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2.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38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다(삼하 11:1)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1장입니다. 사무엘기하 11장 1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 해가 지나고 왕들이 싸움에 나갈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자기 신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더라.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더라.
저는 오늘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삶과 인생을 가리켜서 “길”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잠언 말씀에서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우리가 모두 어리석은 양들처럼 목자를 버리고 자기 ‘길’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고,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좁은 ‘길’을 가야한다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길’을 다 달렸다고 간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길에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다”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지가 아니라 후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많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창조물 가운데, 연어를 보게 되면, 물론 먹을 때 맛도 좋지만, 연어가 살아있을 때,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연어는 자신의 본향을 향해서 거친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다에서는 상어를, 강에서는 곰을 만나기도 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폭포를 뛰어넘고, 거친 물살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연어는 자신의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쉴 새 없이 지느러미를 힘차게 휘저으며 전진합니다. 이러한 연어의 여정 속에 정지상태란 없습니다. 연어가 지느러미를 멈추고 정지하는 순간, 거센 물살에 휩쓸려 아래로, 아래로, 밀려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걷고 있는 믿음의 길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거센 물살을 거슬러서, 많은 유혹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폭포를 뛰어넘는 과정에서 바위에 몸이 긁히기도 하고, 상처를 입고 아파하기도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하늘의 본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발걸음을 멈추고, 믿음의 전진을 주저하는 순간, 우리는 거센 물살에 휩쓸려 아래로 밀려 내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길에 대하여 간증하면서 내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빌 3:13,14). 오늘도 우리에게 세상의 거센 물살이 다가오며, 유혹과 고난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어들처럼, 사도 바울처럼,멈추거나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밀고 나아가며,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 다윗은 머물렀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11장 1절 말씀에서 믿음의 싸움을 멈추고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무엘기하 11장 전체의 말씀에서, 다윗이 믿음의 길에서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로 물러서고 밀려나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사무엘기하 11장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해가 지나고 왕들이 싸움에 나갈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자기 신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더라.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더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곡식을 수확하는 가을철이나,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질퍽해지는 겨울철에는 전쟁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여기서 왕들이 싸움에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겨울철이 지나고, 봄이 되어서 다시 전쟁을 하기에 좋은 기후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암몬 자손은 작년에, 바로 사무엘기하 10장에서 결판내지 못했던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다시 싸움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전쟁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오직 요압과 자기 신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보내고 나서, 정작 자기는 예루살렘의 백향목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다윗이 마땅히 몰아냈어야 할 암몬 족속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시도하다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1절에서 “그러나 다윗은”이라는 표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땅히 전쟁에 나가서 싸움을 진두지휘했어야 할 다윗이, 이상하게도, 가장 앞장 서서 나갔어야 하는데,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집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웠던 여호수아를 위하여 산꼭대기로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기도하였던 모세처럼,기도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영적 나태함 가운데 빠져버렸습니다. 장차 자신의 아들이 건축하게 될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모든 재료를 예비하고자 하던 불타는 열정이 어느새 식어버렸습니다. 죽음과 한 걸음 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 위기의 상황들 속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 막 입성하면서 가졌던, 처음 사랑과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의 형제들이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나갔는데, 그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에 머무르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 육신 안에 머무른 결과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과의 동행을 멈추고, 믿음의 길에서 정지하여,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던 다윗에게 과연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1장 2-4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 저녁때에 다윗이 자기 침상에서 일어나 왕의 집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지붕에서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매우 아름다우므로
3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에 관해 물어보게 하였더니 한 사람이 이르되, 이 여인은 엘리암의 딸이요, 헷 족속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라.
4 다윗이 사자들을 보내어 그녀를 데려오게 하니 그녀가 그에게로 오니라. 그녀가 그녀의 부정함에서 정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그녀와 함께 누웠고 그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성경은 참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만약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 민족의 우수성과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민족 신화였다면, 이 부분은 절대로 기록되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단군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단군이 무슨 죄를 지었고, 어떤 중대한 잘못을 범하였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나, 명량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에 대한 기록들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이 어떤 더럽고 추한 죄를 지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놀랍고도 위대한 다윗 왕의 가장 더럽고, 추하고, 수치스러운 죄악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경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한 가지 진리를 알려주시는데, 그것은 유대 민족이 우수하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는 모두 전혀 신뢰할 만한 대상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시편 39편 5절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전적으로 헛될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니었고,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더 이상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을 때, 그가 더 이상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을 때,그가 더 이상 믿음의 길에서 전진하고 있지 않았을 때, 그는 넘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인 골리앗은 다윗을 쓰러뜨리지 못하였지만, 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단숨에 쓰러뜨렸습니다. 끈질긴 생명의 위험과 사울 왕의 추격이 있었던 기나긴 날들은 그를 넘어뜨리지 못하였지만, 단 하루의 나태한 삶이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블레셋과 아말렉과 수많은 이방 민족들의 칼과 창과 화살은 다윗을 상하게 하지 못하였지만, 한순간의 육신의 정욕이 그를 비참하고 처절하게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게 되면, 다윗은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얼마나 나태한 하루를 보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치열한 전쟁터에 나가있는 동안,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저녁때가 되어서야 침상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집 지붕 위에서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지붕 위에서, 보기에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빈틈을 놓치지 않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에게 결정타를 명중시켰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언제나 틈을 노리면서, 육신의 정욕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다면, 믿음의 길에서 정지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전진하고 있었다면,그는 그 유혹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능히 막아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던 요셉처럼, 지붕에서부터 얼른 집 안으로 들어와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육신의 정욕에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길에서 단지 정지했던 것이 아니라, 정욕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타락의 길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마귀의 유혹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새가 나의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새가 나의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향에 가서 주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마귀의 모든 유혹과 공격 그 자체를 차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할 수는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삶을 통해서,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통해서,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통해서, 최소한, 마귀의 유혹을 대적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길을 멈추면서, 육신의 길로 걷게 되었습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라고 말씀하신 갈라디아서 5장 19절 말씀처럼, 다윗은 육신 가운데 걸으면서,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와 간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우리야는 지금 치열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여인이 누구인지 물었고, 누구인지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날마다, 매순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죄의 유혹들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심과 의지와 눈물도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권능으로 살아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된 승리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나의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붙들고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 죄를 감추려는 다윗의 시도(1차)
이제 우리 함께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여인이 수태하매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이르되, 내가 아이를 가졌나이다, 하니라.
