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딤후 3:13-17)/로빈

2005.03.0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본문 :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전체를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13절부터 17절까지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오늘 저는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저는 개인적으로 디모데전후서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 나온 것처럼 저도 디모데와 비슷하게 어린아이 때부터 성경 기록들을 배우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유언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청년 디모데를 위하여 기록된 것인데 특별히 청년인 저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의 영감성과 관련해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영감”이라는 단어가 단 2번 등장하는데, 한 곳은 욥기 32장 8절이고 또 한 곳은 바로 오늘의 본문인 16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마지막 날들의 위험함
먼저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또한 이것을 알라. 즉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6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7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 믿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빼앗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자들을 고문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그런 위험한 때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너무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곳에 열거된 모든 항목들이 바로 저와 이 세대에 정확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고 타고난 애정도 없으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고집이 세고 쾌락에 사로잡혀있는 이 시대의 흐름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은 다만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욱 사랑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흉내를 내지만 그 안에 참된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만연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배우는 것 같지만 결코 진리를 참되게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는 세대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8절,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그런데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나니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리니 이는 저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


성경은 입술과 모양으로만 경건하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을 가리켜 진리를 거역하는 자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주님을 향하여 뜨거웠고 어떻게 주님을 잘 따랐는지와 상관없이 오늘 주님을 참되게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얼마나 많은 지식정보를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이런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며 그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 교리의 목적
10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았으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 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기록들을 참되게 배우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교리, 즉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심과 믿음의 원칙과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이 교리를 참되게 받고 영접한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10절과 16절을 잘 비교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에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이 말씀을 10절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리를 참되게 받은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강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책망을 참되게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게 됩니다.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은 사람은 이제 의로 교육을 받습니다. 즉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 경건에 이르도록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을 거듭나게 하실 때 원래 계획하신 그 목적대로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바울과 같은 고난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성경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고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여서 자주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완벽하게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13절에 나온 것처럼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고 또 속임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항상 말씀을 배우니까,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면서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위험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
14절,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 각자에게,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서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쾌락을 따라 갈지라도, 이 세상 모든 믿는 이들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모양과 껍데기만 가질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의 의지와 결심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건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위험한 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9절에서 살펴본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있습니다. 이 성경 기록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살펴서 알고 또 이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굳게 붙잡는다면 이 말씀은 능히 우리를 지혜롭게 하여 이 타락하고 위선적인 시대에서 우리를 이끌어주고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마지막으로 16절, 17절을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단 한번뿐인 짧은 인생 가운데 저의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가망도 없는 자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악착같이 붙드는 믿음으로 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거대한 흐름에게 건짐을 받고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설교제목 그대로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입니다. 참으로 주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귀한 말씀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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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4.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2013년 1학기 서울침례신학교 설교과제 /로빈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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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딤후 2: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말씀입니다디모데후서 2장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다 같이 일어나셔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하는 어떤 사람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그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입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우리가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인 4장 7절 말씀을 보게 되면바울이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기록한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바울은 이제 자신이 주님을 따르며 걸어왔던 모든 사역과 섬김의 일들에 대해서 마무리하고 정리하며곧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리고 이제바울은 믿음 안에서 정말 자기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들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아들과도 같은 디모데또 자기의 뒤를 이어서 주님을 섬기는 일들을 감당해나가야 하는 후계자와 같은 디모데에게오늘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만약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을 섬기던 사역자였다면그리고 자신이 떠날 날이 가깝다는 사실을 직감하였다면마지막으로 유언과 같은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다면과연 우리는 어떤 말들을 남겼을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전체에 걸쳐서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여러 가지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2절 말씀에서는 신실한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리고 3-4절 말씀에서는 고난을 견뎌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는 우승하려고 애쓰는 운동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고, 6절에서는 수고하며 인내하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또한 15절에서는 주님께 인정받은 일꾼이 되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고, 20-21절에서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24부터는 주의 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디모데후서 2장의 내용은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특별히 1-4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면서우리가 하나님 안에서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오늘의 말씀은 1차적으로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남긴 유언과 같은 말씀이지만또한 2차적으로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믿음의 후배들인 우리들을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우리가 오늘 반드시이 말씀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2장 1절에 기록된 처음 단어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2장 1절 말씀은 바로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바로 2장 1절의 말씀이 1장의 내용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상태에 있었습니다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1장 16절에 등장하는 오네시보로그리고 일일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도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많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또한 1장 15절에 나타난 것처럼 아시아 지역에 있던 모든 자를 바울을 버리기까지 이르렀고특별히 디모데도 잘 알던 부겔로와 허모게네에 대해서는 이름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또한 4장 10절에서는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길에는 많은 고난과 슬픔이 따르고떠나가는 자들도 생겨난다는 것입니다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디모데 역시도 많은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뿐만 아니라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믿음으로 인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디모데를그리고 믿음 안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을바로 오늘 우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원했습니다바울은 1장의 내용에서 이렇게 우리들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있지만주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힘을 내고 있는 형제들이 많이 있으므로그러므로 힘을 내서 주님을 따르자고 격려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2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난 뒤에 영원한 영광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좋은 군사에게는 전쟁의 승리 후에승급과 훈장이라는 영광이 주어질 것이고운동선수는 경기를 마친 후에 월계관이라는 영광이 주어질 것이고농부에게는 모든 수고 후에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우리 함께 디모데후서 2장 10-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딤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라.

11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

12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시리라.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삶 가운데 받는 모든 고난에 대하여 영원한 영광과 통치권으로 보상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을 견뎌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울과 디모데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자들은 통치자들이었습니다그들은 유대민족의 지도자들이었고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주님의 제자들은 바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그들의 모든 통치에 복종하고 따르는 가운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이것은 얼마나 서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그런데 너무나 놀랍게성경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제자들에게 영원한 통치와 영광을 보상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디모데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까요. “그래맞아오늘은 내가 비록 통치자들로부터 고난과 압제를 받지만장차 주님이 오시면의로우신 심판자께서 오시면의의 왕관을 씌워주시고영원한 통치의 영광을 주실거야.”

 

오늘의 본문 2장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

또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하는 어떤 사람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그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디모데는 그러므로라고 시작되는 이 말씀을 구구절절이 마음에 담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그러므로 내 아들아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어주님을 끝까지 신실하게 따르며좋은 군사와 같은 충성으로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디모데는 이 말씀을 읽으며 뜨거운 눈물과 함께또한 마음에 벅차오르는 감동과 새로운 결심으로주님을 바라보고다시 힘을 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처음 디모데가 이 편지를 읽으면서 가졌던 그러한 마음이 전달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신실한 사람들

