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1.01.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모세가 만난 하나님(히 11:24-27)

본문 : 히브리서 11장 24-27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니라.

오늘 저는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부제목을 달아본다면 "예일전보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도 삶 가운데 경험하기 원합니다.

 

 

 

** 구약의 대표, 모세

만약 우리에게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을 한 명 뽑으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대언자 중의 대언자 엘리야, 지혜의 왕 솔로몬 또는 모든 현자들의 으뜸인 다니엘. 이러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뽑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모세를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구약과 율법을 언급할 때마다 "모세"를 그 대표로 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요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도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모세라는 사람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작지 않습니다. 모세는 성경에서 그의 탄생부터 인생을 마치기까지 모두 기록된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란을 떠난 75세부터 기록이 되었고, 다윗의 인생은 소년 시절부터 기록이 되었지만, 이 모세의 인생은 그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어떠한 청년기를 보냈고, 어떠한 삶을 살고 인생을 마쳤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일생을 설교 한번에 다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일생들 가운데 몇 가지 포인트를 찍어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 예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의 부제목은 "예일전보의 하나님"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캐나다에 와서 더욱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저의 앞길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도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이 나타나시거나 천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예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히브리서 11장 24절 앞에 있는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그가 특이한 아이인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대로, 이집트 파라오 왕의 압제 가운데서도 그 수가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 왕은 이들의 수가 많아지면 나중에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레위인 아므람과 요게벳을 모세의 부모로 예비하셨습니다(출 6:20). 그리고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특이한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모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임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갈대로 만든 궤를 준비하여 모세를 넣고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부모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손안에 있었습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옵니다. 그리고 부들 사이에 놓여있던 궤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시녀를 시켜 궤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 궤 안에 있던 모세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이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멀리서 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얼른 달려와서 "아이의 유모를 구해와 아이에게 젖을 주도록 할까요?" 묻고 파라오의 딸은 삯을 주면서 자기를 위해 아이를 기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파라오의 딸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사람 모세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위해 부모를 예비하셨고, 누나를 예비하셨고, 파라오의 딸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모세는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언제까지 자기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모세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의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24절부터 다시 보시면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요, 인도자로 예비하신 것같이 모세도 믿음으로 그러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그것을 따라갈 자유도 있고 그렇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빈주의나 운명론과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사람의 뜻으로는 좋든지 싫든지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실 지라도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의 믿음의 결심이 합쳐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그가 스스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했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모세의 선택이 합쳐지는 순간입니다. 자,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야말로 하나님께서는 모세 자신을 예비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재판관이 되도록 다른 모든 환경을 예비해주셨지만 정작 모세 자체는 아직 예비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서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

23 그가 정확히 사십 세 되었을 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더라.

24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부당한 일 당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를 옹호하여 학대당한 자의 원수를 갚아 이집트 사람을 치니라.

25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자기 형제들을 건지려 하심을 그들이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

 

 

정확히 사십 세가 되었던 모세의 이 상태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고 아주 자신 만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려 하셨다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에게 이집트 왕자로서 어떻게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이끌며, 백성을 다스리고, 행정을 처리하며, 재판을 하는지 등을 배우게 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이제 모든 것이 예비된 이 상태에서, 모세는 자신이 드디어 영웅과 같이 나타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고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자손을 때리고 부당하게 대한 이집트 사람을 가서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을 벌이긴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도 개의치 않고 그냥 자기 스스로 좋게 보이는 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자손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다시 멋지게 등장하여 싸움을 중재하고 다스리려던 모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스라엘 자손들조차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파라오도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모세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비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하나님 일에 덤벼든 모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자, 이제 두 번째로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모세는 어느덧 80세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이곳 미디안 땅에서 십보라라는 아내를 맞이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대상 23:15)을 낳았습니다. 모세의 현재 직업은 목자입니다. 하는 일은 아침에 양을 몰고 나가서 풀을 뜯게 하고 오후에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이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시냇물이 없습니다. 무조건 우물에서 힘들게 수십 번을 물을 떠올려야만 양떼가 다 마십니다. 그리고 냄새나는 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아픈 데는 없는지 이곳저곳 살펴주고, 양털 깎고, 양털로 천막 짓고, 우유 짜고, 버터 만들고 아주 고생하는 일만 매일 반복됩니다.

 

 

한때 잘나가던 이집트 왕자가 어느새 시골 양치기 할아버지가 되어있습니다. 재기를 노리고 있던 모세, 언젠가 다시 이집트에 돌아가서 위대한 역사를 이뤄보리라고 생각했던 모세,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 난 예비된 사람이거든."하며 결심을 다졌던 모세도 어느덧 80세가 되고 보니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있는 시편 90에서는 모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실패와 좌절과 수고와 슬픔만이 가득한 모세의 일상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양떼를 모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망이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미래도 없을 것 같은 삶이 되었습니다. "이제 난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치는 건가보다. 내 인생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냥 이집트 왕자로 사는게 좋았을까? 아니야, 그래도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시도했다는게 의미가 있을거야. 내가 너무 건방지고 교만해서 일을 그르쳤지만, 에휴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러분이 한번 모세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모세가 매일 보는 것이라곤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과 듬성듬성 나있는 풀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광경, 그리고 양떼들입니다. 특히 이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은 가시덤불과도 같아서 나무를 베어 탁자를 만들거나 막대기도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태울 때 쓸 뗄 감으로도 쓸 수 없는, 아주 볼품 없고 광야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무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건조하기 때문에 그런 떨기나무들이 건조한 열풍에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불이 붙는 광경도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모세는 아마 그러한 떨기나무를 볼 때마다 "꼭 나 같네."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재도 안 되고 뗄 감도 안 되는 쓸모없는 떨기나무.

 

 

어느 날,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 모세는 역시나 양 떼를 몰고 사막을 돌아 호렙 산에 올랐습니다. 평소 자주 보던 광경대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한가지는 그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타지 않는지 보려고 가까이 다가갑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한 음성이 나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숨겼습니다. 지금 모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나타나셨는가? 그것도 왜 이제야, 나이가 80이 다 되고 나서야 나타나셨나?

 

 

출애굽기 3장 말씀

7 ¶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그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8 내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처소로 이끌려고 내려왔노라.

