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06.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요 21:15-17)

본문 : 요한복음 21장 15-17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15 ¶ 이처럼 그들이 먹은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요한복음 21장

이번 주일에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진화론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진화론 공부를 마치면서 잠시 성경에 대하여 기초적으로 알아야할 상식을 공부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무엇이냐? 바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그렇다면 신약의 처음 네 권은 무엇이냐?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성경의 순서와 찾는 법을 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사복음서 모든 곳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탕자의 비유와 같이 누가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영광스럽게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씀과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여주시고 또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며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과 함께 끝나는 듯하더니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복음서의 맥락대로라면 이쯤에서 "아멘." 한마디만 더 나오고 끝맺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21장에서 "이 일들 후에"라고 시작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만약 요한복음마저 이렇게 끝났다면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비통하게 울었던 베드로, 이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 우리는 잠시 사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 베드로가 만난 주님을 우리도 만나보기 원합니다.

 

 

 

** 첫 번째 만남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번째 만남은 요한복음 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루를 함께 머무르며 좋은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1,4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1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내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그가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인즉 게바라 불리리라, 하셨는데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라.

저에게는 공식적인, 법적인 이름, legal name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는 로빈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베드로 역시 이러한 식으로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어릴 적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새로 붙여주신 게바란 이름은 아람어, 수리아어로 돌이란 의미이고, 이것을 그리스말, 헬라말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자기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처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자마자 "너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이제는 너를 게바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이라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튜헨리는 성질이 급하고 난폭했던 베드로에게 돌 같고 반석같이 굳건하고 차분한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라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붙여주신 것이 아닌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에 사도행전 4장 13절 말씀을 읽으면서 무식하고 못 배웠다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이제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에 대해 즉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것을 알게 되고” 아하, 머리가 돌 같은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비상한 사람이 되는구나.

 

 

또 다른 한 심리학을 전공한 성경교사는 여러 가지 심리학적인 구분을 따라 베드로를 볼 때 베드로는 때로는 행동파이면서도 잘 바뀌지 않는 고집 세고 굳건한 사람이므로 그 특징을 살려 돌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실 때도 세 번, 부인할 때도 세 번, 다시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도 세 번, 사도행전에서 환상을 보여줄 때도 세 번, 이렇게 세 번씩은 해줘야 변하는 돌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볼 때 베드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출신이었고, 뱃사람이었던 만큼 때론 아주 거칠고 아주 적극적인 행동파이면서도 때론 쉽게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침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가서 하루 밤을 지내며 대화를 나눌 만큼 진리에 갈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 아니면 확신이 가지 않았는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다시 고기잡는 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 두 번째 만남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의 두 번째 만남은 마가복음 1장(16절부터)과 마태복음 4장(18절부터)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6-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6 이제 그분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더라.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즉시 그들이 자기들의 그물들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기를 했지만 아직 계속해서 어부로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을 초청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안드레는 요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지만, 베드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하시니 일단 하던 일을 멈추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 역시 배 안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아버지와 품꾼들을 배 안에 남겨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든 사람이 그 말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왕과 같이 권위 있는 분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부정한 영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시니이다!" 소리칠 때에 그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회당에서 나오셔서는 안드레와 시몬의 집을 방문하셔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초청하셔서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또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까지 베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어떠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을까요? 처음에 자기 형제 안드레가 오더니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해서 한번 가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상상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너무 눈부시고 아름다워서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생 바다 위에서 태양과 파도와 싸워온 자기 못지않게 햇 빛에 그을린 예수님을 볼 때 베드로는 실망을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너를 돌이라 부르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안드레에게 "메시아 맞아?"하고 반문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장모와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을 가지고 다만 열심히 고기잡이를 할 뿐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사람을 그물로 낚을 수도 없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는 일단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놀라고, 부정한 영이 예수님을 가르켜 하나님의 거룩한 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며 놀라고, 예수님의 한 말씀에 부정한 영이 나가는 것을 보며 놀란 베드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베드로의 집에 방문하셔서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 또 이분은 도대체 왜 무식한 어부에 불과하고 죄 많은 나에게 이렇게 찾아오시는가?"

 

 

 

** 세 번째 만남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지만 여전히 어부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 번째 만남을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들으려는 백성들을 갈릴리 바닷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바다로 조금 나아가도록 청하셔서 바닷가에 서있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베드로의 성격상 한 마리라도 잡혀야 직성이 풀릴텐데 끝내 못 잡았으니 상당히 피곤하고 기분이 나쁜 상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배 안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고 건성건성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신다기 보다 왠지 모르게 베드로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일부로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셨고 시몬 베드로를 배에 태운 채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말씀을 다 마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자"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이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 5:5)

아마도 안드레가 같이 배 안에 있었고 저기 멀리에는 친구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한번 던져서 끌어당기는데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이봐! 야고보! 요한! 좀 도와줘!" 야고보와 요한이 능숙하고 신속하게 배를 몰고 와서 함께 물고기를 잡아 올립니다.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도 베드로와 함께 밤새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물을 끌어올려 양쪽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우니 얼마나 무거웠던지 배가 가라앉으려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갑자기 무릎을 꿇습니다. "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까 떠나세요! 나는 주님을 대면하여 대화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사람 잘못보신거 아닙니까? 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어부일 뿐 아니라 뱃사람이라 거칠고 죄 많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뭐라고 응답하셨을까요? "알아, 너 죄인인거 다 알아. 그래서 내가 너를 찾아온거야. 용서해주고 고쳐주려고. 이제부터 너는 나와 함께 사람을 낚아 구원하는 어부가 되는거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오해하기 때문에 주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르는 두 가지를 알려주기 원하시는데, 한 가지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우리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거칠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악하고 어리석고 둔한 사람인지 모를 때에만 교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과 계시를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기 원하시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크게 감사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의 빛 가운데 더 가까이 나아가서 자신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본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크게 감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죄 많은 자인지를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므로 주님께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베드로는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아시고도 자신을 찾아주시고 제자로 불러주신 의아하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

