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26.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오래 참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서는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언제가는 벌을 내리기 위하여 벼르고 벼르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가 전제된 상태에서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기다리기를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고 계십니다. 또한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가 주님을 떠나 죄 가운데 방황할 때에도 주님은 오래 참으심 가운데 우리를 긍휼로 대하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인데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홍수를 내리시기까지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는 낳을 때에 에녹을 통하여 300년 간 홍수의 심판을 경고하셨고, 므두셀라가 죽기 120년 전부터는 방주를 만들며 말씀을 선포한 노아를 통하여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고, 동물들이 짝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신기한 광경이 벌어진 이후에도 일주일을 더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성경은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재미있는 요나 이야기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오래 참으시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나서 4장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 요나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께 까불고 대들었던 대언자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땅의 심장 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요나보다 위대한 이가 여기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요나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구약의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요나가 들어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제가 요나서에서 가장 재밌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 요나는 뭔가 건방진 태도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요나에게 이해시키고 한 마음이 되길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소 거칠고 과격한 사람이었지만 또 한 면에서는 아주 꾸밈이 없고 진솔 담백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는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서 요나를 오래 참으시며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 니느웨로 가라

이제 요나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는 나중에 요나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3일 동안 걸어야 다 돌 수 있을 만큼 큰 도시였고,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만 해도 십 이만 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사악함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시고 요나를 통하여 경고를 주셔서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하여 부정할 때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반드시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주 예수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신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님이 약속을 더디게 이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들에게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당할 수치를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니느웨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니느웨 사람들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언자 요나를 그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3절을 보시면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요나는 일어나서 욥바로 가더니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려고 배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시 성경 뒤에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뒤에 부록에 보시면 지도 12번 분단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해(지중해)라고 된 곳 오른편에 욥바의 위치가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도 13번을 보면 주황색으로 아시리아 글자 위에 니느웨를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과 가까이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갈 때는 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라는 니느웨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떠나려고 욥바로 가서 배를 탄 것입니다. 다시스라는 곳은 현재 없는 지명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스페인의 어떤 도시이거나, 사도 바울이 태어났던 다소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습니다. 가라고 하셨는데 다만 안가고 버틴 것이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반대방향으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요나서 4장을 보면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요나는 당시에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다스린 나라였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큰 도시였던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해서 용서를 받느니 차라리 멸망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부르셨고 보내셨는지를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 가운데 이미 용서함을 전제로 니느웨 백성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려 하심을 알고 있었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모두 받아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절대 경고하지 않기로 작정하였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그들이 모두 멸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아마 우리가 요나였다 하더라도 비슷한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를 압제한 일본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가려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를 바꿔서라도 니느웨로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열고 음성을 내시거나 주의 천사로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요나에게 먼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불통 반역적인 요나를 용서를 전제로 오래 참고 계십니다.

 

 

 

** 오 잠자는 자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절하고 반대로 나아가는 요나를 돌이키시기 위해 바다에 큰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말씀에 불복종한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설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큰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종교적인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현실적인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온 배가 난리법석입니다. 이때 유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있었다면 유서를 써서 유리병에 담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고있는 요나는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는 배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눈을 꾹 감고 잠을 잡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 저는 죽어도 니느웨 못 갑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우리 민족의 원수들인데 어떻게 회개해서 살으라고 합니까? 다 멸망하게 내버려두세요."

 

 

선장이 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또 무거운 짐이 있으면 바다에 던지려고 배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가 요나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 잠자는 자여, 어찌 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면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리라." 선장은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애써 잠을 자고 있는 요나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이제 선원들이 모여서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많은 경우 비나 눈이나 폭풍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현상이지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가 들거나 배탈이 나면 춥게 다니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이지 죄를 짓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무조건 우리의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이렇게 요나와 같이 자신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환경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과 성령님의 음성을 통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 문제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는데도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은 여기 나온 것처럼 이방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아주 분명하게 요나를 지적하십니다.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고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집니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 나라는 어디냐? 너는 어느 나라 백성이냐?"

9절에서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으로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주 곧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하노라."

