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0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노아가 만난 하나님(창 6:9)

본문 : 창세기 6장 9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9절 한 구절입니다.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노아

여러분은 성경에서 가장 의로운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특별히 구약성경 가운데서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23:35, 눅 11:51).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예수님의 놀라운 예표가 된 요셉,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탄생시킨 모세, 불의 선지자 엘리야. 우리는 많은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이렇게 세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에스겔 14장 13,14절 말씀인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3 사람의 아들아, 그 땅이 심히 범법하여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내 손을 그 위에 내밀고 그곳의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며 기근을 그 위에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그곳에서 끊으리라.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다른 사람은 구할 수 없고, 오직 자기 혼만 건질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대명사로서 노아를 가장 먼저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창세기 6장 9절에서도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히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아가 살던 그 당시에 타락하고 범죄한 모든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의인이라는 것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 노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저는 세 가지로 요점을 잡아보았는데, 첫째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둘째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셋째는 언약의 하나님,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노아가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살펴봄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럼 첫 번째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에녹의 이야기로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의 세대들이라고 해서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고 죽었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에녹이 등장하면서는 조금 더 부연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1-24절 말씀을 보시면

21 ¶ 에녹은 육십오 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23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있지 아니하더라.

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65년을 잘 살다가 갑자기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부터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갑자기 땅에서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말 그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휴거되었는데,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시점에서 에녹에게 이 땅에 임할 심판에 대하여 계시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서 14,15절에서는 이렇게 에녹이 선포했던 말씀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4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은 에녹도 이들에 관해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또한 에녹이 낳은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가 죽으면 오리라"라는 뜻으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표적으로 세워 그의 죽음과 함께 이 땅에 심판이 임할 것을 대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년도를 한번 계산해 본다면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는지 숫자 계산을 해봤는데요, 잠시 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 보시면 에녹이 65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187년을 살면서 라멕을 낳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잘 보십시오. 26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래서 라멕을 낳기 전까지 187년 더하기 782년을 하니 총 969년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맞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손가락을 찍어놓을 년도는 바로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다는 점입니다.

자, 그리고 28절과 29절을 보시면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이 182년을 살고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한 장 넘겨서 창세기 7장 11절에 보시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태어나서 182년을 살고 노아가 600년을 살았으니 그 수를 더하면 782년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뒤에 산 년도도 782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보여주셨던 그대로 정확히 므두셀라의 죽음까지 그 세대의 사람들을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두셀라가 태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 에녹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계속된 경고의 말씀을 주셨고, 또 므두셀라의 마지막 120년 동안은 의의 선포자인 노아를 통하여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969년인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최고로 장수한 사람의 연수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다고 해서 즉시로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대언자 요나가 못마땅하고 분노하며 말했던 것처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욘 4:2). 만약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범죄한 즉시로 벌을 주시는 분이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처음으로 일생을 헌신할 때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격하여 헌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친구 되고 죄악을 물마시듯 행하고 하나님 없이 계속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를 지금까지 참아주시고 오히려 선하게 은혜로 대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묵상할 때면 주님께 헌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런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답하고 고집 센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분에 넘치는 은혜와 긍휼로 나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로 대하신 만큼, 내가 그것을 발견한 만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저 지체를 사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나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이 나를 향하여 얼마나 큰사랑으로 오래 참으셨는지를 알려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오래 참으신 것에 감격한 만큼 그 은혜가 부어진 만큼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긍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말씀 한 마디로 방주를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만 하늘을 열고 직접 벼락같은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여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모양과 길이와 재료와 창문의 위치를 세세하게 가르쳐주시고 120년 동안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성경의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노아는 말 그대로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이기적이고 사나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꾀를 부려서 남을 속여 빼앗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한 사람 노아가 온 가족과 함께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지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우뚝 솟은 언덕에서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묻습니다.

"이게 뭡니까?", "방주입니다.", "방주요? 그럼 배 말입니까?", "네, 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아니 무슨 배를 언덕 위에 짓습니까? 이걸 여기서 다 만들고 강까지 옮길 작정이세요?"

"아니요,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판의 홍수를 일으키실 겁니다. 그럼 자동으로 배가 뜨겠지요?"

"이 사람 정신나갔구먼, 이거 짓는 모양을 보니 하루 이틀 걸릴 일도 아닌거 같은데 온 가족이 고생이구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실 겁니다. 선생님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세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방주에 들어오고 싶거든 말씀만 하세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이고 됐네요 이 사람아, 정신차려."

시간이 흘러갑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수십 년이 흐르도록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를 짓는다는 소식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다가도 구경꾼들이 좀 모였다 싶으면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온 땅을 뒤덮을 물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입니다! 온 땅이 물로 뒤덮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방주로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배 값은 받지 않습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오세요!"

그러면 방주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깔깔대며 노아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이렇게 120년 간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노아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격려와 위로 없이 이 일을 감당했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찾기 원하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웃고 깔깔대며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해나가기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가 과연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만 맡겨진 일들을 사무적으로 처리하고 있는지를 잘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짐이요, 고생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만약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어떠한 일을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상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격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동행하며 함께 일하기 원하고 계십니다.

** 언약의 하나님

첫 번째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우리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의미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 다시 한 번 노아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7장 5-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행하였더라.

6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임할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7 ¶ 노아가 홍수의 물들로 인하여 자기 아들들과 자기 아내와 자기와 함께한 자기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정결하지 않은 짐승과 날짐승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 중에서

9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이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10 이레가 지나서 땅 위에 홍수의 물들이 임하니라.

이제 방주는 완성되었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날짐승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의 기는 모든 것들의 그것들의 종류대로 종류마다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왔고, 노아는 그들을 방주 안에서 배치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각각 스스로 두 마리씩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웅장하고 멋진 장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방금 읽은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이 들어간 이후에 일주일을 더 기다려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이 얼마나 완고하고 어리석은지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이 닫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후두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폭포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전에 한국에서 일주일 동안 소나기가 내린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낮은 지역의 마을들은 삼일 만에 다 잠겨버렸다고 합니다. 더더욱 노아의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집들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으로 산으로 오르고 어떤 이들은 방주로 달려옵니다.

"쾅쾅쾅", "이봐요! 방주 문 좀 열어주세요!! 가진 재산을 다 줄 테니 제발 문 한번만 열어주세요."

방주의 사방에서 사람들이 두드려댑니다. "제발 우리 아이만이라도 들여 보내주세요!"

사람들은 절규와 통곡으로 부르짖지만 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끝나고 심판의 날이 그들에게 닥친 것입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며 또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 29:1)는 잠언 말씀과 같이 그들은 120년간의 책망에 목을 굳게 하고 갑작스런 멸망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천둥과 번개와 쏟아지는 폭우 가운데 방주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합니다. 물이 차올라서 방주를 물 위로 들어 올린 것입니다. 40일 밤낮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뒤에도 계속해서 방주는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이제 창세기 8장 13-16절을 보시면

13 ¶ 제육백일년 첫째 달 곧 그 달 첫째 날에 물들이 땅에서 마르매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치우고 보니, 보라, 지면이 말랐더라.

14 둘째 달 곧 그 달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 ¶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아가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시작된 날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째 해 둘째 달 십 칠일이었으니, 노아는 약 1년간을 방주 안에서 지냈습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헌물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이렇게 보존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홍수에서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여러 가지 언약을 주시는데 오늘 저는 그 중에서 창세기 9장 1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내가 모든 육체를 홍수의 물들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앞으로 다시는 온 땅을 덮을 홍수의 심판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서 가장 신실하시며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믿을 만한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노아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의 심판을 온 몸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하나님 정말 심판하시는 거 아니죠?" 하면서 믿음이 연약함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믿음 없음을 동정하시며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표를 주십니다.

창세기 9장 12-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2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 대대로 영구히 맺는 언약의 증표가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노니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표가 되리라.

14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모든 육체의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들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고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약속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므로 말씀만 하시면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를 증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정말요?"하면서 좋아하더니 이제 매일 밤 아빠에게 그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 정말 저 자전거 사주실거죠? 정말이죠?" 아빠는 이미 말을 했고 정말 사줄 마음이 있지만 아들은 믿음이 연약합니다. 아빠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미소를 지으면서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 아들은 더욱 좋아합니다. 이제 아들은 매일매일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는 어느 날 자전거 대리점에서 자전거 사진이 들어가 있는 광고지를 얻어다가 아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빠가 이거 사줄거야." 이제 아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합니다. 더 이상 아빠에게 "정말이죠?"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을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사진을 보면서 정말 자전거를 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제야 아빠가 정말 자전거를 사줄 것이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사주겠다고 말을 했으므로 더 이상 뭔가를 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아빠를 믿는 믿음이 연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주려고 새끼손가락을 걸어주기도 하고 직접 자전거의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이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의 믿음이 없음을 도와주십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모두 언약으로 가득 찬 책이며,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의 피를 언약의 피로써, 언약의 증표로써 제시하셨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녀들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또 믿고 있지만 믿지 않는 것같이 살아갈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함을 도와주시고자 주님이 오시는 때에 표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 노아의 날

주님께서는 특별히 주님이 다시 오시는 표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4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나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

41 두 여자가 방앗간에서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42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시각에 너희 주가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43 그러나 이것을 알라.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경점에 올 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자기 집이 뚫리지 않게 하였으리라.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

우리들은 어쩌면 노아의 날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너무나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긴 언제 온다고?"하면서 지내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직접 말로는 "주님이 오긴 언제 오셔?"라고 말하진 않지만 때로 우리의 깨어있지 못한 삶은 그러한 말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주님께서 오래 참으셨듯이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을 때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일하는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오래 참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추수의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흐려지고 약해질 때에, 우리를 내치거나 무섭게 다루지 않으시고 너무나 은혜롭게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과 시대의 표적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노아가 만났던 하나님, 오래 참으시며, 나와 동행하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약속하시고 믿음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우리들도, 노아의 날들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친밀히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ot/tora/01genesis/01genesis0609_noah_20070404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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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요셉이 만난 하나님(창 50:15-21)

본문 : 창세기 50장 15-21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입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5 ¶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선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두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오늘 저는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날 "불평 없이 사는게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 설교의 또 다른 제목을 잡아보자면, "불평 없이 살아간 요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37장부터 펼쳐지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예수님의 예표인 요셉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수님의 예표를 하나만 뽑으라면 무엇을 뽑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히 구약성경의 기록들이 예수님 자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구약성경들을 보기 전에 창세기만 살펴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주 많은 예수님의 예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여기에 나타난 빛이 예수님의 예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고후 4:6).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 4:4).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값없이 주어진 생명나무, 아담과 이브를 대신해 피 흘려 죽은 어린양, 그리고 사람의 의를 예표하는 무화과 나뭇잎 대신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옷 등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 특별히 사람들의 인생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 중 이 요셉이라는 인물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으며, 목자였고,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에게 보냄을 받았으나 형제들에게 거절당하여 팔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유다였고, 예수님을 판 제자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같이 옷 벗김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보디발의 집에서 모든 것을 맡은 종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거짓 고소를 당하신 것과 같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요셉은 털 깎는 자들 앞의 어린양처럼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두 강도와 못 박힌 것처럼, 요셉은 두 명의 죄인과 함께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옆의 강도들 중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듯이 요셉과 함께 갇힌 한 죄수는 용서를 받고 한 죄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왕이 되실 것처럼 요셉은 파라오의 부름을 입어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것같이, 파라오는 요셉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으로 예표되는 교회를 신부로 삼으신 것같이 요셉은 이방인 아내를 얻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땅에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곡식과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제 요셉이 두 번째 형제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받아들여졌고, 기근과 궁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예수님의 앞길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펼쳐진 것을 볼 때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히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 요셉의 어린 시절

요셉은 위로 10명의 배다른 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막내인 베냐민만이 친형제 가운데 친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원래부터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이었기 때문에, 또한 라헬이 너무나 간절히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야곱이 노년에 얻은 손자와 같은 아주 귀여운 아들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큰사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요셉에게 더 많은 사랑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특별히 채색 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었습니다. 당시 염색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옷감에 색을 하려하게 집어넣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37장 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화목하게 말도 하지 못하였더라"(창 37:4).

가뜩이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요셉이 너무나 건방진 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이라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먼 훗날 요셉이 어떻게 높아지리라는 것을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5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더라.

6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이 꿈을 들으소서.

7 보소서, 우리가 들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보소서, 내 단은 일어나 똑바로 서고, 보소서, 형들의 단은 둘러서서 내 단에게 경의를 표하였나이다, 하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를 통치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지배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라.

9 ¶ 그가 또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가 또 꿈을 꾼즉, 보소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경의를 표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을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고하매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이 꿈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하니라.

11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하였더라.

 

이러한 꿈, 이러한 비전,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앞으로 요셉이 당할 고난과 역경을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요셉에게 이러한 통치자의 위치를 주시고자 반드시 필요한 고난과 시련을 먼저 주셔서 요셉이 그 위치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다루시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꿈을 주셨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매"(계 11:15).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 5:10).

