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11.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고전 8:1-3)

본문 : 고린도전서 8장 1-3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전서 8장 전체와 로마서의 한 부분, 에베소서의 한 부분을 함께 펴볼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바로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잘못된 사랑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듣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 처음 가게되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는 노래를 부르며 환영해 줍니다. 또 세상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노래들이 "사랑"을 주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다니엘이 말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이며(단 12:4), 많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이러한 지식도 가지고 있고 저러한 지식도 있으므로 나는 부유하며 풍부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하고 우쭐대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서로 배반하며 미워하고 불법이 만연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딤후 4:1-5, 마 24:10-12). 이 시대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이며 쾌락적입니다.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다 있겠지만, 전체적인 세상의 흐름은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이 사랑이 점점 메마르고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 사랑은 없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랑"이 실제로는 없으면서도 "사랑"이라는 외침만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며 지옥과 심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죄와 지옥에 대하여 경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멸망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며, 그 길로 더 이상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은 축복의 길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한 편에서 이와같이 이렇게 거짓되고 잘못된 사랑에 반발하여 일어난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또한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랑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높은 기준과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치우치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사랑을 거부하는 동시에 실제로 영혼들을 향한 사랑과 형제사랑마저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란 말만 울려 퍼지고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까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에 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며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도 일반 다른 음식과 다를 것이 없다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우쭐대게 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올바른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높아지며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만에 반대하는 단어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나 스스로를 세워주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지식은 나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에게 유익을 줍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지만 사랑은 우쭐대지 않습니다.

2절에 보시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지식이 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아는 줄로 생각하게 되지만,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때 그는 잘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내 옆의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지식으로 충분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바로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게 됩니다. 그가 지식만 가졌을 때는 몰랐던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분께서 그 사람을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아, 내가 교만하구나. 나는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하여 우쭐대고 있었구나."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식만을 가지고 우쭐대며 스스로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게 됩니다.

**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지식

이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그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들도 많고 주들도 많으나)

6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가지고 있던 지식은 그 음식들이 다른 일반 음식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우상들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나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가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대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쭐해집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우상들은 실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 음식은 보통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몇몇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좋은 형제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이런 죄는 지어도 되나보다"하면서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습니다.

11절에 보시면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약한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리고 타협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약한 형제를 사랑하므로 진리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내가 올바른 지식을 따라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될 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의 기준은 다만 올바른 지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배려하게 되며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당시에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이미 신전에서 한번 제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심지어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신전에서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묻지 말고 먹으라고까지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고전 10:25).

사도 바울은 내가 고기를 먹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옳고 합당할지라도, 지식이 없는 연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아예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지식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랑을 따라 살아갔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 로마서에서도 언급된 말씀

이와 똑같은 말씀이 로마서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약하여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느니라.

고린도전서 8장에서의 문제가 로마에서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어떤 성도들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다 할지라도 감사하며 먹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또 믿음이 약한 어떤 성도들은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들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신전에서 나온 것인데 어떻게 먹느냐며 채소만 먹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보며 올바른 지식이 없으므로 무식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보면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자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생각 때문에 먹지 못하던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자기들의 양심을 거슬러서 강한 형제들을 무조건 따라서 먹으므로 그들이 약한 양심이 더럽혀지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로마 교회에서는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내가 알고 또 주 예수님을 통해 확신하거니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으되 어떤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하니라."

이것을 다시 말하면 어떤 음식도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도 그 자체로는 먹는 사람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더럽히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그러나 만일 네 음식물로 인해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제 네가 사랑으로 걷지 아니하나니 네 음식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지식으로 인하여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의 형제가 근심하는 것을 보거든 우리는 우리가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지식 안에서 걷기보다 사랑으로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2 우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여 그의 유익을 구하고 그를 세워 주어야 할지니라.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지식은 나를 강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를 강하게 하며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교회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식만을 추구하면 나 홀로 서게 되지만, 사랑을 겸하게 추구하게 되면 교회와 함께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대신 짐을 져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연약함을 못 마땅히 여길 것이 아니라 담당할 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 어떻게 사랑할까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마도 유럽인지 미국인지에 드넓은 초원이 있고, 거기에는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그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여행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 뛸 듯이 기쁘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난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우리 옆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고 사신 귀한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옆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방식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격에 고칠 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실 때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모르는 지식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하신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으려고 하셨다면 우리는 질려서 도망쳐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옆의 형제 자매들에게서 잘못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모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성격들을 발견합니다. 때론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발견하고 바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 가르치고 바로잡으려고 시도하지 말고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잘못된 지식들과 문제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잡기 전에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인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알려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히 엎드리며 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시기 전에 내가 무엇인가 안다고 나의 올바른 지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신앙배경이 어떠한가를 이해해야 하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지식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똑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제시할 때 들으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정말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진리 한 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젊은 부자 청년에게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하시면서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적은 허공에다 진리를 따발총처럼 외쳐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귀한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올바른 지식 위에 믿음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인 우리들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 에베소서에 언급된 말씀

다 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4절과 15절부터 보시면 사도 바울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14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15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무엇을 빌고 있는지 잘 주목하여 보십시오.

16-19절 말씀입니다.

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알려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많은 심오한 지식과 교리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우쭐댈 만큼 많은 지식은 있으나 참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도 사람들 앞에서 지식으로 걷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계속해서 20절과 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안에서 권능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능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식에는 권능이 없지만 사랑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일할 때는 밖에서 내가 일하지만 사랑으로 일할 때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일하십니다. 먼저 사랑이 있는 가운데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권능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형제를 망치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은 많고 사랑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고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결핍되면 그 지식은 형제를 망치게 되고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마땅히 알 바를 모르게 만드는 어두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부하지 아니하며 자긍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지식은 있다 해도 사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분의 제자가 되고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많은 문제들을 다 아시고도 천천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를 우리가 따라오고 소화할 수 있는 만큼 알려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그러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우쭐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을 때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1,2,3,4,5번 순서대로 마구 제시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과연 어떠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시는지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지식은 함부로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주의깊이 듣게 만듭니다. 지식은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며 배려하게 합니다. 사랑이 풍성한 지식은 진리의 권능이 되어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만, 사랑이 없는 지식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하면서 우쭐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성도들은 옳게 행하였으나 형제를 망쳐버렸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성도들은 형제를 업신여기며 논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식과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행동을 변화시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지식은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하지만, 사랑은 먼저 나 자신을 바로잡게 만듭니다.

진리의 지식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지만 나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전달되는 지식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세워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선포되는 진리의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우쭐대지 말고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애통하며 주님께 사랑을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한 것처럼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 것인지를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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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모르면 누릴 수 없는 선물들(고전 12:1,12-17)

본문 : 고린도전서 12장 1절, 12-27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2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다음으로 12-27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2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요 여러 지체이니라.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16 만일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냐?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곧 그것들 각각을 몸 안에 두셨느니라.

19 만일 그것들이 다 한 지체라면 몸은 어디 있느냐?

20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많은 지체이나 그럼에도 오직 한 몸이라.

21 눈이 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며 또 머리가 발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더욱 더 필요하고

23 또한 우리가 덜 귀한 것으로 여기는 몸의 그 지체들 곧 이것들에게 우리가 귀한 것을 더 풍성히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은 아름다운 것을 더 풍성히 얻나니

24 우리의 아름다운 부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몸을 다 같이 고르게 하사 부족한 그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셨으니

25 이것은 몸 안에 분쟁이 없게 하고 오직 지체들이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26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존귀를 얻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기뻐하느니라.