9 그러므로 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렀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며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나니

10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놀랍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갑자기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뭔가 큰 사건이 벌어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일상 가운데 자주 보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떨기나무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식당의 손님들일 수도 있고 동훈이 동우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또는 사물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하고 대단하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가 만나고 접하는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현재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비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제 세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80세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이 빠진 이 모세를 이집트의 사역지로 파송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일까요? 왜 모세가 아직 40세였을 때, 본인도 열정적으로 일해보려고 하는 그 때에는 침묵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할 수 없을 때까지는 일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내 바라던 소망 다 허사가 될 때 내 아버지 도움은 시작일세."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가 되고 더 이상 아들을 가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섬김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냥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인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지체들, 나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주님과 같이 섬기며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전능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 가운데 어떤 일들은 정말 내가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어떤 일들은 솔직히 주님의 도움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세 또한 그러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배운 이 지혜, 그리고 능력 있는 이 나 혼자만으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어."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러한 교만,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 교만을 완전히 꺾는데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교만하지만,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교만하고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 자체가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일을 하고 나서도 내 마음 속에서부터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할 때 그 앞에서는 "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속에서부터는 "암, 자네가 뭘 좀 아는군. 사람 볼 줄 아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저를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 주님은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자랑할 만하지 못하며 부끄러운 사람인지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은연중에라도 자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정말 마음속에서부터 겸손할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 40년 간 광야학교에서 배운 모세는 참된 겸손, 참된 온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이까?" 대답합니다. 또 "오 내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위에 능하던 모세는 간데 없고,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세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모세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만큼 온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민 12:3).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무엇인가 나쁘게 말할 때 조차 "아멘"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해 비방할 때 "아, 그때는 내가 이집트에서 쫓겨나서 도망간 때였다. 그리고 이혼을 하는 것은 더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지금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적하려고 책 잡는거 아니냐?"하면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만 잠잠하였습니다. 모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멘. 주님 저는 그 당시에 율법을 몰라 이방여인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자격 없는 자를 긍휼로 대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이러한 자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러한 겸손은 사실은 내가 뛰어난데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참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겸손은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빛과 계시가 임하여, 내가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볼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빛을 구하여 참된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전능자로서 이 땅에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 보상하시는 하나님

이제 마지막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두 보상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사망이며 지옥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원래 이르렀어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경주를 달릴 수 있는 상태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영광"일 것입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것들만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사역만을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차 앞으로 임할 영원한 왕국에서 받을 놀라운 영광을 또한 예비해 주셨습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8,9).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보화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영광으로 여기며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기던 모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오늘 우리의 삶에 힘이 없고 주님을 향해 크게 열심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무시 받고 조금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영광으로 보상하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 죄의 쾌락들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 정리

마지막으로 다 함께 고린도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4절에 보면 이 빛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빛을 더 많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7절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모두 질그릇과 같이 약하고 쉽게 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서 뛰어난 권능이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오게 하시도록 질그릇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이제 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느니라.

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탄생과 성장과 일생을 예비하셨고 또한 영원한 영광까지 예비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일상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떨기나무와 같이 볼품없고 평범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영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능히 섬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섬기게 하시려고 모든 능력을 공급하시며 다만 겸손하게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여 따라오도록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아래 겸손하며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우리를 높이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수고와 고생이 너무나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낄 정도의 무겁고 뛰어난 영광으로 보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한 영광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이러한 영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전능한 손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영광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 더욱 넘치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모세와 같이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이집트의 보화들을 거절하고, 잠시 누리는 죄의 쾌락들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대로,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의 상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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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30.금 갈보리침례교회 금요설교훈련 / 이승선(22세)

제목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본문 : 히브리서 3장 1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절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 서론
모든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들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나신, 가장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는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도록 우리를 지도해 주는 귀한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오늘 저는 많은 귀한 말씀들 가운데 한 구절인 히브리서 3장 1절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 거룩한 형제들아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를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수식어와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모두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단어들입니다. 원래 우리의 호칭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더럽고 가증한 자들아”,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아”, “진노의 자녀들아”, “불순종의 자녀들아”. 원래는 이렇게 불려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이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더럽고 추악한 죄로 찌들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하다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요 벌레에 불과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을 보시면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더럽고 수치스러운 죄 가운데 거하던 우리들을 친히 거룩히 구별하시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저명하고 높은 사람들 앞에서 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모른 척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형제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오늘의 본문은 또한 우리를 가리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들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했던 자들입니다(히 11:13,16). 우리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순례자”라는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힘이 없고 어려울 때 날 기다리는 밝은 곳,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또 이 땅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형체가 없이 사라질 것들을 알고 믿으며, 오직 영원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길을 나선 나그네요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순례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크리스천”이 갖가지 장애물들을 통과하여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너무나 좋고 영광스럽지만, 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좁고 협소하며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 다만 어떤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거룩한 형제들이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란 다만 무엇으로부터 분리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여 순례의 길을 더욱 전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우리들은 마땅히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오늘의 본문에서 힘주어 권면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의 흐름과 이어지는 가운데 결론적으로 오늘의 권면이 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권면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힘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계속하여 하늘의 부르심에 깊이 참여하여 전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는 무엇이십니까?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약의 첫 번째 사도가 있다면 열두 사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많은 무리들 가운데 제자들을 선별하시고,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을 구별하여 사도로 파송하신 우리 주님 자신이 먼저 사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최초의 사도이십니다. 그분은 높고 높은 영광이 가득한 하늘로부터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첫 번째 선교사이자 사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사도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7절에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라고 말씀하시고
2장 9절에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라고 말씀하시고
2장 10절 후반부에는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라고 기록하시고
18절에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고 어떻게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반복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여 고난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이 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저는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아프리카 가나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다투었던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 오히려 필리핀이나 태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가나는 말라리아의 위험도 있고 생활도 너무 불편합니다. 이곳은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같지가 않습니다. 가나만 말고 다른 나라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원래 하늘에서 살았다. 그런데 내가 나사렛에 와서 살았던 거 너 기억하니? 내가 너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 알고 있니?” 그때 그 선교사님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님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분명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면, 과거에 그분은 대언자요 사도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그분은 왕이요 통치자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레위의 혈통을 따른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히브리서 7장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포함한 히브리서 전체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계속해서 드려야만 하는 헌물을, 자신의 몸으로 드린 한 번의 헌물로써 우리의 속죄사역을 완전히 완성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 안에서 앉을 수 없고 계속해서 서서 섬겨야 하는데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히 9:11,12).

또한 히브리서 8장 1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말한 것들에 관한 요점은 이것이니 곧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이라.”라고 요점정리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 4:15).