 

 

** 노예로 팔려간 요셉

이러한 꿈과 비전, 소망과 목적이 요셉에게 주어진 이후로 요셉의 인생은 이러한 영광을 위한 훈련 코스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형들이 양을 잘 돌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기다리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런즉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 어떤 구덩이에 던지고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리라."

 

그러자 장남이었던 르우벤이 그래도 우리의 형제이니 직접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를 파서 던져놓고 굶겨 죽이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르우벤이 나중에 꺼내서 구해줄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르우벤의 계획을 모르는 유다가 요셉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숨긴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오라,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살붙이니라." 이렇게 되어 요셉은 팔리고 팔려서 이집트의 노예가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호위대장이었던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요셉을 발견하지 못한 르우벤과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직접 한번 요셉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요셉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억울함, 분노, 슬픔, 낙담, 자포자기, 불평과 같은 아주 복합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요셉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집에서 귀하게 사랑 받던 아들이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예로 팔려서 부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터뜨린다면 아주 정당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어릴 때 어머니를 데려가시더니 이젠 아버지와 가족들을 다 빼앗아 가시다니요! 하나님 도대체 제가 잘못한 게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들에게 말했더니 미움만 받고 이젠 낯선 땅에 팔려 와서 이렇게 모욕을 당하며 고생하다니요! 차라리 죽는게 낫겠습니다!"하며 따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요셉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셉은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통제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영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9장 2-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더라.

3 그의 주인이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고 또 주께서 그가 행한 모든 일을 그의 손에서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어 그를 섬기매 그가 그를 자기 집을 감독하는 자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의 손에 맡기니

5 그가 그를 자기 집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감독하는 자로 삼은 뒤부터 주께서 요셉으로 인하여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므로 주의 복이 그의 집과 들에 있던 그의 모든 소유에 임하니라.

6 그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자기가 먹는 빵 외에는 자기 소유 중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며 잘생겼더라.

요셉은 종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3절에서는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말씀을 몰랐겠지만 요셉은 이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일한 것이 아니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과 동행하여 주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마다 넘치게 복을 주셨습니다. 어리고 가장 낮은 위치의 종에 불과했던 요셉은 어느덧 자기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 동안의 고통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 코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의 휴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을 한 단계 더 높이 이끌고자 하십니다.

 

 

** 감옥에 갇힌 요셉

17세에 노예로 팔려와 현재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아버지 야곱보다는 아름다웠던 어머니 라헬을 더 닮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매우 잘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 청년 요셉에게 너무나 달콤한 죄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다같이 7-9절을 보시겠습니다.

7 ¶ 이 일들 뒤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말하기를, 나와 함께 눕자, 하였으나

8 그가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 손에 맡겼은즉

9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자가 없으며 주인이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니라.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고 결코 자신의 죄에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하는 말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죄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11-20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이럴 즈음에 요셉이 자기 일을 보러 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안에 그 집 사람들이 하나도 없더라.

12 그녀가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함께 눕자, 하니 그가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가매

13 그가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아감을 그녀가 보고

14 자기 집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함께 누우려고 내게로 들어오기에 내가 큰 소리로 외쳤더니

15 내가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을 그가 듣고는 자기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며

16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옷을 자기 곁에 두니라.

17 그녀가 이 말들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오기에

18 내가 소리를 높여 외쳤더니 그가 자기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하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런 식으로 행하였다, 하므로 그 말들을 들을 때에 진노하니라.

20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감옥에 넣었는데 이곳은 왕의 죄수들이 묶인 곳이더라. 그가 거기서 감옥에 있었더라.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범죄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한번 요셉은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합당하고 적절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차라리 내가 범죄하였더라면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어찌 하나님을 따르고도 이렇게 비참해 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인도하고 계시긴 합니까? 하나님 저와 동행하고 계시는거 맞습니까?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악하게 대하십니까?" 요셉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맡아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죄수가 요셉과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명은 파라오의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요, 또 한 명은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잔 맡은 사람은 포도나무 가지 세 개가 있고 포도송이가 열리기에 거기서 포도들을 따고 포도를 짜서 파라오의 손에 잔을 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빵 맡은 사람은 온갖 구운 음식을 담은 빵 바구니 세 개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새들이 와서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꿈을 해석하여 주었는데, 요셉의 해석대로, 파라오의 잔을 맡은 사람은 삼일 뒤에 직책이 회복되었고, 빵을 굽는 자는 삼일 뒤에 그를 나무 위에 매달아 공중의 새들이 먹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잔 맡은 자에게 직책이 회복될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잔 맡은 자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 요셉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슬프게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정말 억울하게 나의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렸지요. 내가 얼마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형들은 날 구덩이에 던지더니 옷을 다 벗기고는 지나가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어요. 원수도 아닌 형들에게 팔린 그 기분을 아시나요? 그 배신감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또 노예가 되고 나서는 정말 모든 일을 남이 보던 안 보던 성실하게 일했어요. 노예가 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내가 노예가 된 게 너무나 억울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요. 그래서 결국엔 최고 관리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 못된 여자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지 뭡니까...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셨나 봐요."

 

요셉은 충분히 불평으로 가득한 사람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망을 가지고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었습니다. 잘생기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데 갑자기 야위고 흉한 일곱 마리 암소가 나타나서 살진 암소들을 다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꿈이었습니다. 파라오는 놀라서 잠이 깼다가 다시 잠이 듭니다. 한 나무줄기가 있는데 통통하고 좋은 이삭 일곱 개가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늘고 동풍에 바싹 말라버린 다른 이삭 일곱 개가 솟아 나오더니 통통하고 꽉 찬 이삭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파라오가 두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고 나서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와 점술가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때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가 요셉을 기억하고 파라오에게 요셉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41장 25-4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5 ¶ 요셉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파라오의 꿈은 하나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고자 하는 일을 파라오에게 보이셨나이다.

26 좋은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요, 또 좋은 이삭 일곱 개도 일곱 해니 이 꿈은 하나이니이다.

27 그것들을 따라 올라온 야위고 못생긴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요, 또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이삭 일곱 개도 기근이 드는 일곱 해니

28 내가 파라오에게 아뢰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고자 하는 일을 파라오에게 보이셨나이다, 함이 바로 이것이니이다.

29 보소서, 이집트 온 땅에 두루 일곱 해 큰 풍년이 들겠고

30 그 뒤에 일곱 해 기근이 들므로 이집트 땅에서 그 모든 풍성함을 잊게 되고 그 기근이 이 땅을 소멸시킬 것이며

31 또 뒤따르는 그 기근이 매우 심하므로 그것으로 인해 이 땅에서 그 풍성함을 알지 못하게 되리이다.

32 파라오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굳게 정하셨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서 곧 그 일을 행하실 터이니

33 그러므로 이제 파라오께서는 사려 깊고 지혜로운 사람을 골라 그가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소서.

34 파라오께서는 또 이 일을 행하시되 곧 이 땅에 직무 수행자들을 두시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이집트 땅의 오분의 일을 취하시고

35 그들이 다가올 그 좋은 해 동안에 모든 식량을 거두고 그 곡식을 파라오의 손 밑에 쌓아 두어 도시들 안에 식량을 간직하게 하소서.

36 그 식량을 이 땅을 위해 저장하여 이집트 땅에 임할 일곱 해 기근을 대비하시면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라.

37 ¶ 그 일이 파라오의 눈과 그의 모든 신하들의 눈에 좋게 보이므로

38 파라오가 자기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같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을 우리가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여 주셨으니 너와 같이 사려 깊고 지혜로운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릴지니라. 내 온 백성이 네 말에 따라 치리를 받으리니 나는 왕좌에서만 너보다 높으리라, 하니라.

41 파라오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자, 내가 너를 세워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리게 하노라, 하며

42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주고 그에게 고운 아마 옷을 입히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43 자기가 소유한 둘째 병거에 그를 타게 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무릎을 꿇고 절하라, 하더라. 파라오가 요셉을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았더라.

44 파라오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파라오니라. 이집트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손발을 들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또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며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아내로 주니라. 요셉이 나가서 이집트 온 땅을 돌아보니라.

이집트 이름 사브낫바네아의 의미는 바로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 대단한 출세요 인생역전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꿈으로 약속하신 요셉의 본 위치였고, 그 전에 있었던 많은 고난과 역경은 다만 이 위치에서 올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 코스였을 뿐인 것입니다.

 

 

** 가족들을 만난 요셉

이제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요셉에게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와 주변의 온 땅에 7년 간 큰 풍년을 주셨고 또 그 이후 7년간의 큰 기근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집트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땅의 다른 많은 민족들조차 곡식이 없으므로 곡식을 많이 저장해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오게 됩니다. 저기 멀리 있었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 역시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오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과 형제들이 만나는 이야기는 자세히 한다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집에 가시면 꼭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이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임을 밝히고 아버지의 온 가족을 이집트로 불러들입니다.

 

다 같이 창세기 45장을 보시겠습니다. 1-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때에 요셉이 자기 옆에 서 있던 모든 자들 앞에서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를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게 하니라.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릴 때에 그와 함께 서 있던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2 그가 크게 우니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의 집이 듣더라.

3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 하니 그의 형제들이 그 앞에서 불안하여 능히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매

4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하니 그들이 가까이 가매 그가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동생 요셉이니 곧 당신들이 이집트에 판 자니이다.

5 그런즉 이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당신들 스스로에게 노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또 이 땅에 이 년 동안 기근이 있었으나 아직 오 년이 남아 있어 그때에 밭을 갈지도 못하고 수확하지도 못하리이다.

7 하나님께서 큰 구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을 위해 후손을 땅에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이제 나를 여기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분께서 나를 파라오에게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그의 온 집의 주(主)가 되게 하셨으며 또 이집트 온 땅의 치리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그분께 아뢰되,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이같이 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온 이집트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하지 말고 내게로 내려오소서.

10 아버지는 고센 땅에 거하실 것이며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식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 떼와 소 떼와 모든 소유는 나와 가까이 있으리이다.

11 아직도 오 년 동안 기근이 있으리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궁핍을 당할까 염려하나이다, 하소서.

하나님을 뜻을 완전히 이해한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넘긴 형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지도 않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요셉은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의 눈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았고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사한 요셉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본문인 50장 15절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제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온 지 17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인하여 요셉이 돌변할 것이라 걱정하고 있습니다.

 

15-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5 ¶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선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두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를 괴롭게 만들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자포자기하며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요셉과 같이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우리를 모두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만드셨고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역경은 우리를 낮추신 만큼, 아니 낮추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자 허락하시는 영광의 훈련 코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요셉과 같이 불평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이 늘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넘치는 감사 속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주시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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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삼손이 만난 하나님(삿 13:5)

본문 : 사사기 13장 5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사기 13장입니다. 사사기 13장 5절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기 시작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저는 “삼손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삼손은

우리는 이번 주 주일설교 시간에 "자기 눈에 옳게 보이는 길로 가지 말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들었고, 특별히 사사기의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아갔던 시대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사사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암울한 책 중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전체적으로 타락하였는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또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하고 바로잡으라고 재판관으로서 세우신 믿음의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함부로 걸어간 기록들을 보게됩니다. 이 재판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사람을 뽑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삼손"을 뽑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삼손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아니 성경 전체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그의 탄생과 죽음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입니다. 많은 재판관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시점부터 기록되고 있는 반면, 삼손은 어떻게 그의 부모님이 그를 낳게 되었는지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재판관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되지 않고 다만 몇 년 동안을 재판하였는지만 기록되고 있는 반면, 삼손은 어떻게 죽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손은 총 21장으로 구성된 사사기 가운데 무려 4장을 차지할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재판관들은 다만 한 두 구절의 언급밖에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 삼손이라는 인물을 조명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삼손을 통하여 참으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자기 스스로의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간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목은 "삼손이 만난 하나님"인데, 만약 누군가가 삼손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삼손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긴 있나요?" 매우 애매한 것 같지만, 성경의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삼손을 분명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삼손이 자신이 살았을 때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수보다 그가 죽으면서 죽인 원수들의 수가 더 많다는 기록을 읽을 때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정복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이처럼 삼손은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삼손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삼손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만큼 하나님을 더 참되게 따르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 삼손의 탄생

먼저 삼손의 탄생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삼손의 탄생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 앞에서 범죄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십 년 동안 압제를 받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단 지파 마노아를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셨고 우리가 읽은 사사기 13장 5절의 말씀과 같이 그 아이가 어떠한 사람이 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그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기 시작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흔히들 모태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삼손으로 보자면 모태신앙 중의 모태신앙 아니겠습니까? 삼손은 단순히 모태에서 신앙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사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삼손의 탄생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예비하심 가운데 이루어졌듯이 우리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우연히 저절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과 계획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삼손의 탄생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난 것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삼손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속한 나사르 사람이 된 것같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께 속한 나사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를 향해 놀라운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실 때에는 선한 행위를 위하여, 곧 홀로 선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하도록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입니다.

