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8.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50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삼하 24: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4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4장 14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큰 곤경에 빠졌도다. 주의 긍휼은 크니 이제 우리가 그분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저는 오늘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의 가장 마지막인 24장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용의 흐름상으로 보면 사무엘기하는 23장에서 끝날 때 가장 아름다고 훈훈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윗의 마지막 찬양의 말과 전설의 용사들에 대한 승리담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4장은 다소 당황스럽게도, 다윗의 실패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마무리를 아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사무엘기하 24장의 말씀을 기록하셨으며, 또 이러한 안타까운 내용으로 사무엘기 상하의 모든 말씀을 마무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분명하게,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의 긍휼뿐입니다. 우리가 사무엘기상하의 모든 말씀을 다 살펴보고 나서 다윗이 참 대단하다는 결론을 가지게 된다면,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다윗을 높이시고 사용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게 되고, 또 찬양하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을 기록된 목적대로 바르게 읽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이 주는 위로와 인내를 통해 믿음의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24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과 이스라엘의 실패와 심판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말씀의 제목과 같이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다윗에게 온 시험 - 시험자
그러면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다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오르매 그분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움직이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 하고 말하게 하시니라.
지금 우리가 읽은 1절에서는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타올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지 다윗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타올랐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무엘기하 뒷부분의 내용을 기초로 생각해 본다면, 압살롬의 반역과 또 곧바로 세바의 반역에 가담하였던 온 이스라엘의 반역죄와 연관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1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움직이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고 말하도록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어떠한 동기를 부여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도록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가 개역개정판 한글역본에 기록된 사무엘기하 24장 1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다른지 한 번 비교하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개역개정판 한글역본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이해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는 진행되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 죄가 되어버리는 매우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다윗은 인구를 조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에 어떠한 동기를 제공하시고, 시험을 주셔서, 마음을 움직이신 것이지, 직접적으로 순종해야 할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무엘기하 24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백성의 수를 세도록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면서, 역대기상 21장 1절 말씀과 비교해 보시겠습니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려고 일어나 다윗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하니라.
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만들었던 주인공이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렇게 질문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를 세도록 다윗을 움직인 이는 하나님인가, 사탄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욥기 말씀을 참조해보겠습니다. 욥기 1장 8-12절을 보시겠습니다. 
8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라.
9 이에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그 땅에서 그의 재산이 불어났나이다.
11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12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보라, 그의 모든 소유가 네 권능 안에 있거니와 다만 그에게는 네 손을 내밀지 말라, 하시니 이에 사탄이 주 앞에서 물러가더라.
여기서 우리는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 욥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하나님과 사탄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자랑하셨고, 사탄은 시험하기를 제안하였습니다. 11절에서 주의 손을 내미사 욥의 모든 소유를 쳐보시라고 사탄이 말하였고, 12절에서 그의 모든 소유가 너의 권능 안에 있거니와 다만 그에게는 너의 손을 내밀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모든 소유를 하루 만에 다 앗아간 것은 11절에 나오는 주의 손입니까, 아니면 12절에 나오는 사탄의 손입니까? 사탄이 먼저 하나님께 제안을 하였고, 실행도 하였으니 사탄의 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으니 하나님의 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다윗을 움직인 것이, 사무엘기하에서는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역대기상에서는 사탄이라고 기록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전한 주권과 통치와 제한하심 가운데 사탄의 활동의 범위를 정하시고, 그 안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가운데 시험을 허락하셨고, 사탄은 욥이 믿음을 버리고 무너지기를 원하는 가운데 시험을 제안하였고, 실행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성도가, 모든 일 가운데, 모든 환경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에 순종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 다윗에게 온 시험 - 시험의 내용
다윗에게 임하였던 시험은 교만, 자기 신뢰, 자기 자랑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왕이 인구조사를 통하여, 백성의 수를 세어보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명백히 말해서, 그 일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수를 세시는 주제를 가지고 민수기를 기록하셨을 정도입니다.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 “숫자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책 자체가 민수, 즉 백성의 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다윗의 동기는 교만이며, 자기 신뢰이며, 자기 자랑이었기 때문에, 명백히 말해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력을 확인하고, 느부갓네살 왕처럼 자기 왕국에 대하여 자랑하며,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기 때문에, 명백히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매우 교묘한 것이었고, 이제 노년에 이른, 믿음의 백전노장인 다윗조차도 넘어지고 실패하게 되었던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때로 저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겸손한 나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겸손한, 대단한, 영적인 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일을 섬긴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영적 야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이름을 얻고, 영광을 얻고, 칭송을 받을 만한 놀라운 사역을 소유하고, 업적을 달성하며, 영적인 지위와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야망과 유혹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 밧세바의 실패가 완전히 육신으로 드러난 죄라면, 백성의 수를 센 것은 영적 교만이라는 더욱 교묘하고 감추어진 영적인 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침례자 요한이 말하였던 것처럼, 주님만이 반드시 흥하시고 증가되시며, 나는 반드시 쇠하고 감소되어야 한다고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세어보고 계산해야 한다면, 모세의 기도처럼 우리의 짧은 날 수를 세는 지혜를 얻어서,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나의 업적과 자랑거리를 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베풀어주신 긍휼과 복과 은혜를 세어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머리카락도 다 세어볼 수가 없는 것처럼,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쓸 수가 있고, 그분의 긍휼을 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세어보아야 한다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세어보기를 원합니다. 


** 다윗에게 있었던 기회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으로 돌아오셔서 2-4절을 보시겠습니다. 
2 왕이 자기와 함께한 군대 대장 요압에게 이르되, 이제 너희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백성을 계수하여 내가 백성의 수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왕께 이르되, 백성이 얼마나 많든지 이제 주 왕의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백 배나 더하사 내 주 왕의 눈이 그것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하오나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였으나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말이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을 이겼으므로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 나가니라.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시험을 받을 때에 2번의 도움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그의 믿음을 돕고자 하였던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 바로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왕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우리야를 죽게 하라는 왕의 명령에는 아무런 질문이나 항변 없이 그대로 따랐던 요압 장군도,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요압 장군만이 아니라, 군대의 대장들이 한 마음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다윗 왕의 명령은 너무도 이상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평소에, 또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볼 때, 다윗 왕과 요압 장군 중에서 누가 하나님을 더 신실하게 따랐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또 다윗과 군대의 대장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다윗이 틀렸고, 요압과 군대 대장들이 맞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형제자매들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이 때 이들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겸손하게 들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적 교만에 사로잡혔고, 형제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으며, 고집을 피웠고, 결국 자신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겸손한 귀를 가지고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8,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8 이처럼 그들이 온 땅을 두루 다니고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9 요압이 백성의 수의 총계를 왕에게 주었는데 이스라엘 안에는 칼을 뺀 용맹한 자 팔십만 명이 있었으며 유다 사람은 오십만 명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두 번째 기회는 아홉 달 스무 날이라고 하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윗은 거의 10개월 동안, 백성의 수를 세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 멈출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시간들 동안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백성들의 수를 세어보고, 자신이 어떻게 사울의 망해가는 왕국을 이어받아, 이토록 강건하게 세웠는지를 되짚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요압 장군이 다윗 왕에게 백성의 수를 보고하였는데, 역대기상 말씀을 참조해 보면 요압 장군이 왕의 명령을 가증하게 여겼기 때문에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세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믿음의 시험을 받을 때 승리할 수 있도록 형제들을 주셨고, 또 충분한 시간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윗은 자신의 고집을 그대로 이루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이러한 와중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 다윗의 회개와 하나님의 심판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0-14절을 보시겠습니다. 
10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그를 찌르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행한 일로 인해 크게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주의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주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로 있던 대언자 갓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네게 세 가지를 주노니 너는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라.
13 이에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에게 고하여 이르되, 왕의 땅에서 칠 년 동안 왕에게 기근이 임하리이까? 아니면 왕께서 왕의 원수들에게 추격을 받고 그들 앞에서 석 달 동안 도망하시려나이까? 아니면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역병이 있으리이까? 이제 나를 보내신 분에게 내가 어떤 답을 드려야 할지 살피고 알려 주소서, 하매
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큰 곤경에 빠졌도다. 주의 긍휼은 크니 이제 우리가 그분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비록 늦었긴 했지만, 그래도 다윗은 죄를 지은 이후에 무감각하지 않고, 마음에 찔림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성도의 양심이며,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인정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복을 세어보려고 했다든지, 이스라엘의 군대를 정비하려고 했다든지, 좋은 뜻으로 포장하지 않고, 자신이 크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으며,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다루심을 보게 되는데, 바로 무슨 벌을 받을 것인지, 세 가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한 가지를 다윗에게 고르라고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벌을 내리시든지 달게 받아야만 하는 것이 다윗의 입장인데,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벌을 보기로 주시고, 한 가지를 고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벌을 내리시는 와중에도, 다윗을 사랑하시며, 아끼시며 긍휼히 여기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제시된 보기는 첫 번째, 7년 동안 기근이 임하는 것, 두 번째, 3개월 동안 원수들에게 추격을 당하는 것, 세 번째, 3일 동안 역병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대기상에서는 기근이 임하는 기간을 3년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이 구절들 사이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갓 대언자와 다윗의 대화 중에 긍휼을 베푸셔서 3년으로 줄여주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하늘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3번, 역병의 재앙을 선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주의 긍휼이 크기 때문에, 주님의 손에 온전히 모든 심판을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역병이 임하게 되는데, 이 일은 단지 다윗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5-17절을 보시겠습니다. 
15 이에 주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 위에 역병을 보내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 중에서 칠만 명이 죽으니라.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손을 내밀어 그것을 멸하려 할 때에 주께서 그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사 백성을 멸한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 네 손을 멈추라, 하시거늘 그때에 주의 천사가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옆에 있더라.
17 다윗이 백성을 친 천사를 보고 주께 아뢰어 이르되, 보소서, 나는 죄를 짓고 악하게 행하였사오나 이 양들 곧 그들은 무슨 일을 하였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 집을 치소서,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선택대로 역병을 보내셨습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말처럼, 최북단에서 최남단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백성들을 죽게 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 전국에 걸쳐서 7만 명이 역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말씀에 보면 주의 천사가 아시리아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을 하룻밤 사이에 전멸시킨 기록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지금 3일에 걸쳐서 7만 명을 죽게 하신 것은 매우 천천히 심판을 진행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역병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재앙에서 스스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주의 천사는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옆에 섰습니다. 다윗은 천사를 보고는, 내가 죄를 짓고 내가 악하게 행하였으니, 주의 손으로 나를 치시고, 내 아버지 집을 치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다윗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심판하실 것이 있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에 대하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왕 다윗에 대한 두 번의 반역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다윗 왕의 교만과 높아진 마음에 대하여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을 낮추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긍휼의 풍성하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다윗을 대적하였고 압살롬을 따른 바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임 당한 직후에도 그들은 옷을 찢고 돌이키기는커녕 세바를 따랐습니다. 사실 온 이스라엘이 죽임을 당해야 마땅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소수만을 죽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왕국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인구 가운데 단지 3일 만에 7만 명이나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아니면 왕국이 유지될 수도 없고, 아무것도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시며, 다윗의 마음이 겸손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 타작마당의 제단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4장 18,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그 날에 갓이 다윗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올라가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주께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19 다윗이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갓의 말에 따라 올라가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시 한 번 주님의 긍휼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대언자 갓을 통하여 범죄한 다윗을 부르시고,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더 이상 우리를 보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불러주시며 우리와 교제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이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때에,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해변에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음식을 예비하시며,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상태로 모였든지,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불러주고 계십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메마름과 배고픔과 궁핍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를 새롭게 불러주고 계십니다. 
“너는 왜 왔어? 꼴 보기 싫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며 또 다시 새로운 긍휼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다윗은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즉시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로 기쁨으로 응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받드시고,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 함께 역대기상 21장 26-28절을 보시겠습니다. 
26 다윗이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드리며 주를 부르니 그분께서 하늘로부터 번제 헌물 제단 위에 불을 내려 그에게 응답하시고
27 주께서 천사에게 명령하시매 그가 다시 자기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28 그때에 다윗이 주께서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자기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거기서 희생물을 드렸으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헌물에 하늘의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이로써 다윗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자신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여부스 족속 오르난은 사무엘기하에 나오는 여부스 족속 아라우나와 동일 인물입니다. 다윗은 아라우나, 곧 오르난으로부터 그 땅의 일대를 구입하였고, 그 때부터 바로 그곳의 제단에서 주님께 헌물을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역대기하 3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때에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주의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전에 주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족속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예비한 곳이더라.
다윗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은 백향목 집에 거하지만, 하나님의 궤는 휘장 안에 있음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주의 집, 성전을 짓기를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피를 많이 흘린 전사 다윗을 막으시고, 그의 뒤에 올 샬롬, 즉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 샬로몬, 즉 솔로몬을 통하여 짓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있는 동안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모든 재료를 예비하였는데, 마지막으로 성전이 건축될 장소를 바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예비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과 고집이 수치스럽게 드러난 곳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이 나타났던 곳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바로 그 장소에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후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왜 여기에 성전을 건축하였느냐고 묻게 된다면, 다윗 자신의 교만과 수치가 역사 대대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또한 대대로 찬양받으실 것이기에, 다윗은 바로 그 장소에 성전이 세워지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 정리
다윗은 이 장소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 앞에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 또한 다윗은 장차 이곳에서 성전이 세워질 때, 모든 주의 백성이 모여 이렇게 고백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주의 긍휼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시편 103편 8-11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8 주께서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니
9 그분은 항상 징계하지 아니하시며 자신의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법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긍휼이 크시도다.
기도하겠습니다. 


2015.02.15.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9

은혜로 삽니다(삼하 23:1-5)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3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3장 1-5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이르기를,
2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릴지니라.
4 그는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가 온 뒤 맑게 비침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 같으니라, 하셨도다.
5 비록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사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비록 그분께서 내 집이 자라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나의 모든 구원이요, 나의 모든 소원이기 때문이라.
저는 오늘 “은혜로 삽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사람에게 분명한 말과 글을 통해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저희 호윤이도 이제 20개월 정도 되면서 몇 가지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재미있고 신비롭습니다. 얼마 전에는 잠꼬대를 하는데 한글자로 분명하게 “까”라고 말하는 것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꿈속에서 과자를 먹었나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지만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에서 해상재난을 당했는데 구조정에는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남편은 부인을 남겨두고 혼자 구조정에 올랐고 부인은 침몰하는 배 위에서 남편에게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여러분, 부인이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학생들은 모두 격분하여 말했습니다. "당신을 저주해요. 내가 정말 눈이 삐었지!!"
이때 선생님은 한 학생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학생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생각했을 때, 부인은 아마, 우리 아이 잘 부탁해요!, 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너 이 이야기를 들어봤니?" 

학생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선생님은 뭉클한 마음으로, "정답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배는 침몰했고,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딸을 잘 키운 뒤, 몇 년 후 병으로 죽었습니다. 딸이 아빠의 유물을 정리하던 중 아빠의 일기장을 발견하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배 여행을 갔을 때 엄마는 이미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사고가 발생하였고 아빠는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일기에는 딸 때문에 엄마와 함께 죽을 수가 없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사무엘기하 23장에 나타난 다윗의 마지막 말과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서 모든 내용이 오늘의 제목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었습니다. 은혜로 삽니다. 바로 다윗이 은혜로 살았고, 다윗의 모든 용사들이 은혜로 살았으며, 오늘 우리 모두가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다윗의 마지막 말
먼저 사무엘기하 23장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이르기를,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을 뛰어난 용사라든지, 위대한 왕이라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을 높이 일으켜진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낮은 자였는지를 기억하는 말입니다. 높은 자가 아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입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자를 먼지에서 일으키시며 거지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통치자들 가운데 앉게 하시고 또 그들이 영광의 왕좌를 상속받게 하시나니 이는 땅의 기둥들이 주의 것이요, 또 그분께서 그것들 위에 세상을 세우셨기 때문이라.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라는 다른 신하들의 제안을 받았을 때, 자기 자신을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 다윗을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거지와 같은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영광의 왕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였습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대언자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을 부으려고 왔을 때, 초대받지 못한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나, 그 모든 형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실 가능성이 0%였던, 완전히 제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양치기 소년 시절 때부터, 들판에서 손에 하프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교제하였던 그의 온 삶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의 특징이 있다면, 그 말이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듯 은혜로 간을 하고, 마음의 갈증과 허전함을 배불리 먹여줄 수 있는 풍성하고 복된 믿음의 고백들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하 23장으로 돌아오셔서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
다윗은 달콤한 시편의 말씀들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오늘 우리들의 입과 혀에도 오직 주님의 말씀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릴지니라.
4 그는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가 온 뒤 맑게 비침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 같으니라, 하셨도다.
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의 품격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가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적으로 표현하면서 또 실감나게 예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과 같이 따듯하고 밝고 맑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고, 구름 없는 아침과 같이 상쾌함을 말씀하고 있고, 또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과 같은 신선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 사람들을 인도하는 모든 리더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는 남편에게, 또 가정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일터에서는 상사에게,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배들에게 요구되는 품격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씀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다윗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과연 이러한 왕이었습니까? 그는 과연 의롭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리는 왕이었습니까?