27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

오늘 저는 "모르면 누릴 수 없는 선물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우리교회는 현재 "교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올 준비를 하면서 여러 홈페이지를 돌아다녀 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나가서 외국 친구들을 사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유학생이 중국, 일본, 캐나다, 멕시코 등등 여러 나라의 룸메이트들과 함께 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다같이 모여서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서로 자기 나라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친구들이 갑자기 가만히 듣고 있던 이 유학생에게 "한국에 대해서도 자랑해 보라"고 물었습니다. 이 유학생은 88올림픽, 2002월드컵 외에는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자기 자신을 보며 부끄러워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군가가 자기 나라, 자기 민족, 또는 자기 학교, 자기 집안과 같이 자기 자신이 속해있는 단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그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를 모르고, 우리가 어떤 교회의 모습을 이루려하는지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크고 중요한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이 "교회"라는 주제 또한 너무나 크고 방대해서 한 두 번의 설교로는 다 설명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대표해서 "교회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 교회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하나님, 교회는 언제부터 계획하신 건가요? 이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 또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좀 그러니까 그냥 모아 놓으신거죠?"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를 보여주시며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계획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의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여 이 세상에 비춰주는 교회의 모습을 저 우주의 태양 빛을 반사하여 지구 위에 비추는 달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교회에 대한 놀라운 말씀들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림을, 저 오래 전에 아담이 이브를 얻기 위해 죽음의 잠을 통과했던 것으로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지어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은 이브의 죄를 씻거나, 이브를 구원하기 위해서 잠든 것이 아니라 오직 이브를 얻기 위해서 죽음의 잠을 통과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면으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우리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짊어지시려고 죽으셨지만, 그 뿐만 아니라 아담이 이브를 얻기 위해 죽음의 잠을 통과한 것처럼,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은 빨리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당신을 구원하신 주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 너무 재밌는게 많아서 빨리 가기는 아쉽지요?"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을 보여주며 "내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자살을 하여서라도 주님께 가는 것이 훨씬 좋지만, 나는 지금 교회를 위해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원래 주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당신을 부르셨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야 되니까 교회를 세워서 사람들을 모은 것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여주며 "아닙니다. 나는 나 스스로 천막을 만들어 생활을 유지하며, 그렇게 번 돈을 교회를 위해 다 소비할지라도 나는 교회를 세워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아주 많은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목자를 따르는 양떼와 같고,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는 군대와 같으며, 신랑을 기다리는 순결한 신부 같고, 태양 빛을 받아 비추는 달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과 같고, 진리를 지탱하고 떠받치는 기둥과 같고, 약하고 병든 자들이 치유 받는 병원과 같으며,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일깨움을 받고 배우는 학교와 같고, 부모 없는 고아같이 방황하며 헤매는 자들을 돌보는 아버지 집과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터뷰에 대답하신 것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만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또 사도 바울이 인터뷰에 대답한 것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만큼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목적이라고 말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음식과 바꾸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 있는 교회를 알지 못한다면 당장 눈앞에 직면한 나의 정당성과 나의 만족을 얻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다 희생해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하셨지만 각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알고 믿음으로 영접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영적 선물들을 주셨지만 우리는 그 영적 선물들에 과하여 듣고 알고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영적 선물들"이란 바로 "은사들"을 말합니다. 4절부터 11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이제 선물은 여러 가지나 같은 성령이시고

5 직무는 다르나 같은 주시며

6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이 계시되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10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11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는 아주 여러 가지의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선물들, 기적들, 대언함, 영들 분별함,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 타언들 통역함 등등 많은 종류의 선물들, 은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러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 "영적 선물들에 관해 모르면 안된다고 했어"하면서 이 은사들의 항목에 대해서 집중하여 공부하려고 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선물들... 이렇게 세어보니 항목들이 모두 9개구나. 로마서 12장에는 또 다른 항목들이 나왔는데 겹치는게 뭐뭐 있고 다른 것이 뭐뭐 있나 한번 찾아보자. 일단 여기에 나온 지혜의 말씀을 풀이해 보자면 영적으로 말씀을 잘 적용하여 지혜와 훈계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은사가 아닐까, 지식의 말씀이란 진리의 지식을 교리적으로 말씀을 잘 나누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믿음이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본적으로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그런 은사가 아닐까, 병 고치는 은사들은 초기 사도들 시대에는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진 은사이고... 등등등" 하면서 이 은사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암기하고 나면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공부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선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향해서 "영적 은사들"에 관하여 알아야 한다고 말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4절부터 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4 이제 선물은 여러 가지나 같은 성령이시고

5 직무는 다르나 같은 주시며

6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이 계시되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먼저 우리가 영적 선물들에 관해서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영적 선물들의 종류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다양한 선물을 주신 성령님, 주님,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7절에 나온 것처럼 이렇게 각 사람에게 다양한 선물들을 주신 이유는 바로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11절을 보면 성령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선물들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이렇게 다양한 선물들을 가진 우리 한 명 한 명의 각 지체들이 모여서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각 개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2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 우리가 각각 떨어졌을 때는 한 지체이지만 다 같이 모였을 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서신을 직접 받아서 읽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아주 뛰어난 지체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한 명 한 명 살펴볼 때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성경 지식이 아주 뛰어났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아주 열정적이었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몹시 사모하였고, 여러 가지 필요한 일들을 능력 있게 처리하며 주님을 섬길 만한 은사와 재능을 가진 지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경쟁하며 자기를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들이 주님이 주신 영적 선물들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제 우리가 읽은 12장에 이르러서는 영적 선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한 몸에 속한 지체들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지체는 눈의 역할을 하여 잘 볼 수 있고, 어떤 지체는 손의 기능을 하여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자매님은 귀의 역할을 하여 다른 이들의 고민을 잘 들어 줄 수도 있고, 또 어떤 형제님은 입의 역할을 하여 필요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기능들을 선물로 주신 목적이 바로 전체 몸 안에 속해 있는 지체들 모두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가령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잘 설명하는 형제님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제님에게 그러한 은사, 그러한 재능을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제님에게 그러한 기능을 주신 목적은 스스로를 높이고 우쭐하며 잘 설명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섬기고 돕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 찬송을 아주 아름답게 부르는 자매님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매님에게 그러한 목소리와 재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다른 지체들 가운데는 음치도 있고 목소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매님에게 그러한 기능을 주신 목적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선물로 받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뽐내고 자랑하며 노래 못하는 지체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러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할 때 다른 지체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유익을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형제님은 꼼꼼하고 세심하여서 다른 지체들이 실수로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담대하여서 모두가 걱정하고 주저할 때 앞장서서 전진해 나가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다른 지체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동안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하는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표현과 나타남이 어떤 형태일 지라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러한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발의 기능을 주셨다면 나는 그 기능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교회에서 열심히 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눈의 기능을 받은 지체를 정죄하면서 "너는 맨날 눈만 꿈뻑꿈뻑 거리고 쳐다보기만 하면서 직접 걷는 법을 전혀 못 배웠구나!"라고 호통을 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의 기능을 하는 지체는 "자기는 맨날 엉뚱한 방향으로 쓸데없이 걸어다니면서, 제대로 볼 줄이나 아느냐!?"하고 반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한 지체에 불과하며, 우리는 이미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나를 높이고 다른 지체들을 업신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 다른 지체의 장점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몸 안의 모든 지체가 눈일 필요가 없고, 모든 지체가 손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기능들을 선물로 주신 것은 그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며 주님을 섬기도록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없는 다른 기능들을 다른 지체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그 지체로 하여금 나를 돕고 섬기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면에서 나는 섬김을 받고 그 선물들로 인하여 감사하며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기능은 몸을 위한 것이고, 다른 지체에게 있는 기능이 또한 교회를 위한 것이므로 우리 모두는 각자 지체로서 받은 선물들을 가지고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갑자기 그 동안 하던 일을 다 청산하고 하루 종일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 밀림 속에 들어가서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일이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지만 꼭 그렇게 크고 놀라운 일들 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속하게 하신 지역교회 안에서 한 명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입의 기능을 주셨다면 나는 입의 기능을 받은 그대로 역할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으면서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고 섬길 수 있도록 선물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공급받고 채움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지체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전에 저는 공익근무를 하면서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때 사무실에서 작은 커피자판기를 새것으로 바꾸면서 그 전에 쓰던 커피자판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커피자판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달라고 해서 공짜로 얻어온 적이 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시청까지 오셔서 자판기를 받아 가셨고 깨끗이 씻고 작동이 잘 되는지 테스트를 해서 예배당에 잘 배치해 두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그런 일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토요일 날 모임을 가졌는데, 들어오는 성도님들마다 커피자판기를 보면서 어디서 났느냐고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또 다른 형제님이 서 계십니다. 그 형제님은 엔지니어이신데, 무엇을 설명하고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일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 형제님은 아예 커피자판기 옆에 서서 들어오는 성도님들이 궁금해 할 때마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전혀 짜증을 내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아주 즐겁게 모든 지체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 이거요, 승선형제가 시청에서 얻어온 거에요. 사무실에서 커피자판기를 새걸로 바꾸는데 이걸 어디에 처리할지 고민하는 걸 얻어왔다고 하더라구요. 커피 한번 드셔보세요. 여기 옆에 설탕이랑 프림 따로 있는데 더 넣어드세요."

 

주님을 섬기는 일은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상하실 섬김이란 뭔가 특별하고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속한 교회 안에서, 내가 오늘 속한 몸 안에서, 하나의 지체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해내며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며 보상하실 섬김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이며, 내가 지체라면 나는 이미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선물은 한 면에서 내가 하나의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기능이고, 또 한 면에서는 다른 지체들이 가진 다양한 기능들이 또한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각자가 받은 선물을 조금씩 가지고 다 모였을 때 우리는 한 몸으로서 모든 기능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눈 혼자서는 보는 것만 할 수 있지만, 눈이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눈은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가 몸을 건강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데 한가지씩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들을 보며 서로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감사하고 누리며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정말 기뻐하시는 교회로 발견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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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1.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로빈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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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8절 말씀입니다다 같이 일어나셔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보상을 받으리라입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개요

오늘 저는 우리 학생 여러분들을 격려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선생님은 자라나면서 별로 칭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초등학교 때에는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에서 은상을 타기도 했고중학교 때에도 선생님의 그림이 전체 학생 작품전에 뽑히기도 하였습니다중학교 때에는 45명이 한 반이었는데늘 3등정도 하였었고전교18등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나름대로 칭찬을 들을 만한 일들이었던 것 같은데집에서 별로 잘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옆에 비교가 되는 형이나 동생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선생님의 부모님은 칭찬을 매우 아끼는 스타일이셨습니다그래서선생님이 무엇을 잘 해오면교만하지 말고 앞으로는 더 잘해라라는 말을 듣고마음이 상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저도 여러분에게 칭찬을 많이 해 주고 싶고나름대로 노력을 하기는 하는데그렇게 잘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속이 상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오늘은 이러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칭찬하면서,용기를 주고힘을 주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여러분선생님의 말을 통하여서가 아니라다른 누구다른 사람의 말을 통하여서가 아니라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심는 자와 물 주는 자

