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31.일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눅 19:1-10)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안녕하세요? 오늘은 2006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에게 이런 뜻 깊은 시간에 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우리 그레이스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신 서충원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수요일 기도모임 때 설교를 해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주일날 예배 때 설교를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제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하는 태도로 듣지 마시고,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구하고 찾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는 결코 마법의 지팡이라든지 뭔가 신비한 힘을 가진 지팡이가 아니었고, 일반 다른 나무 막대기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손에 들려있었을 때에 이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기도 했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한 청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까지 읽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거기를 지나가시더라.

2 보라, 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들 가운데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3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서

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5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

6 그가 속히 내려와 기쁘게 그분을 받아들이거늘

7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주시고 또 저의 입술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누가복음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저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한 형이 있습니다. 또 그 형에게는 식당을 하시는 외숙모가 계셨는데 그 때 그 형이 그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형이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식당에 가서 외숙모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외숙모 오늘 삭개오 이야기 들었어요." 그랬는데 외숙모가 설교시간에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약간 당황한 이 형은 아니 성경에 삭개오가 나오니까 설교를 들은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일본 사람도 성경에 나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중에서도 삭개오의 이름을 듣고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삭개오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누가복음이 어떤 책인지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사복음서라고 불리는데 네 권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지, 어떻게 이 세상을 사셨는지,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복음서를 자세히 읽고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같은 이야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복음서를 기록하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기록되었고 그에 맞춰서 왕의 계보로 시작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므로 아무런 족보나 탄생의 기록이 없이 바로 종과 같이 열심히 일하고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은 읽어버려진 죄인들인 우리들을 찾아 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크리스마스가 있었는데, 여러분 말구유에 놓이신 아기 예수님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의 2장 16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말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찬송가 "저 들을 밖에 한 밤 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이 찬송가에 나오는 목자들도 역시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또한 유일하게 예수님의 열 두 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록해 주고 있는 복음서도 누가복음입니다. 백 마리 양을 가진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산 넘고 물 건너 골짜기를 지나 양을 찾아 기쁘게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복음서도 역시 누가복음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탕자의 비유 역시 누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잃어버린 동전과도 같고, 길 잃은 어린양과 같고,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나갔다가 모두 허비하고 탕진하여 거지가 된 아들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삭개오의 이야기도 바로 10절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가나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전에 이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님을 향하여 아프리카 가나로 가서 복음을 전할 뜻을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가나 말고 동남아 필리핀은 안되겠습니까? 아프리카 가나는 의료시설이라든지 아이들 교육시설도 너무 안 좋고 모기 한번 잘못 물리면 말라리아로 죽을 수도 있다는데요. 필리핀도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한국에서 살다가 아프리카 가려니 쫌 그러네요. 주님 아프리카만은 피해주옵소서."

몇날며칠 오랫동안 이렇게 주님과 씨름을 하며 버티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한국하고 비교가 안되는 하늘에서 살았어. 너 하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니? 내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잃어버린 너를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비천하고 가난하게 되었는지 아니? 내가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동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거 잊어버렸니? 내 사랑을 아직 모르겠니!?"

그리고 그 선교사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잃어버려진 나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을 입으신 하나님!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제가 왜 아프리카에 못 가겠습니까? 한국에서 안락하게 살던 것이 어찌 하늘의 영광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든 보내주옵소서!"

오늘 우리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잃어버린 자

여러분, 이제 2006년 한 해가 지나가고 우리 앞에 새 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새 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 내년에, 또 그 이후에 펼쳐질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는 새 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이곳 캐나다에서는 "Happy New Year"이라고 말하는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돈을 아끼고 많이 벌어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구두쇠라고 놀려도 내 지갑에 또는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을 보면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돈을 조금 못 벌더라도 또 많은 돈을 건강식품에 투자하더라도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젊어 보인다든지 피부가 아기 피부 같다든지 하는 말을 들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기 위해 지치고 힘든 삶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각기 다른 생활의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삭개오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열심히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행복"이란 친구는 그다지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이 몰려옵니다. 이제 좀 편하겠지 싶으면 또 일들이 뻥뻥 터집니다. 우리들은 아주 잠시 약간의 행복을 느끼면,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꿈꾸지만 그 꿈은 어김없이 산산이 깨어지고 맙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지만 또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걱정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인생 길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이별하고 헤어지고 외롭고 혼자 있고 쓸쓸할 때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맞습니까?

제가 일하는 석기시대라는 삼겹살 집이 있는데요, 99% 이상의 손님이 두 명 이상 짝을 지어옵니다. 가끔 혼자 와서 식사하고 가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분들을 보면 솔직히 좀 쓸쓸해 보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그다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밌는 영화도 혼자 보면 재미없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혼자 알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을 때 교회 안에서 신랑신부가 탄생되고 우리 청년부는 멋있는 축가를 준비해서 부른 적이 있었는데요, 신부가 축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 우리 축가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정도구나." 생각을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축가를 부를 때 신랑신부는 몸을 돌려서 우리 청년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방향에 신부 아버지,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신부 어머니는 울고 계셨고, 그것을 본 신부도 같이 울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기쁘고 축복된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릴까요? 바로 이별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시집을 보내는 거니까.

저는 밴쿠버에 온지 약 8개월 되었는데요, 한국에서 이곳으로 출발할 때, 제가 외아들인데 저희 어머니는 1년 간 아들과 떨어진다는 사실에 많이는 아니지만 살짝 우셨습니다.

저는 외아들이어서 어릴 적에 성격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지금도 많이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 있다 보니까 이기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유치원 정도의 나이였는데 한번은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노는데 장난감을 제가 하나도 못 가지고 놀게 했지요. "내꺼야." 그리고 그 친구는 조금 놀다가 재미가 없으니까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지요. 왜 울었겠습니까? 이제 다시 혼자 놀아야 한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 놓느냐면요, 우리 모두가 이별의 상처를 가진 잃어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깊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버림받은 마음, 잃어버려진 마음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찮은 일을 시킬 노예가 부족하거나 또는 힘든 일들을 처리해줄 일꾼이 필요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나눠주고자 자신과 똑같은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나이드신 사모님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응애하고 우는 이유는 바로 "버리운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버리운 마음", 바로 "버림받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행복하고 만족하기 위하여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가져도 결코 채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득의 증대로 만족하지 못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사람의 마음속에 거대하게 뚫려있는 구멍, 그 구멍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이제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제가 노래하나 불러보겠습니다.

나는 인생에 산과 들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내가 얻은 건 공허와 깊은 실망 귀한 세월만 다 보냈네

어느 날 주님이 나를 부르시어 사랑의 품에 안으실 때

나는 주님께 매혹돼 이끌리어 인생의 참뜻 알게됐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마음,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마음,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완전히 만족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 삭개오는 어떤 사람

자, 그러면 이제 삭개오 이야기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 삭개오는 1절에 나온 것처럼 여리고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리고라는 도시는 저 옛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첫 번째로 무너뜨리신 가나안 땅의 거대한 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에 살던 사람들의 큰 죄악 때문에 여리고를 저주하셨습니다. 보통 전쟁을 하고 나면 많은 전리품을 얻는데, 이 여리고는 완전히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리품도 취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기고 금과 은과 옷을 전리품으로 숨겼던 아간이라는 사람은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돌에 맞아죽는 큰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고 명령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초를 놓을 때 장자가 죽을 것이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가 죽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였는데요, 이것은 아합 왕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사람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히엘이 기초를 놓을 때 첫 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왕상 16:34).

이후에 헤롯왕이 이 여리고에 많은 요새들을 짓고 도시를 발전시켰습니다.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분위기라기 보다는 로마식 건물과 로마의 분위기가 더욱 강했던 여리고에 살고 있던 삭개오에 대해서 2절에서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였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라고 하면 그는 곧 죄인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의 앞잡이로서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돈을 빼앗아 로마에 바치고 또 동시에 자기도 부자가 되는 못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가 과거에 일본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에 있었던 친일파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카이사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느냐 틀리냐로 상당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말하자면 민족의 배반자요 변절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단순히 세리였을 뿐만 아니라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의 대명사 아니겠습니까? 삭개오는 당시 여리고에서 아주 악명 높은 세리장이었을 것입니다. 또 부자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뒤에 8절에서 삭개오가 스스로 고백하는 말을 참고해 볼 때 삭개오는 거짓 고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았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동족들에게서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삭개오에게 돈을 뜯긴 유대인이라면 삭개오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온갖 욕을 다 퍼붓지 않겠습니까? 너가 사람이냐부터 시작해서 십원짜리, 이십원짜리, 소, 말, 돼지 등 갖가지 욕이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삭개오에 대한 설명이 한 가지 더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일반 사람들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고 가려져서 예수님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에서는 삭개오에 대한 많은 설명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가지는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삭개오라는 사람은 키가 작은 것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키 큰 사람들은 인기도 많고 사람들에게 대우도 잘 받는데, 키가 작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접을 받습니다. 보통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봐도 키 큰 친구들은 잘 나가는데 작은 친구들은 무시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초대 왕을 세울 때 사울의 키가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컸기 때문에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처럼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며 대우하는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대체로 버릇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기적인 것이 무엇인지, 버릇없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도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잘못되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본성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과나무는 너무나 커서 사과를 백 개 열고 어떤 사과나무는 작아서 한 두 개만 열릴지라도 근본 뿌리는 다 같은 사과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큰 죄인이라서 살인 강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조금 착한 죄인이라서 마음 속에서만 미워하고, 마음 속에서만 살인하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근본은 다 같은 죄인, 죄의 나무인 것입니다.