2절 말씀은그 동안 디모데가 신실하게 듣고 배운 진리의 말씀을 다시 신실한 자들에게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이 귀한 복음의 말씀이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 전달되어야 하기에계속해서 신실한 자들을 통하여 말씀이 맡겨지고또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도누군가가 이 말씀을 맡아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기 때문에우리들도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해 주었기에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고지옥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신실한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진리심오하고 오묘한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이미 우리가 신실한 주님의 종들을 통하여 듣고 배우고 맡은 것들을 다시 전달하라는 것입니다주님 안에 있는 모든 부모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이 신실한 믿음의 전수자가 되어야 합니다내가 듣고 배운 믿음삶 속에 살아 역사하는 가장 실제적이고 생생한 믿음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세상을 살아가는데 당장 필요한 지식과 기술만을 전수하지 말고그것보다 더 중요한영원한 세상에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의 길을 전수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필요한 덕목은 바로 신실함입니다성경을 잘 이해하고 가르치기 위해 지혜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때로는 해박한 지식과 이해력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설명을 잘 할 수 있는 능력뛰어난 언변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성경은 다른 모든 단어들을 뒤로하고신실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왜 그렇습니까이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조금 어리석을 수 있고우리가 조금 부족할 수 있고우리의 말이 조금 어눌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신실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주님께서는 우리가 신실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우리 이제 함께 3-4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먼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하는 어떤 사람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그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3-4절 말씀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뎌내라고 말씀하십니다앞으로 계속해서 언급되는 군사운동선수농부는 모두 신실한 자들입니다모두 규칙적이고 꾸준한 수고를 하는 사람들입니다특별히 사도 바울은 첫 번째로 군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쟁에 참여하는 군사가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군사는전쟁의 일 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피곤하다고 집에 가서 쉬는 것도 불가능하고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마음대로 진지를 이탈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그는 한 명의 군인으로서사령관의 지시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는 오직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오직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오직 그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다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모두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전쟁에 참여하는 군사들이 모두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전쟁에 참여한 이상은 최선을 다해 싸워서 승리해야만 합니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놀이공원이 아니라영적 전쟁터입니다하나님의 진영과 사탄의 진영이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이 전쟁터에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우리는 오직 우리의 총사령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하는 군사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먼저우리는 고난을 견뎌내야 합니다믿음으로 인해 고난이 올 때우리는 그 고난에 굴복하지 말고고난으로 인해 뒤로 물러서지 말고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할 때파도는 끊임없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이처럼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에 고난은 끊임없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성경은 믿음 생활을 하면모든 고난이 사라진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견디어내고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는 또 다른 길은 바로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크고 작은 일들을 하게 됩니다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들이지얽매인 사람들이 아닙니다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그네로서 잠시 지나가는 곳이지결코 우리의 고향이나 전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에 얽매이게 되면우리는 믿음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믿음에는 반드시 세상을 버리는 일이 따라옵니다세상에 살고 있지만세상에 묶여있지 않고언제든지 주님이 부르시면 떠나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재산이 많을수록가진 것이 많을수록이 땅에 쌓아둔 것이 많을수록우리는 믿음의 걸음을 무겁게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행군하는 군사는 전쟁에 필요한 필수품만을 가방 하나에 매고 걸어야 합니다많은 것을 지고 갈 수 없습니다우리가 세상의 많은 것을 가져가려한다면 우리는 지쳐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오늘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은혜

그렇다면우리는 어떻게 해야 신실한 자가 될 수 있고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을까요우리는 아마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서, “맞아신실한 사람이 되어야지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지고난을 견뎌야지.세상에 얽매이지 말아야지.”하고 결심할 것입니다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조금 더 결심하고조금 더 노력하고조금 더 잘 해보려고 발버둥치지만우리는 또 다시 넘어지고또 다시 실패하고또 다시 좌절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과연 우리는 how, 어떻게 해야, 2절에 기록된 신실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이며, 3-4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1절에서 그 해답을 찾기 원합니다. 1절에 나타난 전제 조건을 우리가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오늘 저는 설교 말씀의 제목을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라고 잡아보았는데요바로 이 말씀에 우리의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우리 함께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

 

우리의 해답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라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바로 이 은혜 안에서 신실한 자가 되며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고은혜 안에서 고난도 견딜 수 있으며은혜 안에서 세상도 이길 수 있고은혜 안에서 우승하려고 달릴 수 있고은혜 안에서 수고하는 농부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좋은 군사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결혼 문제로 걸려 넘어지고,돈 문제직장 문제자녀교육 문제에서 걸려 넘어지고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갈등 문제로 실족하며믿음에서 떠나가는 수많은 성도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치열한 영적 전쟁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디모데후서 1장 9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이라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라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셨습니다이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2절의 인사말에서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또한 디모데후서의 가장 마지막인 422절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아멘.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이 은혜는 자격 없는 우리들을 부르신 은혜이며날마다 실패하고 넘어지는 우리들을 격려하며 또 다시 받아주시며 또한 일으키시는 은혜입니다이 은혜는 더럽고 교만하며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나를 향해감당할 수 없이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풍성한 주님의 긍휼과 사랑입니다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날마다매순간 필요합니다우리가 강건하고 싶어서 강건해 지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신실하고 싶어서 신실해지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군사처럼 고난을 견디고 싶어서 견뎌지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신에게 질문해보기 원합니다나는 신실한 자인가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고 있는가라는 질문보다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은혜 안에서 걷고 있는가라고 질문해보기 원합니다나의 삶이 메마르고믿음의 걸음이 힘겨운 이유는결심이 부족하고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아니,은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풍성히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형식적인 인사말이 아닙니다은혜는 모든 것입니다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혜로 시작하였고은혜로 유지되고 있으며은혜로 완성될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자신의 모든 수고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바울은 어떻게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리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그 비결은 바로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우리가 힘이 없을 때찬양을 하고또 말씀을 읽고기도를 드리면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은혜입니다자격 없는 나를 은혜로 부르신 주님오늘도 연약하고 어리석고실패하고 쓰러지는 이러한 나를 여전히 은혜로긍휼로 대하시는 선하신 주님이러한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을 때에우리는 강건해 지며신실해지며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군사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풍성히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은혜가 오늘 우리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그리고 이러한 은혜 안에서우리가 강건하고 신실한 주님의 군사로 서서오직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2.11.23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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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주신 목적(딤후 3:16-17)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입니다.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오늘 저는 성경을 주신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여러분이 혹시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그리고 꼭 필요한 물건 3가지를 챙길 수 있다면 무엇을 챙기시겠습니까저는 아마 총과 맥가이버 칼과 성경책을 고를 것 같습니다총은 위험한 짐승들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필요할 것이고맥가이버 칼은 생존에 필요한 도구들과 물품들을 마련하는데 필요할 것이고성경책은 극한 상황 속에서 주님과의 동행함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모나돈이나세상의 즐거움이나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도 아니고오직 하나님의 말씀오직 성경입니다함께 찾지는 않겠지만,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나지혜나능력을 기뻐하지 않으시고사람의 믿음을 기뻐하십니다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한다면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우리가 암송한 로마서 10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 함께 암송해 볼까요?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아멘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배시간에 예배당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정말 우리의 귀를 열고마음을 활짝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받아들였느냐가 중요합니다우리가 단순히 눈으로목소리로 성경을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정말 눈을 크게 뜨고보물을 찾는 해적과 같이주님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찾기 위해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읽고받아들였느냐가 중요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만큼주님의 음성을 들은 만큼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감

오늘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의 말씀을 살펴볼 것인데이 말씀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성경말씀을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지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지우리가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16절의 앞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모든 성경 기록이라는 것은 바로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전서에 들어있는 모든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이 말씀 중의 그 어떤 단어나 글자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

 

영감이라는 것은할아버지 영감님이 아니라바로 영적인 감동을 말하는 것입니다영감은 바로 하나님의 호흡숨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이 성경 기록 안에는 하나님의 숨소리가 들어있습니다성경이라는 책 자체는 종이와 잉크로 만들어진 것이지만이 안에 기록된 모든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나 시편을 읽을 때에도 생생한 감동을 느낄 수 있고오늘 살아계셔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말씀을 읽으시면서묵상하시면서들으시면서눈을 감고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말씀하소서주의 종이 듣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사무엘과 같이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감으로호흡으로숨결로 생명을 불어넣으신 말씀입니다말씀을 대할 때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다른 사람들에대한 생각다른 일들에 대한 생각을 다 내려놓고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나를 위해 영원히 손에 못 자국을 가지신 사랑의 주님나의 하나님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성경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성경은 언제나 오늘을 사는 나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리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그렇다면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주셨을까요과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에우리에게 자신의 영감으로숨결을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말씀을 주셨을까요?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교리입니다. “교리라는 것은 쉬운 말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선생님이 승연이가 전기코드를 만지려고 할 때, “아니야안 돼.”라고 무서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어른들을 만나면 안녕하세요인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숨결로 주신 것인데그 첫 번째 목적은 바로 교리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가장 먼저 교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하하나님께서는 내가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을 원하시는구나.”

