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0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노아가 만난 하나님(창 6:9)

본문 : 창세기 6장 9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9절 한 구절입니다.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노아

여러분은 성경에서 가장 의로운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특별히 구약성경 가운데서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23:35, 눅 11:51).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예수님의 놀라운 예표가 된 요셉,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탄생시킨 모세, 불의 선지자 엘리야. 우리는 많은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이렇게 세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에스겔 14장 13,14절 말씀인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3 사람의 아들아, 그 땅이 심히 범법하여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내 손을 그 위에 내밀고 그곳의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며 기근을 그 위에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그곳에서 끊으리라.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다른 사람은 구할 수 없고, 오직 자기 혼만 건질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대명사로서 노아를 가장 먼저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창세기 6장 9절에서도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히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아가 살던 그 당시에 타락하고 범죄한 모든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의인이라는 것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 노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저는 세 가지로 요점을 잡아보았는데, 첫째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둘째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셋째는 언약의 하나님,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노아가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살펴봄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럼 첫 번째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에녹의 이야기로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의 세대들이라고 해서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고 죽었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에녹이 등장하면서는 조금 더 부연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1-24절 말씀을 보시면

21 ¶ 에녹은 육십오 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23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있지 아니하더라.

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65년을 잘 살다가 갑자기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부터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갑자기 땅에서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말 그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휴거되었는데,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시점에서 에녹에게 이 땅에 임할 심판에 대하여 계시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서 14,15절에서는 이렇게 에녹이 선포했던 말씀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4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은 에녹도 이들에 관해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또한 에녹이 낳은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가 죽으면 오리라"라는 뜻으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표적으로 세워 그의 죽음과 함께 이 땅에 심판이 임할 것을 대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년도를 한번 계산해 본다면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는지 숫자 계산을 해봤는데요, 잠시 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 보시면 에녹이 65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187년을 살면서 라멕을 낳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잘 보십시오. 26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래서 라멕을 낳기 전까지 187년 더하기 782년을 하니 총 969년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맞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손가락을 찍어놓을 년도는 바로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다는 점입니다.

자, 그리고 28절과 29절을 보시면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이 182년을 살고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한 장 넘겨서 창세기 7장 11절에 보시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태어나서 182년을 살고 노아가 600년을 살았으니 그 수를 더하면 782년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뒤에 산 년도도 782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보여주셨던 그대로 정확히 므두셀라의 죽음까지 그 세대의 사람들을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두셀라가 태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 에녹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계속된 경고의 말씀을 주셨고, 또 므두셀라의 마지막 120년 동안은 의의 선포자인 노아를 통하여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969년인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최고로 장수한 사람의 연수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다고 해서 즉시로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대언자 요나가 못마땅하고 분노하며 말했던 것처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욘 4:2). 만약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범죄한 즉시로 벌을 주시는 분이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처음으로 일생을 헌신할 때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격하여 헌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친구 되고 죄악을 물마시듯 행하고 하나님 없이 계속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를 지금까지 참아주시고 오히려 선하게 은혜로 대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묵상할 때면 주님께 헌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런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답하고 고집 센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분에 넘치는 은혜와 긍휼로 나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로 대하신 만큼, 내가 그것을 발견한 만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저 지체를 사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나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이 나를 향하여 얼마나 큰사랑으로 오래 참으셨는지를 알려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오래 참으신 것에 감격한 만큼 그 은혜가 부어진 만큼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긍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말씀 한 마디로 방주를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만 하늘을 열고 직접 벼락같은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여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모양과 길이와 재료와 창문의 위치를 세세하게 가르쳐주시고 120년 동안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성경의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노아는 말 그대로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이기적이고 사나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꾀를 부려서 남을 속여 빼앗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한 사람 노아가 온 가족과 함께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지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우뚝 솟은 언덕에서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묻습니다.

"이게 뭡니까?", "방주입니다.", "방주요? 그럼 배 말입니까?", "네, 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아니 무슨 배를 언덕 위에 짓습니까? 이걸 여기서 다 만들고 강까지 옮길 작정이세요?"

"아니요,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판의 홍수를 일으키실 겁니다. 그럼 자동으로 배가 뜨겠지요?"

"이 사람 정신나갔구먼, 이거 짓는 모양을 보니 하루 이틀 걸릴 일도 아닌거 같은데 온 가족이 고생이구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실 겁니다. 선생님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세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방주에 들어오고 싶거든 말씀만 하세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이고 됐네요 이 사람아, 정신차려."

시간이 흘러갑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수십 년이 흐르도록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를 짓는다는 소식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다가도 구경꾼들이 좀 모였다 싶으면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온 땅을 뒤덮을 물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입니다! 온 땅이 물로 뒤덮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방주로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배 값은 받지 않습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오세요!"

그러면 방주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깔깔대며 노아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이렇게 120년 간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노아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격려와 위로 없이 이 일을 감당했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찾기 원하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웃고 깔깔대며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해나가기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가 과연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만 맡겨진 일들을 사무적으로 처리하고 있는지를 잘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짐이요, 고생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만약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어떠한 일을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상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격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동행하며 함께 일하기 원하고 계십니다.

** 언약의 하나님

첫 번째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우리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의미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 다시 한 번 노아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7장 5-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행하였더라.

6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임할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7 ¶ 노아가 홍수의 물들로 인하여 자기 아들들과 자기 아내와 자기와 함께한 자기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정결하지 않은 짐승과 날짐승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 중에서

9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이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10 이레가 지나서 땅 위에 홍수의 물들이 임하니라.

이제 방주는 완성되었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날짐승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의 기는 모든 것들의 그것들의 종류대로 종류마다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왔고, 노아는 그들을 방주 안에서 배치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각각 스스로 두 마리씩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웅장하고 멋진 장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방금 읽은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이 들어간 이후에 일주일을 더 기다려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지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이 얼마나 완고하고 어리석은지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이 닫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후두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폭포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전에 한국에서 일주일 동안 소나기가 내린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낮은 지역의 마을들은 삼일 만에 다 잠겨버렸다고 합니다. 더더욱 노아의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집들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으로 산으로 오르고 어떤 이들은 방주로 달려옵니다.

"쾅쾅쾅", "이봐요! 방주 문 좀 열어주세요!! 가진 재산을 다 줄 테니 제발 문 한번만 열어주세요."

방주의 사방에서 사람들이 두드려댑니다. "제발 우리 아이만이라도 들여 보내주세요!"

사람들은 절규와 통곡으로 부르짖지만 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끝나고 심판의 날이 그들에게 닥친 것입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며 또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 29:1)는 잠언 말씀과 같이 그들은 120년간의 책망에 목을 굳게 하고 갑작스런 멸망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천둥과 번개와 쏟아지는 폭우 가운데 방주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합니다. 물이 차올라서 방주를 물 위로 들어 올린 것입니다. 40일 밤낮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뒤에도 계속해서 방주는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이제 창세기 8장 13-16절을 보시면

13 ¶ 제육백일년 첫째 달 곧 그 달 첫째 날에 물들이 땅에서 마르매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치우고 보니, 보라, 지면이 말랐더라.

14 둘째 달 곧 그 달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 ¶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아가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시작된 날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째 해 둘째 달 십 칠일이었으니, 노아는 약 1년간을 방주 안에서 지냈습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헌물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이렇게 보존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홍수에서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여러 가지 언약을 주시는데 오늘 저는 그 중에서 창세기 9장 1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내가 모든 육체를 홍수의 물들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앞으로 다시는 온 땅을 덮을 홍수의 심판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서 가장 신실하시며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믿을 만한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노아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의 심판을 온 몸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하나님 정말 심판하시는 거 아니죠?" 하면서 믿음이 연약함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믿음 없음을 동정하시며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표를 주십니다.

창세기 9장 12-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2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 대대로 영구히 맺는 언약의 증표가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노니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표가 되리라.

14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모든 육체의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 사이에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들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고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약속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므로 말씀만 하시면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를 증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정말요?"하면서 좋아하더니 이제 매일 밤 아빠에게 그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 정말 저 자전거 사주실거죠? 정말이죠?" 아빠는 이미 말을 했고 정말 사줄 마음이 있지만 아들은 믿음이 연약합니다. 아빠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미소를 지으면서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 아들은 더욱 좋아합니다. 이제 아들은 매일매일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는 어느 날 자전거 대리점에서 자전거 사진이 들어가 있는 광고지를 얻어다가 아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빠가 이거 사줄거야." 이제 아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합니다. 더 이상 아빠에게 "정말이죠?"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을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사진을 보면서 정말 자전거를 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제야 아빠가 정말 자전거를 사줄 것이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사주겠다고 말을 했으므로 더 이상 뭔가를 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아빠를 믿는 믿음이 연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주려고 새끼손가락을 걸어주기도 하고 직접 자전거의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이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의 믿음이 없음을 도와주십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모두 언약으로 가득 찬 책이며,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의 피를 언약의 피로써, 언약의 증표로써 제시하셨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녀들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또 믿고 있지만 믿지 않는 것같이 살아갈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함을 도와주시고자 주님이 오시는 때에 표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 노아의 날

주님께서는 특별히 주님이 다시 오시는 표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4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나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

41 두 여자가 방앗간에서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42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시각에 너희 주가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43 그러나 이것을 알라.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경점에 올 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자기 집이 뚫리지 않게 하였으리라.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

우리들은 어쩌면 노아의 날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너무나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긴 언제 온다고?"하면서 지내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직접 말로는 "주님이 오긴 언제 오셔?"라고 말하진 않지만 때로 우리의 깨어있지 못한 삶은 그러한 말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주님께서 오래 참으셨듯이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을 때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일하는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오래 참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추수의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흐려지고 약해질 때에, 우리를 내치거나 무섭게 다루지 않으시고 너무나 은혜롭게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과 시대의 표적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노아가 만났던 하나님, 오래 참으시며, 나와 동행하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약속하시고 믿음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우리들도, 노아의 날들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친밀히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ot/tora/01genesis/01genesis0609_noah_20070404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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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요셉이 만난 하나님(창 50:15-21)

