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인 믿음(수 24:14-18)/로빈


2002.05.2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이승선(20세)

제목 : 독립적인 믿음

본문 : 여호수아 24장 14-18절

14 ¶ 그러므로 이제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주를 섬기라.

15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나쁘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거하고 있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

16 백성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주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하리니

17 주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시고 우리 눈앞에서 그 큰 표적들을 행하시며 우리가 지나온 모든 길에서와 우리가 통과한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우리를 보존하신 바로 그분이시니이다.

18 주께서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나이다. 그런즉 우리도 주를 섬기리니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니라.

저와 같이 어리고 자격 없는 자를 세우셔서 교회에 무언가를 더할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온전히 주님의 말씀만 선포되기 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독립적인 믿음’입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독립”과 “연합”

우리는 오늘 주님을 따르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길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 영광의 길, 복음의 길, 헌신의 길, 믿음의 길, 생명의 길, 사랑의 길, 섬김의 길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이 길이 교회의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요, 형제 자매들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격려하면서 가야하는 길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데, 특히 “독립적인”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교회의 길이요 지체들과 함께 가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독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독립”과 “연합” 우리는 이 두 가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만을 강조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합”만을 강조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독립”과 “연합” 이 두 가지 모두를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성경지식을 추구하고 은사도 뛰어나다 할지라도 형제들과 함께 할 줄 모른다면 그는 고린도 교회와 같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함께 잘 연합하고 섞인다 할지라도 각자가 주님 앞에 믿음이 없고, 저 형제가 섬기니까 나도 섬기고 저 형제가 무엇을 말하니까 나도 무조건 동일하게 말한다면 그것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립”과 “연합” 이라는 이 두 가지 진리는 모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오늘 “독립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의 이 말씀이 교회의 진리를 약화시키거나 가리지 않기를 원하고, 오히려 잘 균형을 이루어서 우리 모두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우리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말씀이 떨어지면 무조건 복종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격은 마귀도 지배할 수 없고, 하나님도 지배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만약 인간의 인격을 마귀가 지배할 수 있었다면 마귀는 이브를 유혹하여 속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그 의지를 지배하여서 먹도록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격을 지배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렇지 못하게 막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서 도저히 인간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히려 선택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의 “전적타락”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자기 믿음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믿음과 상관없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교리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독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우리 각자의 믿음을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습니다. 


** 믿음의 “출발” “여정” “결말”

우리는 구원받을 때 믿음으로 받았고, 이 믿음은 독립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저의 부모님이 믿어서 제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저의 부모님이 믿어서는 저의 부모님이 구원받은 것이고, 저는 제가 믿어서 제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나의 가족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의 가족들 각자가 믿어서 그들 각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처음 주님을 믿을 때부터 “독립적인 믿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교회에 믿음이 뛰어난 형제가 있고 주님을 열정적으로 잘 따르는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 형제에게서 귀한 도전을 받을 수 있고, 그 형제로 인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나의 성경 읽기를 대신할 수 없고, 나의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복음전파를 대신해 줄 수 없고 나의 섬김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나 대신 찬송해 줄 수도 없습니다. 즉, 나의 믿음 생활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도움을 받고 섬기며 부축하지만 결국에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각자의 독립적인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끝나고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때에도 우리는 독립적으로 주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친한 형제가 나를 대변해 줄 수 없고 나 자신이 나의 믿음으로 내가 섬긴 것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고후 5:10)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데, 그 믿음의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독립적인 믿음으로 걷는 길입니다. 구원도 각자의 믿음으로 받은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도 각자의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고, 주님 앞에 결산할 때에도 각자가 믿음으로 섬김 것들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 독립적인 믿음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죽을 날을 곧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유언과 같은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참으로 귀한 믿음의 고백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고백이 귀하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 고백이 귀하다고 느껴질까?” 여러분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괜히 멋있는 말 같아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고백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찌하든지 나는 주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는 독립적인 믿음이 발견되기에 귀하다고 느꼈습니다.


현재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은 하수 건너편에서 또 이집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또 이스라엘이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들도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나의 조상들이 누구를 섬겼는가, 혹은 나의 이웃들이 누구를 섬기는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피를 나눈 형제들, 즉 자신과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를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조차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희 조상이 섬기던 신들이거나 너희가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의 신들이든 간에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너희가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주를 섬기리라.”