아하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자주 들어서 믿음이 자라나기를 원하시는구나.”

아하하나님께서는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구나.”

아하하나님께서는 내가 모든 일에 성실하기를 원하시는구나.”

아하하나님께서는 내가 친구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구나.”

아하나는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구나.나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구나.”

 

이러한 모든 가르침과 배움이 바로, “교리입니다교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성경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은 바로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책망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교리 다음에 등장하는 단어는 우리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 단어입니다무엇이죠바로 책망입니다책망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사람들은 모두 칭찬받기를 좋아합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칭찬이 아니라 책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칭찬해주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일까요결코 그렇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칭찬을 잘해주고칭찬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칭찬해 주시기로 정해두신 날이 있습니다그 날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입니다그날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던 우리의 모든 수고와 섬김과 희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칭찬해 주시고놀라운 영광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잘했다착하고 신실한 종아,너가 지극한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이제 나와 함께 큰 도시들을 통치하도록 하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세상에서 큰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시려고오늘 우리에게는 더 많은 책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하나님의 뜻과 교리를 배우게 될 때우리는 마음에 찔림을 받게 되고 책망을 받게 됩니다.우리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교만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며 마음속에 책망을 받게 됩니다우리는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난하고 상처를 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책망을 받게 됩니다우리는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모든 일에 감사하며 부지런히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음속에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말씀을 들을 때 찔림을 받고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하나님께서 바로 그 목적으로 성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들으면서 마음에 책망을 받고 찔림을 받을 때그것이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마음에 아무런 찔림이나 책망이 없다면,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바로잡음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교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가르쳐주며책망은 우리의 길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다른지를 알려주고 마음에 찔림을 줍니다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과정은 바로 바로잡음이라는 것입니다우리가 성경 기록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마음에 책망을 받았다면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바로잡혀져야 합니다.

 

야고보서 말씀에서는 성경을 가리켜 거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여러분오늘 아침에 다들 거울 한 번씩 보고 나오셨죠우리가 거울을 보는 이유는 내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스스로 감탄하기 위한 것일 때도 가끔 있지만주로 우리가 거울을 보는 이유는 내 모습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넥타이가 제대로 되었는지단추가 잘못 끼워지지는 않았는지머리가 단정하게 되었는지여드름이 엉뚱한 곳에 나지는 않았는지를발견하고바르게 고치기 위해서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이유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면서우리의 잘못된 모습들을 정확히 보면서더욱 멋지고 훌륭한 모습으로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함께 찾지는 않지만욥기 5장 1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자는 행복한 자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또한 잠언 3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가 기뻐하는 아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 같이 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바로잡아 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치시고책망을 주시고또한 바로잡으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주님의 바로잡으시는 손길을 겸손하고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면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아무리 잘못해도 때려주거나 혼내주는 사람이 없는 버림받은 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잘못할 때마다 때려주고 혼내주는 부모님과 선생님을 가진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더 나아가 전능자 하나님께서,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바로잡아 주신다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자입니다우리가 주님의 책망을 받을 때주님께서 우리를 바로잡으려고 하실 때기쁘게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하기 원합니다그러면 우리는 요셉처럼주님의 때에 영광중에 높아질 것입니다.

 

 

의로 교육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의 호흡으로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교리,마음에 찔림을 주며 책망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고집과 습관을 바로잡으시며 바로잡음주님의 진리와 의 안에서 바르게 전진하여 나아가도록 교육하여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교육의 시작과 기초는 바로 성경입니다세상의 교육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을 빼고 교육하기 때문입니다세상의 교육은 더 많은 타락과 폭력과 거짓과 교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그러나 성경 말씀 안에서의 참 교육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을 통해 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이제 우리 함께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16절이 과정이라면, 17절은 바로 결과입니다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인 바로 여러분들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할 것입니다모든 전투를 위해 특별훈련을 받은 특전사처럼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훈련을 받은 전문가처럼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섬기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던 요셉처럼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람들,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봉일천 사람도 아니고일산 사람도 아니고한국 사람도 아니고갈보리 사람도 아니고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초청하시고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완전하게 만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여러분을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진 일꾼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여러분에게 영원한 왕국을 통치하는 놀라운 영광과 권능을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완전하게 될 수 있을까요이것은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성경 기록들은 우리를 책망하고 바로잡아주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그것은 바로 겸손의 사람이며사랑의 사람입니다그것은 바로 긍휼의 사람이며순종의 사람입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를 작품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정리

선생님의 눈에는 여러분이 스무 살서른 살이 되었을 때얼마나 멋진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질지 보이는 것 같습니다만약 그때까지 주님이 오시지 않고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다면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오심이 지금보다 더 가까운 때에 주님을 섬기는 최후의 전사들이 될 것입니다세상은 지금보다 더 타락할 것이고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주님을 대적할 것입니다그러나 여러분은 끝가지 남아서 믿음을 지키며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마지막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의 나이쯤 되었을 때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이 선생님보다 더 훌륭하고 온전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영혼들을 긍휼히 여기며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로 서 있을 것입니다우리 학생들 가운데서 뜨거운 믿음의 설교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신실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교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는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의 교육을 잘 받는다면,우리는 모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서 한 자리씩 크게 차지하고영원한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힘내시고하루 한 가지씩 책망을 받고바로잡히고의로 교육을 받아 전진하는 발걸음을 걷기 원합니다오늘도 한 걸음 더 전진하시기 바랍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2.02.14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화요일 채플설교/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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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일꾼(딤후 2:15)

이승선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나이가 어리다고 믿음이 무조건 작거나나이가 많다고 믿음이 무조건 크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먹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우리는 지난 한 주간 믿음의 모범이 되었습니까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요아니면하나님을 이미 믿는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요우리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작년보다 올해에지난달보다는 이번 달에지난주보다는 이번 주에어제보다는 오늘 조금씩 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오늘도 설교의 요점을 정리해서 필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입니다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부끄럽지 않은 일꾼입니다오늘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의 마음

삼국지에 보면 사내대장부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이 말은 사람이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심지어 나이가 아주 어린 아이들 조차도 자신이 그림을 그리거나 무엇인가를 만들었을 때부모님이나 다른 어른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이 나의 말을 잘 들어주기를 바라고나의 말에 따듯하게 반응해 주기를 바라고나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우리가 농담을 할 때도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고 웃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고우리가 화를 낼 때에도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잘 듣고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하는 이유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것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반대로 표현하면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입니다내가 농담을 했을 때 아무도 웃지 않거나내가 화를 낼 때 아무도 응답해 주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슬플 것입니다이 세상 사람들도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관심을 받고 싶고사랑을 받고 싶고 또 칭찬을 듣고 싶고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을 것인가?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인정받는 일꾼이 되도록 힘쓰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이 중요한 질문으로 마음속에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인정받을 것인가?”, “나는 누구에게 인정받을 것인가?”

