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6.08.02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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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만난 하나님(행 17:22-28)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바울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에 오게 된 사도바울은 이 도시가 온통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고 너무나 애통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이르러서 사도바울은 마르스 언덕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경배하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말씀이 구원받지 않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말씀들을 다시 한번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하나님, 또는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이 먼저 만나고 알게 된 하나님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게 된 하나님, 바울이 만났던 하나님을 우리도 알게 되기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저번에 함께 아브라함 이야기를 살펴본 것과 같이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겉에서 바울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고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바울이 자라난 배경
먼저 우리는 바울이 참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오해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직접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 3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얻어맞고 있을 때 로마군의 한 총대장이 와서 바울을 구출하며 나눈 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출생지에 대하여 "미천한 도시가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다소라는 도시는 뛰어난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지적 문화의 일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소 출신의 많은 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로마에 가서 많은 지식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다소는 길리기아 평야에서 나오는 아마, 염소털, 모직물 등의 특산물로 인해서 부유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들거나 천막을 제조하는 수공업이 잘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미천한 도시가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말할 때는 별 볼일 없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주 발달된 도시인 다소 시"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22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말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말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말을 잘한 정도가 아니라 다소 출신이면서도 어릴 적부터 예루살렘으로 와서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율법박사 밑에서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교육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 장 넘겨서 24절부터 2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읽는다.) 총대장은 로마 시민이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성장한 가정환경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쉽게 말해 자수성가하신 분들입니다. 바울의 부모님이 살고 있던 시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철의 로마제국이 유대민족을 압제하며 억압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를 얻고자 수많은 피를 뿌렸습니다. 몇몇 동족들은 세리가 되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자기 삶을 안락하게 꾸려나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왔던 바울의 부모님은 결코 그러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대 땅 어느 곳에 살고 있던 바울의 부모님은 로마의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다소 시로 이사를 갑니다. 떠듬거리는 그리스말로 정보를 알아보며 새로운 땅에 정착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치열한 사투와도 같았습니다. 때로는 유대인 동족들로부터 민족을 배반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밤낮 쉼 없이 천막을 깁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악당 같은 세리들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내 바울의 부모님은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사게되었고, 이제 로마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가정을 세워나갔을 것입니다. 자, 이제 바울이 태어납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베냐민 지파로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그 위대한 왕의 이름으로 따라 자신의 아들을 "사울"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이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부모님이 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아들 사울이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태어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주었고, 당시 다소 시에서 배울 수 있었던 철학과 헬라의 모든 발전된 문화와 지식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조기유학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이라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모를리 없는 랍비 중의 랍비 밑에서 높은 학비를 지불하며 철저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바울에게 지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천막 깁는 기술까지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을 가지고 대략 이렇게 그림을 그려볼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 성장하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수성가하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고 요구 당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랍비 중의 랍비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서도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으며 그것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 해내면 모두가 나를 칭찬해 줄거야. 여기까지 해내면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줄거야."
그러나 이렇게 요구받고 성취해내고 또 다시 요구를 받는 사도바울의 삶에서는 어떠한 쉼도 안식도 만족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그 무엇으로 보아도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었던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유명하고 촉망받는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다시 사람들의 기대라고 이름지어진 더욱더 높고 무거운 요구에 억눌려 그것을 이겨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년 사울이 지금까지 알아온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위대하셔서 그 기준을 맞춰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든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에 의로 말하자면 흠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따라가도 만족시켜 드리기 힘든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무한히 요구하시는 하나님, 끝없는 기준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의 회심
사울은 어느새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서 있습니다.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치열하게 따라갔던 사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섭고 엄격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죽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을 해서라도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당신을 섬기고 내 모든 것을 드리는데 나는 왜 만족이 없을까요? 왜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할까요?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누구보다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했던 사울의 마음 속에는 누구보다 큰 공허와 메마름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거짓 증인들 때문에 잡혀와서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사울은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러한 자들은 다 죽이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하였고 공회에 앉아있던 모든 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다가 분을 참지 못해 그를 도시 밖으로 끌고가 내 던지며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던 스데반은 죽는 그 순간에도 흐트러짐 없이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모든 증인들은 하나같이 촉망받는 공회의 젊은이 사울 앞에 옷을 모아둡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얼굴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이 죽으면서 외친 말은 더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맞다면 그는 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으로 벌할 것을 기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그렇게 죽는 순간에서조차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었는가?"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겉으로는 아무 열매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이 사울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의 요구와 율법의 기준과 사람들의 칭찬과 기대로 인하여 너무나 억눌리고 메마르고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더욱 강하게 일어서고자 다마스커스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다 잡아올 수 있도록 편지를 요청합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돼. 사울! 여태까지 잘 해왔잖아! 그러한 평안 따위는 다 잊어버려. 나는 사람을 섬기는게 아니라 끝없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려면 더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수밖에 없는거야. 스데반 그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사니까 평안해 보인 것 뿐이야. 흔들릴 필요 없어."

그리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가운데 태양 빛보다 더욱 밝은 한 줄기 빛이 사울 위에 둘러 비춥니다. 사울은 즉시 눈이 멀어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그가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울은 만약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자기는 즉결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예수님은 사울에게 "너 이놈, 내가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끝이 없구나. 다마스커스까지 가서 내게 반역하려느냐?"하면서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울을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너는 지금 가시 채를 걷어차고 있구나. 걷어차는 네 발이 더 아프지 않느냐? 사울아 너가 그렇게 길을 가면 갈수록 너의 마음에 더 큰 갈급함이 있고 메마름이 있구나."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바울이 만난 하나님
이렇게 해서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17장 24절을 보시겠습니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 27절, "이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은 책상에서 공부해서 알아낸 하나님이 아닙니다. 직접 바울에게 방문하시고 만나주시고 교제하여 주셔서 알게 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금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참되게 만난 하나님은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알아오던 하나님, 알지 못하는 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엄격하고 늘 요구하며 높은 기준에 이를 때까지 다그치고 책망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풍족하신 하나님,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멀리 계셔서 감히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두려운 분이었으나, 바울이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두 눈을 다 감고 더듬어서라도 찾기 원하면 만나주시고 발견되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그러나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딤전 2:15,16).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딤후 1:12).

우리는 오늘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떠한 모습과 상관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날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엄격하고 무서운 주인과 같이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맡기지 않는 곳에서 찾고자 하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이 만나고 알게된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요,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채워주시는 풍성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을 더 만나고 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영향을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손해를 당하셔서 분노하시고, 또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분을 섬기면 도움을 받아 기뻐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한 행동이 그분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욥기 35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5 하늘들을 우러러보라. 그대보다 더 높은 구름들을 바라보라. 6 그대가 죄를 지은들 그분을 대적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 혹은 그대의 범죄가 많다 한들 그대가 그분께 무슨 일을 하느냐? 7 그대가 의로운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느냐? 혹은 그분께서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느냐? 8 그대의 사악함은 그대 같은 사람이나 해칠 것이요, 그대의 의는 사람의 아들이나 유익하게 하리라."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며 무엇을 요구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더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자하며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친밀하고도 깊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입니까?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복음도 전파하고 교회에서 성도들도 섬겨야하고 여러 가지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수고는 요구받고 기준을 제시받아서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과 더 친밀한 교제로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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