우리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듯이 돌이란 이름을 가진 베드로는 뭐든지 아주 분명하게 알고서야 넘어가는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꼭 나중에 따로 찾아와서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질문하는 제자가 베드로였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하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건너 제자들에게 올 때에 정말 주님이시라면 자신을 바다 위를 건너오도록 불러달라고 요청한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다음날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언급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실 때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장막을 셋을 짓겠다고 말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우리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하셨을 때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엘리야다, 침례자 요한이 부활한 것이다, 예레미야다" 말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확신에 차서 고백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수업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서 집중하여 듣고 집에 가서는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는 훌륭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였고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시고 왕이 되실 때에 자기도 열두 보좌 중 한자리를 맡아서 통치할 영광을 그리며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사모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꾸짖기까지 하면서 소리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호통을 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람의 아들이 배반을 당해 넘겨지실 것과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일으켜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큰 소리로 예수님을 만류할 수 없게 된 베드로는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하시려는 일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배반당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나만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도 실족하지도 않으리라. 주님이 죽으셔야 한다면 나도 같이 죽으리라." 아주 비장하게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들은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데에도 갈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 날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안다는 것을 세 번 부인하리라."

 

 

 

** 베드로의 실패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모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셨고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집회장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사람들이 앉은 곳에 함께 앉았습니다. 어떤 하녀가 베드로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헛기침을 하며 "새벽날씨가 쌀쌀하지요?" 한마디 건넵니다. 하녀는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에이 이 여자가, 나는 그 사람 누군지도 몰라." 말하며 자리를 일어납니다.

 

 

자리를 떠나 현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또 다른 사람이 "너도 그들과 한패지."라고 묻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난 아니야." 이제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지 궁금하고 걱정되던 베드로, 또 두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충격을 받은 베드로, 지금 베드로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아주 자신 있게 단언하면서 말합니다. "너 갈릴리 사람이고 또 말투도 들어보니까 딱 예수님과 한패 맞잖아!" "아 진짜 내가 맹세한다 맹세해! 내 말이 틀리면 내가 저주받는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 "꼬끼오"

 

 

누가복음 22장 말씀 60-62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60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가 아직 말할 때에 즉시 수탉이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62 나가서 비통하게 우니라.

이때 주님은 어떠한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을까요? "너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해?"하면서 째려보셨을까요? "거봐 내 말이 맞았지? 역시 넌 안돼."하면서 비웃는 눈빛으로 보셨을까요? "그래도 널 가장 믿었는데, 실망이야 베드로"하는 실망의 눈빛이었을까요?

 

 

베드로와 마주친 주님의 눈빛은 여느 때와 똑같이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온유한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돌이킨 뒤에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과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죄 많고 자격이 없던 나를 불러주셨던 주님인데, 내가 이렇게 저주하며 맹세하며 예수님을 배반하다니! 나는 정말 더럽고 가증한 사람이로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죄인이로구나. 이 세상 그 누가 나만큼 죄인일 수 있을까! 이제 주님을 다시 볼 수 없을거야. 난 더 이상 제자가 될 자격이 없어." 주님이 알고 계셨던 베드로의 모습을 베드로는 이제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 부활하신 주님

이제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려고 준비했던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자기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베드로를 위하여 특별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라고 하시며 베드로를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이 소식을 들은 요한과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와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평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의 믿음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특별히 무대를 설정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만나기는 했으나 예수님이 안 계신 지금 딱히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던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너도나도 덩달아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너무 오랜만에 그물을 던진 것인지 밤새도록 잡아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제 아침이 되었고 바닷가에 한 사람이 서있습니다. "이보시오, 물고기 좀 잡았소이까?" "못 잡았는데요?!" "배 오른편에 던져보시오!"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주님인 것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 외치자 그물을 끌어올리던 베드로는 어부의 덧옷을 걸치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배 위로 끌어올리기를 포기하고 배와 그물을 함께 바닷가로 끌고 옵니다. 밤새 고기를 못 잡았다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은 상황은 베드로가 주님 앞에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하며 엎드릴 때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세 번째 만났을 때 벌어진 일인데, 지금 이 일 역시 부활하신 주님과 세 번째로 만나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똑같은 무대를 설정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같이 추운 새벽바다에 흠뻑 젖은 베드로는 물고기와 빵이 놓여있는 숯불과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숯불을 바라보는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날 밤에 앉아서 불을 쬐던 모습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느라 고생한 제자들과 함께 빵과 생선을 구워 배불리 먹여주십니다.