이 삭개오는 다만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 맺힌 한 잃어버린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 역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지라도 다만 열매가 조금 덜 맺힌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이 삭개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던 삭개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보고, 또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이 삭개오는 결국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큰 배신감과 상처로 아파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어떤 특정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군대를 현역으로 가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청에서 정보통신과라는 부서에 지정을 받아서 시청을 돌아다니며 컴퓨터를 고쳐주는 일을 했었는데요, 하루는 기업지원과에 가서 컴퓨터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고장낸 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어떤 문제인지를 파악하고 앉아서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공익이세요?"하고 질문을 하길래, "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겁니다. 단순히 반말이 아니고 저를 무시하면서 대하는 겁니다. 이건 뭐 나이로 따지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이냐 공익근무요원이냐에 따라서 존대말과 반말이 나눠진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람이란 존재는, 우리 모두는 아주 단순하고 때론 아주 유치합니다. 내가 인정을 받으면 행복하고, 내가 무시를 당하거나 푸대접을 받으면 마음이 상합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높으신 정치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별 것 아닌 걸로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손가락질이야?", "이 사람? 이게 어따 대고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은?", "당신 몇 살이야?" 뭐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한심한 웃음을 짓지만 돌아서면 우리가 다 이렇게 유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말 한마디에 서운해서 더 이상 얼굴을 보기조차 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관심과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활짝 열려버리는 이렇게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강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젠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작은 몸집을 가지고 직접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었던 탓에 삭개오는 세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자기 뒤에 로마 황제를 든든한 힘으로 삼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평소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신출내기 세리가 된 삭개오는 엄청난 성과를 올리며 로마 정부에 많은 세금을 걷어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고소를 해서 세금을 왕창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제 삭개오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슬슬 피해 다닙니다. 물론 뒤에서는 욕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삭개오 앞에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이제 의기양양하게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덧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크고 멋있는 집에서 하인들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세리 마태

이 누가복음에는 세리의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중 두 가지를 삭개오와 연결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5장은 한번 같이 펴보시겠습니다. 27절부터 32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7 이 일들 후에 그분께서 나아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29 레위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푸니 세리들과 또 그들과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의 큰 무리가 거기 있더라.

30 그런데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대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등장했던 한 세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레위였습니다. 이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입니다. 이 세리 마태가 바로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기 갈릴리에서 잘나가던 세리 마태가 갑자기 사표를 내더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대사회에서는 세리라는 사람들이 죄인들이요 민족들의 배반자라고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 세리들끼리는 똘똘 뭉쳐서 아주 긴밀하게 소식들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지신 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와서 자기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유대사회에서는 큰 소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

이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들의 배를 채우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인들인 세리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자기들과 한 편이 되어 바리새인이 될 줄 알았던 이 예수님이 갑자기 세리를 제자로 삼다니, 바리새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또한 세리들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유대민족의 왕따 집단인 세리들에게 이렇게 따듯하게 접근하시는가?

세리 마태는, 아니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마 마태 역시 세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부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의 집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또 많은 세리들이 모였습니다. 또 잔치가 크게 개방되어 있었던지 몇몇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리 마태는 이 잔치를 열면서 그 동안 함께 친하게 지내온 동료 세리들에게 자신이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신이 왜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서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리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의 병이 든 우리들을 고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가 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열이 납니다. 이때 어떻게 해서든 콧물만 막아내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어떻게 해서든 기침을 참으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콧물이나 기침이 아니라 콧물과 기침을 만들어 내는 감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짓말을 조금 덜 하도록 잘 참고, 화를 내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도록 꾹꾹 참는다고 해서 우리의 죄의 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의 병이 치료될 때 콧물도 안나오고 기침도 안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참 의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의 죄인들의 대명사라 불리는 세리들을 먼저 찾아가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 세리의 기도

이제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9장의 바로 앞에 있는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18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9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직전에 먼저 등장하는 이 세리의 기도. 아마 삭개오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라새인과 같이 "나는 이렇게 의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했습니다"하는 기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정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가식으로 다가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정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부끄러운 모습, 어리석은 모습, 지치고 힘든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진실한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키가 작으면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잘 못하면 비웃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실수를 하면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기도하며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아주십니다.

** 삭개오를 찾아오신 하나님

삭개오는 이제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왔고 부자가 되어서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아직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또 아무리 많은 재산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텅 빈 마음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인생의 참 뜻을 알게 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삭개오를 만나주시려고 기나긴 여정의 방문일정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오기까지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기 위해서 거의 6개월 정도전부터 서류와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위험한 일들은 무엇인지 조심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숙지하고, 책도 읽고 인터넷도 보고 여행자 보험도 들고 하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어느새 밴쿠버에 와서 잘 지내고 있지만 여기에 오기까지는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삭개오를 방문하시기까지도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우주를 너머선 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이 땅에 방문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외로움과 뜻 모를 그리움과 공허함에 사로잡혀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려고 직접 사람이 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고 계십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몰려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신 주목적은 바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고생과 수고로 가득한 인생 속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던 삭개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에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삭개오는 이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가 기대하며 예수님을 보고자 하지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가려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뜻하지 않은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가 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이 삭개오는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져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셨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 왜 가다가 멈추셨는지 기웃기웃 쳐다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예수님은 오늘 반드시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너가 초대해 주면 내가 가고 아니라도 나는 갈 곳이 많은데 어쩔거야? 빨리 말해. 나 바쁘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리고에 찾아온 목적은 바로 잃어버려진 너를 찾고 구원하기 위한거야."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은 우리들의 손님이 되시고, 친구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은 9절에서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삭개오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거짓 고소하여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 인생의 변화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언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언제 만족할 수 있으며 언제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여기 누가복음 19장에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돈을 악착같이 긁어모으던 한 사람이, 부당하게 취한 돈을 네 배로 갚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놀라운 변화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 이상 삭개오에게 있어서 행복의 근거는 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인생의 참 뜻을 알게되고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죄를 선택하였고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시 행복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시끄럽게 지낼지라도 사람의 허전한 마음은 완전히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또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우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고자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는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은 잃어버려진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특별한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거절하실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려진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 1:15).

** 초청

다 같이 눈을 감아주십시오.

혹시 이 자리에 나는 아직 한 번도 예수님을 나의 개인의 구원자로 영접한 적이 없다, 나는 오늘밤 눈을 감아서 다시 떠지지 않을 때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100퍼센트 확신이 없다는 분이 계시다면 잠시 손을 들어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눈을 떠보니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10년 뒤에 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기회가 주어질 때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체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원한 삶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할 심판과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의 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된 증거로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감사하게 믿고 받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믿겠다고 결심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기도할 때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의 어떠한 노력이나 의로운 일들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다는 이 간단하고도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또한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이미 구원을 받은 형제자매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지치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날마다 오고가는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항해 중 파도는 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를 세심하게 인도하시고 날마다 동행하시는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주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이 계속해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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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0.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설교 / 로빈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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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반드시(눅 19:1-10)

 

이승선

 

안녕하세요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누가복음 19장 1-10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거기를 지나가시더라.

보라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서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삭개오속히 내려오라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하시니

그가 속히 내려와 기쁘게 그분을 받아들이거늘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께 이르되주여보소서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하시니라.

 

오늘 저는 오늘 내가 반드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시작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성경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바로 키가 작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는죄 많은 세리들의 우두머리 삭개오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지어떻게 구원을 받고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귀한 이야기입니다보통은 10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구원 받지 않았던잃어버린 삭개오를 어떻게 주님께서 찾으시고 구원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의미로 많이 설교되어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말하자면복음을 전하기 위한,복음 설교로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구원이라는 주제보다는 삭개오가 주님과 만났다는만남이라는 주제로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한 번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여리고

1절에 등장하는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이곳 여리고라는 장소는 구약시대에 여호수아가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무너뜨렸던 도시였습니다하나님께서는 이 도시가 너무나 가증스럽고 죄악이 많았기 때문에이 도시의 모든 물건을 저주하셨고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물건도 전리품으로 취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그러나 잘 아시는 것처럼아간이라는 사람이 금덩이와 좋은 옷을 숨겼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리고를 결코 다시 세우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이스라엘의 타락한 왕,아합 왕의 시대에 이 여리고성이 재건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자가 여리고를 건축하여그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문들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타락하고 저주받았던 도시 여리고를 예수님께서 지나가시게 된 것입니다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연히 지나가시게 된 것이 아니라반드시 하실 일이 있으셔서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신 것이었습니다그 목적은 바로 5절에서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삭개오를 만나기 위함이셨습니다.