본문 : 창세기 50장 15-21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입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5 ¶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선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두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오늘 저는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날 "불평 없이 사는게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 설교의 또 다른 제목을 잡아보자면, "불평 없이 살아간 요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37장부터 펼쳐지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예수님의 예표인 요셉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수님의 예표를 하나만 뽑으라면 무엇을 뽑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히 구약성경의 기록들이 예수님 자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구약성경들을 보기 전에 창세기만 살펴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주 많은 예수님의 예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여기에 나타난 빛이 예수님의 예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고후 4:6).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 4:4).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값없이 주어진 생명나무, 아담과 이브를 대신해 피 흘려 죽은 어린양, 그리고 사람의 의를 예표하는 무화과 나뭇잎 대신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옷 등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 특별히 사람들의 인생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 중 이 요셉이라는 인물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으며, 목자였고,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에게 보냄을 받았으나 형제들에게 거절당하여 팔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유다였고, 예수님을 판 제자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같이 옷 벗김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보디발의 집에서 모든 것을 맡은 종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거짓 고소를 당하신 것과 같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요셉은 털 깎는 자들 앞의 어린양처럼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두 강도와 못 박힌 것처럼, 요셉은 두 명의 죄인과 함께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옆의 강도들 중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듯이 요셉과 함께 갇힌 한 죄수는 용서를 받고 한 죄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왕이 되실 것처럼 요셉은 파라오의 부름을 입어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것같이, 파라오는 요셉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으로 예표되는 교회를 신부로 삼으신 것같이 요셉은 이방인 아내를 얻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땅에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곡식과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제 요셉이 두 번째 형제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받아들여졌고, 기근과 궁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예수님의 앞길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펼쳐진 것을 볼 때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히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 요셉의 어린 시절

요셉은 위로 10명의 배다른 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막내인 베냐민만이 친형제 가운데 친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원래부터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이었기 때문에, 또한 라헬이 너무나 간절히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야곱이 노년에 얻은 손자와 같은 아주 귀여운 아들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큰사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요셉에게 더 많은 사랑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특별히 채색 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었습니다. 당시 염색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옷감에 색을 하려하게 집어넣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37장 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화목하게 말도 하지 못하였더라"(창 37:4).

가뜩이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요셉이 너무나 건방진 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이라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먼 훗날 요셉이 어떻게 높아지리라는 것을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5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더라.

6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이 꿈을 들으소서.

7 보소서, 우리가 들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보소서, 내 단은 일어나 똑바로 서고, 보소서, 형들의 단은 둘러서서 내 단에게 경의를 표하였나이다, 하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를 통치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지배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라.

9 ¶ 그가 또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자기 형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가 또 꿈을 꾼즉, 보소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경의를 표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을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고하매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이 꿈이 도대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하니라.

11 그의 형들은 그를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하였더라.

 

이러한 꿈, 이러한 비전,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앞으로 요셉이 당할 고난과 역경을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요셉에게 이러한 통치자의 위치를 주시고자 반드시 필요한 고난과 시련을 먼저 주셔서 요셉이 그 위치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다루시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꿈을 주셨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매"(계 11:15).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 5:10).

 

 

** 노예로 팔려간 요셉

이러한 꿈과 비전, 소망과 목적이 요셉에게 주어진 이후로 요셉의 인생은 이러한 영광을 위한 훈련 코스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형들이 양을 잘 돌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기다리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런즉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 어떤 구덩이에 던지고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리라."

 

그러자 장남이었던 르우벤이 그래도 우리의 형제이니 직접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를 파서 던져놓고 굶겨 죽이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르우벤이 나중에 꺼내서 구해줄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르우벤의 계획을 모르는 유다가 요셉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숨긴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오라,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살붙이니라." 이렇게 되어 요셉은 팔리고 팔려서 이집트의 노예가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호위대장이었던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요셉을 발견하지 못한 르우벤과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직접 한번 요셉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요셉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억울함, 분노, 슬픔, 낙담, 자포자기, 불평과 같은 아주 복합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요셉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집에서 귀하게 사랑 받던 아들이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예로 팔려서 부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터뜨린다면 아주 정당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어릴 때 어머니를 데려가시더니 이젠 아버지와 가족들을 다 빼앗아 가시다니요! 하나님 도대체 제가 잘못한 게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들에게 말했더니 미움만 받고 이젠 낯선 땅에 팔려 와서 이렇게 모욕을 당하며 고생하다니요! 차라리 죽는게 낫겠습니다!"하며 따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요셉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셉은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통제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영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9장 2-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더라.

3 그의 주인이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고 또 주께서 그가 행한 모든 일을 그의 손에서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어 그를 섬기매 그가 그를 자기 집을 감독하는 자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의 손에 맡기니

5 그가 그를 자기 집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감독하는 자로 삼은 뒤부터 주께서 요셉으로 인하여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으므로 주의 복이 그의 집과 들에 있던 그의 모든 소유에 임하니라.

6 그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자기가 먹는 빵 외에는 자기 소유 중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며 잘생겼더라.

요셉은 종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3절에서는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말씀을 몰랐겠지만 요셉은 이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일한 것이 아니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과 동행하여 주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마다 넘치게 복을 주셨습니다. 어리고 가장 낮은 위치의 종에 불과했던 요셉은 어느덧 자기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 동안의 고통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 코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의 휴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을 한 단계 더 높이 이끌고자 하십니다.

 

 

** 감옥에 갇힌 요셉

17세에 노예로 팔려와 현재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아버지 야곱보다는 아름다웠던 어머니 라헬을 더 닮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매우 잘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 청년 요셉에게 너무나 달콤한 죄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다같이 7-9절을 보시겠습니다.

7 ¶ 이 일들 뒤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말하기를, 나와 함께 눕자, 하였으나

8 그가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보소서, 나의 주인이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 손에 맡겼은즉

9 이 집에는 나보다 더 큰 자가 없으며 주인이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당신이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니라.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고 결코 자신의 죄에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하는 말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죄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11-20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이럴 즈음에 요셉이 자기 일을 보러 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안에 그 집 사람들이 하나도 없더라.

12 그녀가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함께 눕자, 하니 그가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가매

13 그가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아감을 그녀가 보고

14 자기 집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함께 누우려고 내게로 들어오기에 내가 큰 소리로 외쳤더니

15 내가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을 그가 듣고는 자기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며

16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옷을 자기 곁에 두니라.

17 그녀가 이 말들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오기에

18 내가 소리를 높여 외쳤더니 그가 자기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하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런 식으로 행하였다, 하므로 그 말들을 들을 때에 진노하니라.

20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감옥에 넣었는데 이곳은 왕의 죄수들이 묶인 곳이더라. 그가 거기서 감옥에 있었더라.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범죄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한번 요셉은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합당하고 적절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차라리 내가 범죄하였더라면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어찌 하나님을 따르고도 이렇게 비참해 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인도하고 계시긴 합니까? 하나님 저와 동행하고 계시는거 맞습니까?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악하게 대하십니까?" 요셉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맡아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죄수가 요셉과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명은 파라오의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요, 또 한 명은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잔 맡은 사람은 포도나무 가지 세 개가 있고 포도송이가 열리기에 거기서 포도들을 따고 포도를 짜서 파라오의 손에 잔을 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빵 맡은 사람은 온갖 구운 음식을 담은 빵 바구니 세 개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새들이 와서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꿈을 해석하여 주었는데, 요셉의 해석대로, 파라오의 잔을 맡은 사람은 삼일 뒤에 직책이 회복되었고, 빵을 굽는 자는 삼일 뒤에 그를 나무 위에 매달아 공중의 새들이 먹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잔 맡은 자에게 직책이 회복될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잔 맡은 자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 요셉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슬프게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정말 억울하게 나의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렸지요. 내가 얼마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형들은 날 구덩이에 던지더니 옷을 다 벗기고는 지나가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어요. 원수도 아닌 형들에게 팔린 그 기분을 아시나요? 그 배신감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또 노예가 되고 나서는 정말 모든 일을 남이 보던 안 보던 성실하게 일했어요. 노예가 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내가 노예가 된 게 너무나 억울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요. 그래서 결국엔 최고 관리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 못된 여자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지 뭡니까...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셨나 봐요."

 

요셉은 충분히 불평으로 가득한 사람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망을 가지고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었습니다. 잘생기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데 갑자기 야위고 흉한 일곱 마리 암소가 나타나서 살진 암소들을 다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꿈이었습니다. 파라오는 놀라서 잠이 깼다가 다시 잠이 듭니다. 한 나무줄기가 있는데 통통하고 좋은 이삭 일곱 개가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늘고 동풍에 바싹 말라버린 다른 이삭 일곱 개가 솟아 나오더니 통통하고 꽉 찬 이삭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파라오가 두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고 나서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와 점술가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때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가 요셉을 기억하고 파라오에게 요셉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41장 25-4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5 ¶ 요셉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파라오의 꿈은 하나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고자 하는 일을 파라오에게 보이셨나이다.

26 좋은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요, 또 좋은 이삭 일곱 개도 일곱 해니 이 꿈은 하나이니이다.

27 그것들을 따라 올라온 야위고 못생긴 암소 일곱 마리는 일곱 해요, 또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이삭 일곱 개도 기근이 드는 일곱 해니

28 내가 파라오에게 아뢰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고자 하는 일을 파라오에게 보이셨나이다, 함이 바로 이것이니이다.

29 보소서, 이집트 온 땅에 두루 일곱 해 큰 풍년이 들겠고

30 그 뒤에 일곱 해 기근이 들므로 이집트 땅에서 그 모든 풍성함을 잊게 되고 그 기근이 이 땅을 소멸시킬 것이며

31 또 뒤따르는 그 기근이 매우 심하므로 그것으로 인해 이 땅에서 그 풍성함을 알지 못하게 되리이다.

32 파라오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굳게 정하셨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서 곧 그 일을 행하실 터이니

33 그러므로 이제 파라오께서는 사려 깊고 지혜로운 사람을 골라 그가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소서.

34 파라오께서는 또 이 일을 행하시되 곧 이 땅에 직무 수행자들을 두시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이집트 땅의 오분의 일을 취하시고

35 그들이 다가올 그 좋은 해 동안에 모든 식량을 거두고 그 곡식을 파라오의 손 밑에 쌓아 두어 도시들 안에 식량을 간직하게 하소서.

36 그 식량을 이 땅을 위해 저장하여 이집트 땅에 임할 일곱 해 기근을 대비하시면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라.