우리 함께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비록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사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비록 그분께서 내 집이 자라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나의 모든 구원이요, 나의 모든 소원이기 때문이라.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걸었고, 모든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주님만을 붙들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으로 있으면서는 많은 실수와 허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했고 살인했고, 자식들의 죄를 정의롭게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셨으며,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시며, 모든 소원과 구원이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격이 있고, 아주 적합한 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을지라도, 내 집이 비록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어주셔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 말을 남기는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차고 넘치는, 한량없는,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 다윗의 용사들 - 처음 세 용사
사무엘기하 23장은 다윗의 찬양의 말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가장 실제적인 은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다윗과 함께하였던 37인의 용사들, 형제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날까지 정말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 수많은 시간들을 지나서, 이렇게 마지막 말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바로 목숨을 걸고 다윗과 함께, 다윗을 위하여, 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동행하였던 용맹한 형제들이, 다윗에게는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먼저 우리 함께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소유한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자리에 앉았던 다그몬 사람 곧 에센 사람 아디노는 대장들 가운데 우두머리더라. 그가 자기 창을 들어 팔백 명을 치고 한 번에 그들을 죽였더라.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용사는 바로 다그몬 사람 아디노입니다. 그는 창을 사용하는 전사였고, 한 번의 전투에서 가나안 전사 팔백 명을 쓰러뜨린 용사들 중에 첫째 우두머리였습니다. 지금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아디노라는 이름은 “그의 창”이라는 뜻으로, 창을 잘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으로 보여집니다. 역대기상에서는 그의 이름을 야소브암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 함께 9,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인데 그는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의 하나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함께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섰으나 그때에 그들이 저들에게 도전하고
10 그가 일어나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달라붙을 때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치니라. 그 날에 주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으므로 백성이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다윗의 삼총사 가운데 두 번째는 엘르아살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을 두려워하여 물러섰을 때, 앞장서서 도전하며 싸움을 싸웠습니다. 야구선수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훈련을 장시간 지속하면, 나중에 배트를 쥐었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옆에서 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세 용사 가운데 한 명인 엘르아살 역시도 손이 칼에 달라붙어서 펴지지 않을 정도로 싸운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엘르아살을 통하여 큰 승리를 이루셨고, 백성들은 물러섰다가 돌아와서 그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11,12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떼를 지어 팥이 무성한 땅에 함께 모이매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도망하였으나
12 그는 그 땅 한가운데 서서 그 땅을 보호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더라. 주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더라.
세 용사 중 마지막 용사는 바로 삼마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도망하는 상황 속에서 홀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며 블레셋 사람들과 맞서서 싸웠던 용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큰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3-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또 서른 명의 우두머리 중에서 세 사람이 내려가 수확하는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블레셋 사람들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더라.
14 다윗은 그때에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는 그때에 베들레헴에 있었더라.
15 다윗이 애타게 바라며 이르되, 오 누가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는 우물의 물을 내게 주어 마시게 할까! 하매
16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뚫고 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던 우물의 물을 길어 그것을 취해 다윗에게 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주께 부어 드리며
17 이르되, 오 주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그런 까닭에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니라. 이 세 용사가 이런 일들을 행하였더라.
네, 이 장면은 영화 속 한 장면과 같은 너무나 멋지고 감동적인 일화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에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승리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탄식과 같은 혼잣말에 반응하여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세 용사였습니다. 오직 세 사람의 용사가 블레셋의 진영 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길어 왔던 것입니다. 

다윗조차 누군가가 그 말에 반응해서 정말 가서 물을 떠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말을 들었던 그 어떤 신하들도 가서 물을 떠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용사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원함을 예민하게 살피는 자들이었고, 다윗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었고, 다윗이 마실 물 한 모금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충성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일을 달성할 만큼 전투에 능한 용사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과연 무슨 자격으로 이러한 훌륭하고 멋진 용사들을 신하로 두었으며, 그들의 이러한 충성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일까요?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 다윗의 두 번째 삼총사
이제 우리 함께 18,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인데 그는 세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더라. 그가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쳐서 죽이고 세 사람 가운데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었느냐? 그러므로 그가 그들의 대장이 되었으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의 처음 삼총사인 창의 달인 아디노, 칼이 손에 달라붙었던 엘르아살, 그리고 홀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고 섰던 삼마를 이어서, 두 번째 삼총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 첫째는 바로 아비새였습니다. 아비새 역시도 창을 들고 한 번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 삼백 명을 쓰러뜨렸습니다. 또한 아비새는 다윗이 이스비브놉이라는 거인에게 죽임을 당할 번 하였을 때, 다윗을 구조하여 거인을 쓰러뜨리기도 하였습니다. 처음 삼총사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두 번째 삼총사역시 다윗의 든든한 지원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20-23절을 보시겠습니다. 
20 또 갑스엘 출신 용사의 손자요, 여호야다의 아들인 브나야인데 그는 많은 일을 행하였더라. 그가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구덩이 한가운데서 사자 한 마리를 죽였으며
21 또 잘생긴 이집트 사람을 죽였는데 그 이집트 사람의 손에 창이 있었으나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그 이집트 사람에게 내려가 그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의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들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가운데 이름을 얻고
23 그 서른 명보다 더 존귀하였으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자기의 호위대를 다스리게 하였더라.
그 다음 용사는 바로 브나야였습니다. 브나야 역시 전투에 능한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의 두 번째 삼총사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사람에 대하여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매우 궁금하지만, 하늘에 가서야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윗의 용사들을 열거하고 있는 37인의 명단에서 정작 요압 장군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요압 장군은 다윗과 함께하면서 많은 싸움을 싸웠고, 또 암몬 자손과 싸울 때에나,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할 때에나 가장 앞장서서 활약을 하였던 장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좋은 용사 37인의 목록에는 들어가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용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요압을 볼 때, 단지 유능하고 재능이 좋고 활약을 많이 한 것이 기준이 되지 못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며,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요압은 많은 부분에서 훌륭하였고, 많은 수고를 하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참되게 충성했던 용사로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육신의 방식이나,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성경 말씀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며, 칭찬하시는 믿음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 다윗의 31명의 용사
이제 24절부터 39절까지는 나머지 다윗의 용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단에서는 서른 명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이름을 세어보면 서른 한 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9절에서는 모두 서른일곱 명이라고 총 인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 세 용사, 그 다음 세 용사, 그리고 서른 한명의 용사를 더해서, 모두 서른일곱이 되는 것입니다. 
서른 명의 용사들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아사헬이 아브넬 장군을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그 때문에 새롭게 인원이 보충되면서 아마도 서른 명이 재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명단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이름은 34절 마지막에 나오는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조언자이자 밧세바의 할아버지이고, 엘리암은 밧세바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39절에 등장하고 있는 헷 족속 우리야는 바로 밧세바의 남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다윗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면서 범죄 하였던 바로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가장 좋은 용사들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으로서는 이 명단 자체가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뜻대로 추가하거나, 삭제하거나, 변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명단 속에서 다윗의 죄악을 다시 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며, 차고 넘치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격이 없는 다윗에게, 이렇게 훌륭한 형제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풍성한 은혜를 쏟아부어주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숨을 쉬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불평하고 투정을 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을 주신 것 또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복에 겨운지,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귀한 줄도 모르고 불평할 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교회와 형제자매들을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모든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 아둘람 굴의 변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윗과 함께했던 훌륭한 용사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2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거기서 떠나 아둘람 굴로 피하매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이 그 일을 듣고는 그들이 거기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더라.
2 고난 중에 있던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불만이 있던 모든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되었더라. 거기에는 그와 함께한 사백 명가량의 사람이 있더라.
다윗의 용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아둘람 굴 출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별 것 아닌 사람들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고, 하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있던 자들이었고, 빚진 자들이었고, 불만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리석고 약하고,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었을 때 전설적인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이 용사들이 은혜였던 것처럼, 이 용사들에게도 다윗은 은혜이며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영웅이자 전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고, 혼자서 수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맞서게 하였으며, 이미 물러서고 도망갔던 형제들을 다시 회복시켜 모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교회와 형제자매들 역시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나에게 지체들이 은혜이며, 또 지체들에게도 내가 은혜이며 선물인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고난 중에 있던 자이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이며, 빚진 자이며, 헐벗고, 어리석고, 약하고, 메마르고,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주님 앞에 더러운 자였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먼저 찾아와주셨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넘치는 은혜를 쏟아부어주고 계십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교회이며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오늘 다윗과 같이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된다면,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본 사무엘기하 23장의 말씀처럼, 나와 함께했던 형제자매들과의 소중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지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37인의 용사만이 아니라, 100명, 200명, 더 많은 지체들의 이름이 우리의 입에서 감사의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은혜로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은혜로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은혜로 삽니다.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5.02.04.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설교/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8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삼하 22: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2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2장 1-4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그가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니라.
2 그가 이르되,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출자시요,
3 내가 신뢰하는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로다. 주께서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시나이다.
4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를 내가 부르리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저는 오늘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무엘기하 22장의 말씀은 다윗의 삶 속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의 기록입니다. 사무엘기하는 24장까지 기록되었는데, 이제 22장에서는 다윗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가는 과정 가운데, 다윗의 삶 속에서 가장 기쁘게 주님을 찬양하였던 시편 18편 말씀을 인용하여 기록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그가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하여 들었던 그 순간에는 옷을 찢고 슬퍼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말하면서, 사울의 죽음을 알렸던 아말렉 청년을 처형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날 애가를 지으며 애곡하였습니다. 

다윗이 시편 18편의 노래의 말씀들을 기록하며 주님을 찬양한 그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주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사방에서 안식을 주셨을 때가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어볼 수 있는 사무엘기하 22장의 찬양은 어떠한 사건들 이후에 순간적으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잠잠히 지나온 길을 되새겨보고,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차분히 묵상하는 가운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잔잔하면서도 폭발적인 찬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우리 하나님을 가리켜,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찬양과 영광을 받기에 자격이 있으시고, 합당하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자격이 있으시고,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사무엘기하 22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높이고, 사랑하며, 감사하고, 또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고통 중에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2장 5-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홍수가 나를 무섭게 하였으며
6 지옥의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사망의 올가미들이 나보다 앞서 갔도다.
7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며 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고 내 부르짖음이 그분의 귀에 들어갔도다.
먼저 다윗은 자신의 지나온 길을 생각하면서, 죽음과 오직 한 걸음 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 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대적들의 홍수가 밀려들고, 지옥의 고통과 사망의 올가미들이 늘 추격하였던 한 번 한 번의 순간들을 기억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양떼를 돌보면서 사자와 곰을 대항하여 맞섰던 순간들, 거인 골리앗 앞에 오직 목자의 지팡이와 조약 돌멩이를 들고 섰던 순간, 사울 왕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다가 창에 맞을 뻔했던 아찔했던 순간들, 집 주변을 사울의 군사들이 포위하고 매복하였던 순간,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침을 흘리며 정신 나간 시늉을 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해야 했던 순간, 분리의 바위라는 의미인 셀라하마르곳에서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울 왕이 블레셋의 침략 소식을 듣고 급히 떠나갔던 순간, 시글락에서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하였던 절망의 순간, 바로 이러한 사망의 물결이 에워싸던 순간들을 다윗은 회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시는 믿음의 자녀들을 고난으로 이끄십니다. 단지 조금 힘든 일들을 겪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을 것 같은 고난으로 이끄십니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사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명이 베냐민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였는데, 그는 마지막 순간에 베냐민을 이집트 땅으로 보내면서, 내가 그를 잃으면 잃으리로다, 라고 고백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왕 앞에 나가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가운데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장 8-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8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가 힘에 겹도록 한량없이 눌려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9 우리 속에 죽음의 선고를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
10 그분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고 계시며 또 여전히 건지시리니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팀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자기 속에 죽음의 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도 죽을 것만 같은 일들이 가득합니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때로는 건강으로, 때로는 자녀나 부모님과 같은 가족의 일들로, 때로는 나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일들, 때로는 억울하게 오해를 받는 일, 때로는 너무나 바쁘고 정신없는 일, 때로는 외로움과 같은 감정들로 죽을 것만 같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와 우리 CCA 학생들이 하지 말자고 약속한 말 표현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귀찮다고 말하지 말자, 두 번째는 망했다고 말하지 말자, 그리고 세 번째는 죽겠다고 말하지 말자, 입니다. 세상에 죽을 것만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배고파 죽겠고, 답답해 죽겠고, 졸려 죽겠고, 지겨워 죽겠고, 웃겨 죽겠고, 힘들어 죽겠고, 짜증나 죽겠고, 억울해 죽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이러한 죽을 것 같은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참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끄시고,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겠다고 말하지 말고, 나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이론적으로, 지식으로 알아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의 고난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수준은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는 정말 무능하고, 구제불능이며, 답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사망의 물결 속으로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부활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와 기대와 소망이 다 사라질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무너지고 쓰러졌던 사람만이 비로소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나서, 최선을 다해 겸손한 모습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진심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주님께서 하셨다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내 음성을 들으시며, 권능으로 일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 사무엘기하 22장으로 돌아오셔서 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주를 부르며 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고 내 부르짖음이 그분의 귀에 들어갔도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고통 중에 주님을 부를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음성을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도회로 모인 이유는 바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촛불의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시며 권능으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2장 14,1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4 주께서 하늘에서부터 천둥소리를 내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께서 자신의 음성을 내시며
15 화살들을 내보내사 그들을 흩으시고 번개로 그들을 쳐부수셨도다.
다윗은 자신이 친히 목격하고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투 중에 하나님께서 천둥소리를 통하여 두렵게 하시고, 번개를 화살처럼 내리셔서 대적들을 쳐부수시는 역사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망의 홍수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단숨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짜릿한 손길을 맛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자녀를 절망 가운데로 몰아가시고, 뜨거운 용광로에서 제련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순도 높은 믿음을 얻어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나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녹여서 제거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인정하는 순수한 믿음만을 남겨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고난만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승리의 순간도 맛보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최후의 순간이 이른 것 같았을 때, 하늘의 천둥과 번개로 대적들이 눈앞에서 쓰러지며 도망가는 장엄한 광경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놀라운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며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함께 에베소서 3장 20,21절을 다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21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다윗의 눈앞에 나타났던 초자연적인 역사와 큰 권능은 오늘날 우리 안에서 동일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행하실 수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단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고 넘치게 섬길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지체를 조금 위로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지체로 하여금 완전히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오직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하로 돌아오셔서 22장 18-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나의 강한 원수와 나를 미워한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셨나니 내가 감당하기에 그들이 너무 강하였도다.
19 그들이 내 재앙의 날에 나보다 앞서 갔으나 주께서 내 버팀 기둥이 되셨으며
20 또 그분께서 나를 넓은 곳으로 데려가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건지셨도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감당하기에 너무 강하였던 원수들로부터 다윗을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재앙의 날에 버팀 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넓은 곳으로 데려가시며 넘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30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내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힘입었을 때 어떤 권능을 경험하였는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힘입었을 때, 치열한 전쟁터에서 군대 사이를 휘젓고 달려가며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하나님을 힘입었을 때, 길을 가로막고 있던 높은 성벽도 뛰어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다윗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오직 주님을 힘입었을 때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다윗에게 힘을 주셨던 다윗의 하나님은, 바로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신,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 각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지극히 큰 권능을 알기 원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성령의 권능의 삶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함께 35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다윗은 심지어 자신의 팔로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신없는 전투 가운데 자신을 향하여 날아오는 화살을 순간적으로 감지하고 팔을 휘둘렀는데 강철로 된 활이 산산조각 부수어진 것인지, 어떤 것인지, 우리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지만, 다윗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권능으로 전쟁 속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어찌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나를 기억하시며, 긍휼로 보상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 함께 21,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1 주께서 내 의를 따라 내게 보상을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아 주셨으니
22 이는 내가 주의 길들을 지키고 사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다윗이 찬양한 하나님은 보상하시며 갚아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가 주님 앞에 깨끗하게, 의롭게, 주의 길들을 따르며,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던 모든 걸음에 대하여 갚아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48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곧 내 원수를 갚아 주시고 백성을 내 밑으로 들어오게 하시며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의롭게, 그리고 은혜롭게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억울함과 슬픔과 고통을 아시고, 원수를 갚아주시며,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무엇을 순종하였든지, 어떻게 주님 앞에 바르게 걸었든지, 주님께서는 그것을 잊지 않으시며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 물 한 잔의 드림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며, 다 기억하시며,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에 은혜와 감사가 충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철저히 계산적으로만 보상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산에 맞지 않는 넘치는 영광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따지신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어떻게 기억하시고 평가하실 것인지를 살짝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어떻게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는지를 기록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한 것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웃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믿음으로 길을 떠난 것과 이삭을 드린 것에 대하여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스스로의 뜻으로 지도자가 되려고 시도한 것이나, 반석을 두 번이나 친 실수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으시고,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한 것만을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이나, 입다와 같은 이상한 모습을 가졌던 재판관들 역시 믿음의 사람들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잘하고 못한 것을 비교하고 가감하여서 보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따른 그 작은 믿음의 발걸음을 너무나 기뻐하시며 넘치고 넘치게 갚으시며 보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늘 주님을 드높이고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나의 하나님
이제 우리 함께 처음에 읽었던 사무엘기하 22장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들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그가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니라.
2 그가 이르되,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출자시요,
3 내가 신뢰하는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로다. 주께서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시나이다.
4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를 내가 부르리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었습니다. 2절에서는 다윗이 주님을 가리켜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구출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내가 신뢰하는 나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권능이 있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권능으로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좋으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이십니까? 단지 성경속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믿음이 좋은 누구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나의 하나님이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함께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떠받쳐 주리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떠받쳐 주리라. 내가 오늘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강하고 위대하시며, 너무나 선하고 좋으신 하나님께서, 다름 아닌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방패도 되시고, 반석도 되시고, 요새도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지혜도 되시고, 힘도 되시고, 거룩함도 되시고, 친구도 되시고, 아버지도 되십니다. 나의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시며, 나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과연 나의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어쩌면 내 마음 한 구석의 일부분만을 내어드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 우주 만물을 가득 채우시는 광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며, 우리의 전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생명이 되시고, 나의 기쁨이 되시고, 나의 만족이 되시고, 나의 강함이 되시며 나의 용기가 되시고, 나의 길이 되시고, 나의 미래가 되시며, 나의 보상이 되시고, 나의 상속 유업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함께 마지막으로 시편 18편 1-3절까지의 말씀을 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1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2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출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신뢰할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로다.
3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를 내가 부르리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바로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우리가 찬양하며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5.01.21.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설교/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7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삼하 21:1)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1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1장 1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때에 다윗 시대에 해를 이어 삼 년 동안 기근이 있어서 다윗이 주께 여쭈었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으므로 그와 및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인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저는 오늘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물은 생명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꼭 물고기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이 없으면 식물들도 살 수가 없고,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으며,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근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고도 큰 재앙입니다. 

