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16.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6세)

제목 :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은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돌아오자마자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 작년 7월인데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이 정말 이 말씀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를 많이 열매 맺기를 바랬는데, 지금 돌아보니 너무 부족해서 아쉬운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1년을 어떻게 보낸건가 한숨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사시는 삶을 조금씩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마지막 항목인 “절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성령의 열매 - 절제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절제”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 바깥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것이라면, 절제는 내 안에서부터 나오는 원함과 요구를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중에서 얼마나 절제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과 가까이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잠을 자고 싶다고 24시간 잠만 잘 수는 없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고 하루 종일 먹을 수는 없습니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소식이 있어도 다 알 수 없고, 말하고 싶은 사실이 있어도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볼 수 없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나의 원함과 요구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내가 배웠노니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당하는 것을 배웠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없지만, 절제를 배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는 법, 곧 절제를 배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절제는 모든 성령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어떤 지식을 깨달아서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고프고 궁핍한 환경 속에만 오래 있었다고 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절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또한 실제로 많은 환경들이 다가올 때 주님의 제한하시는 손길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절제를 배우게 됩니다.

** 이기려고 애쓰는 자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단순히 절제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기려고 애쓰는 자가 주의해야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법대로, 규칙대로 달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일에서 절제하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 김용국 형제님께서 농구 선수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 선수들은 콜라 같은 탄산음료와 쵸코렛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시합을 앞두었을 때는 몸의 컨디션을 잘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자는 시간을 철저하게 통제한다고 합니다. 선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보다 코치의 제한을 받아서 움직이게 되고, 그러한 통제를 잘 따른 선수들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제를 잘 따르지 않아서 컨디션 조절도 실패하고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선수들은 벤치에 앉거나 교체를 당하여 시합에서 버림을 받게 됩니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기간에 우리나라의 대표 골키퍼는 김병지 선수였습니다. 김병지 선수는 골키퍼지만 한 번씩 골을 스스로 몰고 나가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김병지 선수는 또 그렇게 공을 몰고 나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아시죠? 김병지 선수는 좋은 감각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을 받아 월드컵 경기에 단 한 경기도 출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주자요 이기려고 애쓰는 자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경주자로서 자신을 절제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을 얻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주님이 언제나 사용하시는 선발 선수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늘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절제하지 않는 죄

사도 바울은 가아사랴의 총독이었던 벨릭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귀족이었던 벨릭스의 절제되지 못한 방탕한 삶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맹렬하게 지적하면서 다가올 심판에 대해 설명하였고 벨릭스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 무절제한 삶이 나오게 되고,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절제하는 삶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무절제한 육신의 삶은 욕심을 부리며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 우리는 주님이 주신 환경 속에 만족하고 안식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육신 안에서 사는 사람은 거침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행동하지만,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말과 행동에 주님의 통제를 받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혀를 억제하여 복종시키고, 눈을 억제하여 복종시키고, 손과 발을 억제하여 복종시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 말을 절제함

우리 삶 속에 절제가 필요한 실제적인 영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우리의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고 주님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에 있어서 주님의 통제를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가리는 무서운 일을 하게 됩니다.

다함께 잠언 11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나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문제를 숨기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말의 문제가 곧 영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신실한 입을 지닌 사람입니다. 옛날이야기 중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처럼, 우리의 입술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 입에 병이 날 정도로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실수에 대해서 우스운 이야기처럼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은 주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다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부모님은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긍휼히 여기고 용납하며, 문제가 있다면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도 당장 실수한 형제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긍휼을 입은 부족한 사람임을 인식하고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또 바로 옆에 잠언 12장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

절제되지 못한 혀는 톡 쏘는 것 같고, 칼로 찌르는 것처럼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혀는 꼭 필요한 아픈 말을 할지라도 건강하게 세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정말 성령의 열매 9가지 항목이 하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말을 할 때에 우리에게는 절제도 있어야 하고, 또 사랑도 있어야 하고, 온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항목들은 우리가 머리로 계산하고 일일이 주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주님과 동행할 때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에 대해서 한 구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26장 20절부터 22절입니다.

20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불이 꺼지는 것같이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없는 곳에서는 다툼이 그치느니라.