삼손의 아버지였던 마노아라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처음에 주의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만 나타나서 삼손이 태어날 것과 그가 나사르 사람으로서 어떤 것들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을 때, 마노아는 하나님께서 그 천사가 다시 한번 더 나타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확실히 듣기 원하는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주의 천사가 하나님인지 모른채 잘못된 대상에게 경배하려 하였지만 이 시대의 영적 수준이 낮은 것을 감안해서 본다면 이 마노아라는 사람은 너무나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마노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잘 주의하여 삼손을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 나사르 사람

이제 잠시 나사르 사람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마 "나실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나사르 사람에 대한 명령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다같이 민수기 6장을 보시겠습니다. 민수기 6장 1절에서 8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자기를 구별하여 나사르 사람의 서원을 하고 자기를 구별하여 주께 드리거든

3 그는 포도즙과 독주로부터 자기를 구별하고 포도즙의 식초나 독주의 식초를 마시지 말며 어떤 포도즙도 마시지 말고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라.

4 그는 자기를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씨에서부터 껍질에 이르기까지 먹지 말며

5 자기를 구별하기 위하여 서원하는 모든 날 동안 자기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지니라.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날들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할 것이요, 자기 머리털을 자라게 할 것이며

6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에는 어떤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 것이요,

7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들로 인하여 자기를 부정한 자로 만들지 말지니 이는 그의 하나님의 거룩히 구분하심이 그의 머리 위에 있기 때문이라.

8 자기를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주께 거룩한 자니라.

이 여덟 구절에서 나타난 나사르 사람의 특징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사르 사람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은 씨에서부터 껍질에 이르기까지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머리털을 자르지 말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어떤 시체에도, 심지어 자기 가족들의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포도, 두 번째 머리털, 세 번째 시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또 특징을 찾는다면 이 나사르 사람은 남자든지 여자든지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한번 구분했다고 해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5절에 나온 것처럼 자신을 구별하여 주께 드리는 날들의 기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8장에 나타난 나사르 사람에 관한 율법과 삼손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민수기에 나타난 나사르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나사르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하고 그 기간을 정했던 반면, 삼손은 날 때부터, 아니 이미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나사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다른 나사르 사람들은 큰 결심을 하고 자신을 구별했다면, 삼손을 날 때부터 구별된 원조 나사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이러한 삼손의 인생이 너무나 불행하고 불쌍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다 계획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선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삼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삼손에게 가장 좋고 선하며 삼손이 가장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임을 고백할 것입니다.

** 블레셋을 칠 기회

이제 사사기 14장에서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할 때가 된 삼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삼손이 딤낫에 내려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고

2 올라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고하여 이르되, 내가 딤낫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가운데 한 여자를 보았사온즉 이제 나를 위하여 그녀를 데려와 아내로 주소서, 하니

3 그때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을 딸들 중에나 혹은 내 온 백성 중에 여자가 없어서 네가 가서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아내를 취하여 하느냐? 하매 삼손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그 여자가 나를 매우 기쁘게 하니 나를 위하여 그녀를 데려오소서, 하였더라.

4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알지 못하였고 또 그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블레셋 사람들을 칠 기회를 찾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더라.

주님을 위하여 구별되어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할 원조 나사르인, 모태 나사르인인 삼손은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4절은 매우 주목할 만한데, 어찌보면 오해하기가 매우 쉬운 성경구절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삼손의 이러한 행동이 주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억지로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도록 시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고 또한 삼손을 통하여 그렇게 하기로 예비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삼손이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삼손의 마음에는 하나님도 안중에 없고,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도 안중에 없고, 원수 블레셋에 대항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러한 삼손을 이용하여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 29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일으켜 블레셋을 치기로 계획하셨으나, 삼손은 자기를 위하여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주관하셔서 삼손이 블레셋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의지와 원함을 하나님께 드려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의 의지와 원함을 고집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든 나를 그분의 예비하신 길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협조적인 삼손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삼손 자신에게는 어떠한 기쁨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 포도원으로 간 삼손

이제 14장 5절,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5 그때에 삼손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딤낫에 내려가 딤낫의 포도원에 이른즉, 보라, 젋은 사자가 그를 향하여 소리 지르더니

6 주의 영께서 그에게 강하게 임하시매 그가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염소 새끼를 찢는 것처럼 그 사자를 찢었으나 자기가 행한 일을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삼손은 드디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설득했다기 보다는 억지를 부려서 부모님을 이겼을 것입니다. 삼손은 부모님을 모시고 자기가 마음에 드는 그 여인이 있는 딤낫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삼손은 혼자서 딤낫의 포도원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나사르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일 세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포도나무에서 난 어떤 것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사사기에서는 삼손이 왜 딤낫의 포도원에 이르렀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젊은 사자가 나타난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아직 어렸을 때에는 독실한 부모님의 주관 하에 포도를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부모님을 이기고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된 이 삼손은 어쩌면 이제는 또한 자기를 위하여 포도를 먹기 위해 포도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경고로서 젊은 사자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신 것은 삼손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삼손이 잘못 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삼손이 나사르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구별된 자임을 기억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이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포도열매를 먹으려고 시도한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삼손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새끼 염소를 찢듯이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 삼손이 얼마나 멋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근육과 상관없이 주의 영으로 그에게 임하셔서 큰 힘을 발휘하게 해주셨습니다. 삼손은 이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위하여 구별된 원조 나사르 사람 삼손은 여전히 나를 위하여 자기에게 옳게 보이는 길, 자기 스스로 행복하게 보이는 길로 열심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 시체와 꿀

이제 8절과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 얼마 뒤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되돌아 가다가 돌이켜서 그 사자의 사체를 본즉, 보라, 사자의 사체에 벌떼와 꿀이 있으므로

9 그가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가면서 먹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주어 그들이 먹게 하였으나 자기가 그 꿀을 사자의 사체에서 취하였다고 그들에게 고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여기서 나사르 사람의 금지사항 또 한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죽은 시체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자매의 시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까이 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별되어 있으라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에게 경고로 주어졌던 그 사자를 보면서도, 오히려 담대하게 사자의 시체로 다가가서 꿀을 가지고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몰래 먹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님에게도 줄만큼 이 삼손은 아주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는 제멋대로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포도원에 갔던 일이나, 사자의 시체를 만진 일에 대해서 오히려 수수께끼로 장난을 칠 만큼 삼손은 아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삼손은 신혼부부가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풍습에 따라서 친구들 서른 명을 불러서 일주일 간 잔치를 벌였습니다. 삼손은 그의 친구들에게 얇은 옷과 겉옷 서른 벌씩을 내기로 걸고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14절에 보시면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함부로 행한 일들에 대해서 농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친구들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자 삼손의 아내는 삼손 앞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기쁘게 잔치를 해야할 때 계속해서 울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너무나 괴로웠던 삼손은 아내에게 답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친구들은 수수께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18절에 "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그 도시의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하므로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을 갈지 아니하였다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화가 난 삼손은 다른 동네로 가서 서른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그 옷을 빼앗아다가 친구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을 치는 삼손에게 임하여 힘을 더해주셨고, 블레셋 사람들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불통인 삼손을 어떻게든 인도하셔서 원래 계획하셨던 대로 이끌고 계시지만 삼손의 관점은 여전히 자기를 위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도 했지만 결코 삼손 자신에게는 아무런 행복도 유익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해야 할 잔치에서 삼손은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자신이 범죄한 것을 가지고 수수께끼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아내는 잔치하는 내내 그의 앞에서 울었고, 삼손은 괴로웠습니다. 친구들이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하는 것을 즐거워할 작정이었던 삼손의 기대는 깨어지고 말았고 화가 난 삼손은 원래 살던 자기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자기 딸을 버렸다고 생각한 삼손의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지만, 삼손은 여전히 스스로 옳게 보이는 길, 스스로 좋게 보이는 길로 고집스럽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 라맛레히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서 삼손은 다시 아내를 만나려고 딤낫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고, 장인은 아내의 동생과 결혼하라고 말하며 삼손을 달래었습니다. 삼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삼손은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서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밭을 다 태워버렸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에게 그 원인을 제공한 장인어른과 삼손의 아내를 불태워 죽이게 됩니다. 삼손은 또 그 일로 인해서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잡히는 대로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유다로 내려가게 됩니다.

스스로 행복하기 위하여 참된 행복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 나사르 사람 삼손을 한번 보십시오. 그의 인생을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너무나 비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로 내려간 삼손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를 모아 올라왔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삼손을 밧줄로 묶은 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이때 주의 영이 임하시고 삼손은 자신을 결박한 밧줄을 불탄 실과 같이 툭툭 끊어냅니다. 삼손은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그 자리에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삼손을 통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셨던 대로 삼손을 통하여 자신의 일들을 이루어가고 계시지만, 삼손은 너무나 비참한 가운데 자신의 분노를 내뿜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께 선택된 이 삼손, 너무나 행복할 수 있었던 그의 인생은 그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가엾게 망쳐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삼손은 목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삼손의 입에서 주님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다같이 15장 18절과 19절을 보시겠습니다.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주를 부르며 이르되, 주께서 주의 종의 손에 이 큰 구출을 주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손에 떨어져야 하리이까? 하니라.

19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턱의 우묵한 곳을 쪼개시니 거기서 물이 나오므로 삼손이 그 물을 마시매 그의 정신이 돌아와 그가 회복되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엔학고레라 하였으니 그것이 이 날까지 레히에 있더라.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손은 너무나 못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거 맘대로 다하더니 이제 와서 자기가 죽게 생겼으니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 내가 너 진짜 멋있게 사용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죽어라."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삼손에게 물을 주셨고 삼손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인내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주님 더 많이 알아가기 원합니다.

** 삼손의 죽음

이제 정신을 좀 차릴 줄 알았던 삼손은 아직도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6장 4절에 보시면 "그 뒤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이름의 여인을 사랑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해야할 나사르 사람이 계속해서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첫 번째로 사랑해야할 삼손은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영주들은 이 들릴라를 매수하여서 어떻게 하면 삼손의 큰 힘을 제거하고 그를 죽일 수 있을지 알아내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6절에 보시면 들릴라가 이렇게 묻습니다. "원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내게 고하고 또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하여 괴롭게 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라." 아예 대놓고 삼손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 삼손의 마음은 너무나 어둡고 어리석기만 합니다. 자신을 도살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도 너무나 즐겁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어리석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는 사인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어리석게 자기 뜻을 고집하며 걸어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삼손은 거짓말로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말린 적이 없는 푸른 버드나무 가지 일곱 개로 나를 결박하면 된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줄로 나를 단단히 결박하면 된다.", "짜서 만든 천으로 내 머리털 일곱 타래를 엮으면 된다." 삼손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잘못된 것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삼손의 눈은 완전히 가려졌으며 계속해서 어리석은 길로 향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어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같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자기의 말들로 그를 짓누르매 삼손의 혼이 괴롭게 되어 죽을 지경이 되었더라.

17 이에 삼손이 자기의 온 마음을 털어놓고 그녀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나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었노라. 만일 내 머리를 밀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내가 약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같게 되리라, 하매

삼손의 힘은 삼손이 말한 것처럼 머리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삼손과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로 하나님께서 삼손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삼손은 자기의 온 마음을 이방 여인에게 주어버렸고, 스스로 나사르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삼손은 머리털을 잃었고, 주님의 임재를 잃었고, 눈을 잃었고 원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21절에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그를 가자로 데리고 내려가 놋 족쇄로 결박하니 그가 감옥 집에서 맷돌을 돌리니라."

참으로 영광스럽고 행복할 수 있었던 삼손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 비참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기를 배신하였고 이제 삼손은 그야말로 모두에게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삼손은 이때서야 참으로 하나님께 돌이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었노라. 그러나 나는 참되게 나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쳐본 적이 없었노라. 하나님은 나에게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하셨으나 나는 블레셋 여인들을 사랑함으로 그분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도다."

그러나 자신의 선물들과 부르심에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삼손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참을 만큼 참았다. 너도 인정하지? 넌 정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쓰레기같은 존재야!" 우리가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은 나사르 사람이 해야하는 세 가지를 전부 어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격이 없는 우리들도 여전히 사랑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시고 항상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제 삼손을 붙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큰 축제 열었습니다. 자신들의 신 다곤이 자신들의 원수인 삼손을 드디어 넘겨주셨다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손을 그들 가운데 끌고 나와 모두의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2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그들이 이르되, 삼손을 불러 우리를 위해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감옥 집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기둥들 사이에 삼손을 세우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내가 이 집을 지탱하는 기둥들을 더듬어 찾아서 그것들에게 기대도록 허락하라, 하니라.

