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20.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다윗이 만난 하나님(행 13:21,22)

본문 : 사도행전 13장 21,22절, 사무엘기상 16장 5-13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곳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13장 21-22절을 보시겠습니다.

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키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모든 뜻을 성취하리라, 하시고

 

 

이제 사무엘상 16장 5절부터 13까지 보시겠습니다.

5 그가 이르되, 평화롭게 오느니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은즉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나와 함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자, 하고는 그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부르니라.

6 ¶ 그들이 오매 그가 엘리압을 보고 이르기를,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하였으나

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8 이에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매 그가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9 그때에 이새가 삼마를 지나가게 하매 그가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다시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니라.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이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들을 지키나이다, 하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우리가 앉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그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는데 이제 그는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겼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이 그니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시니라.

13 이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니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일어나서 라마로 가니라.

오늘 저는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길고 자세하게 그가 지나간 길과 행적이 기록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는 이 짧은 설교시간을 통하여 다윗의 생애를 모두 알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생애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주목하여 살펴봄으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었는가를 주의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다음 아들이었던 셋으로부터 인류는 새롭게 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5대손인 에녹이 살았을 때부터 이미 세상은 극도로 타락하기 시작했고, 아담의 8대손 노아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호흡하는 생물을 홍수로 심판하셔야 할 만큼 타락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롭게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셨지만, 모든 인류가 한 곳에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흩으시고 많은 민족들의 구분과 경계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한 민족을 만들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통하여 결국 70명이라는 자손이 이집트로 들어갔고, 400년 만에 그들은 모세와 함께 약 200만이라는 엄청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이동하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은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들에게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재판관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가나안 민족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벌하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재판관들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 때로부터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450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을 주셨습니다(행 13:20).

 

 

이제 재판관들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대언자 사무엘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도 다른 민족들과 같이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구분되게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왕국을 거부하고 다른 민족들과 같은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크고 잘생기고 능력이 많은 용사를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모든 백성은 한번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를 외칠 만큼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의 평가와 눈을 더 주의하는 왕이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 외에는 결코 드려서는 안되는 제사를 전쟁이 두려워 떠나가는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스스로 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민족의 왕과 모든 기름진 양과 소를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떠나갈 때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보다는 그래도 백성들이 보고 있으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양이라도 내달라고 요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는 자신의 경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지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 가족 안에서의 다윗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16장의 말씀이 등장하게 됩니다. 16장 1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어느 때까지 그를 위하여 애곡하려느냐? 기름을 네 뿔에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주님은 아직 누구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시지는 않고 다만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에 들어가니 모든 백성을 인도하던 대언자 사무엘의 방문에 모두들 놀라고 떨며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마을의 장로들이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평화롭게 오시나이까?" 사무엘은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준비를 하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한번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온 민족을 재판하고 이끌던 장로 중의 장로, 대언자 사무엘이 마을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치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한 것같이 베들레헴에서는 엄청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의 장로들이 다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은 특별히 "이새의 가족"을 지명하여 초청하였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아들들 가운데 한 명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도 이 기름 부음을 받을 자가 사울을 대신한 왕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큰 파장이 올 것이기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기름을 붓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백성들도 묻는 것을 두려워해서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첫째 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으로 옵니다. 이 엘리압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용사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보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감탄하면서 기름 부을 준비를 합니다. 주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러한 놀라운 말씀,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와 같은 말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섬겨온 사무엘조차 사람인지라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게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비나답, 삼마 이렇게 일곱 아들들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어떤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확인차 묻습니다. "네 자식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새가 대답한 뉘앙스를 잘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막내 녀석이 있는데, 그 놈은 양치고 있지요. 막내 녀석은 아직 이런 자리에 참석할 놈이 아니죠. 형들 다 왔으니 양이나 보고 있으라 시켰죠."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사무엘이 왔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줘야지, 그것도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대한 잔치요 거룩한 자리인데, "너는 가서 양이나 쳐라."하고 부르지도 않았으니 다윗이 가족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안 봐도 뻔할 뻔 자입니다. 막내로서 형들의 수중을 들고 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하고 모든 아들들을 초청한 가족 행사 때에조차 따로 남겨져 양을 돌봐야하는... 아들이면서도 아들 같지 않은 대우를 받았던 다윗을 그려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새의 가족들을 특별히 초청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많은 베들레헴 주민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 작은 일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축제와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시끌벅적대고 있는 가운데 저 멀리 들판에는 혼자 남겨져 양을 보고 있는 다윗이 있습니다.

 

 

 

** 들판에서의 다윗

어찌보면 외롭고 쓸쓸하고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고 소외당하고 왕따를 당한 것 같은 한 소년이 양을 지키며 앉아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 나타난 말씀들을 통해 다윗이 어떤 모습으로 양들을 돌봤는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잠시 들판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내 일어나서는 하프를 타고 주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찬송시를 직접 지어서 노래를 붙여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금 양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한 마리 한 마리 어디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때 어디선가 곰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양들이 흩어지고 다른 양치기 품꾼들은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곰은 어린양 한 마리를 움켜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와 돌팔매 기구를 가지고 추격합니다. 작은 양치기 소년과 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거대한 몸집의 곰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저 곰의 발톱과 이빨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고 내가 오직 아버지의 양들을 충성되게 지켜낼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소서."