실제적인 물이 없는 기근도 참으로 무서운 재앙이지만, 오늘날 이 시대에 있는 영적인 기근 역시 너무나 무섭고 치명적입니다. 우리 함께 아모스 8장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날들이 이르게 될 때, 이 땅에 기근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빵이나 물이 없는 갈증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을 것이 풍부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기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입니다.

홍수가 나면 온 사방이 물이지만, 정작 마실 수 있는 물은 없다고 합니다. 그처럼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있으면서, 정작 먹고 마실 수 있는 주의 말씀을 찾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설교자도 많고, 기독교 서점에는 책들도 넘쳐납니다. 그러나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정작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너무나 어려운, 기근의 시대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독한 영적 기근의 결과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나 메말라 있습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땅은 싹을 내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자라게 만듭니다. 그러나 메마른 땅은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은 영적 기근 속에서 메마르고 지쳐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21장 1절 말씀에서 다윗 시대에 삼 년 연속으로 일어났던 기근에 대하여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1,2년 정도의 기근이야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3년 연속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는, 4년차부터 매우 힘든 시간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무엘기하 21장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 안에 있는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목마르고 갈증이 난 우리들의 마음을 시원한 진리의 말씀과 성령님의 생명의 물로 풍성히 채워주시기를 원합니다. 


** 기브온 사람들
먼저 우리 함께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때에 다윗 시대에 해를 이어 삼 년 동안 기근이 있어서 다윗이 주께 여쭈었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으므로 그와 및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인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정말 오래간 만에 다윗이 주님께 여쭈었다고 하는 너무나 반가운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1년째 기근이 들었을 때나, 혹은 2년째 기근이 들었을 때에라도 더 빨리 주님께 여쭈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3년만에라도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주님께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즉시로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왕의 시대에 사울왕과 그의 집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문제들을 주님 앞에 가져가 여쭙기를 원합니다. 한두 번 그냥 넘어갔을지라도, 세 번째에는 주님께 여쭙고 답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1장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모리 족속 중에서 남은 자들이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을 향해 열심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죽이려고 꾀하였더라.) 왕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니라.
잠시 기브온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에 속하지 않았고, 가나안 이방 민족인 아모리 족속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모든 가나안 백성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얼마 되지 않아, 기브온 거주민과 주님의 이름으로 화친을 맺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기브온 거주민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아주 먼 곳의 나라에서부터 온 것처럼 여호수아를 속이고, 평화조약을 맺기를 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주님께 여쭙지 않았고, 기브온 거주민들에게 속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맹세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그들이 바로 근처에 거하는 마땅히 진멸해야 하는 가나안 백성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브온 거주민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은 직후에, 다른 가나안의 왕들은 배신자들인 기브온 주민들을 대적하여 연합군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러자 기브온의 거주민들은 여호수아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만히 두면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속임수를 사용한 기브온 사람들을 멸할 수가 있었지만, 주님 앞에서 맹세한 언약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가나안 연합군을 대적하는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들을 이끌고 밤새도록 달려가 전쟁터에 합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돌과 우박을 내리셔서, 이스라엘이 칼로 죽인 자보다 더 많은 자들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해가 넘어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해와 달을 멈추어 서게 하셔서,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마땅히 진멸 당했어야 할 가나안 민족이며, 속임수를 사용하였던 자격이 없는 기브온 거주민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시고, 긍휼로 그들을 보존하시며, 완전한 승리를 허락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날까지 기브온 거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기브온 거주민들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과 함께 살도록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그들의 이웃이며 형제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비록 주님께 묻지 않고, 속임을 당하여, 어리석게 결정하고, 함부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자신의 맹세로 인정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마태복음 18장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
이 마태복음 말씀은 교회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진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의 뜻으로 승인하시고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카톨릭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하면서 교황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지옥에 보낼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한다면, 그것은 인정받을 문제가 아니라 심판을 받을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선택과 결정을 하늘의 뜻으로 인정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각 성도들이 깨어서 주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다소 어리석은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셨고, 기브온 거주민들을 멸하시지 않는 것을 하나님 자신의 맹세로 받아들이시고, 정하셨습니다. 자격이 없고 멸망을 당하기에 합당하였던 기브온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 사울왕의 위험한 열심
그런데 사울왕은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을 위한 “열심”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무서운 “열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사울의 경우에서는 결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맹세를 깨뜨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민족을 죽이고자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10장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모르고,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과 열심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닌 그 결과로, 메시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진리가 없는 열심의 결과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고,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서도 찬성하였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열심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항상 유익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열심은 오히려 해악이 될 수가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을 향한 열심으로 기브온 거주민을 멸하려고 하였고, 많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 기근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맹세와 언약을 사람의 선한 열심으로 깨뜨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배워야 하며, 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걸어야하며, 왜 주님께 기도해야 하고, 교회의 지체들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할까요? 우리의 열심이 언제든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비록 그 자체로는 순수할지라도, 하나님이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육신의 뜻 가운데 행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울왕의 열심은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할 때,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은 무서운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눈에 옳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 기브온 거주민의 요구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1장으로 돌아오셔서 3-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그러므로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하랴? 내가 무엇으로 속죄하여야 너희가 주의 상속 유업을 위해 복을 빌겠느냐? 하매
4 기브온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사울과 그의 집에서 은이나 금을 취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또한 왕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사람을 죽이지 마옵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너희가 무엇을 말하든지 내가 너희를 위해 그것을 행하리라, 하매
5 그들이 왕께 응답하되, 우리를 소멸시킨 사람 곧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지역의 어느 곳에도 남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를 대적하며 계략을 꾸민 사람
6 즉 그의 아들들 중에서 일곱 명을 우리에게 넘겨주소서. 주께서 택하신 사울의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주를 위해 목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그들을 주리라, 하니라.
다윗은 즉시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죽였던 사울왕의 집에서 7명에게 복수하면 만족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7-9절을 보시겠습니다.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곧 그들 사이에 있던 주의 맹세로 인하여 왕이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아끼니라.
8 다만 왕이 아이야의 딸 리스바의 두 아들 곧 그녀가 사울에게 낳은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미갈의 다섯 아들 곧 그녀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을 위하여 키운 아들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니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을 산에서 주 앞에 목매어 달므로 그들 일곱 명이 다 함께 쓰러져 수확하는 때 곧 보리를 수확하기 시작하는 때의 첫 무렵에 죽으니라.
이것은 오늘날로서는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운 복수와 정의의 실현 방식입니다. 어찌되었든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그대로 이행하여, 사울의 자손 7명을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지방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돌무덤에 묻고 왕이 명령한 모든 것을 수행하니라. 그 뒤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간구를 들으시니라.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그대로 이행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과거 다른 장소에 있었던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옮겨와 고향 땅에 묻어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모든 일을 이행한 뒤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간구를 들어주셨고, 기근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 형제들을 사랑하는 길
우리는 오늘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양한 영적 교훈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주님께 여쭙는 모습에서, 사울왕이 잘못된 열심을 부리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자격이 없는 기브온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모습에서 여러 가지 면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의 말씀을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기브온 사람들처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고, 너무나 육신적이어서 영적으로 필요가 없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거짓되게 행하여 믿기가 어렵고, 함께 무슨 일을 하기도 어려운 지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 자매를 구원하시고, 우리교회에 한 몸으로 더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그 형제자매를 받아들이며,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메마름과 기근이 있는 이유는, 우리 나름대로의 열심 가운데 행하면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정당하고, 내가 성경적이고, 내가 더 영적이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거침없이 행하면서, 다른 지체들은 고려하지 않고, 내 눈에 육신적이고, 자격이 없는 지체들을 버려두고,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곤고한 것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형제자매가 있지는 않습니까? 왜 나는 성령 충만의 삶을 살지 못할까를 주님께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함께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보시겠습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오다가 너를 대적할 어떤 일이 네 형제에게 있음을 거기서 기억하거든 
24 네 예물을 거기에,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맨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단 위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 맨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모든 요구를 이행하고, 정당하게 보상하고, 심판을 집행한 그 이후부터 기근을 끝내시고, 그 땅을 위한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형제자매들과 어려운 일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기억나게 해주신다면, 즉시 그것을 가지고 형제자매와 화해하기를 원합니다. 서로 더 이상 대화를 안 하거나, 적당히 인사만 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표면적인 예의를 지키는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기근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적당히 잘 지내면서 다투지 않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렇게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잘못을 고백하고, 보상하며, 용서하고,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 거인들을 대적하는 법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1장 15-21절을 보시겠습니다. 
15 블레셋 사람들이 여전히 또 이스라엘과 싸움을 하매 다윗이 자기 신하들과 함께 내려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더라. 다윗이 기진하게 되매
16 그 거인의 아들들 중에서 무게가 놋으로 삼백 세겔 나가는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였으나
17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를 구조하고 그 블레셋 사람을 쳐서 죽이니 이에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께서 다시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나가지 마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18 이 일 후에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었는데 그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그 거인의 아들들 중에서 삽을 죽였더라.
19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었고 거기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을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20 또 여전히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고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손마다 손가락이 여섯 개요, 발마다 발가락이 여섯 개로 개수가 스물네 개더라. 그도 그 거인에게 태어났더라.
21 그가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거인들을 쓰러뜨렸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물론 혼자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만나는 거인마다 혼자서 다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하면서 거인들을 쓰러뜨렸던 사람들의 이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과 형제들은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함께 돕고 구조하면서 싸움을 싸웠고, 혼자서는 쓰러뜨리기가 힘든 많은 거인들을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앞에도 거인들과 같이 많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거인들을 어떻게 상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다윗과 그의 사람들처럼, 형제들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능히 이러한 거인들을 쓰러뜨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한 울타리의 각 양떼로 부르셨고, 한 몸의 각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각각의 용사들이 모인 군단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교회의 길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내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내가 주님을 섬기고, 내가 믿음이 성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하는 길이 아니라, 우리교회가, 나와 내 형제, 나와 내 자매가, 나와 내 지체가 함께 주님을 따르고, 함께 십자가를 지며, 함께 섬기고, 함께 성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 정리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의 다소 어리석은 결정을 하늘의 뜻으로 인정하셨고, 자격이 없는 기브온 거주민들을 하나님의 백성과 같이 대우해 주셨습니다. 사울과 그의 집은 잘못된 열심 가운데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의롭게 심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정당하게 보상하고, 정의를 집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자격이 없는 민족들과 같은 기브온 형제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고, 또 풀어지는 일이 있었음을 우리가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적 기근과 메마름이 있다면, 다윗과 같이 주님께 여쭙기를 원합니다. 사울왕과 같이 나름대로의 열심 가운데 행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어렵게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보상하였던 것처럼,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화해해야 할 지체가 없는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다윗과 형제들이 팀을 이루어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거인들을 쓰러뜨렸던 것처럼, 우리가 한 몸, 한 교회로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며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각자는 약하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온전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각자는 부족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풍성하고 충분하며 만족할 수가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귀한 교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너무나 귀한 형제자매들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풍성한 믿음의 만찬과 생수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5.01.18.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설교/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6

순종할 사람이 필요하다(삼하 20:19)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0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0장 19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평화롭고 신실하게 사는 자들 가운데 하나이거늘 당신이 이스라엘에서 한 도시와 한 어머니를 멸하려 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당신이 주의 상속 재산을 삼키려 하시나이까? 하매
저는 오늘 “순종할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데, 오늘날 현 시대는 마지막 날들 중에서도, 정말 끝이 가까워 보입니다. 마지막 날들에 나타난 성경의 여러 말씀들을 살펴볼 때,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중, 한 가지는 바로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가장 마지막 교회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인데, 바로 사람들의 권리, 즉 인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모든 생각의 중심이 되고, 근본이 되고, 모든 권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아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고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의 지도자가 국민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고, 가정에서는 부모님들이 권위를 잃어가고 있고, 남편들이 머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학교와 교회들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이 권위를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질서와 반역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참으로 가깝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똑똑하고 재능이 뛰어나고, 능력 있는 인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않고, 온전히 순종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기 생각, 자기 지식, 자기 판단, 자기 경험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석하고 평가할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러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발견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기하 20장 19절 말씀에서, 우리는 한 어머니의 고백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한 어머니가 일어나서 주의 상속 재산을 보호하고, 가족들을 지키며, 반역을 끝내는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실한 믿음의 어머니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에 주신 믿음의 어머니들, 자매님들로 인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교회의 청년부, 중고등부, 초등부의 자매님들이 귀한 믿음의 어머니들로 자라나기를 소망합니다. 저희 승연이도 잘 자라나서 먼저는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귀한 딸이 되기를 원하고, 또 좋은 믿음의 어머니도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조금 이상한 점은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남편은 어디로 갔느냐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다 어디로 가고 한 어머니가 나설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교회에서 믿음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믿음의 아버지, 형제들도 굳건하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무질서하고, 진리가 권위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믿음으로 굳게 서서 전진하는 우리 형제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20장 말씀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거역의 길을 걸었던 네 명의 사람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네 사람의 모습은 각각 다르게 나타났지만, 그 어떤 모습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이와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참된 순종의 삶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 다윗의 불순종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0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마침 거기에 세바라는 이름의 벨리알의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베냐민 족속 비그리의 아들이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에게는 다윗 안에서 얻을 몫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 안에서 얻을 상속 재산이 없도다. 오 이스라엘아, 각각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2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서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랐으나 유다 사람들은 요르단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자기들의 왕에게 굳게 붙으니라.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인물은 세바가 반역을 하도록 원인과 빌미를 제공하였던 다윗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순종하지 못했고, 자기 방법대로 왕의 자리로 돌아오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혈통과 친족을 통해서 속히 왕의 자리로 돌아오고자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무엘기하 19장의 뒷부분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과 유다 지파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유다 지파는 왕이 우리의 친족이라고 주장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우리가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무엘기하 20장 1절에서 세바라는 사람이 마침 거기에 있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반역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불순종은 불순종을 낳습니다. 왕이 불순종의 길을 걸을 때, 백성들도 반역의 길을 걷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부모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지 않을 때, 자녀들이 거역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물론 세바의 반역은 전적으로 세바의 책임입니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 때문에 자녀가 죄를 지어도 되거나, 인도자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을 거역해도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편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대로 길을 걸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압살롬의 반역 직후에, 또 다시 반역하게 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생각해 본 다윗의 경우는 바로 앞에서 이끄는 인도자로서의 불순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잘못일 뿐 아니라, 뒤따르는 백성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는 더욱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 세바의 반역
이제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바로 사무엘기하 20장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세바입니다. 세바는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등하는 그 현장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2절 말씀에 의하면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서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0장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해를 끼치리니 너는 네 주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그를 추격하라. 그가 성벽을 두른 도시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다윗은 세바의 반역을 압살롬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만큼 세바의 반역은 대규모적이었며, 성공적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끝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다윗 왕을 맞으러 왔던 백성들이 바로 그 자리에서 왕을 버리고 세바를 따랐으니, 말 그대로 온 백성의 마음이 세바를 따르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1절에서 세바는 자기를 따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에게는 다윗 안에서 몫이 없으니 각각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백성이 세바를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바의 반역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이 분열을 초래하였습니다. 다윗의 혈통 지파와 그렇지 않은 지파를 다윗이 나누었습니다. 다윗 왕이 잘못했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권위를 거역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주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옳고 정당한 자의 편에 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의 원리 안에서, 진리에 순종하는 자의 편에 서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였고, 자신의 왕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한 순간도 사울 왕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제거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얻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권위와 질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잘했느냐, 못했느냐보다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은 온 우주의 왕이시며, 권위가 되시며, 모든 질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의 모든 역사는 교만과 불순종, 그리고 거역과 반역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안에 내가 옳고 정당하다는 속임수가 숨어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거스르는 모든 역사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루시퍼 사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들 가운데 최초의 반역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었던 것도, 옛 뱀, 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사탄은 무질서를 원하고, 거역의 역사를 원합니다. 락 음악의 정신은 “반항”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정확히 사탄의 정신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면서,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실 때 순종하였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헌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도, 그를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순종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은 순종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거역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표현입니다. 의심과 불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 없음이 악한 마음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바로 그 죄가 믿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불순종하고 거역하게 됩니다. 믿음은 순종과 연결되며, 믿음 없음은 거역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믿음의 길, 순종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0장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여인이 지혜롭게 온 백성에게 가니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지므로 그가 나팔을 불매 그들이 그 도시에서 물러나 각각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에게 이르니라.
이것이 바로 반역자 세바의 최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라고 자신을 밝혔던 여인이 지혜롭게 온 백성들과 대화하여, 반역자를 처단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의 어머니는 전쟁을 막을 수 있었고, 평화를 지키며, 자신의 가정과 주의 상속 재산인 삶의 터전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함께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이유는 죄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자신의 피로 지불하셨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힘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하고, 끈기가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건강이 부족해도 누구나 순종할 수 있는, 단순히 마음으로 믿으라고 하는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면 바로 믿음이며,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영원히 가치 있는 삶이 있다면, 진리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믿음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성품이 있다면 바로 순종입니다. 흠도 많고 실수도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따지고 평가하고 거역하는 길은 결코 지혜로운 길이 아니며, 오히려 어리석고 사악한 길입니다. 지혜로운 길은 모든 질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진리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순종하는 길을 가기 원합니다. 순종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진리에 무릎 꿇고 순종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 아마사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하 20장으로 돌아오셔서 4,5절을 보시겠습니다. 
4 그때에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사흘 안으로 유다 사람들을 소집하고 너도 여기에 있으라, 하니
5 이에 아마사가 유다 사람들을 소집하러 갔으나 왕이 그에게 정해 준 약정 시간보다 더 오래 머무니라.
우리가 생각해 볼 세 번째 인물은 아마사입니다. 그는 처음에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던 사람이었고, 군대 대장으로서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임을 당하기에 마땅했고, 심판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온 유다 지파를 다윗 왕에게 이끌어 올 역할을 하기에 좋은 자이며, 다윗 왕의 혈통이요, 골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면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윗의 새로운 군대 대장으로 임명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아마사가 말하는 것을 단 한마디도 읽어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반역했던 것을 참으로 돌이키고, 새롭게 되었더라면, 믿음과 돌이킴의 고백이 한마디쯤은 기록되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아마사는 끝내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아마사는 다윗 왕에게 사흘 안으로 유다 사람들을 소집하고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정해준 시간보다 더 오래 머무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바로 얼마 전에 아마사의 말을 잘 들어서, 다윗 왕을 모시러 나왔습니다. 아마사가 유다 사람들을 통솔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마사는 그 일을 매우 게으르고 나태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여기서 정해 준 시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는 것은 일이 어려워서 시간이 더 걸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마사가 의도적으로 더 오래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며칠을 더 머물렀는지 알 수 없지만,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아마사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음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다윗 왕을 섬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신속하게 군대를 소집해야하며, 세바의 반역을 진압해야 한다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향 집에 간 김에 좀 더 여유를 즐기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마사의 모습은 우리들 속에도 있는 소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기는 하는데, 정해준 시간에 맞춰서 신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간에 맞춰서 여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기는 하는데, 정해진 방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법대로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순종은 결코 순종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순종의 기준은 즉시로, 기쁘게, 마음을 다하여,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순종입니다. 믿음의 부모님이 자녀에게 가르치고 훈련해야 하는 순종은 바로 이러한 순종입니다. 시간을 질질 끌면서, 억지로, 주어진 역할의 일부분만을 행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용납해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데,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표준에 합당한 순종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이 하는, 적극적인 순종이야말로 참된 순종입니다. 소극적이고 게으른 순종은 다른 말로 거역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는, 순종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그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 요압
이제 우리 함께 네 번째, 마지막 인물로 요압을 보시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0장 9,10절을 보시겠습니다.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건강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에게 입을 맞추려 하였으나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던 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므로 이에 그가 칼로 그의 다섯 번째 갈빗대를 치매 그의 창자가 땅에 흘러 나와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그가 죽으니라. 이처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추격하였더라.
요압 장군은 큰 맥락 가운데서는 단 한 번도 다윗 왕을 대적하거나 반역한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다윗을 위하는 쪽에 섰고, 다윗의 편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위하여 칼을 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을 통치하다가, 드디어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던 아브넬을 통하여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때 요압 장군은 다윗 몰래 아브넬을 암살하여, 자신만이 온 이스라엘의 독보적인 장군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을 때, 다윗은 어찌하든 압살롬을 살려두기를 원했지만, 요압은 후에 일어날 복잡한 일을 피하기 위하여, 주저함 없이 압살롬을 제거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아마사입니다. 요압은 아마사가 자기를 대신하여 군대 대장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더욱이 반역하였던 자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칼을 들었습니다. 