** 결론
우리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하여졌고 형제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가 다시 하늘의 거룩한 곳으로 가셔서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걷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친히 자신을 낮추시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우리의 사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실 수 있는, 그러나 완전히 승리하신 대제사장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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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7.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설교 /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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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오늘(히 3:13)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3절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가운데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강퍅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오직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오늘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하나님께서 영원한 분이시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과거와 미래의 감추어진 모든 일들을 가장 정확히 아시는 분이시며자기 뜻대로 모든 일들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우리는 어제도 살았고또 내일도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우리는 엄밀히 말해서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성경에서도 이러한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오늘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속한 시간이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오직 오늘인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처음 읽은 히브리서 3장 13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시겠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가운데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강퍅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성경은 우리가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고 교제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왜냐하면 누구든지 죄의 속임수를 통해 마음이 딱딱해지고 굳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언제나 속임수를 통해 교묘히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죄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죄 속에 빠져들기가 너무나 쉽습니다나는 영적인 사람이고분별력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죄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그는 벌써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교만의 속임수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어떤 경우에라도 형제자매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죄악입니다그것은 살인죄와 같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어떤 형제자매에 대하여그는 정말 나쁜 사람이고 또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이 정당한 것인 것처럼 우리를 속이기도 합니다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주님의 사역을 지원할 수가 있고어려운 지체들도 도울 수가 있고또 나 자신은 돈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오직 오늘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속임수에 빠져 마음이 딱딱해지고 강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이 말씀은 단순히 서로의 죄나 잘못을 지적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늘 주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있어서 부드럽고 온유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서로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간증을 나누고또 교제하라는 의미입니다오직 오늘이라 부르는 때에 그렇게 매일 하라는 것입니다우리는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일

우리는 과거의 일들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사탄은 우리를 과거의 일들에 얽매여서 오늘을 잘 살아가지 못하게 늘 공격하고 있습니다때로는 과거의 아픈 상처나 다른 사람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통해서 공격하기도 하고때로는 과거의 실패나 어려움을 통해서또 때로는 과거의 영광이나 자랑을 통해서 오늘의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도록 막아서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신실하고 놀라운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렇지 못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놀라운 지혜로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렸던 솔로몬 왕은 그의 노년에 우상숭배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또 주님을 사랑하여서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러 다녔던 데마는 나중에 이 세상을 사랑하여서 사도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 밖에 없습니다과거의 놀라운 헌신이나 믿음의 업적은 오직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죄의 속임수는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과거의 믿음의 행로들은 주님께서 잊지 않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자신은 과거에 머무르거나 연연하지 말고 오직 오늘을 신실하게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과거에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다윗도 오늘을 깨어있지 않았을 때간음하고 살인하는 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과거에 담대하게 갈멜 산에서 홀로 바알의 대언자들 450명과 겨루어 승리하였던 엘리야는 오늘을 깨어있지 않았을 때,이세벨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과거의 용기는 오늘을 붙들어주지 않고과거의 믿음은 오늘을 지켜주지 못합니다우리는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과거의 실패에도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과거의 승리가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과거의 패배도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우리가 오직 오늘을 산다는 말씀은 한 면에서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일깨움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또 한 면에서는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는 말씀입니다우리가 과거에,어제까지또는 방금 전까지 어떤 상태에 있었든지 우리는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옛 것들은 지나갔으니보라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성경은 분명하게 옛 것들은 모두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나는 원래 이것을 못하고,나는 원래 이렇고 저렇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버렸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직 오늘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우리는 오직 오늘을 어제와는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옛 것들은 모두 지나갔고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이 말씀을 믿으십니까아멘그렇다면 나는 원래 이렇고 원래 저렇다는 과거의 것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날마다매순간오직 오늘을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잠언 24장 16절에서는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8장 32절에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시고방금 전까지 실패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우리는 과거를 사는 것이 아니라오직 오늘을 사는 것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미래의 일

이번에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대해 계획하고 상상하면서 기대를 하기도 하고 걱정이나 염려를 하기도 합니다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미래에 얽매이거나 연연하지 않고 오직 오늘을 신실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이제 곧가까운 미래에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었습니다그러나 성경은 일하지 않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시면서미래에 주님이 오실 것을 진정 기다린다면 오늘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신실하게 살라고 명령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함께 야고보서 4장 13-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이제 너희가 말하기를오늘이나 내일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한 해 동안 거기 머물며 사고팔고 하여 이득을 얻으리라하거니와

14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너희 생명이 무엇이냐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15 그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며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하여야 하나

 

우리는 미래의 일들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지만그 모든 일들이 오직 주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고이것이나 저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내일 있을 일을 알지 못합니다우리는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중에 주님께 잘 순종하고 주님을 잘 따르겠다고 결심합니다내일부터또는 다음 달부터또는 2년 뒤부터 주님께 완전히 헌신하겠다고 결심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오늘 주님을 따르지 않는데 어떻게 미래에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오늘 작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오늘 작은 것을 믿음으로 내려놓지 않는데어떻게 미래에 큰 것을 버리고 큰 것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오직 오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성경을 몇 구절 펴보시겠습니다고린도후서 6장입니다고린도후서 6장 2절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하시나니보라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보라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바로 오늘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9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삭개오속히 내려오라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하시니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구원하실 때 내일 너희 집에 가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주님은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만약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 내려놓지 않은 어떤 부분이 있다면계속해서 나중으로 미루고 있는 어떤 부분들이 있다면오늘 반드시 내려놓기 원합니다오늘 반드시 주님을 만나기 원합니다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오늘밤 주님이 오실 수도 있는 것이고오늘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잠들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오늘 주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또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 옆의 강도에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주님은 우리가 오늘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번에는 출애굽기로 한 번 가보시겠습니다출애굽기 8장 9-10절입니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이르되나보다 먼저 영광을 취하소서내가 왕과 왕의 신하들과 왕의 백성을 위해 어느 때에 간구하여 왕과 왕의 집에서 이 개구리들을 멸하고 그것들이 강에만 있게 하리이까하거늘

10 그가 이르되내일이니라하매 모세가 이르되왕의 말씀대로 될지니 이로써 왕께서 주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없음을 아시리이다.

