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10.05.3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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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출 29:42-46)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 29장입니다. 출애굽기 29장 42절부터 46절을 보시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42 이것은 너희 대대로 주 앞에서 회중의 성막 문에서 항상 드릴 번제 헌물이니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거기서 네게 말하리라.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인하여 성막이 거룩히 구별되리라.
44 내가 회중의 성막과 제단을 거룩히 구별하며 또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다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의 직무로 나를 섬기게 하리라.
45 내가 또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그들의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나는 주그들의 하나님이니라.
오늘 저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출애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이라도 읽어보신 분, 손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보통은 출애굽기를 안 읽어보셔도 모세라든지,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라든지, 이러한 모습들은 너무나 유명해서 익히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가 상당히 재미있는데요. 문제는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이제 뒷부분에 가서는 조금씩 지루해 집니다. 이제 뒤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수많은 율법의 항목들이 나옵니다. 또 성막과 그 안에 있는 온갖 기구들, 언약궤라든지, 금향단이라든지, 빵을 차려놓는 상이나, 금촛대, 물두멍, 놋제단 등등 수많은 기명들의 치수와 재료에 대해 나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입어야 할 옷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또 제사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또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 하는 다양한 사실들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압제와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고 불러내신 것일까요? 또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짓게 하신 것일까요? 그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데요. 42절에 보시면 중간에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또 43절에서도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나리니” 우리 어린이 친구들은 “만나고”와 “만나리니”에 동그라미 쳐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45절에 보시면 “내가 또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거하여”, 46절에서도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하여”, “거하려고” 이 단어들에 동그라미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이유를 딱 한 단어로 말하자면 뭐가 좋을까요? 교제, 또는 동행이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항상 만나고 대화하면서 교제를 나누고 동행하시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성막 안에 거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교제하고 동행하기 원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특별히 의롭고 선해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보다 지혜롭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많고 강하기 때문일까요? 다함께 여기 출애굽기 말씀을 손가락으로 끼시고 신명기 7장을 보시겠습니다. 신명기 7장 6절부터 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6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거룩한 백성이니라. 주 네 하나님께서 지면 위의 모든 백성들 위로 너를 높여 자신에게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주께서 너희를 친히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
8 다만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셨으므로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시므로 주께서 자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데리고 나오시고 너희를 노예들의 집에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구속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주 네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이시요, 신실한 하나님이신 줄 알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노예의 집에서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잘나고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면 거룩한 분이십니다. 지금 여기 신명기 7장 6절에서도 거룩이란 단어가 나오고 있는데요. 다시 출애굽기 2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43절과 44절에 보시면 역시 “거룩히 구별”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반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여기서 거룩하신 분 계시면 손 한번 들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거룩하다’ 네, 사람은 거룩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죄가 많고 더럽습니다. 욥기 15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요. “하물며 불법을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얼마나 더 가증하고 더럽겠느냐?” 물 없이 살 수 있는 분 계신가요? 우리는 불법을 물 마시듯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고 놀랍고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죄 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시려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으라고 하신 성막은 이스라엘 전체 진영의 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세 지파씩 동서남북으로 성막 주변에 장막을 쳤습니다.
몇 년 전에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요. 한 노숙자가 옆으로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때 지금 현재까지도 느껴보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꼬랑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하철 문 앞에 서있었고 그 노숙자는 그냥 지하철 한가운데를 지나갔을 뿐인데요. 저는 그 사람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갑자기 송곳으로 코를 콱 찌르는 것 같았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무슨 냄새인지 뒤를 돌아보았더니, 노숙자가 지나가고,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틀어막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예 일어나서 다른 칸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만약 저보고 그런 냄새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가운데서 딱 한 시간만 서 있으면 돈을 주겠다고 한다면요... 얼마 줄거냐고 액수를 물어보고 아주 신중하게 고려해 볼 것 같습니다. 저는 또 코가 안 좋기 때문에요...