27 이제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며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영주들도 거기 있고 지붕에도 삼천 명가량의 남녀가 있더니 그들이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주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그 집을 지탱하며 받쳐 주는 두 개의 중간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고

30 이르되,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 하며 힘을 다하며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던 영주들과 온 백성을 덮으니 이처럼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많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삼손의 생애에 있어서 아마도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딱 들어맞는 기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손은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서야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삼손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 정리

우리는 오늘 이번 주일설교의 흐름과 맞추어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길로 걸어간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행복해 지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는 것을 다 해보았지만 결국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향한 자신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삼손은 고집스럽게 자기 뜻대로 걸어갔고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삼손이 만약 스스로 행복하려는 길 말고, 스스로 좋게 보이는 길 말고,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에 원하시는 길을 찾고 걸어갔다면 그의 인생은 사사기에 나오는 어떠한 재판관보다도 영광스럽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선택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관점과 우리의 고집을 내려놓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분의 뜻을 물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제일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일을 시킬 것 같다는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온 우주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선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얼마나 나에게 좋은 분인지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주님 나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더 많이 보여주셔서 내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하나님의 뜻은 참되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뜻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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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요나가 만난 하나님(욘 4:2)

본문 : 요나서 4장 2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서 4장입니다. 설교의 내용은 요나서 전체가 되겠지만 우선은 요나서 4장 2절 한 구절만 읽겠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아직 내 나라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오늘 저는 "요나가 만난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그리고 교제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 요나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께 까불고 대들었던 대언자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땅의 심장 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요나보다 위대한 이가 여기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요나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구약의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요나가 들어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제가 요나서에서 가장 재밌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 요나는 뭔가 건방진 태도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요나에게 이해시키고 한 마음이 되길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소 거칠고 과격한 사람이었지만 또 한 면에서는 아주 꾸밈이 없고 진솔 담백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는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서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 니느웨로 가라

먼저 요나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는 나중에 요나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3일 동안 걸어야 다 돌 수 있을 만큼 큰 도시였고,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만 해도 십 이만 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사악함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시고 요나를 통하여 경고를 주셔서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3절을 보시면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일어나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요나는 일어나서 욥바로 가더니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려고 배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시 성경 뒤에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뒤에 부록에 보시면 지도 12번 분단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해(지중해)라고 된 곳 오른편에 욥바의 위치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도 13번을 보면 주황색으로 아시리아 글자 위에 니느웨를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과 가까이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갈 때는 굳이 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라는 니느웨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떠나려고 욥바로 가서 배를 탄 것입니다.

 

 

제가 지도에 다시스가 없길래 이곳저곳 찾아보았는데, e-sword라는 공짜 성경검색 프로그램에서 몇 가지 설명을 찾았습니다. 현재의 지명과 다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제미에슨, 파우셋과 브라운 주석(Jamieson, Fausset and Brown Commentary), 아담 클라크 주석(Adam Clarke's Commentary on the Bible), 등등(TSK) 몇 가지 설명을 찾아보니 지브롤터 해협 옆에 있는 스페인의 한 도시 Tartessus가 아니면, 바울이 태어났던 길리기아의 다소(Tarsus)일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니느웨로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 앉았던 것도 아니고 아주 적극적으로 배를 타고 반대로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요나서 4장을 보면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요나는 당시에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다스린 나라였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큰 도시였던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해서 용서를 받느니 차라리 멸망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바꿔서라도 니느웨로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열고 음성을 내시거나 주의 천사로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역을 하기 원하십니다.

 

 

 

** 오 잠자는 자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절하고 반대로 나아가는 요나를 돌이키시기 위해 바다에 큰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말씀에 불복종한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설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큰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종교적인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현실적인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온 배가 난리법석입니다. 이때 유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있었다면 유서를 써서 유리병에 담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아는 요나는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는 배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눈을 꾹 감고 잠을 잡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 저는 죽어도 니느웨 못 갑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우리 민족의 원수들인데 어떻게 회개해서 살으라고 합니까? 다 멸망하게 내버려두세요."

 

 

선장이 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또 무거운 짐이 있으면 바다에 던지려고 배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가 요나를 발견합니다. "오 잠자는 자여, 어찌 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면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리라." 아마 선장은 속으로 "이게 미쳤나, 이런 상황에 잠이 오냐? 넌 믿는 신 없어? 좀 살려달라고 불러봐."하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7절에 보면 이제 선원들이 모여서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많은 경우 비나 눈이나 폭풍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가 들거나 배탈이 나면 춥게 다니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이지 죄를 짓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무조건 우리의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이렇게 요나와 같이 자신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과 성령님의 음성을 통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 문제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는데도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아주 분명하게 요나를 지적하십니다.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고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집니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 나라는 어디냐? 너는 어느 나라 백성이냐?"

9절에서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으로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주 곧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노라.

 

 

 

** 고래를 예비하신 하나님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대로 배를 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우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원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마저 사용하셔서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요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요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요나와 한 마음을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큼직한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고기를 고래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류인 물고기냐, 포유류인 고래냐를 가지고 따지고 고래상어나 청상아리다 많은 추측들을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물고기가 무슨 종류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제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폭풍우를 예비하셨고 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아주 다양한 것들을 예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도 하나님의 자상한 돌보심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많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2년이라는 세월이 아까워서 군대를 어떻게든 빠지려고 하는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가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학력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군대를 뺄 수 있도록 예비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미리 다 계획한 거 아니냐고 물을 정도로 절묘하게 공익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제가 공익을 끝내고 나서부터는 학력으로 조건이 안 되던 사람들도 신체만 건강하면 무조건 현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에서 예비해 주신 것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저를 더 만나주시고 저를 얼마나 섬세하게 이끄시는지 알려주시려고 많은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방만 빌려서 쓰는데도 밥도 잘 주시고 친절히 대해주시는 좋은 주인아주머니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또 월급을 안주는 사장님을 예비해주셨고 그 가운데 모든 월급을 무사히 다 받도록 해주셨습니다. 또 이제는 새로운 좋은 사장님을 주셔서 아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며 예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처럼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다가 갑자기 일이 생기면 급하기 일을 처리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하고 계십니다.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의 이러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을 돌이키고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10절에 보시면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 다시 니느웨로

이제 3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이제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

이제 드디어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최소한 3일을 돌아야 다 다닐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4절에 나온 것처럼 하루 동안만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아주 제멋대로인 대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니느웨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은데, 요나는 하루만 대충 돌면서 저주를 퍼붓고는 나온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이키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 그 더러운 죄 때문에 이제 사십 일 뒤에는 다 망해 버릴거니까 그리들 알어!", "이 저주받은 것들아, 니들 얼마나 가증한 죄를 지었는지 이제 사십 일 뒤에는 그냥 하늘에 불이 떨어지든 땅이 뒤집히든 다 죽을거니까 그리들 알아!" 아마 이런 저주의 뉘앙스로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나가 하루 만 선포하고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아시리아 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아시리아의 왕은 짐승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의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이킨 것을 보시고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실 뿐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셔서 누구든지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이제 겉으로 보자면 요나의 사역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고, 바울과 사도들은 수십 년을 복음을 전하러 다녔어도 이렇게 요나처럼 수많은 사람을 한 번에 회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요나는 하루 만에 어린이만 십이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를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체다 회개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 그러나 요나가 그 일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하여

2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아직 내 나라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이런 멋진 고백을 감사의 눈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면서 하는 이 고집불통 요나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에게 조차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친절은 우리가 잘나고 착하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럽고 가증한 죄악 가운데 묶여있을 때에 조차, 우리가 거칠고 교만하며 어리석을 때에 조차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는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3절에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간청하오니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보면 볼수록 아주 웃기는 대언자입니다. "하나님 거봐요. 내가 이 원수 같은 놈들 그냥 멸망시킬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해 줄지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우리 민족이 죄를 지었어도 이렇게 잔인하고 더러운 놈들을 용서해 주다니요. 저는 분해서 못 살겠습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일제시대에 자신의 부모와 가족을 전부 일본에 잃은 한 사람에게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이 한 면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4절에 보면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주님이라면 "아우 진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가 시키면 하는거지, 진짜 말 많네. 죽고 싶어? 그럼 니 소원대로 그냥 죽어버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요나의 마음을 얻고 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요나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멸망하는 장면을 만끽하기 위하여 도시의 동쪽 편에 앉아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사십 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거짓말하지 마옵소서. 이제 삼십 구일 남았나이다. 삼십 구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소서. 저 원수들을 제발 좀 멸망시키소서."

아주 건방지지만 그러나 진솔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6절에

주 하나님께서 박을 예비하시고 그것이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것이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려 하심이었더라. 이에 요나가 그 박을 심히 기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 볕에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예비해 주셨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우리 하나님은 정말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야 니가 뭘 잘했다고 자꾸 고집이야, 아 이거 진짜 웃긴 녀석이네."하면서 숲 속에서 곰이나 사자를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요나는 그늘이 생겨서 너무 좋아하면서 계속 도시를 지켜봤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삼십 팔일 남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루소서. 우리 민족의 원수를 나의 눈앞에서 멸망케 하옵소서. 믿슙니다. 아멘!"

 

 

7절에 보면 하나님께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르러서 이제 막 시원한 감이 없어지고 해가 막 뜨려할 때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해가 뜨고 그늘이 필요하기 시작한데 때마침 넝쿨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8절에 드디어 해가 뜹니다. 해가 뜰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또 뜨거운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요나 한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대한 폭풍에서부터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교제하시며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제 요나는 기진맥진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은 줄줄 흐르고 뜨거운 동풍에 숨숨 팍팍 막히고 아주 짜증이 머리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요나는 발라당 누워서 "주님 죽여주세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내게 더 낫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9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요나가 응수합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대답으로 요나서는 끝마치고 있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0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하지도 아니하고 자라게 하지도 아니한 박 넝쿨 곧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불쌍히 여겼거든

11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이 넘고 또 많은 가축이 있는 저 큰 도시 니느웨를 내가 아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구약성경이 다만 이스라엘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민족설화라면 이런 말은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나서 자체가 존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을 기록해주고 계십니다.

 

 

 

** 마무리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며, 사람과 함께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뭐가 대단하길래 하나님께서 이토록 공을 들여가며 상대해 주십니까? 우주 저 멀리서 바라볼 때 한낮 점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이 뭐가 이쁘고 뭐가 잘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 주십니까?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송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퍼부어 주고 계십니다. 요나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우를 예비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시고,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작은 벌레를 예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요나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설득하시고 또 알려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만물의 통치자이심에도 불과하고, 먼지와 같고 티끌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땡깡을 다 부리고 고집을 부리더라도 이해가 안되면 따지고 죽겠다고 드러눕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시며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고 용납하면서까지 우리와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진실한 친구보다 뛰어나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고 주님 앞에 합당치 못한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지만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알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소원이자 삶의 목적입니다.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섬세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더 많이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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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창 22:15-18)

본문 : 창세기 22장 15-18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간증과 함께 전했던 말씀인데, 먼저 저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되었고 또 한국에 갈보리 형제자매님들도 인상 깊게 들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와서도 이 말씀을 나누고 싶었었는데 오늘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아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15 ¶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 곧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즉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서론

저는 한국의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었을 때 약 5년가량,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말씀을 준비할 때는 가능하면 재미있게 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준비하게 되고 또 성경을 읽을 때 더 깊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보려고 시도하곤 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자료들과 또 지혜를 주셔서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이 부분만을 다루지 않고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면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하던 것처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재밌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아브라함의 부족함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중에 하나였고 매우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사는 큰 가족 공동체 안에 있었고, 나름대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많은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라는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성품을 조금 엿보자면, 그는 매우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거나 다른 아내를 얻어서 자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평생 자기 아내인 사라만을 사랑하고 아끼는 강직하고 자상하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봐, 저 양반 정말 좋은 사람인데 아들이 없는게 흠이야. 아들만 있으면 딱일텐데." 아브라함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캐나다에 보내놓고 아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저도 부모님만큼 그리워하진 못할지라도 부모님이 그립고, 또 가끔씩 갈보리교회에서 올려주는 찬양과 간증 mp3를 들으면 성도님들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면서 그리운 마음이 커지곤 합니다. 우리는 정들고 사랑했던 누군가와 멀어지면 이렇게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누구와 떨어지고 그리워하기 이전부터, 원래 가지고 있는 허전함, 외로움, 상실감, 상처, 버림받은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별하고 잃어버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지게 된 허전함과 외로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무엇이든 이뤄보려고 몰두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실된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또 대가족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살았지만, 그 마음에 허전함이란 것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나에게 아들만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텐데. 내 인생이 더 이상 허전하지 않을텐데."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허전함을 허락하십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이 백 명의 자식을 낳고 또 여러 해를 살아 그의 햇수의 날들이 많을지라도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또 그가 묻히지도 못하면 내가 말하건대 유산된 자가 그보다 나으니라.”(전 6:3).

아브라함이 겉으로 백 명의 아들을 가진다 해도 그의 내면에 있는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면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유산된 아기보다 못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이러한 갈증이 있습니다. "내가 아들만 가진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참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 자기 자신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고, 너의 자손에게 줄 땅이 있으니, 너의 씨에게 복을 줄 테니 너는 먼저 너가 정을 붙이고 사랑하며 관계하고 붙잡고 집착하던 모든 것, 너의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서 나오라."

 

지금 아브라함은 현재의 상태에서 아들만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만족할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들을 줄테니 우선 그 만족하던 모든 상황을 떠나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이 많은 아브라함은 쉽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친구들과 정을 떼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가족들과는 정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가 죽기까지 머뭇머뭇하며 떠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죽은 형제인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나옵니다. 롯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으니 여차하면 조카인 롯을 자기 아들로 삼기 위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는 제 고향과 친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나와 정들었던 사람들을 떠나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심이었어요.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하던지... 그렇지만 저에게 아들만 있다면 행복해 질거라 생각해서 꾹 참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아들을 주세요!"