요압은 드러나게 다윗을 대적하고 반역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윗의 마음처럼, 완전히 다윗에게 순종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많은 경우,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고,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섬기는 것 같은 모습을 가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나 자신을 위하여,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해 버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느 순간 내가 나 자신을 위하면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는 순종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 생명까지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의심하지 않으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하나님 앞에 그러한 순종의 사람으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순종할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주제로 사무엘기하 20장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가운데서 네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다윗은 왕좌를 회복하게 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지만, 그 뜻을 육신의 방법대로 이루다가 또 다른 반역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마땅히 백성들 앞에서 순종의 본을 보여야했지만, 그렇지 못했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불순종과 반역이라는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하는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모든 시간과 방법과 과정까지도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세바는 옳고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다윗 왕에게 반역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육신에게 옳은 판단과 정당성이 주어질 때 매우 강력해 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는 것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세 번째 아마사는 왕의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고, 게으르고 나태한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의 순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이 아니었고 거역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덧붙여서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고는 순종하였다고 주장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순도 100%의 온전한 순종의 삶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인물이었던 요압은 큰 맥락 가운데서는 다윗 왕에게 순종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판단대로 일들을 결단하고 실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오직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큰 맥락 가운데뿐만 아니라, 모든 결정적이고 세밀한 순간에조차, 주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는 순종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이 너무나 가까운 이 마지막 시대에, 누가 자기를 온전히 부인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비록 아무것도 아니며, 한 없이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 바로 그러한 순종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번 설교에 대한 간략한 덧붙임
사무엘하 19장, 다윗이 왕으로서 예루살렘 성으로 귀환하는 과정의 사건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등장하는데...
한 사건마다 한 번의 설교로 다루자니 그다지 큰 사건들이 아니고, 
또는 그러려면 사무엘하 19장에서만 4번 이상의 설교가 나오게 되고...
그렇다고 무시하고 통과하자니 아쉬운 그런 본문이었습니다. 
결국 많은 일들 속에서도 여전히 한 걸음, 오늘의 믿음의 한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주제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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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7.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5

오늘도 한 걸음을 걷자(삼하 19:14,15)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9장입니다. 사무엘기하 19장 14,15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4 그가 유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같이 돌리매 그들이 왕에게 이 말을 보내어 이르되, 왕과 왕의 모든 신하들은 돌아오소서, 하므로
15 이에 왕이 돌아와서 요르단에 이르매 유다가 왕을 맞으러 가서 왕이 요르단을 건너도록 안내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저는 오늘 “오늘도 한 걸음을 걷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 달리기
사람의 인생은 달리기 경주와도 같습니다. 달리기야 말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종목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달리기를 참 좋아합니다. 달리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우리는 주변 어디서에나 달리기와 관련된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 중에는 “테일즈러너”라고 있는데 바로 달리기 게임입니다. 또 스마트폰에도 “쿠키런”이나 “템플런”이라는 게임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러닝맨”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또 최근에 나온 영화 중에는 미로 속에서 달리는 “메이즈러너”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 역시 인생을 달리기에 빗대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걷는 적이 없어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저희 승연이와 호윤이도 집에서 차분하게 걷기보다는 언제나 그 작은 발로, 호윤이는 짜리몽땅한 다리로 다다다다, 뛰어다닙니다. 우리 대안학교에서도 언제나 초등학생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서도 인생을 달리기 경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9장 24절을 보시겠습니다.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성경은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상을 받도록 달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우리 함께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증인들이 이렇게 큰 구름을 이루며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성경은 우리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이 스타디움의 관중들처럼, 큰 구름을 이루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은퇴한 믿음의 경주자들, 믿음의 승리자들과 영웅들이 우리의 경주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사무엘기하 19장의 말씀은 다윗의 힘겨운 믿음의 경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온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하여, 추방당한 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원했지만, 결국 압살롬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슬퍼할 시간도 없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사무엘기하 19장 14,15절 말씀은 이제 유다의 집이 다시 왕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무엘기하 19장의 말씀은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는 회복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도시 밖으로 나왔던 길이 절망의 발걸음이었다면, 이제 다시 예루살렘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영광과 승리의 귀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의 자리를 회복하였더라, 라고 하면서 간단하게 기록하지 않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아오는 그 발걸음 가운데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의 자리를 회복하여 가는 길 가운데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며, 다윗의 왕좌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다윗의 발걸음은, 오늘 우리가 걷는 믿음의 길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오늘도 한 걸음을 걷자.”라는 말씀의 제목처럼,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 있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 가운데서 주저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힘을 얻기 원합니다. 


** 다윗의 방법

그러면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9-11절을 보시겠습니다. 
9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두루 온 백성이 다투어 이르되, 왕이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셨으나 이제 압살롬으로 인해 이 땅에서 도피하셨도다.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느냐? 하니라.
11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온 이스라엘의 말이 왕에게 이르고 왕의 집에까지 이른 것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왕의 집으로 도로 모셔 오는 일에서 나중이 되려 하느냐?
9절과 10절 말씀은 압살롬의 죽음 이후에 생겨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압살롬이 죽은 시점에서 어찌하여 다윗 왕을 도로 모셔오려고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쉽게 다윗 왕을 다시 왕의 자리로 모셔오기를 어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11절 말씀처럼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하여 유다의 장로들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말이 왕에게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다윗 왕의 지파인 유다 지파가 가만히 있느냐고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친족인 유다 지파를 통하여 왕의 자리로 돌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좋은 방법으로 이루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할지 주님께 여쭈어 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먼저 자기의 방법으로, 자기의 혈육과 인맥을 이용하여 왕의 자리에 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12-14절을 보시겠습니다. 
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서 나중이 되려 하느냐? 하고
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대 대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라, 하니라.
14 그가 유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같이 돌리매 그들이 왕에게 이 말을 보내어 이르되, 왕과 왕의 모든 신하들은 돌아오소서, 하므로
다윗은 자신의 골육, 혈연, 인맥을 이용하여 왕의 자리로 귀환하는 과정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 군대 대장으로 앞장을 섰던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 대장으로 세우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사는 다윗의 누이의 아들이어서, 다윗의 친척이었지만, 명백히 반역자의 무리에 속했던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를 심판하거나 처벌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반역자의 무리를 진압하였던 요압 장군을 대신하여 군대의 대장으로 세우겠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주님께 여쭈었다면 온전한 지혜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일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탁을 무시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죽였던 요압 장군을 밀어내고, 오히려 반역자의 무리에 가담하였던 아마사를 자신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장군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사를 통하여 유다의 온 집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아마사가 유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같이 돌려서 다윗 왕을 모셔오고자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방법이 통하였고, 다윗의 지혜대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두려운 사실은, 때로 우리가 육신의 방법으로 일을 진행할지라도, 예상대로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이 잘 된다는 것이 꼭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이 아님을 우리가 보기 원합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41-43절을 보시겠습니다. 
41 보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어찌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왕을 도둑질하고 왕과 왕의 집안과 왕과 함께한 다윗의 모든 사람들을 데려다가 요르단을 건너게 하였나이까? 하매
42 유다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답하되, 왕이 우리의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너희가 어찌 이 일로 인해 분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경비에서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슨 선물을 주셨느냐? 하니
43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해 열 몫을 가졌으므로 다윗에 대해 너희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멸시하고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서 우리의 권고를 먼저 받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유다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다윗의 좋은 방법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은혜와 평강이 흐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조급함과 육신의 방법에는 시기와 분열과 다툼이 열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유다 지파는 자신들이 왕의 가까운 친족인 것을 교만으로 삼았고,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은 시기와 질투 가운데 우리가 열 몫이나 더 가졌고, 더 큰 권리를 가졌다고 싸웠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의 자리에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윗은 그 뜻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다리지 못했고, 자신의 방법대로 진행하였으며, 결국 형제들 가운데 자신의 친족과 친족이 아닌 다른 형제들을 나누며 분열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0장 9,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건강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에게 입을 맞추려 하였으나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던 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므로 이에 그가 칼로 그의 다섯 번째 갈빗대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흘러 나와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그가 죽으니라. 이처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추격하였더라.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새롭게 세운 군대 대장 아마사가 요압 장군에 의해 암살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압과 아마사는 함께 다윗의 편으로서 반역자 세바를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 과정에서 아마사를 쳐서, 마치 그가 세바와의 전투 중에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요압과 아마사의 문제를 주님께 물어, 주님 뜻대로 처분하였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급함으로 인해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길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일들을 주님께 묻고, 오직 주님 뜻대로 걷기를 원합니다. 


** 시므이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16-20절을 보시겠습니다. 
16 바후림에서 나온 베냐민 족속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하고 사울의 집의 종 시바도 자기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과 함께 요르단을 지나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 왕의 집안사람들을 건너가게 하며 또 왕이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게 하려고 나룻배가 건너가니라. 왕이 요르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 왕께 이르되, 내 주께서는 불법을 내게로 돌리지 마옵소서. 또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왕의 종이 그릇되게 행한 것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내가 죄를 지은 줄을 왕의 종이 아나이다. 그러므로, 보소서, 이 날 요셉의 온 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와서 내려가 내 주 왕을 맞이하나이다, 하였으나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저주하던 베냐민 족속 시므이가 다윗 왕 앞에 엎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조롱하던 자들도, 결국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무릎이 꿇려질 것이고, 모든 혀가 주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오늘도 우리가 믿음의 한 걸음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사람의 길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주님께서 모든 원수들과도 화목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시므이의 비방과 저주를 듣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시간에, 시므이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고, 다윗 왕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담담히 주님의 뜻만을 구하며,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있는 시므이들과, 결국 화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응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이 일로 인해 그가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매
22 다윗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이 날 나의 대적이 되려 하느냐? 이 날 이스라엘 안에서 사람을 죽여야 하겠느냐? 내가 이 날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느냐? 하고
23 그런 까닭에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여기서 아비새는 우리들 안에 있는 옳고 그름의 기준과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시므이는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아비새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습니다. 아비새는 다윗 왕을 위하는 좋은 의도로, 충성심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윗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17절 말씀에 보시면 시므이와 함께 베냐민 사람 천 명이 나아왔습니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반역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워지고, 또 흩어졌던 백성들의 마음을 평화 가운데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므이를 처단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므이 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서, 온 베냐민 지파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므이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우리는 정의롭고 올바르고 정당한 사람의 뜻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교회를 위하고, 때로는 형제자매들을 걱정해서 하는 좋은 말조차 상처를 줄 수 있고, 무너뜨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의롭고 정당한 육신은 어느 정도까지 성령의 인도하심과 일치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뜻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서 주님과 동행하고, 오늘도 믿음의 한 걸음을 걸으며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 므비보셋

이제 우리 함께 므비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보시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24-30절을 보시겠습니다. 
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다시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치장하지 아니하고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5 그가 예루살렘에서 나아와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매
26 그가 대답하되, 오 내 주 왕이여, 주의 종은 발을 절므로 말하기를, 내가 나를 위해 나귀에 안장을 얹어 그 위에 타고 왕에게 가리라, 하였는데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주의 종을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그러나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천사 같으시온즉 왕의 눈에 좋은 대로 하옵소서.
28 내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은 내 주 왕 앞에서 단지 죽은 자나 다름없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께서 왕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들 가운데 두셨사온즉 내게 오히려 무슨 권리가 있어서 더 이상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매
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기를, 너와 시바는 땅을 나누라, 하였느니라, 하매
30 므비보셋이 왕에게 이르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자신의 집에 돌아오시게 되었사오니 참으로 그가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시므이에게는 긍휼을 베풀었지만, 므비보셋에게는 냉정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오해와 모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다윗은 끝내 일을 공정하게 풀어내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 만큼은 자기와 함께하면서 마음으로나마 위로를 얻기를 기대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을 향한 그러한 다윗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므비보셋의 종을 통하여 그가 왕을 모독하고, 사울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자 한다는 모함을 듣고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모함 때문에 닫혀버린 다윗의 마음은 므비보셋 본인의 직접적인 해명을 듣고서도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므비보셋의 태도와 자세는 오히려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죽은 자와 다름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권리도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 왕이 그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이 감사하며, 자기 종과 땅을 나눌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 주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에는 오해도 있고, 때로는 모함도 있고, 사실이 아닌 소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일도 있고, 끝내 오해가 풀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의 걸음을 멈추지 말고, 오늘도 한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믿음의 전진을 결코 멈추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번에 많이 달려 나가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한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 바르실래와 김함

이제 우리 마지막으로 바르실래와 김함의 이야기를 보시겠습니다. 사무엘기하 19장 32,33절을 보시겠습니다. 
32 이제 바르실래는 매우 늙은 사람으로 팔십 세더라. 그가 매우 창대한 사람이었으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거할 때에 왕에게 양식을 제공하였더라.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먹이리라, 하니
다윗 왕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길에서, 자신이 피난 중에 있을 때 호의를 베풀었던 바르실래를 초청하였습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에 새로운 거처를 주겠다고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37,38절을 보시겠습니다. 
37 청하건대 주의 종을 돌려보내시옵소서. 내가 내 도시에서 죽어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히려 하나이다. 그러나 주의 종 김함을 보소서.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소서, 하매
38 왕이 응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네게 좋게 보이는 것을 내가 그에게 행하겠고 또 네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를 위하여 행하리라, 하니라.
바르실래는 팔십 세인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김함을 왕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은 바르실래에게 베풀고자 하였던 보상과 호의를 바르실래의 아들인 김함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우리가 찾지는 않겠지만 예레미야 41장 17절에서는 김함의 거처가 베들레헴 곁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은 다윗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왕의 도시 베들레헴 곁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의 섬김과 헌신이 아들에게 보상되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르실래가 계산적으로 자신의 아들 김함을 다윗 왕에게 추천하기 위해서, 다윗 왕을 도왔던 것은 아닙니다. 바르실래는 정말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위기의 상황에서, 거의 목숨을 걸고 다윗 왕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바르실래의 섬김이 그의 아들인 김함에게 보상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부모님들이 오늘도 한 걸음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부모님의 섬김과 헌신이 자녀의 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19장에 나타난 다윗의 예루살렘 귀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길은 승리 후에 돌아가는 영광스러운 회복의 길이었지만, 그 과정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다윗 왕이 조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백성들이 왕과의 친족 관계를 주장하고, 서로의 권리를 외치며, 다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 왕을 모독하였던 시므이가 용서를 빌었고, 다윗 왕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옆에서는 아비새가 다윗 왕을 위하여 나서서 정의의 심판을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맞이하러 나왔지만, 오해가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귀환하는 길에서 바르실래를 초청하였으나, 바르실래가 자신의 아들을 의탁하면서, 그 아들에게 복이 이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리고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가운데, 모두가 각자의 인생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조급함도 있고, 육신의 방법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시기와 질투도 있고, 권리에 대한 다툼도 있습니다. 아비새와 같은 정당성도 있고, 나의 옳고 그름도 있습니다. 므비보셋과 같은 오해와 모함도 있습니다. 또 바르실래와 같은 헌신과 섬김도 있고, 김함에게 임하였던 것 같은 은혜와 보상도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승리의 길에서든, 영광스러운 회복의 길에서든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때로 넘어지고 실수한다 할지라도, 때로 다툼이 일어나고, 오해가 생겨나고, 나의 마음대로 일들이 진행되지 않아 좌절되고 낙담이 된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뛰어난 믿음의 영웅들처럼 단 번에 성큼성큼 달려 나가지 못한다할지라도, 오늘의 한 걸음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 나가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오늘도 한 걸음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4.12.17.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4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삼하 17: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7장입니다사무엘기하 17장 14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이르되아렉 사람 후새의 조언이 아히도벨의 조언보다 낫다하니 이는 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께서 아히도벨의 좋은 조언을 꺾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더라.