우리 함께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 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일을 농사의 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우리 교장 선생님께서 아주 농사의 전문가이신데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먼저 땅을 갈아서 준비하고씨앗을 준비해서 잘 심고거름을 주고물도 대주고잡초도 뽑아주고농약도 쳐주고... 추수의 열매를 얻기까지 정말 많은 인내와 수고가 필요합니다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여기서심는 일이 더 훌륭하다고또는 물 주는 일이 더 훌륭하다고 다투는 일을 벌였는데사도바울은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라고다 똑같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축구로 예를 들어보자면공격수나 수비수나 골키퍼나 모두 다 중요하고모두 다 한 팀이라는 것입니다공격수와 수비수가 한 팀을 이루어서 승리한다면공격수도 기쁘고수비수도 기쁜 것처럼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섬기고 수고한 바울과 아볼로가 모두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로서 한 팀이며하나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여러분 오늘 공부하는 일이숙제하는 일이 매우 수고스럽고 힘들 것입니다어릴 적에는 이런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었는데어느새 힘들게 수고하고 있는 여러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전에는 그냥 맛있는 음식을 먹고하고 싶은 재미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갔었는데이제는 어느새 숙제를 끝마치기 위해졸린 눈을 억지로 뜨기도 하고자다가도 일찍 일어나야 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잠시, 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성경은 심는 자나 물 주는 자가 아무것도 아니고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진리는우리가 오늘 수고하고 부지런히 일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사람이 심는 다고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사람이 물을 준다고 해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고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곡식을 심고 물을 주는 농부처럼수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성경은 심는 자나 물 주는 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다시 말하면하나님께서는 심는 자나 물 주는 자가 필요 없으시다는 것입니다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왜 수고하는 것입니까다시 8절을 보십시오. 8절의 마지막 문장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오늘 우리가 수고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바로 영원한 보상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오늘 여러분이 공부하고 숙제하고 단어를 외우면서 수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가르치는 선생님이나,공부를 하는 여러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오늘 여러분이 열심히 수고하고 공부한 것에 대해서선생님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며여러분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며부모님이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오직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보상을 해주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설교하는 일에만 보상을 해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찬양을 부르는 일이나교회와 관련된 일을 할 때영적인 모양의 일들을 할 때하나님께서 보상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에게서는 선생님의 일에 대한 보상을학생에게는 학생의 일에 대한 보상을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른 자기의 보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공부하고 숙제하는 일에서 수고한 것에 따라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청소를 하는 일에서 수고한 것에 따라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집에서 부모님께 순종하고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서 수고한 것에 따라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3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나리라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이 말씀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을 가지고자신의 인생을 가지고자신이 구원받은 이후에 행했던 모든 수고와 일들을 가지고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그 날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것이다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날 것이다그 불은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다.” 여러분 여기서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라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똑같이 예배당에 앉아 시간을 보내었는데그 일이 과연 마음을 다해 주님을 경배하는 종류의 일이었는지아니면 억지로 앉아 있다가 옆 사람과 장난을 치며 보내었던 일이었는지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청소를 하는데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마음으로성실하게 수고한 종류의 일이었는지대충대충 하는 시늉을 하며 시간을 보낸 일이었는지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똑같이 숙제를 하였는데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이 하였는지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억지로,최소한의 것을 하였는지하나님의 불이 시험하시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함께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성경은 우리의 수고와 일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한 종류의 일은 금은 보석이고한 종류는 나무,건초짚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보석은 불에 타지 않으므로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나무건초지푸라기는 금새 타버릴 것입니다.

 

14-15절을 보시겠습니다.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

하나님의 불이 우리의 일들을 시험하게 될 때에보석으로 이루어져불을 통과하고도우리의 수고와 일들을 남아 있으면우리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의 일들을 불타버리면 우리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이루어진 영원히 안전한구원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지만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수치스럽고 부끄럽게 받게 될 것입니다.

 

 

보상을 받기 위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영원한 보상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수고와 일들을 가득 차 있습니다우리는 이러한 많은 일들 가운데 어떻게 수고하여야 영원한 보상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우리 함께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

 

여러분 성경에함께 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치시기 바랍니다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하나님과 함께 공부하는 학생이 되십시오하나님과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 되시고하나님과 함께 숙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하나님과 함께 청소하는 사람이 되시고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 되십시오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모든 수고와 섬김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골로새서 3장 23-24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3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에게서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나무나 건초나 지푸라기 같은 불타버리는 종류의 일들로 만들지 마십시오오늘 여러분의 일들을 금과 은과 보석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우리에게는 하기 싫지만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 늘 다가옵니다여러분그러할 때그 일을 매 맞으면서 억지로 하지 마시고기쁨으로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 나가시기 바랍니다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는 영원한 영광과 보상의 기회가 놓여져 있습니다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위해 무엇인가 대단하고 특별한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보상은 우리가 할 수 없는대단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에서부터 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영원한 영광과 보상은 우리가 이미 매일 해나가고 있는수고하고 있는 일들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여러분 안에 계신강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러한 일들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말 그대로하나님과 함께 하느냐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여러분청소하기 전에숙제하기 전에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먼저 하나님께 함께해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제가 이 하기 싫은 일들을이 어려운 일들을하나님과 함께하며 모두 무사히 끝마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모든 일을 마친 뒤에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다음에는 더 기쁜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또 기도하십시오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그리고 영원한 영광을 차지하십시오.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우리 모두가 영원한 보상을 바라보며오늘도 힘을 내어 전진하기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2.10.03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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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하시는 하나님(고전 2:9)

이승선

 

안녕하세요추석 기간 잘 보내셨습니까?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고린도전서 2장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함과 같으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말은하나님께서 아무것도 계획적으로 하실 필요가 없고즉흥적으로 원하시는 것을무엇이든지 언제든지 즉시 실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우리들도 쉽고 가벼운 일들은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중요한 일일수록 신중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업가가 사업을 하기 전에 반드시 준비하고 기획하는 과정이 필요하고또 학생이 공부를 하기 전에 반드시 수업진도표를 보고 학습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처럼우리는 모든 일에서 준비가 필요합니다우리는 심지어 앞으로 일어날지,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만약의 일들을 대비해서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저축을 하기도 하고보험을 들기도 하고여러 가지 대비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즉시 완벽하게 실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아무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신 분즉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하나님께서 예상치 못한 만약의 일들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만약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즉시 완벽하게 시행하실 수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체로 모든 일에 준비된 분이십니다.

 

그런데성경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는 성경구절들을 몇 구절 읽어드리겠습니다함께 찾지 마시고 그냥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시편 33편 1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분의 마음의 생각들은 모든 세대에 이르리로다.

또 이사야 14장 2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께서 계획하셨은즉 누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펼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28장 29절은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만군의 로부터 나오나니 그분은 계획하는 것에서 놀라우시며 행하는 일에서 뛰어나시도다.

한 구절만 더 읽어드리겠습니다에베소서 1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또한 그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

 

성경은 수많은 구절들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아무런 계획 없이즉시완전하게 시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어떤 일도 무계획적으로 시행하시지 않습니다.

 

 

예비하시는 이유와 목적 사람과 동행

우리는 성경에서 수많은 예언의 말씀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러한 말씀들은 마지막 때에 어떠한 일들이 생겨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기록해 주신 것이며또한 자신이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미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크고 거대한 세상 왕국들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획하시는 분이십니다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작은 일들까지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가운데 진행하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동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과 뜻을 먼저 사람에게 알려주십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준비하기를 원하시고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동행하기를 원하셔서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예비하신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모두 자로 시작하는 사람들인데요바로 요셉과 요나입니다우리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예비하시는지그리고 얼마나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먼저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50장 20-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이 말씀은 요셉이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들에게 한 마지막 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말씀에서 요셉의 삶 가운데 일어난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바로 요셉의 어머니였던 라헬이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숨을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요셉은 그로인해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지만그 때문에 10명의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앞으로 그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하셨습니다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성경 말씀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화평을 통해 알려주시지만그 당시에 요셉은 창세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고성경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꿈으로 계시해 보여주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정확히 다 알지는 못했지만최소한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과모든 형들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정말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 속으로 그를 집어 넣으셨습니다이제 요셉은 형들에 의해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이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상처와 아픔과 분노를 가져온 일이었겠지만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전히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창세기 39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 있더라.