 

 

삭개오

2절에서 소개되어지고 있는 삭개오라는 사람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여기서 세리라는 직업은 과거 우리나라의 친일파 앞잡이와 같이 자기 민족을 팔아서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당시 이스라엘을 식민지 삼았던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탈하여 세금을 바치고자기들의 배도 채우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그런데 삭개오는 이러한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또 손가락질을 받는 매국노이며죄인이었는지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또한 삭개오는 3절에 나타난 것처럼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사람들의 무리 속에 있으면 앞사람 등짝만 보이는아주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그는 아마도 자신이 키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더욱 독하고 강하게 백성들을 탄압하였을 것입니다그래서 세리들의 우두머리라는 높은 자리까지 당당하게 올라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들의 우두머리였던 삭개오에게 너무나 신기한 소식이 들렸는데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우리 함께 누가복음 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누가복음 5장 27-32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7 이 일들 후에 그분께서 나아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나를 따르라,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29 레위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푸니 세리들과 또 그들과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의 큰 무리가 거기 있더라.

30 그런데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대며 이르되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하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하시니라.

 

바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레위는 바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던 마태입니다마태는 세금 받는 곳에 앉아서 돈을 세고 있었습니다그의 마음속에는 양심의 가책도 있었을 것이고인생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런데 바로 그러한 마태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나를 따르라.”라고 초청하여 주셨던 것입니다마태는 자격이 없는 자기를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을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갔습니다모든 것을 버려두고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29절에서 우리가 읽은 것처럼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이 잔치는 자기와 같은 세리들을 위한 잔치였습니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언제나 자기들을 미워하고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결코 대화도 하지 않는 죄인으로 대우하였는데예수님께서는 더럽고 자격이 없는 자기 자신을 따듯하게 사랑해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다른 세리들에게도 주님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가 있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거룩하게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야하는데어찌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즐겁게 대화하고 섞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 31-32절의 말씀으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하시니라.

 

삭개오는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을 것입니다세리들죄인들을 따듯하게 대해주시는 분그러한 죄인들에게 바로 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분바로 내가 그러한 자들을 회복시키는 의사라고 말씀하신 분내가 온 목적은 의로운 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모아 회개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사랑과 긍휼의 주 예수님에 대하여 삭개오는 충분히 들어보았을 것입니다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마침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적극성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와 만나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에 대하여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데세 가지의 인물 구성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첫 번째는 삭개오라는 인물이고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고세 번째는 예수님입니다먼저 우리는 삭개오가 주님께 나아간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성경에서는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도대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어떤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시는지너무나 궁금해서 주님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과연 나 같은 사람도 만나면 긍휼히 여겨주실지정말 나 같은 죄인을 불러서 회개하게 하려고 오신 분인지,정말 나 같이 더러운 죄인세리들의 우두머리인 나 같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분인지삭개오는 너무나 간절하게 주님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의 주변에 밀려드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어부 출신의 무식하고 거칠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켜서라고길을 열라고 외치면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호위하고 있었고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하는 다른 호기심 많은 사람들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할 때우리에게는 장애물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때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고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우리가 믿음을 가지고자 할 때다른 형제자매들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믿음에서 물러서는 일들이 발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정말 주님만 사랑해볼라고 하는데저 형제저 자매만 보면 교회에 정이 떨어지고교회에 나오는 것이 힘들게 되는 일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지체들이 내가 주님께 나가는 것을 도와줘야 되는데그것을 막아서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삭개오가 주님을 보지 못하도록 막아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도 아니었고로마의 병사들도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그러나 삭개오는 그러한 일들을 개의치 않았습니다그는 거기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그는 앞으로 달려갔습니다이번 기회에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으로 달려갔습니다세금을 약탈하기 위해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면서 걸었던 그였지만이번에는 절박하게 앞으로 달려갔습니다주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과 사모함으로 그는 달려갔습니다.

 

또한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이것은 정말 세리들의 우두머리로서 너무나 스타일을 구기는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원숭이처럼또는 어린 아이처럼그는 나무에 폴짝 뛰어 매달려 기어 올라갔다는 것입니다사람들이 그를 보게 되면놀림거리가 될 것이 뻔했습니다. “웬 꼬맹이가 나무 위에 올라갔나 해서 봤더니 난쟁이 삭개오였어그러나 좀만 착하게 살면 키가 한 뼘은 크겠다.” 등등 많은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주저없이 하였던 것입니다.그에게는 단 한 가지 간절함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꼭 좀 봐야겠다예수님을 꼭 좀 만나고 싶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간절함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기도를 할 때예배에 참석할 때,이러한 사모함이 있기를 원합니다내가 오늘 반드시 주님을 만나고야 말겠다내가 오늘 반드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도무지 안 되겠다는 절박함이 있기를 원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어려움과 방해를 적극적으로 극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이처럼 우리의 믿음의 삶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세상과 마귀는 늘 우리를 밀어내고자 합니다많은 경우 사탄은 믿음의 지체들을 통하여 우리를 막아서려고 할 것입니다그 때에 우리는 삭개오처럼 굴하지 말고앞으로 달려 나가기 원합니다.손가락질을 받는 부끄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뽕나무 위에 올라가기 원합니다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절박함과 간절함과 사모함이 우리의 마음에 뜨겁게 불타기를 원합니다.

 

 

사람들

이번에는 두 번째 인물 구성으로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앞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사람들은 삭개오가 주님께 다가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그들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는 그 순간에도 수군거리면서 비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하더라.

사람들은 이렇게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는 것을 보며 수군거렸습니다. 7절에 보시면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때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수군거렸다는 것입니다삭개오는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아주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삭개오를 만나셨다는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그것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지금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인데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지금 삭개오에 대해 수군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군거렸던 이유는 첫 번째로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삭개오를 가리켜서 죄인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다.” 그 말은 자기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는 의미인 것입니다자기 자신은 의롭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수군거렸던 이유는 두 번째로 그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자기보다 자격이 없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 집에 오시지왜 저 집에 가셨을까왜 하필 저 사람 집이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부흥하고주님을 만나고주님을 섬기며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수군거리는 자들 중에 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우리는 누군가가 헌신하여 주님을 섬기고자 할 때교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그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어떠한 수군거리는 말을 반드시 듣게 될 것을 마음에 대비하여야 합니다예수님의 발에 향유 옥합을 부었던 마리아도 제자들로부터 크게 비난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섬겼던 사도 바울도 여러 지역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평가를 받고판단을 받고배척을 받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심지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선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의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것입니다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간다면비방과 오해와 수군거림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오늘 우리가 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면으로 사람들이 삭개오에 대해 수군거린 것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그는 죄인이 맞았습니다사람들은 있는 사실 그대로 수군거린 것입니다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당하는 비방과 수군거림 가운데에는잘못된 오해도 있을 수 있지만있는 사실 그대로인 것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모든 말들에 대해겸손하게, “아멘저는 죄인입니다그래서 저에게 오늘 주님이 필요합니다오늘 내가 반드시 주님을 만나고주님과 동행하기 원합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사람들의 평가나 어떠한 말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삭개오속히 내려오라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 쪽으로 걸어오셨습니다그리고 그곳에 이르사 발걸음을 멈추시고 삭개오를 바라보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예수님께서는 그를 올려다보고 계셨습니다이것은 상징적으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겸손한 모습으로 삭개오를 찾아오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사람세리들의 우두머리 삭개오를 만나기 위하여천국의 모든 영광을 다 내어버리고더러운 마구간의 말구유에 태어나신 사랑과 겸손과 온유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삭개오는 난생 처음으로 예수님을 보았는데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삭개오속히 내려오라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하였지만주님은 우리를 알고 계셨습니다.우리는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지만주님은 오늘 우리의 신음과 아픔과 상처와 어려움을 모두 아십니다우리는 그저 주님을 바라볼 뿐이지만주님께서는 먼저 입을 열어 우리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속히 내려오라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그것이 얼마나 단호하고 강한 의지이며주님의 뜻이었는지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반드시 너를 만나야 하겠노라오늘 내가 반드시 너와 머물며 동행해야 하겠노라.” 삭개오가 마음속으로 내가 오늘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하겠다.”라고 결심한 것을 주님께서 들으시고똑같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반드시 너와 함께 머물겠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 잠언 8장 17절 말씀입니다오늘 우리가 반드시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주님께서도 오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머물겠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우리 주님께서는 기꺼이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어주셨고죄인인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이러한 분이십니다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이 수군거린다 할지라도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사람들이 다 비난한다 할지라도그분은 삭개오를 반드시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정리