저는 오늘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은 다르다.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인공자는 논어 위정편을 기록하면서자신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뜻을 세웠다고 말했습니다여기서 뜻을 세웠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나 진로에 대한 확고한 결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이렇게 중대한 문제들에 대하여서는 공자처럼, 30세 정도가 되어서 뜻이 정해질는지 모르지만사실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제 겨우 태어난 지 1년 4개월밖에 안된저의 둘째아들인 호윤이도 벌써 자기의 분명한 뜻을 가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고좋다 싫다자기의 분명한 뜻과 의사를 표현하고고집도 피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호윤이의 뜻대로 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호윤이는 할아버지할머니또는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밖에 나가자고 잡아끌면서 떼를 쓸 때가 많지만요즘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전기콘센트를 만지려고 할 때에도 안 된다는 말을 듣고장난감을 입에 넣을 때도 안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물놀이를 하면서 목욕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데, 30분 정도가 지나면아무리 울어도 밖에 나와서 물기를 닦고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밤에는 잠을 자기 싫어서 버티지만자야만 합니다이처럼 아직 어린 아기에 불과하지만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호윤이 같은 어린 아이들만이 아니라모든 사람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우리는 대단한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단지 조금 더 건강하기를 원하고조금 더 여유롭고 풍부한 삶을 살기 원하고조금 더 안락하고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모든 것이 순탄하기를 바라고우리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학생들은 공부가 잘되기를 바라고조금 더 높은 성적이 나오기를 바랍니다키가 더 크기를 바라고외모가 더 아름답고 멋있어 지기를 바랍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우리의 뜻대로 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사무엘기하 17장부터 19장의 이야기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이 가운데 자신의 뜻을 이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스스로 가서 다윗 왕을 칠 뜻을 세웠지만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압살롬은 반역에 성공하여 스스로 왕이 될 뜻을 세웠지만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다윗 왕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결코 죽이지 않고 살려내야 한다는 뜻을 가졌지만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요압 장군은 다윗 왕에게 승리를 안겨 왕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기를 원했고압살롬을 제거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더욱 안전하게 보장받으려 하였지만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너무나 안타깝게도 자기 뜻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함께 잠시이사야서 55장 8,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피를 흘려주시고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믿습니다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자신보다우리에 대하여 더 잘 아신다고 믿습니다우리를 사랑하시며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선하시며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 가운데 어려움을 겪습니다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호윤이의 뜻이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뜻과 다른 것처럼오늘 우리들의 생각과 길과 뜻이 하나님과 너무나 다릅니다하늘과 땅 치아로 다릅니다하나님께서 가장 필요해서 주신 것인데우리는 가장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여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없어야 해서 가져가셨는데,우리는 꼭 필요한 것을 가져가셨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뜻과 생각을 내려놓고나를 가장 사랑하시며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합니다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설교의 제목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좀처럼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이 척박한 인생의 길에서우리는 과연 무엇을 따라야 할지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그리고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길만이 행복하고가치 있으며영광스러운 길이라는 것을 되새겨보기를 원합니다.

 

 

** 아히도벨

그러면 먼저 우리 함께 아히도벨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겠습니다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로서자신의 사랑하는 손녀에게 비극적인 일을 일으켰던 다윗 왕에게 복수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다윗 왕을 처단하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7장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이제 내가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이 밤에 내가 일어나 다윗을 추격하며

그가 피곤하고 손이 약할 때에 그를 습격하여 그를 무섭게 하리니 그리하면 그와 함께 있는 온 백성이 도망하리이다내가 다윗 왕만 치고

온 백성을 왕에게 다시 데려오리니 왕이 찾는 그 사람을 붙잡으면 모두가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니이다그리하면 온 백성이 평안하리이다하매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그 말을 매우 기쁘게 여기더라.

여기서 아히도벨은 뛰어난 지략가답게압살롬의 반역을 가장 빠르고 쉽게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였습니다오늘 다윗 왕이 예루살렘 성에서 나갔으니아직 어수선하고 경황이 없을 때에그들이 전투 준비를 갖추기 전에,전열을 가다듬고 어디론가 숨어 들어가기 전에빠르게 가서 다윗 왕만을 치고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압살롬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그 말을 매우 기쁘게 여겼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6-8절을 보시겠습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오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아히도벨이 이런 식으로 말하였는데 우리가 그의 말대로 행하랴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하매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아히도벨이 베푼 조언이 이때에는 좋지 아니하니이다하고

또 이르되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사람들은 용사들이니이다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자기 새끼들을 빼앗긴 것 같이 마음속으로 화가 나 있고 왕의 아버지는 전사인즉 백성과 함께 머물지 아니하리이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조언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다윗은 베테랑 전사이며 도망의 전문가인즉결코 백성들과 함께 머무르지 아니하고따로 떨어져있을 것이므로아무리 특공대가 빠르게 가더라도다윗 왕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또한 아히도벨이 제시한 만 명의 특공대로는 뛰어난 용사들인 다윗의 신하들을 이길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11절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조언하노니 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을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왕에게로 총체적으로 모으고 왕께서 친히 싸우러 가소서.

후새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전국적으로 온 이스라엘을 모아 총력전을 벌여야 한다고 조언하였습니다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은 군사를 모아서 12절에 사용된 표현처럼마치 이슬이 땅에 내리는 것같이 습격하고 내려 앉아 다윗의 모든 군사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조언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이르되아렉 사람 후새의 조언이 아히도벨의 조언보다 낫다하니 이는 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께서 아히도벨의 좋은 조언을 꺾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더라.

두 사람 아히도벨과 후새의 조언이 있었는데성경은 아히도벨의 조언이좋은 조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고 심판하시는 것이었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히도벨의 좋은 조언을 꺾기로 작정하셨습니다그러므로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후새의 조언이 더 좋다고 판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아히도벨의 조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에서 여쭙는 것과 같이 뛰어난 지혜를 자랑하였지만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외면을 당하고꺾이고 말았습니다얼마나 지혜롭고 좋은 계획인가에 상관없이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반드시 꺾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히도벨이 그들이 자기의 조언을 따르지 아니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얹고 일어나 자기 도시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안을 정리한 뒤 스스로 목매어 죽고 자기 아버지의 돌무덤에 묻히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히도벨의 비참한 최후를 볼 수가 있습니다그는 자신의 조언이 거절된 것을 보고전쟁에서 질 것을 확신하였으며자신의 뜻이 이루어질 수가 없음을 보았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습니다마치 예수님을 배반하였던 가룟 유다가 그러했던 것처럼다윗의 배반하였던 아히도벨도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어리석고 비참한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계획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며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 압살롬

이제 우리 함께 압살롬의 이야기를 보시겠습니다압살롬은 후새의 조언대로 온 이스라엘을 모았고기세등등하게 요르단을 건너 다윗 왕을 추격하며 전쟁 길에 올랐습니다우리 함께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때에 다윗 마하나임에 이르렀고 압살롬은 자기와 함께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요르단을 건너니라.

이제 또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8장 6-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처럼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숲에서 싸우더라.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신하들 앞에서 죽임을 당하매 그 날 그곳에서 큰 살육이 있어 이만 명이 죽었더라.

거기서 온 지역의 지면 위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날 숲에서 멸망당한 자가 칼로 멸망당한 자보다 더 많았더라.

전쟁의 결과는 아히도벨이 예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압살롬의 신하들은 다윗의 신하들을 당해내지 못하였습니다또한 우리는 8절에서 매우 흥미로운 말씀을 볼 수가 있는데그것은 바로 숲에서 멸망당한 자가 칼로 멸망당한 자보다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숲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다윗의 신하들이 칼로 쓰러뜨린 자보다,숲에서 쓰러진 자가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야생짐승들이 공격을 하였는지늪지대에 빠지게 되었는지산사태가 일어나 바위들이 무너져 내렸는지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초자연적인 어떠한 현상에 의해서 많은 압살롬의 군사들이 숲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9절을 보시겠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신하들과 마주치니라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의 무성한 가지들 밑으로 지나갈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하늘과 땅 사이에 들리고 그 밑에 있던 노새는 가버렸으므로

압살롬 또한 숲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마치 상수리나무가 압살롬의 머리를 잡아챈 것처럼그의 머리가 나무에 걸려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우리 함께 14-15절도 보시겠습니다.

14 그때에 요압이 이르되내가 이처럼 너와 함께 늑장을 부릴 수 없다하고 손에 작은 창 세 개를 가지고 가서 압살롬이 아직 상수리나무 한가운데서 살아 있을 때에 그것들로 그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병기를 나르던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서 그를 죽이니라.

압살롬의 뜻은 반역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나서 멋진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그는 그것을 위해 수년 간모든 것을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준비해 왔습니다객관적인 전력으로 보자면압살롬이 월등히 앞섰는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고 이루어졌습니다압살롬은 결국 아히도벨처럼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한 채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준비와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며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 다윗

이제 다윗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시겠습니다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8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다윗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의 수를 세고 천인 대장들과 백인 대장들을 그들 위에 세우며

백성의 삼분의 일은 요압의 손 밑에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손 밑에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손 밑에 주어 내보내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나도 반드시 직접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하였으나

백성이 응답하되왕은 나가지 마소서만일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이 우리를 상관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를 상관하지 아니하리이다그러나 이제 왕은 우리 만 명과 다름없사오니 그러므로 이제 왕께서 도시에서 나와 우리를 구조하시는 것이 더 나으니이다하매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너희가 가장 선하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하고 문 옆쪽에 서니 온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나갔더라.

왕이 요압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나를 위해 청년 곧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하매 왕이 압살롬에 관하여 모든 대장에게 명을 내릴 때에 온 백성이 들으니라.

다윗 왕은 군사들을 세 무리로 나누어 전쟁의 전문가들인 요압과 아비새에게그리고 새롭게 장군이 된 가드 사람 잇대에게 배치하여 주었습니다그리고 다윗은 5절의 말씀에서 나를 위해 청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하나님께서는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고 작정하신 가운데다윗은 압살롬을 살려두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고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살롬은 요압 장군에 의해서 무참히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다윗의 뜻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는 것이었지만하나님의 뜻은 그를 심판하시는 것이었습니다그의 교만과 반역과 속임수와 살인과 왕의 첩들에 대한 음행과 오랜 시간 동안 주어진 돌이킴의 기회를 멸시한 죄에 대한 맹렬한 심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8장 3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크게 격동하여 문 너머에 있던 방으로 올라가서 우니라그가 올라갈 때에 이같이 말하기를오 내 아들 압살롬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오 압살롬내 아들아내 아들아하였더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좋은 아버지에게그 아들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가를 볼 수가 있으며최악의 상태에 있는 아들을그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아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애통하는 아버지 다윗의 모습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압살롬을 사랑하였더라면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심판하시기 전에아버지로서 마땅히 징계하고 가르쳤어야 할 것입니다이제 이미 때는 늦어버렸습니다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졌고심판은 집행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떤 이가 요압에게 고하되보소서왕이 압살롬으로 인하여 슬피 울며 애곡하시나이다하니

왕이 자기 아들로 인하여 근심한다 함을 그 날에 백성이 들었으므로 그 날의 승리가 온 백성에게 애곡하는 일이 되었더라.

그 날에 백성이 싸움에서 도망칠 때에 부끄러워하며 몰래 떠나는 것 같이 슬그머니 도시로 들어가니라.

그러나 왕이 얼굴을 덮고 큰 소리로 외치되오 내 아들 압살롬오 압살롬내 아들아내 아들아하매

슬픈 일에 대하여 슬퍼하는 마음이 드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감정의 지배를 받는 상태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기쁨이나슬픔이나우리의 모든 감정에 십자가가 적용되어야 합니다우리가 모든 감정을 제거하여 마치 로봇처럼 될 수는 없지만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오직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감정으로 살지 말고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아버지로서 당연히 애통한 마음이 들었겠지만하나님의 사람으로서그리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서마땅히 자신을 위하여 치열한 전투에서 싸웠고또 승리하여 돌아오는 군사들을 기쁨과 영광으로 맞이하고 환영했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승리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있는 그대로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크게 외치면서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불렀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5-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요압이 집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러 아뢰되왕께서 이 날 왕의 생명과 왕의 아들딸들의 생명과 왕의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왕의 모든 신하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셨사오니

왕께서 왕의 원수들은 사랑하시나 왕의 친구들은 미워하시며 통치자들과 신하들을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시는 것을 이 날 밝히 드러내셨나이다이 날 내가 깨달은즉 만일 압살롬이 살고 이 날 우리가 다 죽었더라면 왕이 기뻐하셨으리이다.

그러므로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하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옵소서내가 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께서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이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하리이다그리하면 그것이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한 모든 화보다 왕에게 더 나쁘리이다하니

이에 왕이 일어나서 성문에 앉으매 그들이 온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되보라왕이 성문에 앉아 계신다하니 온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이스라엘은 이미 각각 자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여기에서 요압은 압살롬을 죽인 자로서다윗의 슬픔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자이지만오히려 다윗 왕 앞에서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요압은 자기 자신의 앞길을 위하여 압살롬을 죽였을 수도 있고아니면 그를 살려두었을 때아마도 또 다시 힘을 모아 다윗 왕에게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에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압살롬은 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자기 목숨을 걸고 치열한 전쟁터에서 싸웠고승리를 가져온 왕의 장군이자 신하였습니다비록 그가 다윗 왕의 마음을 세심하게 헤아리고 배려하지는 않았지만자기 판단대로 압살롬을 가차 없이 제거하였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그는 다윗 왕을 위하는 위치에서다윗 왕의 편에서 싸운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아니하고자기 뜻만을 내세웠을 때이중삼중으로 어려움이 임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요압은 다윗에게 신하로서의 직언을 넘어서서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로지금 다윗 왕이 슬퍼할 때가 아니라왕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며승리하여 돌아온 군사들을 환영하고 격려해야 할 때라고 호통을 쳤습니다결국 다윗 왕은 요압의 말대로슬픔을 뒤로 하고 백성들 앞에 나아가 그들을 환영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고 선하다 할지라도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며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 요압

이제 마지막으로 요압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시겠습니다요압은 다윗의 젊은 시절부터 함께하면서 다윗을 위해 싸워온 충성된 장군이었습니다다윗의 누이의 아들로서다윗의 조카로서언제나 다윗을 위하여 싸웠습니다.암몬 자손과 싸울 때에는 위기의 상황에서 믿음을 발휘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고암몬의 도시 랍바를 점령하고자 할 때에는거의 모든 것을 무너뜨려놓고스스로 승리의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고자속히 다윗 왕을 소환하여다윗이 승리의 선봉이 되도록 이끌었습니다헷 족속 우리야를 죽이는 일에서도 한마디라도 토를 달거나이유를 묻거나따지지 않았고그대로 복종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의 복수를 하기 위해다윗에게 투항한 이스라엘의 좋은 장군이었던 아브넬을 암살하였을지라도또 다윗 왕의 부탁을 거절하고 압살롬을 쓰러뜨렸다 할지라도그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장군으로서,언제나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그는 다만 다윗 왕에게 인정을 받는 좋은 장군이요신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말하기를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대 대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바라노라하라하니라.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압을 대신한 다른 군대 대장을 세우고자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그의 이름은 바로 아마사였습니다아마사는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압살롬의 군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던 자입니다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7장 25절을 보시겠습니다.

압살롬이 요압 대신 아마사를 군대 대장으로 삼았는데 이 아마사는 이드라라는 이름의 이스라엘 사람의 아들이더라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가일에게로 들어갔는데 아비가일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압살롬이 임명하였던 군대 대장 아마사는요압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누이의 아들이었습니다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이었고아마사는 다윗의 누이이며스루야의 동생인 아비가일의 아들이었습니다전쟁 경험으로 보나전투 수행 능력으로 보나그 동안 쌓아온 공로를 보나요압이 아마사보다 월등히 나았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윗은 반역자의 무리에 가담했던 아마사를 요압 대신 장군으로 세우고자 하였던 것입니다그 이유는 그가 아브넬을 죽였고또 압살롬을 죽임으로써결정적인 순간에 다윗 왕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요압의 입장에서는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다윗 왕을 위해 그 동안 열심히 싸운 결과 외면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단지 왕의 가장 좋은 신하로 인정을 받고자 하였던그의 뜻은 꺾여지고 말았습니다사람의 능력이나 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세워지며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 마무리

오늘 우리는 총 네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아히도벨과 압살롬과 다윗과 요압이었습니다그들은 각각 자기의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한 사람도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그들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였더라면그들의 뜻을 이룰 수 있었겠지만하나님과 다른 뜻을 가졌기에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사람의 지혜와 계획이 아무리 좋아도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국 꺾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압살롬은 사람의 외모가 아무리 뛰어나고준비가 철저하여도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국 꺾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이 아무리 간절하고누구나 공감할 만한 마음을 가질지라도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국 꺾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압은 사람의 공로와 업적이 아무리 뛰어나도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국 꺾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잠언 19장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오직 의 뜻그것만이 서리라.

아멘다른 모든 것은 무너지고오직 주의 뜻그것만이 서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아무것도 계획할 필요가 없다거나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오히려 우리가 주의 뜻에 맞게 계획하고주의 뜻에 맞게 순종하며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있습니다우리가 아무리 좋은 계획과 철저한 준비와 누구나 공감할 만한 마음과 그 동안 쌓아온 좋은 과거의 업적을 가졌을지라도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순종하는 길로 걷기를 원합니다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주님의 길이 나의 길이 되어서우리가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서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자로서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복주시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4.12.14.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3

고난은 마음 속 진실을 드러낸다(삼하 16:10-12)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6장입니다사무엘기하 16장 10-12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0 왕이 이르되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께서 그에게다윗을 저주하라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그런즉 누가 이르기를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하겠느냐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보라내 배 속에서 난 내 아들이 내 생명을 찾거늘 이제 이베냐민 족속은 얼마나 더 그리하랴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12 혹시 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하니라.