37 ¶ 그 일이 파라오의 눈과 그의 모든 신하들의 눈에 좋게 보이므로

38 파라오가 자기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같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을 우리가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여 주셨으니 너와 같이 사려 깊고 지혜로운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릴지니라. 내 온 백성이 네 말에 따라 치리를 받으리니 나는 왕좌에서만 너보다 높으리라, 하니라.

41 파라오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자, 내가 너를 세워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리게 하노라, 하며

42 자기 손에서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주고 그에게 고운 아마 옷을 입히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43 자기가 소유한 둘째 병거에 그를 타게 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무릎을 꿇고 절하라, 하더라. 파라오가 요셉을 이집트 온 땅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았더라.

44 파라오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파라오니라. 이집트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손발을 들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또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며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아내로 주니라. 요셉이 나가서 이집트 온 땅을 돌아보니라.

이집트 이름 사브낫바네아의 의미는 바로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 대단한 출세요 인생역전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꿈으로 약속하신 요셉의 본 위치였고, 그 전에 있었던 많은 고난과 역경은 다만 이 위치에서 올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 코스였을 뿐인 것입니다.

 

 

** 가족들을 만난 요셉

이제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요셉에게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와 주변의 온 땅에 7년 간 큰 풍년을 주셨고 또 그 이후 7년간의 큰 기근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집트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땅의 다른 많은 민족들조차 곡식이 없으므로 곡식을 많이 저장해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오게 됩니다. 저기 멀리 있었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 역시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오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과 형제들이 만나는 이야기는 자세히 한다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집에 가시면 꼭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이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임을 밝히고 아버지의 온 가족을 이집트로 불러들입니다.

 

다 같이 창세기 45장을 보시겠습니다. 1-1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때에 요셉이 자기 옆에 서 있던 모든 자들 앞에서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를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게 하니라.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릴 때에 그와 함께 서 있던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2 그가 크게 우니 이집트 사람들과 파라오의 집이 듣더라.

3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 하니 그의 형제들이 그 앞에서 불안하여 능히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매

4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하니 그들이 가까이 가매 그가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동생 요셉이니 곧 당신들이 이집트에 판 자니이다.

5 그런즉 이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당신들 스스로에게 노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또 이 땅에 이 년 동안 기근이 있었으나 아직 오 년이 남아 있어 그때에 밭을 갈지도 못하고 수확하지도 못하리이다.

7 하나님께서 큰 구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을 위해 후손을 땅에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이제 나를 여기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분께서 나를 파라오에게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그의 온 집의 주(主)가 되게 하셨으며 또 이집트 온 땅의 치리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그분께 아뢰되, 아버지의 아들 요셉이 이같이 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온 이집트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하지 말고 내게로 내려오소서.

10 아버지는 고센 땅에 거하실 것이며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식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 떼와 소 떼와 모든 소유는 나와 가까이 있으리이다.

11 아직도 오 년 동안 기근이 있으리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받들어 모시겠나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과 아버지의 모든 소유가 궁핍을 당할까 염려하나이다, 하소서.

하나님을 뜻을 완전히 이해한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넘긴 형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지도 않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요셉은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의 눈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았고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사한 요셉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본문인 50장 15절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제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온 지 17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인하여 요셉이 돌변할 것이라 걱정하고 있습니다.

 

15-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5 ¶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우리에게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그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을 선이 되도록 계획하시고 이루셔서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두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를 괴롭게 만들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자포자기하며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요셉과 같이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우리를 모두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만드셨고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역경은 우리를 낮추신 만큼, 아니 낮추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자 허락하시는 영광의 훈련 코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요셉과 같이 불평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이 늘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넘치는 감사 속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주시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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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창 22:15-18)

본문 : 창세기 22장 15-18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간증과 함께 전했던 말씀인데, 먼저 저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되었고 또 한국에 갈보리 형제자매님들도 인상 깊게 들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와서도 이 말씀을 나누고 싶었었는데 오늘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아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15 ¶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 곧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즉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서론

저는 한국의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었을 때 약 5년가량,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말씀을 준비할 때는 가능하면 재미있게 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준비하게 되고 또 성경을 읽을 때 더 깊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보려고 시도하곤 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자료들과 또 지혜를 주셔서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이 부분만을 다루지 않고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면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하던 것처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재밌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아브라함의 부족함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중에 하나였고 매우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사는 큰 가족 공동체 안에 있었고, 나름대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많은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라는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성품을 조금 엿보자면, 그는 매우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거나 다른 아내를 얻어서 자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평생 자기 아내인 사라만을 사랑하고 아끼는 강직하고 자상하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봐, 저 양반 정말 좋은 사람인데 아들이 없는게 흠이야. 아들만 있으면 딱일텐데." 아브라함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캐나다에 보내놓고 아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저도 부모님만큼 그리워하진 못할지라도 부모님이 그립고, 또 가끔씩 갈보리교회에서 올려주는 찬양과 간증 mp3를 들으면 성도님들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면서 그리운 마음이 커지곤 합니다. 우리는 정들고 사랑했던 누군가와 멀어지면 이렇게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누구와 떨어지고 그리워하기 이전부터, 원래 가지고 있는 허전함, 외로움, 상실감, 상처, 버림받은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별하고 잃어버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지게 된 허전함과 외로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무엇이든 이뤄보려고 몰두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실된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또 대가족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살았지만, 그 마음에 허전함이란 것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나에게 아들만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텐데. 내 인생이 더 이상 허전하지 않을텐데."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허전함을 허락하십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이 백 명의 자식을 낳고 또 여러 해를 살아 그의 햇수의 날들이 많을지라도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또 그가 묻히지도 못하면 내가 말하건대 유산된 자가 그보다 나으니라.”(전 6:3).

아브라함이 겉으로 백 명의 아들을 가진다 해도 그의 내면에 있는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면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유산된 아기보다 못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이러한 갈증이 있습니다. "내가 아들만 가진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참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 자기 자신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고, 너의 자손에게 줄 땅이 있으니, 너의 씨에게 복을 줄 테니 너는 먼저 너가 정을 붙이고 사랑하며 관계하고 붙잡고 집착하던 모든 것, 너의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서 나오라."

 

지금 아브라함은 현재의 상태에서 아들만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만족할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들을 줄테니 우선 그 만족하던 모든 상황을 떠나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이 많은 아브라함은 쉽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친구들과 정을 떼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가족들과는 정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가 죽기까지 머뭇머뭇하며 떠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죽은 형제인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나옵니다. 롯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으니 여차하면 조카인 롯을 자기 아들로 삼기 위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는 제 고향과 친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나와 정들었던 사람들을 떠나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심이었어요.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하던지... 그렇지만 저에게 아들만 있다면 행복해 질거라 생각해서 꾹 참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아들을 주세요!"

 

 

** 위기와 은혜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때 바로 아들을 주셨다면 창세기는 10장 이상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는커녕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물도 많고 곡식도 많았던 이집트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는 사람도 많고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사람도 많았는데, 이제 새로운 문명지 이집트에 들어가려니 막상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꾸미고 한평생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온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아무래도 파라오가 아름다운 사라를 보고 자기를 죽일 것이고 빼앗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졌고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살길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파라오에게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아들 하나 얻으려고 그 먼 길을 떠나왔고, 이제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데, 한평생 지조 있게 지켜온 아내마저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신세입니까? 신이난 파라오는 사라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들과 종들을 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라리 아들 없이 그냥 고향에서 살 걸. 롯을 그냥 아들로 삼고 메소포타미아에 있을걸. 한평생을 정직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내가 무서운 거짓말로 아내를 팔아 넘기고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무엇이든 하실 수 있거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아들을 주신다던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길래 누가 너 롯을 데리고 나오래? 내가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라고 했지? 왜 롯을 데리고 나왔어? 롯도 친족이야, 아니야?"하면서 다그쳐 묻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가나안 땅에 있으라고 했지 언제 이집트에 내려가라고 했어! 기근이 든거는 시험이야, 시험, 그 정도도 통과할 믿음이 없느냐? 너가 다 망쳐놓았으니 이제 너가 알아서 살아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 그리고 아내를 팔아 넘기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넌 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죄 값을 치르고 멸망하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7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하여 파라오와 그의 집에 큰 재앙들로 재앙을 내리시매

거짓말은 누가 했습니까? 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네,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상상해 오던 하나님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고 강력하고 무서운 분이어서 한 가지 실수만 하더라도 책잡고 심판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되 조건 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를 신실하게 선하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전함과 버림받은 마음을 그러한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파라오는 아브라함 때문에 큰 재앙을 당했지만 아브라함을 감옥에 넣거나 해치지 않고 오히려 무사히 그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이상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다 망쳐놓은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여태까지 자기가 아들처럼 데리고 온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롯과 분리

창세기 13장 9절을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하니라.

이상한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떤 경우에도 롯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허전함과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아들과 같은 유일한 존재인데 어떻게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양을 더 줬으면 줬지, 손해를 봤으면 봤지, 어떻게 아들 같은 조카를 떠나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아브라함은 이제 롯이 없어도 그렇게 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롯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노니 내게서 갈라서라. 나는 너가 나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버리라고 강요하시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풀리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족한 만큼 우리의 허전함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끼고 다녔던 롯을 떠나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하나님,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 우리도 경험하기 원합니다.

 

 

** 방패이신 하나님

다 같이 창세기 15장을 보시겠습니다.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 이 일들 뒤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이 지내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쿠스에서 온 이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이 말씀은 아브람이 롯을 떠나보낸 뒤에, 롯이 거하던 소돔 땅에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롯을 구출해 온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전쟁은 가나안의 네 왕국과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이 벌인 것인데, 네 왕국 연합이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의 연합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훈련받은 종 318명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치고 롯을 구출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도와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들이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내가 너의 방패고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란다. 내가 너에게 정말 주려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나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아브라함의 관심은 변함 없이 온통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약속하시고 또 짐승을 쪼갠 가운데를 혼자서 가로질러 가심으로 피의 언약까지 맺어주셨습니다.