여기에 함께 모인 우리 성도님들 모두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우리가 삭개오처럼 지옥에 갈 처지의 죄인들은 아니지만우리가 함께 말씀을 살펴본 것처럼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는 그 과정을 우리의 믿음의 삶에 적용해 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삭개오가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을 만나기를 원했는지그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힌다 할지라도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그 행동이 너무나 우습고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라 할지라도자기가 예수님을 만나는 그 자체가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그는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오늘 우리에게는 그러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습니까오늘 내가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겠다하는 그러한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예수님께서는 저주받았던 도시 여리고를 방문하시면서가장 더럽고 죄인이라고 소문이 났던 삭개오라는 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 만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이처럼오늘 주님께서는 오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머물겠다라는 뜻을 가지고 우리 각자를 방문하여 주십니다.우리가 얼마나 큰 실패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우리가 얼마나 큰 영적인 침체기에 있다 할지라도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냉랭하다 할지라도주님께서는 오늘 내가 반드시 너와 만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8절 말씀을 읽은 것처럼주님을 만난 이후의 삭개오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이러한 변화는 그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렇게 변화되려고 한다면그것은 너무나 힘들고 또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고 시급한 일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우리가 오늘 반드시 주님을 만나고주님과 함께 머무르며동행하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2.06.12.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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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를지니라(눅 9:23)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입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나를 따를지니라입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따를지니라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를 따라가는 기나긴 여행의 길입니다우리는 처음 태어났을 때 부모님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우리는 엄마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엄마라고 계속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엄마라고 따라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또 우리는 사람들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잼잼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따라하게 되었습니다.요즘 승연이는 물티슈를 뽑아주면 방바닥을 닦는 행동을 하는데그것은 할머니나 엄마가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 자라나게 되면 자신보다 조금 큰 형이나 누나오빠나 언니가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잘 구분하지 못할 때에도 무조건 따라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또 아이가 더 자라나 여러분과 같은 학생의 나이가 되면 친구들이 하는 말투를 따라하거나웃는 소리를 따라하거나걷는 모습을 따라하거나행동하는 습관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유명한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하기도 하고유명한 영화의 한 장면을 따라하기도 하고유명한 만화의 대사를 따라하기도 합니다이렇게 사람은 자라나면서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때로는 재미있어서 따라하기도 하고때로는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기도 하고때로는 존경스러워서 따라하기도 할 것입니다우리는 오늘 누구를 따라가고 있습니까우리는 오늘 누구를 닮으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를지니라.”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정확하고 분명하게 우리가 따라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세상에서 가장 선하신 분세상에서 가장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분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으신 분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우신 분세상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야말로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유일한 모범이 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알려주고 계십니다첫 번째 방법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누가복음 9장 2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거절하며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내가 원하는 것내가 생각하는 것내가 주장하는 것내가 고집하는 것,내가 열망하는 것나의 뜻을 부정하고 거절하며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자체를 부정하고 거절하며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처럼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자존심을 부정하며때로는 나의 유익을 거절하고때로는 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며때로는 나의 기분을 무시하고때로는 나의 아픔과 상처까지도 철저히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더럽고 죄 많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대신 고통과 모욕과 수치를 다 견디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그렇게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나의 기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나의 뜻을 고집부리며나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표시는 사랑과 부드러움과 온유와 겸손인 것입니다.

 

형제의 기쁨을 위해 나의 슬픔을 받아들이며자매의 유익을 위해 나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며형제의 높아짐을 위해 나의 낮아짐을 기뻐하며자매의 만족을 위해 나의 불만족을 내려놓는 길이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며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믿음의 길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어느 날 갑자기 나이가 스무 살,서른 살이 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매순간 우리의 선택의 문제인 것입니다나 자신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선택하며나 자신을 부정하고 형제자매를 선택하는 매순간의 선택이 모아져서 주님을 따르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저는 우리 모두가 참되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교회에 모여서 종교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성경을 잘 암송하고문제를 잘 맞추며아는 찬송도 많고기도도 잘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잘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표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부인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은 이사야서에서 고통의 사람이요 슬픔의 사람이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예수님은 잠을 잘 처소도 없이 여행을 다니셨고늘 피곤하고 굶주리는 삶을 사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주셨고생명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이제 이러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를 따를지니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두 번째 방법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주님을 따르는 길은 한 달 동안 쉬다가 하루 동안 벼락치기로 몰아서 갈 수 없습니다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길은 날마다 걸어가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날마다 걸어가는 믿음의 삶이 진짜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일요일날 교회에 왔을 때만믿음이 있는 척학교에 나와서 선생님들과 함께 할 때에만 올바른 척 하는 것은 가짜 믿음의 삶입니다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사람들의 칭찬이나 평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오직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자기 십자가를 주셨습니다십자가는 사람을 처형하는 도구입니다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진다는 뜻이 아닙니다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함께 펴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인정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죽은 사람이 모욕을 당한다할지라도 반응할 수 없고죽은 사람이 손해를 당한다할지라도 대항할 수 없는 것처럼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우리는 참된 사랑과 겸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욕이 나오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요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만약 우리가 죽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참을 필요도 없이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나는 십자가에서 죽고오직 내 안에 강력한 활동으로 역사하시며 살아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우리는 신비한 믿음의 삶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화가 나올 상황에서 화가 나오지 않고욕이 나올 상황에서도 욕이 나오지 않고오히려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폭포수같이 흘러넘치는 거대한 믿음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내가 억지로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나는 십자가를 지고 성령 충만을 힘입어 주님의 성품인 사랑과 겸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이 말씀은 바울이 매일 자살을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이 말씀은 바울의 육신이 날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에 넘겨지고 바울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며 역사하시는 길을 따라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정리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고주님을 따르고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그러나 참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자신을 부인하며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고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주님을 따르며또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척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6장 27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영광 중에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이요그때에 그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먼저 예수님께서 더럽고 죄 많은 나를 위해 그렇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갚을 수 없는 뜨거운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또 오늘 우리가 손해보고 희생한 모든 것들을 놀랍고 찬란한 영광 중에 다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오늘 누구를 따르고 있습니까기도하겠습니다

설교 일시 : 2010.05.23 / 설교 장소 의정부 임마누엘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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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용기(눅 12:6-7)

 

안녕하세요저는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온 이승선 형제라고 합니다현재 서울침례신학교에 공부하면서특별히 이번에 학생들이 각 지역교회를 방문해서 설교하는 일정을 가지게 되어서 저는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이곳에 설 수 있도록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신학생이니까 설교 어떻게 잘하나 보자.” 이렇게 듣지 마시고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은혜와 진리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2장입니다누가복음 12장 6절과 7절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참새 다섯 마리가 이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히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오늘 저는 참 용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여러분 점심식사도 하시고 이렇게 오후예배에 앉으시면 정말 피곤하시죠잠시 다 같이 기지개를 좀 피시고목도 좀 돌리시고어깨도 돌려주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기 원합니다잠이 좀 깨셨습니까?

 

 

문맥 이해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서 먼저 잠시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2장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우리가 함께 읽은 7절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4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또 11절 뒷부분을 보시면 염려하지 말라.”, 22절에서도 염려하지 말라.”, 29절에서는 마음에 의심하지도 말라.” 또한 32절에서는 적은 양 무리여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제자들에게 실제적으로 닥친 두려움은 가장 먼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이었던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그리고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한 장 앞으로 가셔서 누가복음 11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을 맹렬히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1장 44절에 보시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위선자들아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46절 보시면 율법사들아너희에게도 화가 있을지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온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도자요스승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율법사들을 향해 폭탄발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아멘옳소!”라고 함께 외치기보다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지금 예수님이 왜 자꾸 이러시지이 사람들 건드려서 좋을게 하나도 없는데...”라고 초조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53절과 54절을 보시면 당시에 분위기를 잘 볼 수 있습니다. “53 그분께서 이것들을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하여 그분이 많은 것을 말씀하시게 하고 54 또 그분을 기다리며 그분을 고소하려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것을 붙잡으려 하더라.

 

이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어떤 말실수가 나오기만 하면 고소하려고 주의 깊게 들으면서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제자들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고 집에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2,3절에서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대해 말씀하시고이제4절과 5절의 말씀을 주십니다한번 저와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시작)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이르노니몸을 죽이고 그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너희가 두려워할 분을 내가 미리 너희에게 알려주리니 곧 죽인 뒤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능이 있으신 그분을 두려워하라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그분을 두려워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몸을 죽이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지옥에 던져 넣는 권능이 있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앞으로 이어지는 말씀들은 이렇게 가장 강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시는데 무엇이 두렵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새도 돌보시는 창조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로 두려움이 임합니다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시선의 두려움또 먹고살 걱정으로 인한 경제적인 두려움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또 건강이 좋지 못하여 생기는 두려움 등 수많은 종류의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에게 닥쳐옵니다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6절과 7절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이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히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혹시 이중에 참새고기 드셔보신 분이 계십니까저는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봤는데요저희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드셔보셨다고 합니다치킨보다 훨씬 맛있다고 합니다지금 여기 보면 참새 다섯 마리가 2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새를 사고팔았는데애완용으로 기르려고 사고판 것이 아니라식용으로 먹기 위해 사고팔았겠죠.

