야의 대화를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7절부터 16절까지 교독하여 읽어보겠습니다.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 보라, 엘리야가 그를 만나니, 그가 엘리야를 알아 보고, 엎드려 말하기를 "당신이 나의 주 엘리야시니이까?" 하니, 
8 엘리야가 그에게 대답하기를 "그렇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하라." 하더라.
9 그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기시어 나를 죽이려 하시나이까?
10 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가 당신을 찾으려고 보내지 아니한 민족이나 왕국이 없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여기 없나이다.'하면, 그는 그들이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을 왕국과 민족으로부터 맹세를 받았나이다.
11 그런데 이제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 하라.'하시니, 
12 내가 당신을 떠나면, 곧 주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가실 것이요,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나를 죽이리이다. 그러나 당신의 종인 나는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나이다.
13 이세벨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 내가 어떻게 주의 선지자 백 명을 한 굴에 오십 명씩 숨기고, 그들을 빵과 물로 먹였는지, 내 주께 말씀드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 그런데 이제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주께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 하라.'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하자, 
15 엘리야가 말하기를 "내가 그 앞에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가 오늘 아합에게 나를 반드시 보이리라." 하더라.
16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 

대화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아합에게로 가서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알리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오랜 기근 끝에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겠다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바댜는 엘리야를 믿지 못하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과 주의 선지자들을 먹였던 사람인 것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여태까지 엘리야를 찾아다녔던 이야기와 자신이 아합에게 죽임 당할 위협을 설명합니다. 엘리야의 응답은 "내가 그 앞에 서서 섬기는 만군의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내가 오늘 아합에게 나를 반드시 보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후에 아합왕을 만나고 칼멜 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큰 기근의 종결을 고하는 비를 내리게 합니다. 

3. 오바댜와 엘리야
사실 오늘 본문은 이유 없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러 간 사건만을 기록하려 하였다면 8절에서 바로 16절로 갔어야 했습니다. 8절에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하라."하더라"는 말씀 직후에 16절에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는 말씀으로 곧바로 연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굳이 엘리야와 오바댜의 대화를 무려 9절부터 15절까지 여섯 구절이나 할애해서 적어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에 멈추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귀한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보시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며 주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먹였던 오바댜,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아합왕 앞에 나서는 엘리야. 저는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읽고 또 생각하면서 답답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 자신의 모습은 아닌가하고 돌아보게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악들이 마치 가벼운 것 같았던 아합왕의 타락하고 배교한 시대에 주를 두려워하고 주의 선지자들을 숨기고 먹이는 봉사와 섬김을 한 오바댜는 실로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가뭄에 빗방물을 얻은 것 같이 귀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기준, 엘리야와 오바댜가 만난 곳에서 저는 정말 분연히 일어나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와 오바댜는 대화가 안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시대의 흐름을 뒤바꾸고 개혁할만한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가지고 말해내는데, 오바댜의 반응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를 죽이려 하시나이까", "내가 어떻게 주의 선지자들을 먹였는지" 등등을 말하면서 자신 안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눈을 들어 이 시대를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해내는데 한 사람은 자신 안에 갇혀서 엉뚱한 대답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까 심히 두렵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딤 3:1).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덥지도 차지도 않은, 주님께서 역겨워서 토하여 내치실 만한 미적지근하고 타협한 배교의 시대입니다. 아합왕의 때에 주님의 말씀이 다 사라지고 수많은 바알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판을 쳤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시대도 이러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그나마 이 땅에서 우리는 오바댜와 같은 사람들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바댜가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서 먹여주었던 것과 같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섬김과 봉사와 희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책들을 펴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난 장면에서 그는 아주 엉뚱한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물을 찾고 있던 오바댜의 눈 앞에 하나님께서 내리실 큰비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오바댜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먼저 엘리야를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음을 알리라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 오바댜에게는 자신을 죽이려는 말, 또는 믿지 못할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엘리야를 보내셨는가를 생각할 만한 겨를이 없을 정도로 자신 안에만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오바댜는 분명 과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주는 위험을 무릅썼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고 교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러한 위험한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과 멀어진 한 사람, 과거의 영화를 계속해서 반복하여 말하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바댜에게는 과거에 주님을 섬겼던 간증이 있었지만 현재에 어떻게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주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주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바댜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 고백입니다. 오바댜가 만약 엘리야를 만나는 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면 그의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합에게 말하기를 '보소서,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하라."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하나님께서 어떠한 말씀을 당신에게 주셨나이까? 우리가 여태까지 당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나이까? 이제 비를 주시려나이까? 아합왕에게 심판을 내리시려나이까? 온 백성이 바알과 아세라들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기 바라나이다. 속히 가서 아합왕을 데려오겠나이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
"그러므로 오바댜가 아합을 만나러 가서 그에게 고하니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니라." 

