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교에 대한 간략한 덧붙임
사무엘하 19장, 다윗이 왕으로서 예루살렘 성으로 귀환하는 과정의 사건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등장하는데...
한 사건마다 한 번의 설교로 다루자니 그다지 큰 사건들이 아니고, 
또는 그러려면 사무엘하 19장에서만 4번 이상의 설교가 나오게 되고...
그렇다고 무시하고 통과하자니 아쉬운 그런 본문이었습니다. 
결국 많은 일들 속에서도 여전히 한 걸음, 오늘의 믿음의 한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주제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

2015.01.07.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3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45

오늘도 한 걸음을 걷자(삼하 19:14,15)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하 19장입니다. 사무엘기하 19장 14,15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4 그가 유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같이 돌리매 그들이 왕에게 이 말을 보내어 이르되, 왕과 왕의 모든 신하들은 돌아오소서, 하므로
15 이에 왕이 돌아와서 요르단에 이르매 유다가 왕을 맞으러 가서 왕이 요르단을 건너도록 안내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저는 오늘 “오늘도 한 걸음을 걷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 달리기
사람의 인생은 달리기 경주와도 같습니다. 달리기야 말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종목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달리기를 참 좋아합니다. 달리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우리는 주변 어디서에나 달리기와 관련된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 중에는 “테일즈러너”라고 있는데 바로 달리기 게임입니다. 또 스마트폰에도 “쿠키런”이나 “템플런”이라는 게임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러닝맨”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또 최근에 나온 영화 중에는 미로 속에서 달리는 “메이즈러너”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 역시 인생을 달리기에 빗대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걷는 적이 없어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저희 승연이와 호윤이도 집에서 차분하게 걷기보다는 언제나 그 작은 발로, 호윤이는 짜리몽땅한 다리로 다다다다, 뛰어다닙니다. 우리 대안학교에서도 언제나 초등학생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 복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서도 인생을 달리기 경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9장 24절을 보시겠습니다.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성경은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상을 받도록 달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우리 함께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증인들이 이렇게 큰 구름을 이루며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성경은 우리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이 스타디움의 관중들처럼, 큰 구름을 이루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은퇴한 믿음의 경주자들, 믿음의 승리자들과 영웅들이 우리의 경주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사무엘기하 19장의 말씀은 다윗의 힘겨운 믿음의 경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온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하여, 추방당한 자,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원했지만, 결국 압살롬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슬퍼할 시간도 없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사무엘기하 19장 14,15절 말씀은 이제 유다의 집이 다시 왕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무엘기하 19장의 말씀은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는 회복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도시 밖으로 나왔던 길이 절망의 발걸음이었다면, 이제 다시 예루살렘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영광과 승리의 귀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의 자리를 회복하였더라, 라고 하면서 간단하게 기록하지 않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아오는 그 발걸음 가운데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의 자리를 회복하여 가는 길 가운데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며, 다윗의 왕좌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다윗의 발걸음은, 오늘 우리가 걷는 믿음의 길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오늘도 한 걸음을 걷자.”라는 말씀의 제목처럼,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 있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 가운데서 주저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힘을 얻기 원합니다. 