 

 

이제 주님이 말문을 여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부르셨던 그 이름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만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 나의 부족함, 나의 문제,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다가도 누군가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넘어질지 어떻게 실패할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참되게 만나게 된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이 죄냐 아니냐, 큰 죄냐, 어디까지 지켜야하는 의무이냐를 따지고 계산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베드로를 먼저 찾아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매순간 방문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많은 물고기로 채워질 수 없듯이 오늘의 우리의 삶도 주님 외에 그 무엇으로도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사랑하신 주님, 실패하고 넘어져도 여전히 변함없이 찾아와 주시는 주님을 더 많이 만나기 원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gospels/43john/43john211517_peter_20060906_robin.html

티스토리 https://robinlee.tistory.com/230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gloryever/38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robin1611/222072019913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robinbox/50

 

2006.05.2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 1:1)

본문 : 요한복음 1장 1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집중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을 더 알고자 하여 샅샅이 찾아보고 외우고 필기하고 정리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군사로서 또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종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의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갈급하고 목마르며 허기진 양으로서, 갓난아기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꿀처럼 달고 너무 맛있어서 한번 듣고 읽었던 말씀, 내 안에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묵상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할까요? 학생처럼, 군사처럼, 종처럼, 또 양처럼, 갓난아기처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원래 설교를 훈련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 것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우리 서 목사님께서 그렇게 배우는 것이 설교를 훈련하는 입장이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유익하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바로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요?

 

1절을 보면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는 “그분께서”라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분에 의해”라는 것은 바로 “그 말씀에 의하여”라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서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그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5절은 그 분 안에, 즉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요, 빛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 나온 침례인 요한은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온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에 다시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도 문맥을 따라 계속해서 “He”라고 불리는 “그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11절에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분도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드디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읽고 묵상하는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불리신 우리 주님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원래의 이름은 바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 구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문맥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나타난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과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 "그 말씀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여기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여기서 우리가 영접한 분의 이름이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말씀”이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에서는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이름, 주께서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이름 중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다섯 군데만 성경을 함께 찾아서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6절을 볼 때 물과 피로 오신 분, 즉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언하는 분으로서 나타나실 때는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요? 다만 지식으로, 명령으로, 법칙으로 대하기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대하듯이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더 알기 원하는 사모함은 우리의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알기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는 다만 명령과 법칙을 대하면서 그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2. 현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한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까지 하늘에서 가지셨던 이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골로새서 1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2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비라는 것은 쉽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합니다. 26절을 보시면 이 신비는 여러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 곧 우리와 같이 더럽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29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이 일을 위해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그분의 활동에 따라 싸우며 수고하노라.”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속에는 "성령 충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수고와 애씀은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려고 풍선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압축기에 연결된 호스에서 버튼만 누르면 강력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바울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섬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속에는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거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바로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그리스도는 이상한 느낌이나 감정이나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바로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유익을 다 발견하자면 평생을 묵상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신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절과 7절의 앞부분을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4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은 4절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거하시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말씀이 거하시는 것을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태초부터 하늘에 거하셨던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안에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주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살아 계신 주 예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러한 주 예수님을 더 알게 되기 원합니다.

 

 

3.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이름 또한 “말씀”이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나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이 부분은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을 마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면,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오셔서 온 땅을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때 주 예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과 1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명백히 드러내시며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실 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시고 우리를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내시는 분은 바로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주 예수님의 이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에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접한 분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 원하십니다. 또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곧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이며, 말씀을 무시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시인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이며,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알거나 모르는 지식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키고 못 지키는 율법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태초부터 말씀이셨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거하시고, 앞으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실 살아 계신 주 예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또 우리 각 지체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살아 계신 주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무슨 지식을 알고 무엇을 잘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예언에 정통했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알았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많은 지식과 의로운 행실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역사와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목표와 소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친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gospels/43john/43john0101_christtheword_20060524_robin.html

티스토리 https://robinlee.tistory.com/226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gloryever/32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robin1611/222071440354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robinbox/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로빈


2001년 어느 날 - 첫 번째 설교훈련 / 이승선(19세)


제목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본문구절 -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 저는 오늘

저는 오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해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잠깐 기도하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멀고도 험한, 그렇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권력이 바로 인생의 열쇠이며 길이라고들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이고, 뭐고, 즐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복된 길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정말, 한번뿐인 인생,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많은 생각들과 많은 계획들을 합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고, 가정도 꾸리고, 재산도 어느 정도 모았고, 자녀들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 분가한 시점이 되면, 사람들은 이만하면 좋은 길로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난 과거를 매우 후회하면서 “그때 그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닌데”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여러분이 걸어온 인생길에 만족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후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여러분의 지나온 인생길에 이름을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젊으신 분들은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미래의 인생길에 이름을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돈의 길? 명예의 길? 권력의 길? 쾌락의 길?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름을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봉사의 길? 사랑의 길? 한번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여러분과 한시도 끊임없이 동행했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아니,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과 떼어놓을 수 없는 그런 사이입니다.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줄곧 여러분과 동행해 온 친구입니다. 나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쑥쑥 튀어나와서 나의 인생길을 장식해 놓은 그것!

그것의 이름은 바로 죄악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길에 대해서 정직하게 이름을 붙이신다면 ‘죄악의 길’이라고 붙일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사실이 아닙니까?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을 생각하든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입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죄악의 길에 머물러 있는 이상 여러분은 언젠가 그 죄악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인생길에 이런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다 같이 잠언 14장 12절 말씀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사망의 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 나가는 길을 걸어왔다 할지라도 또는 그런 길을 계획하고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끝은 사망의 길로 끝날 것입니다. 자, 주의해서 말씀을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읽는다.) 예, 그 끝은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코, 그 끝이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끝은 사망이 아니라, 사망의 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죽음 뒤에 무엇인가 이어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사람들에게, 바로 여러분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사망의 길인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히 9:27) 