 

 

** 위기와 은혜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때 바로 아들을 주셨다면 창세기는 10장 이상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는커녕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물도 많고 곡식도 많았던 이집트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는 사람도 많고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사람도 많았는데, 이제 새로운 문명지 이집트에 들어가려니 막상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꾸미고 한평생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온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아무래도 파라오가 아름다운 사라를 보고 자기를 죽일 것이고 빼앗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졌고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살길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파라오에게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아들 하나 얻으려고 그 먼 길을 떠나왔고, 이제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데, 한평생 지조 있게 지켜온 아내마저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신세입니까? 신이난 파라오는 사라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들과 종들을 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라리 아들 없이 그냥 고향에서 살 걸. 롯을 그냥 아들로 삼고 메소포타미아에 있을걸. 한평생을 정직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내가 무서운 거짓말로 아내를 팔아 넘기고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무엇이든 하실 수 있거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아들을 주신다던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길래 누가 너 롯을 데리고 나오래? 내가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라고 했지? 왜 롯을 데리고 나왔어? 롯도 친족이야, 아니야?"하면서 다그쳐 묻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가나안 땅에 있으라고 했지 언제 이집트에 내려가라고 했어! 기근이 든거는 시험이야, 시험, 그 정도도 통과할 믿음이 없느냐? 너가 다 망쳐놓았으니 이제 너가 알아서 살아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 그리고 아내를 팔아 넘기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넌 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죄 값을 치르고 멸망하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7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하여 파라오와 그의 집에 큰 재앙들로 재앙을 내리시매

거짓말은 누가 했습니까? 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네,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상상해 오던 하나님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고 강력하고 무서운 분이어서 한 가지 실수만 하더라도 책잡고 심판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되 조건 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를 신실하게 선하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전함과 버림받은 마음을 그러한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파라오는 아브라함 때문에 큰 재앙을 당했지만 아브라함을 감옥에 넣거나 해치지 않고 오히려 무사히 그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이상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다 망쳐놓은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여태까지 자기가 아들처럼 데리고 온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롯과 분리

창세기 13장 9절을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하니라.

이상한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떤 경우에도 롯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허전함과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아들과 같은 유일한 존재인데 어떻게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양을 더 줬으면 줬지, 손해를 봤으면 봤지, 어떻게 아들 같은 조카를 떠나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아브라함은 이제 롯이 없어도 그렇게 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롯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노니 내게서 갈라서라. 나는 너가 나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버리라고 강요하시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풀리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족한 만큼 우리의 허전함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끼고 다녔던 롯을 떠나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하나님,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 우리도 경험하기 원합니다.

 

 

** 방패이신 하나님

다 같이 창세기 15장을 보시겠습니다.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 이 일들 뒤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이 지내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쿠스에서 온 이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이 말씀은 아브람이 롯을 떠나보낸 뒤에, 롯이 거하던 소돔 땅에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롯을 구출해 온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전쟁은 가나안의 네 왕국과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이 벌인 것인데, 네 왕국 연합이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의 연합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훈련받은 종 318명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치고 롯을 구출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도와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들이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내가 너의 방패고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란다. 내가 너에게 정말 주려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나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아브라함의 관심은 변함 없이 온통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약속하시고 또 짐승을 쪼갠 가운데를 혼자서 가로질러 가심으로 피의 언약까지 맺어주셨습니다.

 

 

** 또 실패

75세 때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10년 간 아들을 기다렸어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답답해하던 아내 사라가 여종인 하갈을 아내로 주어서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99세 때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꿔주시고 할례의 언약을 주시면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너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 하는 "이삭"이라 지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 번 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사라도 장막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으면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심정도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10년 동안 기다렸다가 기다려도 안되니까 이스마엘을 낳고 지금 또 이스마엘이 13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들 소리하십니까?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주세요." 이 말은 이미 이스마엘이 다 컸다는 소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을 하나 주십니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라오가 아비멜렉으로 바뀐 것 말고는 창세기 12장에 나왔던 내용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사라를 자기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속이고서 아비멜렉에게 넘겨줍니다. 사실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이고 쉬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75세 때 가나안 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나님께서 입학시험으로 주셨던 것인데, 이제 졸업할 때가 되어서 졸업시험으로 어려운거 안하시고 1학년 때 봤던 시험 그대로 내셨습니다. 그런데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75세 때 써냈던 답안지 그대로 적었습니다. 24년 동안 아브라함이 변했습니까? 믿음이 충만하고 굳세어지고 승리를 해야 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1학년 때 봤던 시험문제를 아직까지 못 푸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하면 총 12년이고, 대학교 4년 석사 박사를 6년 잡아서 다 더해도 22년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믿음에 관한한 이제 박사학위를 딸만한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봤던 아주 기초적인 시험을 또 틀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그래도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고향도 떠나왔고 롯도 내보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도 아들을 주실래야 주실 수가 없겠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엎드려서 웃기나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이스마엘이나 낳더니만 이제는 가장 초보적인 시험에서 또 넘어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포기하실거야. 이 멍청이, 구제불능, 난 정말 가망이 없는 사람이구나. 나이만 먹었지 믿음이 하나도 안 자랐어. 이제는 사라도 완전히 잃어버린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브라함이 아닌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다 같이 창세기 2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 또 주께서 친히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수태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정한 때에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하나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 우리의 실패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오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올바르고 흠이 없는 사람만 사랑하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패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으실거야."하면서 오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러한 오해를 풀어주기 원하십니다.

 

로마서 4장 22-2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23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이제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24 우리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을 믿을진대 그것을 의로 인정받을 우리도 위한 것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가 믿음이 좋았으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거야. 아 내가 얼마나 큰 결단으로 하나님을 따랐던지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을 주셨어야 마땅하지, 암."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는 이삭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 믿음의 시험

이제 우리는 우리가 처음 읽었던 창세기 22장에 이르렀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정말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도 아시고, 그가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게 보일 정도로 이상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번제 헌물이란 것은 그를 칼로 찌르고 조각조각 잘라서 하나님 앞에 불태우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우상 신들도 그렇게 무서운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준비합니다. 아침 일찍 월드컵을 보려고 일어난 젊은이들처럼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물을 챙겨 모리아 땅으로 출발합니다. 얼마 전가지만 해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봤던 시험마저 틀렸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100점 만점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걸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희생을 하고 헌신을 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옆에 아브라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잠자리에 누운 아브라함은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시 밖에 나가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끌벅적하게 정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살았지만 너무나 허전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기근이 든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에 갔다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망칠 뻔한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나오게 해주신 이상한 하나님을 떠올려 봅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이스마엘을 낳고, 아비멜렉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라를 빼앗길 뻔한 모든 순간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아브라함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서 허전한 줄만 알았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만족하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 헌물로 드릴지라도 여태까지 나에게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고자 다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귓가에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너무나 행복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큰 결단과 희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한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만족했고 믿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쁘게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1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을 걸고 맹세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얻고 완전히 만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실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우리의 만족

오늘 우리의 마음이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분주하게 세상의 여러 가지를 찾고 주목하고 집착하고 붙잡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찬사를 받아도,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다 짊어져도, 또는 아브라함의 소원이었던 것처럼 백 명의 자식을 가질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의 힘을 다 허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참되게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55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오호 목마른 모든 자들아, 너희는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또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내 말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라. 또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너희 혼으로 하여금 스스로 기름진 것을 기뻐하게 할지어다.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긍휼이니라.

우리는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번 만나지 말고 매순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완전히 만족될 때까지 그분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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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시 138:6-8)

2005.12.2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주의 손
본문 : 시편 138편 6-8절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시편 138편은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다”하는 말씀을 담고 있는 시편입니다.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6 주께서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은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버리지 마옵소서.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손”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지나고 있는데 이렇게 다친 것을 계기로 손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손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주의 손을 가까이 대하면서도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또 그것에 얼마나 감사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주의 손
우리는 성경에서 “주의 손”이라든지 “주의 오른손”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는 대부분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며,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붙잡는 것은 너무나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실 때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이집트 한가운데서 행할 나의 모든 이적들로 그 나라를 치리니 그 뒤에야 그가 너희를 가게 하리라.”(출 3:20).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모든 이적들이 하나님의 손을 내밀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통해 이러한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적을 주실 때에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고 모세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신 후에 “네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셨을 때 모세의 손에 나병이 생겼고 다시 한번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니 그것이 처음의 손과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쟁을 할 때 모세가 손을 올리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배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손이라는 단어만 주목해 보아도 성경에서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막대기는 죽어버린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모세의 손을 통해 살아있는 뱀이 되기도 하고, 이집트의 모든 풍요를 관장하는 여신이라 불리던 나일강을 피로 물든 죽음의 강으로 만들기도 하고, 거대한 홍해바다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늙고 기운이 빠진 모세, 마른 막대기와 같은 모세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다면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많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사무엘의 평생 동안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없었고,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엘리야는 아합의 수레를 앞질러 달려갔으며,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욥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 정금과 같이 연단되었고, 하나님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타국의 통치자들로부터 긍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 지으신 모든 창조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모든 역사들과 사도들 위에 임하신 주의 손의 권능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진리들로 인하여 전율할 것입니다.


** 구원의 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28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29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능히 그들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30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라.”
(요 10:28-30).

우리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의 팔로 붙잡아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 예수님의 손을 떠올릴 때 우리는 못 자국 난 손을 기억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님의 권능의 손은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영광과 사랑의 상처를 지닌 손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께 우리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주 예수님 자신을 주의 팔이요, 주의 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이는 그가 주 앞에서...”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여기는 “그가”라고 부른 주인공은 바로 “주의 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주의 팔”은 누구입니까? 권능과 능력의 주의 팔이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고운 모양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는 모습으로 이 땅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과 주의 팔을 언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주의 권능의 오른손이신 주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기 원합니다.


** 오른손을 다치고
5절에서는 원수들의 면전에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고,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시는 목자를 기록하고 있고, 6절에서는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가 승리하고, 주님 앞에서 잘 살 때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며 함께 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많으신 주님을 더욱 알아가며 참되게 따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식탁을 마련하시는 목자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주의 손을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어떻습니까? 성경에서는 주의 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떻게 주의 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되어가고 있는데 지금은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젓가락질도 하루 3번씩 꼬박꼬박 연습을 하니 지금은 밥풀도 집고 라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해졌습니다.

전에는 몰랐습니다. 오른손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손을 다치고 나서 집에 돌아온 뒤 처음 저녁식사를 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숟가락질도 젓가락질도 모두가 생소한 왼손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추하나를 풀고 끼워 넣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수할 때, 양치할 때... 기본적으로 생활하는 모든 것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던 열쇠와 핸드폰이 모두 왼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물건을 사기 위하여 지갑에서 돈을 꺼낼 때에도,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붙잡을 때에도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차라리 왼손이 다쳤더라면 조금 덜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문득 마태복음 6장에,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네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의 오른손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우 크고 작은 일들에 수고를 해왔습니다. 왼손으로 그 동안 오른손이 해왔던 많은 일을 해나가면서 오른손이 어떤 힘든 일을 해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조금 하다가 손에 쥐가 나려고 한 적도 있었고, 단추 하나를 끼지 못해 몇 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말 왼손으로서는 오른손의 수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못 자국 난 주님의 손을 볼 수는 없지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손의 역할을 감당하는 지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곧 그것들 각각을 몸 안에 두셨느니라”(고전 12:18).
우리 중 누구는 눈의 역할을 감당하고 우리 중 누구는 발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 중 누구는 손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지체들을 섬기고 있든지 우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손길은 바로 교회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책망하시며 징계하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안아주시며 품어주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손은 오늘날 우리 지체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주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처럼 오해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많은 지체들을 통하여 우리를 돌보시며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손길이 교회와 상관없이 임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께 긍휼을 얻고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으로 부르셔서 몸을 이루는 한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떠나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려는 모순 가운데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간과하며 쉽게 지나치는 형제자매들의 미소와 관심이 곧 우리와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만 왼손과 같이 그저 섬김을 받는 생활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오른손이 얼마나 큰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손이 다친 이후로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거나 해야 할 일을 발견할 때마다 저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오른손에 발동이 걸리는 바람에 의지적으로 그것을 멈추는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을 해왔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왼손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오른손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오른손이고 왼손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대로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왼손과 같이 알게 모르게 섬김을 받기만 하던 지체가 이제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지체들을 위해 주님의 일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오른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왼손인 사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손에 붙들린 사람의 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린 한 사람이 지은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힘입어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 소년, 죄를 범하고는 자신에게 제시된 세 가지 형벌 가운데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손에 떨어져 벌을 받고자 했던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손을 많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6 주께서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은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손에 붙들린 다윗은 겸손하게 주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주의 손을 붙들었으며, 주의 손이 자신을 완전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은 위풍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아닌 겸손하게 긍휼을 구하며 주의 오른손을 힘입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마른 막대기가 놀라운 기적들을 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우리의 가련한 인생은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 마무리하는 말
여러분 옆에 형제자매들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길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주님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여 낙담하거나 불평하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수고하는 지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왼손인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나를 위해 오른손의 역할을 끊임없이 해온 지체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주님의 손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한 지체들로 인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또 내가 오른손으로서 섬겨야할 지체들을 발견한다면 그것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그 지체들이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을 하나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훗날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왼손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다만 오른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임했던 인자하고 긍휼히 풍성한 주의 손을 기억하며 묵상하며 되새기며 오늘 내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손으로서 어떻게 섬겨야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 지체들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4-40절까지 보시겠습니다.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세상의 창건 이후로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내게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 왔느니라, 하리니
37 그때에 그 의로운 자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하였나이까?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가 되신 것을 보고 받아들였나이까?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께 옷을 입혔나이까?
39 혹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께 갔나이까? 하리라.
40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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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가장 크신 주의 이름
본문 : 시편 138편 2절


오늘 저와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가장 크신 주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은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above"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주님의 모든 이름들보다 위에 있다고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호칭들, 닉네임, 또는 별명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만해도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름은 아니지만 주일학교 아이들은 저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교회 안에서는 다만 “형제”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아들아”하고 불리기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만 “친구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많은 호칭들이 저 한사람을 가리키면서도 각각 한 가지 특징들을 부각하여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15:15).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요 20:17).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너무나 중요한 표현들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호칭이 어떻게 죄인에서 의인으로, 불순종의 자녀들에서 순종의 자녀들로, 마귀의 자식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많은 주의 이름들
그러나 성경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름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 자신의 이름들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각각 주님의 어떠하신 특징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양, 반석, 방패, 망대, 요새, 전사, 주, 여호와,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 전능자, 위로자, 상담자, 영원하신 아버지, 부활의 첫 열매,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 목자, 참 포도나무, 부활, 생명, 길, 진리, 사랑, 생명의 빵, 임마누엘...

