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1.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설교/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7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삼하 21:1)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21장입니다. 사무엘기하 21장 1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때에 다윗 시대에 해를 이어 삼 년 동안 기근이 있어서 다윗이 주께 여쭈었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으므로 그와 및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인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저는 오늘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물은 생명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꼭 물고기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이 없으면 식물들도 살 수가 없고,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가 없으며,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근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고도 큰 재앙입니다. 

실제적인 물이 없는 기근도 참으로 무서운 재앙이지만, 오늘날 이 시대에 있는 영적인 기근 역시 너무나 무섭고 치명적입니다. 우리 함께 아모스 8장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그것은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날들이 이르게 될 때, 이 땅에 기근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빵이나 물이 없는 갈증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을 것이 풍부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기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기갈입니다.

홍수가 나면 온 사방이 물이지만, 정작 마실 수 있는 물은 없다고 합니다. 그처럼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있으면서, 정작 먹고 마실 수 있는 주의 말씀을 찾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설교자도 많고, 기독교 서점에는 책들도 넘쳐납니다. 그러나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정작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너무나 어려운, 기근의 시대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독한 영적 기근의 결과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나 메말라 있습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땅은 싹을 내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자라게 만듭니다. 그러나 메마른 땅은 그렇게 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은 영적 기근 속에서 메마르고 지쳐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21장 1절 말씀에서 다윗 시대에 삼 년 연속으로 일어났던 기근에 대하여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1,2년 정도의 기근이야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3년 연속으로 기근이 들었을 때는, 4년차부터 매우 힘든 시간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무엘기하 21장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 안에 있는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목마르고 갈증이 난 우리들의 마음을 시원한 진리의 말씀과 성령님의 생명의 물로 풍성히 채워주시기를 원합니다. 


** 기브온 사람들
먼저 우리 함께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때에 다윗 시대에 해를 이어 삼 년 동안 기근이 있어서 다윗이 주께 여쭈었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으므로 그와 및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인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정말 오래간 만에 다윗이 주님께 여쭈었다고 하는 너무나 반가운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1년째 기근이 들었을 때나, 혹은 2년째 기근이 들었을 때에라도 더 빨리 주님께 여쭈었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3년만에라도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주님께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즉시로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왕의 시대에 사울왕과 그의 집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문제들을 주님 앞에 가져가 여쭙기를 원합니다. 한두 번 그냥 넘어갔을지라도, 세 번째에는 주님께 여쭙고 답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1장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모리 족속 중에서 남은 자들이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을 향해 열심이 있었으므로 그들을 죽이려고 꾀하였더라.) 왕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니라.
잠시 기브온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에 속하지 않았고, 가나안 이방 민족인 아모리 족속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모든 가나안 백성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얼마 되지 않아, 기브온 거주민과 주님의 이름으로 화친을 맺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기브온 거주민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아주 먼 곳의 나라에서부터 온 것처럼 여호수아를 속이고, 평화조약을 맺기를 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주님께 여쭙지 않았고, 기브온 거주민들에게 속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맹세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그들이 바로 근처에 거하는 마땅히 진멸해야 하는 가나안 백성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브온 거주민이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은 직후에, 다른 가나안의 왕들은 배신자들인 기브온 주민들을 대적하여 연합군을 결성하였습니다. 그러자 기브온의 거주민들은 여호수아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만히 두면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속임수를 사용한 기브온 사람들을 멸할 수가 있었지만, 주님 앞에서 맹세한 언약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가나안 연합군을 대적하는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들을 이끌고 밤새도록 달려가 전쟁터에 합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돌과 우박을 내리셔서, 이스라엘이 칼로 죽인 자보다 더 많은 자들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해가 넘어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해와 달을 멈추어 서게 하셔서,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마땅히 진멸 당했어야 할 가나안 민족이며, 속임수를 사용하였던 자격이 없는 기브온 거주민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시고, 긍휼로 그들을 보존하시며, 완전한 승리를 허락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날까지 기브온 거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기브온 거주민들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과 함께 살도록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그들의 이웃이며 형제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비록 주님께 묻지 않고, 속임을 당하여, 어리석게 결정하고, 함부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자신의 맹세로 인정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마태복음 18장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
이 마태복음 말씀은 교회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진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의 뜻으로 승인하시고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카톨릭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하면서 교황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지옥에 보낼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한다면, 그것은 인정받을 문제가 아니라 심판을 받을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선택과 결정을 하늘의 뜻으로 인정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각 성도들이 깨어서 주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다소 어리석은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승인하셨고, 기브온 거주민들을 멸하시지 않는 것을 하나님 자신의 맹세로 받아들이시고, 정하셨습니다. 자격이 없고 멸망을 당하기에 합당하였던 기브온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원합니다. 