** 다윗의 방법

그러면 먼저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9-11절을 보시겠습니다. 
9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두루 온 백성이 다투어 이르되, 왕이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셨으나 이제 압살롬으로 인해 이 땅에서 도피하셨도다.
10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느냐? 하니라.
11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온 이스라엘의 말이 왕에게 이르고 왕의 집에까지 이른 것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왕의 집으로 도로 모셔 오는 일에서 나중이 되려 하느냐?
9절과 10절 말씀은 압살롬의 죽음 이후에 생겨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압살롬이 죽은 시점에서 어찌하여 다윗 왕을 도로 모셔오려고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쉽게 다윗 왕을 다시 왕의 자리로 모셔오기를 어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11절 말씀처럼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하여 유다의 장로들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말이 왕에게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다윗 왕의 지파인 유다 지파가 가만히 있느냐고 재촉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친족인 유다 지파를 통하여 왕의 자리로 돌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좋은 방법으로 이루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할지 주님께 여쭈어 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먼저 자기의 방법으로, 자기의 혈육과 인맥을 이용하여 왕의 자리에 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12-14절을 보시겠습니다. 
12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서 나중이 되려 하느냐? 하고
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대 대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라, 하니라.
14 그가 유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같이 돌리매 그들이 왕에게 이 말을 보내어 이르되, 왕과 왕의 모든 신하들은 돌아오소서, 하므로
다윗은 자신의 골육, 혈연, 인맥을 이용하여 왕의 자리로 귀환하는 과정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 군대 대장으로 앞장을 섰던 아마사를, 자신의 군대 대장으로 세우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사는 다윗의 누이의 아들이어서, 다윗의 친척이었지만, 명백히 반역자의 무리에 속했던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를 심판하거나 처벌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반역자의 무리를 진압하였던 요압 장군을 대신하여 군대의 대장으로 세우겠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주님께 여쭈었다면 온전한 지혜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일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탁을 무시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죽였던 요압 장군을 밀어내고, 오히려 반역자의 무리에 가담하였던 아마사를 자신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장군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사를 통하여 유다의 온 집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아마사가 유다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같이 돌려서 다윗 왕을 모셔오고자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방법이 통하였고, 다윗의 지혜대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두려운 사실은, 때로 우리가 육신의 방법으로 일을 진행할지라도, 예상대로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이 잘 된다는 것이 꼭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이 아님을 우리가 보기 원합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41-43절을 보시겠습니다. 
41 보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어찌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왕을 도둑질하고 왕과 왕의 집안과 왕과 함께한 다윗의 모든 사람들을 데려다가 요르단을 건너게 하였나이까? 하매
42 유다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답하되, 왕이 우리의 가까운 친족이기 때문이라. 그런즉 너희가 어찌 이 일로 인해 분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경비에서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슨 선물을 주셨느냐? 하니
43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해 열 몫을 가졌으므로 다윗에 대해 너희보다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멸시하고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서 우리의 권고를 먼저 받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 유다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다윗의 좋은 방법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은혜와 평강이 흐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조급함과 육신의 방법에는 시기와 분열과 다툼이 열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유다 지파는 자신들이 왕의 가까운 친족인 것을 교만으로 삼았고,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은 시기와 질투 가운데 우리가 열 몫이나 더 가졌고, 더 큰 권리를 가졌다고 싸웠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의 자리에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윗은 그 뜻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다리지 못했고, 자신의 방법대로 진행하였으며, 결국 형제들 가운데 자신의 친족과 친족이 아닌 다른 형제들을 나누며 분열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20장 9,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건강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에게 입을 맞추려 하였으나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던 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므로 이에 그가 칼로 그의 다섯 번째 갈빗대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흘러 나와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그가 죽으니라. 이처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추격하였더라.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새롭게 세운 군대 대장 아마사가 요압 장군에 의해 암살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압과 아마사는 함께 다윗의 편으로서 반역자 세바를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 과정에서 아마사를 쳐서, 마치 그가 세바와의 전투 중에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요압과 아마사의 문제를 주님께 물어, 주님 뜻대로 처분하였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급함으로 인해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길에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일들을 주님께 묻고, 오직 주님 뜻대로 걷기를 원합니다. 


** 시므이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16-20절을 보시겠습니다. 
16 바후림에서 나온 베냐민 족속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하고 사울의 집의 종 시바도 자기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과 함께 요르단을 지나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 왕의 집안사람들을 건너가게 하며 또 왕이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게 하려고 나룻배가 건너가니라. 왕이 요르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 왕께 이르되, 내 주께서는 불법을 내게로 돌리지 마옵소서. 또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왕의 종이 그릇되게 행한 것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내가 죄를 지은 줄을 왕의 종이 아나이다. 그러므로, 보소서, 이 날 요셉의 온 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와서 내려가 내 주 왕을 맞이하나이다, 하였으나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저주하던 베냐민 족속 시므이가 다윗 왕 앞에 엎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조롱하던 자들도, 결국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무릎이 꿇려질 것이고, 모든 혀가 주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사모하면서, 오늘도 우리가 믿음의 한 걸음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사람의 길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주님께서 모든 원수들과도 화목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시므이의 비방과 저주를 듣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시간에, 시므이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고, 다윗 왕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담담히 주님의 뜻만을 구하며,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 있는 시므이들과, 결국 화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응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이 일로 인해 그가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매
22 다윗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이 날 나의 대적이 되려 하느냐? 이 날 이스라엘 안에서 사람을 죽여야 하겠느냐? 내가 이 날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느냐? 하고
23 그런 까닭에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여기서 아비새는 우리들 안에 있는 옳고 그름의 기준과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시므이는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아비새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습니다. 아비새는 다윗 왕을 위하는 좋은 의도로, 충성심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윗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17절 말씀에 보시면 시므이와 함께 베냐민 사람 천 명이 나아왔습니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반역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워지고, 또 흩어졌던 백성들의 마음을 평화 가운데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므이를 처단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므이 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서, 온 베냐민 지파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므이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우리는 정의롭고 올바르고 정당한 사람의 뜻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교회를 위하고, 때로는 형제자매들을 걱정해서 하는 좋은 말조차 상처를 줄 수 있고, 무너뜨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의롭고 정당한 육신은 어느 정도까지 성령의 인도하심과 일치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뜻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서 주님과 동행하고, 오늘도 믿음의 한 걸음을 걸으며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 므비보셋