이러한 많은 이름들은 주님 한 분을 가리키면서도 각각의 단어가 서로 다른 면에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다만 미사여구나 장식을 위한 표현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잘 묘사해 주고 알려주는 귀한 단어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주님의 이름은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 전에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로 받은 사람의 아들이 되신 주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약에서 잃어버린 자를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다 같이 빌립보서 2장 6-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10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11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시키시고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토록 낮아지셨던, 그토록 비참하게 멸시를 받으셨던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시라 시인하여 영광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목을 곧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그 날에 예수님의 이름 앞에 완전히 굴복을 당하고 꺾임을 당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땅 아래, 곧 지옥에 있던 모든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하였던 자들도 그 날에는 수치 가운데 그분을 높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시라 시인하며 찬양한 우리들은 그 날에 수치를 당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분을 높이며 찬양할 것입니다.

 

**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신 이름 - 주의 말씀
그런데 오늘 함께 살펴본 시편 말씀에서는 주의 모든 이름들 위에 “주의 말씀”을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다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또는 기록되어 글로 적혀있는 말씀이라고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말씀”이라는 주의 이름에 대하여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들 중에서 가장 큰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가지셨던 이름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가지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때 나타내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잠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서신들 중에서 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물과 피로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 육체를 입고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언하실 때에는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계심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역시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주님을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보시면 계속해서 "그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절에 “그분께서”, 3절에 “그분에 의해”, “그분 없이”, 4절에 “그분 안에”, 10절에 “그분께서”, “그분에 의해”, 11절에 “그분께서”, “그분을”, 12절에 “그분을”, “그분의 이름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흐름에 따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절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그 이름, “예수님”을 떠올리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본문을 살펴본다면 “그분의 이름”은 문맥에 따라 일차적으로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함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 1:23).

이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심판하시며 전쟁을 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의 이름은 신실하신 이요 참되신 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16절에 보시면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고 기록된 한 이름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그분의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12,13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나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여전히 가지고 계실 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 결론 -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은 틀린 것이 없는 완전하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알려고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이상한 믿음과 삶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만 지침서나 설명서가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참고서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잘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액세서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누리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배움과 위로를 얻고 책망을 받고 바로잡히고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들 중에서 주께서 가장 높고 크게 하신 이름이 바로 “주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바로 “주의 말씀”을 높이고 찬양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순간 동안 말씀을 가까이 하고 떠올리며 생각하며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님을 만나며 생각하며 사랑하는지가 판가름 될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우리들이 생명을 더 풍성히 얻기 위하여 날마다 영접하고 마음에 품어야할 주님의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날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읽고 탐구하며 연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더 사랑하며 찬양하며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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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8.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50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삼하 24: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4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4장 14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큰 곤경에 빠졌도다. 주의 긍휼은 크니 이제 우리가 그분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저는 오늘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의 가장 마지막인 24장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용의 흐름상으로 보면 사무엘기하는 23장에서 끝날 때 가장 아름다고 훈훈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윗의 마지막 찬양의 말과 전설의 용사들에 대한 승리담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4장은 다소 당황스럽게도, 다윗의 실패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마무리를 아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사무엘기하 24장의 말씀을 기록하셨으며, 또 이러한 안타까운 내용으로 사무엘기 상하의 모든 말씀을 마무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분명하게,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뿐입니다. 우리가 사무엘기상하의 모든 말씀을 다 살펴보고 나서 다윗이 참 대단하다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다윗을 높이시고 사용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게 되고, 또 찬양하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을 기록된 목적대로 바르게 읽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이 주는 위로와 인내를 통해 믿음의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24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과 이스라엘의 실패와 심판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말씀의 제목과 같이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다윗에게 온 시험 - 시험자
그러면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다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오르매 그분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움직이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 하고 말하게 하시니라.
지금 우리가 읽은 1절에서는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타올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다윗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타올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무엘기하 뒷부분의 내용을 기초로 생각해 본다면, 압살롬의 반역과 또 곧바로 세바의 반역에 가담하였던 온 이스라엘의 반역죄와 연관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1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움직이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고 말하도록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어떠한 동기를 부여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도록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가 개역개정판 한글역본에 기록된 사무엘기하 24장 1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다른지 한 번 비교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개역개정판 한글역본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이해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는 진행되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 죄가 되어버리는 매우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다윗은 인구를 조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어떠한 동기를 제공하시고, 시험을 주셔서,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지, 직접적으로 순종해야 할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무엘기하 24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백성의 수를 세도록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면서, 역대기상 21장 1절 말씀과 비교해 보시겠습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일어나 다윗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하니라.
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만들었던 주인공이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렇게 질문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를 세도록 다윗을 움직인 이는 하나님인가, 사탄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욥기 말씀을 참조해보겠습니다. 욥기 1장 8-12절을 보시겠습니다. 
8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라.
9 이에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그 땅에서 그의 재산이 불어났나이다.
11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12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보라, 그의 모든 소유가 네 권능 안에 있거니와 다만 그에게는 네 손을 내밀지 말라, 하시니 이에 사탄이 주 앞에서 물러가더라.
여기서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 욥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하나님과 사탄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자랑하셨고, 사탄은 시험하기를 제안하였습니다. 11절에서 주의 손을 내미사 욥의 모든 소유를 쳐보시라고 사탄이 말하였고, 12절에서 그의 모든 소유가 너의 권능 안에 있거니와 다만 그에게는 너의 손을 내밀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모든 소유를 하루 만에 다 앗아간 것은 11절에 나오는 주의 손입니까, 아니면 12절에 나오는 사탄의 손입니까? 사탄이 먼저 하나님께 제안을 하였고, 실행도 하였으니 사탄의 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으니 하나님의 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다윗을 움직인 것이, 사무엘기하에서는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역대기상에서는 사탄이라고 기록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전한 주권과 통치와 제한하심 가운데 사탄의 활동의 범위를 정하시고, 그 안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가운데 시험을 허락하셨고, 사탄은 욥이 믿음을 버리고 무너지기를 원하는 가운데 시험을 제안하였고, 실행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성도가, 모든 일 가운데, 모든 환경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에 순종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 다윗에게 온 시험 - 시험의 내용
다윗에게 임하였던 시험은 교만, 자기 신뢰, 자기 자랑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왕이 인구조사를 통하여, 백성의 수를 세어보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명백히 말해서, 그 일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수를 세시는 주제를 가지고 민수기를 기록하셨을 정도입니다.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 “숫자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책 자체가 민수, 즉 백성의 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다윗의 동기는 교만이며, 자기 신뢰이며, 자기 자랑이었기 때문에, 명백히 말해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력을 확인하고, 느부갓네살 왕처럼 자기 왕국에 대하여 자랑하며,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기 때문에, 명백히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매우 교묘한 것이었고, 이제 노년에 이른, 믿음의 백전노장인 다윗조차도 넘어지고 실패하게 되었던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때로 저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겸손한 나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겸손한, 대단한, 영적인 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섬긴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영적 야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이름을 얻고, 영광을 얻고, 칭송을 받을 만한 놀라운 사역을 소유하고, 업적을 달성하며, 영적인 지위와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야망과 유혹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 밧세바의 실패가 완전히 육신으로 드러난 죄라면, 백성의 수를 센 것은 영적 교만이라는 더욱 교묘하고 감추어진 영적인 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침례자 요한이 말하였던 것처럼, 주님만이 반드시 흥하시고 증가되시며, 나는 반드시 쇠하고 감소되어야 한다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세어보고 계산해야 한다면, 모세의 기도처럼 우리의 짧은 날 수를 세는 지혜를 얻어서,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나의 업적과 자랑거리를 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베풀어주신 긍휼과 복과 은혜를 세어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머리카락도 다 세어볼 수가 없는 것처럼,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쓸 수가 있고, 그분의 긍휼을 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세어보아야 한다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세어보기를 원합니다. 