 

 

어린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작은 양치기의 입에는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노래하는 찬양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라. 가족들 가운데서도 막내에 불과하고 양치기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내가 이렇게 양을 지키는 목자이듯이 주님은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목자시로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외쳤을 것입니다.

 

 

다윗은 날마다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며 모든 외로움과 쓸쓸함을 이겨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섭섭하고 허전하고 울적할 때마다 다시 주님께 나아가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주님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 속에 깊이 잠겨서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다윗을 누군가 부르고 있습니다.

 

 

"이봐, 다윗! 야! 내 말 안들려? 너 출세하겠더라? 지금 빨리 사무엘 대언자께서 너를 불러오라고 하셨어. 너가 오지 않으면 앉지도 않겠다고 서서 기다리신단 말야. 빨리 와봐."

이렇게 해서 다윗은 영문도 모른채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 위에 임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다윗과 골리앗

한편 사울 위에 있던 주의 영은 떠나가고 오히려 악한 영이 와서 사울을 괴롭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신하들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추천하여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이 괴로울 때에 하프를 타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괴로울 때마다 하프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사울은 상쾌하게 되고 낫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크게 사랑한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병기 드는 자로 삼았습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벌어지자 사울은 다윗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다윗의 큰 형들 중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는 용사로서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다윗은 다시 여전히 아버지의 양을 먹이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간 큰 아들들을 걱정하여서 다윗에게 음식을 주며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잘 있는 증거물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보냅니다. 왕 앞에서 하프를 타고 병기를 드는 역할까지 했던 다윗이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목동이요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한편 전쟁터에서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키가 약 3미터나 되는 거인 투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입은 쇠 그물 옷은 놋 오천 세겔이라 하는데 이것은 대략 196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골리앗이 들고 있던 창은 베틀 채 같았고 그 창의 촉 무게만 해도 쇠 육백 세겔로 대략 20킬로그램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놋 투구와 어깨 사이의 놋 방패, 정강이가리개 등의 모든 무장을 합치면 이 골리앗은 수백 킬로그램의 무겁고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쟁에 능한 앨리트 신동 전사로서 블레셋의 영웅 중의 영웅이었습니다. 이 골리앗이 40일 동안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리치기를 모두가 전쟁할 필요 없이 한 사람만 나와서 자기와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전에 우리 서 목사님과 제가 좋아하던 삼국지 게임을 보면, 일기토라는 전쟁 옵션이 있는데 전쟁 중에 대장인 장수 두 명이 나와서 대표로 싸웁니다. 뒤에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 있더라도 대표 장수가 패하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골리앗은 지금 일기토를 해서 전쟁을 끝내자고 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컸던 사울 조차 골리앗 앞에 서서는 작고 약해 보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골리앗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하였습니다.

 

 

22 다윗이 자기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자기 형들에게 이르러 문안하며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보라,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에서 가드 출신의 블레셋 사람 곧 이름이 골리앗이라 하는 투사가 올라와 똑같은 말들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이 말을 들은 다윗이 흥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느냐?"

이 말을 들은 엘리압이 다윗을 향해 분노를 발하며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그 양들을 네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왔도다."

 

 

막내 주제에 자기를 대신해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못마땅한데 지금 모두가 두려워 떠는 상태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다윗을 보고 흥분한 엘리압은 다윗을 향하여 무례하고 교만하다고 호통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향해 열심을 내다보면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들 안에서 말입니다. 너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교만할 필요 없다, 너만 왜 유별나게 그러냐, 그러나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우리를 격려하는 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의 내용처럼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이 때 갑자기 믿음이 생겨서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 아니라 평소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구해내신 하나님을 평소 그대로 신뢰하며 동행하였고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45 이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도전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이 날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게서 네 머리를 취하고 또 이 날 블레셋 사람들 군대의 사체를 공중의 날짐승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주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온 땅이 알게 하겠고

47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심을 이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시리라, 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만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만 사용하신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섬길 수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 맞는 것을 보시고 이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없었으면 저기 저 시골에 가족들 중에서도 하찮게 여겨지는 작은 목동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놀라운 역사와 간증을 일으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좀 모자라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이 아직 주님과 온전히 합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흥분해야 할 때 차분하려고 노력하고, 주님을 위해 잠잠하고 인내해야 할 때 앞서 나가 흥분하여 화를 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은 주님을 닮은 듯하여 주님께 가까이 나가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너무도 멀기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능력이 많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둔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해진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바로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 죄를 지은 다윗

이제 이야기를 많이 뛰어넘어서 다윗이 왕이 된 뒤에 일어난 사건 한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못지않게 너무나 유명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바로 다윗이 간음과 계획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군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서도 동침하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죄가 폭로될 것을 가리기 위하여 헷 족속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의 선봉으로 세워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된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음과 계획 살인은 율법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이러한 죄를 위한 번제 헌물은 아예 항목이 없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위하여서는 도피성읍이라도 예비되어 있었지만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그 생명으로 죄 값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하는 자와 살인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 주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사울 왕은 간음이나 살인이 아니라 다만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제사를 본인이 직접 수행한 것과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족속 중 좋은 것들을 남겨놓은 죄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 더욱더 중한 죄를 지은 다윗은 어떻게 해서 계속해서 왕의 자리에 앉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의 보좌가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까지 얻게 되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의 죄로 인하여 다윗의 집에서 간음과 살인과 반역이라는 일들로 다윗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범죄하기 이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까?