이제 우리 함께 므비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보시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하 19장 24-30절을 보시겠습니다. 
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다시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치장하지 아니하고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25 그가 예루살렘에서 나아와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매
26 그가 대답하되, 오 내 주 왕이여, 주의 종은 발을 절므로 말하기를, 내가 나를 위해 나귀에 안장을 얹어 그 위에 타고 왕에게 가리라, 하였는데 내 종이 나를 속이고
27 주의 종을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그러나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천사 같으시온즉 왕의 눈에 좋은 대로 하옵소서.
28 내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은 내 주 왕 앞에서 단지 죽은 자나 다름없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께서 왕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들 가운데 두셨사온즉 내게 오히려 무슨 권리가 있어서 더 이상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매
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기를, 너와 시바는 땅을 나누라, 하였느니라, 하매
30 므비보셋이 왕에게 이르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자신의 집에 돌아오시게 되었사오니 참으로 그가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시므이에게는 긍휼을 베풀었지만, 므비보셋에게는 냉정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오해와 모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다윗은 끝내 일을 공정하게 풀어내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 만큼은 자기와 함께하면서 마음으로나마 위로를 얻기를 기대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을 향한 그러한 다윗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므비보셋의 종을 통하여 그가 왕을 모독하고, 사울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자 한다는 모함을 듣고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모함 때문에 닫혀버린 다윗의 마음은 므비보셋 본인의 직접적인 해명을 듣고서도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므비보셋의 태도와 자세는 오히려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죽은 자와 다름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권리도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 왕이 그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이 감사하며, 자기 종과 땅을 나눌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 주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믿음의 길에는 오해도 있고, 때로는 모함도 있고, 사실이 아닌 소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일도 있고, 끝내 오해가 풀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의 걸음을 멈추지 말고, 오늘도 한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믿음의 전진을 결코 멈추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번에 많이 달려 나가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한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 바르실래와 김함

이제 우리 마지막으로 바르실래와 김함의 이야기를 보시겠습니다. 사무엘기하 19장 32,33절을 보시겠습니다. 
32 이제 바르실래는 매우 늙은 사람으로 팔십 세더라. 그가 매우 창대한 사람이었으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거할 때에 왕에게 양식을 제공하였더라.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먹이리라, 하니
다윗 왕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길에서, 자신이 피난 중에 있을 때 호의를 베풀었던 바르실래를 초청하였습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에 새로운 거처를 주겠다고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37,38절을 보시겠습니다. 
37 청하건대 주의 종을 돌려보내시옵소서. 내가 내 도시에서 죽어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묻히려 하나이다. 그러나 주의 종 김함을 보소서.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소서, 하매
38 왕이 응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네게 좋게 보이는 것을 내가 그에게 행하겠고 또 네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를 위하여 행하리라, 하니라.
바르실래는 팔십 세인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김함을 왕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은 바르실래에게 베풀고자 하였던 보상과 호의를 바르실래의 아들인 김함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우리가 찾지는 않겠지만 예레미야 41장 17절에서는 김함의 거처가 베들레헴 곁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은 다윗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왕의 도시 베들레헴 곁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의 섬김과 헌신이 아들에게 보상되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르실래가 계산적으로 자신의 아들 김함을 다윗 왕에게 추천하기 위해서, 다윗 왕을 도왔던 것은 아닙니다. 바르실래는 정말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위기의 상황에서, 거의 목숨을 걸고 다윗 왕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바르실래의 섬김이 그의 아들인 김함에게 보상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부모님들이 오늘도 한 걸음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부모님의 섬김과 헌신이 자녀의 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하 19장에 나타난 다윗의 예루살렘 귀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길은 승리 후에 돌아가는 영광스러운 회복의 길이었지만, 그 과정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다윗 왕이 조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백성들이 왕과의 친족 관계를 주장하고, 서로의 권리를 외치며, 다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 왕을 모독하였던 시므이가 용서를 빌었고, 다윗 왕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옆에서는 아비새가 다윗 왕을 위하여 나서서 정의의 심판을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맞이하러 나왔지만, 오해가 잘 풀리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귀환하는 길에서 바르실래를 초청하였으나, 바르실래가 자신의 아들을 의탁하면서, 그 아들에게 복이 이어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리고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가운데, 모두가 각자의 인생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조급함도 있고, 육신의 방법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시기와 질투도 있고, 권리에 대한 다툼도 있습니다. 아비새와 같은 정당성도 있고, 나의 옳고 그름도 있습니다. 므비보셋과 같은 오해와 모함도 있습니다. 또 바르실래와 같은 헌신과 섬김도 있고, 김함에게 임하였던 것 같은 은혜와 보상도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승리의 길에서든, 영광스러운 회복의 길에서든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때로 넘어지고 실수한다 할지라도, 때로 다툼이 일어나고, 오해가 생겨나고, 나의 마음대로 일들이 진행되지 않아 좌절되고 낙담이 된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뛰어난 믿음의 영웅들처럼 단 번에 성큼성큼 달려 나가지 못한다할지라도, 오늘의 한 걸음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 나가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오늘도 한 걸음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