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4.2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2세)

제목 :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
본문 : 로마서 8장 1-4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4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깊은 풍요로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제가 조금 맛본 것을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이 7장의 흐름을 이어받아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한 가지 법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 21절 앞부분을 잠시 보시면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실질적인 지체들을 죄의 법에게로 사로 잡아가는 아주 강력한 법칙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낙망과 정죄 속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5절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오늘의 본문 8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가장 무서운 정죄 -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오늘의 본문 1절 말씀에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정죄”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어서 하나님의 맹렬한 정죄와 심판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더럽고 가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으며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정죄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소자인 마귀의 고소와 우리 자신의 정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정죄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의롭고 영적인 율법의 말씀을 이루고 살아내고자 분투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더욱 죄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행하고자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없었습니다.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내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내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나? 도저히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나는 더욱 죄를 짓는구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가 완전히 거두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보다 더욱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를 거절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야 마는, 죄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는 우리가 행한 행위들로 인한 것을 넘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야 마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정죄입니다. 


**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어쩌면 매우 자주 이러한 정죄 가운데 빠져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직접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 안에 머무른다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맹렬한 정죄와 탄식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면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말씀은 바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에 주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아멘!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
3절과 4절은 우리를 어떻게 자유하게 하셨는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사역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정죄 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7장 12,14절에 나온 것처럼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 안에서 율법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즉시 죄와 사망을 만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루고자 시도할수록 계속해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성취하는 일은 육신이 연약하므로 할 수가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육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 법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결단하고 노력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 육신을 용도 폐기하심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아,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곧 내게 큰 권능을 주셔서 하게 하셨구나.”라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육신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셨습니다. 육신을 수리하고 부축하고 개발시켜서 능히 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육신의 모양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은 온 인류의 육신을 대표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정죄 받으실 때 그분은 나의 육신을 포함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용도 폐기될 때 나의 육신도 함께 용도 폐기되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 3:16)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육체를 용도 폐기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모든 육체를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정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정죄 받았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죄하는 우리 자신은 이미 주님과 함께 정죄 받고 죽었으며 폐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육체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육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3절에서 주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하였다면, 4절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은 “하셨느니라.”고 끝마치지만, 4절의 말씀은 “하려 하심이니라.”고 끝마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실이며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4절에서는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육신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고자 두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육신을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신 것이며, 하나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친히 그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거침이 되는 육체를 처리한 것이며, 이제는 권능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약하고 무능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절망과 정죄의 골짜기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나타나서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비라면, 성령님의 동행하심은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은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원하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음으로는 원하여도 실제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결론 - 성령님을 따라 걷는 우리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미세한 성령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주의하며 순종하여 걷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어떤 말이 붙어 있습니까?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다만 오순절 날 성령님이 임하신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다만 성령님을 받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여 걷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또 다른 이름은 성령행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온전히 걸어갔을 때 일어난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과 같은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데마는 성령님을 모시고도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사도바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님을 따라 걷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기를 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걷는 믿음의 실재를 가지기 원합니다. 다시 한 번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pauline/45romans/45romans080104_godwhomademefree_20040421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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