 

이 장면은 이집트에서의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의 모습입니다파라오가 개구리들을 치워주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겠다고 말하자 모세가 어느 때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파라오는 어리석게도 내일이니라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지금 당장이라고 대답했어야 할 것 같은데 파라오는 다시 하룻밤을 개구리들과 보낼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가리키시면서 우리가 즉시 버리기를 원하시고,즉시 포기하기를 원하시고즉시 꺾기를 원하시고즉시 내려놓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내일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는 합니다우리가 어리석은 파라오와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우리에게 내일은 없고오직 오늘이 있음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다함께 마태복음 6장 33-34절을 보시겠습니다.

33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그 날의 악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을 염려하면서 오늘을 낭비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오직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첫째로 구하기를 원하십니다내일을 약속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것 말고오늘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우리는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되찾으라

성경은 우리가 오직 오늘을 사는 동안 아무도 죄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우리는 과거에 매어있지 않습니다옛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지나가버렸고 우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또한 우리는 미래에 매어있지도 않습니다내일은 우리에게 속한 날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내일을 살 수 있고활동할 수 있을 뿐입니다우리는 오직 오늘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믿음의 승리를 떠올리며 오늘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하나님께 미래에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하지 말고 오늘 순종해야 합니다우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에베소서 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먼저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시간을 되찾으라날들이 악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에 대해 명령하고 계십니다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되찾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여기서 되찾는다는 단어를 영어로 보게 되면 “redeeming”이라고 되어있는데이것은 값을 치르고 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대가를 치르고 시간을 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인생은 짧고 오직 한번 뿐이며 세상의 날들은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르고 귀한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그리고 우리는 이 시간들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 중 몇 시간을 주님과 보내고 있습니까우리는 하루 중 몇 분이나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우리는 하루 중 몇 분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까우리는 하루 중 몇 분이나 형제자매들과 사랑을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우리는 하루 중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어리석은 욕심 가운데 낭비하고 있습니까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가를 치르고 시간을 얻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그 대가는 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 대가는 때로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즉 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 대가는 육신의 욕심을 채우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 대가는 학교 성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우리의 자녀들은 두뇌 회전이 가장 빠른 청소년기에정서적 활동이 가장 활발한 청소년기에 주님을 배우고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는 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우리의 자녀들은 그러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5장 17절과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7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으로 충만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뜻을 이해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주님의 뜻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우리가 육신 안에 있지 않고그리스도 안에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에어제까지 어떠했든지 오직 오늘 죄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고마음이 딱딱하거나 강퍅하지 않고,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래의 일들을 염려하다가 오늘 하루를 낭비하지 않고오직 오늘 주님을 향해 뜨겁게 불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주님의 뜻은 우리가 육신 안에서 하루를 내버리지 않고오직 성령을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우리는 오늘 주님과 만났습니까우리는 오늘 주님과 동행하였습니까우리는 하루의 각 시간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우리의 시간표에서 사라져야 할 것들은 없습니까우리의 시간표에서 추가되어야 할 것들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오늘이라 부르는 날들 속에서 어떻게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지 카운트하고 계십니다우리의 드림과 섬김과 봉사와 헌신의 시간을 단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갚아주실 것입니다우리가 오직 오늘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2.04.02.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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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보는 것이다(히 12:2)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배경 설명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2장은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히브리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하고 있는데이것은 11장의 말씀과 이어지는 문맥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먼저 히브리서 11장을 빠르게 훑어보겠습니다.

1절은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3절은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부터 보시면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나열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5절에 믿음으로 에녹은”,그리고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11절에 믿음을 통해 사라 자신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22절에 믿음으로 요셉은”, 23절에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24절에 믿음으로 모세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또 32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또 이어지는 33절부터의 말씀들은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이 믿음을 통해 어떤 일들을 하였는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33절부터 38절까지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번갈아서 보시겠습니다.

33 그들이 믿음을 통해 왕국들을 정복하기도 하며 의를 이루기도 하며 약속하신 것들을 얻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맹렬한 불을 끄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싸움에서 용맹하게 되어 외부의 군대들과 싸워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인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36 또 다른 이들은 심한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참으로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겪었으며

37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며 시험을 받기도 하고 칼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며 궁핍과 고난과 고통을 당하였으니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사막과 산과 동굴과 땅굴에서 떠돌아다녔느니라.

 

이렇게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통해 살았던 수많은 성도들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만약 지금까지 믿음장이 기록되고 있다면 여러분의 이야기도 기록될 수 있을 것입니다믿음으로 승주는믿음으로 주영이는믿음으로 나연이는믿음으로 수진이는... 여러분은 믿음으로 무엇을 하였다고 기록되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히브리서 11장과 이어지고 있는 히브리서 12장 1-2절 말씀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하늘의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되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입니다마치 올림픽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육상선수들에게 환호와 응원을 보내듯이 우리를 앞서갔던 믿음의 성도들이 이제 우리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과 같습니다마라톤 경주를 하는데 무거운 복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떨쳐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믿음의 인생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아낌없이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또한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과 같은 것이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포기와 실패의 한 발자국 앞에 승리와 성공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힘을 내기 원합니다.

 

 

본문 설명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시작되고 강해지며 또 완성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의 경주믿음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주님의 삶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자기 앞에 놓인 기쁨과 영광으로 인해 십자가와 수치를 철저히 무시하시고 인내로 그 길을 통과하셨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이어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여러분오늘 설교의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바로 믿음은 바라보는 것이다입니다믿음은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다함께 이사야 45장 22절을 보시겠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나를 바라보라그리하고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나는 하나님이요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성경은 믿음의 다른 표현으로 바라본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 물렸을 때 놋 뱀을 쳐다보고 살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서서 주의 구원을 보라고 하신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이제부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믿음과 보는 것에 대해서 성경말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첫 번째로 믿음이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믿음은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이와 관련된 성경구절이 너무나 많은데요그 중 몇 구절만 빠르게 보시겠습니다먼저갈라디아서 110절입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하나님을 설득하느냐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

우리가 부모님과 친구들이웃들을 사랑하고 또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지만우리의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우리의 목적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목적으로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고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지우리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보다 사람이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 12장 43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우리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이지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 위해 성실하고 겸손히 살아가는 가운데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다면 좋은 일이지만우리의 목적 자체가 사람들의 칭찬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이와 관련해서 한 구절만 더 보시겠습니다.시편 118편 8절 말씀입니다. “를 신뢰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반복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하여 주고 있습니다믿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믿음은 사람들의 칭찬이 아니라먼저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는 것입니다믿음은 사람의 도움을 바라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오직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지금 읽은 시편 118편 8절 말씀은 바로 성경의 가장 중간에 있는 구절입니다성경은 한 가운데서 바로 사람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사람을 믿으면 상처받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주를 믿을 때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믿음이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두 번째로 믿음은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바다 위를 걸었지만파도를 바라보았을 때는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다함께 마태복음 6장을 보시겠습니다마태복음 6장 22-24절을 보시겠습니다.