 

 

대언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가난하여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 없던 그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윗은 흥분하며 일어나서 그 사람을 반드시 죽어야 하며 반드시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단이 대답합니다. "왕이 그 사람이니이다."

 

 

자신의 죄가 발각되었을 때 사울왕은 백성의 눈을 의식하여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였지만, 다윗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에 따라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 주의 친절한 긍휼의 풍성함에 따라 내 범법들을 지워 주소서.

6 보소서, 주께서는 속 부분에 있는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나로 하여금 은밀한 부분에 있는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14 오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그리하시면 내 혀가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

16 주께서는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 헌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갔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러저러한 행위들이나 기름진 번제물들을 가지고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되게 돌이키고 깊은 속에서부터 통회하며 다시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완전하게 회복하였습니다.

 

 

호세아 대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호 6:6).

주님은 죄를 지으면 희생물을 가져오고, 기계적으로 자백하고, 번제 헌물을 가져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죄에게 정복당하여 종노릇하며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속마음이 하나님과 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 다윗이 만난 하나님

이번 주 중고등부 학생들과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만날 때에만 참되게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혼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혼자 먹는 것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가 있어도 혼자 극장에 찾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좋은 관광지가 있어도 혼자서 찾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며 어울리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지내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외로움과 허전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실된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기들은 엄마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청년들은 친구들과 즐기는 쾌락으로, 장년들은 돈과 명예와 자식들의 성공으로, 노인들은 손주들의 애교와 사람들의 존경으로... 허기지고 오그라든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노력하지만 블랙홀 같이 끊임없이 빨아드리는 요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되지도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자신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웠던 무식하고 볼품없던 한 양치기 소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마음과 마음의 진솔한 교제,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오늘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벌하고 저것을 하면 상주는 계산이 빠른 컴퓨터 시스템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오늘 나의 마음에 찾아오시고 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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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2.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바울이 만난 하나님(행 17:22-28)

본문 : 사도행전 17장 22-28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22 ¶ 그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23 내가 지나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글이 있는 제단을 발견하였나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라.

26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27 이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28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라. 너희의 시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도 이르되, 우리 또한 그분의 후손이라, 하였나니

오늘 저는 “바울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에 오게 된 사도바울은 이 도시가 온통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고 너무나 애통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이르러서 사도바울은 마르스 언덕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경배하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말씀이 구원받지 않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하나님, 또는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이 먼저 만나고 알게 된 하나님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게 된 하나님, 바울이 만났던 하나님을 우리도 알게 되기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저번에 함께 아브라함 이야기를 살펴본 것과 같이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겉에서 바울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고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 바울이 자라난 배경

먼저 우리는 바울이 참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오해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직접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 3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얻어맞고 있을 때 로마군의 한 총대장이 와서 바울을 구출하며 나눈 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37 바울이 성채 안으로 끌려 들어갈 때에 총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해도 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네가 그리스말을 하느냐?

38 너는 이전에 소동을 일으켜 살인자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간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냐? 하거늘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 출신의 유대인으로 결코 미천하지 않은 도시의 시민이니 간청하건대 내가 백성에게 말하도록 허락하라, 하매

 

 

사도바울은 자신의 출생지에 대하여, 결코 미천하지 않은,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다소라는 도시는 뛰어난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지적 문화의 일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소 출신의 많은 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로마에 가서 많은 지식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다소는 길리기아 평야에서 나오는 아마, 염소털, 모직물 등의 특산물로 인해서 부유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들거나 천막을 제조하는 수공업이 잘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결코 미천하지 않은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말할 때는 별 볼일 없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주 발달된 도시인 다소 시"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22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사람들아, 형제들아, 아버지들아, 내가 이제 너희에게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그들이 듣고 더욱 잠잠하거늘 그가 이르되,)

3 진실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으되 이 도시에서 가말리엘의 발밑에서 자라며 조상들의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이 날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노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말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말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말을 잘한 정도가 아니라 다소 출신이면서도 어릴 적부터 예루살렘으로 와서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율법박사 밑에서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교육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 장 넘겨서 24절부터 2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4 총대장이 그를 성채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그들이 무슨 까닭으로 그에게 소리 지르는지 알려고 그를 채찍질해서 심문하라고 명하니라.

25 그들이 가죽 끈으로 그를 묶으니 바울이 곁에 서 있던 백부장에게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인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하는 것이 법에 맞느냐? 하매

26 백부장이 그 말을 듣고 총대장에게 가서 전하여 이르되, 대장님이 행하시는 일에 주의하소서.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이니이다, 하니

27 이에 총대장이 와서 그에게 이르되, 내게 말하라. 네가 로마 사람이냐? 하매 그가 이르되, 그러하다, 하거늘

28 총대장이 응답하되,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이 자유를 얻었노라, 하니 바울이 이르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자니라, 하니라.