그의 주인이 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보고 또 께서 그가 행한 모든 일을 그의 손에서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의 주인이 되었던파라오의 호위대장 보디발은 먼저 요셉이 노예로 팔려온 신분답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노예 신분답지 않은 생활태도라든지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이라든지더 나아가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고마음으로부터 주인을 위하는 모습과 또 알 수 없는 신비적인 어떤 힘이 요셉의 모든 일들을 형통하게 풀어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요셉은 주인의 온 집을 관리하는 자가 되었고요셉의 주인은 자신이 매일 식사하는 것 외에는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도 확인하지 않을 만큼 요셉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요셉은 다시 한 번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바로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요셉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죄를 대적하였는데그 결과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이것은 정말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었겠지만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여전히 버리지 않으셨고 그와 동행하고 계셨습니다우리 함께 창세기 39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21 그러나 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고 그에게 긍휼을 보이사 감옥의 간수의 눈앞에서 은총을 베푸시매

22 감옥의 간수가 감옥에 있던 죄수들을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들이 거기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가 다 그 일을 행하였더라.

23 감옥의 간수는 그의 손에 무엇을 맡겼든지 그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께서 그가 행한 일을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최소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붙잡고 계시고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그는 감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섬겼고파라오의 빵 굽는 우두머리와 잔 맡은 우두머리의 꿈도 해석해 주었습니다요셉이 겪은 모든 일들과요셉이 만났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연히 불필요하게 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마침내 요셉은 하루아침에 파라오의 왕좌에 앉아 온 이집트 땅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통치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가뭄으로 인해 곡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에 찾아와 자신 앞에 엎드린 형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거기에서 요셉에게는 어떠한 분노나 복수님의 감정이 없었습니다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그 목적은 요셉과 동행하시고요셉을 높여주시고요셉을 통해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음을 요셉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일들을 예비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비록 현재 우리에게 괴롭고 어려운 일들이 있다할지라도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나자신을 모함하였던 보디발의 아내나자신을 잊어버렸던 잔 맡은 자 누구에게도 복수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요셉은 사람이나 주변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오직 자신을 위해 선한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예비하시고우리가 그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요나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먼저 요나서 1장 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께서 큰 바람을 바다로 보내시매 바다에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서 그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으므로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반대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습니다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바다의 큰 폭풍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난 사람들은 두려워하다가 폭풍의 원인이 바로 요나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그 때요나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였습니다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느니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나서 11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더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께 자백하고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니느웨 백성들은 요나가 선포한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고 왕에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회개하며 돌이킨 것을 보게 됩니다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심판을 돌이키시고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셨습니다요나는 그것이 못마땅해서 하나님께 따지게 됩니다이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자신의 마음과 뜻을 알게 해 주시려고 여러 가지 것들을 예비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요나서 4장 5-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요나가 그 도시에서 나가 그 도시의 동쪽 편에 앉고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만들고는 그 도시가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그 밑의 그늘 아래 앉았더라.

주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그것이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 넝쿨이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려 하심이었더라이에 요나가 그 박 넝쿨을 심히 기뻐하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를 때에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쳐서 시들게 하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또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매 그가 기진하여 스스로 죽기를 바라며 이르되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하니라.

 

요나는 빨리 니느웨를 멸망시키시라고 떼를 쓰면서 초막을 짓고 도시를 바라보고 앉았습니다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세 가지를 예비해 주셨습니다첫 번째는 박 넝쿨이고두 번째는 벌레 한 마리이고세 번째는 뜨거운 동풍입니다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심거나 수고하지도 않은 박 넝쿨의 그늘을 귀하게 여기고아깝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로 하여금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시고 또 인도하시는 니느웨 사람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또 아끼시는지를그 심정을 요나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심지어 벌레 한 마리까지도 예비하시는데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정과 생각을 알고 동감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요셉의 삶 속에 일어난 큰 사건들도요나의 삶 속에 일어난 작은 박 넝쿨과 벌레와 동풍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입니다바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동행하시려고 예비해 주신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

우리 함께 처음 읽었던 고린도전서 2장 9절의 말씀으로 돌아와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좋은 것을 예비해 주십니다그것이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라 할지라도때로는 까다롭고 이상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놀라운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을 통한 놀라운 구원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영원 전부터 계획하고 계셨습니다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냄새나고 더러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이 놀라운 역사를 미리 계획하시고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더라둘째 날이더라하는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성경에서 왜 저녁이 먼저 기록되었을까요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이 먼저이고그 다음이 아침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저녁에 해가 붉게 노을이 되어지는 모습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여주기 원하셨고아침에 찬란하게 빛나며 떠오르는 모습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시 오심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신부인 교회에 대해서도 미리 계획하시고 예비하셨습니다에베소서 말씀에서는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며 목적 가운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태양 빛을 받아 지구의 밤하늘을 비추는 달을 창조하시면서주님의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에 비추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입니다우리는 삶 속에서 요셉의 형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보디발의 아내와 같이 모함을 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가 있고감옥에서 만났던 잔 맡은 우두머리처럼 나의 호의를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사람들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요나에게 있었던 박 넝쿨과 같은 시원한 그늘 같은 일들도 만날 수 있고한 마리의 벌레나 뜨거운 동풍과 같은 작지만 힘든 일들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장 좋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당장 괴롭고 힘들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이 각각의 퍼즐 조각들처럼 흩어져있을지라도 그 모든 일들이 조합되고 합력되어 큰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반드시 올 것입니다그때 우리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씨앗이 땅에 묻혀 썩어진 뒤에생명이 자라나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를 맺도록 창조하시면서,바로 우리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여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영광을 예비하고 계십니다그것은 사람이 눈으로 보거나귀로 듣거나마음으로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영광입니다사람의 한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에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리

오늘 우리는 기도회로 모였습니다우리의 삶 속에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고무거운 짐들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오늘 우리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기 원하고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기 전에 준비하고 계신 분이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다 말하기도 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예비하시는 가운데 정확하게 자신의 때에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좋으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며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우리가 오늘 우리를 위해 모든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2.06.17.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설교 /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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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간청(고전 1:10)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고린도전서 1장 10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잠시 말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님의 간청입니다.

 

 

고린도 도시와 교회

오늘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간청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린도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간청의 말씀을 주셨습니다이 말씀은 단지 과거의 고린도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오늘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먼저 고린도 도시와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과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그리고 어떤 심정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였을까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어로 장식을 의미하는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로마제국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동쪽에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었고서쪽에는 레카이온 항구가 있어서동양과 서양남방과 북방이 교차하는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고린도는 도자기 공업융단 제조업철강업 등이 발달하였고직접 화폐를 제조할 정도로 상업과 무역이 매우 번창한 부자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도시였으므로다양한 지역에서 다녀가는 외지인들이 많았고그로 인해 쾌락과 유흥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아가씨라는 말이 창녀라는 의미로 통용될 정도로 고린도는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뿐만 아니라 고린도에는 전쟁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고여신을 대표하는 수 백 명의 여사제들이 있어서 영적으로나육체적으로나물질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심히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방문하여 복음을 전할 즈음에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나사렛 칙령을 내려고린도에는 로마에서부터 쫓겨난 유대인들이 더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과정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다함께 사도행전 18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절부터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 일들 후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라 하는 어떤 유대인을 만났는데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에게 명령하여 로마를 떠나게 하였으므로그가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왔더라바울이 그들에게로 가서

생업이 같으므로 그들과 머물며 일하니라그들은 그들의 직업으로 보면 천막을 만드는 사람들이더라.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니라.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이제 고린도로 건너와 천막을 만들어 생활비를 마련하면서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직업으로 보면 천막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지만실제 직업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우리가 사도행전 18장 말씀을 차근차근 읽어본다면 고린도 교회의 탄생 과정을 생생히 볼 수 있겠지만시간 관계상 몇 가지 중요한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8절에서는 회당의 우두머리 치리자인 그리스보라는 사람이 온 집과 함께 주님을 믿고또 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에게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라고 기록된 로마서 5장 20절 말씀처럼돈과 쾌락의 도시 고린도에는 주님께 돌아올 많은 영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이제 사도행전 18장 11절에서는 바울이 무려 1년 6개월이나 고린도에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떠난 뒤에는 뛰어난 성경 교사인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8장 24절에서 28절에서는뛰어난 성경 교사였던 아볼로가 바울과 함께 다녔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히 알게 되고아가야로 건너가아가야의 수도였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민족과 인종으로 구성된 국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또한 다양한 성경 교사와 사역자들이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고 실로 많은 이들의 섬김이 쏟아 부어진 축복받은 교회였습니다.

 

이제 다시 고린도전서 1장으로 돌아와서 바울이 말하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4절에서 7절까지 보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너희가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증언이 너희 안에서 굳게 세워진 바와 같도다.

이로써 너희가 어떤 선물에서도 뒤쳐지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

 

바울은 쾌락과 죄악의 도시 고린도의 형제자매들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이 되고 감사가 되었습니다회당의 치리자였던 형제로부터 시작하여죄의 쾌락 속에 방황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기뻐하던 여러 지체들한 때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 여사제로 일하면서 신 내림을 받고 방언을 하며 우상을 섬겼던 자매들못 배우고 연약하여 멸시를 당하던 낮은 계층의 지체들심지어 노예로 팔려왔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던 형제자매들에 이르기까지바울은 이러한 성도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 놀랍고 감사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언이 굳게 세워지고 모든 말과 지식에서 풍성하게 되었으며주님을 섬기는 다양한 재능과 은사들이 풍성하여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 뒤처지지 않았고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재림을 소망하였다는 사실입니다얼마나 아름다고 감사한 교회의 모습인지 모릅니다우리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직접 방문하게 되었다면 얼마나 큰 은혜가 있었을까요?