21 타는 숯불에 숯을 더하는 것과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같이 논쟁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22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들은 상처들과 같아서 뱃속의 가장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야고보서에서도 우리의 혀를 불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소문을 내는 자가 불을 일으키는 나무와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의 말씀은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잘 간직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지체들의 어떤 소식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할 때 그 말이 돌고 돌아서 그 지체의 뒤통수를 때리게 될 때 지체들에게 뱃속의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악의를 가지고 하지 않은 말이라 할지라도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말을 절제할 수 없게 되고, 우리는 의도치 않게 사랑하는 가족과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슬픔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또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 감정을 절제함

우리의 삶에 주님의 통제가 필요한 또 한가지 실제적인 영역은 바로 우리의 감정입니다. 우리의 감정에는 주님의 통제가 필요합니다.

잠언 16장 32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영을 다스리는 자는 도시를 취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감정의 문제가 곧 영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가장 통제되지 못하는 곳은 우리의 가정 안에서입니다. 교회에서 모일 때는 모두가 천사 같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긴장이 풀어지고 쉽게 육신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려면 가정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남편은 쉽게 아내에게 화를 내고, 아내는 쉽게 남편에게 불평하고,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쉽게 화를 내고, 자녀들은 쉽게 부모님에게 짜증을 냅니다. 우리가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냥하고 부드러운지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할 사람들은 저 멀리 아프리카에 있지 않고 우리의 가정 안에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되 사라가 자신을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는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모든 일에서 순종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되 밥을 먹이고 공부를 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시간을 드려 아이와 다정하게 대화하고 놀아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내려놓고 부모님의 일을 돕고 섬기며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통제가 가장 필요한 장소는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실제가 우리의 가정 안에서 나타나기 원합니다.

** 마지막 시대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무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방탕함이며 불평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하여, 또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가지기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말씀에서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사람들이 자신의 입과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고하며 살아가지만 성경의 진리대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입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고, 사람들의 눈은 더 현란하고 재미있고 자극적인 영상들을 보고자하고, 사람들의 귀는 더 신나고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또 뛰어나고 깊은 지식들을 듣고자 하지만 결코 채워지지도 않고 만족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돈으로 보고, 의사들은 환자들을 돈으로 보며, 목사들은 성도들을 돈으로 계산하는 타락하고 사악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무절제와 방탕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 아이들은 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발산하라는 사탄의 메시지를 들으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고집이 세며 자기 원하는 것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절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마지막 때의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우리는 너무나 노골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절제를 잃어버렸습니다. 말에도 거침이 없고 감정에도 거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또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합니까?

** 주님을 바라보며 만족함

다함께 디모데전서 6장을 보시겠습니다. 6절부터 1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만족이 있을 때 함께 오는 것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우리가 무절제하고 방탕한 이 시대의 흐름에 쓸려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약함이 있는 남편을 주신을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부족함이 있는 아내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 자녀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부모님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환경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제한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때로 저에게 엄청난 돈이 있어서 주님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수백억의 돈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건물도 크게 짓고, 출판사도 하나 만들어서 복음 책자도 최고급으로 엄청나게 찍어서 우리나라 모든 곳에 뿌리고, 선교사들과 주님께 헌신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후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그렇게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그러한 돈을 가지게 되었을 때 여전히 주님께 신실하고 또 절제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집에서 과일이나 음료수를 먹는 일에도 잘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큰돈을 저에게 맡기실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재정적인 어려움도 주님의 통제입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사람의 의지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육신 안에서 살게 되고 사역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후보 선수가 되어 벤치에 앉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힘들고 어려운 주님의 제한하심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늘 자신의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키며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되 만족하면서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허락하신 만큼 걸어가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제한하실 때 멈추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원함을 억제하고 복종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수십 개씩 사줄 수 있어도, 한 번에 한 개로 제한하는 이유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온 세상을 다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온 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신의 생명과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더욱 성숙케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제한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광의 보상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지옥훈련을 받는 그 기간만을 생각한다면 아무도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우승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감독이 어떻게 힘들게 훈련을 시킨다 할지라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서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선수들은 썩어질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억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 절제하고 주님의 모든 제한하심과 통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과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하나님의 강한 손은 우리를 누르고 제한하시는 손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안 된다고 막으시는 주님의 통제하시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답답한 환경이 하나님의 통제하시는 강한 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억제하고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제와 만족으로 이끄실 때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믿음의 경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더 얻으려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보고 듣는다 할지라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절제를 가르치십니다. 때로는 궁핍하게 때로는 풍성하게, 때로는 답답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ㅌ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통제를 잘 따르느냐에 따라 우리는 선발 선수도 될 수 있고 후보 선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게 법대로 잘 달렸느냐에 따라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pauline/48galatians/48galatians051626_11controlofthelord_20080716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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