우리의 믿음에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른 누가 어찌하든지 상관없이 나만은 단일하게 주님을 섬기겠다는 확고하고도 독립적인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지속적인 믿음의 행사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 독립적인 믿음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을 때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결정하여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수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믿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버립니다. 자신을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이라든가 교회의 목사님이라든가 믿음이 뛰어난 친구 등에게 자신의 믿음을 맡겨버립니다. 뭔가 어려운 일이 있고 혼란스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이 직접 주님께 나아가기보다 그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을 참으로 잘못배우는 것입니다.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들이 나쁜 조언을 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좋은 조언들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참으로 안정되게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 때 그는 방황하게 됩니다. 그 스스로 주님을 찾는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심하게 요동칠 것입니다.


오히려 조금은 독단적으로 보이고 불안해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이 어릴 때부터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주님을 따라온 사람은 그 자신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들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굳건하게 길을 갈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형제자매들의 조언과 권면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낮아진 자세와 들을 귀를 가지고 다른 지체들의 사랑어린 권면과 조언을 잘 들을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장한 형제가 말했다고 무조건 따라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많은 조언들을 듣고 나서 나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내가 나의 믿음으로 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체들이 말해준 조언들과 똑같은 결정을 내리더라도 나 자신의 믿음으로 확증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독립적인 믿음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을 가지되 독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사람을 보고 따르는 요소가 있는지를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나와 형제자매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보고 걷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를 때 결국 같은 길을 올바로 걷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을 보고 걷는다면 같은 길을 갈 수는 있어도 한사람이 잘못가면 다 같이 잘못 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의 믿음의 고백은 지금 갑자기 뛰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훨씬 이전부터 이 믿음을 길러왔습니다. 여호수아는 젊은 시절에 가나안 땅의 정탐꾼으로 파송된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해 총 열두 명의 사람들이 정탐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열 명의 사람들이 악한 보고를 하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일어나서 온 백성을 향해 외쳤습니다. “8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이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양식이니라. 그들의 방어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민 14:8-9)

그때 온 회중이 일어나 흙먼지를 날리며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의 영광이 회중의 성막에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남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구출 받게 됩니다. 이것이 젊은 시절 여호수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전부터 독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지긋이 들어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그의 온 생애가 어떠했는지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이 어릴 때부터 우리 자신의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굳건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 모세를 따르던 백성들과 하나님을 따르던 여호수아

이제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죽을 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양 무리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서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라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어떠한 마음을 가지시겠습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모세 곁에서 모세의 믿음을 보고 배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의 믿음의 보고 여호수아를 자신 곁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지금 죽음을 앞둔 것처럼 모세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는 여호수아를 불러서 용기를 돋워주었습니다. 

7 ¶ 또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그에게 이르되, 마음을 강하게 하고 크게 용기를 내라. 네가 반드시 이 백성과 함께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상속하게 하리라.

8 주 그분께서 너보다 앞서 가시고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하니라. (신 31:7,8).


모세는 자신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여호수아를 불러서 이렇게 백성 앞에서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 힘을 돋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에게는 백성들 앞에서 힘을 돋워줄 만한 이렇다 할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양무리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갈 영적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라면 어떠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이제 여호수아가 죽으면 이스라엘은 목자가 없는 양같이 흩어질 것이 여호수아의 눈앞에는 선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모세를 회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참으로 독립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할 때에도 모세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할 때에도 모세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 독립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은 찬양을 터뜨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셔서 그들로 마른땅을 걷게 하시고 이집트의 병거들을 물에 빠뜨리심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터뜨렸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터뜨렸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좋던 믿음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을 잘 따르던 백성들의 믿음이 급속도로 타락한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은 모세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모세에게 의존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사라지면 믿음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떤 사람에게 의존되어 있다면 그 어떤 사람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믿음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어떤 사람에게도 의존되지 아니하고 독립적으로 하나님께만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견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여호수아는 정말 양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서 있습니다. 모세가 잠깐 산에 올라가서 지체한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황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때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있었습니다. “진영에서 전쟁하는 소리가 나나이다.” 여호수아가 말하자, 모세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승리하여 외치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요, 패배하여 부르짖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자들의 소리로다.” 모세와 대화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는데 내려와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터뜨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앞에서 뛰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여호수아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앞에서 뛰놀다니!