 

 

본문 설명

우리가 처음 읽었던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바울은 이렇게 귀하고 감사한 고린도 교회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간청하는 것이 있었습니다주님의 이름으로 명령을 하거나권고를 하거나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요청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그것은 바로 고린도 성도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함께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가 분쟁하지 않고 완전히 함께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우리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말과 영적인 지식을 배우게 됩니다또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일들을 섬기게 됩니다또 재림에 대한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사모하게 됩니다뿐만 아니라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즐거움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늘 간청하시는 한 가지는 바로 우리가 교회의 지체들과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말과 지식과 은사와 믿음이 충만한 한 명의 사람보다어리석고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로 이루어졌을지도 완전히 함께 결합된 교회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11절부터 13절까지 보시겠습니다.

11 내 형제들아글로에의 집안사람들 편으로 너희에 관한 일 곧 너희 가운데 다툼이 있음을 내가 밝히 알게 되었노라.

12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너희가 각각 이르기를나는 바울에게나는 아볼로에게나는 게바에게나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하는도다.

13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느냐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혹은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느냐?

 

고린도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교회였지만속에서는 서로 다투고 분쟁하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들이 분쟁하는 주제는 누구에게 속하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처음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고우리 교회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에 바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 이후에 아볼로가 와서 성경 말씀을 더 정확하고 또 탁월하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아볼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따랐던 제자이며사도들의 대표자인 게바베드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정죄하면서자신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겉으로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말이 정답이기는 했지만그들 역시 교만과 육신 가운데 다투는 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들도 함께 책망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나이도 다르고출신도 다르며타고난 성격도 다르고과거의 살아온 환경이나 현재 살아가는 모습도 완전히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에게 공통점이라고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교회 안의 다양한 지체들이 완전히 함께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육신은 판단과 정죄자랑과 교만시기와 질투분열과 편 가르기를 끊임없이 일으키기 때문에우리에게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우리가 각자 집에서 혼자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른다면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완전히 함께 결합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십자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완전히 함께 결합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청하면서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니라.

우리의 능력은 육신의 지혜나 힘에 있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있습니다교회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따라야 할 것은 사람의 지혜나 힘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이며우리를 위해또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23절과 24절도 보시겠습니다.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24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선교여행의 헌신과 놀라운 계시에 대해서아볼로의 힘 있고 유창한 설교와 가르침에 대해서베드로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생생한 체험담과 사도로서의 기적과 능력에 대해서무엇이 더 대단한가누가 더 영적인가하나님께서 누구를 더 크게 쓰시는가우리는 과연 그들 중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말과 지혜는 아무것도 아니며우리에게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권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31절까지 보시겠습니다.

26 형제들아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

31 이것은 기록된 바자랑하는 자는 를 자랑할지니라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기억나게 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어떤 처지에서 어떻게 용서를 받고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구원을 받았는지를 기억하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은혜와 긍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나같이 더럽고 죄 많은 자를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떠올릴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지만정작 고린도 성도들은 그렇지 못하였던 것입니다.자신이 어떤 처지에서 부르심을 받았고 긍휼을 얻었는지를 잃어버린 채누가 더 크고 대단한 자인지를 가지고 서루 다투며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주님만 자랑하기를 원하십니다사람의 뛰어남육신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신 주님만을 자랑하기 원하십니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 되어주시고내가 어리석을 때 지혜가 되어주시고내가 어둠 가운데 헤맬 때 빛과 길이 되어주시고내가 굶주릴 때 생명의 빵이 되어주시고내가 목마를 때 생수의 강이 되어주시고내가 두려울 때 요새와 방패가 되어주시고내가 요동할 때 반석이 되어주시고내가 피곤할 때 안식처가 되어주시고내가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주시고내가 고민할 때 아버지가 되어주시고나의 모든 상황에 나의 모든 것이 되어주신 주님만을 자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1-5절을 보시겠습니다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의 진솔한 간증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언을 너희에게 밝히 말할 때에 말이나 지혜의 뛰어난 것을 가지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나니

나는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느니라.

내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면서 너희와 함께 있었으며

또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이 사람들의 지혜 안에 서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 안에 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당당한 로마제국 시민으로서 상류층 집안 출신이었고어릴 적에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주지 않는예루살렘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존경하던 가말리엘 박사 밑에서 완전한 바리새인의 방식으로 성장하였습니다바울은 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천막을 만드는 실질적인 생존 기술까지 익히고 있었습니다바울은 안수하는 자마다 병을 고치게 만드는 사도이자 성경기록자로서의 권능도 부여받았고정치적으로나지식적으로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배경과 스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오늘날로 말하자면 엄마 친구 아들엄친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것 가운데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사람들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신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만 서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유혹스러운 점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바울이 전파하는 말 속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든지다른 사람에 대해서든지사람에 대하여육신에 대하여 자랑하거나 과시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씀 선포가 사람의 지혜나 유혹의 말들로 되지 않도록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자신을 온전히 가려주시고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하나님뿐

이번에는 고린도전서 3장 4-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즉 바울은 누구며 아볼로는 누구냐그들은 단지 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대로 너희를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또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를 보내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고 섬기는 고마운 분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가 사람을 따르는 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라모든 것이 너희 것이니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현재 것들이나 장래 것들이나 다 너희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주님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나아볼로나게바만 가지기를 원하지 않으셨고그들 모두를 가지도록 선물로 주셨습니다사람마다 뛰어난 점이 있고또 부족한 점이 있지만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람을 보고 사람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읽었던 고린도전서 1장 10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완전히 함께 결합하기 위해서 우리는 육신의 자랑사람의 말과 지혜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주 하나님께서 약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을 부르셔서 구원하시고 한 교회의 양떼로 모으신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완전히 하나로 함께 결합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우리에게 자랑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힘과 모든 것이 되어주신 주님을 바라보면서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며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합니다혹시 우리들 사이에서 몇 주간 동안 인사 외에는 별로 나눠본 대화가 없는 서먹서먹한 지체들이 있지 않으십니까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말 저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았는데요어떤 주는 제가 다른 교회에 온 것처럼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놀라기도 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교제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지체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늘어나기를 원하고주님께서 간청하신 대로 모두가 완전히 함께 결합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우리가 인사만 하고 지내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소식만 듣고 지내는 겉으로의 교회 생활이 아니라주님의 말씀처럼 깊고 친밀하며 끈끈한,완전히 결합된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2.03.27.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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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입니다.

그런즉 이제 믿음소망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소망사랑 중 가장 큰 것

성경에서 유명한 몇 개의 장들이 있습니다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불리면서믿음으로 아벨은에녹은노아는 아브라함은이삭은야곱은요셉은모세는 등등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지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또한 소망장” 또는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은 성도들의 부활과 소망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유명한 장입니다특별히 우리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13장 13절은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 믿음소망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이 말씀에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요믿음이나 소망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까요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믿음이나 소망은 어찌 보면 한시적인 것이고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반드시 필요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한 사실이나 대상에 대하여서는 믿음이란 것이 필요하지만눈을 직접 보게 될 때 믿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하늘의 소망을 가지면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만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오늘날도 필요하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될 때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그러한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은 사랑이 가장 큰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1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사람들의 언어들과 천사들의 언어들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내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은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무리 뛰어나고 아름답고 옳은 말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징과 꽹과리 같은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모든 지식을 가지고 산을 옳기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심지어 모든 재산을 바쳐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우리의 더듬거리는 말과부족한 지식과작은 섬김의 일들이 너무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지만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사랑이 없이 남들보다 말을 잘하는 사람남들보다 많이 아는 사람남들보다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고 있습니까아니면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고 있습니까?