죽음의 길 뒤에는 심판의 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뒤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걸어왔던 길은 죄악의 길이요, 그 끝은 죽음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길 다음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이 지금 가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태까지 걸어왔던 그 길,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서 있던 그 길, 곧 죄악의 길이요, 죽음의 길, 파멸과 멸망의 길인 그곳에서 반드시 벗어나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길로 곧장 간다면 지금은 아무리 좋아 보일지라도 영원한 불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라는 새로운 길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 어떤 사람들은 이슬람교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수억만 가지의 서로 다른 종교들을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서로 다른 길이라고. 서로 길은 다르지만, 결국은 한곳으로 통한다고들 말합니다. 서로 방법들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내가 바로 길이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하고, 도덕적이며, 존경받는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가고 있는 길이 선행의 길이요, 봉사의 길이요, 종교적 열심의 길이요, 미덕의 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럴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죄인에 불과한 우리들이, 죄악에 찌든 우리들이, 죄를 처벌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죄를 정결케 하시는 보배로운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 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죄인인 우리들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어주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의 죄악의 길, 사망의 길,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제시하신 그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만든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끝까지 자기의 길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거부하고서야 어떻게 그분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사 55:7)

죄악에 찌들어서 여태까지 걸어왔던 그 길에서, 그 죄악의 길, 자기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하면 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자신이 말하는 바를 진리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타당한 이유들이나 증거들로 설명하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자기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얼마 전 제가 한 모슬렘교도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수많은 종교들을 연구하고,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상들과 가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다 사실 곧, 진리가 아니라 그중 하나만이 진실이며, 진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질문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많은 사상들과 종교들 중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까?”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리입니까? 불교에서는 자비와 미덕을 베푸는 것을 통해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미사와 고백성사라는 것을 통해, 또 여러 가지 다른 많은 선한 봉사들을 통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아프리카 어떤 종교는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죽음 뒤의 심판을 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또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양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죄를 해결해 보려고 길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슬렘교도 역시 어릴 때부터 그 종교를 배우며 자라났지만, 그 종교는 그로 하여금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도록 만들었습니다. 진짜 진리, 그것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습니다. 과연 무엇을 통해 나의 죄를 씻을 수 있는가? 과연 무엇이, 나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줄 것인가?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는 어디 있는가? 이렇게 질문들을 던지고 있을 때,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이분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란 분은 누구시길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옛날, 인도에 썬다 씽이라는 복음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힌두교 신자였으나,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헌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한 신학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신학자가 썬다 씽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썬다 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도덕적 기준이나 교훈에 관한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그 신학자는 웃으면서, 그것 말고 다른 사상적인 차이점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썬다 씽의 대답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수억만 가지 종교가 있더라도 모든 종교가 요구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바로,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선행과 고행과 봉사와 눈물과 결심으로! 나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든 또는 아무리 형편없고 죄악에 찌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 중 과연 무엇이 진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진시황제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진시황제는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부와 권력, 명예와 쾌락!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흠모할 만한 좋은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자신의 죽음과 함께 끝나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불로초’라는, 먹으면 영원히 산다는 전설의 풀을 찾으러 신하들을 이리 저리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것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자신의 생명을 돈과 바꾸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순간의 쾌락과 바꾸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명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약 4:14)


우리의 생명은 안개와 같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시황제는 이점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현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풀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도 진시황제와 같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입니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명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죄악된 생명이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생명이 여러분의 생명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악된 생명을 대신해서 희생할, 죄 없으신 한 분의 생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생명을 소유하신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곧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존경할 만한 많은 말들을 남겼습니다. 말뿐 아니라 그의 삶 또한 존경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참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왜 죽었습니까? 그 역시 수많은 훌륭한 명언들과 좋은 말들을 남겼습니다. 아주 강직하고, 간사함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그 끝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 역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죽으셨습니까? 그분은 도대체 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우리 죄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 (마 20:28). 

이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죽어 갔습니다. 단지 많은 훌륭한 말들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이 분은 바로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분이 생명을 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죄 없으신 그분, 진리 자체이신 그분이 여러분의 생명을 대신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만 되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구주, 즉 구원자이십니다. 여러분의 죄악된 생명을 대신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생명 자체가 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 같이 성경 요한복음 10장 18절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빼앗을 자고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죽으실 만한 어떤 악한 일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자신을 변명하지도,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단지 너무 선한 사람 이어서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목적은 죄악에 찌든 우리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를 잇는 길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들에게 진리가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분의 목적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악된 생명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분은 죽은 뒤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만약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죽어서 썩어버렸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생명을 다시 얻을 권세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 마무리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악된 길에서 벗어나기 원하신다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참된 진리를 찾으신다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신다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고, 여러분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대로 죽음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말릴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리가 아닌 거짓에 계속 머무르고자 한다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죽음의 길에서 죄악된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이미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서 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길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은 이미 진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를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은 이미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gospels/43john/43john1406_iamtheway_2001_robin.html

티스토리 http://robinlee.tistory.com/200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gloryever/11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robin1611/221351408574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robinbox/22

* 설교 일시 : 2006.09.06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http://robinbox.net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 (요 21:15-17)

