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6.11.0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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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만난 하나님(히 11:24-27) 


(히 11:24-27)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27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를 버렸으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하여 견디어 냈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부제목을 달아본다면 "예일전보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도 삶 가운데 경험하기 원합니다. 

구약의 대표, 모세
만약 우리에게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을 한 명 뽑으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대언자 중의 대언자 엘리야, 지혜의 왕 솔로몬 또는 모든 현자들의 으뜸인 다니엘. 이러한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뽑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모세를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구약과 율법을 언급할 때마다 "모세"를 그 대표로 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부터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요한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도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모세라는 사람이 성경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작지 않습니다. 모세는 성경에서 그의 탄생부터 인생을 마치기까지 모두 기록된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란을 떠난 75세부터 기록이 되었고, 다윗의 인생은 소년 시절부터 기록이 되었지만, 이 모세의 인생은 그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어떠한 청년기를 보냈고, 어떠한 삶을 살고 인생을 마쳤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일생을 설교 한번에 다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일생들 가운데 몇 가지 포인트를 찍어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늘의 부제목은 "예일전보의 하나님"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캐나다에 와서 더욱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저의 앞길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고통에서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한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서도 곧바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이 나타나시거나 천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을 예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모세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히브리서 11장 24절 앞에 있는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에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니 아이가 특이한 것을 그들이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셨던 대로, 이집트 파라오 왕의 압제 가운데서도 그 수가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파라오 왕은 이들의 수가 많아지면 나중에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아이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레위인 아므람과 요게벳을 모세의 부모로 예비하셨습니다(출 6:20). 그리고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특이한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모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모세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임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죽이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자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갈대로 만든 궤를 준비하여 모세를 넣고 강가의 부들 사이에 두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부모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손안에 있었습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으로 목욕을 하러 내려옵니다. 그리고 부들 사이에 놓여있던 궤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시녀를 시켜 궤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 궤 안에 있던 모세를 발견합니다. 파라오의 딸은 이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멀리서 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얼른 달려와서 "아이의 유모를 구해와 아이에게 젖을 주도록 할까요?" 묻고 파라오의 딸은 삯을 주면서 자기를 위해 아이를 기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파라오의 딸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한 사람 모세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위해 부모를 예비하셨고, 누나를 예비하셨고, 파라오의 딸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예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모세는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언제까지 자기 어머니와 함께 있었는지 성경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모세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시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1장의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24절부터 다시 보시면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구원자요, 인도자로 예비하신 것같이 모세도 믿음으로 그러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이 한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그것을 따라갈 자유도 있고 그렇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빈주의나 운명론과 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사람의 뜻으로는 좋든지 싫든지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실 지라도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의 믿음의 결심이 합쳐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그가 스스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했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모세의 선택이 합쳐지는 순간입니다. 자,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야말로 하나님께서는 모세 자신을 예비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재판관이 되도록 다른 모든 환경을 예비해주셨지만 정작 모세 자체는 아직 예비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서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모세가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었느니라. 23 그가 정확히 사십 세 되었을 때에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그의 마음에 들더니 24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당한 일 당하는 것을 그가 보고 그를 옹호하여 학대당한 자의 원수를 갚아 이집트 사람을 치니라. 25 그는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그들을 건지려 하심을 깨달을 줄로 생각하였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더라." 

정확히 사십 세가 되었던 모세의 이 상태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고 아주 자신 만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려 하셨다는 뜻을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에게 이집트 왕자로서 어떻게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이끌며, 백성을 다스리고, 행정을 처리하며, 재판을 하는지 등을 배우게 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동에 능력이 있게 된 이 시점에서 이제 모든 것이 예비된 이 상태에서, 모세는 자신이 드디어 영웅과 같이 나타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고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자손을 때리고 부당하게 대한 이집트 사람을 가서 죽이고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을 벌이긴 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도 개의치 않고 그냥 자기 스스로 좋게 보이는 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 자손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다시 멋지게 등장하여 싸움을 중재하고 다스리려던 모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스라엘 자손들조차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파라오도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고, 이스라엘 자손들도 모세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예비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하나님 일에 덤벼든 모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자, 이제 두 번째로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모세는 어느덧 80세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이곳 미디안 땅에서 십보라라는 아내를 맞이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대상 23:15)을 낳았습니다. 모세의 현재 직업은 목자입니다. 하는 일은 아침에 양을 몰고 나가서 풀을 뜯게 하고 오후에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이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시냇물이 없습니다. 무조건 우물에서 힘들게 수십 번을 물을 떠올려야만 양떼가 다 마십니다. 그리고 냄새나는 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아픈 데는 없는지 이곳저곳 살펴주고, 양털 깎고, 양털로 천막 짓고, 우유 짜고, 버터 만들고 아주 고생하는 일만 매일 반복됩니다. 
한때 잘나가던 이집트 왕자가 어느새 시골 양치기 할아버지가 되어있습니다. 재기를 노리고 있던 모세, 언젠가 다시 이집트에 돌아가서 위대한 역사를 이뤄보리라고 생각했던 모세, 일년 이년이 지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 난 예비된 사람이거든."하며 결심을 다졌던 모세도 어느덧 80세가 되고 보니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있는 시편 90에서는 모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10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실패와 좌절과 수고와 슬픔만이 가득한 모세의 일상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양떼를 모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망이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미래도 없을 것 같은 삶이 되었습니다. "이제 난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치는 건가보다. 내 인생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냥 이집트 왕자로 사는게 좋았을까? 아니야, 그래도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시도했다는게 의미가 있을거야. 내가 너무 건방지고 교만해서 일을 그르쳤지만, 에휴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러분이 한번 모세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모세가 매일 보는 것이라곤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과 듬성듬성 나있는 풀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광경, 그리고 양떼들입니다. 특히 이 광야에 널려있는 떨기나무들은 가시덤불과도 같아서 나무를 베어 탁자를 만들거나 막대기도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불태울 때 쓸 뗄 감으로도 쓸 수 없는, 아주 볼품 없고 광야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무입니다. 그리고 광야는 건조하기 때문에 그런 떨기나무들이 건조한 열풍에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불이 붙는 광경도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모세는 아마 그러한 떨기나무를 볼 때마다 "꼭 나 같네."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재도 안되고 뗄 감도 안되는 쓸모 없는 떨기나무. 