 

 

사랑이란2

이번에는 4-7절까지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성경에 기록된 사랑에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친절함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사랑은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시기하지 아니하며 함께 기뻐합니다또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않습니다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고 예의바르게 행동합니다사랑은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고 인내합니다사랑은 악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며불법을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잘못을 할 때 겉모습으로 드러난 문제를 볼 뿐만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문제좀 더 본질적인 문제인 사랑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우리가 누군가에게 오래 참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 자체도 문제가 되며 잘못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좀 더 중심적인 문제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내가 조금 더 오래 참아주고조금 더 친절한 행동을 해주고예의바르게 행동을 하는 것만이 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진정한 해결책은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내가 부모님과 선생님과 선후배를 사랑하게 되면자연히 오래 참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단순히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겉모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라도 사랑이 없는 마음 자체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내가 가만히 있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미워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행동으로만 옮기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성경은 원수가 배고프거든 먹을 것을 주고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성경은 단순히 어떠한 겉모습과 행동에 대해서 명령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성경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원수까지도 사랑하며행동으로도 반드시 나타낼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우리가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성경의 기준을 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욕하지 않았고나는 때리지 않았고나는 괴롭히지 않았고나는 아무 말도 안했고나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정당하고 의롭다고 주장할지라도나에게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원수 말고 사랑하기 더 쉽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 질문을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을 사랑합니까우리는 우리의 부모님께 친절하며 예의바르게 행하고 있습니까단순히 홈플러스나 이마트 직원이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겉모습의 친절이나 예의 말고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말하고 행동하고 있습니까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없다면 반드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주님 앞에 악한 마음을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에 대해서 사랑하고 있습니까함께 찾지는 않지만 잠언 17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구는 언제나 사랑하며 형제는 어려운 때를 위하여 태어났느니라.”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 옆에 있는 선후배,친구들동료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조금 잘해주고 조금 봐주고 많이 참아주는 것 말고사랑하고 있습니까말을 함부로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사랑하지 않는 마음 자체가 죄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사랑을 우리의 마음속에 가질 수 있을까요아마도 우리는 많은 순간 사랑해야지,용서해야지라고 결심하고 노력할 것입니다그러나 사랑의 마음은 우리가 결심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만약 사랑의 마음이 우리가 결심하고 노력하는 만큼 생겨날 수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미 사랑의 천사들이 되어있을 것입니다사람은 자신의 결심과 노력으로 사랑처럼 보여지는 어떤 말과 행동의 모습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하면바로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자기가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자기가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우리들의 인간적인 사랑은 결코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된 사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우리의 사랑은 계산적이며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우리의 사랑은 조건은 걸고 한계치를 정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무한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더럽고 죄 많은 우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의 모든 수치와 모욕과 부끄러움을 기꺼이 감당하신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문제를 주님이 책임지시는 것이었고우리의 잘못을 주님이 대신 갚으시는 것이었습니다우리가 억울하다고 말하는 모든 일들을 주님은 어린양처럼 묵묵히 사랑으로 감당하셨습니다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가득하게 될 때 우리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요한복음 15장을 보시겠습니다요한복음 15장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명령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여러분,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을 때사랑을 해야 하고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을 때예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떠올려 보시고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주님은 내가 주님을 대적하고 죄를 짓고 있는 오늘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신 것을 생각하십시오주님이 나를 대신해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는지 떠올려보십시오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명령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라시고 행복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게 될 때 주님의 충만한 기쁨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어제보다 오늘오늘보다 내일 우리가 더 사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2012.02.21.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화요일 채플설교 /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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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되라(고전 4:20)

이승선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고린도전서 4장 20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권능에 있느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진짜가 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가짜가 많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은 매우 짧지만 너무나 분명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권능에 있느니라.”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로는 고백하였지만그들의 실제 삶 속에서는 믿음의 권능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다시 말하자면믿음의 겉모습을 가진 사람들은 많았지만 진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성경에서 매우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6장 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너희를 회당들에서 내쫓을 것이요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면서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5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였지만실제 마음과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다시 말해서 가짜들은 옛날에도 많이 있어왔고오늘날도 많이 있습니다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직한 것입니다너무나 무서운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우리는 말과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동시에 마음에서부터 또 실제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짜입니까아니면 말과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고 실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가짜입니까우리는 진짜입니까아니면 가짜입니까?

 

 

가짜에 대한 경고

다함께 디도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디도서 1장 16절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니 그들은 가증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요 모든 선한 일에 대해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짜들에 대해서 매우 강력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하나님을 안다고 말로는 고백하지만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을 보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가증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요 모든 선한 일에 대해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그들이 가증스러운 이유는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위선을 부리기 때문입니다그들은 불순종을 하면서 순종하는 척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그리고 모든 선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거나 사용하실 수 없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짜가 되어서는 안 되고진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가짜들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하나님을 잘 알고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가짜들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증스럽게 보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모든 선한 일에 대해 쓸모가 없어서 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함께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5절을 보시겠습니다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이 번갈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또한 이것을 알라즉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1절에서는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그 첫 번째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탐욕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그들은 배신하고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여러분, 4절에 나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사랑했을까요아마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그들은 물론입니다저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왜 그럴까요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다만 쾌락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그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입술로는 사랑을 고백했을 것입니다.

 

5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비록 그들에게 능력은 없었지만 모양은 있었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사랑과 온유와 부드러움과 겸손의 모양은 있었다는 것입니다얼마나 교묘하고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서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진짜가 되려면

믿음의 삶에서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이겠습니까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그들의 말을 들어보고 알 수 있을까요눈물을 흘리면서 진심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 그의 믿음은 진짜일가요성경구절을 많이 암송하면서 말하면 그의 믿음은 진짜일까요우리는 무엇으로 믿음이 진짜인지가짜인지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왕국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권능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사람들도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언자 요나는 하나님과 다투는 가운데서도 단 하루의 설교만으로 니느웨 도시의 왕에서부터 감옥에 갇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회개시켰습니다그러나 성령님으로 충만하였던 스데반 집사님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설교를 한 뒤에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하였습니다그렇다면 요나는 믿음의 능력이 있고스데반은 없었던 것일까요우리는 어떠한 일의 성취나 결과를 가지고 믿음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가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요저는 오늘 두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사도행전 17장 10-12절을 보시겠습니다.

10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즉시 베레아로 보내니 그들이 그곳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12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믿고 또 그리스 사람인 귀부인들과 남자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리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베레아 사람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습니다그들은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먼저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그 뿐만이 아닙니다그들은 더 나아가서 정말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였다는 것입니다그 결과 12절에 나온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고 살펴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단순히 어떤 설교자가 설교했기 때문에 아무런 검증이나 확인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진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대충 가볍게 넘기는 경우가 있지만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정말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있는지정말 그 말씀이 그런 뜻인지를 날마다 탐구해야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올바른 믿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가 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두 번째로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하나님보다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반드시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컵에 우유가 들어있는데 오렌지주스를 부어 마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먼저 우유를 다 마시거나 깨끗이 씻은 후에 오렌지주스를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붙들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성공이나 명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그것이 나의 꿈이나 비젼이 될 수도 있고나의 계획이나 나의 목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가차 없이 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과거에 무엇을 버렸다거나미래에 무엇을 버릴 예정이라거나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오늘지금 내가 하나님 외에 무엇을 붙들고 있다면 지금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훈련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여러분 각자에게 아직 어리고 젊은 이 시기에도 무엇인가를 버리고 포기해야 할 많은 순간들이 늘 다가올 것입니다때로는 노는 것을때로는 자존심을때로는 나의 주장을때로는 나의 먹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입니다여러분지금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의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노는 것을 포기하고먹을 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닙니다현재 여러분의 상황에서는 너무나 크고 중요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장차 여러분이 어른이 되어서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들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여러분이 오늘 이러한 믿음의 훈련을 하지 않고내가 원하는 것을 움켜잡고 탐욕을 부리는 삶을 산다면여러분은 장차 자라났을 때 가짜 믿음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성경을 많이 배워서 누구보다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잘 설명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채플 시간에 예배 인도도 해보고 대표기도도 많이 해봐서 교회 안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형제의 모습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저는 여러분이 훌륭한 가짜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저는 여러분이 어딘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차라리 부족한 진짜가 되기를 원합니다모양만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신다 하였습니다여러분진짜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그 말씀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였던 베레아 사람들처럼여러분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성경을 배우시기 바랍니다다른 사람이 아닌 여러분이 알고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 받아 배우고 믿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 외에 붙들고 싶은 수많은 것들이 다가올 때 하나씩 하나씩 버리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오늘 훈련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었을 때 여러분은 가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오늘 진짜가 되지 않으면 나중에도 진짜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은 말과 입술에 있습니까아니면 실제 삶 속에 있습니까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4.25 / 설교 장소 : 서울침례신학교 채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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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고전 3:7-9)


본문 : 고린도전서 3:7-9
7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7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서울침례신학교의 학생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일꾼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9절의 말씀을 읽은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저는 이 고린도전서 3장의 내용을 가지고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저희가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으시다
먼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하나님의 속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며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약개론을 배우면서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온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I AM THAT I AM", "나는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며,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떠한 섬김이나 도움도 필요하치 않는 전능자, 완전함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1) 본문의 말씀(고전 3:7) -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3장 7절에서도 기록하기를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심고 물 주고 수고할지라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농부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 할지라도 모든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2) 욥기의 말씀
우리는 토요일날 욥기를 배우고 있는데, 욥기 22장 2절과 3절에서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 지혜로운 자가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 있겠느냐? 3 네가 의롭다 한들 그것이 전능자께 무슨 기쁨이 되겠느냐? 네가 네 길을 완전하게 한들 그것이 그분께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이 말씀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하나님께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은 나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계신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의 신실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나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근거합니다. 