(요 21:15-17) 『15 이처럼 그들이 식사를 한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요한복음 21장
이번 주일에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진화론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진화론 공부를 마치면서 잠시 성경에 대하여 기초적으로 알아야할 상식을 공부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무엇이냐? 바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그렇다면 신약의 처음 네 권은 무엇이냐?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성경의 순서와 찾는 법을 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사복음서 모든 곳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탕자의 비유와 같이 누가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영광스럽게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씀과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여주시고 또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며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과 함께 끝나는 듯 하더니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복음서의 맥락대로라면 이쯤에서 "아멘." 한마디만 더 나오고 끝맺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21장에서 "이 일들 후에"라고 시작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만약 요한복음마저 이렇게 끝났다면 우리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비통하게 울었던 베드로, 이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 우리는 잠시 사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 베드로가 만난 주님을 우리도 만나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만남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번째 만남은 요한복음 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루를 함께 머무르며 좋은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1,4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가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인즉 게바라 부르리라, 하시니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라."
저의 법적인 이름, legal name은 현균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부르는 이름은 승선입니다. 어릴 적 동네에서 불리던 이름도 승선입니다. 그리고 영어로는 로빈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베드로 역시 이러한 식으로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어릴 적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새로 붙여주신 게바란 이름은 아람어, 수리아어로 돌이란 의미이고, 이것을 그리스말, 헬라말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자기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처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자마자 "너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이제는 너를 게바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이라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튜헨리는 성질이 급하고 난폭했던 베드로에게 돌 같고 반석같이 굳건하고 차분한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라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붙여주신 것이 아닌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에 사도행전 4장 13절 말씀을 읽으면서 무식하고 못 배웠다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이제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게 되고" 아하, 머리가 돌 같은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비상한 사람이 되는구나. 
또 다른 한 심리학을 전공한 성경교사는 여러 가지 심리학적인 구분을 따라 베드로를 볼 때 베드로는 때로는 행동파이면서도 잘 바뀌지 않는 고집 세고 굳건한 사람이므로 그 특징을 살려 돌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실 때도 세 번, 부인할 때도 세 번, 다시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도 세 번, 사도행전에서 환상을 보여줄 때도 세 번, 이렇게 세 번씩은 해줘야 변하는 돌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볼 때 베드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출신이었고, 뱃사람이었던 만큼 때론 아주 거칠고 아주 적극적인 행동파이면서도 때론 쉽게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침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가서 하루 밤을 지내며 대화를 나눌 만큼 진리에 갈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 아니면 확신이 가지 않았는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다시 고기잡는 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의 두 번째 만남은 마가복음 1장(16절부터)과 마태복음 4장(18절부터)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분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자기들의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기를 했지만 아직 계속해서 어부로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을 초청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안드레는 요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지만, 베드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하시니 일단 하던 일을 멈추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 역시 배 안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아버지와 품꾼들을 배 안에 남겨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든 사람이 그 말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왕과 같이 권위 있는 분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부정한 영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시니이다!" 소리칠 때에 그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회당에서 나오셔서는 안드레와 시몬의 집을 방문하셔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초청하셔서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또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까지 베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어떠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을까요? 처음에 자기 형제 안드레가 오더니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해서 한번 가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상상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너무 눈부시고 아름다워서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생 바다 위에서 태양과 파도와 싸워온 자기 못지 않게 햇빛에 그을린 예수님을 볼 때 베드로는 실망을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한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너를 돌이라 부르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안드레에게 "메시아 맞아?"하고 반문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장모와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을 가지고 다만 열심히 고기잡이를 할 뿐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사람을 그물로 낚을 수도 없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는 일단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놀라고, 부정한 영이 예수님을 가르켜 하나님의 거룩한 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며 놀라고, 예수님의 한 말씀에 부정한 영이 나가는 것을 보며 놀란 베드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베드로의 집에 방문하셔서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 또 이분은 도대체 왜 무식한 어부에 불과하고 죄 많은 나에게 이렇게 찾아오시는가?" 