29 이에 그를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즉시 그에게서 물러가고 총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을 알고는 자기가 그를 결박하였으므로 두려워하니라.

총대장은 로마 시민이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다른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5 나는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에 관한 한 교회를 핍박하였고 율법에 있는 의에 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성장한 가정환경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쉽게 말해 자수성가하신 분들입니다. 바울의 부모님이 살고 있던 시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철의 로마제국이 유대민족을 압제하며 억압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를 얻고자 수많은 피를 뿌렸습니다. 몇몇 동족들은 세리가 되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자기 삶을 안락하게 꾸려나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왔던 바울의 부모님은 결코 그러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대 땅 어느 곳에 살고 있던 바울의 부모님은 로마의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다소 시로 이사를 갑니다. 떠듬거리는 그리스말로 정보를 알아보며 새로운 땅에 정착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치열한 사투와도 같았습니다. 때로는 유대인 동족들로부터 민족을 배반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밤낮 쉼 없이 천막을 깁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악당 같은 세리들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내 바울의 부모님은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사게 되었고, 이제 로마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가정을 세워나갔을 것입니다. 자, 이제 바울이 태어납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베냐민 지파로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그 위대한 왕의 이름으로 따라 자신의 아들을 "사울"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부모님이 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아들 사울이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주었고, 당시 다소 시에서 배울 수 있었던 철학과 헬라의 모든 발전된 문화와 지식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조기유학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이라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모를리 없는 랍비 중의 랍비 밑에서 높은 학비를 지불하며 철저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바울에게 지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천막 깁는 기술까지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을 가지고 대략 이렇게 그림을 그려볼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 성장하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수성가하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고 요구 당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랍비 중의 랍비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서도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으며 그것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 해내면 모두가 나를 칭찬해 줄거야. 여기까지 해내면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줄거야."

 

 

그러나 이렇게 요구받고 성취해내고 또 다시 요구를 받는 사도바울의 삶에서는 어떠한 쉼도 안식도 만족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그 무엇으로 보아도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었던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유명하고 촉망받는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다시 사람들의 기대라고 이름 지어진 더욱더 높고 무거운 요구에 억눌려 그것을 이겨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년 사울이 지금까지 알아온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위대하셔서 그 기준을 맞춰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든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에 의로 말하자면 흠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따라가도 만족시켜 드리기 힘든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무한히 요구하시는 하나님, 끝없는 기준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 바울의 회심

사울은 어느새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서 있습니다.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치열하게 따라갔던 사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섭고 엄격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죽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을 해서라도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당신을 섬기고 내 모든 것을 드리는데 나는 왜 만족이 없을까요? 왜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할까요?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누구보다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했던 사울의 마음 속에는 누구보다 큰 공허와 메마름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거짓 증인들 때문에 잡혀 와서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사울은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러한 자들은 다 죽이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하였고 공회에 앉아있던 모든 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다가 분을 참지 못해 그를 도시 밖으로 끌고가 내 던지며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던 스데반은 죽는 그 순간에도 흐트러짐 없이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모든 증인들은 하나같이 촉망받는 공회의 젊은이 사울 앞에 옷을 모아둡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얼굴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이 죽으면서 외친 말은 더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맞다면 그는 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으로 벌할 것을 기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그렇게 죽는 순간에서조차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었는가?"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겉으로는 아무 열매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이 사울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의 요구와 율법의 기준과 사람들의 칭찬과 기대로 인하여 너무나 억눌리고 메마르고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더욱 강하게 일어서고자 다마스쿠스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다 잡아올 수 있도록 편지를 요청합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돼. 사울! 여태까지 잘 해왔잖아! 그러한 평안 따위는 다 잊어버려. 나는 사람을 섬기는게 아니라 끝없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려면 더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수밖에 없는거야. 스데반 그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사니까 평안해 보인 것 뿐이야. 흔들릴 필요 없어."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가운데 태양 빛보다 더욱 밝은 한 줄기 빛이 사울 위에 둘러 비춥니다. 사울은 즉시 눈이 멀어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그가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울은 만약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자기는 즉결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예수님은 사울에게 "너 이놈, 내가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끝이 없구나. 다마스쿠스까지 가서 내게 반역하려느냐?"하면서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울을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너는 지금 가시 채를 걷어차고 있구나. 걷어차는 네 발이 더 아프지 않느냐? 사울아 너가 그렇게 길을 가면 갈수록 너의 마음에 더 큰 갈급함이 있고 메마름이 있구나."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 바울이 만난 하나님

이렇게 해서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17장 24-27절을 보시겠습니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라.

26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27 이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은 책상에서 공부해서 알아낸 하나님이 아닙니다. 직접 바울에게 방문하시고 만나주시고 교제하여 주셔서 알게 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금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참되게 만난 하나님은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알아오던 하나님, 알지 못하는 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엄격하고 늘 요구하며 높은 기준에 이를 때까지 다그치고 책망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풍족하신 하나님,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멀리 계셔서 감히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두려운 분이었으나, 바울이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두 눈을 다 감고 더듬어서라도 찾기 원하면 만나주시고 발견되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15 이것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1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 안에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

 

 

또 디모데후서에서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

 

 

우리는 오늘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떠한 모습과 상관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날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엄격하고 무서운 주인과 같이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맡기지 않는 곳에서 찾고자 하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이 만나고 알게된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요,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채워주시는 풍성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을 더 만나고 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영향을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손해를 당하셔서 분노하시고, 또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분을 섬기면 도움을 받아 기뻐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한 행동이 그분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욥기 35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5 하늘들을 바라보고 살펴보라. 그대보다 더 높은 구름들을 바라보라.

