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6.05.24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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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 1:1) 

제목 :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집중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을 더 알고자 하여 샅샅이 찾아보고 외우고 필기하고 정리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군사로서 또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종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의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갈급하고 목마르며 허기진 양으로서, 갓난아기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꿀처럼 달고 너무 맛있어서 한번 듣고 읽었던 말씀, 내 안에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묵상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할까요? 학생처럼, 군사처럼, 종처럼, 또 양처럼, 갓난아기처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좀더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원래 설교를 훈련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 것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우리 서 목사님께서 그렇게 배우는 것이 설교를 훈련하는 입장이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유익하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바로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요?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는 "그 말씀이"라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에 의하여"라는 것은 바로 "그 말씀에 의하여"라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서는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그 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5절은 "그 분 안에", 즉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요, 빛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 나온 침례인 요한은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온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에 다시 "그가 세상에 계셨고"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도 문맥을 따라 계속해서 "He"라고 불리는 "그"는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11절에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분도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드디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읽고 묵상하는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불리신 우리 주님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원래의 이름은 바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 구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문맥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나타난 "그를 영접한 사람들"과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 "그 말씀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여기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여기서 우리가 영접한 분의 이름이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말씀"이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에서는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경배하고 주의 자애하심과 주의 진리를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이름, 주께서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이름 중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다섯 군데만 성경을 함께 찾아서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요일 5:5-7)『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외에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니,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니라.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시라.』
6절을 볼 때 "물과 피로 오신", 즉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로서 나타나실 때는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요? 다만 지식으로, 명령으로, 법칙으로 대하기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대하듯이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더 알기 원하는 사모함은 우리의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알기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는 다만 명령과 법칙을 대하면서 그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2. 현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한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까지 하늘에서 가지셨던 이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골로새서 1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2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요함이 어떠한지를 알리고자 하셨으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비라는 것은 쉽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합니다. 26절을 보시면 이 신비는 여러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 곧 우리와 같이 더럽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29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 분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며 애쓰노라."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속에는 "성령충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수고와 애씀은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려고 풍선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압축기에 연결된 호스에서 버튼만 누르면 강력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바울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섬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속에는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거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지혜로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바로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그리스도는 이상한 느낌이나 감정이나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바로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유익을 다 발견하자면 평생을 묵상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신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절과 7절의 앞부분을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4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은 4절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거하시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말씀이 거하시는 것을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태초부터 하늘에 거하셨던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안에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주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살아 계신 주 예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러한 주 예수님을 더 알게되기 원합니다. 

3.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이름 또한 "말씀"이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13절은 다같이) 이 부분은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을 마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면,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오셔서 온 땅을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때 주 예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13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오직 만물이 우리가 회계해야 하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게 되느니라.』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명백히 드러내시며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실 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시고 우리를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내시는 분은 바로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론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주 예수님의 이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에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접한 분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 원하십니다. 또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곧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이며, 말씀을 무시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시인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이며,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알거나 모르는 지식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키고 못 지키는 율법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태초부터 말씀이셨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거하시고, 앞으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실 살아 계신 주 예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또 우리 각 지체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살아 계신 주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무슨 지식을 알고 무엇을 잘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예언에 정통했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알았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많은 지식과 의로운 행실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역사와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목표와 소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친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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