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31.일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눅 19:1-10)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안녕하세요? 오늘은 2006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에게 이런 뜻 깊은 시간에 이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우리 그레이스침례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신 서충원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수요일 기도모임 때 설교를 해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주일날 예배 때 설교를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제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하는 태도로 듣지 마시고,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고자 하시는지를 구하고 찾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는 결코 마법의 지팡이라든지 뭔가 신비한 힘을 가진 지팡이가 아니었고, 일반 다른 나무 막대기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손에 들려있었을 때에 이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기도 했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이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한 청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부터 10절까지 읽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거기를 지나가시더라.

2 보라, 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들 가운데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3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서

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5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

6 그가 속히 내려와 기쁘게 그분을 받아들이거늘

7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인즉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주시고 또 저의 입술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누가복음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서 저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한 형이 있습니다. 또 그 형에게는 식당을 하시는 외숙모가 계셨는데 그 때 그 형이 그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형이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식당에 가서 외숙모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외숙모 오늘 삭개오 이야기 들었어요." 그랬는데 외숙모가 설교시간에 무슨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약간 당황한 이 형은 아니 성경에 삭개오가 나오니까 설교를 들은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일본 사람도 성경에 나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 중에서도 삭개오의 이름을 듣고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삭개오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오늘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누가복음이 어떤 책인지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 네 권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사복음서라고 불리는데 네 권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지, 어떻게 이 세상을 사셨는지,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복음서를 자세히 읽고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같은 이야기를 네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복음서를 기록하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자 기록되었고 그에 맞춰서 왕의 계보로 시작해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므로 아무런 족보나 탄생의 기록이 없이 바로 종과 같이 열심히 일하고 사역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누가복음은 읽어버려진 죄인들인 우리들을 찾아 사람이 되신,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크리스마스가 있었는데, 여러분 말구유에 놓이신 아기 예수님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의 2장 16절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말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찬송가 "저 들을 밖에 한 밤 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이 찬송가에 나오는 목자들도 역시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또한 유일하게 예수님의 열 두 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록해 주고 있는 복음서도 누가복음입니다. 백 마리 양을 가진 한 목자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산 넘고 물 건너 골짜기를 지나 양을 찾아 기쁘게 돌아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복음서도 역시 누가복음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탕자의 비유 역시 누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잃어버린 동전과도 같고, 길 잃은 어린양과 같고,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나갔다가 모두 허비하고 탕진하여 거지가 된 아들과 같은 우리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삭개오의 이야기도 바로 10절에 나온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느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가나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전에 이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님을 향하여 아프리카 가나로 가서 복음을 전할 뜻을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가나 말고 동남아 필리핀은 안되겠습니까? 아프리카 가나는 의료시설이라든지 아이들 교육시설도 너무 안 좋고 모기 한번 잘못 물리면 말라리아로 죽을 수도 있다는데요. 필리핀도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 한국에서 살다가 아프리카 가려니 쫌 그러네요. 주님 아프리카만은 피해주옵소서."

몇날며칠 오랫동안 이렇게 주님과 씨름을 하며 버티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 한국하고 비교가 안되는 하늘에서 살았어. 너 하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니? 내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잃어버린 너를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비천하고 가난하게 되었는지 아니? 내가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비천한 동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난 거 잊어버렸니? 내 사랑을 아직 모르겠니!?"

그리고 그 선교사님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잃어버려진 나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을 입으신 하나님!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들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 제가 왜 아프리카에 못 가겠습니까? 한국에서 안락하게 살던 것이 어찌 하늘의 영광에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든 보내주옵소서!"

오늘 우리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잃어버린 자

여러분, 이제 2006년 한 해가 지나가고 우리 앞에 새 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새 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 내년에, 또 그 이후에 펼쳐질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인생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는 새 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이곳 캐나다에서는 "Happy New Year"이라고 말하는데,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돈을 아끼고 많이 벌어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친구들이 구두쇠라고 놀려도 내 지갑에 또는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을 보면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돈을 조금 못 벌더라도 또 많은 돈을 건강식품에 투자하더라도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젊어 보인다든지 피부가 아기 피부 같다든지 하는 말을 들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이 곧 행복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기 위해 지치고 힘든 삶도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도 각기 다른 생활의 영역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행복해 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삭개오 역시 행복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열심히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행복"이란 친구는 그다지 쉽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이 몰려옵니다. 이제 좀 편하겠지 싶으면 또 일들이 뻥뻥 터집니다. 우리들은 아주 잠시 약간의 행복을 느끼면,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꿈꾸지만 그 꿈은 어김없이 산산이 깨어지고 맙니다. 때론 평안한 것 같지만 또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걱정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조심조심 걷는 사람들처럼 우리의 인생 길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인생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이별하고 헤어지고 외롭고 혼자 있고 쓸쓸할 때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맞습니까?