 

저는 여러분과 같은 어린 학생들과 축구를 하면서 제일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심지어 선생님은 너무 잘해요선생님 사기에요.”라는 말까지 듣습니다우리 학생들은 아마 저의 축구실력을 인정해 주는가 봅니다그러나 만약 호날두나 메시 같은 선수들이 와서 저의 축구실력을 본다면 어떨까요제가 축구를 잘한다고 인정해 줄까요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인정받을 것인가?”

 

여러분은 누구에게 인정을 받기 원하십니까? “나는 정말 천재야역시 나는 최고라니까.”하면서 스스로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만족하시겠습니까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는 몇 마디 말을 듣고 만족하시겠습니까여러분여러분의 눈을 수준 낮게 이 땅이나 사람들에게 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여러분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여러분도 삶의 방향을 잡을 때자기 자신이 인정하거나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을 바라지 마시기 바랍니다그러한 것은 너무나 수준이 낮고 하찮은 것입니다여러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인정받을 것인가?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우리가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주목하여 보기를 원합니다이 말씀에서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특별히 여기서 영어단어로는 “study”라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서 공부해야 할까요?

 

과거에 축구시합을 할 때에는 수비수가 골키퍼에게 패스를 하면 골키퍼가 바로 손으로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그러나 나중에는 규칙이 변경되어서수비수가 골키퍼에서 패스를 하더라도 골키퍼는 발로만 받을 수가 있지손으로 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우리나라 국가대표선수들은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하였고,골키퍼는 그 공을 손으로 받았습니다그러자 심판이 페널티킥을 선언하였고우리나라는 황당하게 골을 먹었습니다.왜 공을 먹혔나요규칙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디모데후서 2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또한 사람이 우승하려고 애써도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관을 얻지 못하며

 

운동선수가 이기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애쓴다 할지라도 규칙을 어긴다면 실격을 당하거나 경기에서 지게 될 것입니다마찬가지입니다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타올라 여러분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선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열심히 하였다고 해봅니다그런데 만약 그러한 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들이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함께 마태복음 7장 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21 내게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너희는 내게서 떠나라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주님을 위해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그들과 상관이 없다고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이들은 열심히 일했고주님의 이름으로 일했지만주님이 인정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겠습니까단순히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어떠한 것인지 여러분이 정확히 알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한 가지 작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을 하십시오아주 작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말씀을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배워야 할까요다함께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보시겠습니다.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묵상하고배울 때에 우리는 반드시 이 말씀에 기록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16절에서 보시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하나님의 살아있는 숨결로 불어넣어진 성경말씀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성경을 읽고묵상하고배우게 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교리를 만나게 됩니다.

 

교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예를 들면하나님께서 가인의 길인 종교와 행위의 길을 거절하시고아벨의 길인 복음과 은혜의 길을 받아주신다는 어떠한 기준이며 가르침인 것입니다마음에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죄와 같다는 가르침 또한 교리입니다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가르침을 한 단어로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열어 교리를 배우게 되거나또 다시 기억하게 될 때우리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책망이 다가오게 됩니다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경우 우리에게 위로와 감동이 되기도 하지만우리가 교리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될 때 우리는 동시에 우리의 잘못에 대한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여러분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때 나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춰지고 마음속에 찔림이나책망이나뉘우침이 있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았다는 증거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았다면하나님의 교리를 잘 배웠다면 우리는 마음에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16절 말씀을 보십시오교리와 책망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바로 바로잡음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를 혼내고 책망하면서 끝나지 않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우리를 바로잡으십니다우리의 실생활의 모든 말버릇을 비롯하여 모든 생활습관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우리가 익숙하게 해오던 어떤 습관을 고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여러분더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기 전에오늘 우리의 악한 습관이 더 오랜 세월동안 굳혀지기 전에아직 나이가 어릴 때에 반드시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이 있었다면이제 우리는 바로잡힌 상태에서 의로 훈육되어질 수 있습니다.나무가 옆으로 자라고 있다면 그것을 억지로 잡아당겨서라도 바르게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나무가 이제 바로 섰다면 그대로 위로 쭉 자라기만 하면 됩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책망을 받고,바로잡혔다면 이제 의로 훈육되어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나게 될 때에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디모데후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러한 과정을 통과한다면 완전하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또한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완전하고 철저한 준비가 갖추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생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온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준다할지라도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기 않는다면우리의 인생은 비참하고 절망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반대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선한 일꾼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행복한 인생은 어디에서 옵니까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데서 옵니다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인정하십니까단순히 열심히 무엇인가를 바쁘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규칙대로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여서 교리를 배우고책망을 받고바로잡히고의로 교육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하게 갖추어진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의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철저히 갖추어진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십니다나이의 제한도 없고자격의 제한도 없습니다다만 그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며 준비하는 사람인가를 보실 것입니다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꾼입니까아니면 그것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까여러분은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12.17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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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길(딤후 2:22)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22절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우리
우리는 본래 우리 자신의 뜻과 유익만을 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길이며, 거짓과 교만과 더러움으로 가득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으며 영원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더러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비록 연약할지라도, 비록 자주 넘어질지라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뜻과 유익만을 구하는 길로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우리들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숨길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한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고 생각했지만,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한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게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받아서 읽고 있는 젊은이 역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어리고 연약한 자를 부르셔서 영광의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게 하신 은혜에 감격해 하는 디모데라는 청년이 사도 바울의 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역시 주님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우리 갈보리침례교회가 이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격려하시고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우리가 이제 우리 자신의 길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자 할 때 우리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늘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 중의 한가지가 바로 청년의 정욕입니다. 사도 바울은 혈기왕성한 디모데를 향해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인 디모데에게만 정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는 육신의 정욕과 욕심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육신의 많은 정욕들 가운데 특별히 명예욕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갈라디아서 5장 2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갈 때에 우리에게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육신의 정욕 가운데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하기 원하고, 드러나기 원하고, 두각을 나타내기 원하고, 높여지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젊을수록 그러한 욕망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항상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놓고 논쟁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더 큰 자라고 누누이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고 가난하고 낮아지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라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도 더욱 낮아지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침례자 요한이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 4:30)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고 높이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나, 교제를 나눌 때나, 간증을 할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시길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는 않지만 주님이 보시는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 주님의 일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모르지만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칭찬하실 그 칭찬을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때론 오해하더라도, 사람들이 나쁘게 평가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주님을 잘 따라 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자신의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는 길이요,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참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의미가 없고,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참되게 평가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얻는 칭찬과 영광을 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러한 모든 영광이 다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칭찬과 영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실 그 날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낮아질 수 있고 더 쇠잔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만이 높여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이제, 잠시 순수한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마치 바다 속의 산호초가 그대로 보이는 맑은 바닷물같이 투명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이란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인 사람을 말합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예는 예라고 말하고,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모습 그대로, 조금 모자라면 모자란 모습 그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모습 그대로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이 곧 순수한 사람입니다. 순수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며 믿을 수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자신이 대하는 사람에 따라 말이나 행동이 바뀌지 않고 한결 같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어떤 숨은 의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다르고 뒤에서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은 순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나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게 될 때 우리는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순수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화려한 장식으로 자신을 두르고 있지만 실제로 생명의 열매를 맺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가져다가 붙여놓은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장식품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한 참된 열매입니다.