오바댜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었다면 엘리야가 나타나서 아합을 만나려는 일에 어떠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다면 타락하고 부패한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 주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가 올바른 관점으로 아합의 장관 역할을 하였다면 그의 왕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그가 엘리야를 만났다면 그는 오늘의 본문과 같이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바댜가 어찌하여 이렇게 주님과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가 안 지었는가 만을 관심하는 소극적인 믿음의 태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과거의 영화만을 자랑하며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시대의 흐름이 너무도 강력하게 주님과 멀었기 때문에 그 흐름과 맞서 싸우다 지쳐버려서 멀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오바댜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오바댜는 성경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그의 과거와 현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여 자신의 재물과 직위와 가족과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을 만한 위험을 무릅쓰고 주의 선지자들을 숨겨주고 먹여주었던 오바댜. 이 오바댜는 현재 주님의 일과는 너무도 멀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를 두려워하나이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섬김을 했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았나이까?"라고 고백하지만 엘리야는 그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후에 엘리야가 칼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 사백 오십 명과 대결하여 이긴 뒤에 그들을 모두 키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 죽이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때 엘리야는 심히 낙담하여 죽기를 구합니다. 여러분 그때 엘리야가 한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만군의 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심히 질투하였사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음이니이다. 나, 오직 나만이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도 앗아가려고 찾고 있나이다"(왕상 19:10).

주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렇게 기도할 당시에 엘리야의 인식 속에 오바댜라는 사람은 결국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들과 같이 분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분명 오바댜를 만났었지만 "나, 오직 나만이 남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볼 때는 자신이 지쳤을 때 위로를 받을 수도 없는, 그냥 없는 것 같은 사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4.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오바댜와 같이 과거의 영화만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과거에 이러이러하게 주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지만은 않습니까? 현재는 어떠합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 나는 그것에 대해 깨어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올바른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주님과 동행했을 때의 오바댜는 자신의 생명, 직위, 가족보다 주님의 일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오바댜는 "자기가 죄를 지었나 안 지었나", "내가 죽을까 안 죽을까"만을 관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주님을 섬겼던 어떠한 일들, 과거에 주님과 동행했던 일들을 자랑하며 기쁘게 간증해내지만 현재의 하나님의 역사와 현재의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주파수"가 맞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나의 죄 문제, 나의 생활 문제, 나의 믿음 생활, 나의 섬김, 나의 건강, 나의 은사... 모두가 자신에게 관심이 맞춰져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하늘의 흐름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오바댜가 정말 주님과 바른 관계를 지속하였다면 엘리야가 낙담하고 힘들게 되었을 때 옆에서 큰 부축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나에게는 생각을 같이하여 너희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느니라"(빌 2:20,21).
그러나 다행히도 사도바울은 이어서 "그러나"라고 말하며 디모데와 에파프로디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아니하기까지 바울과 생각을 같이하며 바울을 부축했던 동역자들이 바울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의 엘리야에게는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지치고 힘들 때에는 위로와 부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그와 생각을 같이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염려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오바댜라는 과거에 주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했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모두 자기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믿음 생활, 나의 생활 환경, 나의 어려움들... 우리가 이러한 것들만을 관심할 때 언젠가 우리는 지쳐 쓰러질 것이고 우리 옆의 지체들도 하나하나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도 넘어지는데, 바울 사도도 도움이 필요했는데 우리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들은 각자가 자신의 일들만을 관심하지 아니하고 서로를 관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 안에서 벗어나 밭을 바라보고 주님의 일을 관심해야 합니다. 또한 형제들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하며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영화를 내려놓고 현재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현재 주님과 동행해야 하며 현재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오바댜와 같이 주님과 멀어지게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한때는 목숨을 내놓고 따르다가도 점점 주님과 멀어져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대화가 안 통하면서도 과거의 일들만 나열하는 답답한 사람이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을 통한 경각심이 일어나고 우리의 삶에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오늘날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엘리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영화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바댜와 같이 자기 자신만을 관심을 때 우리의 전진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밭을 보아야 합니다. 
현재 이 시대는 엘리야의 때와 같이 극심한 기근의 시대입니다. 빵의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닙니다. 오직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입니다(암 8:11). 이러한 때에 우리는 각자의 믿음 생활을 위해서 오바댜와 같이 땅을 찾아 헤매며 각자가 뭔가를 추구해 보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나 자신의 일들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선행되기를 원합니다. 라오디케아, 시민의 권리라는 말처럼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이익만을 존중하는 이기적인 시대의 흐름 가운데서, 나 자신 안에만 갇혀있던 눈들을 들어올려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눈을 들어 밭을 바라보며 일꾼을 보내주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러할 때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임 가운데 주님의 강한 임재와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ot/history/111kings/111kings181516_manfortoday_20030312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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