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5.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9

은혜로 삽니다(삼하 23:1-5)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3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3장 1-5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이르기를,
2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릴지니라.
4 그는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가 온 뒤 맑게 비침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 같으니라, 하셨도다.
5 비록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사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비록 그분께서 내 집이 자라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나의 모든 구원이요, 나의 모든 소원이기 때문이라.
저는 오늘 “은혜로 삽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사람에게 분명한 말과 글을 통해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저희 호윤이도 이제 20개월 정도 되면서 몇 가지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재미있고 신비롭습니다. 얼마 전에는 잠꼬대를 하는데 한글자로 분명하게 “까”라고 말하는 것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꿈속에서 과자를 먹었나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지만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한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유람선에서 해상재난을 당했는데 구조정에는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남편은 부인을 남겨두고 혼자 구조정에 올랐고 부인은 침몰하는 배 위에서 남편에게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은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여러분, 부인이 무슨 말을 했을까요?"
학생들은 모두 격분하여 말했습니다. "당신을 저주해요. 내가 정말 눈이 삐었지!!"
이때 선생님은 한 학생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학생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생각했을 때, 부인은 아마, 우리 아이 잘 부탁해요!, 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너 이 이야기를 들어봤니?" 

학생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선생님은 뭉클한 마음으로, "정답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배는 침몰했고,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딸을 잘 키운 뒤, 몇 년 후 병으로 죽었습니다. 딸이 아빠의 유물을 정리하던 중 아빠의 일기장을 발견하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배 여행을 갔을 때 엄마는 이미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사고가 발생하였고 아빠는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일기에는 딸 때문에 엄마와 함께 죽을 수가 없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마지막 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사무엘기하 23장에 나타난 다윗의 마지막 말과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서 모든 내용이 오늘의 제목과 같은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었습니다. 은혜로 삽니다. 바로 다윗이 은혜로 살았고, 다윗의 모든 용사들이 은혜로 살았으며, 오늘 우리 모두가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 다윗의 마지막 말
먼저 사무엘기하 23장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하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이르기를,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높이 일으켜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을 뛰어난 용사라든지, 위대한 왕이라고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을 높이 일으켜진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낮은 자였는지를 기억하는 말입니다. 높은 자가 아니라, 높이 일으켜진 자입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자를 먼지에서 일으키시며 거지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통치자들 가운데 앉게 하시고 또 그들이 영광의 왕좌를 상속받게 하시나니 이는 땅의 기둥들이 주의 것이요, 또 그분께서 그것들 위에 세상을 세우셨기 때문이라.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라는 다른 신하들의 제안을 받았을 때, 자기 자신을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 다윗을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거지와 같은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사 영광의 왕좌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였습니다. 

다윗은 또한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대언자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기름을 부으려고 왔을 때, 초대받지 못한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나, 그 모든 형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실 가능성이 0%였던, 완전히 제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양치기 소년 시절 때부터, 들판에서 손에 하프를 들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교제하였던 그의 온 삶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고백의 특징이 있다면, 그 말이 달콤하다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듯 은혜로 간을 하고, 마음의 갈증과 허전함을 배불리 먹여줄 수 있는 풍성하고 복된 믿음의 고백들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하 23장으로 돌아오셔서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었도다.
다윗은 달콤한 시편의 말씀들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오늘 우리들의 입과 혀에도 오직 주님의 말씀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릴지니라.
4 그는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으며 비가 온 뒤 맑게 비침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 같으니라, 하셨도다.
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의 품격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가 반드시 의로워야 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적으로 표현하면서 또 실감나게 예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해가 돋을 때의 아침 햇살과 같이 따듯하고 밝고 맑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고, 구름 없는 아침과 같이 상쾌함을 말씀하고 있고, 또 비가 온 뒤에 땅에서 움이 돋는 연한 풀과 같은 신선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 사람들을 인도하는 모든 리더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는 남편에게, 또 가정에서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일터에서는 상사에게,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배들에게 요구되는 품격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씀을 지금 고백하고 있는 다윗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과연 이러한 왕이었습니까? 그는 과연 의롭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다스리는 왕이었습니까?