다같이 야고보서 3장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러우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
세상의 지혜는 자신을 포장하고 속임수를 사용하지만, 위로부터 난 지혜는 순수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평화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게 될 때에 우리는 긴장을 풀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무엇인가 요구하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아니라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위선을 부리지 않습니다. 
높이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게 되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군림을 하려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차별하게 되고, 위선을 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은 정치인들을 볼 때 순수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순수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함께
우리가 우리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 말씀을 대할 때 가장 주의해서 새겨야 할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우리는 주님을 나 홀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형제 자매들과 함께 따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우리 주님은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까? 시간과 공간의 아무런 제약이 없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배가 고프기도 하시고, 피곤하여 잠들기도 하셨습니다. 
과거에 로마 카톨릭이 침례성도들을 맹렬히 박해하고 죽일 때에 사람을 벽 속에 가둬놓고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벽 속에 갇힌 사람은 무릎이나 허리를 굽힐 수도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 큰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야 했습니다. 나중에 한 성도가 갇혀 죽었던 감옥의 벽에서 작은 그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그림이었는데, 십자가의 동서남북에 이렇게 쓰여진 것입니다. "주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라고 각각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다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벽 속에 갇혀서 모든 활동에 큰 제한을 받은 이 성도는 그러한 환경 가운데 우리 주님의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깊고 높은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려고 얼마나 큰 제한을 감당하셨는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하시고자 하늘의 영광을 떠나셨고 답답하고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한 디모데를 권면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형제들을 실족시키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나와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어떻게 나 자신을 부인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것은 나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나 혼자 성경 읽고 찬송하고 기도할 때는 십자가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형제 자매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분 좋으면 조금 어울리고, 기분 나쁘면 홀로 분리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이 더럽고 천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는 그 누구와 함께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따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다 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또 도전을 주고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번 조별모임에서 교제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함께 나누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교제란 무엇입니까?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경구절들만 서로 암송해서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 교제입니까? 서로 찬송가 가사나 설교 말씀을 나누는 것만이 성경적인 교제입니까? 마음에 가득한 어려움이나 불만을 전혀 말하지 않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말만 하는 것이 성격적인 교제입니까? 또는 지체들을 만날 때, 오늘 아침에 말씀보고 기도하셨어요?, 형식적으로 하신거 아니고 정말 은혜로운 시간이었나요?, 라고 물어보는 것이 성경적인 교제이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진실된 교제를 나누고 함께 하기 원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먼저 헛된 영광을 구하고 경쟁하며 시기하는 마음을 다 버려야 합니다. 또한 순수한 마음으로 꾸밈없이 서로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교제를 통해 안식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늘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주님을 따르도록 함께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세리들과 죄인들은 바리새인들 근처에도 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는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안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돌이키고 주님을 따르는 회개와 회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며, 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지금도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에서도 괴롭지만, 머리에서 열이 나면서 머리를 긁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온 몸을 긁게 됩니다. 어릴 때는 김치를 먹어야 한다고 많이 혼났습니다. 너무 매워서 먹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억지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커다란 배추김치를 손으로 들고 죽죽 찢어서 밥에다 싸서 한입 가득 물고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비록 내가 매워서 싫어하는 김치이지만 참 맛있게 보인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워치만 니라는 한 형제님은 이런 글을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 읽고 기도하셨어요?"라고 물으면서 왜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하는지 주님과의 교제가 왜 중요한지, 왜 주님께 순종을 해야하는지 권면하고 설명해 주는 일도 귀한 일이지만, 그 형제 앞에서 김치를 죽죽 찢어서 먹음직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섬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한다는 권면을 받으면 "기도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 자매가 기도하면서 주님과 어떻게 만나고 교제했는지 간증을 하게 되면 우리는 "나도 저 형제처럼 기도하고 싶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 자신의 간증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저 사람이 만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한 간증을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위대한 순종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고, 그 간증을 듣는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순종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다는 갈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실패했다가 돌이킨 간증을 하는 이유는 그 간증을 듣는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나도 저 형제처럼 용기를 내서 다시 돌이키고 주님을 따라야겠구나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넘치는 풍성함을 흘려보내고 나누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빈손으로 온 지체들도 부담 없이 안식하며 격려 받고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은혜가 넘치는 지체도 더 큰 은혜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고린도후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
온 우주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도 하시지 않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믿음을 지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 선택의 의지를 주셨고 결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사람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지옥에 가기로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많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 믿음이 큰 지체도 있고 연약한 지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믿음으로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고 지배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지체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함께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우리에게 함께 주를 부르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 문제가 많고 연약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우리는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더 많이 부어져서 형제 자매들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11.19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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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해의 4계절(딤후 2:15)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우리 교회는 지난 달 조별 모임에서 "성경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공부를 했었고, 지난 주 수요일과 주일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 또한 교회의 흐름에 맞춰서 성경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들었고 또 잘 아시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좋은지, 방법적인 부분들을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경 이해의 4계절"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1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4계절이 있는데 이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나 1년 내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해야하는데, 말씀을 대하실 때마다 늘 기억하기 좋으시라고 제목을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성경 이해의 4계절, 먼저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본문 설명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하나님께는 두 종류의 일꾼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일꾼이고, 한 종류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인정을 받고 어떤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할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데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연지 자매를 사랑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제가 좋아하는 튀김을 사준 적이 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가 연지 자매를 사랑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핸드폰 줄을 사줬는데 연지 자매는 핸드폰 줄이 거추장스럽다고 아예 하고 다니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데 있어서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이 소용이 없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의 기준에 우리가 맞춰야 합니다. 
모두가 잘 아시는 이사야 55장 8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사랑과 긍휼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그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인정하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온 우리의 인생 기간 동안 우리가 여러 가지 배움과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지식과 관념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생각은 고집할 것이 아니고, 과감하게 버리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미혹이 가득한 세상
오늘날 이 세상은 정말 미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짓 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진화론이라는 속임수도 있고, 이성주의나 인본주의와 같은 철학적인 속임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론이나 풍유적 해석과 같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속임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혹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떤 분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제 눈에도 글이 들어와서 보게 되었는데, 그 글에는 대략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창조자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 우주는 당신의 편에 있고 당신은 우주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정도 읽고 눈을 감으면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창조자라고 하다니, 참 어리석은 말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그 책에 눈이 가게 되었는데 그 책에서는 놀랍게도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그러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강렬하게 우주를 향하여 선포하고, 또 그것을 이미 당신 자신의 것으로 의심하지 말고 믿으면 정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고,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으로 벅차오르도록 고무시키는 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제목을 보니 시크릿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비밀이란 뜻이죠? 요즘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네이버에서 시크릿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여러 가지 글 중에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 이런 제목이 있었습니다. "시크릿이란 책 때문에 기독교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 책을 읽고 난 한 학생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점점 흔들리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면서 오히려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글을 읽고 기독교분들이 뭐라고 반박하시겠지만, 그것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관점이 아니겠냐고 적혀있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서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오늘날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힘든 마지막 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사탄의 미혹하는 역사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지 말고 아직도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선포할지 모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이해의 4계절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성경의 계시를 받기로 마음을 먹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눈을 감고 한 번에 성경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마침 마태복음 27장 5절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그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그 남자는 이상한 구절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다시 조금 더 앞부분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37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그 남자는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다시 한번 더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 27절을 짚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그 남자가 어떻게 했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 일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 이해의 4계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4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문자적 해석, 두 번째는 문법적 해석, 세 번째는 문화적 해석, 네 번째는 문맥적 해석입니다.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 해석입니다. 물론 성경을 공부하는데 꼭 이 4가지 원칙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원칙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이 4가지 중에서 생략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4가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어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이 4가지 원칙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오류와 속임수에 빠지고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기록된 말씀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달리 사람에게 말하고 글을 쓰는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과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만약 성경을 읽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성경을 해석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경을 주신 의미가 전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분명한 말로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군가가 가르치고 해석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칠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면, 우리는 문자적으로 칠일 동안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칠일이 문자적인 칠일이 아니고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천년 동안 지상 왕국이 있을 것이라 말씀한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천년이란 기간 동안 지상에서 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천년이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고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 기록한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적으로 오셨다고 가르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지옥은 문자적인 지옥을 의미하고, 성경에서 하늘이란 문자적인 하늘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과 미혹의 속임수들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단어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어지럽혔기 때문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서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고,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내 생각을 추가하지 말고 문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법적 해석
또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반드시 언어의 문법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했는지, 과거 시제로써 이미 이루어진 일인지 아니면 미래 시제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인지, 단수인지 복수인지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한 예로 갈라디아서 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면서 "네 씨에게"라고 단수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바로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는 것은 "씨들에게"라고 복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씨에게"라고 단수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대충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고 차분하게 또 분명하게 읽으며 이해해야 합니다.