세 번째 만남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지만 여전히 어부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 번째 만남을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들으려는 백성들을 갈릴리 바닷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바다로 조금 나아가도록 청하셔서 바닷가에 서있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베드로의 성격상 한 마리라도 잡혀야 직성이 풀릴텐데 끝내 못 잡았으니 상당히 피곤하고 기분이 나쁜 상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배 안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고 건성건성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신다기 보다 왠지 모르게 베드로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일부로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셨고 시몬 베드로를 배에 태운 채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말씀을 다 마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자"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이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아마도 안드레가 같이 배 안에 있었고 저기 멀리에는 친구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한번 던져서 끌어당기는데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이봐! 야고보! 요한! 좀 도와줘!" 야고보와 요한이 능숙하고 신속하게 배를 몰고 와서 함께 물고기를 잡아 올립니다.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도 베드로와 함께 밤새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물을 끌어올려 양쪽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우니 얼마나 무거웠던지 배가 가라앉으려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갑자기 무릎을 꿇습니다. "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까 떠나세요! 나는 주님을 대면하여 대화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사람 잘못보신거 아닙니까? 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어부일 뿐 아니라 뱃사람이라 거칠고 죄 많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뭐라고 응답하셨을까요? "알아, 너 죄인인거 다 알아. 그래서 내가 너를 찾아온거야. 용서해주고 고쳐주려고. 이제부터 너는 나와 함께 사람을 낚아 구원하는 어부가 되는거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오해하기 때문에 주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르는 두 가지를 알려주기 원하시는데, 한가지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우리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거칠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악하고 어리석고 둔한 사람인지 모를 때에만 교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과 계시를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기 원하시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크게 감사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의 빛 가운데 더 가까이 나아가서 자신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본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크게 감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죄 많은 자인지를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므로 주님께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베드로는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아시고도 자신을 찾아주시고 제자로 불러주신 의아하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
우리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듯이 돌이란 이름을 가진 베드로는 뭐든지 아주 분명하게 알고서야 넘어가는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꼭 나중에 따로 찾아와서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질문하는 제자가 베드로였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하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건너 제자들에게 올 때에 정말 주님이시라면 자신을 바다 위를 건너오도록 불러달라고 요청한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다음날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언급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실 때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장막을 셋을 짓겠다고 말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우리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하셨을 때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엘리야다, 침례자 요한이 부활한 것이다, 예레미야다" 말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확신에 차서 고백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수업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서 집중하여 듣고 집에 가서는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는 훌륭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였고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시고 왕이 되실 때에 자기도 열두 보좌 중 한자리를 맡아서 통치할 영광을 그리며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사모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꾸짖기까지 하면서 소리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호통을 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람의 아들이 배반을 당해 넘겨지실 것과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일으켜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큰 소리로 예수님을 만류할 수 없게 된 베드로는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하시려는 일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배반당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나만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도 실족하지도 않으리라. 주님이 죽으셔야 한다면 나도 같이 죽으리라." 아주 비장하게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들은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데에도 갈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 날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안다는 것을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실패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모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셨고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집회장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사람들이 앉은 곳에 함께 앉았습니다. 어떤 하녀가 베드로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헛기침을 하며 "새벽날씨가 쌀쌀하지요?" 한마디 건넵니다. 하녀는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에이 이 여자가, 나는 그 사람 누군지도 몰라." 말하며 자리를 일어납니다. 자리를 떠나 현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또 다른 사람이 "너도 그들과 한패지."라고 묻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난 아니야." 이제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지 궁금하고 걱정되던 베드로, 또 두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충격을 받은 베드로, 지금 베드로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아주 자신 있게 단언하면서 말합니다. "너 갈릴리 사람이고 또 말투도 들어보니까 딱 예수님과 한패 맞잖아!" "아 진짜 내가 맹세한다 맹세해! 내 말이 틀리면 내가 저주받는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 "꼬끼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즉시 수탉이 울더라.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
이때 주님은 어떠한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을까요? "너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해?"하면서 째려보셨을까요? "거봐 내 말이 맞았지? 역시 넌 안돼."하면서 비웃는 눈빛으로 보셨을까요? "그래도 널 가장 믿었는데, 실망이야 베드로"하는 실망의 눈빛이었을까요? 
베드로와 마주친 주님의 눈빛은 여느 때와 똑같이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온유한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돌이킨 뒤에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과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죄 많고 자격이 없던 나를 불러주셨던 주님인데, 내가 이렇게 저주하며 맹세하며 예수님을 배반하다니! 나는 정말 더럽고 가증한 사람이로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죄인이로구나. 이 세상 그 누가 나만큼 죄인일 수 있을까! 이제 주님을 다시 볼 수 없을거야. 난 더 이상 제자가 될 자격이 없어." 주님이 알고 계셨던 베드로의 모습을 베드로는 이제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이제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려고 준비했던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자기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베드로를 위하여 특별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라고 하시며 베드로를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이 소식을 들은 요한과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와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평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의 믿음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특별히 무대를 설정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만나기는 했으나 예수님이 안 계신 지금 딱히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던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너도나도 덩달아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너무 오랜만에 그물을 던진 것인지 밤새도록 잡아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제 아침이 되었고 바닷가에 한 사람이 서있습니다. "이보시오, 물고기 좀 잡았소이까?" "못 잡았는데요?!" "배 오른편에 던져보시오!"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주님인 것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 외치자 그물을 끌어올리던 베드로는 어부의 덧옷을 걸치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배 위로 끌어올리기를 포기하고 배와 그물을 함께 바닷가로 끌고 옵니다. 밤새 고기를 못 잡았다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은 상황은 베드로가 주님 앞에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하며 엎드릴 때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세 번째 만났을 때 벌어진 일인데, 지금 이 일 역시 부활하신 주님과 세 번째로 만나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똑같은 무대를 설정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같이 추운 새벽바다에 흠뻑 젖은 베드로는 물고기와 빵이 놓여있는 숯불과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숯불을 바라보는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날 밤에 앉아서 불을 쬐던 모습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느라 고생한 제자들과 함께 빵과 생선을 구워 배불리 먹여주십니다. 

이제 주님이 말문을 여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부르셨던 그 이름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만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 나의 부족함, 나의 문제,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다가도 누군가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넘어질지 어떻게 실패할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참되게 만나게 된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이 죄냐 아니냐, 큰 죄냐, 어디까지 지켜야하는 의무이냐를 따지고 계산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베드로를 먼저 찾아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매순간 방문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많은 물고기로 채워질 수 없듯이 오늘의 우리의 삶도 주님 외에 그 무엇으로도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사랑하신 주님, 실패하고 넘어져도 여전히 변함 없이 찾아와 주시는 주님을 더 많이 만나기 원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5.2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http://robinbox.net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 1:1) 