** 다윗에게 있었던 기회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으로 돌아오셔서 2-4절을 보시겠습니다. 
2 왕이 자기와 함께한 군대 대장 요압에게 이르되, 이제 너희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백성을 계수하여 내가 백성의 수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왕께 이르되, 백성이 얼마나 많든지 이제 주 왕의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백 배나 더하사 내 주 왕의 눈이 그것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하오나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였으나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말이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을 이겼으므로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 나가니라.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시험을 받을 때에 2번의 도움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그의 믿음을 돕고자 하였던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 바로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왕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우리야를 죽게 하라는 왕의 명령에는 아무런 질문이나 항변 없이 그대로 따랐던 요압 장군도,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요압 장군만이 아니라, 군대의 대장들이 한 마음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다윗 왕의 명령은 너무도 이상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평소에, 또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볼 때, 다윗 왕과 요압 장군 중에서 누가 하나님을 더 신실하게 따랐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또 다윗과 군대의 대장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다윗이 틀렸고, 요압과 군대 대장들이 맞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이 때 이들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겸손하게 들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적 교만에 사로잡혔고, 형제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으며, 고집을 피웠고, 결국 자신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겸손한 귀를 가지고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8,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8 이처럼 그들이 온 땅을 두루 다니고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9 요압이 백성의 수의 총계를 왕에게 주었는데 이스라엘 안에는 칼을 뺀 용맹한 자 팔십만 명이 있었으며 유다 사람은 오십만 명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두 번째 기회는 아홉 달 스무 날이라고 하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윗은 거의 10개월 동안, 백성의 수를 세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멈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간들 동안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백성들의 수를 세어보고, 자신이 어떻게 사울의 망해가는 왕국을 이어받아, 이토록 강건하게 세웠는지를 되짚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요압 장군이 다윗 왕에게 백성의 수를 보고하였는데, 역대기상 말씀을 참조해 보면 요압 장군이 왕의 명령을 가증하게 여겼기 때문에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세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믿음의 시험을 받을 때 승리할 수 있도록 형제들을 주셨고, 또 충분한 시간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윗은 자신의 고집을 그대로 이루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러한 와중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 다윗의 회개와 하나님의 심판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0-14절을 보시겠습니다. 
10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그를 찌르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행한 일로 인해 크게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주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로 있던 대언자 갓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주노니 너는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라.
13 이에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에게 고하여 이르되, 왕의 땅에서 칠 년 동안 왕에게 기근이 임하리이까? 아니면 왕께서 왕의 원수들에게 추격을 받고 그들 앞에서 석 달 동안 도망하시려나이까? 아니면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역병이 있으리이까? 이제 나를 보내신 분에게 내가 어떤 답을 드려야 할지 살피고 알려 주소서, 하매
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큰 곤경에 빠졌도다. 주의 긍휼은 크니 이제 우리가 그분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비록 늦었긴 했지만, 그래도 다윗은 죄를 지은 이후에 무감각하지 않고, 마음에 찔림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성도의 양심이며,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복을 세어보려고 했다든지, 이스라엘의 군대를 정비하려고 했다든지, 좋은 뜻으로 포장하지 않고, 자신이 크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으며,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다루심을 보게 되는데, 바로 무슨 벌을 받을 것인지, 세 가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를 다윗에게 고르라고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벌을 내리시든지 달게 받아야만 하는 것이 다윗의 입장인데,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벌을 보기로 주시고, 한 가지를 고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벌을 내리시는 와중에도, 다윗을 사랑하시며, 아끼시며 긍휼히 여기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제시된 보기는 첫 번째, 7년 동안 기근이 임하는 것, 두 번째, 3개월 동안 원수들에게 추격을 당하는 것, 세 번째, 3일 동안 역병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대기상에서는 기근이 임하는 기간을 3년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이 구절들 사이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갓 대언자와 다윗의 대화 중에 긍휼을 베푸셔서 3년으로 줄여주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하늘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3번, 역병의 재앙을 선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주의 긍휼이 크기 때문에, 주님의 손에 온전히 모든 심판을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역병이 임하게 되는데, 이 일은 단지 다윗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5-17절을 보시겠습니다. 
15 이에 주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 위에 역병을 보내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 중에서 칠만 명이 죽으니라.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손을 내밀어 그것을 멸하려 할 때에 주께서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사 백성을 멸한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 네 손을 멈추라, 하시거늘 그때에 주의 천사가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옆에 있더라.
17 다윗이 백성을 친 천사를 보고 주께 아뢰어 이르되, 보소서, 나는 죄를 짓고 악하게 행하였사오나 이 양들 곧 그들은 무슨 일을 하였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 집을 치소서,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선택대로 역병을 보내셨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말처럼, 최북단에서 최남단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백성들을 죽게 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 전국에 걸쳐서 7만 명이 역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말씀에 보면 주의 천사가 아시리아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하룻밤 사이에 전멸시킨 기록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지금 3일에 걸쳐서 7만 명을 죽게 하신 것은 매우 천천히 심판을 진행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역병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재앙에서 스스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주의 천사는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옆에 섰습니다. 다윗은 천사를 보고는, 내가 죄를 짓고 내가 악하게 행하였으니, 주의 손으로 나를 치시고, 내 아버지 집을 치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다윗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심판하실 것이 있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에 대하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왕 다윗에 대한 두 번의 반역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다윗 왕의 교만과 높아진 마음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을 낮추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긍휼의 풍성하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다윗을 대적하였고 압살롬을 따른 바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임 당한 직후에도 그들은 옷을 찢고 돌이키기는커녕 세바를 따랐습니다. 사실 온 이스라엘이 죽임을 당해야 마땅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소수만을 죽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왕국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인구 가운데 단지 3일 만에 7만 명이나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아니면 왕국이 유지될 수도 없고, 아무것도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시며, 다윗의 마음이 겸손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 타작마당의 제단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8,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그 날에 갓이 다윗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올라가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주께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19 다윗이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갓의 말에 따라 올라가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시 한 번 주님의 긍휼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대언자 갓을 통하여 범죄한 다윗을 부르시고,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더 이상 우리를 보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불러주시며 우리와 교제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이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에,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해변에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음식을 예비하시며,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상태로 모였든지,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불러주고 계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메마름과 배고픔과 궁핍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를 새롭게 불러주고 계십니다. 
“너는 왜 왔어? 꼴 보기 싫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며 또 다시 새로운 긍휼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즉시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로 기쁨으로 응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받드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 함께 역대기상 21장 26-28절을 보시겠습니다. 
26 다윗이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리며 주를 부르니 그분께서 하늘로부터 번제 헌물 제단 위에 불을 내려 그에게 응답하시고
27 주께서 천사에게 명령하시매 그가 다시 자기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28 그때에 다윗이 주께서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자기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거기서 희생물을 드렸으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헌물에 하늘의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자신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여부스 족속 오르난은 사무엘기하에 나오는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와 동일 인물입니다. 다윗은 아라우나, 곧 오르난으로부터 그 땅의 일대를 구입하였고, 그 때부터 바로 그곳의 제단에서 주님께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역대기하 3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때에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전에 주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예비한 곳이더라.
다윗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은 백향목 집에 거하지만, 하나님의 궤는 휘장 안에 있음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주의 집, 성전을 짓기를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피를 많이 흘린 전사 다윗을 막으시고, 그의 뒤에 올 샬롬, 즉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 샬로몬, 즉 솔로몬을 통하여 짓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있는 동안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모든 재료를 예비하였는데, 마지막으로 성전이 건축될 장소를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예비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과 고집이 수치스럽게 드러난 곳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이 나타났던 곳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바로 그 장소에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후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왜 여기에 성전을 건축하였느냐고 묻게 된다면, 다윗 자신의 교만과 수치가 역사 대대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또한 대대로 찬양받으실 것이기에, 다윗은 바로 그 장소에 성전이 세워지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 정리
다윗은 이 장소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 앞에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 또한 다윗은 장차 이곳에서 성전이 세워질 때, 모든 주의 백성이 모여 이렇게 고백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시편 103편 8-11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8 주께서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니
9 그분은 항상 징계하지 아니하시며 자신의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법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긍휼이 크시도다.
기도하겠습니다. 


2015.02.15.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9

은혜로 삽니다(삼하 23:1-5)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3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3장 1-5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이르기를,
2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릴지니라.
4 그는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가 온 뒤 맑게 비침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 같으니라, 하셨도다.
5 비록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사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비록 그분께서 내 집이 자라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나의 모든 구원이요, 나의 모든 소원이기 때문이라.
저는 오늘 “은혜로 삽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사람에게 분명한 말과 글을 통해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저희 호윤이도 이제 20개월 정도 되면서 몇 가지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재미있고 신비롭습니다. 얼마 전에는 잠꼬대를 하는데 한글자로 분명하게 “까”라고 말하는 것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꿈속에서 과자를 먹었나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지만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에서 해상재난을 당했는데 구조정에는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남편은 부인을 남겨두고 혼자 구조정에 올랐고 부인은 침몰하는 배 위에서 남편에게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여러분, 부인이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학생들은 모두 격분하여 말했습니다. "당신을 저주해요. 내가 정말 눈이 삐었지!!"
이때 선생님은 한 학생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학생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생각했을 때, 부인은 아마, 우리 아이 잘 부탁해요!, 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너 이 이야기를 들어봤니?" 

학생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선생님은 뭉클한 마음으로, "정답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배는 침몰했고,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딸을 잘 키운 뒤, 몇 년 후 병으로 죽었습니다. 딸이 아빠의 유물을 정리하던 중 아빠의 일기장을 발견하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배 여행을 갔을 때 엄마는 이미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사고가 발생하였고 아빠는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일기에는 딸 때문에 엄마와 함께 죽을 수가 없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사무엘기하 23장에 나타난 다윗의 마지막 말과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서 모든 내용이 오늘의 제목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었습니다. 은혜로 삽니다. 바로 다윗이 은혜로 살았고, 다윗의 모든 용사들이 은혜로 살았으며, 오늘 우리 모두가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다윗의 마지막 말
먼저 사무엘기하 23장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이르기를,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을 뛰어난 용사라든지, 위대한 왕이라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을 높이 일으켜진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낮은 자였는지를 기억하는 말입니다. 높은 자가 아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입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자를 먼지에서 일으키시며 거지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통치자들 가운데 앉게 하시고 또 그들이 영광의 왕좌를 상속받게 하시나니 이는 땅의 기둥들이 주의 것이요, 또 그분께서 그것들 위에 세상을 세우셨기 때문이라.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라는 다른 신하들의 제안을 받았을 때, 자기 자신을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 다윗을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거지와 같은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영광의 왕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였습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대언자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을 부으려고 왔을 때, 초대받지 못한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나, 그 모든 형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실 가능성이 0%였던, 완전히 제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양치기 소년 시절 때부터, 들판에서 손에 하프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교제하였던 그의 온 삶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의 특징이 있다면, 그 말이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듯 은혜로 간을 하고, 마음의 갈증과 허전함을 배불리 먹여줄 수 있는 풍성하고 복된 믿음의 고백들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하 23장으로 돌아오셔서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
다윗은 달콤한 시편의 말씀들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오늘 우리들의 입과 혀에도 오직 주님의 말씀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릴지니라.
4 그는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가 온 뒤 맑게 비침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 같으니라, 하셨도다.
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의 품격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가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적으로 표현하면서 또 실감나게 예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과 같이 따듯하고 밝고 맑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고, 구름 없는 아침과 같이 상쾌함을 말씀하고 있고, 또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과 같은 신선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 사람들을 인도하는 모든 리더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는 남편에게, 또 가정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일터에서는 상사에게,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배들에게 요구되는 품격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씀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다윗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과연 이러한 왕이었습니까? 그는 과연 의롭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리는 왕이었습니까?

우리 함께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비록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사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비록 그분께서 내 집이 자라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나의 모든 구원이요, 나의 모든 소원이기 때문이라.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걸었고, 모든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주님만을 붙들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으로 있으면서는 많은 실수와 허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했고 살인했고, 자식들의 죄를 정의롭게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셨으며,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시며, 모든 소원과 구원이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격이 있고, 아주 적합한 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을지라도, 내 집이 비록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어주셔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 말을 남기는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차고 넘치는, 한량없는,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 다윗의 용사들 - 처음 세 용사
사무엘기하 23장은 다윗의 찬양의 말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가장 실제적인 은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다윗과 함께하였던 37인의 용사들, 형제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날까지 정말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 수많은 시간들을 지나서, 이렇게 마지막 말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바로 목숨을 걸고 다윗과 함께, 다윗을 위하여, 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동행하였던 용맹한 형제들이, 다윗에게는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먼저 우리 함께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소유한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자리에 앉았던 다그몬 사람 곧 에센 사람 아디노는 대장들 가운데 우두머리더라. 그가 자기 창을 들어 팔백 명을 치고 한 번에 그들을 죽였더라.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용사는 바로 다그몬 사람 아디노입니다. 그는 창을 사용하는 전사였고, 한 번의 전투에서 가나안 전사 팔백 명을 쓰러뜨린 용사들 중에 첫째 우두머리였습니다. 지금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아디노라는 이름은 “그의 창”이라는 뜻으로, 창을 잘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으로 보여집니다. 역대기상에서는 그의 이름을 야소브암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 함께 9,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인데 그는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의 하나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함께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섰으나 그때에 그들이 저들에게 도전하고
10 그가 일어나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달라붙을 때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치니라. 그 날에 주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으므로 백성이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다윗의 삼총사 가운데 두 번째는 엘르아살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을 두려워하여 물러섰을 때, 앞장서서 도전하며 싸움을 싸웠습니다. 야구선수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훈련을 장시간 지속하면, 나중에 배트를 쥐었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옆에서 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세 용사 가운데 한 명인 엘르아살 역시도 손이 칼에 달라붙어서 펴지지 않을 정도로 싸운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엘르아살을 통하여 큰 승리를 이루셨고, 백성들은 물러섰다가 돌아와서 그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11,12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떼를 지어 팥이 무성한 땅에 함께 모이매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도망하였으나
12 그는 그 땅 한가운데 서서 그 땅을 보호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더라. 주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더라.
세 용사 중 마지막 용사는 바로 삼마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도망하는 상황 속에서 홀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며 블레셋 사람들과 맞서서 싸웠던 용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큰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3-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또 서른 명의 우두머리 중에서 세 사람이 내려가 수확하는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블레셋 사람들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더라.
14 다윗은 그때에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는 그때에 베들레헴에 있었더라.
15 다윗이 애타게 바라며 이르되, 오 누가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는 우물의 물을 내게 주어 마시게 할까! 하매
16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뚫고 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던 우물의 물을 길어 그것을 취해 다윗에게 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주께 부어 드리며
17 이르되, 오 주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그런 까닭에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니라. 이 세 용사가 이런 일들을 행하였더라.
네, 이 장면은 영화 속 한 장면과 같은 너무나 멋지고 감동적인 일화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에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승리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탄식과 같은 혼잣말에 반응하여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세 용사였습니다. 오직 세 사람의 용사가 블레셋의 진영 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길어 왔던 것입니다. 