 

일꾼 한 사람이 포도원에 나가서 일당을 받으면 1데나리온을 받습니다그리고 1데나리온을 잔돈으로 바꾸면 16앗사리온입니다이제 이 중에 2앗사리온을 주고 참새 다섯 마리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정말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사복음서를 비교해서 볼 때 정말 재미있습니다다함께 누가복음 말씀을 손가락으로 끼시고마태복음 10장을 보시겠습니다지금부터 참새의 가격비교를 해보겠습니다마태복음 10장 29절을 보시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여기서는 참새가 두 마리에 1앗사리온입니다.누가복음에서는 얼마였죠참새 다섯 마리가 2앗사리온입니다참새가 2마리 묶어서 한 세트입니다참새 2마리 묶어서 1앗사리온그러면 4마리 묶으면 2앗사리온이 되겠죠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5마리에 2앗사리온입니다원래는4마리에 2앗사리온인데그럼 한 마리는 뭘까요?

 

저희 신학교 앞에서 겨울철이 되면 붕어빵을 파는데요, 3개에 천원입니다그런데 2천원어치를 사면 원래 6개인데 7개를 줍니다그리고 또 신학교에서 밤에 공부하기 때문에 제과점에서 빵을 사는데 15,000원어치를 사면 빵을 두어개 더 넣어줍니다왜 그럴까요바로 덤으로 줍니다보너스지요.

 

그런데 이 참새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서러운지 모릅니다제가 참새의 하소연을 상상해서 한번 적어봤습니다. “나는 독수리처럼 강하지도 못합니다공작처럼 화려한 날개도 없습니다타조처럼 크거나 잘 달리지도 못하구요.닭처럼 큰 소리로 외치지도 못합니다앵무새처럼 사람의 말을 따라하는 재주도 없습니다부엉이처럼 밤에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나는 참새입니다색은 볼품없는 똥색이고작고 힘도 없습니다그런데 더 서러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팔 때 제 가격도 치지 않고 보너스로 그냥 준다는 것입니다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일까요?”

 

때로는 우리의 인생이 누가복음 본문에 나온 다섯 번째 참새와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은 서러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다른 사람들은 독수리같이 강하고공작처럼 화려하고타조처럼 잘 달리고앵무새처럼 재주가 좋고부엉이처럼 밤에도 잘보고하다못해 닭처럼 큰 소리를 내기까지 하는데 나는 뭔가같은 참새들 중에서도 나만 가격을 안쳐주고 덤으로 넘기는 것 같은 외로움과 서러움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히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덤으로 팔려나가는 작은 참새 한 마리라 할지라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새들을 다 창조하셨고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독수리공작타조앵무새부엉이치킨참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다 만드셨습니다하나님께서 참새를 돌보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참새가 뭘 잘하고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돌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습니까모든 창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가장 특별한 작품입니다사람들이 다 나를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우리가 무엇을 잘하고 뛰어나서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돌보시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내가 잘하면 돌보시고 못하면 버리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의 돌보심은 나의 어떠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신실하심에 달려있습니다여러분 오 신실하신 주” 찬송 좋아하십니까내가 잘해서 돌보시는게 아닙니다우리가 참새보다 더 귀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용서의 피 값을 주신 참 친구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참새도 돌보시고 또 우리도 돌보십니다우리가 무엇을 잘한 것에 근거해서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을 근거해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는 창조물 이상의 관계로서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누가복음 12장 4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뭐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친구라 부르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는 참새도 돌보시는 창조주로서만 우리를 돌보시는 것이 아닙니다창조주 이상의 가까운 친구로서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지금 우리에게 내가 내 친구인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은 누구십니까정체가 무엇입니까바로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하나님께서 사람의 친구가 되시고자 친히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지금 이 교회의 이름이 임마누엘침례교회 아닙니까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시대에 항상 불평하고 반역하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거하시려고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이제는 더럽고 천한 우리 같은 죄인들과 함께 거하시고 친구가 되시려고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매우 두렵고 멀 수가 있습니다그분은 전능자이시고나는 작은 창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자 친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우리는 태어날 때내가 태어날 국가나 집안장소 등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는 어디였을까요바로 더럽고 냄새나는 마굿간이었습니다소들와 나귀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여물을 먹는 그 냄새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더럽고 못사는 동네인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사람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겠느냐고 말할 정도로 볼품없는 동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까지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 보조였습니다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나무를 자르고,대패질을 하고망치와 못을 들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문짝 고치세요식탁 고치세요!” 외치는 일명 3D 업종 근로자였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니가 50세도 못되었으면서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물을 정도로 30세 초반이었던 예수님의 겉모습은 거칠고 볼품이 없었습니다이사야 대언자가 이렇게 기록한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3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고통을 잘 아는 자라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 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예수님은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자 친히 사람이 되셔서배고픔과 피곤함과 연약함의 모든 감정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눅 7:34)라고 비난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려고 오셨는데바로 그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하면죄 많고 더러운 구제불능의 죄인들이었던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의롭고 선했기 때문에감히 하나님과 친구가 될 만했기 때문에친구가 되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더럽고 냄새나는 사람에게는 친구는 커녕 가까이 가려고 하지도 없습니다성격이 못되고 자주 거짓말하는 사람과는 친구는 커녕 가깝게 지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더럽고 냄새나는 우리들에게매일 거짓말하고 죄를 물처럼 마시는 우리들에게 먼저 친구가 되고자 다가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다함께 요한복음 15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요한복음15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친구가 되시고자사람이 되어 오셔서 보여주신 큰 사랑이 무엇입니까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어떤 우정보다 놀라운 우정을 보여주셨습니다더럽고 냄새나고 죄가 많은 우리들에게 먼저 다가오셨구요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십자가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모든 피를 남김없이 흘리시고우리의 죄 값이 완전히 지불하셨습니다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좋으신 친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주님께 감사합니다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기쁨으로 왕국을 주시는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누가복음 12장의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참새도 돌보시고,우리도 돌보신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우리가 잘나고 의로워서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돌보신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죄인인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고또 구원하여 주신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부분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다시 누가복음 12장으로 한번 돌아와 보겠습니다누가복음 12장 30절부터 32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민족들이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1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두려워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사람의 몸을 죽인 뒤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능을 가지신 두려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심이 되고 감사한 사실인지 모릅니다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고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줄을 아시는 분이십니다또한 우리의 필요를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 자체를 가장 잘 아십니다때로는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착각하기도 하고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도 합니다그러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혹시 이중에 자기 머리카락이 모두 몇 개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없으시죠하나님은 다 세어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우리 자신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잘 아십니다우리를 잘 아시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실까요다함께 시편 103편으로 가보시겠습니다시편 103편 8절부터 1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께서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니

그분은 항상 징계하지 아니하시며 자신의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불법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긍휼이 크시도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그분께서 우리의 범죄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같이 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도다.

15 사람으로 말하건대 그의 날들은 풀과 같으며 그가 번영하는 것은 들의 꽃과 같도다.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다 아시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히 여기십니다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이 독수리처럼 강하다고 생각하고공작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앵무새처럼 재주가 많다고 생각하며자신만만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그러나 우리의 구조를 아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십니다그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만약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고 불법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으셨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하늘만큼 땅만큼 높고 큰 아버지의 긍휼이 우리에게 매일 매순간 풍성하였기에 오늘 우리가 맛있는 점심도 먹고편안한 잠도 자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해변의 들판이나 언덕에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가도남쪽에서부터 열풍이 불어오면 하룻밤 사이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꽃이 다 시들어버린다고 합니다사람이 이 세상에서 잘나가고 번영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열풍이 한 번 불어보면 한순간에 다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잘 아시며 불쌍히 여기시고또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열풍이 불어버리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그런 잠시 잠깐의 것이 아니라영원한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다시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2장을 보시겠습니다누가복음 12장 30절부터 32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민족들이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1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두려워하지 말라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우리 자녀들이 장난감과 초코렛과 사탕을 달라고 구할 때 부모님은 아이들이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사주기도 합니다그러나 아이들이 계속 그런 것만 구하면 부모님은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다그러나 아이들이 공부하게 책을 사주세요.” 한다면 부모님은 아주 기쁘게 그것을 사줄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책과 함께 장난감이나 맛있는 것을 같이 사줄 것입니다오늘 여기 있는 자녀들이 지혜롭게 잘 구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돈이 필요하고건강이 필요하고좋은 직장이 필요한 줄을 아십니다그러나 우리가 맨날 그것만 구하면 그것을 주시면서도 별로 기쁘지가 않으십니다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게 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모든 것을 함께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아버지께서 주실 영원한 왕국의 영광입니까아니면 이 땅에서 잠시 누리다가 썩어지고 불타버릴 이 세상의 것입니까우리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정말 기쁘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입니다하나님의 왕국은 하루하루 살면서 우리의 마음에 가득 차 있어야 할 한 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세상의 영광과 사람들의 칭찬이 가득하다면 다 비워버리기 원합니다오늘 우리의 마음에 돈과 명예가 들어있다면 다 비워버리기 원합니다오늘 우리의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이 있다면 다 비워버리기 원합니다오직 주님과 하나님의 왕국만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기 원합니다.