저는 오늘 고난은 마음 속 진실을 드러낸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모든 사람이 고난을 받는다

오늘 우리는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고생명을 건지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고 있는 신세입니다그 와중에 사울의 집에 속하였던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다윗을 따라오면서 흙먼지를 뿌리고저주를 퍼붓는 수모까지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선한 사람악한 사람의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고난을 주십니다그 고난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것이든죄와 상관없이 우리의 믿음의 단련이나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 것이든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고난을 주십니다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우리 함께 시편 119편 6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길을 잃었사오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고 있나이다.

 

시편의 기록자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길을 잃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제 고난을 통과한 후에는 길을 찾았으며주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이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며세상의 무겁고 복잡한 것들을 가볍게 만들어 주며우리의 마음이 진실하게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방향과 목표는 물질적 번영이나외적인 행복이 아니라고난을 통한 성숙이며영원한 왕국을 위한 준비입니다.

때로 우리는 파라오 왕과 같이 극심한 고난 중에 더욱 힘을 내어 주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책망의 목적은 바로잡는 것인데바로잡히기를 거절하고 더욱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같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따라 고난의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어떤 사람은 고난으로 인해서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될 것이고또 어떤 사람은 그 고난으로 인해서 주님을 더욱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고난은 마음 속 진실을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면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단련의 과정입니다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하면우리가 붙잡고 있는 주님 외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며주님만 붙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또 우리가 고집하던 생각들을 내려놓고주님의 말씀에만 온전히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또 우리가 고난을 통하여 성숙할 때믿음이 자라나며장차 주님의 왕국에서 더 큰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하면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우리 자신에게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고난은 마음 속 진실을 드러내며무엇을 버려야할지무엇을 갖춰야할지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자녀 교육의 목표를 자녀의 행복으로 잡는 부모님들이 많이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어찌 보면 그다지 성경적인 교육 방향이 아닙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향과 같이자녀의 행복이 아니라자녀의 성숙을 교육 목표로 잡아야 합니다자녀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질 때고난이 오고자녀가 행복하지 못한 모습을 볼 때마냥 함께 속상해 하거나분노할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다루시는 손을 발견하고자녀가 성숙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책망하고격려하고이끌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보다오히려 자신의 자녀에게 더 많은 고난을 주십니다야곱의 열 한 아들보다유독 요셉에게 더 극심한 고난을 주셨고욥의 친구들이 아니라 욥에게 더 견디기 힘든 고난을 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사랑하고 아끼는 자녀일수록더욱 성숙하게 단련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시고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믿음의 불같은 시련은 어떤 이상한 일이 아니라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에게나 오는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면감사하기 원합니다비록 고난 자체는 기쁘지 아니하지만그래도 감사하기 원합니다.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나를 성숙케 하시며나에게 반드시 가르쳐주실 것이 있으시기에가장 완벽하게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음을 믿으면서감사하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고난 중에 함께했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다윗에게 있었던 고난이 다윗 자신뿐만 아니라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 진실을 밝히 드러낸 것을 살펴볼 것입니다또한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과 동행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 다윗에게 임한 고난의 목적

그러면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13,14절을 보시겠습니다.

13 사자가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을 따르나이다하므로

14 다윗이 자기와 함께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신하에게 이르되일어나 우리가 도망하자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빨리 떠나가자그가 갑자기 우리를 따라잡고 우리에게 해를 가져오며 칼날로 도시를 칠까 염려하노라하니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다윗을 볼 수가 있습니다.이 상황은 다윗이 젊은 시절에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다녔던 것보다훨씬 더 어려운 고난이었습니다그때는 신체적으로도 훨씬 더 젊고 건강했으며위치적으로도 왕에게 쫓기는 신하의 모습이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훨씬 더 나이가 들었으며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져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무엇보다 자신의 아들에게 쫓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이러한 고난이 임한 이유는 바로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그가 간음하며 살인했기 때문이고또한 자신의 자녀들 사이에서 일어난 간음과 살인의 문제를 정의롭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러나 이제 이러한 고난은 다윗의 마음 속 진실이 어떠한가를 드러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뿐만 아니라 다윗의 주변에 있던 많은 신하들과 동료들이 다윗을 향해 어떠한 마음을 가졌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고난은 마음 속 진실을 드러냅니다.

 

 

** 잇대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18-23절을 보시겠습니다.

18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옆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족속과 모든 블렛 족속과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육백 명의가드 사람들이 왕 앞으로 지나가니라.

19 그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너는 타국인이요추방당한 자니 네 처소로 돌아가서 왕과 함께 머무르라.

20 너는 단지 어제 왔거늘 어찌 내가 이 날 너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올라가고 내려가게 하리요내가 정처 없이 가나니 그러므로 돌아가고 또 네 형제들도 데려가라긍휼과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하매

21 잇대가 왕에게 응답하여 이르되께서 살아 계심과 또 내 주 왕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참으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죽으나 사나 왕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하매

22 다윗 잇대에게 이르되가서 건너가라하니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사람들과 그와 함께한 어린것들이 다 건너가니라.

23 온 땅이 큰 소리로 울며 온 백성이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고 온 백성이 건너서 광야 길로 향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잇대를 볼 수가 있습니다그는 육백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다윗 왕의 피난길에 합류하였습니다그는 가드 사람으로 타국인이었으며이방인이었습니다또한 그는 19절에서추방자라고 불리고 있는데이것은 그가 다윗을 따랐다는 이유로 가드 땅에서바로 자신의 고향 땅에서 추방당하였음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또한 20절에서다윗이 단지 어제라고 표현한 것처럼잇대는 다윗과 아주 오랜 친분을 가진 신하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정처 없이 가므로고생길이 훤하고또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으니형제들을 데리고 새로운 왕인 압살롬에게 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리고 긍휼과 진리로 잇대를 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잇대는 주께서 살아계심과 다윗의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면서죽으나사나 언제 어디나 왕과 함께 있겠다고 말하면서단호한 충성을 보여주었습니다그러자 다윗은 잇대를 허락하고 그와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 길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난 중에 나타난두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먼저 다윗의 마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지금 다윗으로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압살롬의 추격을 받게 되거나전투가 벌어질 경우자신을 경호해 줄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자신을 따라 나서는 잇대를 위하고 있습니다그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먼저 생각하고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잇대가 자신을 떠나 압살롬과 함께한다 할지라도긍휼과 진리로 축복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은 처음에 주님만 붙들었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사울 왕에게 쫓기던 바로 그 시절,주님만 온전히 바라던 그 때의 그 믿음으로 회복하고 있는 것입니다고난은 다윗의 마음 속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었습니다고난은 다윗 안에서 그 동안 잠들어 있던 믿음을 다시 불러 일으켰습니다고난은 다윗 안에서 꺼져가던 믿음의 불꽃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잇대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그는 이방인이었고다윗 왕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그는 어차피 자기 민족을 한 번 버린 경험이 있으며고향 땅인 가드에서도 추방당한 자였고이제 예루살렘 도성이 그의 새로운 고향이었습니다그가 계산적으로 생각했다면다윗을 한 번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오히려 압살롬에게 가담하고자신의 새로운 고향인 예루살렘 도성에 머무는 편이 훨씬 더 안정된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심지어 다윗 왕이 축복하면서까지 돌아가라고 말했을 때못이기는 척 하면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선택하였습니다죽으나사나다윗을 따르겠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다윗은 피할 길도 없이 고난을 당한다고 하나잇대는 고난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기꺼이 다윗과 함께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23절 말씀에서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이 장면은 마치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을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우리 함께 요한복음 18장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시고 자기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셔서 자기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있던 동산으로 들어가시니라.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시던 바로 그 날에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마치 다윗 왕이 자신의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여 기드론 시내를 건넌 것처럼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넜던 다윗처럼또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셨던 예수님처럼오늘날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멸시와 천대를 당하십니다오늘 우리는 어쩌면 잇대처럼 선택적으로 고난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오늘 우리가 다윗을 따랐던 잇대와 같이 죽으나사나 주님과 동행하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를 위해 살고 죽어도 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의 것이로다.

바로 이 로마서 14장 7절 말씀처럼그리고 잇대의 고백처럼죽으나사나 주님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 사독과 아비아달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24-29절을 보시겠습니다.

24 보라또한 사독과 그와 함께하며 하나님의 언약 궤를 멘 모든 레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았더라아비아달이 올라오고 마침내 온 백성이 도시에서 나와 지나가더라.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하나님의 궤를 도시로 도로 가지고 가라만일 내가 의 눈에 호의를 입으면 그분께서 다시 나를 데려오사 내게 그 궤와 자신의 처소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분께서 이같이 이르시되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하시면보라내가 여기 있으니 그분께서 보시기에 선한 대로 내게 행하실지로다.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네가 선견자가 아니냐너희와 함께한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도시로 돌아가라.

28 보라너희로부터 내게 알리는 말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의 평야에서 머무르리라하니

29 그러므로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거기에 머무니라.

가드 사람 잇대에 이어서두 번째로 다윗을 따라나선 사람들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멘 레위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따라나섰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급한 마음에 하나님의 궤를 차지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징이었기 때문에다윗은 더욱 절박한 심정으로 그것을 붙들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다윗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자신의 아들이 성전을 짓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 또한 기억하였을 것입니다다윗은주님께서 나에게 호의를 베푸신다면내가 돌아와서 하나님의 궤를 다시 볼 수가 있을 것이고주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면주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날 처분하실 터이니하나님의 궤를 가지고가지 않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자기에 대한 자기 뜻이 하나도 없었고주의 뜻만 있었습니다.

 

사독은 자신의 아들 아히마아스를아비아달은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을 데리고하나님의 궤를 도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의 광야에 머무는 다윗에게 소식을 전달할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이제 우리 함께 30,31절을 보시겠습니다.

30 다윗이 올리벳 산의 오르막길로 올라갈 때에 올라가면서 울고 머리를 덮고 맨발로 가며 그와 함께한 온 백성도 각각 자기 머리를 덮고 올라가되 울며 올라가니라.

31 어떤 이가 다윗에게 고하여 이르되압살롬과 함께한 음모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하니 다윗이 이르되,오 원하건대 아히도벨의 조언이 어리석음이 되게 하옵소서하니라.

이제 다윗은 주님 앞에 철저히 통회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맨발로 올리벳 산을 올랐습니다주님께서 주시는 이 고난의 기간을 부디 잘 통과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올라갔을 것입니다그리고 압살롬과 함께한 아히도벨에 대하여 들었을 때그 또한 주님께 맡겨드렸습니다다윗은 어떠한 상황들에 대해서 일일이 반응하거나 연연하지 않았습니다다만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였고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렸습니다.

 

 

** 후새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32-37절을 보시겠습니다.

32 다윗이 산의 꼭대기 곧 그가 하나님께 경배하던 곳에 이를 때에보라아렉 사람 후새가 자기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오므로

3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짐이 되리라.

34 그러나 네가 만일 도시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이르기를오 왕이여내가 왕의 종이 되리이다지금까지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이제는 또한 왕의 종이 되리이다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조언을 꺾으리라.

35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들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그러므로 네가 왕의 집에서 무슨 일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들에게 그것을 고할지니라.

36 보라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는 너희가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들 편으로 내게 보낼지니라하매

37 이에 다윗의 친구 후새가 도시로 들어가고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여기서 우리는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의 친구인 아렉 사람 후새를 볼 수가 있습니다후새는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나왔습니다그는 어느 편에도 설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지만기꺼이 다윗을 선택하였습니다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과 방식대로 다윗과 함께할 수도 있었으나다윗이 요청하는 그대로 행하여다윗을 위한 스파이 첩자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후새가 어떻게 다윗을 섬겼는가를 생각해보기 원합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고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자기 방법대로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자기가 보기에 옳은 것을 말하고자기가 보기에 옳은 것을 행합니다정말 형제자매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고단지 자기 생각에 올바른 것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아렉 사람 후새는 어떠하였습니까그는 다윗을 위하여 왔고다윗을 위하여 갔으며다윗이 지정한 바로 그 방식대로 다윗을 도왔습니다. “아니나는 다윗 왕과 함께 가겠습니다나도 저 가드 사람 잇대처럼죽으나,사나언제나 당신 옆에서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의 신하이면서친구였고자기 방식이 아닌왕의 방식대로 왕을 섬겼습니다우리가 오늘 주님의 종이며,또한 주님의 친구라면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우리에게는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오늘날 수많은 종류의 하나님의 일이 있는데그 중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나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기게 될 때그것이 진정으로 형제자매들을 위하는 섬김이 될 것이며진정으로 교회를 세우고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섬김이 될 것입니다우리가 주님이 받으시는 그러한 섬김을 하기 원합니다.

 

 

** 시므이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6장 7,8절을 보시겠습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너 피를 흘리는 자여너 벨리알의 사람이여가거라가거라.

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보라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네가 빠졌느니라하니라.

다윗을 따라나선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을 벨리알의 사람이라고 부르면서사탄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저주하고 있는 시므이를 볼 수 있습니다그는 다윗이 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기간 동안에는 평범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다윗 왕을 감히 대적할 엄두도 못 내던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이제 그는 담대하게 다윗 왕을 저주하고 있습니다다윗은 사울의 집을 대적한 적이 없었지만시므이는 잘못된 사실을 가지고 다윗을 비난하였고,일방적으로 저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장군이었던 아비새가 분노에 차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다윗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우리 함께 12절을 보시겠습니다.

혹시 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하니라.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것은 다윗의 눈이 오직 주님께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다윗의 관심은 결코 시끄럽게 떠들며 저주를 퍼붓고 있는 시므이에게로 돌려지지 않았습니다그는 다만 주님께서 내 고통을 보시고주님께서 그 모든 근거 없는 비난의 말들을 들으시고주님께서 오히려 나의 억울함을 보시고오히려 긍휼로선으로 갚아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다윗은 오늘 우리에게 고난당하는 자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범답안처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다윗은 시므이에게 사실이 무엇인지 해명하거나잘잘못을 따지거나그 무엇으로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다만 모든 것을정말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그리고 주님께서는 나중에 다윗의 기대대로 그에게 선을 베푸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어떤 여인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7장 15-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5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들에게 이르되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조언하였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조언하였으니

16 그러므로 이제 빨리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이르기를이 밤에 광야의 평원에서 머무르지 마시고 빨리 건너가소서하라왕과 그분과 함께 있는 온 백성이 삼켜질까 염려하노라하니라.

17 이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엔로겔 옆에 머물렀으므로 어떤 하녀가 가서 그들에게 고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고하니라.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가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고하였으나 그 두 사람이 빨리 도망하여 바후림에 있던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뜰에 있던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19 여인이 뚜껑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펴 놓으매 그 일이 알려지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을 도왔던 어떤 하녀와 바후림에 있던 어떤 여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이들은 이름도 없이명성도 없이빛도 없이 다윗을 도왔던 숨은 손길들이었습니다어떤 하녀가 없었더라면다윗은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며어떤 여인이 없었더라면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고문을 당하고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우리는 오늘 그들을 알 수 없지만장차 하늘에서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이처럼 오늘도 이름 없이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그러나 주님 앞에 신실했던주님의 일꾼들이 있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 영광 중에 오실 그날 모든 것을 드러나게 갚아주시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 외부 사람들

이제 우리 함께 오늘의 마지막 주인공들을 사무엘기하 17장 27-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 다윗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자손에게 속한 랍바 출신의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드발 출신의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출신의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

28 침상들과 대야들과 질그릇들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콩과

29 꿀과 버터와 양과 암소의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및 그와 함께한 백성이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프고 피곤하고 목마르다하였기 때문이더라.

우리는 여기에서 세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암몬 자손에 속한 랍바 출신의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첫 번째 이고로드발 출신의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두 번째이고로글림 출신의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세 번째입니다소비마길바르실래이 세 사람은 암몬 자손에게 속한 지역요르단 저편의 외곽 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특별히 로드발 출신 암미엘의 아들 마길은 므비보셋을 다윗이 예루살렘 성으로 데려가기까지 모시고 있었던 사람입니다이 세 사람은 다윗 왕의 무리에게 필요한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였습니다이러한 일은 미래를 전망하며 투자한 것이 아니라모든 것이 절망적인 가운데다윗 왕과 함께 죽고함께 살겠다는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무엇인가를 계산해서 이익이라는 결론으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모든 것이 손해이지만심지어 압살롬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베풀어진 호의였고섬김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때이 땅에서 결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이 땅에서 보상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주님을 섬기는 일은 이 땅에서 수익을 거두는 투자가 아닙니다주님을 섬기는 일은 값진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어버리는 일과 같습니다사람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말할 수 있고차라리 다른 쪽으로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계산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주님께 드리는 헌신과 섬김은 결코 그런 세상적인 방식으로 계산되거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오늘 우리가 하늘에서 결산하고하늘에서 보상 받을오직 그 날을 바라보며주님을 섬기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 결론

오늘 우리는 다윗에게 임한 고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 진실이 드러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다윗 자신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는지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누가 다윗의 진정한 친구였는지,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고난은 마음속 진실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방법입니다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다가오는 수많은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난은 우리가 결국 무엇을 바라보는지무엇을 선택하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왜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먼저는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잘못한 것에 대하여 돌이키며 바로잡히는 징계와 배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또한 우리 자신이 더욱 성숙하여지고주님 앞에 불분명한 믿음의 태도가 더욱 분명하고 철저하게 단련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단지 고난을 끝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어떻게 통과하고어떻게 끝내느냐가 중요합니다.경제적인 문제로 고난이 임할 때우리가 돈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붙드는지아니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붙드는지우리의 마음 속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자녀의 문제로 고난이 임할 때우리가 자녀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지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온전히 드릴 것인지마음 속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참된 믿음의 실제를 원하십니다고난은 우리의 마음 속 원함을 실제 믿음으로 삶 속에서 입증하도록 단련시켜주는 하나님의 회초리이며용광로입니다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었음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믿음의 큰 기회입니다우리가 오늘 고난 중에 있다면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을 반드시 배우기 원합니다다윗이 처음 믿음으로 돌아가 주님을 따랐던 것처럼우리도 오늘 새롭게 주님을 바라보고주님을 따르게 되길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4.12.03.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2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삼하 15:10)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5장입니다사무엘기하 15장 10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정탐꾼들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두루 보내어 이르되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압살롬이 헤브론에서 통치한다하라하니라.