제가 일하는 석기시대라는 삼겹살 집이 있는데요, 99% 이상의 손님이 두 명 이상 짝을 지어옵니다. 가끔 혼자 와서 식사하고 가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분들을 보면 솔직히 좀 쓸쓸해 보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그다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밌는 영화도 혼자 보면 재미없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혼자 알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을 때 교회 안에서 신랑신부가 탄생되고 우리 청년부는 멋있는 축가를 준비해서 부른 적이 있었는데요, 신부가 축가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아, 우리 축가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정도구나." 생각을 하면서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축가를 부를 때 신랑신부는 몸을 돌려서 우리 청년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방향에 신부 아버지,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신부 어머니는 울고 계셨고, 그것을 본 신부도 같이 울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기쁘고 축복된 결혼식에서 눈물을 흘릴까요? 바로 이별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시집을 보내는 거니까.

저는 밴쿠버에 온지 약 8개월 되었는데요, 한국에서 이곳으로 출발할 때, 제가 외아들인데 저희 어머니는 1년 간 아들과 떨어진다는 사실에 많이는 아니지만 살짝 우셨습니다.

저는 외아들이어서 어릴 적에 성격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지금도 많이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혼자 있다 보니까 이기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유치원 정도의 나이였는데 한번은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노는데 장난감을 제가 하나도 못 가지고 놀게 했지요. "내꺼야." 그리고 그 친구는 조금 놀다가 재미가 없으니까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지요. 왜 울었겠습니까? 이제 다시 혼자 놀아야 한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 놓느냐면요, 우리 모두가 이별의 상처를 가진 잃어버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깊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외로움과 쓸쓸함, 버림받은 마음, 잃어버려진 마음은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찮은 일을 시킬 노예가 부족하거나 또는 힘든 일들을 처리해줄 일꾼이 필요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나눠주고자 자신과 똑같은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 나이드신 사모님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응애하고 우는 이유는 바로 "버리운 마음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버리운 마음", 바로 "버림받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행복하고 만족하기 위하여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가져도 결코 채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우주의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도 소득의 증대로 만족하지 못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사람의 마음속에 거대하게 뚫려있는 구멍, 그 구멍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고 하나님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이제 삭개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 전에 제가 노래하나 불러보겠습니다.

나는 인생에 산과 들 방황하며 삶의 의미를 찾았지만

내가 얻은 건 공허와 깊은 실망 귀한 세월만 다 보냈네

어느 날 주님이 나를 부르시어 사랑의 품에 안으실 때

나는 주님께 매혹돼 이끌리어 인생의 참뜻 알게됐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마음, 외롭고 쓸쓸한 우리의 마음,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완전히 만족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 삭개오는 어떤 사람

자, 그러면 이제 삭개오 이야기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 삭개오는 1절에 나온 것처럼 여리고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리고라는 도시는 저 옛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첫 번째로 무너뜨리신 가나안 땅의 거대한 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에 살던 사람들의 큰 죄악 때문에 여리고를 저주하셨습니다. 보통 전쟁을 하고 나면 많은 전리품을 얻는데, 이 여리고는 완전히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전리품도 취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기고 금과 은과 옷을 전리품으로 숨겼던 아간이라는 사람은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돌에 맞아죽는 큰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여리고를 다시 세우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이 죽을 것이라고 명령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기초를 놓을 때 장자가 죽을 것이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가 죽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였는데요, 이것은 아합 왕의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라는 사람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히엘이 기초를 놓을 때 첫 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대문을 세울 때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왕상 16:34).

