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7.07.1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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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고전 8:1-3)


고린도전서 8장
1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전서 8장 전체와 로마서의 한 부분, 에베소서의 한 부분을 함께 펴볼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잘못된 사랑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듣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에 처음 가게되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는 노래를 부르며 환영해 줍니다. 또 세상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노래들이 "사랑"을 주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외치고 "사랑"을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다니엘이 말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이며(단 12:4), 많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시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이러한 지식도 가지고 있고 저러한 지식도 있으므로 나는 부유하며 풍부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하고 우쭐대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들을 사랑하며, 서로 배반하며 미워하고 불법이 만연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딤후 4:1-5, 마 24:10-12). 이 시대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계산적이며 쾌락적입니다.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다 있겠지만, 전체적인 세상의 흐름은 성경이 말씀한 바와 같이 사랑이 점점 메마르고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 사랑은 없는 시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랑"이 실제로는 없으면서도 "사랑"이라는 외침만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며 지옥과 심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죄와 지옥에 대하여 경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멸망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며, 그 길로 더 이상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은 축복의 길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한 편에서 이와같이 이렇게 거짓되고 잘못된 사랑에 반발하여 일어난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또한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랑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높은 기준과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치우치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사랑을 거부하는 동시에 실제로 영혼들을 향한 사랑과 형제사랑마저 잃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란 말만 울려 퍼지고 실제로는 사랑이 없는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할까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에 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며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도 일반 다른 음식과 다를 것이 없다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우쭐대게 하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틀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올바른 지식은 그들로 하여금 높아지며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만에 반대하는 단어로 사랑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나 스스로를 세워주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세워줍니다. 지식은 나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에게 유익을 줍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지만 사랑은 우쭐대지 않습니다. 

2절에 보시면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지식이 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아는 줄로 생각하게 되지만,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때 그는 잘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내 옆의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지식으로 충분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알게 됩니다. 그가 지식만 가졌을 때는 몰랐던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분께서 그 사람을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게 됩니다. "아, 내가 교만하구나. 나는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하여 우쭐대고 있었구나."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식만을 가지고 우쭐대며 스스로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나의 문제들을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지식
이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이나 땅에나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들도 많고 주들도 많으나)
6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들에 관하여 가지고 있던 지식은 그 음식들이 다른 일반 음식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우상들이 있을지라도 그러한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우리가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을 대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쭐해집니다. 고린도 교회의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이 앞에 차려졌을 때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우상들은 실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 음식은 보통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몇몇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이 좋은 형제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이런 죄는 지어도 되나보다"하면서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습니다. 

11절에 보시면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약한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리고 타협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약한 형제를 사랑하므로 진리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내가 올바른 지식을 따라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될 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의 기준은 다만 올바른 지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옆에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배려하게 되며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당시에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이미 신전에서 한번 제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심지어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신전에서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묻지 말고 먹으라고까지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고전 10:25). 

사도 바울은 내가 고기를 먹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옳고 합당할지라도, 지식이 없는 연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아예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지식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사랑을 따라 살아갔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언급된 말씀
이와 똑같은 말씀이 로마서 1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 믿음이 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에 찬 논쟁은 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약하여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느니라.

고린도전서 8장에서의 문제가 로마에서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어떤 성도들은 모든 음식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우상에게 바쳐졌다 할지라도 감사하며 먹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또 믿음이 약한 어떤 성도들은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들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신전에서 나온 것인데 어떻게 먹느냐며 채소만 먹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아니하는 자를 보며 올바른 지식이 없으므로 무식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먹지 아니하는 자는 먹는 자를 보면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자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생각 때문에 먹지 못하던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자기들의 양심을 거슬러서 강한 형제들을 무조건 따라서 먹으므로 그들이 약한 양심이 더럽혀지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로마 교회에서는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내가 알고 또 주 예수님을 통해 확신하거니와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으되 어떤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정하니라." 

