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4.2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2세)

제목 :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
본문 : 로마서 8장 1-4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4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깊은 풍요로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제가 조금 맛본 것을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이 7장의 흐름을 이어받아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한 가지 법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 21절 앞부분을 잠시 보시면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실질적인 지체들을 죄의 법에게로 사로 잡아가는 아주 강력한 법칙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낙망과 정죄 속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5절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오늘의 본문 8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가장 무서운 정죄 -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오늘의 본문 1절 말씀에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정죄”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어서 하나님의 맹렬한 정죄와 심판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더럽고 가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으며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정죄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소자인 마귀의 고소와 우리 자신의 정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정죄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의롭고 영적인 율법의 말씀을 이루고 살아내고자 분투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더욱 죄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행하고자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없었습니다.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내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내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나? 도저히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나는 더욱 죄를 짓는구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가 완전히 거두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보다 더욱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를 거절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야 마는, 죄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는 우리가 행한 행위들로 인한 것을 넘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야 마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정죄입니다. 


**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어쩌면 매우 자주 이러한 정죄 가운데 빠져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직접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 안에 머무른다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맹렬한 정죄와 탄식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면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말씀은 바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에 주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아멘!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
3절과 4절은 우리를 어떻게 자유하게 하셨는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사역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정죄 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7장 12,14절에 나온 것처럼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 안에서 율법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즉시 죄와 사망을 만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루고자 시도할수록 계속해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성취하는 일은 육신이 연약하므로 할 수가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육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 법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결단하고 노력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 육신을 용도 폐기하심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아,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곧 내게 큰 권능을 주셔서 하게 하셨구나.”라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육신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셨습니다. 육신을 수리하고 부축하고 개발시켜서 능히 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육신의 모양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은 온 인류의 육신을 대표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정죄 받으실 때 그분은 나의 육신을 포함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용도 폐기될 때 나의 육신도 함께 용도 폐기되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 3:16)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육체를 용도 폐기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모든 육체를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정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정죄 받았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죄하는 우리 자신은 이미 주님과 함께 정죄 받고 죽었으며 폐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육체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육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3절에서 주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하였다면, 4절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은 “하셨느니라.”고 끝마치지만, 4절의 말씀은 “하려 하심이니라.”고 끝마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실이며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4절에서는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육신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고자 두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육신을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신 것이며, 하나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친히 그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거침이 되는 육체를 처리한 것이며, 이제는 권능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약하고 무능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절망과 정죄의 골짜기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나타나서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비라면, 성령님의 동행하심은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은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원하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음으로는 원하여도 실제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결론 - 성령님을 따라 걷는 우리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미세한 성령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주의하며 순종하여 걷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어떤 말이 붙어 있습니까?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다만 오순절 날 성령님이 임하신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다만 성령님을 받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여 걷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또 다른 이름은 성령행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온전히 걸어갔을 때 일어난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과 같은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데마는 성령님을 모시고도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사도바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님을 따라 걷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기를 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걷는 믿음의 실재를 가지기 원합니다. 다시 한 번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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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8.10.15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한 가지 아는 것(롬 8:28-30)