** 사울왕의 위험한 열심
그런데 사울왕은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을 위한 “열심”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무서운 “열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사울의 경우에서는 결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맹세를 깨뜨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민족을 죽이고자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로마서 10장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모르고,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과 열심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닌 그 결과로, 메시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진리가 없는 열심의 결과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고,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에서도 찬성하였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열심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항상 유익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열심은 오히려 해악이 될 수가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을 향한 열심으로 기브온 거주민을 멸하려고 하였고, 많은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 기근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맹세와 언약을 사람의 선한 열심으로 깨뜨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배워야 하며, 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걸어야하며, 왜 주님께 기도해야 하고, 교회의 지체들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할까요? 우리의 열심이 언제든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비록 그 자체로는 순수할지라도, 하나님이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육신의 뜻 가운데 행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울왕의 열심은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할 때,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은 무서운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눈에 옳은 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 기브온 거주민의 요구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1장으로 돌아오셔서 3-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그러므로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하랴? 내가 무엇으로 속죄하여야 너희가 주의 상속 유업을 위해 복을 빌겠느냐? 하매
4 기브온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사울과 그의 집에서 은이나 금을 취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또한 왕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사람을 죽이지 마옵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너희가 무엇을 말하든지 내가 너희를 위해 그것을 행하리라, 하매
5 그들이 왕께 응답하되, 우리를 소멸시킨 사람 곧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지역의 어느 곳에도 남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를 대적하며 계략을 꾸민 사람
6 즉 그의 아들들 중에서 일곱 명을 우리에게 넘겨주소서. 주께서 택하신 사울의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주를 위해 목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그들을 주리라, 하니라.
다윗은 즉시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죽였던 사울왕의 집에서 7명에게 복수하면 만족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7-9절을 보시겠습니다. 
7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곧 그들 사이에 있던 주의 맹세로 인하여 왕이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아끼니라.
8 다만 왕이 아이야의 딸 리스바의 두 아들 곧 그녀가 사울에게 낳은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미갈의 다섯 아들 곧 그녀가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을 위하여 키운 아들들을 붙잡아
9 그들을 기브온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니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을 산에서 주 앞에 목매어 달므로 그들 일곱 명이 다 함께 쓰러져 수확하는 때 곧 보리를 수확하기 시작하는 때의 첫 무렵에 죽으니라.
이것은 오늘날로서는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운 복수와 정의의 실현 방식입니다. 어찌되었든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그대로 이행하여, 사울의 자손 7명을 넘겨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지방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돌무덤에 묻고 왕이 명령한 모든 것을 수행하니라. 그 뒤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간구를 들으시니라.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그대로 이행하였고, 여기에 더하여 과거 다른 장소에 있었던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옮겨와 고향 땅에 묻어주었습니다. 다윗이 이 모든 일을 이행한 뒤에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위하여 간구를 들어주셨고, 기근을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 형제들을 사랑하는 길
우리는 오늘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양한 영적 교훈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주님께 여쭙는 모습에서, 사울왕이 잘못된 열심을 부리는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자격이 없는 기브온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모습에서 여러 가지 면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의 말씀을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기브온 사람들처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고, 너무나 육신적이어서 영적으로 필요가 없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거짓되게 행하여 믿기가 어렵고, 함께 무슨 일을 하기도 어려운 지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 자매를 구원하시고, 우리교회에 한 몸으로 더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그 형제자매를 받아들이며,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메마름과 기근이 있는 이유는, 우리 나름대로의 열심 가운데 행하면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정당하고, 내가 성경적이고, 내가 더 영적이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거침없이 행하면서, 다른 지체들은 고려하지 않고, 내 눈에 육신적이고, 자격이 없는 지체들을 버려두고,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곤고한 것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형제자매가 있지는 않습니까? 왜 나는 성령 충만의 삶을 살지 못할까를 주님께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함께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보시겠습니다. 