3) 사도행전의 말씀
또한 우리는 화요일 오전에 사도행전을 배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과 25절 말씀에서는 사도바울이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많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던 아테네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많은 신들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을 벌하고 심판하는 그런 신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아테네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바울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뭔가 부족해서 사람에게 요구하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풍성하시고, 긍휼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분이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든 것에서 만족하시고, 사람에게서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임을 또한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7절에서는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이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엔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9절에서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일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분명히 사람의 도움이 필요치 않은 완전함 그 자체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하시는 원칙은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신 예들
우리는 성경에서 창조의 역사를 제외하고서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신다는 하나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즙으로 만드신 기적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항아리도 창조하실 수 있고, 물도 창조하실 수 있고, 또 굳이 물을 포도즙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이, 바로 항아리에 담긴 포도즙을 창조하실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들에게 항아리 여섯 통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셨고, 그 물을 떠다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죽은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말씀하셨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신 뒤에는, 나사로를 풀어주어 마음대로 걸어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으로 무덤의 돌을 감쪽같이 제거하실 수도 있고, 들어다가 멀리 날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사로의 손발을 묶고 있던 수의를 감쪽같이 없애실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나사로를 풀어주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실 수도 있고, 감사의 기도를 하고 눈을 뜨는 순간에 각각의 사람들 앞에 진수성찬의 음식을 마련하실 수도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년의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셨고, 손에서 떼어 제자들에게 주신 뒤에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2) 고넬료와 베드로
신약성경에서 주님께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원칙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가지 예를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와 베드로의 이야기인데, 한번 사도행전 10장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어떤 사람이 있더니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 하는 부대의 백부장이더라.
2 그는 독실한 사람이요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백성에게 구제물을 많이 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3 하루는 아홉시쯤 되어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보매
4 그가 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하니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은즉
5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부르라. 
6 그가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와 함께 묵고 있는데 그의 집은 바닷가에 있느니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가 네게 말하여 주리라, 하더라.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독실한 사람이요,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식민지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제물을 많이 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넬료는 아직 거듭나지 못했고 생명을 얻지 못한 잃어버린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훌륭한 종교인이요, 양심적이고 선한 사람이었지만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고넬료를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고넬료에게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베드로를 부르라는 말만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욥바에서는 베드로가 배고픈 중에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은 하늘에서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 같은 그릇 하나가 내려오고, 한 음성이 있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내가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음성이 다시 두 번째로 그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고넬료가 보낸 이방인 세 사람이 찾아오게 됩니다. 19절을 한번 보시면,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세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모두 부정한 개로 여겼고, 대화를 하거나 집에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것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여주신 이 환상으로 인해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고, 고넬료의 온 집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일하심으로 고넬료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셨으나 베드로를 부르라는 말만하도록 명령하셨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예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서운 홍수를 경고하실 때에도 의의 선포자인 노아와 함께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방주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일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셨고, 모세와 함께 일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 센 요나를 돌이켜 함께 일하심으로 수십만이 넘는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어부들을 부르셔서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이제는 세상에서 약하고 천하고 어리석고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부르셔서 함께 일하자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어떠한 기적이나 위대한 일들을 보여주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고, 우리의 작은 순종을 통해, 우리와 함께 일하심으로, 우리가 시간을 쪼개어 말씀으로 예비하고, 주님의 부담에 순종하여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때, 하찮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장 21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 왜 사람을 사용하기 원하시는가? 보상을 주시려고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가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전능자이시며 사람의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는 분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면 되지, 왜 우리들을 부르시는가? 사람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본문(고전 3:8) - 저마다 자기 수고에 따라
7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7 그런즉 이와 같이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이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

7절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고 수고하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무익한 종들에 불과합니다. 오직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9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무것도 아닌 심는 자나 물 주는 자를 필요로 하시며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8절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의 수고에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호흡과 생명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일하고자 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보잘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닌 수고에 따라 보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이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지만, 어리석고 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함께 일하도록 하신 것은 보상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현재 저희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중고등부 선생님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초등부 주일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저는 때로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뭐라고 주고 싶어서 일부로 일을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을 암송하면 선물을 주겠다든지, 어떤 일을 순종하면 선물을 주겠다든지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고자 함이 아니고,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뭐라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을 만들어서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호흡과 생명을 주셨고, 건강을 주셨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이 다만 그분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에게 값을 매길 수 없고, 한계를 측량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을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참여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보상을 주기 원하십니다. 

2) 본문(고전 3:12-15) -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에 따라
계속해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내가 지혜로운 주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세우되 저마다 어떻게 그 위에 세울지 주의할지니라.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13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터인데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을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 

10절과 11절의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는 단단한 기초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구원의 반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기초는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어떤 가르침이나,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체험이 될 수 없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기초가 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12절의 말씀을 따라 이 단단한 구원의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가지고 건축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상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기초를 가진 자는 누구나 건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섬기는 것은 바로 이 기초 위에 세우고 건축하는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보상이 주어질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애쓰고 수고했는지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13절에 나온 것처럼,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를 시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불로 시험을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나무나 건초나 짚은 다 타버리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금과 은과 보석은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금과 은과 보석이 남은 것을 보시고 우리에게 보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는 제가 저희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날이었는데,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같이 앉아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설교 중에 나오는 성경구절 몇장몇절이라고 말한 것을 5개 이상, 그리고 설교 중에 나오는 성경인물의 이름을 10개 이상 적어오면 선물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 설교에서는 성경구절이 10구절 이상 나왔고, 사람의 이름이 15명 정도 언급되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아이들이 자기가 쓴 것을 내는데, 어떤 아이들은 성경구절 5개, 성경인물 10개보다 더 많이 썼지만, 어떤 아이들은 몇 개가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한 아이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해왔습니다. 성경구절은 하나밖에 없고, 설교를 들으면서 나오는 어떤 문구들을 적어온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너는 열심히는 했지만, 선생님이 요구한 규칙대로, 선생님이 적으라고 한 종류대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선물을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매우 슬퍼합니다. 제가 마음이 약해서 다음 주일날 많게든 적게든 적어온 아이들 모두에게 초코렛을 나눠줬습니다. 


4.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쓸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대로, 법대로 달리지 않으면 상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한 것이 어떤 종류인지를 시험할 것입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여야하고, 나쁜 열매를 맺으려면 나쁜 나무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종류의 일들로 섬길 수 있으려면,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 하나보다, 우리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가 곧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1) 거룩히 자신을 분별하는 사람(성막의 도구들)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자신을 거룩히 분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막을 배우고 있는데, 우상으로 만든 금송아지나, 언약궤를 두른 금은 모두 같은 금입니다. 그러나 금송아지에 쓰인 금은 가증한 것이요, 언약궤에 쓰인 금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 금의 성분은 결국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가증한가 거룩한가의 여부는 그 금이 어디에 속했으며 누구를 위한 용도인가에서 결정지어집니다. 우리는 성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된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세상의 지혜를 버린 자 
또한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지니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려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그가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고, 주님께 온전히 속한 우리들은 이 세상의 지혜를 다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고 높아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당한 일을 당하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시고, 거짓고소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 주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볼 때 이러한 주님의 길은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입니다. 왜 자신의 권리와 정당함을 주장하고 싸우지 않는가? 오늘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때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아야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지혜를 무시하고, 더욱더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3장의 말씀을 통해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7절의 말씀대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절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의 수고에 따라 보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10절과 11절의 말씀대로 우리의 기초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12절부터 15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이 기초 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우고 건축함으로 주님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16절과 17절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하는지 말해주기보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히 자신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18절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는 더욱 어리석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학생들 모두가 장차 주님 앞에서 금과 은과 보석을 많이 쌓아올려서 큰 보상을 받고 함께 즐거워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03.16 / 설교 장소 : 용산침례교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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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르심(고전 1:9)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9절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안녕하세요? 저는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온 이승선 형제라고 합니다. 저는 현재 서울침례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는 학생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자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루이스 목사님과 또 용산침례교회의 성도 여러분께서 이렇게 귀한 기회를 주셔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 주님이 함께하여 주셔서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잠깐 눈만 감았다 뜨면 아침이 밝아오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생활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됩니다. "벌써 2008년 새해구나"라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새해의 1/4이 지나고 벌써 3월의 중간인 16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과제물을 제출해야 할 날짜가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생각하면 어느새 제출할 날짜가 코앞에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잠시나마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 가운데서 빠져나와서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리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다시 보면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짧지만, 이 구절에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를 깊이 있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주셔서 오직 이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너희를" "ye"
오늘의 본문은 "너희를"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원래 우리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그분 자체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무엇인가 힘들고 어려운 노동을 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찾아내서 바치도록 요구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풍성함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사랑을 주고 또 주시려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따라,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며 교제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고, 땅 위의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위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두시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가 너무 아까워서 하나님이 혼자 드시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선악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만들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도 아니고, 다만 사람이 겸손하게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사람의 위에는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너무나 친근하고 원활하던 교제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대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사 59:1,2).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살다가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한 사랑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손해는 하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형벌은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친히 다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의미를 모르고,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모르며 방황하던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먼저 방문하셔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을 방황하면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장의 뒷부분인 26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있고 똑똑하고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꼭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약해서 낙담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어리석고 약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러주지도 않고,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두시고 오히려 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키도 크고 힘도 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을 때, 주님은 키도 작고 약해서 무리들 사이에 낄 수도 없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자들아 다 이리오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저는 주님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교제하게 하시는" "unto the fellowship"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히브리말인데 이 말의 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 이 땅에 사람이 되어 내려오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으셨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때만이 마음에 만족을 얻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만족을 얻어보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만나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길러서라도 마음의 허전함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허전함, 공허함, 상실감, 외로움 같은 많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별되고 멀어진 사람의 마음은 뜻 모를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돈이나 쾌락이나 세상의 많은 것들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절대 완전히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때만이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제로 부르신 것은 마치 아들을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찾은 것과 같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의 인생은 하늘의 아버지를 만날 때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것은 우리를 따듯하게 품어주고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선생님이 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과거에 너무나 잘해주셨던 선생님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는 그런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과의 교제가 너무나 그리워서 다시 그 선생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잘 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 만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것은 너무나 친했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그리워하는 가장 뛰어나고 좋은 교제의 대상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선생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이 세상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손해를 입히면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생명의 손해까지도 기꺼이 감당하시면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앞에 잘못하고 문제를 일으키지만 주님은 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 주님과 같은 분을 결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 인생 가운데 가장 친해지고 가장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할 한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일서 1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함께 요한일서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3절과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4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함께 교제하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유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이 교제가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할 때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늘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는 항상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을 때 주님은 나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의 다른 것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이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마음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주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God is faithful"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신용이 좋다", "믿을 만하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교제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신뢰입니다. 누군가가 자꾸 거짓말을 한다거나 약속을 어긴다면 우리는 그 사람과 더 이상 만나고 교제하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갈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조차 불쌍히 여기시며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항상 누리지 못하고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사라지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지내다가도 한 번의 큰 실수나 한마디 말 때문에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관계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어려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해야하고 때로는 마음을 풀어줄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 앞에서 크게 든 작게 든 눈치를 살피면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의 교제에는 나의 어떠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순수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따듯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성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나의 어떠함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어떠한 모습을 하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꾸미지 말고 가리지 말고, 약하면 약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그대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의롭고 거룩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하루 종일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큰 착각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과 그분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언제나 받아주십니다. 