6 그대가 죄를 지은들 그분을 대적하여 무슨 일을 하겠느냐? 혹은 그대의 범법이 많다 한들 그대가 그분께 무슨 일을 하겠느냐?

7 그대가 의로운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겠느냐? 혹은 그분께서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사악함은 그대 같은 사람이나 해칠 것이요, 그대의 의는 사람의 아들이나 유익하게 하리라.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며 무엇을 요구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더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자하며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친밀하고도 깊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입니까?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복음도 전파하고 교회에서 성도들도 섬겨야하고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수고는 요구받고 기준을 제시받아서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과 더 친밀한 교제로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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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6.09.20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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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만난 하나님(행 13:21-22)


(행 13:21-22) 『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켜 세우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뜻을 다 성취하리라, 하시고』
(삼상 16:5-13) 『5 그가 이르되, 평화롭게 오느니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은즉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나와 함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자, 하고 그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청하니라. 6 그들이 오매 그가 엘리압을 보고 이르기를,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하였으나 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이에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매 그가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그 때에 삼마를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다시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니라.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자식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니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서서,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하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우리가 앉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그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이제 그는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겼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이 그니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시니라. 13 이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니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일어나서 라마로 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곳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13장 21-22절을 보시겠습니다. (읽는다.) 이제 사무엘상 16장 5절부터 13까지 보시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길고 자세하게 그가 지나간 길과 행적이 기록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는 이 짧은 설교시간을 통하여 다윗의 생애를 모두 알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생애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주목하여 살펴봄으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었는가를 주의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다음 아들이었던 셋으로부터 인류는 새롭게 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5대손인 에녹이 살았을 때부터 이미 세상은 극도로 타락하기 시작했고, 아담의 8대손 노아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호흡하는 생물을 홍수로 심판하셔야 할 만큼 타락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롭게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셨지만, 모든 인류가 한 곳에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흩으시고 많은 민족들의 구분과 경계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한 민족을 만들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통하여 결국 70명이라는 자손이 이집트로 들어갔고, 400년 만에 그들은 모세와 함께 약 200만이라는 엄청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이동하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은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들에게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재판관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가나안 민족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벌하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재판관들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 때로부터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450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을 주셨습니다(행 13:20). 

이제 재판관들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대언자 사무엘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도 다른 민족들과 같이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구분되게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왕국을 거부하고 다른 민족들과 같은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크고 잘생기고 능력이 많은 용사를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모든 백성은 한번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를 외칠 만큼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의 평가와 눈을 더 주의하는 왕이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 외에는 결코 드려서는 안되는 제사를 전쟁이 두려워 떠나가는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스스로 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민족의 왕과 모든 기름진 양과 소를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떠나갈 때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보다는 그래도 백성들이 보고 있으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양이라도 내달라고 요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는 자신의 경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지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다윗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16장의 말씀이 등장하게 됩니다. 16장 1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어느 때까지 그를 위하여 애곡하려느냐? 기름을 네 뿔에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주님은 아직 누구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시지는 않고 다만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에 들어가니 모든 백성을 인도하던 대언자 사무엘의 방문에 모두들 놀라고 떨며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마을의 장로들이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평화롭게 오시나이까?" 사무엘은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준비를 하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한번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온 민족을 재판하고 이끌던 장로 중의 장로, 대언자 사무엘이 마을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치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한 것같이 베들레헴에서는 엄청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의 장로들이 다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은 특별히 "이새의 가족"을 지명하여 초청하였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아들들 가운데 한 명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도 이 기름 부음을 받을 자가 사울을 대신한 왕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큰 파장이 올 것이기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기름을 붓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백성들도 묻는 것을 두려워해서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첫째 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으로 옵니다. 이 엘리압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용사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보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감탄하면서 기름 부을 준비를 합니다. 주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러한 놀라운 말씀,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와 같은 말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섬겨온 사무엘조차 사람인지라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게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비나답, 삼마 이렇게 일곱 아들들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어떤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확인차 묻습니다. "네 자식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새가 대답한 뉘앙스를 잘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막내 녀석이 있는데, 그 놈은 양치고 있지요. 막내 녀석은 아직 이런 자리에 참석할 놈이 아니죠. 형들 다 왔으니 양이나 보고 있으라 시켰죠."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사무엘이 왔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줘야지, 그것도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대한 잔치요 거룩한 자리인데, "너는 가서 양이나 쳐라."하고 부르지도 않았으니 다윗이 가족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안 봐도 뻔할 뻔 자입니다. 막내로서 형들의 수중을 들고 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하고 모든 아들들을 초청한 가족 행사 때에조차 따로 남겨져 양을 돌봐야하는... 아들이면서도 아들 같지 않은 대우를 받았던 다윗을 그려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새의 가족들을 특별히 초청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많은 베들레헴 주민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 작은 일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축제와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시끌벅적대고 있는 가운데 저 멀리 들판에는 혼자 남겨져 양을 보고 있는 다윗이 있습니다. 