23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오다가 너를 대적할 어떤 일이 네 형제에게 있음을 거기서 기억하거든 
24 네 예물을 거기에,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맨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단 위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 맨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모든 요구를 이행하고, 정당하게 보상하고, 심판을 집행한 그 이후부터 기근을 끝내시고, 그 땅을 위한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형제자매들과 어려운 일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기억나게 해주신다면, 즉시 그것을 가지고 형제자매와 화해하기를 원합니다. 서로 더 이상 대화를 안 하거나, 적당히 인사만 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표면적인 예의를 지키는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기근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적당히 잘 지내면서 다투지 않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그렇게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잘못을 고백하고, 보상하며, 용서하고,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 거인들을 대적하는 법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1장 15-21절을 보시겠습니다. 
15 블레셋 사람들이 여전히 또 이스라엘과 싸움을 하매 다윗이 자기 신하들과 함께 내려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더라. 다윗이 기진하게 되매
16 그 거인의 아들들 중에서 무게가 놋으로 삼백 세겔 나가는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였으나
17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를 구조하고 그 블레셋 사람을 쳐서 죽이니 이에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께서 다시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나가지 마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18 이 일 후에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었는데 그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그 거인의 아들들 중에서 삽을 죽였더라.
19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었고 거기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을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20 또 여전히 가드에서 싸움이 있었고 거기에 키 큰 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손마다 손가락이 여섯 개요, 발마다 발가락이 여섯 개로 개수가 스물네 개더라. 그도 그 거인에게 태어났더라.
21 그가 이스라엘에게 도전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거인들을 쓰러뜨렸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물론 혼자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만나는 거인마다 혼자서 다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하면서 거인들을 쓰러뜨렸던 사람들의 이름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과 형제들은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함께 돕고 구조하면서 싸움을 싸웠고, 혼자서는 쓰러뜨리기가 힘든 많은 거인들을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앞에도 거인들과 같이 많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거인들을 어떻게 상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다윗과 그의 사람들처럼, 형제들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능히 이러한 거인들을 쓰러뜨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한 울타리의 각 양떼로 부르셨고, 한 몸의 각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각각의 용사들이 모인 군단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교회의 길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내가 십자가의 삶을 살고, 내가 주님을 섬기고, 내가 믿음이 성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하는 길이 아니라, 우리교회가, 나와 내 형제, 나와 내 자매가, 나와 내 지체가 함께 주님을 따르고, 함께 십자가를 지며, 함께 섬기고, 함께 성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 정리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의 다소 어리석은 결정을 하늘의 뜻으로 인정하셨고, 자격이 없는 기브온 거주민들을 하나님의 백성과 같이 대우해 주셨습니다. 사울과 그의 집은 잘못된 열심 가운데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정의롭게 심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정당하게 보상하고, 정의를 집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자격이 없는 민족들과 같은 기브온 형제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고, 또 풀어지는 일이 있었음을 우리가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의 기근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적 기근과 메마름이 있다면, 다윗과 같이 주님께 여쭙기를 원합니다. 사울왕과 같이 나름대로의 열심 가운데 행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어렵게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보상하였던 것처럼,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화해해야 할 지체가 없는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다윗과 형제들이 팀을 이루어 치열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거인들을 쓰러뜨렸던 것처럼, 우리가 한 몸, 한 교회로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며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각자는 약하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온전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 각자는 부족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풍성하고 충분하며 만족할 수가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귀한 교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너무나 귀한 형제자매들을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풍성한 믿음의 만찬과 생수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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