다 같이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마음에서부터 죄를 자백할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 요한일서 1장 9절에 나오는 죄들의 자백은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라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할 때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십니다. "너 지난번에도 와서 그랬잖아. 이번엔 용서 못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하나님 제가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 또 이렇게 죄를 지었어요. 면목이 없습니다." 
"응? 어제 무슨 죄를 지었는데?"
"아우 하나님 어제 제가 그 죄 또 짓고 지금 또 지었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나는 기억이 안나는데?"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마무리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교제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인이며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려있어서 이 세상 전부를 가진다할지라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영광의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불러주셨습니다. "연봉 10억 이상 버는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100미터 달리기 10초 안에 들어오는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수능 수학문제 1분 만에 다 풀 수 있는 사람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이러한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하고 불러주셨습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약하고 어리석고 없는 자들을 불러주신 것은 놀랍고 신기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제를 회복하시고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고, 사람의 대표로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친구를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를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내가 거룩하게 살면 더 좋아지고, 내가 죄를 짓고 실수하면 나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자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기쁨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머물러 있어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항상 기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언제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고 날마다 더 친밀한 주님과 교제로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07.1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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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고전 8:1-3)


고린도전서 8장
1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전서 8장 전체와 로마서의 한 부분, 에베소서의 한 부분을 함께 펴볼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잘못된 사랑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듣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 처음 가게되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는 노래를 부르며 환영해 줍니다. 또 세상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노래들이 "사랑"을 주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다니엘이 말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이며(단 12:4), 많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이러한 지식도 가지고 있고 저러한 지식도 있으므로 나는 부유하며 풍부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하고 우쭐대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서로 배반하며 미워하고 불법이 만연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딤후 4:1-5, 마 24:10-12). 이 시대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이며 쾌락적입니다.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다 있겠지만, 전체적인 세상의 흐름은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이 사랑이 점점 메마르고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 사랑은 없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랑"이 실제로는 없으면서도 "사랑"이라는 외침만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며 지옥과 심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죄와 지옥에 대하여 경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멸망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며, 그 길로 더 이상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은 축복의 길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한 편에서 이와같이 이렇게 거짓되고 잘못된 사랑에 반발하여 일어난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또한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랑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높은 기준과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치우치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사랑을 거부하는 동시에 실제로 영혼들을 향한 사랑과 형제사랑마저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란 말만 울려 퍼지고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까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에 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며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도 일반 다른 음식과 다를 것이 없다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우쭐대게 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올바른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높아지며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만에 반대하는 단어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나 스스로를 세워주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지식은 나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에게 유익을 줍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지만 사랑은 우쭐대지 않습니다. 

2절에 보시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지식이 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아는 줄로 생각하게 되지만,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때 그는 잘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내 옆의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지식으로 충분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게 됩니다. 그가 지식만 가졌을 때는 몰랐던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분께서 그 사람을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아, 내가 교만하구나. 나는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하여 우쭐대고 있었구나."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식만을 가지고 우쭐대며 스스로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지식
이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들도 많고 주들도 많으나)
6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가지고 있던 지식은 그 음식들이 다른 일반 음식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우상들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가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대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쭐해집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우상들은 실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 음식은 보통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몇몇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좋은 형제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이런 죄는 지어도 되나보다"하면서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습니다. 

11절에 보시면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약한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리고 타협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약한 형제를 사랑하므로 진리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내가 올바른 지식을 따라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될 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의 기준은 다만 올바른 지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배려하게 되며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당시에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이미 신전에서 한번 제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심지어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신전에서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묻지 말고 먹으라고까지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고전 10:25). 

사도 바울은 내가 고기를 먹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옳고 합당할지라도, 지식이 없는 연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아예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지식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랑을 따라 살아갔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언급된 말씀
이와 똑같은 말씀이 로마서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약하여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느니라.

고린도전서 8장에서의 문제가 로마에서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어떤 성도들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다 할지라도 감사하며 먹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또 믿음이 약한 어떤 성도들은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들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신전에서 나온 것인데 어떻게 먹느냐며 채소만 먹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보며 올바른 지식이 없으므로 무식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보면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자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생각 때문에 먹지 못하던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자기들의 양심을 거슬러서 강한 형제들을 무조건 따라서 먹으므로 그들이 약한 양심이 더럽혀지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로마 교회에서는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내가 알고 또 주 예수님을 통해 확신하거니와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으되 어떤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하니라." 

이것을 다시 말하면 어떤 음식도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도 그 자체로는 먹는 사람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더럽히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만일 네 음식물로 인해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제 네가 사랑으로 걷지 아니하나니 네 음식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지식으로 인하여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의 형제가 근심하는 것을 보거든 우리는 우리가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지식 안에서 걷기보다 사랑으로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2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여 그의 유익을 구하고 그가 세워지게 할지니라.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지식은 나를 강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를 강하게 하며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교회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식만을 추구하면 나 홀로 서게 되지만, 사랑을 겸하게 추구하게 되면 교회와 함께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대신 짐을 져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연약함을 못마땅히 여길 것이 아니라 담당할 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할까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마도 유럽인지 미국인지에 드넓은 초원이 있고, 거기에는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그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여행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 뛸 듯이 기쁘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난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우리 옆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고 사신 귀한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옆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방식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격에 고칠 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실 때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모르는 지식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하신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으려고 하셨다면 우리는 질려서 도망쳐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옆의 형제 자매들에게서 잘못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모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성격들을 발견합니다. 때론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발견하고 바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 가르치고 바로잡으려고 시도하지 말고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잘못된 지식들과 문제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잡기 전에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인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알려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히 엎드리며 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시기 전에 내가 무엇인가 안다고 나의 올바른 지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려고 하지말고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신앙배경이 어떠한가를 이해해야 하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지식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똑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제시할 때 들으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정말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진리 한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젊은 부자 청년에게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하시면서 "너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적은 허공에다 진리를 따발총처럼 외쳐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귀한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올바른 지식 위에 믿음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인 우리들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언급된 말씀
다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4절부터 보시면 사도 바울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14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15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무엇을 빌고 있는지 잘 주목하여 보십시오.

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알려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많은 심오한 지식과 교리를 모르는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우쭐댈 만큼 많은 지식은 있으나 참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도 사람들 앞에서 지식으로 걷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20절부터 또 보시면,
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안에서 권능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능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식에는 권능이 없지만 사랑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일할 때는 밖에서 내가 일하지만 사랑으로 일할 때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일하십니다. 먼저 사랑이 있는 가운데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권능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형제를 망치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은 많고 사랑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고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결핍되면 그 지식은 형제를 망치게 되고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마땅히 알 바를 모르게 만드는 어두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부하지 아니하며 자긍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지식은 있다 해도 사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분의 제자가 되고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많은 문제들을 다 아시고도 천천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를 우리가 따라오고 소화할 수 있는 만큼 알려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그러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우쭐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을 때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1,2,3,4,5번 순서대로 마구 제시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과연 어떠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시는지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지식은 함부로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주의깊이 듣게 만듭니다. 지식은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며 배려하게 합니다. 사랑이 풍성한 지식은 진리의 권능이 되어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만, 사랑이 없는 지식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하면서 우쭐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성도들은 옳게 행하였으나 형제를 망쳐버렸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성도들은 형제를 업신여기며 논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식과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행동을 변화시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지식은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하지만, 사랑은 먼저 나 자신을 바로잡게 만듭니다. 진리의 지식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지만 나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전달되는 지식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세워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선포되는 진리의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우쭐대지 말고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애통하며 주님께 사랑을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한 것처럼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 것인지를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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