문화적 해석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원칙은 바로 문화적 해석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기록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원전 1500년 전에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기원 후 90년 사도 요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약 1600여년의 기간을 흘러오면서 40여명의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자들의 모든 인간적인 특징을 사용하시면서도 아무런 오류가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록할 수 없는 놀라운 책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왕이나 의사, 서기관, 제사장과 같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농부나 어부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로운 때에 살면서 성경을 기록했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 나고 포로로 잡혀갈 때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우리는 그 당시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가 현대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보다는 먼저 그 당시에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구약의 대언서라면 그 대언서를 읽는 구약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알아야하고, 신약의 서신서라면 그 서신서를 읽는 교회가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 동일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 3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마치신 후에 "일어나라. 우리가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15장에서는 겟세마네로 가는 길 가운데 포도원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포도나무를 가리키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니"하시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각 효과와 함께 위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6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서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불"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지옥"을 연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구원을 잃어버려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포도원을 지나면서 제자들은 버려진 가지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불이 붙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쓸모없는 가지들을 모아서 불로 태웠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처럼 버려져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쓸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 중에 아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만, 불타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저렇게 쓸모없이 버려지는구나, 하고 이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두 아시지만 우리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또 성령님께서는 역사적인 어떤 사실이나 배경에 대해서 우리에게 조명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적인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의 도움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많은 선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선물들은 바로 신실한 성경 학자들이고 그들이 남긴 많은 연구 자료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항상 틀릴 수 있고, 성경은 사람의 해석대로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책을 참고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다른 부분은 버리고, 성경과 합하는 부분은 받아들여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맥적 해석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마지막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맥적 해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 어떤 단어나 문구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14편을 보시겠습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 이 말만 떼어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의 어떤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구절 전체를 읽어보아야 합니다. 또 그 구절의 앞뒤에 어떤 말씀이 어떤 주제로 흐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장의 전체적인 흐름도 보아야하고, 때로는 그 책 자체의 주제와 배경을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또한 성경 전체의 조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24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날 수많은 이단들이 이 말씀을 사용해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아닌, 행위로 받는 구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라고, 누가 구원을 받느냐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이해의 4계절을 떠올려야 합니다.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 해석을 해야합니다.

먼저 우리는 "끝까지"라는 단어와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끝까지"라는 단어가 우리의 인생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기간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환경이나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 보면 제자들이 세상 끝의 표적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시는 4절에서 바로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속이는 자들이 얼마나 대범한지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쓰여진 말씀을 가지고 속이고 있습니다. 마치 요즘 우체국이나 은행을 가장해서 전화를 하는 사기꾼들과 비슷합니다. 실제로는 자기들이 사기꾼이면서 당신이 사기를 당했으니 신상정보를 제공해서 잘 해결하자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이 고통의 시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14절에 보면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면 끝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맥 가운데서 시작이과 끝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소한 "끝까지" 견딘다고 했을 때는 어떤 고통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21절에 보시면 이 고통의 기간은 바로 "큰 환난", 즉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전무후무한 대환란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16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20절에 보면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대환란을 피하여 도망하고 도피하는 유대인을 향한 실제적인 구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대환란이라는 주제가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적인 조화를 살펴야 합니다.

구약 성경 요엘서 2장 32절에서도 이것과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 주가 말한 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가 행위로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지켜서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고, 대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이 끝까지 견디고 산으로 도망할 때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출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
마지막으로 베드로후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6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나니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17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21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은 교묘히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므로 아주 확실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오직 3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재림 때의 모습을 보여주신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짓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예 대사도 없습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그 놀라운 광경 가운데 직접 말을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직접 들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도 직접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날마다 간증하고 책도 쓰고 세계방방곡곡을 돌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본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내가 귀로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라고 유언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는 만큼 우리의 믿음은 더 자라날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온전하게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으로 읽고 이해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5.03.02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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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딤후 3:13-17)


제목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본문 :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13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그 까닭은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전체를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13절부터 17절까지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저는 개인적으로 디모데전후서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 나온 것처럼 저도 디모데와 비슷하게 어린아이 때부터 성경 기록들을 배우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유언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청년 디모데를 위하여 쓰여진 것인데 특별히 청년인 저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의 영감성과 관련해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영감”이라는 단어가 단 2번 등장하는데, 한 곳은 욥기 32장 8절이고 또 한 곳은 바로 오늘의 본문인 16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론
마지막 날들의 위험함

먼저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또한 너는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그 까닭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타고난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기 때문이니 너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6 이는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7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 믿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빼앗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자들을 고문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그런 위험한 때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너무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곳에 열거된 모든 항목들이 바로 저와 이 세대에 정확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고 타고난 애정도 없으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고집이 세고 쾌락에 사로잡혀있는 이 시대의 흐름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은 다만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욱 사랑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흉내를 내지만 그 안에 참된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만연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배우는 것 같지만 결코 진리를 참되게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는 세대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8절,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이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니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같이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임이라.

성경은 입술과 모양으로만 경건하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을 가리켜 진리를 거역하는 자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주님을 향하여 뜨거웠고 어떻게 주님을 잘 따랐는지와 상관없이 오늘 주님을 참되게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얼마나 많은 지식정보를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이런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며 그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리의 목적
10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고 있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 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기록들을 참되게 배우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교리, 즉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심과 믿음의 원칙과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이 교리를 참되게 받고 영접한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10절과 16절을 잘 비교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에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이 말씀을 10절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리를 참되게 받은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강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책망을 참되게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게 됩니다.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은 사람은 이제 의로 교육을 받습니다. 즉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 경건에 이르도록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을 거듭나게 하실 때 원래 계획하신 그 목적대로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바울과 같은 고난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성경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고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여서 자주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완벽하게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13절에 나온 것처럼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고 또 속임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항상 말씀을 배우니까,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면서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위험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
14절,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그 까닭은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내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 각자에게,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서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쾌락을 따라 갈지라도, 이 세상 모든 믿는 이들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모양과 껍데기만 가질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의 의지와 결심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건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위험한 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9절에서 살펴본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있습니다. 이 성경 기록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살펴서 알고 또 이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굳게 붙잡는다면 이 말씀은 능히 우리를 지혜롭게 하여 이 타락하고 위선적인 시대에서 우리를 이끌어주고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마지막으로 16절, 17절을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단 한번뿐인 짧은 인생 가운데 저의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가망도 없는 자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악착같이 붙드는 믿음으로 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거대한 흐름에게 건짐을 받고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설교제목 그대로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입니다. 참으로 주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귀한 말씀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딤후 2:15-21)/로빈


2002.12.18.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15-21절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16 그러나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커져서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가리라.