이후에 헤롯왕이 이 여리고에 많은 요새들을 짓고 도시를 발전시켰습니다.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분위기라기 보다는 로마식 건물과 로마의 분위기가 더욱 강했던 여리고에 살고 있던 삭개오에 대해서 2절에서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였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사람들은 세리라고 하면 그는 곧 죄인이라고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의 앞잡이로서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돈을 빼앗아 로마에 바치고 또 동시에 자기도 부자가 되는 못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가 과거에 일본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을 때에 있었던 친일파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카이사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맞느냐 틀리냐로 상당히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말하자면 민족의 배반자요 변절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는 단순히 세리였을 뿐만 아니라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였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죄인 중의 대명사 아니겠습니까? 삭개오는 당시 여리고에서 아주 악명 높은 세리장이었을 것입니다. 또 부자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뒤에 8절에서 삭개오가 스스로 고백하는 말을 참고해 볼 때 삭개오는 거짓 고소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았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동족들에게서 많은 돈을 긁어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삭개오에게 돈을 뜯긴 유대인이라면 삭개오를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온갖 욕을 다 퍼붓지 않겠습니까? 너가 사람이냐부터 시작해서 십원짜리, 이십원짜리, 소, 말, 돼지 등 갖가지 욕이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삭개오에 대한 설명이 한 가지 더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일반 사람들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싶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고 가려져서 예수님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에서는 삭개오에 대한 많은 설명을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가지는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그가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삭개오라는 사람은 키가 작은 것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키 큰 사람들은 인기도 많고 사람들에게 대우도 잘 받는데, 키가 작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접을 받습니다. 보통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봐도 키 큰 친구들은 잘 나가는데 작은 친구들은 무시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초대 왕을 세울 때 사울의 키가 모든 백성들보다 어깨 위만큼 컸기 때문에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처럼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며 대우하는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대체로 버릇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기적인 것이 무엇인지, 버릇없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도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잘못되이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본성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과나무는 너무나 커서 사과를 백 개 열고 어떤 사과나무는 작아서 한 두 개만 열릴지라도 근본 뿌리는 다 같은 사과나무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큰 죄인이라서 살인 강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조금 착한 죄인이라서 마음 속에서만 미워하고, 마음 속에서만 살인하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근본은 다 같은 죄인, 죄의 나무인 것입니다.

이 삭개오는 다만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 맺힌 한 잃어버린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 역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할지라도 다만 열매가 조금 덜 맺힌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아무튼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이 삭개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던 삭개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보고, 또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치열하게 살아오던 이 삭개오는 결국 큰 절망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큰 배신감과 상처로 아파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어떤 특정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군대를 현역으로 가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청에서 정보통신과라는 부서에 지정을 받아서 시청을 돌아다니며 컴퓨터를 고쳐주는 일을 했었는데요, 하루는 기업지원과에 가서 컴퓨터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고장낸 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어떤 문제인지를 파악하고 앉아서 고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공익이세요?"하고 질문을 하길래, "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겁니다. 단순히 반말이 아니고 저를 무시하면서 대하는 겁니다. 이건 뭐 나이로 따지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이냐 공익근무요원이냐에 따라서 존대말과 반말이 나눠진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람이란 존재는, 우리 모두는 아주 단순하고 때론 아주 유치합니다. 내가 인정을 받으면 행복하고, 내가 무시를 당하거나 푸대접을 받으면 마음이 상합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높으신 정치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별 것 아닌 걸로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손가락질이야?", "이 사람? 이게 어따 대고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은?", "당신 몇 살이야?" 뭐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한심한 웃음을 짓지만 돌아서면 우리가 다 이렇게 유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말 한마디에 서운해서 더 이상 얼굴을 보기조차 피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관심과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활짝 열려버리는 이렇게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강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젠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작은 몸집을 가지고 직접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었던 탓에 삭개오는 세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자기 뒤에 로마 황제를 든든한 힘으로 삼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평소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신출내기 세리가 된 삭개오는 엄청난 성과를 올리며 로마 정부에 많은 세금을 걷어오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거짓말로 고소를 해서 세금을 왕창 뜯어내기도 합니다. 이제 삭개오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슬슬 피해 다닙니다. 물론 뒤에서는 욕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삭개오 앞에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삭개오는 이제 의기양양하게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덧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 세리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크고 멋있는 집에서 하인들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세리 마태

이 누가복음에는 세리의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중 두 가지를 삭개오와 연결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5장은 한번 같이 펴보시겠습니다. 27절부터 32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7 이 일들 후에 그분께서 나아가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29 레위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푸니 세리들과 또 그들과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의 큰 무리가 거기 있더라.

30 그런데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대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등장했던 한 세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레위였습니다. 이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입니다. 이 세리 마태가 바로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기 갈릴리에서 잘나가던 세리 마태가 갑자기 사표를 내더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대사회에서는 세리라는 사람들이 죄인들이요 민족들의 배반자라고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 세리들끼리는 똘똘 뭉쳐서 아주 긴밀하게 소식들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지신 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 먼저 다가와서 자기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 유대사회에서는 큰 소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분은 누구신가?

이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들의 배를 채우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죄인들인 세리들과는 대화도 하지 않고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자기들과 한 편이 되어 바리새인이 될 줄 알았던 이 예수님이 갑자기 세리를 제자로 삼다니, 바리새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또한 세리들도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유대민족의 왕따 집단인 세리들에게 이렇게 따듯하게 접근하시는가?