들판에서의 다윗
어찌보면 외롭고 쓸쓸하고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고 소외당하고 왕따를 당한 것 같은 한 소년이 양을 지키며 앉아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 나타난 말씀들을 통해 다윗이 어떤 모습으로 양들을 돌봤는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잠시 들판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내 일어나서는 하프를 타고 주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찬송시를 직접 지어서 노래를 붙여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금 양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한 마리 한 마리 어디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때 어디선가 곰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양들이 흩어지고 다른 양치기 품꾼들은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곰은 어린양 한 마리를 움켜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와 돌팔매 기구를 가지고 추격합니다. 작은 양치기 소년과 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거대한 몸집의 곰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저 곰의 발톱과 이빨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고 내가 오직 아버지의 양들을 충성되게 지켜낼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소서." 

어린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작은 양치기의 입에는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노래하는 찬양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라. 가족들 가운데서도 막내에 불과하고 양치기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내가 이렇게 양을 지키는 목자이듯이 주님은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목자시로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외쳤을 것입니다. 
다윗은 날마다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며 모든 외로움과 쓸쓸함을 이겨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섭섭하고 허전하고 울적할 때마다 다시 주님께 나아가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주님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 속에 깊이 잠겨서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다윗을 누군가 부르고 있습니다. 
"이봐, 다윗! 야! 내 말 안들려? 너 출세하겠더라? 지금 빨리 사무엘 대언자께서 너를 불러오라고 하셨어. 너가 오지 않으면 앉지도 않겠다고 서서 기다리신단 말야. 빨리 와봐."
이렇게 해서 다윗은 영문도 모른채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 위에 임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한편 사울 위에 있던 주의 영은 떠나가고 오히려 악한 영이 와서 사울을 괴롭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신하들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추천하여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이 괴로울 때에 하프를 타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괴로울 때마다 하프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사울은 상쾌하게 되고 낫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크게 사랑한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병기 드는 자로 삼았습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벌어지자 사울은 다윗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다윗의 큰 형들 중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는 용사로서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다윗은 다시 여전히 아버지의 양을 먹이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간 큰 아들들을 걱정하여서 다윗에게 음식을 주며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잘 있는 증거물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보냅니다. 왕 앞에서 하프를 타고 병기를 드는 역할까지 했던 다윗이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목동이요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한편 전쟁터에서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키가 약 3미터나 되는 거인 투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입은 쇠 그물 옷은 놋 오천 세겔이라 하는데 이것은 대략 196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골리앗이 들고 있던 창은 베틀 채 같았고 그 창의 촉 무게만 해도 쇠 육백 세겔로 대략 20킬로그램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놋 투구와 어깨 사이의 놋 방패, 정강이가리개 등의 모든 무장을 합치면 이 골리앗은 수백 킬로그램의 무겁고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쟁에 능한 앨리트 신동 전사로서 블레셋의 영웅 중의 영웅이었습니다. 이 골리앗이 40일 동안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리치기를 모두가 전쟁할 필요 없이 한 사람만 나와서 자기와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전에 우리 서 목사님과 제가 좋아하던 삼국지 게임을 보면, 일기토라는 전쟁 옵션이 있는데 전쟁 중에 대장인 장수 두 명이 나와서 대표로 싸웁니다. 뒤에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 있더라도 대표 장수가 패하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골리앗은 지금 일기토를 해서 전쟁을 끝내자고 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컸던 사울 조차 골리앗 앞에 서서는 작고 약해 보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골리앗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하였습니다. 

"22 다윗이 자기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자기 형들에게 문안하고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보라,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에서 가드 출신 블레셋 사람 곧 이름이 골리앗이라 하는 투사가 올라와 똑같은 말들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삼상 17:22,23). 
이 말을 들은 다윗이 흥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느냐?"
이 말을 들은 엘리압이 다윗을 향해 분노를 발하며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그 양들을 네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왔도다."
막내 주제에 자기를 대신해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못마땅한데 지금 모두가 두려워 떠는 상태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다윗을 보고 흥분한 엘리압은 다윗을 향하여 무례하고 교만하다고 호통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향해 열심을 내다보면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들 안에서 말입니다. 너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교만할 필요 없다, 너만 왜 유별나게 그러냐, 그러나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우리를 격려하는 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의 내용처럼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이 때 갑자기 믿음이 생겨서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 아니라 평소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구해내신 하나님을 평소 그대로 신뢰하며 동행하였고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45 너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도전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이 날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게서 네 머리를 취하고 또 이 날 블레셋 사람들 군대의 사체를 공중의 날짐승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주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온 땅이 알게 하겠고 47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심을 이 모든 무리가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시리라"(삼상 17:45-47).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한가지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만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만 사용하신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섬길 수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 맞는 것을 보시고 이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없었으면 저기 저 시골에 가족들 중에서도 하찮게 여겨지는 작은 목동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놀라운 역사와 간증을 일으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좀 모자라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이 아직 주님과 온전히 합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흥분해야 할 때 차분하려고 노력하고, 주님을 위해 잠잠하고 인내해야 할 때 앞서 나가 흥분하여 화를 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은 주님을 닮은 듯하여 주님께 가까이 나가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너무도 멀기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능력이 많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둔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해진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바로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죄를 지은 다윗
이제 이야기를 많이 뛰어넘어서 다윗이 왕이 된 뒤에 일어난 사건 한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못지 않게 너무나 유명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바로 다윗이 간음과 계획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군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서도 동침하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죄가 폭로될 것을 가리기 위하여 헷 족속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의 선봉으로 세워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된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음과 계획 살인은 율법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이러한 죄를 위한 번제 헌물은 아예 항목이 없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위하여서는 도피성읍이라도 예비되어 있었지만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그 생명으로 죄 값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하는 자와 살인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 주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사울 왕은 간음이나 살인이 아니라 다만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제사를 본인이 직접 수행한 것과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족속 중 좋은 것들을 남겨놓은 죄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 더욱더 중한 죄를 지은 다윗은 어떻게 해서 계속해서 왕의 자리에 앉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의 보좌가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까지 얻게 되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의 죄로 인하여 다윗의 집에서 간음과 살인과 반역이라는 일들로 다윗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범죄하기 이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까?