17 그들의 말은 궤양이 파먹듯이 먹을 터인데 그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잘못하였으니 곧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느니라.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초는 확고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며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 하는 글이 담긴 이 봉인이 있느니라.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저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잘 준비되어서 주님 오심이 정말 가까운 이때에 주님을 섬기는 자로써 발견되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저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얼마 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고 저도 잘 알고 있는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다시 펴보고 또 펴보고 하면서 정말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제가 발견한 은혜들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 말씀을 공부하라

“누가 주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때 우리는 곧바로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15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서 공부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하며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이 서신에서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 다음 장인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준비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본문 2장 18절에 나온 것처럼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사람들이 어떠한 진리에 관해서 정도를 벗어나서 말할 때 자신의 믿음이 뒤엎임을 당하고 혼란 속에 빠질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참된 진리는 온대간대 없고 사람의 말들과 전통과 거짓 교리들이 난무하는 이런 어두운 시대에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지키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 부끄럽지 않고 인정받는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더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시고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강조하려면 정말 시간이 부족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아군과 대적을 구분하지 못하며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의 명령과 대적의 혼란케 하는 말을 분별하지 못하는 군사와 같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규칙도 자신의 골대가 어디인지도 라인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운동선수와도 같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가라지가 무엇인지 잡초가 무엇인지 알곡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정말 기쁘게 하고 싶어도, 자신의 팀을 크나큰 승리로 이끌고 싶어도, 정말 좋은 곡식들로 풍성한 수확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먼저 아군과 대적을 구별할 줄 알아야하며 대장의 음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는 경기의 규칙과 규율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곡식을 거두기 전에 무엇이 알곡인지 무엇이 가라지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며 주님의 필요한 사역에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 큰 집 안에 있는 그릇들 -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의 차이

저는 오늘 이 말씀과 더불어 우리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다른 한 가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것은 먼저 저에게 많은 유익이 된 말씀이었고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2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자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 군대대장과 군사들, 목자와 양들, 참포도나무와 가지들, 주인과 종들, 모퉁이의 머릿돌과 산 돌들. 이렇듯 성경에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그릇들“로 묘사한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우리가 질그릇에 보배를 가진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는 주님이 사도바울을 가리켜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9장 22,23절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진노의 그릇들”이라 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는 남편들에게 아내된 자매를 “더 약한 그릇”으로서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20절에 나타난 큰 집, 이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많은 그릇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그릇들입니다. 이 집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지만 어떤 그릇들은 금과 은으로 되어있어 귀하고, 어떤 그릇들은 나무와 진흙으로 되어있어 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금과 은으로 되어있는 주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21절 말씀을 잠깐 보시면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귀한 그릇은 곧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한 그릇, 천한 그릇과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냥 나 혼자 식사할 때, 또는 가족끼리만 식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좀 천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일 년에 한두 번 쓰일까 말까하는 그릇을 귀한 그릇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을 말합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이것이 귀한 그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 사용하는가 또는 어쩌다 한두 번 사용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기에 합당한가 여부에 따라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이 나뉘는 것입니다. 

만약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천한 그릇이고 어쩌다 한두 번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면 아주 바쁘게 열정적으로 일생을 드려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한 사도바울 자신은 천한 그릇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형제나 자매를 보고 “아, 저 지체가 참으로 귀하다.”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형제나 자매의 은사와 재능을 보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저 형제는 참 귀한 은사가 있구나.”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한 지체의 간증을 듣고 “아, 저 자매는 주님 앞에 참 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하면서 귀히 여길 것입니다. 제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보배로운, 가장 귀한 보혈로 값 주고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영혼이라 하셨는데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 각자 각자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어떤 지체에게 두드러지게 뛰어난 은사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표현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안에 들어온 모든 그릇들이 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 그릇들이 다시 한 번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나뉘는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을 두신 분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하늘과 땅을 나누신 하나님께서 두신 구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귀한 그릇이고, 누가 천한 그릇입니까? 칼빈주의와 같이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가 귀한 그릇인지 어떻게 해야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성적으로 머리가 좋아서 말씀을 공부하는데 쏙쏙 잘 외우고 잘 이해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재능이 많아서 교회에 와보니까 이것저것 섬길 것도 많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말을 너무나 잘해서 복음도 잘 전하고 교제도 잘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인내심이 많아서 어떠한 화가 나는 일에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누가 귀한 그릇입니까?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두 번 읽기)

오늘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있는 모든 그릇들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아, 저 형제는 원래 귀한 그릇이야. 그리고 나는 그냥 원래 천한 그릇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 큰 집 안에서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없나 찾고 계십니다. 우리 같으면 필요한 그릇이 있을 때 직접 깨끗이 씻어서 쓰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릇인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각 집안에서 쓰이는 그릇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인 우리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직접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그릇들의 주인이시지만 아무 그릇이나 갖다가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깨끗하게 한 귀한 그릇만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한다면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귀한 그릇은 없으며 처음부터 천한 그릇은 없는 것입니다. 이 집안에 있는 그릇이라면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되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 귀한 그릇의 조건

21절을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고, 거룩하여지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여 지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귀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자신을 거룩케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곧 자신을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 첫 부분에서 함께 보았던 디모데후서 3:17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은 말이 지금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으로써 선한 일을 사모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 되고자 한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말씀을 공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식과 은사와 재능이 있으면 귀한 그릇으로써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지식에 능통하고 은사와 재능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는 기준, 귀한 그릇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 유일한 기준, 그것은 곧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로써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할수록 엄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아주 잘 공부해서 지식적으로 아주 뛰어난 위치에 있습니다. “아, 나는 이제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 또한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여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척척 펴서 보여주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는 말씀들을 다양하게 전할 수 있게 되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의 이 믿음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본문을 대할 때 한 가지 엄중한 것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인이 그릇인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를 더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끗함”, “정결함”, “거룩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성경에 정통하다 할지라도 은사와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천연적인 성품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학력이 아주 우수하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자기를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그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절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온 것처럼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 또 18절에 나온 것처럼 “진리에 관하여” 잘못한 말, 그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절 후반부에 나온 것처럼 “불법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22절에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것”, 23절에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3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항목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게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인 그릇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금과 은, 나무와 진흙

