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7.03.16 / 설교 장소 : 용산침례교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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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르심(고전 1:9)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9절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안녕하세요? 저는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온 이승선 형제라고 합니다. 저는 현재 서울침례신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는 학생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자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루이스 목사님과 또 용산침례교회의 성도 여러분께서 이렇게 귀한 기회를 주셔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 주님이 함께하여 주셔서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잠깐 눈만 감았다 뜨면 아침이 밝아오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생활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됩니다. "벌써 2008년 새해구나"라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새해의 1/4이 지나고 벌써 3월의 중간인 16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과제물을 제출해야 할 날짜가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생각하면 어느새 제출할 날짜가 코앞에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잠시나마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 가운데서 빠져나와서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리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다시 보면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짧지만, 이 구절에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를 깊이 있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주셔서 오직 이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너희를" "ye"
오늘의 본문은 "너희를"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원래 우리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그분 자체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무엇인가 힘들고 어려운 노동을 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찾아내서 바치도록 요구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풍성함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사랑을 주고 또 주시려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따라,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며 교제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고, 땅 위의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위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두시고 그것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가 너무 아까워서 하나님이 혼자 드시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선악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도 만들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도 아니고, 다만 사람이 겸손하게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사람의 위에는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너무나 친근하고 원활하던 교제는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대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사 59:1,2).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살다가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한 사랑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손해는 하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형벌은 주님이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다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친히 다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의미를 모르고,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모르며 방황하던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먼저 방문하셔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을 방황하면서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장의 뒷부분인 26절부터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멋있고 똑똑하고 잘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꼭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약해서 낙담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어리석고 약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듣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러주지도 않고,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내버려두시고 오히려 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키도 크고 힘도 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을 때, 주님은 키도 작고 약해서 무리들 사이에 낄 수도 없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능력 있고 지혜로운 자들아 다 이리오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저는 주님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교제하게 하시는" "unto the fellowship"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히브리말인데 이 말의 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시는지, 이 땅에 사람이 되어 내려오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으셨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때만이 마음에 만족을 얻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만족을 얻어보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만나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은 애완동물을 길러서라도 마음의 허전함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허전함, 공허함, 상실감, 외로움 같은 많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별되고 멀어진 사람의 마음은 뜻 모를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돈이나 쾌락이나 세상의 많은 것들로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절대 완전히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때만이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제로 부르신 것은 마치 아들을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찾은 것과 같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의 인생은 하늘의 아버지를 만날 때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것은 우리를 따듯하게 품어주고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선생님이 되신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과거에 너무나 잘해주셨던 선생님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는 그런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과의 교제가 너무나 그리워서 다시 그 선생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잘 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 만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것은 너무나 친했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그리워하는 가장 뛰어나고 좋은 교제의 대상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선생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이 세상은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손해를 입히면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생명의 손해까지도 기꺼이 감당하시면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앞에 잘못하고 문제를 일으키지만 주님은 늘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 주님과 같은 분을 결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 인생 가운데 가장 친해지고 가장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할 한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일서 1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함께 요한일서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3절과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4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함께 교제하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유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이 교제가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할 때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늘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는 항상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십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을 때 주님은 나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의 다른 것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이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마음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주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God is faithful"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신용이 좋다", "믿을 만하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교제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신뢰입니다. 누군가가 자꾸 거짓말을 한다거나 약속을 어긴다면 우리는 그 사람과 더 이상 만나고 교제하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갈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조차 불쌍히 여기시며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항상 누리지 못하고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다가, 문제가 사라지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지내다가도 한 번의 큰 실수나 한마디 말 때문에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관계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어려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해야하고 때로는 마음을 풀어줄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 앞에서 크게 든 작게 든 눈치를 살피면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의 교제에는 나의 어떠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순수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따듯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떻게 성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나의 어떠함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어떠한 모습을 하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꾸미지 말고 가리지 말고, 약하면 약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그대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의롭고 거룩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하루 종일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큰 착각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과 그분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언제나 받아주십니다. 

다 같이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마음에서부터 죄를 자백할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 요한일서 1장 9절에 나오는 죄들의 자백은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라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할 때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십니다. "너 지난번에도 와서 그랬잖아. 이번엔 용서 못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하나님 제가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 또 이렇게 죄를 지었어요. 면목이 없습니다." 
"응? 어제 무슨 죄를 지었는데?"
"아우 하나님 어제 제가 그 죄 또 짓고 지금 또 지었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나는 기억이 안나는데?"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마무리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교제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인이며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큰 구멍이 뚫려있어서 이 세상 전부를 가진다할지라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영광의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불러주셨습니다. "연봉 10억 이상 버는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100미터 달리기 10초 안에 들어오는 자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수능 수학문제 1분 만에 다 풀 수 있는 사람들아 내게로 나아오라." 이러한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하고 불러주셨습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약하고 어리석고 없는 자들을 불러주신 것은 놀랍고 신기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제를 회복하시고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고, 사람의 대표로서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친구를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를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내가 거룩하게 살면 더 좋아지고, 내가 죄를 짓고 실수하면 나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자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기쁨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머물러 있어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항상 기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지고 언제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시고 날마다 더 친밀한 주님과 교제로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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