대언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가난하여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 없던 그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윗은 흥분하며 일어나서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야하며 반드시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단이 대답합니다. "왕이 그 사람이니이다."
자신의 죄가 발각되었을 때 사울왕은 백성의 눈을 의식하여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였지만, 다윗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에 따라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 주의 크신 친절한 긍휼에 따라 내 범죄들을 지워 주소서. 6 보소서, 주께서는 속 부분에 있는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나로 하여금 은밀한 부분에 있는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14 오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그리하시면 내 혀가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 16 주께서는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 헌물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갔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러저러한 행위들이나 기름진 번제물들을 가지고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되게 돌이키고 깊은 속에서부터 통회하며 다시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완전하게 회복하였습니다. 

호세아 대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느니라"(호 6:6). 주님은 죄를 지으면 희생물을 가져오고, 기계적으로 자백하고, 번제 헌물을 가져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죄에게 정복당하여 종노릇하며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속마음이 하나님과 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
이번 주 중고등부 학생들과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만날 때에만 참되게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혼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혼자 먹는 것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가 있어도 혼자 극장에 찾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좋은 관광지가 있어도 혼자서 찾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며 어울리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지내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외로움과 허전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실된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기들은 엄마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청년들은 친구들과 즐기는 쾌락으로, 장년들은 돈과 명예와 자식들의 성공으로, 노인들은 손주들의 애교와 사람들의 존경으로... 허기지고 오그라든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노력하지만 블랙홀 같이 끊임없이 빨아드리는 요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되지도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자신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웠던 무식하고 불품 없던 한 양치기 소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마음과 마음의 진솔한 교제,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오늘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벌하고 저것을 하면 상주는 계산이 빠른 컴퓨터 시스템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오늘 나의 마음에 찾아오시고 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6.08.02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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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만난 하나님(행 17:22-28)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바울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에 오게 된 사도바울은 이 도시가 온통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고 너무나 애통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이르러서 사도바울은 마르스 언덕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경배하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말씀이 구원받지 않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말씀들을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하나님, 또는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이 먼저 만나고 알게 된 하나님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게 된 하나님, 바울이 만났던 하나님을 우리도 알게 되기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저번에 함께 아브라함 이야기를 살펴본 것과 같이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겉에서 바울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고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바울이 자라난 배경
먼저 우리는 바울이 참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오해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직접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 3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얻어맞고 있을 때 로마군의 한 총대장이 와서 바울을 구출하며 나눈 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출생지에 대하여 "미천한 도시가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다소라는 도시는 뛰어난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지적 문화의 일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소 출신의 많은 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로마에 가서 많은 지식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다소는 길리기아 평야에서 나오는 아마, 염소털, 모직물 등의 특산물로 인해서 부유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들거나 천막을 제조하는 수공업이 잘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미천한 도시가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말할 때는 별 볼일 없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주 발달된 도시인 다소 시"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22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말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말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말을 잘한 정도가 아니라 다소 출신이면서도 어릴 적부터 예루살렘으로 와서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율법박사 밑에서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교육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 장 넘겨서 24절부터 2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총대장은 로마 시민이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성장한 가정환경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쉽게 말해 자수성가하신 분들입니다. 바울의 부모님이 살고 있던 시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철의 로마제국이 유대민족을 압제하며 억압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를 얻고자 수많은 피를 뿌렸습니다. 몇몇 동족들은 세리가 되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자기 삶을 안락하게 꾸려나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왔던 바울의 부모님은 결코 그러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대 땅 어느 곳에 살고 있던 바울의 부모님은 로마의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다소 시로 이사를 갑니다. 떠듬거리는 그리스말로 정보를 알아보며 새로운 땅에 정착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치열한 사투와도 같았습니다. 때로는 유대인 동족들로부터 민족을 배반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밤낮 쉼 없이 천막을 깁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악당 같은 세리들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내 바울의 부모님은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사게되었고, 이제 로마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가정을 세워나갔을 것입니다. 자, 이제 바울이 태어납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베냐민 지파로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그 위대한 왕의 이름으로 따라 자신의 아들을 "사울"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이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부모님이 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아들 사울이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태어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주었고, 당시 다소 시에서 배울 수 있었던 철학과 헬라의 모든 발전된 문화와 지식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조기유학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이라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모를리 없는 랍비 중의 랍비 밑에서 높은 학비를 지불하며 철저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바울에게 지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천막 깁는 기술까지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을 가지고 대략 이렇게 그림을 그려볼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 성장하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수성가하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고 요구 당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랍비 중의 랍비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서도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으며 그것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 해내면 모두가 나를 칭찬해 줄거야. 여기까지 해내면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줄거야."
그러나 이렇게 요구받고 성취해내고 또 다시 요구를 받는 사도바울의 삶에서는 어떠한 쉼도 안식도 만족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그 무엇으로 보아도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었던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유명하고 촉망받는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다시 사람들의 기대라고 이름지어진 더욱더 높고 무거운 요구에 억눌려 그것을 이겨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년 사울이 지금까지 알아온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위대하셔서 그 기준을 맞춰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든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에 의로 말하자면 흠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따라가도 만족시켜 드리기 힘든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무한히 요구하시는 하나님, 끝없는 기준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의 회심
사울은 어느새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서 있습니다.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치열하게 따라갔던 사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섭고 엄격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죽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을 해서라도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당신을 섬기고 내 모든 것을 드리는데 나는 왜 만족이 없을까요? 왜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할까요?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누구보다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했던 사울의 마음 속에는 누구보다 큰 공허와 메마름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거짓 증인들 때문에 잡혀와서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사울은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러한 자들은 다 죽이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하였고 공회에 앉아있던 모든 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다가 분을 참지 못해 그를 도시 밖으로 끌고가 내 던지며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던 스데반은 죽는 그 순간에도 흐트러짐 없이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모든 증인들은 하나같이 촉망받는 공회의 젊은이 사울 앞에 옷을 모아둡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얼굴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이 죽으면서 외친 말은 더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맞다면 그는 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으로 벌할 것을 기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그렇게 죽는 순간에서조차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었는가?"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겉으로는 아무 열매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이 사울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의 요구와 율법의 기준과 사람들의 칭찬과 기대로 인하여 너무나 억눌리고 메마르고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더욱 강하게 일어서고자 다마스커스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다 잡아올 수 있도록 편지를 요청합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돼. 사울! 여태까지 잘 해왔잖아! 그러한 평안 따위는 다 잊어버려. 나는 사람을 섬기는게 아니라 끝없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려면 더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수밖에 없는거야. 스데반 그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사니까 평안해 보인 것 뿐이야. 흔들릴 필요 없어."