22 몸의 등불은 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하되

23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라그런즉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라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6장 22절에서 눈이 단일하면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눈이 단일하다는 것은 활을 쏘는 양궁선수총을 쏘는 사격선수가 한 쪽 눈을 감고 오로지 표적만을 집중하여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이 그렇게 단일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그러나 우리의 눈이 단일하지 못할 때 그것은 악하고 또 어둠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일한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상황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믿음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달리기 경주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달려가야 할 목표지점을 바라보며 달려야지주변 상황이나 환경을 바라보면서 달린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62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시편 62편 5-8절입니다.

내 혼아너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내가 기대하는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분만이 나의 반석이시요나의 구원이시요나의 방벽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나의 영광이 하나님 안에 있나니 곧 내 힘의 반석과 내 피난처가 하나님 안에 있도다.

백성들아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셀라.

믿음은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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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31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화요일 채플설교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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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인생(히 11:6)

이승선

 

오늘은 2012년 새해 새 학기의 첫 번째 채플입니다이 채플 시간은 여기 앉아 있는 학생들이 조금 더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을 때에 교회의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훈련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앞으로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예배도 인도할 수 있고대표로 기도도 할 수 있고또 특송도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예배생활을 훈련하는 시간입니다또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맞추어 나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앞으로 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주님을 만나는 계기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6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의 목적

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어떤 사람은 운동선수어떤 사람은 음악가어떤 사람은 사업가어떤 사람은 정치가와 같은 다양한 꿈과 비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그러나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한 가지 꿈과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함께 찾아보지는 않겠지만 계시록 4장 1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하더라.

이 말씀처럼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삶의 목적과 방향은 오직 하나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이것 외에 우리가 다른 목표나 다른 비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든지 다 잘못된 것이며우리가 반드시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도 행복하며 즐거운 인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 읽은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유일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그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우리가 믿음이 없이 많은 훌륭하고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예배도 드리고찬송도 드리고기도도 하고선한 일들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을 드릴 때자신의 멋진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뽐내기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어떤 사람은 기도를 할 때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멋있게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나타내기 위해 선한 일들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여러분사람의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참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지가 너무나 중요합니다왜냐하면 그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며우리가 살아 숨 쉬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3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오직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는데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다함께 히브리서 11장 24-25절을 보시겠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모세의 믿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믿음으로 모세는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바로 이집트의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거절하였고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믿음으로 모세는 거절하고 선택하였습니다믿음으로 모세는 세상의 즐거움 거절하고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바로 첫 번째는 믿음은 선택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모세의 믿음은 이집트의 즐거움을 거절하고이스라엘 백성과 고난을 받는 그 인생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었을 때여러분 앞에도 계속해서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질 것입니다우리의 인생에는 끊임없이 고민거리와 선택의 기회가 나타납니다여러분 그러한 때에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나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선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무엇이 믿음의 길인가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인가를 생각하여 선택하시기 바랍니다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비록 내가 이집트의 즐거움과 배부름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할지라도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믿음은 선택하는 것입니다믿음은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원한 보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믿음은 무엇일까요히브리서 11장 26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니라.

 

모세가 이집트의 금은보화를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모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모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고난을 받고 고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바로 모세는 지금은 내가 비록 고생하고 고난을 받더라도앞으로 영원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우리에게 70, 80년을 사는 이 땅에서의 인생이 전부라면우리는 이 땅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남의 것을 빼앗더라도 내가 더 가지고 내가 더 누리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우리에게 70, 80년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면정말 우리에게 영원한 왕국이 기다리고 있다면우리는 잠시 잠깐 이 땅에서 가질 재산이나 보물이 아니라하늘에서 영원히 소유하고 누릴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모든 보물과 즐거움을 과감히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실 보물과 즐거움이 비교할 수 없이 더 엄청나고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모세는 손해 보는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영원히 이득을 보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무엇이 지혜롭고 현명하고 똑똑한 인생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재산을 저축하는 것과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재산을 저축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이득입니까?

첫 번째로 믿음은 선택하는 것입니다두 번째로 믿음은 영원한 보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리대로 사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노라.

 