우리 함께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비록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사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셨으니 그 까닭은 비록 그분께서 내 집이 자라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나의 모든 구원이요, 나의 모든 소원이기 때문이라.
여기에서 다윗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걸었고, 모든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주님만을 붙들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으로 있으면서는 많은 실수와 허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음했고 살인했고, 자식들의 죄를 정의롭게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집이 하나님께 대해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셨으며, 모든 것을 정비하시고 확실하게 하시며, 모든 소원과 구원이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격이 있고, 아주 적합한 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아무 자격이 없을지라도, 내 집이 비록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어주셔서, 은혜를 베푸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마지막 말을 남기는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차고 넘치는, 한량없는, 갚을 길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 다윗의 용사들 - 처음 세 용사
사무엘기하 23장은 다윗의 찬양의 말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가장 실제적인 은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다윗과 함께하였던 37인의 용사들, 형제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날까지 정말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 수많은 시간들을 지나서, 이렇게 마지막 말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바로 목숨을 걸고 다윗과 함께, 다윗을 위하여, 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동행하였던 용맹한 형제들이, 다윗에게는 가장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먼저 우리 함께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소유한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자리에 앉았던 다그몬 사람 곧 에센 사람 아디노는 대장들 가운데 우두머리더라. 그가 자기 창을 들어 팔백 명을 치고 한 번에 그들을 죽였더라.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용사는 바로 다그몬 사람 아디노입니다. 그는 창을 사용하는 전사였고, 한 번의 전투에서 가나안 전사 팔백 명을 쓰러뜨린 용사들 중에 첫째 우두머리였습니다. 지금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아디노라는 이름은 “그의 창”이라는 뜻으로, 창을 잘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으로 보여집니다. 역대기상에서는 그의 이름을 야소브암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또 우리 함께 9,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인데 그는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의 하나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함께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섰으나 그때에 그들이 저들에게 도전하고
10 그가 일어나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달라붙을 때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치니라. 그 날에 주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으므로 백성이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다윗의 삼총사 가운데 두 번째는 엘르아살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을 두려워하여 물러섰을 때, 앞장서서 도전하며 싸움을 싸웠습니다. 야구선수들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훈련을 장시간 지속하면, 나중에 배트를 쥐었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옆에서 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세 용사 가운데 한 명인 엘르아살 역시도 손이 칼에 달라붙어서 펴지지 않을 정도로 싸운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엘르아살을 통하여 큰 승리를 이루셨고, 백성들은 물러섰다가 돌아와서 그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11,12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떼를 지어 팥이 무성한 땅에 함께 모이매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도망하였으나
12 그는 그 땅 한가운데 서서 그 땅을 보호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더라. 주께서 큰 승리를 이루셨더라.
세 용사 중 마지막 용사는 바로 삼마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도망하는 상황 속에서 홀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며 블레셋 사람들과 맞서서 싸웠던 용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큰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3-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또 서른 명의 우두머리 중에서 세 사람이 내려가 수확하는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블레셋 사람들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더라.
14 다윗은 그때에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는 그때에 베들레헴에 있었더라.
15 다윗이 애타게 바라며 이르되, 오 누가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는 우물의 물을 내게 주어 마시게 할까! 하매
16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뚫고 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던 우물의 물을 길어 그것을 취해 다윗에게 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주께 부어 드리며
17 이르되, 오 주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그런 까닭에 그가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아니하니라. 이 세 용사가 이런 일들을 행하였더라.
네, 이 장면은 영화 속 한 장면과 같은 너무나 멋지고 감동적인 일화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에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승리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탄식과 같은 혼잣말에 반응하여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세 용사였습니다. 오직 세 사람의 용사가 블레셋의 진영 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가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길어 왔던 것입니다. 