 

 

** 또 실패

75세 때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10년 간 아들을 기다렸어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답답해하던 아내 사라가 여종인 하갈을 아내로 주어서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99세 때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꿔주시고 할례의 언약을 주시면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너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 하는 "이삭"이라 지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 번 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사라도 장막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으면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심정도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10년 동안 기다렸다가 기다려도 안되니까 이스마엘을 낳고 지금 또 이스마엘이 13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들 소리하십니까?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주세요." 이 말은 이미 이스마엘이 다 컸다는 소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을 하나 주십니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라오가 아비멜렉으로 바뀐 것 말고는 창세기 12장에 나왔던 내용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사라를 자기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속이고서 아비멜렉에게 넘겨줍니다. 사실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이고 쉬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75세 때 가나안 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나님께서 입학시험으로 주셨던 것인데, 이제 졸업할 때가 되어서 졸업시험으로 어려운거 안하시고 1학년 때 봤던 시험 그대로 내셨습니다. 그런데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75세 때 써냈던 답안지 그대로 적었습니다. 24년 동안 아브라함이 변했습니까? 믿음이 충만하고 굳세어지고 승리를 해야 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1학년 때 봤던 시험문제를 아직까지 못 푸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하면 총 12년이고, 대학교 4년 석사 박사를 6년 잡아서 다 더해도 22년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믿음에 관한한 이제 박사학위를 딸만한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봤던 아주 기초적인 시험을 또 틀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그래도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고향도 떠나왔고 롯도 내보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도 아들을 주실래야 주실 수가 없겠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엎드려서 웃기나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이스마엘이나 낳더니만 이제는 가장 초보적인 시험에서 또 넘어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포기하실거야. 이 멍청이, 구제불능, 난 정말 가망이 없는 사람이구나. 나이만 먹었지 믿음이 하나도 안 자랐어. 이제는 사라도 완전히 잃어버린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브라함이 아닌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다 같이 창세기 2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 또 주께서 친히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수태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정한 때에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하나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 우리의 실패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오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올바르고 흠이 없는 사람만 사랑하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패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으실거야."하면서 오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러한 오해를 풀어주기 원하십니다.

 

로마서 4장 22-2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23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이제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24 우리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을 믿을진대 그것을 의로 인정받을 우리도 위한 것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가 믿음이 좋았으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거야. 아 내가 얼마나 큰 결단으로 하나님을 따랐던지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을 주셨어야 마땅하지, 암."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는 이삭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 믿음의 시험

이제 우리는 우리가 처음 읽었던 창세기 22장에 이르렀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정말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도 아시고, 그가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게 보일 정도로 이상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번제 헌물이란 것은 그를 칼로 찌르고 조각조각 잘라서 하나님 앞에 불태우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우상 신들도 그렇게 무서운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준비합니다. 아침 일찍 월드컵을 보려고 일어난 젊은이들처럼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물을 챙겨 모리아 땅으로 출발합니다. 얼마 전가지만 해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봤던 시험마저 틀렸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100점 만점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걸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희생을 하고 헌신을 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옆에 아브라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잠자리에 누운 아브라함은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시 밖에 나가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끌벅적하게 정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살았지만 너무나 허전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기근이 든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에 갔다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망칠 뻔한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나오게 해주신 이상한 하나님을 떠올려 봅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이스마엘을 낳고, 아비멜렉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라를 빼앗길 뻔한 모든 순간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아브라함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서 허전한 줄만 알았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만족하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 헌물로 드릴지라도 여태까지 나에게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고자 다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귓가에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너무나 행복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큰 결단과 희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한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만족했고 믿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쁘게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1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을 걸고 맹세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얻고 완전히 만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실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우리의 만족

오늘 우리의 마음이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분주하게 세상의 여러 가지를 찾고 주목하고 집착하고 붙잡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찬사를 받아도,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다 짊어져도, 또는 아브라함의 소원이었던 것처럼 백 명의 자식을 가질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의 힘을 다 허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참되게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55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오호 목마른 모든 자들아, 너희는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또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내 말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라. 또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너희 혼으로 하여금 스스로 기름진 것을 기뻐하게 할지어다.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긍휼이니라.

우리는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번 만나지 말고 매순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완전히 만족될 때까지 그분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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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 : 2010.10.24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여호와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창 22:7-8)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입니다창세기 22장 7절과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내 아버지여하니 그가 이르되내 아들아내가 여기 있노라하매 이삭이 이르되불과 나무를 보시거니와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내 아들아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하고 이처럼 그 두 사람이 함께 가서

 

또한 14절도 읽어보겠습니다.

14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하느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부족함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친구이자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또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2장 말씀은 어찌 보면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일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성경 속에 기록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곧 예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여기서 나온여호와이레라는 단어는 많은 분들이 익히 아시겠지만히브리말로 예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할 때만이 온전히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질그릇처럼 만들어진 사람의 마음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을 때만이 가득 찰 수 있고 충만할 수 있습니다많은 돈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건강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좋은 가족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명예와 인기를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성공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도 부족함이 있습니다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족함과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끊임없는 문제와 부족함 속에서 허전하고 공허한 인생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예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아브라함을 위하여아브라함의 인생에 예비하신 것이 무엇일까요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바로 아들이 없는 부족함을 예비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세계 4대 문명의 발달지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나름대로 잘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부모님과 형제들과 조카들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많은 가축들과 종들을 거느리면서 살았습니다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부족함이 있었습니다그것은 바로 족보를 이어나갈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모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부족함을 아브라함에게 예비하셨습니다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그러한 부족함을 통하여 참 만족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부족함이 있고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돈이 부족한 것도 문제입니다건강하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직장 문제도 있습니다자녀들도 문제입니다한 번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옵니다또 한 번 어떤 부족함을 채워서 만족했다 싶으면 또 다른 부족함결핍이 생겨납니다오늘 우리가 주님을 찾게 된 이유는 우리가 모두 부족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가 모든 면에서 만족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이처럼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부족함을 예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찾게 하시고 만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아들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이곳에 아들을 가진 부모님들께서 많이 계신데요정말 아들이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완전한 만족을 누리며 사십니까아들이 두 명세 명 있으신 부모님은 그 아들로 인해서 만족이 세 배기쁨이 세 배이신가요아브라함은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아들 하나만 있으면 정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우리도 때로는 어떤 문제만 해결되면어떤 것 하나만 가지면 정말 행복하고 만족할 것이라고 믿을 때가 있습니다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전도서 1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

또한 전도서 6장 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할 때만이 완전히 만족하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아브라함에게 주기 원하셨고오늘 우리에게도 주기 원하십니다상황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그런 일시적인 만족이 아닌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만족하는 참된 행복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은혜를 예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이 실패하고 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그리고 가족과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온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떠났습니다또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정을 하란에서 멈추고 자신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냥 머물러 지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가족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그 때에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자신의 조카인 롯을 데리고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만약 아들을 주지 않으시면 조카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왔던 아브라함은 또 다시 기근이라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이집트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아브라함은 파라오가 자신을 죽이고 사라를 아내로 취할 것이라 생각하고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오히려 그 결과로 파라오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 약속하셨지만아브라함은 자신의 지혜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무사히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고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는속으로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그리고 그 후에는 또 다시 아비멜렉의 땅에서 사라가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일생은 실패와 의심으로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가득하였습니다아브라함은 늘 하나님을 의심하고 실패하고 넘어졌지만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인도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시도하다가 오히려 위험을 맞이했지만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아브라함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결국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지만아들을 주신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아브라함의 일생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바로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우리는 늘 주님을 떠나서 방황하며 우리 자신이 원하는 길대로 다녔지만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보호하시고가장 좋고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우리는 교만과 거짓과 이기심 가운데 살았지만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와 긍휼로 대하셨습니다또한 우리는 걱정과 염려와 의심 가운데 살았지만하나님께서는 늘 신실하고 또 세심하게 우리의 필요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전에 제가 아이들에게는 종종했던 간증이 있는데요바로 제가 훈련소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저는 공익근무를 해서 한 달 동안만 훈련을 받았는데요그 짧은 한 달 동안에도 먹고 싶은게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처음에 군대밥을 보면서 옆 사람에게 이거 완전 개밥 아니냐.”라고 하면서 거의 먹지 않던 사람도 저녁에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그리고 주말이 되면 이제 훈련소 내에 기독교천주교불교 이렇게 종교 활동을 하는데요사람들의 화제는 어디서 무슨 음식을 주는가입니다불교에서는 햄버거 준다더라천주교는 컵라면 준다더라 하면서 어느 종교 행사를 갈지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너무나 치킨이 먹고 싶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저 치킨 먹고 싶어요.” 이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그런데 이제 그날 점심시간이 되어서 군가를 부르면서 점심식사를 기다리는데 마침 반찬이 닭튀김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와 진짜 하나님 좋다.”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어차피 두 조각 정도만 할당 될 것이기 때문에 크게 기쁜 마음이 들진 않았습니다그런데 갑자기 무슨 작업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저를 포함한 여덟 명 정도가 불려가게 되었습니다작업을 다 하고 나서 돌아왔는데 이미 배식이 다 끝나고 식당이 완전히 정리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교가 치킨 두 바구니를 가져와서는 책임지고 다 먹으라고 주는 것이었습니다그때 정말 배터지게 치킨을 먹으면서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저 같은게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고 공급해 주십니까?” 치킨을 먹었다는 자체도 기쁘고 감사했지만하나님께서 세심하게 예비하신 모든 상황들을 볼 때 더욱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아 정말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오늘날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입니다우리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며우리에게 공급이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예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22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창세기 17장 21절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에 이 정한 때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더불어 세우리라.” 하신 것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삭과 더불어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늘 실패하고 의심하던 아브라함이 드디어 여기서는 드디어 믿음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과 언약을 맺으리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다함께 히브리서 11장을 보시겠습니다히브리서 11장 17절부터 1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이 말씀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의 독생자를 바쳤느니라.

18 이 아들에 관하여는 그분께서 전에 이르시되이삭 안에서 네 씨가 부름을 받으리라하셨느니라.

19 하나님께서 심지어 죽은 자들로부터 능히 그를 일으키실 줄로 생각하였으므로 또한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정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여기서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이삭을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여주는 정확한 모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22장으로 돌아와 보시겠습니다창세기 22장 5절을 보시면여기서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부활의 믿음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청년들에게 이르되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무르라나와 아이는 저기에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하고는” 아브라함은 분명히 나와 아이가 경배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창세기 22장 7절과 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내 아버지여하니 그가 이르되내 아들아내가 여기 있노라하매 이삭이 이르되불과 나무를 보시거니와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니

아브라함이 이르되내 아들아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하고 이처럼 그 두 사람이 함께 가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는 말씀을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굳게 믿고흔들림 없이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의 앞길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예비하셨습니다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거나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예비하려했다면 결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것을 믿고 단순히 순종하였을 때 큰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함께 창세기 22장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6 이르되가 말하노라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곧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즉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하니라.