다윗은 자신의 타락과 범죄가 조용히 지나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덮여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밧세바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제 다윗의 죄악이 만천하에 공개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라, 너희가 주께 죄를 지었으니 너희 죄가 너희를 찾아낼 줄을 분명히 알지니라.” 바로 이 민수기 32장 23절의 말씀처럼, 다윗의 죄는 결코 숨겨지지 않았고, 마치 살아있는 추적자처럼, 끝내 다윗을 찾아내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습니다. 다윗은 단지 아주 잠깐 동안, 믿음의 싸움을 멈추고 집에 머물렀을 뿐이었습니다.그는 단지 조금 낮잠을 자고, 신선한 바람을 쐬기 위해 지붕 위를 거닐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주님을 향해 처음 마음처럼 뜨겁지 않았을 뿐이었고, 아주 조금 식어진 것뿐이었으며, 결코 주님을 대적하여 범죄를 하고자 결심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과 동행하기를 멈추었을 때, 육신 가운데 머물러 있었을 때, 이제 거센 유혹의 물살에 걷잡을 수 없이 밀려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을 때에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지만, 육신 안에서 걸을 때에는 명백한 육신의 행위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 가운데 걷다가, 육신의 열매들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즉시 주님 안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즉시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열매로 나타난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행동들을 수정하거나,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수습하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온 마음을 다해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즉시 엎드리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지혜와 방법을 통해 일을 수습해 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1장 6-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다윗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헷 족속 우리야를 내게로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야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 우리야가 그에게 이르매 다윗이 그에게 요압이 어떻게 행하는지, 백성은 어떻게 행하는지 그리고 싸움은 잘 되어 가는지 다그쳐 묻고
8 다윗이 또 우리야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야가 왕의 집에서 떠나매 왕에게서 온 음식물이 그의 뒤를 따르니라.
이제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 속히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소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요압이 어떻게 행하는지, 백성은 어떻게 행하는지, 싸움은 잘 되어 가는지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렇게 싸움이 궁금하다면 직접 전쟁터에 나갔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또 단지 이러한 소식을 묻기 위해서였다면, 굳이 우리야를 소환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잘 파악해서 돌아오게 하였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다소 의아하고 당황한 표정의 우리야와 어색하고도 초조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더욱 당당하고 위엄 있게 다그쳐 물으면서 행동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사실 안중에도 없고, 관심에도 없는 전쟁이야기를 속히 마무리 짓고, 이제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쉬라고 말하면서, 왕의 풍성한 음식물로 하여금 그를 뒤따르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제 오늘밤만 지나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덮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함께 9-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그러나 우리야는 왕의 집 문에서 자기 주의 모든 종들과 함께 자고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으므로
10 그들이 다윗에게 고하여 이르되, 우리야가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다윗이 우리야에게 이르되, 네가 여행에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매
11 우리야가 다윗에게 이르되, 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장막에서 머물고 또 내 주 요압과 내 주의 종들이 빈 들에서 진을 치고 있거늘 내가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아내와 함께 누우리이까? 왕께서 살아 계심과 내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다윗은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침부터 심장이 벌렁거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야가 집으로 가지 않고, 왕의 집 문에서 다른 신하들과 함께 머물렀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서는 최대한 점잖게, 그리고 그렇게 큰 관심은 없는 척, 흘려 지나가는 투로, “아니 여행에서 돌아와서 많이 피곤할 텐데, 어찌 집에서 좀 쉬지 않았어?”하고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정말 충신 중의 충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관광여행이나, 해외여행이나, 견학체험학습을 하고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치열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잠시 왕의 소환을 받고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야는 너무나 충성스러운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장막에서 머물고 또 내 주 요압과 내 주의 종들이 빈 들에서 진을 치고 있거늘 내가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아내와 함께 누우리이까? 왕께서 살아 계심과 내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평소 같았으면, 다윗이 너무나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야를 크게 칭찬했을 법한 고백입니다. 또 다윗이 조금이라도 주님 앞에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우리야의 고백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책망과 찔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야가 지금 왕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한 이 일을 지금 행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살아 있는 왕, 다윗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 죄를 감추려는 다윗의 시도(2차)
자신의 죄를 감추어보려던 다윗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너무나 절박해졌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2,13절을 보시겠습니다.