본문 : 로마서 8장 28-30절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한 가지 아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가 알거니와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말씀은 로마서가 반지라면, 로마서 8장은 반지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누군가 말한 것처럼 너무나 귀한 진리가 담겨 있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저의 짧은 입으로 너무나 깊고 풍요로운 진리의 말씀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만큼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아는 것에 근거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믿거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오늘날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지 모르고, 죄인을 영원한 지옥의 불길 가운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모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셔서 큰 구원을 이루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분명하게 깨달아 알 수만 있다면 누구나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이 크다면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크다면 역시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이나 감정을 통해서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들에게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 6:39)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한 만큼 주님에 대한 많은 증언들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멸망케 하지만,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랑과 열정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식을 따르지 않은 열정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열심을 다해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지식과 사랑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8장 28절에서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면서 지식과 사랑을 동시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4장 1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교만하고 또 이기적이어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이용하면서 살아왔고 날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 짓기를 숨쉬듯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 돈과 쾌락과 안락한 삶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그분을 대적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십자가에 처형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러운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찾아와 주셨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크게든 작게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목적에 따라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목적에 따라 부르셨습니다. 저도 전에 삼겹살 집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저를 많이 불렀습니다. "여기요" 그 때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목적은 오직 한가지 주문하고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아무 이유 없이 부르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믿음의 목표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큰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새 생명의 시작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출발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부끄럽고 자신 없는 고백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두려운 심판을 우리 대신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9절과 3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정하사
29절과 30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우리들을 미리 아시는 가운데 우리가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엡 1:4,5).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칼빈주의 예정론"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굳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거나, 어차피 택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예정하심을 말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자유의지와 순종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5살짜리 아이가 부모님의 마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형상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가운데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셔서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랑하며 교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사람의 대표가 되어 죽게 하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감당하시고 완전히 깨끗케 하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이 주어지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과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1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한 것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도 사람을 통해 임하였나니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되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4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지막 아담입니다. 이것은 첫 사람을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와 사망을 사람의 대표로서 완전히 종결시키시고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47절에 나온 것처럼 "둘째 사람"이 되십니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주님이 "둘째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아담에게 속한 죄인의 형상과 사망을 끝내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둘째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제 4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9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 
우리가 로마서에서 읽은 말씀과 같이 여기서도 우리가 하늘에 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내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지만,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읽은 이 말씀에서도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하고 미래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지니게 되는 그 날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우리에게는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육신 가운데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는 그 날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대로 표현해 보자면,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린다기 보다는, 오히려 썩어질 아담의 형상이 썩지 아니할 주님의 형상에 의해 삼켜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23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
25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너무나 놀라운 것은 로마서나 고린도전서나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휴거의 소망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썩음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세상과 육신과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구원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바로 더럽고 추한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멸망 받고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 예수님의 많은 형제들로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 자들을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으로 나온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선포하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의롭다고 선언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고, 예수님의 형제들로 삼으신 것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을 상속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다같이 이사야 42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나는 주니 그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며 내 찬양을 새긴 형상들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또한 48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그것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게 자신을 높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였을 때 바빌론을 통한 심판을 말씀하셨고,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였을 때 7년 동안 짐승과 같이 살아가게 하셨으며, 헤롯이 사람들에게서 신처럼 추앙을 받을 때 즉시 그를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영광을 구할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영광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 더러운 우리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고, 의롭다 하신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다같이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31절은 "그런즉"이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죄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영광까지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38절과 39절도 보시겠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은 여기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고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벅차고 감동스러운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되고 죄인되었던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로마서를 받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피의 네로라고 불리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 도시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유대교에 의해 핍박을 받았고, 또 로마 제국에 의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35절부터 37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아니라.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들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썩어질 형상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완전하게 입을 휴거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영광을 상속받을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 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경과 어려움은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저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속도 좁고, 한 저 자신을 보면서 늘 낙망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말할 것처럼 저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었고,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비천하고 눈멀고 헐벗은 자였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문제 많고 구제불능인지 몰랐는데, 하나님은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셨을까 하면서 주저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9절의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미리 아신 자들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저를 부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실망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미리 아시고 저를 부르셨기 때문에 변함 없이 저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날마다 감격하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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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8.09.17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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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헌신(롬 12:1-2)


본문 : 로마서 12장 1-2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2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온전한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 형제들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비록 "자매들아"라는 말은 없지만 자매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주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 죽어서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더럽고 천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나아가서 형제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다같이 히브리서 2장 10절부터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0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데려가시는 일에서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밝히 보이고 교회의 한가운데서 노래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시며

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부족함이 없으신 완전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더러운 우리들을 거룩히 구별하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때에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함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더럽고 미천한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누구든지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셔서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서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은 "그러므로 형제들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히 구별되고 용서받은,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얻은 모든 사람을 향해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정당성이나 권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힘입어 간청"하고 계십니다. 이 긍휼에 대해서는 "그러므로"라는 말과 함께 로마서 12장의 앞부분에 있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원래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성경 기록상으로는 로마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순절 날 로마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고, 명절이 끝난 뒤에 그들이 돌아가서 로마 교회를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처음에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처음에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시작으로, 또한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1장 13절에서도 바울이 직접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방인들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들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존귀히 여기나니"