 

 

참 용기

오늘 말씀의 제목이 뭐였죠, “참 용기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에서 용감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솔직한 말로 저는 저 자신을 볼 때 절망적입니다아무 용기도 나지 않고 의욕도 나지 않습니다맨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결심하고 넘어지고또 결심하고 넘어집니다그러나 우리가 용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하나님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참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근거로 세 가지 요점을 말씀드렸습니다이 세 가지 요점은 오늘의 제목 세 글자로 각각 시작됩니다.

참 용기의 에서 우리는 참새도 돌보시는 창조주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 용기의 에서 우리는 용서의 피 값을 주신 참 친구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참 용기의 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왕국을 주시는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새를 돌보시는 이유는 참새가 뛰어나고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이유도 우리가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작품 중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돌보심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하나님은 참새도 돌보시는 창조주이십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친구가 되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우리가 당하는 피곤함과 배고픔과 연약함의 모든 감정을 우리와 똑같이 경험하셨습니다.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참 친구입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과 피를 모두 쏟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으며영원한 지옥 불 속에서 절규하며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주님은 바로 용서의 피 값을 주신 참 친구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기쁨으로 왕국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우리의 구조와 체질을 아시며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두신 아버지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잘 아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며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긍휼과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정말 기쁘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그것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이 세상에는 참 두려워할 것도 많고 염려할 것도 많습니다그러나 오늘 우리가 참새도 돌보시는 창조주”, “용서의 피 값을 주신 참 친구”, 그리고 기쁨으로 왕국을 주시는 아버지를 기억하며 용기를 내기 원합니다참 용기는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오직 주님만 바라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리기 원합니다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6.12.31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주일설교/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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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가 만난 하나님(눅 19:1-10) 

1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보라, 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3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5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
6 그가 속히 내려와 기쁘게 그분을 받아들이거늘
7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안녕하세요? 오늘은 2006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에게 이런 뜻깊은 시간에 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우리 그레이스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신 서충원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수요일 기도모임 때 설교를 해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주일날 예배 때 설교를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제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하는 태도로 듣지 마시고,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구하고 찾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는 결코 마법의 지팡이라든지 뭔가 신비한 힘을 가진 지팡이가 아니었고, 일반 다른 나무 막대기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손에 들려있었을 때에 이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기도 했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한 청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까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주시고 또 저의 입술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누가복음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저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한 형이 있습니다. 또 그 형에게는 식당을 하시는 외숙모가 계셨는데 그 때 그 형이 그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형이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식당에 가서 외숙모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외숙모 오늘 삭개오 이야기 들었어요." 그랬는데 외숙모가 설교시간에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약간 당황한 이 형은 아니 성경에 삭개오가 나오니까 설교를 들은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일본 사람도 성경에 나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중에서도 삭개오의 이름을 듣고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삭개오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누가복음이 어떤 책인지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사복음서라고 불리는데 네 권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지, 어떻게 이 세상을 사셨는지,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복음서를 자세히 읽고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같은 이야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복음서를 기록하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기록되었고 그에 맞춰서 왕의 계보로 시작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므로 아무런 족보나 탄생의 기록이 없이 바로 종과 같이 열심히 일하고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은 읽어버려진 죄인들인 우리들을 찾아 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크리스마스가 있었는데, 여러분 말구유에 놓이신 아기 예수님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의 2장 16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말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찬송가 "저 들을 밖에 한 밤 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이 찬송가에 나오는 목자들도 역시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또한 유일하게 예수님의 열 두 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록해 주고 있는 복음서도 누가복음입니다. 백 마리 양을 가진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산 넘고 물 건너 골짜기를 지나 양을 찾아 기쁘게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복음서도 역시 누가복음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탕자의 비유 역시 누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잃어버린 동전과도 같고, 길 잃은 어린양과 같고,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나갔다가 모두 허비하고 탕진하여 거지가 된 아들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삭개오의 이야기도 바로 10절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가나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전에 이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님을 향하여 아프리카 가나로 가서 복음을 전할 뜻을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가나 말고 동남아 필리핀은 안되겠습니까? 아프리카 가나는 의료시설이라든지 아이들 교육시설도 너무 안 좋고 모기 한번 잘못 물리면 말라리아로 죽을 수도 있다는데요. 필리핀도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한국에서 살다가 아프리카 가려니 쫌 그러네요. 주님 아프리카만은 피해주옵소서." 

몇날며칠 오랫동안 이렇게 주님과 씨름을 하며 버티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한국하고 비교가 안되는 하늘에서 살았어. 너 하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니? 내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잃어버린 너를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비천하고 가난하게 되었는지 아니? 내가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동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거 잊어버렸니? 내 사랑을 아직 모르겠니!?"
그리고 그 선교사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잃어버려진 나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을 입으신 하나님!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제가 왜 아프리카에 못 가겠습니까? 한국에서 안락하게 살던 것이 어찌 하늘의 영광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든 보내주옵소서!"

오늘 우리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자
여러분, 이제 2006년 한 해가 지나가고 우리 앞에 새 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새 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 내년에, 또 그 이후에 펼쳐질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는 새 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이곳 캐나다에서는 "Happy New Year"이라고 말하는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돈을 아끼고 많이 벌어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구두쇠라고 놀려도 내 지갑에 또는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을 보면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돈을 조금 못 벌더라도 또 많은 돈을 건강식품에 투자하더라도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젊어 보인다든지 피부가 아기 피부 같다든지 하는 말을 들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기 위해 지치고 힘든 삶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각기 다른 생활의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삭개오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열심히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행복"이란 친구는 그다지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이 몰려옵니다. 이제 좀 편하겠지 싶으면 또 일들이 뻥뻥 터집니다. 우리들은 아주 잠시 약간의 행복을 느끼면,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꿈꾸지만 그 꿈은 어김없이 산산이 깨어지고 맙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지만 또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걱정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인생 길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이별하고 헤어지고 외롭고 혼자 있고 쓸쓸할 때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맞습니까? 
제가 일하는 석기시대라는 삼겹살 집이 있는데요, 99% 이상의 손님이 두 명 이상 짝을 지어옵니다. 가끔 혼자 와서 식사하고 가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분들을 보면 솔직히 좀 쓸쓸해 보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그다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밌는 영화도 혼자 보면 재미없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혼자 알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을 때 교회 안에서 신랑신부가 탄생되고 우리 청년부는 멋있는 축가를 준비해서 부른 적이 있었는데요, 신부가 축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 우리 축가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정도구나." 생각을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축가를 부를 때 신랑신부는 몸을 돌려서 우리 청년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방향에 신부 아버지,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신부 어머니는 울고 계셨고, 그것을 본 신부도 같이 울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기쁘고 축복된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릴까요? 바로 이별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시집을 보내는 거니까. 

저는 밴쿠버에 온지 약 8개월 되었는데요, 한국에서 이곳으로 출발할 때, 제가 외아들인데 저희 어머니는 1년 간 아들과 떨어진다는 사실에 많이는 아니지만 살짝 우셨습니다. 
저는 외아들이어서 어릴 적에 성격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지금도 많이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 있다보니까 이기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유치원 정도의 나이였는데 한번은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와서 노는데 장난감을 제가 하나도 못 가지고 놀게 했지요. "내꺼야." 그리고 그 친구는 조금 놀다가 재미가 없으니까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지요. 왜 울었겠습니까? 이제 다시 혼자 놀아야 한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느냐면요, 우리 모두가 이별의 상처를 가진 잃어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깊은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버림받은 마음, 잃어버려진 마음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찮은 일을 시킬 노예가 부족하거나 또는 힘든 일들을 처리해줄 일꾼이 필요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나눠주고자 자신과 똑같은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나이드신 사모님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응애하고 우는 이유는 바로 "버리운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버리운 마음", 바로 "버림 받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행복하고 만족하기 위하여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가져도 결코 채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득의 증대로 만족하지 못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사람의 마음 속에 거대하게 뚫려있는 구멍, 그 구멍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이제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제가 노래하나 불러보겠습니다. 