그리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가운데 태양 빛보다 더욱 밝은 한 줄기 빛이 사울 위에 둘러 비춥니다. 사울은 즉시 눈이 멀어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그가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울은 만약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자기는 즉결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예수님은 사울에게 "너 이놈, 내가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끝이 없구나.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내게 반역하려느냐?"하면서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울을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너는 지금 가시 채를 걷어차고 있구나. 걷어차는 네 발이 더 아프지 않느냐? 사울아 너가 그렇게 길을 가면 갈수록 너의 마음에 더 큰 갈급함이 있고 메마름이 있구나."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바울이 만난 하나님
이렇게 해서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17장 24절을 보시겠습니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 27절, "이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은 책상에서 공부해서 알아낸 하나님이 아닙니다. 직접 바울에게 방문하시고 만나주시고 교제하여 주셔서 알게 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금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참되게 만난 하나님은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알아오던 하나님, 알지 못하는 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엄격하고 늘 요구하며 높은 기준에 이를 때까지 다그치고 책망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풍족하신 하나님,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멀리 계셔서 감히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두려운 분이었으나, 바울이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두 눈을 다 감고 더듬어서라도 찾기 원하면 만나주시고 발견되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그러나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딤전 2:15,16).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딤후 1:12).

우리는 오늘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떠한 모습과 상관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날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엄격하고 무서운 주인과 같이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맡기지 않는 곳에서 찾고자 하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이 만나고 알게된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요,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채워주시는 풍성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을 더 만나고 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영향을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손해를 당하셔서 분노하시고, 또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분을 섬기면 도움을 받아 기뻐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한 행동이 그분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욥기 35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5 하늘들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더 높은 구름들을 바라보라. 6 그대가 죄를 지은들 그분을 대적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 혹은 그대의 범죄가 많다 한들 그대가 그분께 무슨 일을 하느냐? 7 그대가 의로운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느냐? 혹은 그분께서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느냐? 8 그대의 사악함은 그대 같은 사람이나 해칠 것이요, 그대의 의는 사람의 아들이나 유익하게 하리라."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며 무엇을 요구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더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자하며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친밀하고도 깊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입니까?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복음도 전파하고 교회에서 성도들도 섬겨야하고 여러 가지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수고는 요구받고 기준을 제시받아서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과 더 친밀한 교제로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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