 

믿음의 순종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우리는 여기서 맹세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말로 약속하시고또 짐승을 쪼개는 언약도 맺으셨지만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맹세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이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우셨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두고 맹세하여 복을 주고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정말 주고자 하셨던 것은 무엇입니까아들을 빼앗기는 아픔이었을까요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맹세하면서 복을 주고 복을 주는 것이었을까요?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다함께 로마서 8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죄 많은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영원 전부터 예비하신 구원의 계획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삭이 나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던 그 모습 그대로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에 오르셨던 것입니다우리는 아무것도 받은 자격이 없었고오히려 멸망에 떨어져야 합당한 죄인들이었지만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또 한 구절만 더 보시겠습니다고린도전서 2장 9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함과 같으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현재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제 영원한 왕국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어마어마한 것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사람이 눈으로 보거나귀로 듣거나마음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것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늘 영광과 존귀를 꿈꾸는 사람조차도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놀라운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놀라운 영광과 존귀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하여 부족함도 허락하셨습니다또한 아브라함이 넘어지고 실패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은혜와 긍휼을 예비하시고 공급하셨습니다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예비하시고피할 길도 예비하셔서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복을 맹세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부족함을 예비하셨습니다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넘어지고 실패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예비하시고 공급하여 주셨습니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시험들을 예비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시험들을 잘 통과하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아니라 바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과 존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그분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우리가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모든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다만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첫째로 구할 때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순종하였을 때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모형을 볼 수 있었습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시험 가운데 있을 때에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전진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모형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내가 예비하는 방법이나내가 마련하는 길들을 다 내려놓고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할 때에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고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까지 내주신 우리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오늘 인도하고 계십니다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더 자라나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서 우리가 늘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04.0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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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가 만난 하나님(창 6:9)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니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창 6:9).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9절 한 구절입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노아
여러분은 성경에서 가장 의로운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특별히 구약성경 가운데서 세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23:35, 눅 11:51).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브라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예수님의 놀라운 예표가 된 요셉,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탄생시킨 모세, 불의 선지자 엘리야. 우리는 많은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대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실 때 이렇게 세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에스겔 14장 13,14절 말씀인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3 사람의 아들아, 그 땅이 심히 범법하여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내 손을 그 위에 내밀고 그곳의 빵 지팡이를 부러뜨리며 기근을 그 위에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그곳에서 끊으리라. 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자기 혼만 건지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이스라엘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다른 사람은 구할 수 없고, 오직 자기 혼만 건질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대명사로서 노아를 가장 먼저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창세기 6장 9절에서도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인이라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히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아가 살던 그 당시에 타락하고 범죄한 모든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의인이라는 것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 노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 저는 세 가지로 요점을 잡아보았는데, 첫째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둘째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셋째는 언약의 하나님,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노아가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살펴봄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럼 첫 번째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에녹의 이야기로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의 세대들이라고 해서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고 죽었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에녹이 등장하면서는 조금 더 부연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부터 보시면 "21 에녹은 육십오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뒤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23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에녹은 65년을 잘 살다가 갑자기 므두셀라를 낳은 이후부터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갑자기 땅에서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은 말 그대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휴거되었는데, 이에 관하여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시점에서 에녹에게 이 땅에 임할 심판에 대하여 계시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서 14,15절에서는 이렇게 에녹이 선포했던 말씀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4 아담으로부터 일곱 번째 사람은 에녹도 이들에 관해 대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자신의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시나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또한 에녹이 낳은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은 "그가 죽으면 오리라"라는 뜻으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표적으로 세워 그의 죽음과 함께 이 땅에 심판이 임할 것을 대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년도를 한번 계산해 본다면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정말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홍수가 일어났는지 숫자 계산을 해봤는데요, 잠시 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에 보시면 에녹이 65년을 살며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187년을 살면서 라멕을 낳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잘 보십시오. 26절에 보면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래서 라멕을 낳기 전까지 187년 더하기 782년을 하니 총 969년의 생애를 살았습니다. 맞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손가락을 찍어놓을 년도는 바로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뒤 782년을 더 살았다는 점입니다.
자, 그리고 28절과 29절을 보시면 므두셀라의 아들인 라멕이 182년을 살고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한 장 넘겨서 창세기 7장 11절에 보시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 번째 해"에 홍수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태어나서 182년을 살고 노아가 600년을 살았으니 그 수를 더하면 782년입니다. 맞습니까? 그리고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뒤에 산 년도도 782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보여주셨던 그대로 정확히 므두셀라의 죽음까지 그 세대의 사람들을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두셀라가 태어난 바로 그 시점부터 에녹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계속된 경고의 말씀을 주셨고, 또 므두셀라의 마지막 120년 동안은 의의 선포자인 노아를 통하여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969년인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최고로 장수한 사람의 연수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있다고 해서 즉시로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대언자 요나가 못마땅하고 분노하며 말했던 것처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욘 4:2). 만약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범죄한 즉시로 벌을 주시는 분이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처음으로 일생을 헌신할 때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격하여 헌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세상과 친구 되고 죄악을 물 마시듯 행하고 하나님 없이 계속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를 지금까지 참아주시고 오히려 선하게 은혜로 대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묵상할 때면 주님께 헌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런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답하고 고집센 나를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너무나 분에 넘치는 은혜와 긍휼로 나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로 대하신 만큼, 내가 그것을 발견한 만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 저 지체를 사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나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이 나를 향하여 얼마나 큰사랑으로 오래 참으셨는지를 알려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오래 참으신 것에 감격한 만큼 그 은혜가 부어진 만큼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긍휼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말씀 한 마디로 방주를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만 하늘을 열고 직접 벼락같은 말씀으로 세상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여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모양과 길이와 재료와 창문의 위치를 세세하게 가르쳐주시고 120년 동안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성경의 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노아는 말 그대로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이기적이고 사나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꾀를 부려서 남을 속여 빼앗는 사람은 부자가 되고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며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한 사람 노아가 온 가족과 함께 방주를 짓기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지나가면서 볼 수 있도록 우뚝 솟은 언덕에서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묻습니다. 
"이게 뭡니까?", "방주입니다.", "방주요? 그럼 배 말입니까?", "네, 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아니 무슨 배를 언덕 위에 짓습니까? 이걸 여기서 다 만들고 강까지 옮길 작정이세요?"
"아니요,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심판의 홍수를 일으키실 겁니다. 그럼 자동으로 배가 뜨겠지요?"
"이 사람 정신나갔구먼, 이거 짓는 모양을 보니 하루 이틀 걸릴 일도 아닌거 같은데 온 가족이 고생이구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를 심판하실 겁니다. 선생님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세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방주에 들어오고 싶거든 말씀만 하세요.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아이고 됐네요 이 사람아, 정신차려."

시간이 흘러갑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수십 년이 흐르도록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를 짓는다는 소식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다가도 구경꾼들이 좀 모였다 싶으면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온 땅을 뒤덮을 물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입니다! 온 땅이 물로 뒤덮힐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방주로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배 값은 받지 않습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들어오세요!" 그러면 방주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깔깔대며 노아를 조롱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이렇게 120년 간 방주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만약 노아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격려와 위로 없이 이 일을 감당했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찾기 원하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비웃고 깔깔대며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주님과의 교제를 누리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해나가기 원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가 과연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만 맡겨진 일들을 사무적으로 처리하고 있는지를 잘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일들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짐이요, 고생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만약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어떠한 일을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다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주님과 동행하는 상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과 동행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격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지 결코 가만히 앉아서 쉬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동행하며 함께 일하기 원하고 계십니다. 


언약의 하나님
첫 번째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두 번째로 우리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의미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 다시 한번 노아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7장 5절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5 노아가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에 따라 행하였더라.
6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임할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7 노아가 홍수의 물들로 인하여 자기 아들들과 자기 아내와 자기와 함께한 자기의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갔고
8 정결한 짐승과 정결하지 않은 짐승과 날짐승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 중에서
9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이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10 이레가 지나서 땅 위에 홍수의 물들이 임하니라."