제목 :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집중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을 더 알고자 하여 샅샅이 찾아보고 외우고 필기하고 정리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군사로서 또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종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의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갈급하고 목마르며 허기진 양으로서, 갓난아기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꿀처럼 달고 너무 맛있어서 한번 듣고 읽었던 말씀, 내 안에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묵상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할까요? 학생처럼, 군사처럼, 종처럼, 또 양처럼, 갓난아기처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좀더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원래 설교를 훈련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 것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우리 서 목사님께서 그렇게 배우는 것이 설교를 훈련하는 입장이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유익하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바로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요?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는 "그 말씀이"라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에 의하여"라는 것은 바로 "그 말씀에 의하여"라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서는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그 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5절은 "그 분 안에", 즉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요, 빛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 나온 침례인 요한은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온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에 다시 "그가 세상에 계셨고"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도 문맥을 따라 계속해서 "He"라고 불리는 "그"는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11절에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분도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드디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읽고 묵상하는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불리신 우리 주님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원래의 이름은 바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 구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문맥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나타난 "그를 영접한 사람들"과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 "그 말씀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여기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여기서 우리가 영접한 분의 이름이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말씀"이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에서는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경배하고 주의 자애하심과 주의 진리를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이름, 주께서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이름 중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다섯 군데만 성경을 함께 찾아서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요일 5:5-7)『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외에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니,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니라.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시라.』
6절을 볼 때 "물과 피로 오신", 즉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로서 나타나실 때는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요? 다만 지식으로, 명령으로, 법칙으로 대하기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대하듯이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더 알기 원하는 사모함은 우리의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알기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는 다만 명령과 법칙을 대하면서 그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2. 현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한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까지 하늘에서 가지셨던 이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골로새서 1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2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요함이 어떠한지를 알리고자 하셨으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비라는 것은 쉽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합니다. 26절을 보시면 이 신비는 여러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 곧 우리와 같이 더럽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29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 분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며 애쓰노라."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속에는 "성령충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수고와 애씀은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려고 풍선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압축기에 연결된 호스에서 버튼만 누르면 강력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바울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섬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속에는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거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바로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그리스도는 이상한 느낌이나 감정이나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바로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유익을 다 발견하자면 평생을 묵상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신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절과 7절의 앞부분을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4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은 4절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거하시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말씀이 거하시는 것을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태초부터 하늘에 거하셨던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안에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주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살아 계신 주 예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러한 주 예수님을 더 알게되기 원합니다. 

3.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이름 또한 "말씀"이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13절은 다같이) 이 부분은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을 마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면,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오셔서 온 땅을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때 주 예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13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오직 만물이 우리가 회계해야 하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게 되느니라.』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명백히 드러내시며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실 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시고 우리를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내시는 분은 바로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론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주 예수님의 이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에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접한 분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 원하십니다. 또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곧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이며, 말씀을 무시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시인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이며,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알거나 모르는 지식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키고 못 지키는 율법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태초부터 말씀이셨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거하시고, 앞으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실 살아 계신 주 예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또 우리 각 지체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살아 계신 주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무슨 지식을 알고 무엇을 잘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예언에 정통했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알았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많은 지식과 의로운 행실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역사와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목표와 소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친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2003.10.2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1세)
제목 : 성경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ible(요 5:39,40)
본문 : 요한복음 5장 39-40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장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 40절 두 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9 ¶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40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경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ible)”입니다.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앞에 섰지만 저의 어떠함을 보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여 유익을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말씀에 기름 부어 주시고 저를 붙들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 생명의 검색엔진
오늘의 본문 39절은 “성경을 탐구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탐구하라”는 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Search”인데, 이것은 성경을 찾고 뒤지고 수색하고 추구하며 유심히 살펴보고 탐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두컴컴한 밤에 서치라이트를 환하게 비추어 구석구석을 살피듯이 우리는 성경을 향해 우리의 서치라이트를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이 아주 발달되어서 백과사전이나 책을 많이 뒤지지 않아도 웬만한 자료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와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이트를 보통 “서치엔진”, “검색엔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검색엔진”을 통하여 많은 전문지식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 목사님의 통풍에 관해서 잘 정리한 사이트를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와, 요즘에는 의사들이 보는 두꺼운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쉽게 이런 정보들을 구할 수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은 바로 주 예수님과 생명을 제공하는 검색엔진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이용하듯이, 매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성경의 검색엔진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공해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바로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주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며, 주 예수님을 만나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생명이신 주 예수님
주 예수님께서는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주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바로 생명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요 6:48). 