우리는 늘 죄와 불법의 꼬랑내와 악취를 뿜어내는 사람들입니다. 피차 문제가 많은 우리들끼리 봐도 정말 서로 실망하고 상처주고 시기하고 다투고 할 정도로 우리는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기준이 더 높으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한가운데 거하시려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육신의 장막 안에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우리 자매님들 화장품 사시면 샘플 꼭 챙겨 받으시죠? 저도 연지 자매를 따라 몇 번 스킨푸드 같은 곳에 가봤는데, 꼭 뭐 하나 사면 작은 거라도 샘플을 주더라구요. 샘플은 본 제품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샘플을 써보고 좋으면 제품을 하나 사라’고 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요. 이제 어떻게 보면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지었던 성막도 하나의 샘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가운데 거하시려고 지으셨던 성막이 진정 보여주고자 하는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함께 요한복음 1장으로 가보실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또 3절도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지금 요한복음은 마치 창세기처럼 태초부터 계셨던 창조주 하나님, 곧 말씀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14절을 보시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한 가운데 거하시려고 성막 위에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신 것처럼,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계셨던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장막을 입고 사람들 한 가운데 거하신 사실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장 23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시간과 공간의 아무런 제약이 없으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친히 배고프고 피곤하며 연약한 사람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시면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더러운 말구유에서 그렇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친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장막을 입으신 하나님께서는 양을 잃은 목자가 자기 양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불쌍한 영혼들을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시간만 나면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논쟁하였던 한심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친히 씻어주시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던 세리들과 죄인들의 집에 손님이 되어 가셔서 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한없이 부어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시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우시면서 사람들과 동행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장막을 입고 내려오신 가장 큰 목적에 대해 보시겠습니다. 다함께 히브리서 10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을 보시겠습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또한 1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밤에 잡아서 문의 기둥에 뿌렸던 어린양의 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샘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세우고 그 안에 놋제단에서 드렸던 수많은 짐승의 피와 헌물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샘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거룩이란 단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죄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위선되며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욕심과 자랑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나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으셨습니다. 단 한 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화해헌물로 드리시고 우리를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다 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셔서 그들 한가운데 거하시려고 성막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와서 직접 육신의 장막을 입고 내려오셔서 사람들 가운데서 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셔서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이스라엘과 만나는 장소로 성막이 세워졌고,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몸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은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거하실까요?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2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각자의 몸 안에 계시고, 두 번째는 우리들의 모임 가운데, 즉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 먼저 제가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9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몸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럽고 죄가 많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씻으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사시는 것입니다. 한 형제님께서는 “우리는 단순히 교회 다니는게 아니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술, 담배, 마약, 문신 이런 것을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몸이 이제 내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은 나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과 더 가까이 교제하며 동행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주어야 할 가장 행복한 삶의 가치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실제로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샘플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즐거움과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몸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임 가운데, 즉 교회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다 같이 마태복음 18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보시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입니다. 바로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모일 때에 주님은 여기에 우리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와 사랑을 한없이 공급받고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집에서 혼자서도 찬송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누릴 수도 있고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모였을 때 주시는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약하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강하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부족하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풍성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냉랭하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모일 때에는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한 구절 앞으로 가셔서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자기들이 구할 어떤 것에 대하여 땅에서 한마음이 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행하시리라.”
우리 어린이들은 “한마음”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해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사모하는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기도는 약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함께 한마음이 되어 하는 기도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마다, 한마음이 되어,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주님의 임재하심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교회 가운데서의 섬김
이제 마지막으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막을 지으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겼는가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시대의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샘플이 될 수가 있는데요. 우리는 성막을 건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교회에서의 섬김이 또한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다 같이 출애굽기 36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번갈아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1 그때에 브살레엘과 아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자 곧 주께서 지혜와 명철을 주사 성소에서 섬기는 데 필요한 온갖 일을 할 줄 알게 된 자들이 주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일을 하니라.
2 모세가 브살레엘과 아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자 곧 주께서 마음에 지혜를 주신 자와 마음에 감동을 받아 와서 그 일을 하려 하는 자를 다 부르니라.
3 그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가져온 모든 헌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아침마다 자원하는 헌물을 가져오므로
4 성소의 모든 일을 행하는 모든 지혜로운 자들이 저마다 자기들이 만들던 일을 멈추고 오니라.