아무튼 초기의 로마 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방인 성도들이 더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AD 49년에 로마의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 로마 추방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18장 2절에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칙령으로 인하여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던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로마에서 추방을 당하고 떠나와서 고린도의 본도라는 곳에서 사도 바울과 만나게 됩니다. 이제 로마 교회는 유대인들이 모두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이방인 중심의 교회로 자리를 잡았고, AD 54 년에 네로 황제가 집권하면서 이 추방령은 해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로마 교회의 상황은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상황에서, 원래 중심을 이루었던 유대인들이 돌아오면서 갈등과 마찰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님을 설명하고자 로마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로마서 11장은, 9장, 10장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원래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연방 국가 밖에 있던 외인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서 분리된 낯선 자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복음에 불순종하고 그들의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방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장 3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2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신 것은 친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잠시 제쳐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또 다시 이방인들로 인해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긍휼에 대하여 기록하다가 성령의 감동을 견딜 수가 없어서 찬양을 터뜨렸습니다. 
33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35 누가 그분께 먼저 드려서 다시 보답을 받겠느냐?
36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께로 돌아가나니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었던 우리들에게까지 그 놀라운 긍휼과 사랑이 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교만함과 더러움과 어리석음 가운데 방황하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생명과 놀라운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생명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긍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너희 몸을
로마서 12장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손과 발과 눈과 귀와 입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 아니라 실제로 나의 몸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6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다 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그것과 저것을 다 멸하시리라. 이제 몸은 음행을 위해 있지 아니하고 주를 위해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해 계시느니라."

우리의 몸은 음행을 위해 있지 아니하고, 음식을 위해 있지도 않으며 오직 주를 위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인상적인 표현은 주님께서도 우리의 몸을 위해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만을 위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몸을 위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취하여 창녀의 지체로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씀하지 않고,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제 19절과 2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9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20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를 값으로 치르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인 우리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희생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담배나 술이나 마약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왜 문신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진 이 몸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되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모습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거룩히 구별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물 만을 받으십니다. 다함께 말라기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말라기 1장 6절부터 8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6 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만군의 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자기 주인을 공경하나니 그런즉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빵을 내 제단 위에 드리고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나니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상은 업신여겨도 된다, 하는 점에서 그리하였느니라. 
8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가 눈 먼 것을 희생물로 드리면 그것이 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다리 저는 것과 병든 것을 드리면 그것이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네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또한 10절 뒷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에서 헌물도 받지 아니하리라."

말라기에 나오는 타락한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거룩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지도 않은 더러운 빵과 희생물을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영적 제사장입니다. 특별한 직분을 가진 사람만이 제사장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믿는 자들이 다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곧 제사장이며, 또한 우리 자신이 곧 희생물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우리를 위한 화해헌물로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바로 다음 구절인 로마서 12장 2절에 나온 것처럼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 세상에 동화되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안되고 뭐든지 적당히 해야 좋다는 우리의 생각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세상도 조금 하나님도 조금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이곳에 모인 우리 형제 자매님들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의 힘입어 생각의 변화를 받아 오직 우리 자신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기 원합니다.


살아 있는 희생물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축복과는 멀리 떨어져있던 사람들이었으나 말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으로 인하여 긍휼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놀라운 긍휼을 힘입어 우리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우리는 실제로 희생물을 드려본 적은 없지만, 구약성경을 통해 희생물이 어떠한 모습인지 알 수 있습니다. 희생물이라는 것은 희생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듯이 반드시 죽음을 수반합니다.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물은 생명과 피를 다 바치고 불 가운데서 태워져야 합니다. 다같이 레위기 3장에 나타난 화평 헌물의 희생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만일 그의 봉헌물이 화평 헌물의 희생물이며 그가 그것을 소 떼에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주 앞에 드릴지니
2 그가 자기 헌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중의 성막 문에서 그것을 잡을 것이요, 아론의 아들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의 주위에 뿌릴 것이며
3 그는 또 그 화평 헌물의 희생물 중에서 주께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드릴지니 곧 그는 내장을 덮은 기름과 내장 위의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 위의 꺼풀을 콩팥들과 함께 취할 것이요,
5 아론의 아들들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우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태우는 희생물 위에서 태울지니 그것은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희생물로 드려진 소의 피는 제단의 주위에 뿌려집니다. 그리고 속에 있는 모든 내장들을 다 가져다가 제단 위에 있는 희생물 위에서 불태우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다 태울 것이 분명한데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내장을 일일이 다 언급하시면서 따로 분리하여 희생물 위에 올려놓고 태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희생물로 드려질 때에 우리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꺼내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속에 있는 야망과 욕심과 권리와 의견을 다 불태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두 콩팥과 간 위의 꺼풀과 모든 기름을 다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태워야 합니다.