아멘이 말씀은 우리가 어떠한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너무나 쉽고 단순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믿음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믿음의 인생이란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오직 진리를 위해서만오직 진리의 말씀 그대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믿음의 인생은 내 기분대로내 감정대로내 느낌대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우리가 내 기분대로내 생각대로내 판단대로내 느낌대로 살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오직 진리대로 살아야 합니다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인생입니다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입니다그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우리는 마음속에서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나는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아는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노라나의 기분이나의 느낌이나의 감정이나의 생각이나의 판단이 나에게 진리와 다른 것을 하도록 요구할 때우리는 단호히 그것을 거절하며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저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붙잡아 주셔서제가 오직 믿음으로 진리대로 살아가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유일한 것입니다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고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믿음이란 첫째로 선택하는 것입니다믿음이란 둘째로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믿음이란 셋째로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어떻게 크게 만들고 어떻게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요다함께 베드로전서 2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믿음은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고 그것을 먹음으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개역성경에서는 이렇게 잘못 기록하고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라고 표현함으로써 구원이 마치 계속해서 노력하여 이루어야 하는 과정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이 복음의 말씀을 믿을 때에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받는 것이지오랜 시간동안 이르러야 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은 개역성경이 기록하는 것처럼 구원의 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새로 태어난갓난아기로서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믿음의 성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기쁘시게 하고 싶고또 우리도 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은데 그 핵심비결인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생겨날까요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데에 길이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여러분이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또 주일마다수요일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뿐만 아니라 여러분 월금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또 성경수업을 듣습니다그러나 여러분단순히 말씀이 귀에 들려지는 그 시간에 앉아만 있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숙이 그 말씀을 담고먹고새기고묵상하고또 생각하고그 말씀에 반응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소화의 과정을 통해 자라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우리가 만약 예배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 집중하지 않고다른 생각을 하면서형식적으로 앉아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배고픈 아기가 젖병을 꼭 잡고 우유를 쭉쭉 빨아먹듯이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그렇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잘 먹고 소화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때에 우리의 믿음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예배시간을 대했든지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대충 대하였든지 상관없이 오늘부터지금부터 변화되기 원합니다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설교 일시 : 2010.09.26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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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신 하나님(히 3:1)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3장입니다히브리서 3장 1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늘의 부르심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은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불법 속에서 허망하게 살다가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우리는 모두 썩어지고 불타 없어져버릴 돈과 세상의 자랑과 쾌락을 쫓아 살다가 멸망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들이었습니다우리는 모두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남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기에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우리를 부르셨을까요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기준이나 자격은 무엇일까요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하고 의롭기 때문에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누가복음 5장 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또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너희는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더러운 죄인들이었기 때문이고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시려고또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또한 다함께 고린도전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고린도전서 1장 26절부터 2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6 형제들아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롭고지혜롭고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우리가 더럽고어리석고약하고쓸모없고천하고멸시받고가진 것이 없는 그러한 낮고 비참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떠한 수준을 보시고 우리를 차별적으로 부르셨다면 아마 이 자리가 오늘 텅 비어있을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우리의 모든 죄를 흰 눈과 같이 씻으시며우리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하여주신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손가락을 끼시고다함께 디모데후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디모데후서 1장 9절과 10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이라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10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고오직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이 은혜는 창세전부터 예비 되어진 것으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히 나타내어졌습니다우리는 특별히 여기서 목적과 은혜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은혜라는 것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는데그렇다면 목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부르심의 목적 교제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으로 2가지를 간략하게 나눠보고자 합니다첫 번째는 우리가 방금 전에 보았던 고린도전서 1장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다시 고린도전서 1장으로 돌아오셔서 9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비참한 우리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아버지 자신과또 자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도 같습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사람의 친구가 되셔서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을 때이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지만이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죄의 문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해결하시고다시 그 교제를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와 교제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하고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한번 만나보고 싶고 대화도 나눠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예를 들어우리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다 알고 있지만만약 다윗을 직접 만나서직접 그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어떨까요훨씬 더 생동감 있고재미도 있고감동도 있지 않을까요그렇다면 기드온을 직접 만나서 300명의 용사로 해변의 모레같이 많은 미디안 족속과 싸운 이야기를 직접 듣는다면 어떨까요또는 베드로를 직접 만나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순간이라든지예수님을 따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든지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에 대하여 듣게 된다면 어떨까요아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직접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요우리가 가장 죄를 많이 짓고가장 주님을 대적하고가장 더럽고 추했던그 모든 순간을 다 아시면서도우리를 미워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시고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셨던 사랑과 긍휼의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우리는 얼마나 푸근한 안식과 함께얼마나 뜨거운 감격과 함께주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누리겠습니까우리가 장차 하늘에 가게 될 때 그러한 교제를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장차 하늘에서처럼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교제할 수 없겠지만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과 교제하며 동행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주인의 모든 일을 맡아서 관리하는 아끼는 청지기와 주인의 관계다사랑하는 친구이다스승과 제자의 관계다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신랑과 신부의 관계이다형제자매 관계다이렇게 수많은 친밀하고 사랑하는 관계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과 우리가 그러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음이 답답할 때 가장 먼저 누구를 찾습니까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올 때 가장 먼저 누구를 찾습니까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쁘거나 슬프거나어렵고 힘든 무거운 짐을 지거나언제나 함께하고 교제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모든 사람이 우리를 오해하고우리에게 말도 걸지 않고우리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우리를 알아주지 않을 때우리가 비참하고 연약하고 어려울 때항상 우리와 동행하고 교제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좋으신 주님께 나아가기 원합니다늘 주님과 동행하고 교제하기 원합니다.

 

 

부르심의 목적 찬양과 섬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또 우리가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베드로전서 2장 말씀을 통해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베드로전서 2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긍휼을 얻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긍휼을 얻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지만이제는 긍휼을 얻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 모두는 이제 선정된 세대요왕가의 제사장이요거룩한 민족이요특별한 백성이 되었습니다믿는 사람들 중에 뛰어난 어떤 사람들만 특별한 백성이 아니라믿는 우리 모두가 특별한 백성이 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왕가의 제사장으로서 주님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첫째로 교제이고둘째로 찬양과 섬김입니다사실 이것은 첫째둘째로 나누기가 애매한 것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당연히 주님을 찬양하고자연스럽게 주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주님과 교제는 하는데 찬양하지 않는 사람주님과 교제는 하는데 주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우리가 정말 주님과 교제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을 찬양하게 되고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며 동행하고 있을 때우리는 주님께서 하기 원하시는 일들을 알게 됩니다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주님의 일들을 하기 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그래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하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을 섬기게 되고 또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우리 자신도 너무나 기쁘게 됩니다주님을 섬기는 것은 무엇인가 거창한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형제에게 찬 물 한 잔을 주는 것도 주님이 기뻐하시고 기억하시는 섬김입니다교회 예배당에 떨어진 종이 한 조각을 줍는 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입니다새로운 지체들에게 먼저 찾아가서 인사하고 작은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오늘 하루 힘내시자고 문자 한통 보내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크고 거창한 일들이 아닐지라도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한 가지씩 섬기게 될 때에 우리의 입에서는 늘 찬양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마무리

이제 히브리서 3장으로 돌아오셔서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의로운 자를 부르러 오지 아니하시고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 오신 긍휼의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부르셔서거룩한 형제들로 삼아주셨습니다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거룩하신 주님의 형제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참여한 부르심은 이 땅의 부르심이 아니라 바로 하늘의 부르심입니다우리의 고향은 이제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우리의 시민권생활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우리의 보물우리의 비전우리가 목표우리의 나아갈 길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썩어지고 불타버릴 이 땅의 허망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부르셔서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하늘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사도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우리 주님은 하늘의 모든 영광으로부터 이 땅의 말구유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하고 비천한 곳으로 보냄을 받아오신 사도이십니다또한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피로 대속하시고지금도 여전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시고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를 잘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이러한 좋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고또한 찬양과 섬김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이러한 좋으신 주님을 오해하고 잘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우리가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좋으신 하나님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또한 이제 장차 주님이 우리를 하늘로 부르실 때 우리는 모두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주님을 만나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그 날을 그리며 오늘도 힘을 내어 전진하기 원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아멘!

* 설교 일시 : 2006.11.0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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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만난 하나님(히 11:24-27) 


(히 11:24-27)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27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부제목을 달아본다면 "예일전보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도 삶 가운데 경험하기 원합니다. 