모세가 잠시만 사라졌어도 방황하는 백성들인데, 이제 여호수아 자신이 후계자가 없이 죽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여러분 이 말씀은 모세가 말했던 것과는 좀 다른 말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굳게 붙들고”(신 13:4).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한 길은 하나였습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받은 독특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따라야 한다는 그 한 가지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상들을 섬기든지 주를 섬기든지 너희가 마음대로 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무조건 주를 섬겨야 한다. 내가 죽어도 너희들 제발 주를 떠나지 마라.”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수아는 “너희 조상이 섬기던 신들이거나 너희가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의 신들이든 간에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각자각자의 믿음의 고백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 누군가를 인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음의 길을 걷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믿음을 돕고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독립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많이 부족하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양육해 본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에는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고 교회로까지 인도된 친구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열심히 말씀을 가르쳐주며 섬겼습니다. 잘 때마다 그 친구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기도하고 학교가 끝나면 매일같이 집으로 데려와 성경도 같이 읽고,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알고 있던 진리들을 가르쳐준 기억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예배가 끝난 뒤에 함께 복음을 전하러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주 큰 부분을 잘못하였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친구들의 믿음을 주관하려고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성경을 더 열심히 읽었으면 좋겠고 교회를 더 열심히 나왔으면 좋겠고 복음을 잘 전했으면 좋겠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가 마구 앞서서 친구들을 끌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그 친구들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엇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면 친구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잘 모르니까 그냥 니가 하는 대로 할게.” 저는 그것도 매우 좋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친구들에게 제시한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올바른 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자신의 믿음은 저버린 채 저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비록 그 친구들은 올바르게 행하였지만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자주 연락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종종 연락을 시도하였지만 그 친구들은 하나님을 잊어 버린지 오래였습니다. 구원받은 것 맞나 하고 확인하면 구원받은 간증은 제대로 나오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 일을 생각하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주님께 인도할 때 성장이 비록 더디고 느릴지라도 그 사람이 직접 주님 앞에 믿음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 읽고 안 읽고 보다 중요한 것은 왜 읽느냐 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나의 눈치를 보고 읽는다면 내가 사라지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성경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구절을 읽더라도 자신이 주님 앞에 믿음으로 읽도록 도와준다면 그는 내가 사라져도 말씀을 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인도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 (고후 1:24)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 우리 각자는 우리 각자의 믿음으로 서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사도 바울이라 할지라도 주관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관할 수 없습니다. 마귀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로 주관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주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독립적인 것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또한 독립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주님 앞에 인도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때 말씀을 강력하게 전달할 줄도 알아야 하고 강하게 권면하고 책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에서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고 말하기 전에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만은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어떠한 강한 말 때문에 그 사람이 바뀌어 행동의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자체로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변화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단지 나의 말로 인한 변화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은 결과인지를 명확히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 결론

저는 오늘 독립적인 믿음에 대해서 부족하나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저는 “믿음은 독립적인 것입니다.”하고 말하겠습니다. 두 가지로 말해보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누군가의 믿음생활을 도우려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한 몇 가지 귀한 것들을 함께 살펴본 후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여호수아는 “이 날” 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 “This day”, 이날, 즉 오늘 택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선택은 결코 미뤄질 수 없습니다. “주님 제가 한 오년 동안만 세상을 섬기고 그 뒤에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섬길 자를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성도님들께 이 도전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섬길 자를 오늘 여러분이 택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돈이든지 명예이든지 쾌락이든지 권력이든지 간에 여러분이 섬길 자를 오늘 여러분이 각자의 믿음으로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 말을 할 때 어떠한 마음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는 마음이겠습니까? 무시하는 마음이겠습니까? 여호수아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과 함께 주를 섬기기 위해 자원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 앞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푼네의 아들 갈렙이 서 있습니다.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 여호수아 자신과 유일하게 선한 보고를 하였던 동역자 갈렙이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는 고백을 할 때 여호수아의 눈은 갈렙을 향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갈렙 너도 그렇지? 너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라고 마음속으로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갈렙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합니다. “우리도 주를 섬기리니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와 같은 응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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