5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주께서 만들라고 명령하신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져오나이다, 하니
6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그들이 그 명령을 진영에 두루 선포하여 이르되, 남자든 여자든 성소의 헌물로 드리기 위해 더 이상 일하지 말라, 하였더라. 그리하여 백성이 가져오는 것을 삼갔으니
7 그들이 가진 재료가 그것을 만들기 위한 모든 일에 충분하며 너무 많았더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여러 가지 섬김의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고, 또 교회 안에서의 섬김에 대한 샘플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다양한 섬김의 연합
성막을 세우고 그 안에 기명들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힘들기도 했고, 위험할 수도 있었고, 또 매우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성막의 가장 깊은 자리에 있던 언약궤 같은 경우는 1,300여 종류의 아카시아나무 중에 한 종류인 시팀나무를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시팀나무는 이집트에서 미라의 관을 만드는데도 사용되었던 아주 좋은 재료였습니다. 이 나무를 톱으로 썰고 다듬고 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시팀나무 위에 금을 덧입혔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많은 금장신구들을 용광로에서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을 나무에 도금하는 작업은 매우 위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뚜껑인 긍휼의 자리를 덮는 두 그룹의 모습은 금덩어리를 두들겨서 조각하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힘들고 위험하고 또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모든 섬김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의 섬김이 모여 하나 되고 연합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됩니다. 목수만 있어서도 안 되고, 대장장이만 있어서도 안 되고, 또 예술가만 있어서도 안 됩니다. 각 성도의 모든 은사와 기능이 한 곳에 어우러질 때에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
또한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3절 뒷부분에 보시면 바로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free offerings 라고 되어있는데요. 대가를 계산하거나 유익을 바라지 않고 값없이 드린 헌물을 의미하고, 또 누군가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드린 헌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요를 통하여 억지로 나오는 섬김을 결코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며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으신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섬김이나 경배가 없어도 영광이 충만하시고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으시면서 기뻐하시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의 섬김이 너무나 놀랍고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너무 큰 도움이 되고 유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드림과 헌신과 봉사를 기뻐하시는 경우는 오직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동되어 자원하는 마음이 넘쳐서 드릴 때입니다. 저도 아이들 선생님으로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어쩌다 저에게 사탕이나 편지를 줄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탕이 맛있어서 좋아하기도 하고, 편지가 예뻐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저를 생각해준 그 마음 때문에 더 기쁩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들이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편지를 써서 준다면 저는 별로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길 때에 자원함으로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섬김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권면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섬김은 섬기는 사람도 기쁘지가 않고,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감동하여 나오는 섬김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작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감동하여 나오는 섬김은 5절에 나온 것처럼 넘치는 섬김이 됩니다. 모두가 기쁨에 넘쳐서 섬기는데 뭔가 부족한 상황은 벌어질 수가 없습니다. 자원하는 섬김은 언제나 넘치고 풍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통제와 질서
그러나 또한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넘치는 섬김이 적절한 통제와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이 뜨겁고 넘친다고 해서 무조건 맘대로 섬겨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보면 백성들이 성막에 쓸 재료를 너무 많이 가져오니까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세에게로 문제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모세가 명령을 내리고,각 지파의 족장들과 전달자들이 백성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질서가 필요합니다. 어떤 섬김이든지 합당한 통제와 질서 가운데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가령 찬양대에서 멋진 목소리를 가진 한 자매님이 혼자서 크게 부르면 화음이 아름다울까요? 또 건축을 하는데 벽돌 크기가 서로 제각각이면 건물이 세워질까요? 우리 여기 뒤에도 벽돌이 질서정연하게 쌓여져 있는데 만약 한 벽돌이 삐쭉 튀어나와 있으면 어떨까요? 그 벽돌 하나 때문에 건물 전체가 균형을 잃고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예전에 성막은 사람들이 재료를 가지고 건축하였지만, 오늘 교회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중간에 돌이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체 집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계신 우리 성도님들 한분 한분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합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마시고, “내가 빠지면 교회가 무너질 수도 있구나.”하는 책임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 집에는 누가 거하십니까? 네, 주님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2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세워져 있느니라.” 우리교회 한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정리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은 마치 아주 먼 옛날 이집트 동쪽에 있는 시내 광야에서부터 출발하여, 예수님이 계시던 나사렛과 갈릴리를 거쳐서, 현재 이곳 일산까지 아주 먼 여행을 한 느낌이 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한가운데 거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한가운데 거하시고, 또 이제는 교회의 한가운데 거하십니다. 죄를 물처럼 마시던 우리를 단 한 번 드려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영원히 완전하고 거룩하게 하셔서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모이는 모임 가운데 사람의 말이나 주장이나 생각이 아닌 오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만이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늘 실패하고 넘어지는 연약한 우리들과 함께 하시려고 우리의 한가운데 거하시고 동행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생각하며 오늘도 용기를 내어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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