구약의 대표, 모세
만약 우리에게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을 한 명 뽑으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대언자 중의 대언자 엘리야, 지혜의 왕 솔로몬 또는 모든 현자들의 으뜸인 다니엘. 이러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뽑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모세를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구약과 율법을 언급할 때마다 "모세"를 그 대표로 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요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도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모세라는 사람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작지 않습니다. 모세는 성경에서 그의 탄생부터 인생을 마치기까지 모두 기록된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란을 떠난 75세부터 기록이 되었고, 다윗의 인생은 소년 시절부터 기록이 되었지만, 이 모세의 인생은 그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어떠한 청년기를 보냈고, 어떠한 삶을 살고 인생을 마쳤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일생을 설교 한번에 다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일생들 가운데 몇 가지 포인트를 찍어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의 부제목은 "예일전보의 하나님"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캐나다에 와서 더욱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저의 앞길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한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도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이 나타나시거나 천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예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히브리서 11장 24절 앞에 있는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아이가 특이한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대로, 이집트 파라오 왕의 압제 가운데서도 그 수가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 왕은 이들의 수가 많아지면 나중에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레위인 아므람과 요게벳을 모세의 부모로 예비하셨습니다(출 6:20). 그리고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특이한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모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임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갈대로 만든 궤를 준비하여 모세를 넣고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부모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손안에 있었습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옵니다. 그리고 부들 사이에 놓여있던 궤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시녀를 시켜 궤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 궤 안에 있던 모세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이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멀리서 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얼른 달려와서 "아이의 유모를 구해와 아이에게 젖을 주도록 할까요?" 묻고 파라오의 딸은 삯을 주면서 자기를 위해 아이를 기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파라오의 딸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사람 모세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위해 부모를 예비하셨고, 누나를 예비하셨고, 파라오의 딸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모세는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언제까지 자기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지 성경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모세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의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24절부터 다시 보시면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요, 인도자로 예비하신 것같이 모세도 믿음으로 그러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한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그것을 따라갈 자유도 있고 그렇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빈주의나 운명론과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사람의 뜻으로는 좋든지 싫든지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실 지라도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의 믿음의 결심이 합쳐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그가 스스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했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모세의 선택이 합쳐지는 순간입니다. 자,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야말로 하나님께서는 모세 자신을 예비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재판관이 되도록 다른 모든 환경을 예비해주셨지만 정작 모세 자체는 아직 예비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서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 23 그가 정확히 사십 세 되었을 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더니 24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당한 일 당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를 옹호하여 학대당한 자의 원수를 갚아 이집트 사람을 치니라. 25 그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건지려 하심을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 

정확히 사십 세가 되었던 모세의 이 상태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고 아주 자신 만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려 하셨다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에게 이집트 왕자로서 어떻게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이끌며, 백성을 다스리고, 행정을 처리하며, 재판을 하는지 등을 배우게 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이제 모든 것이 예비된 이 상태에서, 모세는 자신이 드디어 영웅과 같이 나타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고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자손을 때리고 부당하게 대한 이집트 사람을 가서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을 벌이긴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도 개의치 않고 그냥 자기 스스로 좋게 보이는 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자손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다시 멋지게 등장하여 싸움을 중재하고 다스리려던 모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스라엘 자손들조차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파라오도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모세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비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하나님 일에 덤벼든 모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자, 이제 두 번째로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모세는 어느덧 80세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이곳 미디안 땅에서 십보라라는 아내를 맞이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대상 23:15)을 낳았습니다. 모세의 현재 직업은 목자입니다. 하는 일은 아침에 양을 몰고 나가서 풀을 뜯게 하고 오후에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이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시냇물이 없습니다. 무조건 우물에서 힘들게 수십 번을 물을 떠올려야만 양떼가 다 마십니다. 그리고 냄새나는 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아픈 데는 없는지 이곳저곳 살펴주고, 양털 깎고, 양털로 천막 짓고, 우유 짜고, 버터 만들고 아주 고생하는 일만 매일 반복됩니다. 
한때 잘나가던 이집트 왕자가 어느새 시골 양치기 할아버지가 되어있습니다. 재기를 노리고 있던 모세, 언젠가 다시 이집트에 돌아가서 위대한 역사를 이뤄보리라고 생각했던 모세,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 난 예비된 사람이거든."하며 결심을 다졌던 모세도 어느덧 80세가 되고 보니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있는 시편 90에서는 모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10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실패와 좌절과 수고와 슬픔만이 가득한 모세의 일상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양떼를 모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망이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미래도 없을 것 같은 삶이 되었습니다. "이제 난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치는 건가보다. 내 인생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냥 이집트 왕자로 사는게 좋았을까? 아니야, 그래도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시도했다는게 의미가 있을거야. 내가 너무 건방지고 교만해서 일을 그르쳤지만, 에휴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러분이 한번 모세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모세가 매일 보는 것이라곤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과 듬성듬성 나있는 풀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광경, 그리고 양떼들입니다. 특히 이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은 가시덤불과도 같아서 나무를 베어 탁자를 만들거나 막대기도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태울 때 쓸 뗄 감으로도 쓸 수 없는, 아주 볼품 없고 광야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무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건조하기 때문에 그런 떨기나무들이 건조한 열풍에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불이 붙는 광경도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모세는 아마 그러한 떨기나무를 볼 때마다 "꼭 나 같네."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재도 안되고 뗄 감도 안되는 쓸모 없는 떨기나무. 

어느 날,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 모세는 역시나 양 떼를 몰고 사막을 돌아 호렙 산에 올랐습니다. 평소 자주 보던 광경대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한가지는 그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타지 않는지 보려고 가까이 다가갑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한 음성이 나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숨겼습니다. 지금 모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나타나셨는가? 그것도 왜 이제야, 나이가 80이 다 되고 나서야 나타나셨나? 