어느 날,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 모세는 역시나 양 떼를 몰고 사막을 돌아 호렙 산에 올랐습니다. 평소 자주 보던 광경대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 한가지는 그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모세는 어찌하여 타지 않는지 보려고 가까이 다가갑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서 한 음성이 나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시니라."
모세는 하나님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숨겼습니다. 지금 모세의 마음은 아주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왜 나타나셨는가? 그것도 왜 이제야, 나이가 80이 다 되고 나서야 나타나셨나? 

"7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자기들을 직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8 내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처소로 이끌려고 내려왔노라. 9 그러므로 이제, 보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이르렀고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며 학대하는 것도 내가 보았나니 10 그런즉 이제 오라.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리니 이로써 네가 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놀랍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갑자기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뭔가 큰 사건이 벌어져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일상 가운데 자주 보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떨기나무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식당의 손님들일 수도 있고 동훈이 동우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또는 사물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하고 대단하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가 만나고 접하는 일상 가운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현재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비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제 세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80세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이 빠진 이 모세를 이집트의 사역지로 파송하시려고 나타나신 것일까요? 왜 모세가 아직 40세였을 때, 본인도 열정적으로 일해보려고 하는 그 때에는 침묵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할 수 없을 때까지는 일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내 바라던 소망 다 허사가 될 때 내 아버지 도움은 시작일세."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가 되고 더 이상 아들을 가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섬김이 사람의 일이라면 그냥 우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인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지체들, 나와 생각이 다른 지체들을 주님과 같이 섬기며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전능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 가운데 어떤 일들은 정말 내가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어떤 일들은 솔직히 주님의 도움이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세 또한 그러했습니다. "내가 이집트에서 배운 이 지혜, 그리고 능력 있는 이 나 혼자만으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어."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러한 교만,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 교만을 완전히 꺾는데 무려 4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교만하지만, 어떤 사람은 속으로만 교만하고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성 자체가 교만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일을 하고 나서도 내 마음 속에서부터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영광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칭찬할 때 그 앞에서는 "아, 주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지라도 속에서부터는 "암, 자네가 뭘 좀 아는군. 사람 볼 줄 아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저를 이러한 교만에서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 주님은 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자랑할만하지 못하며 부끄러운 사람인지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낄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은연 중에라도 자랑스럽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정말 마음 속에서부터 겸손할 수 있도록 알려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 40년 간 광야학교에서 배운 모세는 참된 겸손, 참된 온유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누구이기에 파라오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리이까?" 대답합니다. 또 "오 내 주여,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말씀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행위에 능하던 모세는 간데 없고,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세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향하여, 모세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 만큼 온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민 12:3).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무엇인가 나쁘게 말할 때 조차 "아멘"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해 비방할 때 "아, 그때는 내가 이집트에서 쫓겨나서 도망간 때였다. 그리고 이혼을 하는 것은 더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지금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적하려고 책 잡는거 아니냐?"하면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만 잠잠하였습니다. 모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멘. 주님 저는 그 당시에 율법을 몰라 이방여인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자격 없는 자를 긍휼로 대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이러한 자를 여전히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이러한 겸손은 사실은 내가 뛰어난데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참된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겸손은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빛과 계시가 임하여, 내가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볼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빛을 구하여 참된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전능자로서 이 땅에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보상하시는 하나님
이제 마지막으로, 보상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비하시는 하나님, 일상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두 보상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사망이며 지옥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원래 이르렀어야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경주를 달릴 수 있는 상태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영광"일 것입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예비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만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것들만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사역만을 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차 앞으로 임할 영원한 왕국에서 받을 놀라운 영광을 또한 예비해 주셨습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8,9).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보화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치욕을 영광으로 여기며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기던 모세의 소원은 바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오늘 우리의 삶에 힘이 없고 주님을 향해 크게 열심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무시 받고 조금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영광으로 보상하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 죄의 쾌락들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리
마지막으로 다 함께 고린도후서 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6절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4절에 보면 이 빛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빛을 더 많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7절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모두 질그릇과 같이 약하고 쉽게 깨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서 뛰어난 권능이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게 하시도록 질그릇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이제 17,18절을 보시겠습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뛰어나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느니라. 18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탄생과 성장과 일생을 예비하셨고 또한 영원한 영광까지 예비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일상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떨기나무와 같이 볼품 없고 평범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영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능히 섬길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섬기게 하시려고 모든 능력을 공급하시며 다만 겸손하게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여 따라오도록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 겸손하며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주님의 때에 우리를 높이시고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수고와 고생이 너무나 가볍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낄 정도의 무겁고 뛰어난 영광으로 보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한 영광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이러한 영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전능한 손으로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영광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광으로 보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 더욱 넘치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모세와 같이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이집트의 보화들을 거절하고, 잠시 누리는 죄의 쾌락들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대로,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의 상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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