12 다윗이 우리야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에서 머무르라. 내일은 내가 너를 떠나가게 하리라, 하매 이에 우리야가 그 날과 그 다음 날에 예루살렘에서 머무니라.
13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하여금 자기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그가 나가서 자기 주의 신하들과 함께 침상에 눕고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그날 우리야를 불러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두 번째 시도로 술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야가 술에 취하면 집으로 돌아가서 쉴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야의 충성은 술에도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날도 역시 왕의 집 문에서 다른 신하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다윗에게 이러한 충성스러운 훌륭한 신하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디에서 이렇게 귀하고 충성된 사람을 또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과의 동행을 멈추고, 믿음의 전진을 멈춘 다윗에게, 오히려 육신의 거센 흐름 가운데 뒤로 물러나버린 다윗에게, 이러한 충성된 신하는 제거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사울 왕이 다윗에게 하였던 것처럼, 다윗이 우리야에게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 죄를 감추려는 다윗의 시도(3차) - 계획적 살인
이제 우리 함께 14-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야의 손에 보내니라.
15 그가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는 우리야를 맹렬한 싸움의 최전방에 두고 그로부터 물러가서 그가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 요압이 도시를 살피고는 자기가 알기에 용맹한 자들이 있던 장소에 우리야를 배치하니
17 그 도시의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싸울 때에 다윗의 신하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이 쓰러지고 헷 족속 우리야도 죽으니라.
우리는 다윗의 생애 가운데 가장 가증하고, 비열하며, 더럽고, 잔인하고, 추악한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충성된 신하였던 우리야는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살인 청부서를 들고 요압에게 보내어졌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너무나 충성스러운 신하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땅히 자신이 가서 싸웠어야 하는 바로 그 싸움에서, 목숨을 걸고 자기 대신 싸웠던 충성스러운 신하를 고의적으로 죽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성공하였고, 마침내 몇몇의 다른 백성들과 함께 우리야가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습니다. 다윗은 단지 아주 잠깐 동안 집에 머물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간음을 하겠다고 결심한 적이 없었고, 자신의 충성스럽고 무죄한 신하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잠시 믿음의 싸움을 멈추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육신에게 아주 작은 틈을 허용한 것이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 사건의 결말과 하나님의 평가
이제 우리 함께 23-27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3 사자가 다윗에게 이르되, 확실히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해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덮쳐서 성문 입구에까지 이르렀더니
24 활 쏘는 자들이 성벽에서 왕의 신하들을 향하여 쏘므로 왕의 신하들 중에서 몇 사람이 죽었고 왕의 종 헷 족속 우리야도 죽었나이다, 하니라.
25 그때에 다윗이 사자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너는 이 일을 불쾌히 여기지 말라. 칼은 이 사람도 삼키고 저 사람도 삼키나니 그 도시를 향해 더욱 힘써 싸워 그것을 정복하라, 하고 너는 그의 용기를 북돋우라, 하니라.
26 우리야의 아내가 자기 남편 우리야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자기 남편으로 인하여 애곡하니라.
27 애곡하는 일을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니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그러나 다윗이 행한 그 일을 주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죽음을 알리는 사자를 맞이하면서, 너무도 태연하게 원래 전쟁이 그런 것이라고 말하였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 도시를 정복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 양심이 마비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였던 사울 왕조차도 끝까지 살려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자신에게 충성을 하고 있는 무죄한 신하를 죽음을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결국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완벽하게 감추는데 성공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이제는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무엘기하 11장의 모든 말씀을 마치면서, 오직 침묵 가운데 다윗을 지켜보시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짧은 한 문장으로 평가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행한 그 일을 주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니라.”
그 동안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다윗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서 평화와 안식의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방에서 안식을 주셨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평화가 끝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길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고, 정지하였으며, 오히려 뒤로 물러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후로 이어지는 많은 말씀들을 통해서, 다윗이 육신의 길을 선택하였던 결과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일들로 나타나게 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정리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습니다. 이 모든 비극은 다윗이 마땅히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 시점에 집에서 여유를 부린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작점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고,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보였고, 지극히 작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었기에, 믿음의 길에서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이 아니었기에,육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었기에 너무나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믿음의 길에 정지상태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전진하지 않으면, 우리는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전진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형제자매들을 대적하게 될 것이고, 해를 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복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이, 비록 좁고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포기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물러서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연어들이 자신들의 고향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지느러미를 세차게 휘젓는 것처럼,우리도 오늘 비록 미약한 발걸음이라 할지라도,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전진하고, 조금 더 주님과 가깝기를 원합니다.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격려하여 주시고, 믿음의 발걸음을 붙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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