저는 오늘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부귀영화를 원하는 마음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 왕에게 반역하고자신의 통치권을 외치는 압살롬을 볼 수가 있습니다사실 생각해보면 압살롬만 그런 것이 아니라정도의 차이는 다르더라도사람은 누구나 부귀영화를 원합니다남들이 좋은 집에 사는 것을 보면 나도 그런 집에 살고 싶고남들이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나도 먹고 싶고남들이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나도 입고 싶고남들이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보면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비록 그것이 십계명의 마지막 항목인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 할지라도비록 그것이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는 말씀에 걸리는 것일지라도우리는 보는 대로듣는 대로원하고부러워하고동경하는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면에서 우리는 꼭 남들을 부러워하기 때문이 아니더라도꼭 남의 것을 탐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더 좋은 것더 많은 것더 높은 영광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사람은 누구나 부와 재산그리고 안락한 삶을 원합니다정도의 차이는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하고칭찬받기를 원하고높아지기를 원하고영광을 얻기를 원합니다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누구나 원하고 있는 부귀영화를 왕관이라는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사람은 누구나 빛나는 왕관을 원합니다여기 혹시나는 아니라고나는 더 가난해지고 싶고더 못살고 싶고,더 고생하고 싶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아마 없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압살롬의 왕관을 향한 갈망은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상한 것이 아니라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어쩌면 이미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함께 압살롬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빛난 왕관을 얻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왕관을 받는 것이다.

이제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4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이제 배부르고 이제 부유하며 우리 없이 왕처럼 군림하였도다너희가 군림하는 것을 내가 하나님께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도 너희와 함께 군림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는 배부르고 부유하며 왕처럼 군림하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바울은 그들에게 서신을 쓰면서그들이 지금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장차 다가올 왕국에서 군림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 바란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또한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 자신 또한 주님과 함께성도들과 함께 군림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성경은 군림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그것이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군림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언제 군림할 것인가그 시점에 대하여는 지금이 아니라장차 임할 주님의 왕국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8장 17,18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라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하나님의 상속자로서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성경은 우리가 영광을 받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그것이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우리가 영광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우리가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황금 길을 밟으며찬란한 새 예루살렘 도성에서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 시대에오늘날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또한 십자가의 완전한 죽음으로 넘겨지는 삶입니다내가 완전히 부인되며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며오직 내가 아니요그리스도께서만이 사시며 드러나시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완전히 연합하며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한다면장차 임할 주님의 왕국에서 영원한 영광을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오늘 우리가 진정한 영광을 원하며영원한 부귀영화를 원한다면우리는 기꺼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처럼십자가 없는 왕관은 없습니다.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처럼고통 없이 얻는 것은 없습니다낮아짐 없는 높아짐이 없으며어두운 밤이 없는 찬란한 아침이 없으며죽음 없는 부활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데이 땅에서 70, 80년 동안 누리는 잠시 잠깐의 싸구려 부요함이 아니라영원히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부요함을 원합니다이 땅에서 정직하고 올바른 방법으로는 달성하기 힘들고오히려 거짓되게 남을 속이거나또는 남을 짓누르고 피해를 주면서 달성해야하는 저질적인 부요함 말고정직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달성할 수 있는 고품격의 영원한 부요함을 원합니다.

저는 또 영광을 원합니다사람들 앞에서 눈치를 잘보고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춰서 겨우 가질 수 있고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느 새 사라져버릴 그런 천박한 일시적인 영광이 아니라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원합니다.영원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과 또 성경 속에 기록되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사 가운데 앞서간 놀라운 믿음의 성도들 앞에서 받을 수 있는그리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놀랍고 놀라운 영광을 원합니다저는 이러한 영원한 부귀영화를 얻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신실하게 따라갈 때반드시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을 믿습니다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믿기에우리는 오늘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고모든 오해와 비방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저는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과 보상을 사모합니다영원한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늘 우리가 받는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며오히려 너무 부족해서 걱정입니다저는 정말 영원한 영광을 얻기 원합니다.

또한 저는 저의 자녀들이 이러한 영광을 얻기를 원하며반드시 그 길로 저의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련할 것입니다.뿐만 아니라제가 가르치는 우리교회의 모든 믿음의 학생들과 자녀들이 이러한 영광을 얻기를 원합니다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고이 땅에서의 보물과 하늘에서의 보물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기에한 가지를 포기하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주저하지 않고영원한 영광을 선택하기 원합니다우리가 오늘까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았든지,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새롭게 열어주셔서우리가 마땅히 사모해야 하며갈망해야 하는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 볼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의 말씀을 통해서하나님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하나님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방법대로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왕관을 차지하려 한 압살롬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는 아버지인 다윗 왕이 자신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기간 동안철저히 하나님 앞에 낮아지며자신의 죄를 돌이키며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가운데 거하면서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세워주시고높여주시고자연스럽게 왕좌를 이어받게 될 시간까지 기다렸어야 했습니다그러나 그는 그러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였고오히려 반역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힘으로 왕관을 차지하려 하였습니다.

 

 

** 압살롬의 반역의 시작

그러면 지금부터 압살롬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4장 25-27절을 보시겠습니다.

25 그러나 온 이스라엘 안에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렇게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더라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더라.

26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그가 머리털을 깎되 해마다 연말에 깎았더라.) 그가 머리를 깎을 때에 그의 머리털을 달아 보니 왕의 무게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 압살롬에게 아들 셋과 딸 하나가 태어났는데 그 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그녀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안에서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성경은 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요즘말로 말하면 꽃미남이었고훈남이었습니다그의 머릿결이 또 어떠했는지 모르지만헤어스타일 또한 아주 멋있었던 것 같습니다그는 일 년에 한 번씩 약 2.2kg정도 나가는 머리털을 이발하였습니다.압살롬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딸의 이름을 자신의 누이동생의 이름과 똑같이 다말이라고 지었습니다.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딸을 볼 때마다자신의 누이동생 다말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압살롬의 딸 다말 역시 아빠를 닮아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압살롬은 외모에 대하여는 흠이 없을 정도로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잘생겨서 교만해지느니 차라리 못생겨서 겸손한 것이 낫습니다물론 잘생겼는데 겸손하기까지 하다면 더 좋을 것이지만흠이 없어서 거만해지느니 차라리 흠이 많아서 낮아지고 주님께 언제나 겸손히 무릎을 꿇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1-6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일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과 자기 앞에 달려갈 자 오십 명을 예비하니라.

압살롬이 일찍 일어나 성문 길 옆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분쟁거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너는 어느 도시 출신이냐하여 그가 말하기를주의 종은 이스라엘 지파들 중의 하나에 속하나이다하면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보라네 일들이 선하고 바르다마는 네 말을 들을 사람을 왕께서 임명하지 아니하셨다,하고

압살롬이 이르기를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어 청원이나 사정이 있는 모든 사람이 내게로 올 때에 내가 그에게 정의를 베풀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어떤 사람이라도 그에게 가까이 와서 경의를 표하려 하면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라.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온 이스라엘에게 압살롬이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니라.

지금 압살롬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었을까요먼저 다윗 왕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심이었을 것입니다왕이 만약 자신의 여동생을 위하여 암논을 정의롭게 처벌하여주었더라면압살롬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그는 2년 동안 암논을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웠지만한 편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 왕이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고 믿으며 기다린 기간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4절 뒷부분에서 압살롬은 내가 그에게 정의를 베풀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면서다윗 왕이 실행하지 않았던 정의를 자기가 실행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압살롬의 마음에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컸을 것입니다다윗 왕이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놓고는 2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그리고 요압 장군을 통해 겨우 왕의 얼굴을 보았지만그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그는 자신이 후계자 자격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그러므로 이제 자신의 힘으로 야망을 이룰 수 있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단순한지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도 없이 멋진 외모를 가진 왕의 아들이 자신의 사정에 대하여 편을 들어주고또 5절 말씀처럼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할 때얼른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들면서 입을 맞추는 아주 친절하고도 따듯한 겉모양을 보면서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그는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고오직 자신의 야망을 위하고 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에게서 떠나고,압살롬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라는 고린도후서 11장 14절 말씀처럼우리는 언제든지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압살롬이 자신을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나타낸 것처럼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나타내는 것입니다압살롬은 정의로운 말과 따듯한 사랑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였습니다.

그는 결코 정의롭지 못한 살인자이며백성들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야망을 사랑하는 자이며결코 겸손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한 반역자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의 흠 잡을 곳 없는 용모와 빼어난 말재주와 뛰어난 연기력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정의로운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때로 따듯한 사랑의 권면을 한다고 해서또 때로는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들을 잡아 일으키며 입을 맞춘 압살롬처럼 겸손한 태도를 가진다고 해서주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입니다우리는 가짜가 되지 말고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압살롬이 진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면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가지고 애통하였을 것입니다압살롬이 진짜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면암논을 용서하고 다윗도 용서하였을 것입니다압살롬이 진짜 겸손한 사람이었다면왕이 외면하는 기간 동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의 시간을 묵묵히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결국 속이는 자였으며교만한 반역자였고자신의 유익과 영광과 야망을 추구하는 자에 불과하였습니다이러한 모습은 어떤 이상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며우리 자신이 육신 가운데 있을 때너무나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모습입니다.

 

 

** 사십 년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7-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십 년 뒤에 압살롬이 왕께 이르되내가 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내가 가서 헤브론에서 내 서원을 갚게 하소서.

왕의 종이 시리아의 그술에 머물렀을 때에 서원하여 말하기를만일 께서 참으로 나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가시면 내가 를 섬기리이다하였나이다하매

왕이 그에게 이르되평안히 가라하니 이에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 그러나 압살롬이 정탐꾼들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두루 보내어 이르되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압살롬이 헤브론에서 통치한다하라하니라.

압살롬은 이제 반역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기 위하여 헤브론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그는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거짓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마치 그가 하나님과 서원을 하였고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긍휼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처럼 믿음의 모양을 가진 것이었습니다사탄도 빛의 천사의 모습을 가질 수 있고육신도 성령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고백이나믿음의 삶을 흉내 내는 연기자 같은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버리고 포기하며참되게 돌이키고드리고 섬기면서 진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7절 말씀에서 사십 년 뒤에라는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보셨습니까잠시 이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우리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전 기간이 30세부터 70세까지 총 40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 잠시 사무엘기하 5장 4,5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삼십 세에 통치하기 시작하여 사십 년 동안 통치하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통치하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치하였더라.

다윗이 이스라엘 통치한 기간이 총 40년입니다그러므로 사무엘기하 15장 7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십 년 뒤에라는 기간은 압살롬이 반역을 준비한 기간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압살롬이 40년간 반역을 준비해 버리면다윗의 통치는 이미 끝나고도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성경에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다고 판단한 NIV성경역본과 한글개역성경의 편집자들은 히브리어 맛소라 원어성경에 기록된 40년을제멋대로 4년이라고 고쳐놓았습니다그래서 마치 압살롬이 반역을 4년 동안 준비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을 기록하여주셨고또 보존하셨습니다사람이 하나님을 도와 성경의 오류를 제거할 필요가 없이성경은 그 자체로 오류가 없고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우리의 믿음은 아무 근거가 없는 미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시험이나심판이나검증이나재판이나통치의 기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우리는 먼저 노아의 홍수 때에 사십 일 밤낮으로 비가 내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사십일 동안 시내 산에 머물렀고엘리야는 밤낮 사십일을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사십일을 금식하셨고또 부활하신 이후에 사십일을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에 가나안 땅을 탐지한 기간이 사십일이었고믿음이 없음으로 인해 광야를 돌았던 기간이 사십년이었습니다.

 

사무엘기상을 열었던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재판한 기간이 사십 년이었습니다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하며 모독하였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습니다또한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기간도 사십 년이었습니다그리고 지금 압살롬은 사십 년 뒤에 반역을 시도하고자 하고 있는데여기서의 사십 년은 바로 소년 다윗이 처음 사무엘로부터 기름을 받은 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스라엘의 마음이 사울 왕보다는 믿음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전쟁 영웅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을 더 따르게 된 그 해로부터 사십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숫자와 년도는 반역을 하고자 하는 압살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정의를 저버린 다윗 왕을 버리시고새로운 왕을 세우실 때가 되었다는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 아히도벨

우리는 또한 이 모든 일에서 압살롬을 도왔던 한 무서운 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5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압살롬이 희생물을 드릴 때에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조언자인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도시 곧 길로에서 청하여 오니라압살롬과 함께하는 백성이 계속해서 불어났으므로 그 음모가 커졌더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조언자였던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압살롬의 반역 음모에 가담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과연 이 아히도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6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당시에 아히도벨이 베푼 조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에서 여쭙는 것과 같았으니 아히도벨의 모든 조언이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아히도벨의 조언과 계략에 대한 평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그의 조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에서 여쭙고 응답을 받는 것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얼마나 지혜롭고 뛰어났는가를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삼국지로 말하자면 제갈공명보다 높은 수준의 지략가라고 할 수가 있는데바로 이러한 사람이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7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아히도벨 압살롬에게 이르되이제 내가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이 밤에 내가 일어나 다윗을 추격하며

그가 피곤하고 손이 약할 때에 그를 습격하여 그를 무섭게 하리니 그리하면 그와 함께 있는 온 백성이 도망하리이다내가 다윗 왕만 치고

온 백성을 왕에게 다시 데려오리니 왕이 찾는 그 사람을 붙잡으면 모두가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니이다그리하면 온 백성이 평안하리이다하매

여기서 아히도벨은 자신이 직접 만 이천 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다윗 왕만 기습으로 치고 빠지겠다고 압살롬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다윗 왕의 모든 전력을 일시에 무너뜨릴 수 있는 최상의 작전이었습니다그런데 다소 의아한 것은 아히도벨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이끌고 갈 정도로 적극적으로 다윗 왕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최고의 지략가답게 조언을 내고작전을 짜면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일텐데직접 가서 다윗 왕을 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3장 34절을 보시겠습니다.

마아가 사람의 손자요아하스배의 아들인 엘리블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

우리는 여기에서 아히도벨의 아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그 아들의 이름은 바로 엘리암입니다이 이름,엘리암을 기억하시면서 사무엘기하 11장 3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에 관해 물어보게 하였더니 한 사람이 이르되이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요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가 아니니이까하니라.

이제 우리는 아히도벨이 무슨 이유로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으며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특공대를 구성하여 다윗 왕을 치려하고 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바로 다윗이 간음하였던 여인인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였던 것입니다다윗이 죽였던 헷 족속 우리야가 바로 아히도벨의 손주 사위였던 것입니다아히도벨은 자신의 집안과 가문에 이러한 비극을 가져온 다윗 왕을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아히도벨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더라면다윗은 정말 큰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친구이면서스파이 첩자로 압살롬의 편에 붙었던 후새를 통하여 아히도벨의 계략을 막으셨습니다후새는 지금 다윗 왕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전사들이며심지어 지금은 새끼를 빼앗긴 곰들처럼 분노하고 있기 때문에만 이천 명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차라리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를 모아새로운 왕이신 압살롬 왕께서 직접 지휘하실 때더욱 완전한 승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시간을 지연시켰고다윗 왕에게 소식을 보내어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 압살롬의 죽음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8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신하들과 마주치니라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의 무성한 가지들 밑으로 지나갈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하늘과 땅 사이에 들리고 그 밑에 있던 노새는 가버렸으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압살롬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그의 자랑 중 하나였던 수려한 머리털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그의 큰 키와 수려한 머리털은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자랑거리였지만결국 그것이 그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습니다상수리나무에 꼼짝없이 매달리게 된 그는 요압 장군의 창을 맞고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자랑과 교만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잠언 16장 18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멸망에 앞서 교만이 나가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

또한 잠언 18장 12절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멸망에 앞서 사람의 마음의 거만이 있고 명예에 앞서 겸손이 있느니라.

 

정의사회구현과 사랑의 통치를 외쳤던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이 잘생기고 매력 있던친절하고 따듯해 보였던 청년 압살롬은 여기서 이렇게 비참하고 허무하게 인생을 끝마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그가 정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오직 겸손하게 주님이 긍휼을 구하였더라면자연스럽게 왕의 후계자로서차기 왕으로 세워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결론 겸손과 높이심

오늘 우리는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압살롬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압살롬은 왕관을 원했지만 결국 얻지 못하였습니다그에게 왕관은 어쩌면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그의 외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곳이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였고그가 반역을 위하여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였던 모든 모습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으며거짓되고 교만하게 반역을 통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그 결과 그는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베드로전서 5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우리는 지금 당장 높아지기를 원하지만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낮추시고영원히 높여주기를 원하십니다마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이후에제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시고자신의 백성에게 배척을 당하시고삼일 밤낮으로 차가운 돌무덤에 머물러 계신 이후에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처럼승천하신 이후에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시고모든 무릎이 꿇려지고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게 될 그 영광의 왕좌에 앉으신 것처럼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낮추시되철저히 낮추시기를 원하십니다십자가의 죽음에까지내가 아니요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까지 우리를 낮추시고더 낮추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자신의 강한 손으로 누르시는 목적은우리를 말할 수 없는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높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마치 요셉이 하루아침에 감옥 밑바닥에서온 이집트 제국의 통치자가 된 것처럼그렇게 우리를 단숨에 높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르시고 낮추실 때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여전히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눈동자처럼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언제까지입니까제가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합니까우리가 이렇게 외친다면주님께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우리를 위로하실 하나님 앞에서우리가 빛난 왕관을 받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4.11.19.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1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삼하 14:1-3)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4장입니다사무엘기하 14장 1-3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제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드고아로 사람을 보내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녀에게 이르되원하건대 너는 애곡하는 자처럼 변장하여 이제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며 죽은 자를 위해 오랫동안 애곡한 여인같이 하고

왕에게 들어가 그분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라하며 이처럼 말들을 그녀의 입에 넣어 주니라.