이제 방주는 완성되었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날짐승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의 기는 모든 것들의 그것들의 종류대로 종류마다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왔고, 노아는 그들을 방주 안에서 배치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짐승들이 각각 스스로 두 마리씩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너무나 웅장하고 멋진 장면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방금 읽은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이 들어간 이후에 일주일을 더 기다려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지 우리는 다시 한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이 얼마나 완고하고 어리석은지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이 닫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후두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폭포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전에 한국에서 일주일 동안 소나기가 내린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낮은 지역의 마을들은 삼일만에 다 잠겨버렸다고 합니다. 더더욱 노아의 때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집들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으로 산으로 오르고 어떤 이들은 방주로 달려옵니다. 
"쾅쾅쾅", "이봐요! 방주 문 좀 열어주세요!! 내 가진 재산을 다 줄테니 제발 문 한번만 열어주세요."
방주의 사방에서 사람들이 두드려댑니다. "제발 우리 아이만이라도 들여 보내주세요!"
사람들은 절규와 통곡으로 부르짖지만 이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끝나고 심판의 날이 그들에게 닥친 것입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굳게 하는 자는 갑자기 멸망을 당하여도 구할 길이 없으리라"(잠 29:1)는 잠언 말씀과 같이 그들은 120년 간의 책망에 목을 굳게 하고 갑작스런 멸망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천둥과 번개와 쏟아지는 폭우 가운데 방주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합니다. 물이 차 올라서 방주를 물 위로 들어올린 것입니다. 40일 밤낮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뒤에도 계속해서 방주는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이제 창세기 8장 13절을 보시면 "13 제육백일년 첫째달 곧 그 달 첫째 날에 물들이 땅에서 마르매 노아가 방주의 덮개를 치우고 본즉, 보라, 지면이 말랐더라. 14 둘째 달 곧 그달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너와 함께한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홍수가 시작된 날이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 번째 해 둘째 달 십 칠일이었으니, 노아는 약 1년 간을 방주 안에서 지냈습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헌물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이렇게 보존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홍수에서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여러 가지 언약을 주시는데 오늘 저는 그 중에서 창세기 9장 11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내가 모든 육체를 홍수의 물들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앞으로 다시는 온 땅을 덮을 홍수의 심판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서 가장 신실하시며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믿을 만한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노아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노아는 그 무시무시한 홍수의 심판을 온 몸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하나님 정말 심판하시는거 아니죠?" 하면서 믿음이 연약함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믿음 없음을 동정하시며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표를 주십니다. 12절에 "12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너희와 함께하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 사이에 대대로 영구히 맺는 언약의 증표가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노니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표가 되리라. 14 내가 구름을 가져다가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보이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또 모든 육체의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 사이에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들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고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약속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므로 말씀만 하시면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하여 무지개를 증표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정말요?"하면서 좋아하더니 이제 매일 밤 아빠에게 그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 정말 저 자전거 사주실거죠? 정말이죠?" 아빠는 이미 말을 했고 정말 사줄 마음이 있지만 아들은 믿음이 연약합니다. 아빠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미소를 지으면서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 아들은 더욱 좋아합니다. 이제 아들은 매일매일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약속을 확인합니다. 아빠는 어느 날 자전거 대리점에서 자전거 사진이 들어가 있는 광고지를 얻어다가 아들에게 보여줍니다. "아빠가 이거 사줄거야." 이제 아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너무나 기뻐합니다. 더 이상 아빠에게 "정말이죠?"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을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사진을 보면서 정말 자전거를 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제야 아빠가 정말 자전거를 사줄 것이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사주겠다고 말을 했으므로 더 이상 뭔가를 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아빠를 믿는 믿음이 연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주려고 새끼손가락을 걸어주기도 하고 직접 자전거의 사진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이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의 믿음이 없음을 도와주십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모두 언약으로 가득찬 책이며,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의 피를 언약의 피로써, 언약의 증표로써 제시하셨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녀들에게 또 한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또 믿고 있지만 믿지 않는 것같이 살아갈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함을 도와주시고자 주님이 오시는 때에 표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노아의 날
주님께서는 특별히 주님이 다시 오시는 표적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노아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나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시각에 너희 주가 올지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 44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

우리들은 어쩌면 노아의 날들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너무나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오긴 언제 온다고?"하면서 지내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직접 말로는 "주님이 오긴 언제 오셔?"라고 말하진 않지만 때로 우리의 깨어있지 못한 삶은 그러한 말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주님께서 오래 참으셨듯이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을 때에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일하는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오래 참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에 이르도록 이끌어줄 추수의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흐려지고 약해질 때에, 우리를 내치거나 무섭게 다루지 않으시고 너무나 은혜롭게 하나님의 여러 말씀들과 시대의 표적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노아가 만났던 하나님, 오래 참으시며, 나와 동행하고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약속하시고 믿음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우리들도, 노아의 날들과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친밀히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 설교 일시 : 2007.02.2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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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만난 하나님(창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요셉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입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날 "불평없이 사는게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 설교의 또 다른 제목을 잡아보자면, "불평없이 살아간 요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37장부터 펼쳐지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예표인 요셉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수님의 예표를 하나만 뽑으라면 무엇을 뽑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히 구약성경의 기록들이 예수님 자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구약성경들을 보기 전에 창세기만 살펴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주 많은 예수님의 예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여기에 나타난 빛이 예수님의 예표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고후 4:6).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고후 4:4).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값없이 주어진 생명나무, 아담과 이브를 대신해 피흘려 죽은 어린양, 그리고 사람의 의를 예표하는 무화과나뭇잎 대신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가죽옷 등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 특별히 사람들의 인생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 중 이 요셉이라는 인물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으며, 목자였고, 형제들에게 시기를 받고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형제들에게 보냄을 받았으나 형제들에게 거절당하여 팔렸습니다. 요셉을 팔아 넘긴 형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유다였고, 예수님을 판 제자의 이름도 유다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같이 옷 벗김을 당했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보디발의 집에서 모든 것을 맡은 종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거짓 고소를 당하신 것과 같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거짓 고소를 당했습니다. 요셉은 털 깎는 자들 앞의 어린양처럼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두 강도와 못박힌 것처럼, 요셉은 두 명의 죄인과 함께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옆의 강도들 중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듯이 요셉과 함께 갇힌 한 죄수는 용서를 받고 한 죄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왕이 되실 것처럼 요셉은 파라오의 부름을 입어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것같이, 파라오는 요셉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으로 예표되는 교회를 신부로 삼으신 것같이 요셉은 이방인 아내를 얻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땅에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곡식과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제 요셉이 두 번째 형제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는 받아들여졌고, 기근과 궁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예수님의 앞길을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펼쳐진 것을 볼 때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히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봄으로 요셉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 
요셉은 위로 10명의 배다른 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막내인 베냐민 만이 친형제 가운데 친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원래부터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이었기 때문에, 또한 라헬이 너무나 간절히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야곱이 노년에 얻은 손자와 같은 아주 귀여운 아들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베냐민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큰사랑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요셉의 어머니인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요셉에게 더 많은 사랑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특별히 채색 옷을 만들어서 입혀주었습니다. 당시 염색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옷감에 색을 하려하게 집어넣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 37장 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화목하게 말도 하지 못하였더라"(창 37:4). 
가뜩이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요셉이 너무나 건방진 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이라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먼 훗날 요셉이 어떻게 높아지리라는 것을 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5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이러한 꿈, 이러한 비전,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앞으로 요셉이 당할 고난과 역경을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요셉에게 이러한 통치자의 위치를 주시고자 반드시 필요한 고난과 시련을 먼저 주셔서 요셉이 그 위치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다루시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꿈을 주셨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있어 이르되, 이 세상 왕국들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었고 그분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로다, 하매"(계 11:15).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 5:10). 


노예로 팔려간 요셉
이러한 꿈과 비전, 소망과 목적이 요셉에게 주어진 이후로 요셉의 인생은 이러한 영광을 위한 훈련 코스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형들이 양을 잘 돌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기다리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런즉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 어떤 구덩이에 던지고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 하자.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리라."
그러자 장남이었던 르우벤이 그래도 우리의 형제이니 직접 죽이지는 말고 구덩이를 파서 던져놓고 굶겨 죽이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르우벤이 나중에 꺼내서 구해줄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르우벤의 계획을 모르는 유다가 요셉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숨긴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오라,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살붙이니라." 이렇게 되어 요셉은 팔리고 팔려서 이집트의 노예가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호위대장이었던 보디발에게 팔려갔고, 요셉을 발견하지 못한 르우벤과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 인하여 큰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직접 한번 요셉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요셉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억울함, 분노, 슬픔, 낙담, 자포자기, 불평과 같은 아주 복합적인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요셉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집에서 귀하게 사랑 받던 아들이 남의 집에, 고용되어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예로 팔려서 부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터뜨린다면 아주 정당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어릴 때 어머니를 데려가시더니 이젠 아버지와 가족들을 다 빼앗아 가시다니요! 하나님 도대체 제가 잘못한게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을 형들에게 말했더니 미움만 받고 이젠 낯선 땅에 팔려와서 이렇게 모욕을 당하며 고생하다니요! 차라리 죽는게 낫겠습니다!"하며 따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
그러나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요셉은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셉은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통제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영과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6절까지 읽는다.)
요셉은 종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3절에서는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말씀을 몰랐겠지만 요셉은 이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일한 것이 아니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과 동행하여 주셨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마다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어리고 가장 낮은 위치의 종에 불과했던 요셉은 어느덧 자기 주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 동안의 고통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 코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잠시의 휴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요셉을 한 단계 더 높이 이끌고자 하십니다. 


감옥에 갇힌 요셉
17세에 노예로 팔려와 현재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아버지 야곱보다는 아름다웠던 어머니 라헬을 더 닮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매우 잘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 청년 요셉에게 너무나 달콤한 죄의 유혹이 찾아옵니다. 다같이 7절을 보시겠습니다. (7절부터 9절까지 읽는다.)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고 결코 자신의 죄에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하는 말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죄로부터 철저하게 분리시켰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20절까지 읽는다.)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범죄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한번 요셉은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합당하고 적절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차라리 내가 범죄하였더라면 감옥에 갇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어찌 하나님을 따르고도 이렇게 비참해 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를 인도하고 계시긴 합니까? 하나님 저와 동행하고 계시는거 맞습니까?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악하게 대하십니까?" 요셉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도 죄수들을 맡아 관리하는 최고 관리자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두 죄수가 요셉과 함께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 명은 파라오의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요, 또 한 명은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잔 맡은 사람은 포도나무 가지 세 개가 있고 포도송이가 열리기에 거기서 포도들을 따고 포도를 짜서 파라오의 손에 잔을 드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빵 맡은 사람은 온갖 구운 음식을 담은 빵 바구니 세 개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새들이 와서 먹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꿈을 해석하여 주었는데, 요셉의 해석대로, 파라오의 잔을 맡은 사람은 삼일 뒤에 직책이 회복되었고, 빵을 굽는 자는 삼일 뒤에 그를 나무 위에 매달아 공중의 새들이 먹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잔 맡은 자에게 직책이 회복될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잔 맡은 자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 요셉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슬프게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정말 억울하게 나의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렸지요. 내가 얼마나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형들은 날 구덩이에 던지더니 옷을 다 벗기고는 지나가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어요. 원수도 아닌 형들에게 팔린 그 기분을 아시나요? 그 배신감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또 노예가 되고 나서는 정말 모든 일을 남이 보던 안 보던 성실하게 일했어요. 노예가 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내가 노예가 된 게 너무나 억울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요. 그래서 결국엔 최고 관리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 못된 여자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지 뭡니까...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셨나봐요." 요셉은 충분히 불평으로 가득한 사람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소망을 가지고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었습니다. 잘생기고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데 갑자기 야위고 흉한 일곱 마리 암소가 나타나서 살진 암소들을 다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꿈이었습니다. 파라오는 놀라서 잠이 깼다가 다시 잠이 듭니다. 한 나무 줄기가 있는데 통통하고 좋은 이삭 일곱 개가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늘고 동풍에 바싹 말라버린 다른 이삭 일곱 개가 솟아 나오더니 통통하고 꽉 찬 이삭을 다 삼켜버렸습니다. 파라오가 두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고 나서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와 점술가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누구도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 때 파라오의 잔을 맡은 자가 요셉을 기억하고 파라오에게 요셉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41장 2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25절부터 45절까지). 이집트 이름 사브낫바네아의 의미는 바로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 대단한 출세요 인생역전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꿈으로 약속하신 요셉의 본 위치였고, 그 전에 있었던 많은 고난과 역경은 다만 이 위치에서 올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 코스였을 뿐인 것입니다. 