다윗조차 누군가가 그 말에 반응해서 정말 가서 물을 떠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말을 들었던 그 어떤 신하들도 가서 물을 떠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용사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원함을 예민하게 살피는 자들이었고, 다윗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이었고, 다윗이 마실 물 한 모금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충성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일을 달성할 만큼 전투에 능한 용사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과연 무슨 자격으로 이러한 훌륭하고 멋진 용사들을 신하로 두었으며, 그들의 이러한 충성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일까요?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 다윗의 두 번째 삼총사
이제 우리 함께 18,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인데 그는 세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더라. 그가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쳐서 죽이고 세 사람 가운데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었느냐? 그러므로 그가 그들의 대장이 되었으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의 처음 삼총사인 창의 달인 아디노, 칼이 손에 달라붙었던 엘르아살, 그리고 홀로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고 섰던 삼마를 이어서, 두 번째 삼총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 첫째는 바로 아비새였습니다. 아비새 역시도 창을 들고 한 번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 삼백 명을 쓰러뜨렸습니다. 또한 아비새는 다윗이 이스비브놉이라는 거인에게 죽임을 당할 번 하였을 때, 다윗을 구조하여 거인을 쓰러뜨리기도 하였습니다. 처음 삼총사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두 번째 삼총사역시 다윗의 든든한 지원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20-23절을 보시겠습니다. 
20 또 갑스엘 출신 용사의 손자요, 여호야다의 아들인 브나야인데 그는 많은 일을 행하였더라. 그가 사자 같은 모압 사람 두 명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구덩이 한가운데서 사자 한 마리를 죽였으며
21 또 잘생긴 이집트 사람을 죽였는데 그 이집트 사람의 손에 창이 있었으나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그 이집트 사람에게 내려가 그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의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들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가운데 이름을 얻고
23 그 서른 명보다 더 존귀하였으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자기의 호위대를 다스리게 하였더라.
그 다음 용사는 바로 브나야였습니다. 브나야 역시 전투에 능한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의 두 번째 삼총사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사람에 대하여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매우 궁금하지만, 하늘에 가서야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윗의 용사들을 열거하고 있는 37인의 명단에서 정작 요압 장군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요압 장군은 다윗과 함께하면서 많은 싸움을 싸웠고, 또 암몬 자손과 싸울 때에나,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할 때에나 가장 앞장서서 활약을 하였던 장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좋은 용사 37인의 목록에는 들어가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용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요압을 볼 때, 단지 유능하고 재능이 좋고 활약을 많이 한 것이 기준이 되지 못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며,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요압은 많은 부분에서 훌륭하였고, 많은 수고를 하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참되게 충성했던 용사로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육신의 방식이나,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성경 말씀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며, 칭찬하시는 믿음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 다윗의 31명의 용사
이제 24절부터 39절까지는 나머지 다윗의 용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단에서는 서른 명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 이름을 세어보면 서른 한 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9절에서는 모두 서른일곱 명이라고 총 인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 세 용사, 그 다음 세 용사, 그리고 서른 한명의 용사를 더해서, 모두 서른일곱이 되는 것입니다. 
서른 명의 용사들 중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고 있는 아사헬이 아브넬 장군을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그 때문에 새롭게 인원이 보충되면서 아마도 서른 명이 재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명단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이름은 34절 마지막에 나오는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조언자이자 밧세바의 할아버지이고, 엘리암은 밧세바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39절에 등장하고 있는 헷 족속 우리야는 바로 밧세바의 남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다윗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면서 범죄 하였던 바로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가장 좋은 용사들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으로서는 이 명단 자체가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왕이라 할지라도 자기 뜻대로 추가하거나, 삭제하거나, 변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명단 속에서 다윗의 죄악을 다시 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며, 차고 넘치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격이 없는 다윗에게, 이렇게 훌륭한 형제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 은혜로 살았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풍성한 은혜를 쏟아부어주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숨을 쉬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을 통하여,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불평하고 투정을 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을 주신 것 또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복에 겨운지, 받은 게 너무 많아서 귀한 줄도 모르고 불평할 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교회와 형제자매들을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모든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 아둘람 굴의 변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윗과 함께했던 훌륭한 용사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2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거기서 떠나 아둘람 굴로 피하매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이 그 일을 듣고는 그들이 거기로 내려가 그에게 이르렀더라.
2 고난 중에 있던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불만이 있던 모든 자가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을 다스리는 대장이 되었더라. 거기에는 그와 함께한 사백 명가량의 사람이 있더라.
다윗의 용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아둘람 굴 출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별 것 아닌 사람들이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고, 하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있던 자들이었고, 빚진 자들이었고, 불만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리석고 약하고,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었을 때 전설적인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이 용사들이 은혜였던 것처럼, 이 용사들에게도 다윗은 은혜이며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영웅이자 전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담대하게 만들었고, 혼자서 수많은 블레셋 군사들과 맞서게 하였으며, 이미 물러서고 도망갔던 형제들을 다시 회복시켜 모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교회와 형제자매들 역시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나에게 지체들이 은혜이며, 또 지체들에게도 내가 은혜이며 선물인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고난 중에 있던 자이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이며, 빚진 자이며, 헐벗고, 어리석고, 약하고, 메마르고, 아무것도 아닌 자였습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주님 앞에 더러운 자였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먼저 찾아와주셨습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넘치는 은혜를 쏟아부어주고 계십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교회이며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오늘 다윗과 같이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된다면,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본 사무엘기하 23장의 말씀처럼, 나와 함께했던 형제자매들과의 소중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지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면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37인의 용사만이 아니라, 100명, 200명, 더 많은 지체들의 이름이 우리의 입에서 감사의 고백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은혜로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은혜로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은혜로 삽니다.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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