나는 인생에 산과 들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내가 얻은 건 공허와 깊은 실망 귀한 세월만 다 보냈네
어느 날 주님이 나를 부르시어 사랑의 품에 안으실 때
나는 주님께 매혹돼 이끌리어 인생의 참뜻 알게됐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마음,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마음,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완전히 만족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
자, 그러면 이제 삭개오 이야기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 삭개오는 1절에 나온 것처럼 여리고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리고라는 도시는 저 옛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첫 번째로 무너뜨리신 가나안 땅의 거대한 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에 살던 사람들의 큰 죄악 때문에 여리고를 저주하셨습니다. 보통 전쟁을 하고 나면 많은 전리품을 얻는데, 이 여리고는 완전히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리품도 취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기고 금과 은과 옷을 전리품으로 숨겼던 아간이라는 사람은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돌에 맞아죽는 큰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고 명령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초를 놓을 때 장자가 죽을 것이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가 죽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였는데요, 이것은 아합 왕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사람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히엘이 기초를 놓을 때 첫 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왕상 16:34). 

이후에 헤롯왕이 이 여리고에 많은 요새들을 짓고 도시를 발전시켰습니다.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분위기라기 보다는 로마식 건물과 로마의 분위기가 더욱 강했던 여리고에 살고 있던 삭개오에 대해서 2절에서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였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라고 하면 그는 곧 죄인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의 앞잡이로서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돈을 빼앗아 로마에 바치고 또 동시에 자기도 부자가 되는 못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가 과거에 일본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에 있었던 친일파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시져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느냐 틀리냐로 상당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말하자면 민족의 배반자요 변절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단순히 세리였을 뿐만 아니라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의 대명사 아니겠습니까? 삭개오는 당시 여리고에서 아주 악명 높은 세리장이었을 것입니다. 또 부자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뒤에 8절에서 삭개오가 스스로 고백하는 말을 참고해 볼 때 삭개오는 거짓 고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았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동족들에게서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삭개오에게 돈을 뜯긴 유대인이라면 삭개오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온갖 욕을 다 퍼붓지 않겠습니까? 너가 사람이냐부터 시작해서 십원짜리, 이십원짜리, 소, 말, 돼지 등 갖가지 욕이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삭개오에 대한 설명이 한가지 더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일반 사람들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고 가려져서 예수님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에서는 삭개오에 대한 많은 설명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가지는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삭개오라는 사람은 키가 작은 것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키 큰 사람들은 인기도 많고 사람들에게 대우도 잘 받는데, 키가 작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접을 받습니다. 보통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봐도 키 큰 친구들은 잘 나가는데 작은 친구들은 무시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초대 왕을 세울 때 사울의 키가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컸기 때문에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처럼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며 대우하는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대체로 버릇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기적인 것이 무엇인지, 버릇없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도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잘못되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본성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과나무는 너무나 커서 사과를 백 개 열고 어떤 사과나무는 작아서 한 두 개만 열릴지라도 근본 뿌리는 다 같은 사과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큰 죄인이라서 살인 강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조금 착한 죄인이라서 마음 속에서만 미워하고, 마음 속에서만 살인하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근본은 다 같은 죄인, 죄의 나무인 것입니다. 

이 삭개오는 다만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 맺힌 한 잃어버린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 역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지라도 다만 열매가 조금 덜 맺힌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이 삭개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던 삭개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보고, 또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이 삭개오는 결국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큰 배신감과 상처로 아파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어떤 특정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군대를 현역으로 가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청에서 정보통신과라는 부서에 지정을 받아서 시청을 돌아다니며 컴퓨터를 고쳐주는 일을 했었는데요, 하루는 기업지원과에 가서 컴퓨터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고장낸 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어떤 문제인지를 파악하고 앉아서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공익이세요?"하고 질문을 하길래, "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겁니다. 단순히 반말이 아니고 저를 무시하면서 대하는 겁니다. 이건 뭐 나이로 따지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이냐 공익근무요원이냐에 따라서 존대말과 반말이 나눠진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람이란 존재는, 우리 모두는 아주 단순하고 때론 아주 유치합니다. 내가 인정을 받으면 행복하고, 내가 무시를 당하거나 푸대접을 받으면 마음이 상합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높으신 정치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별 것 아닌 걸로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손가락질이야?", "이 사람? 이게 어따 대고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은?", "당신 몇 살이야?" 뭐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한심한 웃음을 짓지만 돌아서면 우리가 다 이렇게 유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말 한마디에 서운해서 더 이상 얼굴을 보기조차 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관심과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활짝 열려버리는 이렇게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강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젠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작은 몸집을 가지고 직접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었던 탓에 삭개오는 세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자기 뒤에 로마 황제를 든든한 힘으로 삼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평소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신출내기 세리가 된 삭개오는 엄청난 성과를 올리며 로마 정부에 많은 세금을 걷어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고소를 해서 세금을 왕창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제 삭개오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슬슬 피해 다닙니다. 물론 뒤에서는 욕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삭개오 앞에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이제 의기양양하게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덧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크고 멋있는 집에서 하인들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리 마태
이 누가복음에는 세리의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중 두 가지를 삭개오와 연결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5장은 한번 같이 펴보시겠습니다. 27절부터 32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7 이 일들 후에 그분께서 나아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29 레위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푸니 세리들과 또 그들과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의 큰 무리가 거기 있더라.
30 그런데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대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등장했던 한 세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레위였습니다. 이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입니다. 이 세리 마태가 바로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기 갈릴리에서 잘나가던 세리 마태가 갑자기 사표를 내더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대사회에서는 세리라는 사람들이 죄인들이요 민족들의 배반자라고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 세리들끼리는 똘똘 뭉쳐서 아주 긴밀하게 소식들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지신 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와서 자기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유대사회에서는 큰 소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

이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들의 배를 채우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인들인 세리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자기들과 한 편이 되어 바리새인이 될 줄 알았던 이 예수님이 갑자기 세리를 제자로 삼다니, 바리새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또한 세리들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유대민족의 왕따 집단인 세리들에게 이렇게 따듯하게 접근하시는가? 

세리 마태는, 아니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마 마태 역시 세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부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의 집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또 많은 세리들이 모였습니다. 또 잔치가 크게 개방되어 있었던지 몇몇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리 마태는 이 잔치를 열면서 그 동안 함께 친하게 지내온 동료 세리들에게 자신이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신이 왜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서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리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의 병이 든 우리들을 고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가 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열이 납니다. 이때 어떻게 해서든 콧물만 막아내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어떻게 해서든 기침을 참으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콧물이나 기침이 아니라 콧물과 기침을 만들어 내는 감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짓말을 조금 덜 하도록 잘 참고, 화를 내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도록 꾹꾹 참는다고 해서 우리의 죄의 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의 병이 치료될 때 콧물도 안나오고 기침도 안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참 의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의 죄인들의 대명사라 불리는 세리들을 먼저 찾아가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세리의 기도
이제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9장의 바로 앞에 있는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18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9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직전에 먼저 등장하는 이 세리의 기도. 아마 삭개오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라새인과 같이 "나는 이렇게 의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했습니다"하는 기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정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가식으로 다가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정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부끄러운 모습, 어리석은 모습, 지치고 힘든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진실한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키가 작으면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잘 못하면 비웃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실수를 하면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기도하며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아주십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하나님
삭개오는 이제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왔고 부자가 되어서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아직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또 아무리 많은 재산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텅 빈 마음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인생의 참 뜻을 알게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삭개오를 만나주시려고 기나긴 여정의 방문일정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오기까지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기 위해서 거의 6개월 정도전부터 서류와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위험한 일들은 무엇인지 조심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숙지하고, 책도 읽고 인터넷도 보고 여행자 보험도 들고 하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어느새 밴쿠버에 와서 잘 지내고 있지만 여기에 오기까지는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삭개오를 방문하시기까지도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우주를 너머선 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이 땅에 방문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외로움과 뜻 모를 그리움과 공허함에 사로잡혀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려고 직접 사람이 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고 계십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몰려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신 주목적은 바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고생과 수고로 가득한 인생 속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던 삭개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에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삭개오는 이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가 기대하며 예수님을 보고자 하지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가려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뜻하지 않은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가 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이 삭개오는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져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셨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 왜 가다가 멈추셨는지 기웃기웃 쳐다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예수님은 오늘 반드시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너가 초대해 주면 내가 가고 아니라도 나는 갈 곳이 많은데 어쩔거야? 빨리 말해. 나 바쁘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리고에 찾아온 목적은 바로 잃어버려진 너를 찾고 구원하기 위한거야."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은 우리들의 손님이 되시고, 친구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은 9절에서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삭개오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거짓 고소하여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인생의 변화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언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언제 만족할 수 있으며 언제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여기 누가복음 19장에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돈을 악착같이 긁어모으던 한 사람이, 부당하게 취한 돈을 네 배로 갚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놀라운 변화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 이상 삭개오에게 있어서 행복의 근거는 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인생의 참 뜻을 알게되고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죄를 선택하였고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시 행복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시끄럽게 지낼지라도 사람의 허전한 마음은 완전히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또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우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고자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는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은 잃어버려진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특별한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거절하실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려진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 1:15).