가족들을 만난 요셉
이제 하나님께서 파라오와 요셉에게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와 주변의 온 땅에 7년 간 큰 풍년을 주셨고 또 그 이후 7년 간의 큰 기근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집트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땅의 다른 많은 민족들조차 곡식이 없으므로 곡식을 많이 저장해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오게됩니다. 저기 멀리 있었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 역시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오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과 형제들이 만나는 이야기는 자세히 한다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집에 가시면 꼭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이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임을 밝히고 아버지의 온 가족을 이집트로 불러들입니다. 다같이 창세기 45장을 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읽는다.)

하나님을 뜻을 완전히 이해한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 넘긴 형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지도 않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요셉은 불평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의 눈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았고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인도하시는 선하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사한 요셉
이제 우리가 처음 읽었던 본문인 50장 15절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제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들어온 지 17년이 지났을 때 야곱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인하여 요셉이 돌변할 것이라 걱정하고 있습니다. 15절부터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15절부터 21절까지). 

요셉은 어떻게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었고,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에게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를 괴롭게 만들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자포자기하며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요셉과 같이 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던 것처럼, 우리를 모두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만드셨고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역경은 우리를 낮추신 만큼, 아니 낮추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자 허락하시는 영광의 훈련 코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요셉과 같이 불평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이 늘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넘치는 감사 속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6.1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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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


(창 22:15-18) 『15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니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시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간증과 함께 전했던 말씀인데, 먼저 저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되었고 또 한국에 갈보리 형제 자매님들도 인상깊게 들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와서도 이 말씀을 나누고 싶었었는데 오늘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아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저는 한국의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었을 때 약 5년 가량,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말씀을 준비할 때는 가능하면 재미있게 해야하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준비하게 되고 또 성경을 읽을 때 더 깊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보려고 시도하곤 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자료들과 또 지혜를 주셔서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이 부분만을 다루지 않고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면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하던 것처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재밌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중에 하나였고 매우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사는 큰 가족 공동체 안에 있었고, 나름대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많은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라는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성품을 조금 엿보자면, 그는 매우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거나 다른 아내를 얻어서 자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평생 자기 아내인 사라 만을 사랑하고 아끼는 강직하고 자상하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봐, 저 양반 정말 좋은 사람인데 아들이 없는게 흠이야. 아들만 있으면 딱일텐데." 아브라함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캐나다에 보내놓고 아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저도 부모님만큼 그리워하진 못할지라도 부모님이 그립고, 또 가끔씩 갈보리교회에서 올려주는 찬양과 간증 mp3를 들으면 성도님들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면서 그리운 마음이 커지곤 합니다. 우리는 정들고 사랑했던 누군가와 멀어지면 이렇게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누구와 떨어지고 그리워하기 이전부터, 원래 가지고 있는 허전함, 외로움, 상실감, 상처, 버림받은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별하고 잃어버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지게 된 허전함과 외로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무엇이든 이뤄보려고 몰두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실된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또 대가족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살았지만, 그 마음에 허전함이란 것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나에게 아들만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텐데. 내 인생이 더 이상 허전하지 않을텐데."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허전함을 허락하십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이 백 명의 자식을 낳고 또 여러 해를 살아 그의 햇수의 날들이 많을지라도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또 그가 묻히지도 못하면 내가 말하건대 유산된 자가 그보다 나으니라"(전 6:3). 
아브라함이 겉으로 백 명의 아들을 가진다 해도 그의 내면에 있는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면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유산된 아기보다 못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이러한 갈증이 있습니다. "내가 아들만 가진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참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 자기 자신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고, 너의 자손에게 줄 땅이 있으니, 너의 씨에게 복을 줄 테니 너는 먼저 너가 정을 붙이고 사랑하며 관계하고 붙잡고 집착하던 모든 것, 너의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서 나오라."

지금 아브라함은 현재의 상태에서 아들만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만족할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들을 줄테니 우선 그 만족하던 모든 상황을 떠나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이 많은 아브라함은 쉽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친구들과 정을 떼는데는 성공을 했지만 가족들과는 정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가 죽기까지 머뭇머뭇하며 떠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죽은 형제인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나옵니다. 롯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으니 여차하면 조카인 롯을 자기 아들로 삼기 위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는 제 고향과 친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나와 정들었던 사람들을 떠나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심이었어요.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하던지... 그렇지만 저에게 아들만 있다면 행복해 질거라 생각해서 꾹 참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아들을 주세요!"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때 바로 아들을 주셨다면 창세기는 10장 이상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는커녕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물도 많고 곡식도 많았던 이집트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는 사람도 많고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사람도 많았는데, 이제 새로운 문명지 이집트에 들어가려니 막상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꾸미고 한평생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온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아무래도 파라오가 아름다운 사라를 보고 자기를 죽일 것이고 빼앗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졌고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살길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파라오에게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아들 하나 얻으려고 그 먼길을 떠나왔고, 이제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데, 한평생 지조 있게 지켜온 아내마저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신세입니까? 신이난 파라오는 사라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들과 종들을 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라리 아들 없이 그냥 고향에서 살 걸. 롯을 그냥 아들로 삼고 메소포타미아에 있을걸. 한평생을 정직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내가 무서운 거짓말로 아내를 팔아 넘기고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무엇이든 하실 수 있거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아들을 주신다던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길래 누가 너 롯을 데리고 나오래? 내가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라고 했지? 왜 롯을 데리고 나왔어? 롯도 친족이야, 아니야?"하면서 다그쳐 묻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가나안 땅에 있으라고 했지 언제 이집트에 내려가라고 했어! 기근이 든거는 시험이야, 시험, 그 정도도 통과할 믿음이 없느냐? 너가 다 망쳐놓았으니 이제 너가 알아서 살아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 그리고 아내를 팔아 넘기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넌 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죄 값을 치르고 멸망하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하여 파라오와 그의 집에게 큰 재앙으로 재앙을 내리시매"(창 12:17).
거짓말은 누가 했습니까? 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네,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상상해 오던 하나님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고 강력하고 무서운 분이어서 한가지 실수만 하더라도 책잡고 심판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되 조건 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를 신실하게 선하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전함과 버림받은 마음을 그러한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파라오는 아브라함 때문에 큰 재앙을 당했지만 아브라함을 감옥에 넣거나 해치지 않고 오히려 무사히 그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이상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다 망쳐놓은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여태까지 자기가 아들처럼 데리고 온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3장 9절을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이상한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떤 경우에도 롯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허전함과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아들과 같은 유일한 존재인데 어떻게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양을 더 줬으면 줬지, 손해를 봤으면 봤지, 어떻게 아들 같은 조카를 떠나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아브라함은 이제 롯이 없어도 그렇게 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롯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노니 내게서 갈라서라. 나는 너가 나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버리라고 강요하시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풀리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족한 만큼 우리의 허전함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끼고 다녔던 롯을 떠나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하나님,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 우리도 경험하기 원합니다. 

다같이 창세기 15장을 보시겠습니다.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커스에서 온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이 말씀은 아브람이 롯을 떠나보낸 뒤에, 롯이 거하던 소돔 땅에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롯을 구출해 온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전쟁은 가나안의 네 왕국과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이 벌인 것인데, 네 왕국 연합이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의 연합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훈련받은 종 318명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치고 롯을 구출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도와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들이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내가 너의 방패고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란다. 내가 너에게 정말 주려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나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아브라함의 관심은 변함 없이 온통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약속하시고 또 짐승을 쪼갠 가운데를 혼자서 가로질러 가심으로 피의 언약까지 맺어주셨습니다. 

75세 때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10년 간 아들을 기다렸어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답답해하던 아내 사라가 여종인 하갈을 아내로 주어서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99세 때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꿔주시고 할례의 언약을 주시면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너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 하는 "이삭"이라 지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번 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사라도 장막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으면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심정도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10년 동안 기다렸다가 기다려도 안되니까 이스마엘을 낳고 지금 또 이스마엘이 13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들 소리하십니까?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주세요." 이 말은 이미 이스마엘이 다 컸다는 소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을 하나 주십니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라오가 아비멜렉으로 바뀐 것 말고는 창세기 12장에 나왔던 내용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사라를 자기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속이고서 아비멜렉에게 넘겨줍니다. 사실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이고 쉬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75세 때 가나안 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나님께서 입학시험으로 주셨던 것인데, 이제 졸업할 때가 되어서 졸업시험으로 어려운거 안하시고 1학년 때 봤던 시험 그대로 내셨습니다. 그런데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75세 때 써냈던 답안지 그대로 적었습니다. 24년 동안 아브라함이 변했습니까? 믿음이 충만하고 굳세어지고 승리를 해야 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1학년 때 봤던 시험문제를 아직까지 못 푸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하면 총 12년이고, 대학교 4년 석사 박사를 6년 잡아서 다 더해도 22년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믿음에 관한한 이제 박사학위를 딸만한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봤던 아주 기초적인 시험을 또 틀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그래도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고향도 떠나왔고 롯도 내보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도 아들을 주실래야 주실 수가 없겠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엎드려서 웃기나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이스마엘이나 낳더니만 이제는 가장 초보적인 시험에서 또 넘어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포기하실거야. 이 멍청이, 구제불능, 난 정말 가망이 없는 사람이구나. 나이만 먹었지 믿음이 하나도 안 자랐어. 이제는 사라도 완전히 잃어버린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브라함이 아닌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다같이 창세기 2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 또 주께서 친히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수태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정한 때에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하나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 우리의 실패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오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올바르고 흠이 없는 사람만 사랑하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패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으실거야."하면서 오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러한 오해를 풀어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그(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을 믿을진대 그것을 의로 인정받을 우리도 위한 것이니라"(롬 4:22-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가 믿음이 좋았으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거야. 아 내가 얼마나 큰 결단으로 하나님을 따랐던지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을 주셨어야 마땅하지, 암."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는 이삭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이제 우리는 우리가 처음 읽었던 창세기 22장에 이르렀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정말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도 아시고, 그가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게 보일 정도로 이상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번제 헌물이란 것은 그를 칼로 찌르고 조각조각 잘라서 하나님 앞에 불태우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우상 신들도 그렇게 무서운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준비합니다. 아침 일찍 월드컵을 보려고 일어난 젊은이들처럼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물을 챙겨 모리아 땅으로 출발합니다. 얼마 전가지만 해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봤던 시험마저 틀렸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100점 만점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걸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희생을 하고 헌신을 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옆에 아브라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잠자리에 누운 아브라함은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시 밖에 나가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끌벅적하게 정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살았지만 너무나 허전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기근이 든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에 갔다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망칠 뻔한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나오게 해주신 이상한 하나님을 떠올려 봅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이스마엘을 낳고, 아비멜렉 앞에서 다시 한번 사라를 빼앗길 뻔한 모든 순간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자신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아브라함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서 허전한 줄만 알았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만족하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 헌물로 드릴지라도 여태까지 나에게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고자 다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귓가에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너무나 행복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큰 결단과 희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한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만족했고 믿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쁘게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1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을 걸고 맹세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얻고 완전히 만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실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분주하게 세상의 여러 가지를 찾고 주목하고 집착하고 붙잡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찬사를 받아도,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다 짊어져도, 또는 아브라함의 소원이었던 것처럼 백 명의 자식을 가질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의 힘을 다 허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참되게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오 목마른 모든 자들아, 너희는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또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내 말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일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너희 혼이 기름진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긍휼이니라"(사 55:1-3). 