다윗조차 누군가가 그 말에 반응해서 정말 가서 물을 떠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말을 들었던 그 어떤 신하들도 가서 물을 떠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용사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원함을 예민하게 살피는 자들이었고, 다윗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었고, 다윗이 마실 물 한 모금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충성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일을 달성할 만큼 전투에 능한 용사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과연 무슨 자격으로 이러한 훌륭하고 멋진 용사들을 신하로 두었으며, 그들의 이러한 충성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일까요?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 다윗의 두 번째 삼총사
이제 우리 함께 18,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인데 그는 세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더라. 그가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쳐서 죽이고 세 사람 가운데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었느냐? 그러므로 그가 그들의 대장이 되었으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의 처음 삼총사인 창의 달인 아디노, 칼이 손에 달라붙었던 엘르아살, 그리고 홀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고 섰던 삼마를 이어서, 두 번째 삼총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 첫째는 바로 아비새였습니다. 아비새 역시도 창을 들고 한 번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 삼백 명을 쓰러뜨렸습니다. 또한 아비새는 다윗이 이스비브놉이라는 거인에게 죽임을 당할 번 하였을 때, 다윗을 구조하여 거인을 쓰러뜨리기도 하였습니다. 처음 삼총사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두 번째 삼총사역시 다윗의 든든한 지원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20-23절을 보시겠습니다. 
20 또 갑스엘 출신 용사의 손자요, 여호야다의 아들인 브나야인데 그는 많은 일을 행하였더라. 그가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구덩이 한가운데서 사자 한 마리를 죽였으며
21 또 잘생긴 이집트 사람을 죽였는데 그 이집트 사람의 손에 창이 있었으나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그 이집트 사람에게 내려가 그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의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들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가운데 이름을 얻고
23 그 서른 명보다 더 존귀하였으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자기의 호위대를 다스리게 하였더라.
그 다음 용사는 바로 브나야였습니다. 브나야 역시 전투에 능한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의 두 번째 삼총사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사람에 대하여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매우 궁금하지만, 하늘에 가서야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윗의 용사들을 열거하고 있는 37인의 명단에서 정작 요압 장군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요압 장군은 다윗과 함께하면서 많은 싸움을 싸웠고, 또 암몬 자손과 싸울 때에나,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할 때에나 가장 앞장서서 활약을 하였던 장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좋은 용사 37인의 목록에는 들어가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용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요압을 볼 때, 단지 유능하고 재능이 좋고 활약을 많이 한 것이 기준이 되지 못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며,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요압은 많은 부분에서 훌륭하였고, 많은 수고를 하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참되게 충성했던 용사로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육신의 방식이나,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성경 말씀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며, 칭찬하시는 믿음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 다윗의 31명의 용사
이제 24절부터 39절까지는 나머지 다윗의 용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단에서는 서른 명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이름을 세어보면 서른 한 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9절에서는 모두 서른일곱 명이라고 총 인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 세 용사, 그 다음 세 용사, 그리고 서른 한명의 용사를 더해서, 모두 서른일곱이 되는 것입니다. 
서른 명의 용사들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아사헬이 아브넬 장군을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그 때문에 새롭게 인원이 보충되면서 아마도 서른 명이 재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명단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이름은 34절 마지막에 나오는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조언자이자 밧세바의 할아버지이고, 엘리암은 밧세바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39절에 등장하고 있는 헷 족속 우리야는 바로 밧세바의 남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다윗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면서 범죄 하였던 바로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가장 좋은 용사들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으로서는 이 명단 자체가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뜻대로 추가하거나, 삭제하거나, 변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명단 속에서 다윗의 죄악을 다시 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며, 차고 넘치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격이 없는 다윗에게, 이렇게 훌륭한 형제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풍성한 은혜를 쏟아부어주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숨을 쉬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불평하고 투정을 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을 주신 것 또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복에 겨운지,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귀한 줄도 모르고 불평할 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교회와 형제자매들을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모든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 아둘람 굴의 변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윗과 함께했던 훌륭한 용사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2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거기서 떠나 아둘람 굴로 피하매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이 그 일을 듣고는 그들이 거기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더라.
2 고난 중에 있던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불만이 있던 모든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되었더라. 거기에는 그와 함께한 사백 명가량의 사람이 있더라.
다윗의 용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아둘람 굴 출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별 것 아닌 사람들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고, 하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있던 자들이었고, 빚진 자들이었고, 불만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리석고 약하고,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었을 때 전설적인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이 용사들이 은혜였던 것처럼, 이 용사들에게도 다윗은 은혜이며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영웅이자 전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고, 혼자서 수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맞서게 하였으며, 이미 물러서고 도망갔던 형제들을 다시 회복시켜 모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교회와 형제자매들 역시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나에게 지체들이 은혜이며, 또 지체들에게도 내가 은혜이며 선물인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고난 중에 있던 자이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이며, 빚진 자이며, 헐벗고, 어리석고, 약하고, 메마르고,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주님 앞에 더러운 자였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먼저 찾아와주셨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넘치는 은혜를 쏟아부어주고 계십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교회이며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오늘 다윗과 같이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된다면,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본 사무엘기하 23장의 말씀처럼, 나와 함께했던 형제자매들과의 소중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지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37인의 용사만이 아니라, 100명, 200명, 더 많은 지체들의 이름이 우리의 입에서 감사의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은혜로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은혜로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은혜로 삽니다.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5.02.04.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설교/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8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삼하 22: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2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2장 1-4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그가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니라.
2 그가 이르되,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출자시요,
3 내가 신뢰하는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로다. 주께서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시나이다.
4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를 내가 부르리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저는 오늘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무엘기하 22장의 말씀은 다윗의 삶 속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의 기록입니다. 사무엘기하는 24장까지 기록되었는데, 이제 22장에서는 다윗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가는 과정 가운데, 다윗의 삶 속에서 가장 기쁘게 주님을 찬양하였던 시편 18편 말씀을 인용하여 기록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그가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하여 들었던 그 순간에는 옷을 찢고 슬퍼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사울의 죽음을 알렸던 아말렉 청년을 처형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날 애가를 지으며 애곡하였습니다. 

다윗이 시편 18편의 노래의 말씀들을 기록하며 주님을 찬양한 그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주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사방에서 안식을 주셨을 때가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어볼 수 있는 사무엘기하 22장의 찬양은 어떠한 사건들 이후에 순간적으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잠잠히 지나온 길을 되새겨보고,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차분히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잔잔하면서도 폭발적인 찬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우리 하나님을 가리켜,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자격이 있으시고, 합당하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자격이 있으시고,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사무엘기하 22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높이고, 사랑하며, 감사하고, 또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고통 중에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2장 5-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홍수가 나를 무섭게 하였으며
6 지옥의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사망의 올가미들이 나보다 앞서 갔도다.
7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며 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고 내 부르짖음이 그분의 귀에 들어갔도다.
먼저 다윗은 자신의 지나온 길을 생각하면서, 죽음과 오직 한 걸음 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 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대적들의 홍수가 밀려들고, 지옥의 고통과 사망의 올가미들이 늘 추격하였던 한 번 한 번의 순간들을 기억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면서 사자와 곰을 대항하여 맞섰던 순간들, 거인 골리앗 앞에 오직 목자의 지팡이와 조약 돌멩이를 들고 섰던 순간, 사울 왕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다가 창에 맞을 뻔했던 아찔했던 순간들, 집 주변을 사울의 군사들이 포위하고 매복하였던 순간,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침을 흘리며 정신 나간 시늉을 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해야 했던 순간, 분리의 바위라는 의미인 셀라하마르곳에서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울 왕이 블레셋의 침략 소식을 듣고 급히 떠나갔던 순간, 시글락에서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하였던 절망의 순간, 바로 이러한 사망의 물결이 에워싸던 순간들을 다윗은 회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시는 믿음의 자녀들을 고난으로 이끄십니다. 단지 조금 힘든 일들을 겪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을 것 같은 고난으로 이끄십니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사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명이 베냐민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는 마지막 순간에 베냐민을 이집트 땅으로 보내면서, 내가 그를 잃으면 잃으리로다, 라고 고백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왕 앞에 나가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가운데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장 8-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8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가 힘에 겹도록 한량없이 눌려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9 우리 속에 죽음의 선고를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
10 그분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고 계시며 또 여전히 건지시리니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팀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자기 속에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도 죽을 것만 같은 일들이 가득합니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때로는 건강으로, 때로는 자녀나 부모님과 같은 가족의 일들로, 때로는 나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일들, 때로는 억울하게 오해를 받는 일, 때로는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는 일, 때로는 외로움과 같은 감정들로 죽을 것만 같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와 우리 CCA 학생들이 하지 말자고 약속한 말 표현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귀찮다고 말하지 말자, 두 번째는 망했다고 말하지 말자, 그리고 세 번째는 죽겠다고 말하지 말자, 입니다. 세상에 죽을 것만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배고파 죽겠고, 답답해 죽겠고, 졸려 죽겠고, 지겨워 죽겠고, 웃겨 죽겠고, 힘들어 죽겠고, 짜증나 죽겠고, 억울해 죽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러한 죽을 것 같은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참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끄시고,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겠다고 말하지 말고, 나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이론적으로, 지식으로 알아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의 고난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수준은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는 정말 무능하고, 구제불능이며, 답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사망의 물결 속으로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부활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와 기대와 소망이 다 사라질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무너지고 쓰러졌던 사람만이 비로소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나서, 최선을 다해 겸손한 모습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진심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주님께서 하셨다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내 음성을 들으시며, 권능으로 일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 사무엘기하 22장으로 돌아오셔서 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며 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고 내 부르짖음이 그분의 귀에 들어갔도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고통 중에 주님을 부를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도회로 모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촛불의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시며 권능으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2장 14,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4 주께서 하늘에서부터 천둥소리를 내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 자신의 음성을 내시며
15 화살들을 내보내사 그들을 흩으시고 번개로 그들을 쳐부수셨도다.
다윗은 자신이 친히 목격하고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투 중에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를 통하여 두렵게 하시고, 번개를 화살처럼 내리셔서 대적들을 쳐부수시는 역사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망의 홍수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단숨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짜릿한 손길을 맛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자녀를 절망 가운데로 몰아가시고, 뜨거운 용광로에서 제련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순도 높은 믿음을 얻어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나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녹여서 제거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순수한 믿음만을 남겨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고난만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승리의 순간도 맛보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최후의 순간이 이른 것 같았을 때, 하늘의 천둥과 번개로 대적들이 눈앞에서 쓰러지며 도망가는 장엄한 광경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놀라운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며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함께 에베소서 3장 20,21절을 다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다윗의 눈앞에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역사와 큰 권능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행하실 수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단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고 넘치게 섬길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지체를 조금 위로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지체로 하여금 완전히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오직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하로 돌아오셔서 22장 18-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나의 강한 원수와 나를 미워한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셨나니 내가 감당하기에 그들이 너무 강하였도다.
19 그들이 내 재앙의 날에 나보다 앞서 갔으나 주께서 내 버팀 기둥이 되셨으며
20 또 그분께서 나를 넓은 곳으로 데려가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건지셨도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감당하기에 너무 강하였던 원수들로부터 다윗을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재앙의 날에 버팀 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넓은 곳으로 데려가시며 넘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30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내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힘입었을 때 어떤 권능을 경험하였는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힘입었을 때, 치열한 전쟁터에서 군대 사이를 휘젓고 달려가며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하나님을 힘입었을 때, 길을 가로막고 있던 높은 성벽도 뛰어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다윗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오직 주님을 힘입었을 때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다윗에게 힘을 주셨던 다윗의 하나님은, 바로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신,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 각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지극히 큰 권능을 알기 원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성령의 권능의 삶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함께 35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다윗은 심지어 자신의 팔로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신없는 전투 가운데 자신을 향하여 날아오는 화살을 순간적으로 감지하고 팔을 휘둘렀는데 강철로 된 활이 산산조각 부수어진 것인지, 어떤 것인지, 우리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지만, 다윗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권능으로 전쟁 속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어찌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나를 기억하시며, 긍휼로 보상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 함께 21,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1 주께서 내 의를 따라 내게 보상을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아 주셨으니
22 이는 내가 주의 길들을 지키고 사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다윗이 찬양한 하나님은 보상하시며 갚아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가 주님 앞에 깨끗하게, 의롭게, 주의 길들을 따르며,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던 모든 걸음에 대하여 갚아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48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곧 내 원수를 갚아 주시고 백성을 내 밑으로 들어오게 하시며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의롭게, 그리고 은혜롭게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억울함과 슬픔과 고통을 아시고, 원수를 갚아주시며,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무엇을 순종하였든지, 어떻게 주님 앞에 바르게 걸었든지, 주님께서는 그것을 잊지 않으시며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 물 한 잔의 드림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며, 다 기억하시며,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에 은혜와 감사가 충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적으로만 보상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산에 맞지 않는 넘치는 영광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따지신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어떻게 기억하시고 평가하실 것인지를 살짝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어떻게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는지를 기록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한 것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웃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믿음으로 길을 떠난 것과 이삭을 드린 것에 대하여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스스로의 뜻으로 지도자가 되려고 시도한 것이나, 반석을 두 번이나 친 실수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으시고,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한 것만을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이나, 입다와 같은 이상한 모습을 가졌던 재판관들 역시 믿음의 사람들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잘하고 못한 것을 비교하고 가감하여서 보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른 그 작은 믿음의 발걸음을 너무나 기뻐하시며 넘치고 넘치게 갚으시며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늘 주님을 드높이고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나의 하나님
이제 우리 함께 처음에 읽었던 사무엘기하 22장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그가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니라.
2 그가 이르되,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출자시요,
3 내가 신뢰하는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로다. 주께서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시나이다.
4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를 내가 부르리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었습니다. 2절에서는 다윗이 주님을 가리켜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구출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내가 신뢰하는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권능이 있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권능으로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십니까? 단지 성경속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믿음이 좋은 누구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나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함께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떠받쳐 주리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떠받쳐 주리라. 내가 오늘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강하고 위대하시며, 너무나 선하고 좋으신 하나님께서, 다름 아닌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방패도 되시고, 반석도 되시고, 요새도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지혜도 되시고, 힘도 되시고, 거룩함도 되시고, 친구도 되시고, 아버지도 되십니다. 나의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시며, 나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과연 나의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어쩌면 내 마음 한 구석의 일부분만을 내어드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 우주 만물을 가득 채우시는 광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며, 우리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생명이 되시고, 나의 기쁨이 되시고, 나의 만족이 되시고, 나의 강함이 되시며 나의 용기가 되시고, 나의 길이 되시고, 나의 미래가 되시며, 나의 보상이 되시고, 나의 상속 유업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함께 마지막으로 시편 18편 1-3절까지의 말씀을 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1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2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출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신뢰할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로다.
3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를 내가 부르리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바로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우리가 찬양하며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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