저는 오늘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마음을 따라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바쁘고 복잡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의 마음을 따라가라.”라고 하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개인용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을 개발하면서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스티브 잡스도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 연설을 하면서 “Follow your heart. 너의 마음을 따르라.”라고 말했습니다오늘날 많은 미디어 매체들과 책들에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롭고 추천할 만한 방법으로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있습니다생각할 것이 많고 복잡할 때는생각을 멈추고바로 자신의 마음에서뜨거운 가슴에서 말하는 것을 따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사람들이 뭐라 하든내 마음에서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누가 뭐라 하든내 생각이 옳다고 믿고 확신하면서 전진하면 성공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보는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러한 사상을 주입하고 있습니다얼마 전에 저희 승연이가 보던 겨울왕국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한국말로 더빙된 “let it go”라는 노래의 가사를 듣는데, “이젠 내 맘대로 살 거야.”라고 하는 가사가 있었습니다승연이는 의미도 모르고 그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저는 그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그리고는 승연아내 맘대로 살면 절대 안 돼큰일 나는 거야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말해주면서그 노래를 금지시켰습니다.

호기심에 영어 가사를 찾아보니 더욱 무서운 말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No right, no wrong, no rules for me, I'm free!”, “나를 위한 옳은 것도틀린 것도규칙도 없다나는 자유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애니메이션을 보고노래를 듣고 또 따라 부르면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기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이 세상의 신,사탄의 가치관을 주입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얼핏 들으면 매우 멋있는 말이고또 우리의 마음에 자유를 주는 것 같고마음을 뜨겁게 하여 열정을 불어넣어주고젊은이들에게 새롭게 인생의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는 좋은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번도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거나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하신 말씀은 있지만자기 마음을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우리 잠시 성경에서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몇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시겠습니다먼저 예레미야 17장 9절 말씀입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우리나라 속담에도 열길 우물 속은 알아도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성경에서도 사람의 마음이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다고 말씀하시면서누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오직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거짓되냐하면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속아 넘어갑니다.

 

분명히 악한 의도로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한 순간에 돌변하여 자신이 너무나 순수하고 좋은 의도로 어떤 일을 했는데그것이 마치 의도와 다르게 실수가 되고오해가 된 것처럼눈물로 나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까지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아침에는 기분이 좋았다가점심에는 갑자기 최악으로 치달았다가또 저녁에 금새 풀리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이렇게 거짓되고 변화무쌍한 사람의 마음을우리는 과연 신뢰할 수 있고따라갈 수가 있을까요?

 

이제우리 함께 창세기 6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크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또한 창세기 8장 21절도 보시겠습니다.

께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시고 께서 마음속으로 이르시되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에서 상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내가 다시는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또 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입으로 먹어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생각과 죄악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 읽었던 사무엘기하 14장 1절에서는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모든 비극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우리의 삶은 결코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다윗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 오직 하나님께로 향하였어야 했습니다하나님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었던 다윗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다른 누군가에게로 향하게 되었을 때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14장부터 시작되어 19장까지 이어지는 비극을 살펴보면서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은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 드고아의 여인의 거짓 호소

우리 다시 한 번 사무엘기하 14장 1절 말씀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이제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다윗의 측근이었던 요압 장군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다윗은 지금 왕으로서그리고 아버지로서 큰 고민과 갈등 가운데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온 이스라엘을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는 왕으로서는 압살롬의 속임수와 살인 행위에 대하여 마땅히 심판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반면에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용서하고 덮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다윗은 이러한 두 가지 마음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하고 있었습니다가장 쉬운 길은 고민할 것이 아니라마음 가는대로 할 것이 아니라하나님께 여쭙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제 아들 압살롬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하나님의 법에 따른다면 그를 심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그러나 저 자신 또한 더 크게 죄를 지었다가주님의 크신 긍휼로 용서를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저의 사랑하는 아들압살롬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주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나이다.”

 

차라리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고 교제하였더라면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을 다윗에 보여주셨을 것입니다아니면 하나님의 대언자인 나단과 의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맡긴 상태도 아니었고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상태도 아니었습니다다만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분명히 정하지 않은 채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수동적인 상태육신적인 상태로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요압에게는 이러한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다윗을 위해서그리고 다윗의 마음이 계속 이러하다면 장차 왕의 후계자가 될 압살롬을 위해서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미래의 지위를 위해서한 가지 일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그것은 바로 드고아라는 한 지역에서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다가 다윗에게 청원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4장 4-7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드고아의 여인이 왕에게 말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경의를 표하며 이르되오 왕이여도와주소서하니

왕이 그녀에게 이르되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느냐하매 그녀가 대답하되나는 참으로 과부 여인이니이다내 남편은 죽었고

왕의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들 둘이 들에서 서로 싸웠으나 그들을 떼어 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서 죽였나이다.

그런데 보소서온 가족이 일어나 왕의 여종을 대적하여 말하기를자기 형제를 친 자를 넘겨주라그가 죽인 그의 형제의 생명을 위하여 우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상속자도 멸하리라하오니 이처럼 그들이 남아 있는 내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을 위하여 이름이나 남은 자를 땅 위에 남겨 두지 아니하려 하나이다하매

여기서 우리는 드고아의 여인으로부터 매우 딱하고 어려운 사정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남편이 죽고혼자서 두 아들을 키워온 과부 여인인데두 아들이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그것도 슬픈데문제는 온 가족이 일어나서 그 살인자를 심판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이제 이 여인에게 모든 희망의 불씨가 사라지고겨우 숯불 하나가 남았을 뿐인데그것마저 꺼뜨려서우리 가족의 대가 끊어질 지경이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의 마음이 연민을 느끼고불쌍한 감정을 느끼도록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서 정의를 실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또한 동시에 그는 이 안타까운 처지의 여인을 외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이때 다윗이 이 일을 가장 지혜롭게 판결하는 길은 무엇이었을까요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이 문제에 대하여 여쭙는 것이었습니다하나님께 여쭈었다면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해 주셨을 것입니다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하였습니까하나님께 여쭙지도 않았고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 찾아보지도 아니하였습니다그는 다만 8절 말씀처럼 대답하였습니다함께 8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네 집으로 가라내가 너에 관하여 명을 내리리라하니라.

이것은 다윗이 이 여인의 호소를 받아들여그 아들이 죽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미입니다그런데 이 여인은 감사하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9절을 보시겠습니다.

드고아의 여인이 왕께 이르되오 내 주 왕이여그 불법은 나와 내 아버지 집에 임할 터인즉 왕과 왕의 왕위는 무죄하리이다하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비록 이 일 자체가 불법이기는 하지만그 책임은 나와 내 아버지 집에 있고다윗 왕과 왕위는 무죄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비록 이 살인자를 살려두는 것은 불법이지만왕은 무죄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과연 불법인데 무죄일 수가 있을까요?

 

이제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이르되누구든지 네게 조금이라도 말하면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 못하리라하니라.

다윗은 어쨌든지 또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나에게 데려오라고 말하면서끝까지 이 여인을 위해주고 있습니다지금 다윗은 8절에서 한 번그리고 10절에서 또 한 번 이 여인의 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그리고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그녀가 이르되원하건대 왕은 주 왕의 하나님을 기억하사 피를 복수하는 자들이 다시는 멸하지 못하게 하옵소서그들이 내 아들을 죽일까 염려하나이다하매 왕이 이르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하니라.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에게 두 번이나 정확한 보호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이제 하나님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또 다시 한 번 확실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다윗은 세 번째로 주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면서심지어 그 아들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이러한 판결은 과연 진리의 말씀에 따른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분별이며올바른 결론이었을까요다윗이 정말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를 원했더라면먼저 하나님께 여쭈었어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그 아들을 데리고 와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직접 그 아들을 대면하여 보고그가 과연 주님 앞에서 상한 영으로 겸손히 엎드렸는가를 보고자 했을 것입니다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단지 인간적인 감정에 이끌려서눈물로 호소하는 모정에 이끌려서그가 무사할 것이라고 판결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 드고아의 여인의 본래 의도

다윗의 확실한 판결을 들은 드고아의 여인은 이제 본래 가졌던 의도를 밝히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우리 함께 12-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2 이에 여인이 이르되원하건대 왕의 여종이 한 말씀만 내 주 왕께 말하게 하소서하거늘 그가 이르되말하라하니

13 여인이 이르되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그런 일을 생각하셨나이까왕께서는 자신의 내쫓은 자를 다시 집으로 불러오지 아니하심으로써 허물 있는 사람같이 이 일을 말씀하시나이다.

14 우리는 반드시 죽으며 땅에 쏟아진 물 즉 다시 모으지 못하는 물과 같으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방법을 고안하사 자신의 내쫓은 자가 자기에게서 아주 쫓겨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5 그러므로 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일을 말씀드리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였기 때문이니이다왕의 여종이 말하기를이제 내가 왕께 말하리니 그리하면 혹시 왕께서 자기 여종의 요청하는 것을 시행하시리라.

16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하나님의 상속 재산에서 끄집어내어 함께 멸하려 하는 사람의 손에서부터 왕의 여종을 건져 내리라하였나이다.

17 이에 왕의 여종이 말하기를내 주 왕의 말씀이 이제 위로가 되리로다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시기 때문이니이다그러므로 주 왕의 하나님께서 왕과 함께 계시기 원하나이다하니라.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 왕이 살인자인 아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판결한 내용을 붙들고역으로 다윗 왕의 상황에 적용하였습니다이것은 요압 장군이 대언자 나단이 다윗을 책망하였을 때 사용했던 방법을 흉내낸 것입니다육신으로도 충분히 성령님의 모습을 흉내낼 수 있고모방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성품의 능력은 부인하지만모양은 흉내낼 수 있습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하나님의 이름까지 사용해가면서 다윗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진리의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13절에서 내쫓은 자라는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러나 다윗 왕은 압살롬을 내쫓은 적이 없습니다.압살롬 스스로가 죄를 짓고 도망간 것입니다.

 

또한 14절에서 드고아의 여인은 우리가 다 반드시 죽는다고 말하면서땅에 쏟아진 물과 같이 다시 모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것은 우리는 어차피 다 죽게 되는 것이므로먼저 죽었던 후계자인 암논에 대해서는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으므로 그만 잊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이미 죽은 암논을 잊으라는 말은 곧 압살롬의 죄를 눈감아 주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고아의 여인은 뜬금없이 하나님께서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신다고 말하면서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어떠한 잘못을 개의치 아니하시고압살롬이 아주 쫓겨나지 않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진리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외모를 중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드고아 여인이 말한 것처럼죄를 용납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집행하지 않으시거나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드고아의 여인은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16절에서 드고아의 여인은 왕께서 살인자인 자신의 아들을 건져 내리라는 약속을 하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압살롬도 딱 그와 같이 건져 내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굳이 따져보자면이 여인에게는 남은 아들이 오직 하나뿐이었지만다윗에게는 압살롬 말고도 다른 후계자들이 충분히 있었습니다다윗의 경우는 이 여인의 경우와 전혀 다릅니다.

계속해서 17절에서 이 여인은 다윗 왕이 하나님의 천사와 같다고 아첨하고 있으며다윗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한다고 아첨하고 있으며하나님께서 왕과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고 아첨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실제로 다윗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지 않으며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지도 못하고 있고어쩌면 분간을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고 있으며,또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드고아의 여인이 말한 것은 우리가 잠깐만 생각을 해보아도 전혀 진리가 아니고이치에도 맞지 않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말이 다윗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왜 그럴까요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무엇인가를 붙들게 되면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내 마음에서 원하는 것이 옳고 좋다는 정당성을 발견하게 됩니다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 진리이고하나님의 뜻이고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선하고좋은 일이라는 이유와 근거를 끊임없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누군가라도 반대를 하거나 의문을 품게 되었을 때수만 가지 이유로 방어하고 설명할 준비를 갖추면서,요새를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 다윗의 이상한 결정

이제 우리 함께 18-20절을 보시겠습니다.

18 그때에 왕이 그 여인에게 응답하여 이르되원하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하거늘 여인이 이르되내 주 왕은 이제 말씀하옵소서하매

19 왕이 이르되이 모든 일에서 요압의 손이 너와 함께하지 아니하였느냐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내 주 왕의 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건대 아무도 내 주 왕께서 말씀하신 것을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옮기지 못하리이다.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으니

20 왕의 종 요압이 이런 식으로 말을 돌려서 하게 하려고 이 일을 행하였나이다내 주께서는 지혜롭되 하나님의 천사의 지혜에 따라 지혜로우사 땅에 있는 모든 일을 아시나이다하니라.

다윗은 이 모든 일이 요압에게서 나왔는가를 확인하였습니다드고아의 여인은 혹여나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까 걱정하며온갖 아첨을 다 떨면서그렇다는 아주 짧고 쉬운 대답을길고 어렵게 늘어놓았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21-24절을 보시겠습니다.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이제 보라내가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러므로 가서 청년 압살롬을 다시 데려오라하매

22 요압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왕께 감사를 드리고 이르되오 내 주 왕이여왕의 종이 요청한 것을 왕께서 이행하셨사오니 오늘 왕의 종이 왕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은 줄을 아나이다하고

23 이에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라.

24 왕이 이르되그가 자기 집으로 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하매 이에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다윗은 요압의 요청에 못이기는 척하면서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도록 명하였습니다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압살롬이 왕 앞에 나아와 얼굴을 대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압살롬에 대해서 아주 이상한 처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다윗은 압살롬을 심판하거나 징계하지도 않았고그렇다고 용서하고 받아주지도 않았습니다차라리 다윗은 그를 불러서 그의 여동생 다말이 험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하여얼마나 마음이 아팠느냐고 위로하고또 암논을 제대로 징계하지 못했던 점을 사과했어야 할 것입니다차라리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 스스로가 그렇게 복수하고 살인을 한 것을 잘못한 것이었다고 꾸짖었어야 할 것입니다압살롬의 마음을 상한 영으로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통회하는 영으로 바꾸어 놓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무엇을 하였습니까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왕으로서도아버지로서도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그의 마음은 압살롬을 향했는데아무것도 하지 않고방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에게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집에서 일어날 때에든지앉을 때에든지누웠을 때에든지또 길을 갈 때이든지 끊임없이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육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에게 아직 소망이 있을 때어릴 때에 회초리로 징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일찍이 마땅히 가야 할 길로 훈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부모가 자녀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부지런하고 신실하게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주님께 맡긴다는 것은주님이 알아서 가르치시겠지생각하면서 방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자녀를 주님께 맡기고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녀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성경에 기록된 부모의 역할에 순종하면서신실하게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부모에게 명령하신 역할에 순종하는 가운데믿음으로 자녀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지방관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아닙니다여기서 다윗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고다만 아버지로서인간적인 감정으로서오로지 마음만 그 아들을 향하였고연민과 애착과 사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 압살롬의 결과

다윗이 압살롬을 방관한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우리 먼저 사무엘기하 14장 28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이 만 이 년 동안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압살롬은 왕의 부름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다윗 왕으로부터 어떤 개인적인 부름도 받지 못하였습니다.차라리 불러서 책망을 하시던지무섭게 화를 내시고징계를 하시든지뭔가 소통이 있어야 하는데, 2년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던 것입니다이제 우리 함께 32-3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보라내가 네게로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여기로 오라하였나니 이것은 내가 너를 왕에게 보내어 말하게 하기를어찌하여 나를 그술에서 오게 하였나이까여전히 거기 있는 것이 내게 좋았으리이다하려 함이로다그러므로 이제 내가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내게 무슨 불법이 있거든 왕이 나를 죽이게 하라하니라.

33 이에 요압이 왕께 나아가 왕께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압살롬은 2년 동안 마음이 겸손해지고하나님 앞에 바르게 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그의 마음은 답답함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였고오히려 내게 무슨 불법이 있거든 왕이 나를 죽이게 하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결국 다윗은 또 다시 요압 장군의 말을 듣고압살롬을 불러 표면적인 화해와 소통을 이루었지만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압살롬은 어떻게 됩니까우리가 다음번에는 압살롬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이러한 다윗의 올바르지 못한 처신으로 인하여 압살롬은 비극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압살롬은 정면으로 다윗 왕에게 반역을 일으키게 되고결국 다윗 왕은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도피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8장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나를 위해 청년 곧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하매 왕이 압살롬에 관하여 모든 대장에게 명을 내릴 때에 온 백성이 들으니라.

다윗 왕은 정신없는 도피의 길에서 벌어지는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도 압살롬을 향한 애착의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온 백성이 듣는 가운데나를 위해 청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8장 14,15절을 보시겠습니다.

14 그때에 요압이 이르되내가 이처럼 너와 함께 늑장을 부릴 수 없다하고 손에 작은 창 세 개를 가지고 가서 압살롬이 아직 상수리나무 한가운데서 살아 있을 때에 그것들로 그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병기를 나르던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서 그를 죽이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압살롬의 최후를 볼 수 있습니다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아니하고압살롬을 향한 결과,바로 압살롬이 죽게 되었습니다나를 위해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해 달라는 왕의 부탁과 명령에도 불구하고압살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사람은그 동안 압살롬을 위하여 일하는 것 같았던다윗의 최측근이었던 다름 아닌 요압 장군이었습니다요압 장군은 압살롬이 만일 여기서 살아나 왕의 후계자가 된다면자기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것을 정확히 계산했기 때문에주저 없이 압살롬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이 모든 비극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아니하고압살롬을 향했던 결과였습니다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붙들지 아니하고 사람을 붙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육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우리 함께 말씀을 정리하면서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5장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우리 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2절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육신에 속한 애착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또한 빛이시며 진리이십니다다윗의 마음이 진리를 향하고빛을 따랐더라면그의 마음이 육신적인 애정과 섞여타협하지 않았더라면오히려 그가 사랑하던 압살롬이 어떻게 해서든 긍휼을 얻고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이름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라는 단어와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평화의 아버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만약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하기 때문에그에게 하나님의 징계와 정의와 공의를 주저 없이 실행했더라면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 함께 나아가 상하고 겸손한 영으로 긍휼을 구하는 법을 가르쳤더라면아마도 압살롬은 다윗의 후계자로서이스라엘을 잘 다스리는 평화의 아버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누구를 향해 있습니까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남편과 아내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우리의 온 마음이 하나님께 향해 있기를 원합니다.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 향하기 원합니다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주님과 동행하며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습니다주님께서 우리를 복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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