세리 마태는, 아니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마 마태 역시 세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부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의 집에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또 많은 세리들이 모였습니다. 또 잔치가 크게 개방되어 있었던지 몇몇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리 마태는 이 잔치를 열면서 그 동안 함께 친하게 지내온 동료 세리들에게 자신이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자신이 왜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서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리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의 병이 든 우리들을 고쳐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가 있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감기 몸살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열이 납니다. 이때 어떻게 해서든 콧물만 막아내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어떻게 해서든 기침을 참으면 감기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콧물이나 기침이 아니라 콧물과 기침을 만들어 내는 감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짓말을 조금 덜 하도록 잘 참고, 화를 내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도록 꾹꾹 참는다고 해서 우리의 죄의 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의 병이 치료될 때 콧물도 안나오고 기침도 안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참 의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의 죄인들의 대명사라 불리는 세리들을 먼저 찾아가셨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고쳐주시고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 세리의 기도

이제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9장의 바로 앞에 있는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 18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9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삭개오가 등장하기 직전에 먼저 등장하는 이 세리의 기도. 아마 삭개오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라새인과 같이 "나는 이렇게 의롭습니다"라고 말하는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했습니다"하는 기도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정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가식으로 다가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정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부끄러운 모습, 어리석은 모습, 지치고 힘든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진실한 사랑을 나누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키가 작으면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잘 못하면 비웃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실수를 하면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기도하며 나아오는 자를 기뻐 받아주십니다.

** 삭개오를 찾아오신 하나님

삭개오는 이제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왔고 부자가 되어서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아직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또 아무리 많은 재산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텅 빈 마음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인생의 참 뜻을 알게 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삭개오를 만나주시려고 기나긴 여정의 방문일정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밴쿠버에 오기까지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기 위해서 거의 6개월 정도전부터 서류와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위험한 일들은 무엇인지 조심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숙지하고, 책도 읽고 인터넷도 보고 여행자 보험도 들고 하면서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제가 어느새 밴쿠버에 와서 잘 지내고 있지만 여기에 오기까지는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삭개오를 방문하시기까지도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우주를 너머선 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이 땅에 방문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외로움과 뜻 모를 그리움과 공허함에 사로잡혀 세월을 허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려고 직접 사람이 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고 계십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몰려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오신 주목적은 바로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고생과 수고로 가득한 인생 속에서 지치고 힘들어하던 삭개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에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삭개오는 이 예수님이 과연 나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가 기대하며 예수님을 보고자 하지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가려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뜻하지 않은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리가 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삭개오처럼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이 삭개오는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져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셨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 왜 가다가 멈추셨는지 기웃기웃 쳐다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들어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삭개오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예수님은 오늘 반드시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너가 초대해 주면 내가 가고 아니라도 나는 갈 곳이 많은데 어쩔거야? 빨리 말해. 나 바쁘거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리고에 찾아온 목적은 바로 잃어버려진 너를 찾고 구원하기 위한거야."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은 우리들의 손님이 되시고, 친구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은 9절에서 "이 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삭개오는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거짓 고소하여 빼앗은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습니다.

** 인생의 변화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언제 변화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언제 만족할 수 있으며 언제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여기 누가복음 19장에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삭개오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돈을 악착같이 긁어모으던 한 사람이, 부당하게 취한 돈을 네 배로 갚고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놀라운 변화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더 이상 삭개오에게 있어서 행복의 근거는 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인생의 참 뜻을 알게되고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죄를 선택하였고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별의 상처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외로워합니다. 사람들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시 행복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시끄럽게 지낼지라도 사람의 허전한 마음은 완전히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적이고 또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우시고 행복하게 해주시고자 직접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는 사랑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하나님은 잃어버려진 죄인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완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특별한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거절하실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려진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딤전 1:15).

** 초청

다 같이 눈을 감아주십시오.

혹시 이 자리에 나는 아직 한 번도 예수님을 나의 개인의 구원자로 영접한 적이 없다, 나는 오늘밤 눈을 감아서 다시 떠지지 않을 때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100퍼센트 확신이 없다는 분이 계시다면 잠시 손을 들어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 평생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눈을 떠보니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다음에 하겠다고 10년 뒤에 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기회가 주어질 때 여러분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체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구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원한 삶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할 심판과 내가 받아야할 형벌을 주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배로운 피의 값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된 증거로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하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감사하게 믿고 받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렇게 믿겠다고 결심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기도할 때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저의 어떠한 노력이나 의로운 일들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씻어주셨다는 이 간단하고도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를 헛되이 믿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또한 이미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고 이미 구원을 받은 형제자매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찾아와 주신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지치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날마다 오고가는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항해 중 파도는 오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를 세심하게 인도하시고 날마다 동행하시는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주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이 계속해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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