우리는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번 만나지 말고 매순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완전히 만족될 때까지 그분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위치 안의 순종(창 16:1-10)/로빈


2002.08.07.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위치 안의 순종

본문 : 창세기 16장 1절-10절

1 그런데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 그녀에게 한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집트 사람이요,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더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주께서 나를 막으사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하녀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말미암아 아이들을 얻을까 하나이다,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하녀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한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이 지난 뒤였더라.

4 ¶ 그가 하갈에게 들어가니 그녀가 수태하니라.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므로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하는 부당한 일을 당신이 당하기 원하나이다. 내가 내 하녀를 주어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나를 멸시하니 나와 당신 사이에서 주께서 판단하시리이다, 하니라.

6 그러나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그녀를 학대하니 하갈이 그녀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니라.

7 ¶ 주의 천사가 광야의 물 샘 옆에서 곧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옆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8 이르되,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하매

9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하고

10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니라.

내일은 수련회 날입니다.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세 번이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속으로 준비한 본문과 주제로 설교하려다가 수련회 전날인 만큼 수련회를 준비하는 설교를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준비하는 것은 좀 무리인 듯싶어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제가 이미 한번 받았고 누렸던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위치 안의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 설교가 우리들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데 부축이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본문 설명 

본문에서 하갈은 이집트인 여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자신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였습니다. 파라오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집에 큰 역병들로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밝혀내십니다. 그때 파라오는 아브람에게 화를 내며 아브람을 내어 쫓습니다. 하갈은 아마 이때 아브람과 함께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하갈은 아마 사래를 파라오의 집에 데려올 때부터 사래를 시중들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갈이 이집트에 있는 많은 여종들 중에서도 파라오의 집에서 일하였던 것을 보면 굉장히 잘나가던 여종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어쨌든 하갈은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나오면서 사래의 종으로 같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자식을 갖고 싶어 했던지 아브람에게 가서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내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아내로 삼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예상했던 것처럼 하갈은 임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래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하갈이 그녀의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래는 화가 나서 아브람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라고 대답합니다. 사래는 그 말을 듣고 하갈에게 심하게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여종들에게는 시키지 않는 굳은 일을 시키고 힘든 일을 많이 심하게 시켰을 것입니다. 하갈은 견디다 못해 도망을 나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갈은 매우매우 억울합니다. 아니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여종으로 잘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래라는 여자가 나타나더니, 자신의 주인 파라오는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고 자신은 그녀의 여종이 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사래라는 여자가, 함께 온 아브람이라는 남자의 아내라는 것이 밝혀지더니 자신은 사래의 여종이 되어 이집트에서 함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사래의 여종으로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아주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이상한 여자의 여종이 되어야 하는가? 난 이집트에 남았어야 했어. 계속해서 같이 지내다보니 사래는 임신도 못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마음속으로 사래를 계속해서 멸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래가 하갈을 자신의 남편 아브람의 아내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임신하였고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자 드러내놓고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래는 아브람에게 불평하고 아브람은 사래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이제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멸시의 대한 진노를 하갈에게 퍼붓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하갈은 도망가면서 흐느껴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뒤엉킨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 또는 사래에 대한 억울한 마음 등이 뒤엉켜 비참하게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하갈을 부릅니다.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주님은 그녀를 부를 때 “오 불쌍한 하갈아”, “오 사랑하는 하갈아”, “복 받은 여인 하갈아”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부르실 때 “사래의 하녀 하갈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많고 많은 수식어 중에 “사래의 하녀”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갈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러자 하갈은 대답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성경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한마디로 대답하지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 앞에서 울부짖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주님 제 처지를 좀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임신도 못하는 제 여주인 사래가 자기를 대신해서 자식을 낳아달라고 하길래 그렇게 하였더니 이제는 저를 시기해서 저를 박대하지 뭡니까!? 그래서 저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이때 주의 천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오 상처받은 영혼 하갈아, 위로를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의 나쁜 여주인 사래에게 경고하리라.” 이렇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먼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하갈에게 주실 축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위로인 것입니다.


** 우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 순종 

성경은 순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교회를 방문하였던 조 윌리암 형제님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순종”이라고 말할 만큼 성경은 순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최종권위이며 우리는 이 권위아래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이시요 권위자들 중의 권위자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서부터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수많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롬 5:19)


하나님께서 순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조차 하나님은 순종, 불순종의 여부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살후 1: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지옥에서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많은 죄들을 지어서도 아니요, 많은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많은 선한 일들을 많이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기에 순종, 불순종의 문제로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시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아 보이고 영적으로 보이는 일도 순종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은 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각 제사를 드리는 방법들, 그에 따른 제물의 종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어떠해야 하는 지와 같은 것들을 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순종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큼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 15:22,23)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신구약에 걸쳐서 순종에 대해서 참으로 강조하며 또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위치 안에서 하는 순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주관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질서체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의 위치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 모두의 위치를 친히 안배하셨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위치와 자녀의 위치, 부부사이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위치, 교회 안에서는 감독과 성도들의 위치, 또 세상에서는 왕들과 권세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위치를 모두 안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능력별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가를 살피고 순종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인가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위치 안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저 형제님은 뭐가 어때”, “우리 부모님는 뭐가 어때”, “내 남편은 뭐가 어때”하며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그 권위자가 나에게 와서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우리는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위치는 그 사람보다 낮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그 사람보다 높아져서 그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과도 같습니다. 사래를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하갈에게는 사래에게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님 앞에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발견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위치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위에 있는 권위도, 또 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주님께서 안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는 잘 순종하겠는데,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렵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겠는데 보이는 형제들은 어렵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요일 4:20)

이것은 순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노라.” 하면서 자기 권위자에게 거역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권위자에게 거역하면서 어떻게 본적이 없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의 순종의 본 

우리는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가 완벽한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인가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나에게 권위자로 안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나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순종의 본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 절기가 끝나서 돌아올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르셨으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행자들 중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하룻길을 간 뒤 예수님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는데, 예수님은 박사들 가운데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다가가 어린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까? “아! 아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여인이여 당신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은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십니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내려가심으로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순종의 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과는 비교도 안되는 지혜와 명철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위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능력과 지혜로 치자면 그들은 예수님과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무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그 자리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순종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자가 지식이 있는가 능력이 있는가를 실수가 없는 사람인가를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우리를 그 위치로 안배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갈에게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 교만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한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하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로 답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도 그러했고, 우리의 경우도 자주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순종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요,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많은 경우,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권위자를 멸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꺾이지 않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위치는 낮지만 우리의 마음은 높아졌기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갈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녀의 여주인을 멸시하였습니다. 자신은 임신하였고 자신의 여주인은 임신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높아진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갈은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은 떼어놓을 수 없고, 교만과 거역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가 불순종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가 거역하지 않을리 만무한 것입니다. 

누가 구원받지 못합니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으나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겸손과 순종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겸손이 가면 순종이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의 문제로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약 4:6,7) 

겸손과 복종이라는 단어가 함께 이어져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젊은 사람들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너희가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오늘날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자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일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권위자를 나와 비교하고 판단하는 악한 습관을 버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온전히 낮아질 때 우리는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먼저이다

저는 오늘 순종에 대해 말하면서 한 가지 순서를 올바르게 하고 넘어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주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천사가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너의 권위자에게 복종하라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진리를 반대하는 권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나의 남편이 진리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권위자인 남편이,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떠나시오.”한다고 해서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신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다 같이 사도행전 5장 27-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 그들이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그들에게 물어

28 이르되, 너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보라, 너희가 너희 교리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또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도다, 하니라.

29 ¶ 이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유대인들 사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반 제사장들도 권위가 있는데, 대제사장이라면 더욱 높은 권세자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엄하게 명령한 것을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놓고 거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는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거리에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전파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누군가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가 누구일지라도 대항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절대 한발자국도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한발자국이라도 물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수많은 순교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베드로와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교황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떠한 권세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한 순교자가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성경에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는가? 너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거역하는가?” 왕은 그 순교자의 믿음을 포기시키려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나의 믿음을 부인할 수 없고, 왕께 순종하기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이요 그 다음은 다른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 결론

오늘 이러한 말씀이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순종이라는 부분을 각인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능력 많고 지식이 뛰어난 엘리트 같은 그리스도인보다 무식한 종같이 시키는 대로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의견과 권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권위의 말씀이 떨어질 때 입을 다물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절대적으로 순종하였기에 주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 앞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자들로 세우신 자들에게 복종하기 원합니다. 그들을 거역함은 우리를 그 위치 안에 두신 하나님을 거역함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높아진 마음들이 낮추어지기 원하고, 나의 권위자를 비교 판단하는 모든 악한 죄악들이 철저히 버려지기 원하고, 오직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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