우리는 침례성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침례를 받을 때 한번 나의 옛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묻혀서 끝나버렸음을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물속에서 나온 것은 더 이상 우리의 옛 생명이 아닌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새 생명임을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린다는 것은 다시 한번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 나의 계획, 나의 목적, 나의 길이 다 사라지고 불타 없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필수적이고, 정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콩팥과 간과 내장은 다 주님 앞에서 꺼내어지고 불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콩팥 위의 기름과 간 위의 꺼풀과 같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속에 끼어들어오는 탐욕과 높아지려는 야망과 명예심을 다 불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희생물이란 이와 같습니다. 살아 있으나 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합당한 섬김인 것입니다. 우리는 제단 위에서 우리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불태우고 죽음에 넘겨지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정리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형제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초청입니다. 
우리의 본래 위치는 이방인들이며, 또 죄로 가득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본래 운명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절규하며 통곡하며 고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긍휼을 입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아오면서 많은 경우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이요 비천한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자신의 긍휼을 힘입어 우리에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나 결심만을 원하지 않으시고 실제적인 우리 몸의 드려짐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므로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예비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물은 속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꺼내놓고 불태워집니다. 우리는 우리 몸 안에 숨겨진 모든 의도와 동기들을 다 꺼내놓고 주님 앞에 불태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제단 위에서 불타는 희생물로서 온전히 죽은 자가 될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저 자신을 이렇게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세상과 동화되거나 타협하지 아니하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 원합니다. 저의 결심과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오직 제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긍휼만을 의지하여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온전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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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4.04.2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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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해방하신 하나님(롬 8:1-4)


제목 :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
본문 :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4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심이라"(롬 8:1-4).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읽는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말씀은 너무나도 깊은 풍요로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제가 조금 맛본 것을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이 7장의 흐름을 이어받아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한가지 법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 21절 앞부분을 잠시 보시면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실질적인 지체들을 죄의 법에게로 사로 잡아가는 아주 강력한 법칙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낙망과 정죄 속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5절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오늘의 본문 8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론
가장 무서운 정죄 -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오늘의 본문 1절 말씀에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정죄”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어서 하나님의 맹렬한 정죄와 심판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더럽고 가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으며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정죄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소자인 마귀의 고소와 우리 자신의 정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정죄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의롭고 영적인 율법의 말씀을 이루고 살아내고자 분투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더욱 죄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행하고자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없었습니다.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내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내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나? 도저히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나는 더욱 죄를 짓는구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가 완전히 거두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보다 더욱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를 거절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야 마는, 죄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는 우리가 행한 행위들로 인한 것을 넘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야 마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정죄입니다.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어쩌면 매우 자주 이러한 정죄 가운데 빠져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직접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 안에 머무른다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맹렬한 정죄와 탄식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면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말씀은 바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에 주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아멘!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
3절과 4절은 우리를 어떻게 자유케 하셨는지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사역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정죄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7장 12,14절에 나온 것처럼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일점 일획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 안에서 율법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즉시 죄와 사망을 만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루고자 시도할수록 계속해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성취하는 일은 육신이 연약하므로 할 수가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육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 법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결단하고 노력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용도 폐기하심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아,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곧 내게 큰 권능을 주셔서 하게 하셨구나.”라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육신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셨습니다. 육신을 수리하고 부축하고 개발시켜서 능히 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육신의 모양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은 온 인류의 육신을 대표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정죄받으실 때 그분은 나의 육신을 포함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용도 폐기될 때 나의 육신도 함께 용도 폐기되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지사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육체를 용도 폐기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모든 육체를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정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정죄받았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죄하는 우리 자신은 이미 주님과 함께 정죄받고 죽었으며 폐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육체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육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3절에서 주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하였다면, 4절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은 “하셨느니라.”고 끝마치지만, 4절의 말씀은 “하려 하심이니라.”고 끝마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실이며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4절에서는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육신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고자 두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육신을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신 것이며, 하나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친히 그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거침이 되는 육체를 처리한 것이며, 이제는 권능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약하고 무능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절망과 정죄의 골짜기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나타나서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비라면, 성령님의 동행하심은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은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 속에서부터 원하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음으로는 원하여도 실제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결론
성령님을 따라 걷는 우리
이제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미세한 성령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주의하며 순종하여 걷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어떤 말이 붙어 있습니까?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다만 오순절날 성령님이 임하신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다만 성령님을 받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여 걷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또 다른 이름은 성령행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온전히 걸어갔을 때 일어난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과 같은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데마는 성령님을 모시고도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사도바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님을 따라 걷는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기를 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걷는 믿음의 실재를 가지기 원합니다. 다시 한번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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