"7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을 직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8 내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처소로 이끌려고 내려왔노라. 9 그러므로 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렀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며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나니 10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놀랍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갑자기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뭔가 큰 사건이 벌어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일상 가운데 자주 보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떨기나무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식당의 손님들일 수도 있고 동훈이 동우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또는 사물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하고 대단하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가 만나고 접하는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현재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비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제 세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80세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이 빠진 이 모세를 이집트의 사역지로 파송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일까요? 왜 모세가 아직 40세였을 때, 본인도 열정적으로 일해보려고 하는 그 때에는 침묵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할 수 없을 때까지는 일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내 바라던 소망 다 허사가 될 때 내 아버지 도움은 시작일세."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가 되고 더 이상 아들을 가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섬김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냥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인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지체들, 나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주님과 같이 섬기며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전능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 가운데 어떤 일들은 정말 내가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어떤 일들은 솔직히 주님의 도움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세 또한 그러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배운 이 지혜, 그리고 능력 있는 이 나 혼자만으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어."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러한 교만,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 교만을 완전히 꺾는데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교만하지만,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교만하고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 자체가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일을 하고 나서도 내 마음 속에서부터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할 때 그 앞에서는 "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속에서부터는 "암, 자네가 뭘 좀 아는군. 사람 볼 줄 아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저를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 주님은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자랑할만하지 못하며 부끄러운 사람인지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은연 중에라도 자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정말 마음 속에서부터 겸손할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 40년 간 광야학교에서 배운 모세는 참된 겸손, 참된 온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이까?" 대답합니다. 또 "오 내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위에 능하던 모세는 간데 없고,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세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모세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만큼 온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민 12:3).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무엇인가 나쁘게 말할 때 조차 "아멘"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해 비방할 때 "아, 그때는 내가 이집트에서 쫓겨나서 도망간 때였다. 그리고 이혼을 하는 것은 더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지금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적하려고 책 잡는거 아니냐?"하면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만 잠잠하였습니다. 모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멘. 주님 저는 그 당시에 율법을 몰라 이방여인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자격 없는 자를 긍휼로 대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이러한 자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러한 겸손은 사실은 내가 뛰어난데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참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겸손은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빛과 계시가 임하여, 내가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볼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빛을 구하여 참된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전능자로서 이 땅에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보상하시는 하나님
이제 마지막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두 보상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사망이며 지옥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원래 이르렀어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경주를 달릴 수 있는 상태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영광"일 것입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것들만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사역만을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차 앞으로 임할 영원한 왕국에서 받을 놀라운 영광을 또한 예비해 주셨습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8,9).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보화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영광으로 여기며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기던 모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오늘 우리의 삶에 힘이 없고 주님을 향해 크게 열심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무시 받고 조금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영광으로 보상하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 죄의 쾌락들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리
마지막으로 다 함께 고린도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6절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4절에 보면 이 빛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빛을 더 많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7절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모두 질그릇과 같이 약하고 쉽게 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서 뛰어난 권능이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게 하시도록 질그릇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이제 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느니라. 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탄생과 성장과 일생을 예비하셨고 또한 영원한 영광까지 예비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일상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떨기나무와 같이 볼품 없고 평범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영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능히 섬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섬기게 하시려고 모든 능력을 공급하시며 다만 겸손하게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여 따라오도록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 겸손하며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우리를 높이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수고와 고생이 너무나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낄 정도의 무겁고 뛰어난 영광으로 보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한 영광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이러한 영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전능한 손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영광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 더욱 넘치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모세와 같이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이집트의 보화들을 거절하고, 잠시 누리는 죄의 쾌락들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대로,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의 상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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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4.07.3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금요설교훈련 / 로빈22세
http://robinbox.net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 3:1) 

제목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본문 :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 3:1).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절 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을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서론
모든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들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나신, 가장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는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도록 우리를 지도해 주는 귀한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오늘 저는 많은 귀한 말씀들 가운데 한 구절인 히브리서 3장 1절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론
거룩한 형제들아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를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수식어와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모두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단어들입니다. 원래 우리의 호칭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더럽고 가증한 자들아”,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잃어버린바된 죄인들아”, “진노의 자녀들아”, “불순종의 자녀들아”. 원래는 이렇게 불려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이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더럽고 추악한 죄로 찌들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하다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요 벌레에 불과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을 보시면 “이는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더럽고 수치스러운 죄 가운데 거하던 우리들을 친히 거룩히 구별하시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저명하고 높은 사람들 앞에서 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모른 척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형제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오늘의 본문은 또한 우리를 가리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들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했던 자들입니다(히 11:13,16). 우리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순례자”라는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힘이 없고 어려울 때 날 기다리는 밝은 곳,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또 이 땅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형체가 없이 사라질 것들을 알고 믿으며, 오직 영원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길을 나선 나그네요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순례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존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크리스천”이 갖가지 장애물들을 통과하여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너무나 좋고 영광스럽지만, 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좁고 협소하며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 다만 어떤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거룩한 형제들이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란 다만 무엇으로부터 분리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여 순례의 길을 더욱 전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우리들은 마땅히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오늘의 본문에서 힘주어 권면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의 흐름과 이어지는 가운데 결론적으로 오늘의 권면이 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권면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힘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계속하여 하늘의 부르심에 깊이 참여하여 전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는 무엇이십니까?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약의 첫 번째 사도가 있다면 열두 사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많은 무리들 가운데 제자들을 선별하시고,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을 구별하여 사도로 파송하신 우리 주님 자신이 먼저 사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최초의 사도이십니다. 그분은 높고 높은 영광이 가득한 하늘로부터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첫 번째 선교사이자 사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사도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7절에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추시며”라고 말씀하시고
2장 9절에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라고 말씀하시고
2장 10절 후반부에는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라고 기록하시고
18절에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고 어떻게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반복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여 고난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이 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저는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아프리카 가나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다투었던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 오히려 필리핀이나 태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가나는 말라리아의 위험도 있고 생활도 너무 불편합니다. 이곳은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같지가 않습니다. 가나만 말고 다른 나라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원래 하늘에서 살았다. 그런데 내가 나사렛에 와서 살았던거 너 기억하니? 내가 너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 알고 있니?” 그때 그 선교사님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님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분명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면, 과거에 그분은 대언자요 사도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그분은 왕이요 통치자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레위의 혈통을 따른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히브리서 7장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포함한 히브리서 전체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계속해서 드려야만 하는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드린 한번의 제사로써 우리의 속죄사역을 완전히 완성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 안에서 앉을 수 없고 계속해서 서서 섬겨야 하는데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 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완전한 성막을 통하여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히 9:11,12).
또한 히브리서 8장 1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말한 것들에 관한 요점은 이것이니 곧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라.”라고 요점정리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 4:15). 

결론
우리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하여졌고 형제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가 다시 하늘의 거룩한 곳으로 가셔서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걷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친히 자신을 낮추시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우리의 사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실 수 있는, 그러나 완전히 승리하신 대제사장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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