이것을 다시 말하면 어떤 음식도 자체적으로 부정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도 그 자체로는 먹는 사람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다고 여기면서 먹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더럽히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는 "만일 네 음식물로 인해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제 네가 사랑으로 걷지 아니하나니 네 음식물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지식으로 인하여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의 형제가 근심하는 것을 보거든 우리는 우리가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지식 안에서 걷기보다 사랑으로 걷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그런즉 우리 강한 자들은 마땅히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하리라.
2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여 그의 유익을 구하고 그가 세워지게 할지니라.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지식은 나를 강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지만 사랑은 다른 형제를 강하게 하며 다른 형제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교회의 길입니다. 우리가 지식만을 추구하면 나 홀로 서게 되지만, 사랑을 겸하게 추구하게 되면 교회와 함께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지식이 많고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대신 짐을 져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연약함을 못마땅히 여길 것이 아니라 담당할 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할까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마도 유럽인지 미국인지에 드넓은 초원이 있고, 거기에는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그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여행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했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 뛸 듯이 기쁘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난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렸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우리 옆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고 사신 귀한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옆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방식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성격에 고칠 점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실 때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가 모르는 지식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시면서 강의를 시작하신다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만약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바로잡으려고 하셨다면 우리는 질려서 도망쳐 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옆의 형제 자매들에게서 잘못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모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성격들을 발견합니다. 때론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발견하고 바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 가르치고 바로잡으려고 시도하지 말고 먼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잘못된 지식들과 문제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잡기 전에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인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알려주시도록 기도하고 겸손히 엎드리며 이들을 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알려주시기 전에 내가 무엇인가 안다고 나의 올바른 지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하려고 하지말고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신앙배경이 어떠한가를 이해해야 하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지식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똑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제시할 때 들으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정말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가장 귀한 진리 한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들을 나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젊은 부자 청년에게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다만 사랑하시면서 "너에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적은 허공에다 진리를 따발총처럼 외쳐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귀한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올바른 지식 위에 믿음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인 우리들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에베소서에 언급된 말씀
다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4절부터 보시면 사도 바울의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14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15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무엇을 빌고 있는지 잘 주목하여 보십시오.

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알려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단순히 많은 심오한 지식과 교리를 모르는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우쭐댈 만큼 많은 지식은 있으나 참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려주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대하신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도 사람들 앞에서 지식으로 걷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20절부터 또 보시면,
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주님이 우리 안에서 권능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여 능히 일하실 것입니다. 지식에는 권능이 없지만 사랑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일할 때는 밖에서 내가 일하지만 사랑으로 일할 때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일하십니다. 먼저 사랑이 있는 가운데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권능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진리가 제시될 때 그것은 형제를 망치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식은 많고 사랑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고 사랑은 세워준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거기에 사랑이 결핍되면 그 지식은 형제를 망치게 되고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마땅히 알 바를 모르게 만드는 어두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부하지 아니하며 자긍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지식은 있다 해도 사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분의 제자가 되고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많은 문제들을 다 아시고도 천천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리를 우리가 따라오고 소화할 수 있는 만큼 알려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그러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는 것은 우쭐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을 때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1,2,3,4,5번 순서대로 마구 제시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 사람에게 과연 어떠한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시는지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지식은 함부로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주의깊이 듣게 만듭니다. 지식은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말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며 배려하게 합니다. 사랑이 풍성한 지식은 진리의 권능이 되어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만, 사랑이 없는 지식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하면서 우쭐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인가 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알 수 있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고린도 성도들은 옳게 행하였으나 형제를 망쳐버렸습니다. 지식만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성도들은 형제를 업신여기며 논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지식과 함께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행동을 변화시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지식은 다른 사람을 바로잡으려하지만, 사랑은 먼저 나 자신을 바로잡게 만듭니다. 진리의 지식은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지만 나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전달되는 지식은 결코 다른 사람을 세워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선포되는 진리의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우쭐대지 말고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므로 애통하며 주님께 사랑을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한 것처럼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 것인지를 알려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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