초청
다같이 눈을 감아주십시오. 
혹시 이 자리에 나는 아직 한번도 예수님을 나의 개인의 구원자로 영접한 적이 없다, 나는 오늘밤 눈을 감아서 다시 떠지지 않을 때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100퍼센트 확신이 없다는 분이 계시다면 잠시 손을 들어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눈을 떠보니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10년 뒤에 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기회가 주어질 때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체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원한 삶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할 심판과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의 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된 증거로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감사하게 믿고 받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믿겠다고 결심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기도할 때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의 어떠한 노력이나 의로운 일들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다는 이 간단하고도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또한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이미 구원을 받은 형제 자매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지치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날마다 오고가는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항해 중 파도는 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를 세심하게 인도하시고 날마다 동행하시는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주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이 계속해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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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0.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1세)
제목 : 우리가 구할 것(눅 12:29-34) 
본문 : 누가복음 12장 29-34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2장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9절부터 34절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의심하는 마음도 갖지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민족들이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1 ¶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위하여 낡지 않는 가방들 곧 하늘들에서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예비하라. 거기서는 도둑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좀도 먹지 못하느니라.
34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저는 오늘 "우리가 구할 것"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이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지고 익숙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들도 여럿이 있고, 우리가 기도회로 모였을 때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이 한 말씀을 붙잡고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인생의 푯대를 다시 한 번 분명케 해주는 귀한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 성령 안에서 누리는 왕국
오늘의 본문 29절에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의심하는 마음도 갖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31절에서는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은 성령님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린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앞장에 있는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날 누군가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따라 이생의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다면 그는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하심과 충만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히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만 이 땅의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기 원합니다. 


** 재물에 대한 경고
누가복음 12장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을 보시겠습니다. 
¶ 무리 중의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 형제에게 말씀하사 그가 나와 상속 재산을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후에 나오는 누가복음 12장의 모든 구절들은 이 말 한마디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나누는 자로 삼았느냐?"고 반문하시며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5절에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라.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물에 있지 아니하니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할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물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 역시 오늘의 본문말씀과 같이 너무나 유명해서 아마 우리 중에 모르시는 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고 이제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0절에 "너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네게서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는 이 비유를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사용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땅의 생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오늘 밤 당신이 죽는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일이 헛되다는 것을 경고해 주기 위해서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만 좀 더 안락한 삶, 안정된 삶,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먹을 것, 나의 입을 것, 나의 거할 처소, 나의 미래,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해서 "너 어리석은 자야"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의 삶만을 바라보며 사는 죄인들도 어리석은 자이겠지만,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안개와 같이 짧은 이 땅의 삶만을 바라보며 산다면 그것은 얼마나 더욱 비참하고 어리석은 삶이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서 나온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은 22절부터 구구절절이 탄식하시는 가운데 말씀하고 계십니다. 24절에 "너희는 그 날짐승들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 26절에 "그런즉 너희가 가장 작은 그 일도 능히 행하지 못하거든 어찌하여 나머지 일들을 염려하느냐?", 28절에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이 모든 것은 세상 민족들이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늘날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민족들과 같이, 이방인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수많은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며,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며 오늘도 탄식하고 계십니다. "오 너 어리석은 자야",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애통하고 탄식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길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민족들과 같이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돌이키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버림받은 자처럼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을 돌이키기 원합니다. 


** 우리가 구할 것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해야 할 한 가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31 ¶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에게 참으로 기쁘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왕국"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그 가장 좋은 것을 구할 때 아버지는 참된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도 아들이 불량식품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고 쓸모없는 것을 구하기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가장 좋은 것을 구할 때 아버지는 기뻐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왕국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냥 억지로 손에 쥐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여야, 그것을 구하여야, 기뻐하며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한 사모함이 우리 마음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앞에서 이 하나님의 왕국을 일차적인 의미로써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이 하나님의 왕국은 다만 현재 우리가 영 안에서 누리는 주님과의 교제일 뿐만 아니라 장차 실제로 이 땅에 세워질 왕국에서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문맥에서 주님은 곧바로 주인과 청지기의 비유를 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3,44절을 보시겠습니다. 
43 그의 주인이 올 때에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도다.
44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을 치리자로 삼으리라.

"오 너희 어리석은 자들아,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부디 이 땅의 천하고 하찮은 것들을 구하지 말고 영원한 왕국과 통치를 구하라. 내가 진실을 말하노니, 주인이 그 사람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스릴 자로 삼으리라. 너희에게 그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방인들이었을 때에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장차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며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들어 이 세상을 한번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한번 바라보고, 우리 앞에 놓인 인생길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안개와 같이 짧고 보잘 것 없는 삶에 소망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고 허무한 것입니다. 여기에 저보다 연장하신 모든 형제님들도 그렇게 고백하실 것입니다. 야곱도 파라오 앞에서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 순례 길의 햇수의 날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삶의 햇수의 날이 얼마 안 되고 험악하였으며 내 조상들이 순례하던 때에 그들이 누린 삶의 햇수의 날에 미치지는 못하나이다." 130세가 된 야곱조차 "내 생애의 세월이 짧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짧고 허무한 삶 속에서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며 구하며 수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들은 참되게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영원에 속한 것이며,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마음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왕국을 구하는 자의 삶
그렇다면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다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의 왕국을 주십시오..”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에는 “값없이”, “원하기만 하면”,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국을 받는 문제는 다릅니다. “하나님, 왕국을 주십시오. 아멘.”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왕국이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주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어떠한 경고도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것도 다 구하고 왕국도 덤으로 구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둘 중 하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지도 말고 마음에 의심하지도 말라.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이와 같은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는 마태복음 6장에서도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존중하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오늘의 실제적인 필요에 대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중심적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다면, 그는 재물을 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존중하던 것들을 업신여겨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3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위하여 낡지 않는 가방들 곧 하늘들에서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예비하라. 거기서는 도둑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좀도 먹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유일한 방법,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여 해어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다면 그는 가진 것을 팔아서 다른 영혼들을 섬길 것입니다. 가진 것을 얼마나 포기하느냐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을 얼마나 구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많이 버린 자에게 많이 보상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버린 자가 가장 많이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11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것들을 피하고...
18 또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
19 또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 이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하려 함이라. (딤전 6장)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손실로 여기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있던 어떤 사람들이 재물 때문에 믿음에서 떠나고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삶입니까? 조금 더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소유하는 것입니까? 조금 더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어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잃어버리는 삶을 사는 자들, 정리하는 삶을 사는 자들,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가지를 오늘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위하여 낡지 않는 가방들 곧 하늘들에서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예비하라.”


**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고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라.”
는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재물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다 내어놓고 가난한 성도들과 모두 함께 사용한 것처럼,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 일곱 집사를 세운 것처럼 구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이 세상의 자원봉사단체들이나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단체들과 같이 행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자선 사업가들과 같이 계속하여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가진 무거운 것들을 모두 처리하고 주님을 전폭적으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완전히 순종한 한 사람을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키프로스 지방 출신의 요세라 하는 레위 사람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그것을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라.)
바나바라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토지를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나바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시 돈을 벌러 떠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자신의 토지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은 바나바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이렇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여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라는 말씀을 온전히 순종한 바나바에게 주님께서는 놀라운 섬김의 기회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내게 따로 구별해 놓으라.”하나님께 따로 구별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치 레위인들이 오직 성막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따로 구별된 것처럼, 바나바와 사울은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따로 구별되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자는 이생의 일들에 얽매일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오직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 둔 베드로의 이 고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담대하게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여! 보십시오. 우리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나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재판하리라.”
우리가 만약 이 세상에서의 안락과 재물을 모두 버려두고 오직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거니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장차 이 땅에 임할 왕국에서 우리에게 심판과 통치와 다스리는 놀라운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길에 실제가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다 버리고 따르기 원합니다.”라는 고백은 이제 족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보소서, 주여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외에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나이다.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이제는 다 손실로 여기나이다. 나의 명예, 나의 장래, 나의 재물, 나의 야망, 나의 자랑... 이 모든 것은 세상의 민족들이 구하는 것이니이다. 오, 주여! 우리는 오직 주님 자신을 얻기 원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결론 -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저는 이 한번뿐인 인생을 참으로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의 인생은 정말 허무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길을 따르려고 할 때 저의 장래와 경제적인 압박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제적으로 이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주저함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을 하시면서 사랑어린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한 사람, 개인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은 양 무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작고 연약한 무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꼭 우리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우리의 부단한 결단과 헌신도 필요하겠지만, 다만 그것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사랑어린 음성으로 우리에게 위로하시는 주님께서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적은 무리로 모였습니다. 나 혼자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놀라운 왕국과 영광을 사모하며 함께 따르고자 하는 동료들,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 속에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1,32절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31 ¶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주님이 우리 모두를 복 주시기 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gospels/42luke/42luke122934_ourprayer_20030820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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