20,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온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연상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일한 것들을 쌓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믿음의 섬김들을 금, 은, 보석과 나무, 짚, 그루터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분이 나오고 있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들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성막에 쓰이는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와 긍휼의 자리, 그리고 성소 안에 있는 일곱 금 등잔대를 비롯하여 성막에 속한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은기명, 놋기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금으로 입혀지거나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불같은 시련을 통과한 믿음을 가리켜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흙보다 귀한 믿음, 나무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 우리는 믿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은 주님의 보혈에 대해 말할 때에도 금이나 은 같은 썩어질 것들도 구속된 것이 아니라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은 또한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보혈을 말할 때 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는 사람의 혼을 구속할 때 은 세겔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민수기 3장 47-49절, 레위기 27장 3,4절, 출애굽기 30장 13-1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2편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리켜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금과 은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과 은으로 된 귀한 그릇이 되려면 성막에 속한 금 기명들이 오직 주님께만 속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께만 속해야 합니다. 또한 불같은 시련을 당할 때에 믿음과 인내로 견뎌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속받은 자로써 구속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정화된 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와 진흙으로 된 그릇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무는 성경에서 “인간” 또는 “인성”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9장에서는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성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나무 또는 무화과나무로 비유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1편에서는 의로운 자를 가리켜서 강가에 심긴 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로마서 11장에서는 유대인들을 본래의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이방인들을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 여러 곳에서 나무를 사람으로 상징한 것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로 된 그릇이 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무로 된 그릇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들을 즐겨듣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천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육신적이고 인간적이며,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자아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이 처리되지 못한 지극히 인간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릇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사람의 말들보다, 나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중하게 여기는 그릇들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옛 성품들과 옛 습관들을 주님이 만지시고 고치고자 하실 때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온유함, 좋은 것 같이 보이는 성품들도 모두 처리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였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성품인 것 같지만, 때로 우리의 옛 성품에 속한 인내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담을 순종치 않고 견디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랑이란 성품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조차 인간적으로 덮어주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아주 잘 들어주는 성품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때로 그러한 성품은 정작 해야 할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부탁한 일들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천연적인 옛 성품들은 그것이 좋아 보이든 그렇지 않든 주님 앞에 다 처리 받고 오직 우리의 성품이 일곱 번 정화되어 나온 은과 같은 주님의 말씀, 금 사과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질그릇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있으신 분들은 여기에 “질그릇”이라는 단어에 “earth”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earth”라는 단어는 “진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지구”, “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진흙으로 된 그릇은 무엇이겠습니까? 땅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는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흙으로 된 그릇은 이 땅에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 정착하며 마음까지 세상에 내어 줘버린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소망을 천히 여기고 이 땅의 것들을 귀히 여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을 사용하실 수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이 천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우리는 이미 주님의 보혈로 구속받아 “거룩한 성도”들이 되었지만 우리 앞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걸어 가야할 거룩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쉽게 에워싸는 죄악들과 나를 이 땅에 눌러 붙게 만드는 모든 천한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 자신을 예비하는 사람은 곧 자기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곧 주님께 귀한 그릇인 것입니다. 


** 거룩이란 주제에 대한 성경 전반적인 언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거룩한 책 성경에서는 “거룩”이란 주제에 대해서 아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다음에 있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계속해서 살펴볼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는 바로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주제가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땅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 수많은 거룩에 대한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이라는 주제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누누이 거룩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그룹들이 이사야서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서까지 계속해서 찬양하는 한 가지는 주님을 향해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는 이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것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고 “은혜가 풍성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도다.”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떠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대면할 때 가장 먼저 주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욥이 그러했고 이사야가 그러했고 사도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주님을 대할 때 두려워서 납작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내게 화가 있도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또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거니와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의를 줄곧 주장하던 욥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 

유월절날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나는 주님을 알아.”라고 말하는데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인식이 없다면 그는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아야 하며 그분이 또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는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그네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을 말할 때 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한없이 드러낸 일임을 말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기준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못 박으신 것은 우리에게는 사랑이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는 거룩에 대한 만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을 못 박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거룩이 그 아들을 못 박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뻐 찬양해야 하지만 한 면으로 우리는 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를 그의 거룩한 교제, 빛 가운데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참으로 불결한 입술을 가진 자가 주님의 보혈로 거룩케 되어 거룩하신 주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주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이 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세상이 생각하는 거룩과 그리스도인의 거룩의 차이점

우리가 거룩이란 주제를 생각하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거룩이 어디에 근거했는가 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경건을 말하고 거룩을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도 거룩하다고 말하고 저기 스님도 거룩하고 신부님도 거룩하고 수녀님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거룩,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고 추구하는 거룩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로 보자면 많은 부분 흡사하고 비슷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릅니다. 마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꽃이 진짜 꽃과 모양도 비슷하고 향수를 넣어 향기까지 똑같다 할지라도 그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 안에 새롭게 주어진 새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생명,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생명, 그 생명에서 우러나오는 거룩이야말로 참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함으로써 이루어진 거룩,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거룩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9절에서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라고 나온 것처럼 “주께 속한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다 같은 금일지라도 이집트에 속했을 때에는 우상이요, 세상이 될 수 있지만 성막에 속하였을 때에는 거룩한 기명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오직 주께만 속했을 때 참된 거룩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 성령 충만하지 못함, 곧 거룩하지 못함

오늘날 저 자신과 우리교회, 더 나아가서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거의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은 성경을 가지기 위해 직접 펜으로 필사하였고 각자가 성경을 한 권씩 가진다는 것을 꿈으로 가졌으나 우리는 모두 인쇄되고 잘 제본되어 나온 성경을 각자 한 권씩, 아니 여러 권씩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영적인 책들과 성경공부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다음 장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주님을 믿는다는 모양과 제도들이 있으나 실제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능력이 없는 시대, 실제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고, 성경을 부인하고 비평하는 이론들이 난무하며,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진리를 찾아 헤매이지만 찾지 못하고, 미혹하는 자들만이 가득한 정말 어둡고 어두운 최악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봐도 좀처럼 그 능력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700년대 후반, 18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찰스 피니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어떤 공장을 방문하였는데 그 공장에서 일하던 어떤 아주머니가 동료를 향해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찰스 피니는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연민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은 피니와 마주쳤고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더니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고 이내 큰소리로 울면서 자신의 죄악됨을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 공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의 회개를 시작으로 모두가 자신의 죄악들을 회개하였고 이내 그 공장은 한동안 찰스 피니가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교회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왜 이 시대에는 그러한 회개의 역사, 복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까? 저는 무슨 쳐다보기만 하면 다 거꾸러지는 이상한 미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몰고 다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족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과 능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삼손에게 성령님이 떠나가셨을 때 그에게는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속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시는 일은 없지만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다시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을 잃어버릴 때 우리에게서 능력이 떠나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이유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먼저 “구하면 주신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구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와 더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고전 3:16,17). 

우리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거룩하신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옛 습관들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며, 자신의 옛 성품들이 드러날 때 주님 앞에 철저히 버리지 않으며, 이 땅의 유혹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가올 때 단호히 물리치지 않고, 쉽게 에워싸고 자주 넘어지게 하는 죄악들을 주님의 거룩하신 관점으로 철저히 미워하고 심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거룩하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미지근한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습관들을 철저하게 미워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세상과 타협하는 마음을 철저히 돌이키지 않는 죄악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할 때 주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시며 능력으로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부흥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 마무리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을 찾고 계십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하며 선한 일을 위하여 잘 예비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주님 앞에 쓰임 받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저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저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원하였고 이러한 마음을 교회에 나누고자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혹여나 주제넘게 한 말이 있다면 주님께서 보혈로 덮어주시기를 원하고 오직 우리 마음 속에 능력 있는 주님의 말씀만이 남기를 원합니다.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들 보다 귀한 주님의 말씀,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과 같은 거룩한 말씀, 이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성장시키며 돕고 인도하고 세우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사야를 정결케 한 제단의 숯불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주님의 보혈이 있음을 찬양합니다. 제단 숯불로 정결케 된 이사야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한번 드리심으로 거룩케 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귀하게 쓰시는 그릇으로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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