오늘날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죄인이 새 생명을 얻고 거듭나기 위해서도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며, 이미 생명을 얻어 그분의 양무리가 된 교회도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기 위하여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주 예수님 없이는 생명의 탄생도, 생명의 자라남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생명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합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주 예수님은 분명 우리의 생명을 풍성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안타깝게도 주님의 생명을 풍성히 얻고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은 생명을 풍성케 하려고 오셨지만 우리는 정작 그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생명으로 거하시지만 우리는 그 생명을 충만히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생명을 얻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상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주 예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하고 사모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풍성히 얻어 주 예수님처럼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애통하고 눈물도 흘리며 매번 새롭게 결심합니다. “오늘은 반드시 이 생명으로 살리라!”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생명을 풍성히 얻기 위해 주님 자신에게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실생활 가운데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너무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늘 생명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우리는 생명을 풍성히 얻기 위하여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 주님께 나아가는 것 - 성경을 탐구함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의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오늘날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주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셋째 하늘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진지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도 있고, 교회의 집회 가운데 나아와 주님의 임재를 찾을 수도 있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려고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본문 안에서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곧 “성경을 탐구하라”는 말씀과 하나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에는 말씀에 기록된 약속을 붙잡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교회의 집회 가운데는 기록된 말씀의 선포가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데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 예수님께 생명이 있고, 성경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자라남은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서는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찾고 샅샅이 탐색하고 공부할 때 생명을 풍성히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풍성히 얻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기초요 믿음의 기초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사상과 말들로부터 벗어나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상고하지 않으면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탐구하지 않으면 결코 생명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루 10분 성경을 찾으면 그 만큼 성장하는 것이고, 하루 1시간 성경을 상고하면 그 만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되찾으라.”하셨고 “심는 대로 거둔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생명의 말씀에 시간을 투자할 때 우리는 그 만큼 생명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넘어지고 무능하고 실패하는데 있지 않고 주님과 멀어진 데에 있습니다. 주님과 멀어진 원인은 우리가 죄를 지은 것에 있지 않고,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말씀 앞에서 풀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성경을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다만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 않으셨고, “성경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77편 6절에서는 “밤에 부른 나의 노래를 기억하고 내 마음과 이야기하며 내 영이 부지런히 살펴 이르기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라는 말씀의 영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탐구하라”는 단어와 같은 “Search”입니다. 탐구한다는 것은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라는 것은 다만 쭉쭉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머물러서 깊이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7장에서는 성경을 상고하는 한 무리, 베레아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자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12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믿고 또 그리스 사람인 귀부인들과 남자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리하더라. (행 17:11,12). 
베레아 사람들은 다만 말씀을 전심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말들이 그런가 하여 매일 성경을 탐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가 오늘 본문과 같은 단어입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매일 성경을 탐구하고 그러한가 살폈습니다. 그 결과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매일 읽어나갈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묵상하고 찾아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지속되는 추구가 있을 때 그 결과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 생명 = 빛
요한복음 1장 4절
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생명이 자라난다는 것은 곧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이고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인식이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할 때 빛과 계시와 인식을 얻게 됩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 119:130).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취는 빛이 바로 우리의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우리가 빛을 얻을 때 생명을 더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는 것에 근거합니다. 모르는 사실을 믿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은 결단력과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온전히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모든 문제가 말씀에서 빛을 얻는 것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자라는 문제는 오직 빛과 계시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빛과 계시는 내 안을 들여다보고 나를 살피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탐구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찾고 탐구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빛과 계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빛과 계시를 얻을 때 생명을 풍성히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카톨릭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 수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죽임을 당하던 시대를 가리켜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대를 우리는 “암흑시대”, “빛이 없는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카톨릭은 일반인들에게는 성경을 금서로 정하였고, 오직 성직자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오직 로마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고자 하여도 당시에는 성경에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성경을 탐구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탐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가 가지는 참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역사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95개조 반박문을 드높이고 그의 용기를 칭송할지 모르겠지만 마틴 루터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보급한 것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자국의 모든 사람들이 빛과 계시를 얻을 수 있도록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 성경입니다. 암흑시대를 종결하는 찬란한 빛 가운데로 인류를 인도한 위대한 역사는 마틴 루터가 이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이룩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마틴 루터가 아닌 성경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암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의 면에서 보자면 황폐하고 메마른 시대라고 말할 수 있고, 빛의 면에서 보자면 암흑과 같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마귀는 사람들의 손에서 성경을 강제로 빼앗고 성경을 읽고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원수는 그보다 더 교묘하게 우리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있습니다. 세상의 분주한 소식들과 생활 속의 시끄러운 환경들로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전한 흑암 가운데로 빠질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풍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메마른 이유는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서, 즉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에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간을 생명으로 여기고 사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명은 풍성해 질 수도 자라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자라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야위고 약해지고 황폐해져 갈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두컴컴한 흑암의 시대를 뚫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찬란하게 비춰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사명을 짊어져야 합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 5:39).
우리를 무겁게 하고 분주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 우리에게 주신 복 - 진리의 말씀, 진리의 영, 진리의 기둥과 터전
우리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원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이 생명을 풍성히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얻고자 하는 원함보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원함이 더 크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성경을 탐구하여 빛과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까이 다가서셔서 우리에게 풍성히 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빛과 계시를 풍성히 얻지 못하는 이유는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간절히 사모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과 생명을 풍성히 주시고자 주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바로 주 예수님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 말씀을 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넘치는 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경의 저자이신 진리의 영을 내주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 “저자 직강”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진리의 기둥과 터전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안배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며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생명 얻기를 사모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히 복 주시며 풍성히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나는 부요하다”, “배부르다”하는 생활 태도입니다. 오, 주께서 우리에게 가난한 영을 허락하시고 갈급함을 허락하시기 원합니다. 


** 실제적인 변화
우리가 생명을 풍성히 얻고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실제적인 시간표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잠자는 시간이 바뀌어야하고, 우리의 일어나는 시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게으르고 태만한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성경을 상고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며 형제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둘째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인용한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 말씀에 이어지는 6,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고
7 너는 그것들을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가 네 집에 앉을 때에든지, 길을 걸을 때에든지, 누울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을 말할 것이며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는 말씀을 마음속에 두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해 말하고,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 그 말씀들에 관해 말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기 위하여 시간을 따로 때어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바로 우리의 실제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의 시간동안 성경을 상고하고 있습니까? 하루에 얼마나 자주 성경 말씀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모였을 때 대화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어떠했을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성경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길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할 때만이 길을 얻고 생명을 얻고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으로 돌아갈 때 주 예수님을 만나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생활에 실제적인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 결론 - 성경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우리의 믿음 생활이 완전히 성경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패의 원인은 오직 성경에서 멀어진 데에 있습니다. 죄를 짓고 실패를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과 멀어진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생명을 추구한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을 상고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추구한다는 말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내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성경이며, 우리의 생명의 기초도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잠 8:17).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 주시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gospels/43john/43john053940_backtothebible_20031022_robin.html
티스토리 http://robinlee.tistory.com/13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gloryever/22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robin1611/221358565818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robinbox/3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