 

 

 

** 고래를 예비하신 하나님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대로 배를 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우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원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마저 사용하셔서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는 아마도 이 순간에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는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 죽어도 저는 니느웨 안갑니다."

 

 

이제 요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요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요나와 한 마음을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큼직한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고기를 고래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류인 물고기냐, 포유류인 고래냐를 가지고 따지고 고래상어나 청상아리다 많은 추측들을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물고기가 무슨 종류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제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며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뱃속에 있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폭풍우를 예비하셨고 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아주 다양한 것들을 예비해 주십니다.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의 이러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을 돌이키고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10절에 보시면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 다시 니느웨로

이제 3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3절에 보면 "이에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이제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 이제 드디어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최소한 3일을 돌아야 다 다닐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4절에 나온 것처럼 하루 동안만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아주 지멋대로인 대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니느웨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은데, 요나는 하루만 대충 돌면서 저주를 퍼붓고는 도시 밖으로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이키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 그 더러운 죄 때문에 이제 사십 일 뒤에는 다 망해버릴거니까 그리들 알어!", "이 저주받은 것들아, 니들 얼마나 가증한 죄를 지었는지 이제 사십 일 뒤에는 그냥 하늘에 불이 떨어지든 땅이 뒤집히든 다 죽을거니까 그리들 알아!" 아마 이런 저주의 뉘앙스로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요나야 사흘 길을 다녀야 니느웨에 다 말씀을 전하는데 하루만 하고 나오면 어떡하니?"

"아우 그래도 전했잖아요. 저도 더 이상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멋대로 대언자 요나에게 조차 오래 참으십니다.

 

 

놀랍게도 요나가 하루 만 선포하고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앗시리아 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앗시리아의 왕은 짐승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의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이에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며 그들 중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으니"라고 말하고 9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돌아서시고 뜻을 돌이키사 자신의 맹렬한 분노에서 떠나심으로 우리가 멸망하지 아니할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한 것을 보시고 재앙을 철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실 뿐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셔서 누구든지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이제 겉으로 보자면 요나의 사역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고, 바울과 사도들은 수십 년을 복음을 전하러 다녔어도 이렇게 요나처럼 수많은 사람을 한번에 회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요나는 하루만에 어린이만 십이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를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체다 회개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설교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서는 이렇게 성공적인 사역과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4장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 그러나 요나가 그 일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하여

2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이런 멋진 고백을 감사의 눈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면서 하는 이 고집불통 요나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에게 조차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친절은 우리가 잘나고 착하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럽고 가증한 죄악 가운데 묶여있을 때에조차, 우리가 거칠고 교만하며 어리석을 때에조차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는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3절에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주께 간청하건대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보면 볼수록 아주 웃기는 대언자입니다. "하나님 거봐요. 내가 이 원수 같은 놈들 그냥 멸망시킬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해 줄지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우리 민족이 죄를 지었어도 이렇게 잔인하고 더러운 놈들을 용서해 주다니요. 저는 분해서 못 살겠습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주님이라면 "아우 진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가 시키면 하는거지, 진짜 말많네. 죽고싶어? 그럼 니 소원대로 그냥 죽어버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요나의 마음을 얻고 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요나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멸망하는 장면을 만끽하기 위하여 도시의 동쪽 편에 앉아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사십 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거짓말하지 마옵소서. 이제 삼십 구일 남았나이다. 삼십 구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소서. 저 원수들을 제발 좀 멸망시키소서."

아주 건방지지만 그러나 진솔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6절에 "주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 넝쿨이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려 하심이었더라. 이에 요나가 그 박 넝쿨을 심히 기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 볕에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예비해 주셨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우리 하나님은 정말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야 니가 뭘 잘했다고 자꾸 고집이야, 아 이거 진짜 웃긴 녀석이네."하면서 숲 속에서 곰이나 사자를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요나는 그늘이 생겨서 너무 좋아하면서 계속 도시를 지켜봤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삼십 팔일 남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루소서. 우리 민족의 원수를 나의 눈앞에서 멸망케 하옵소서. 믿슙니다. 아멘!"

 

 

7절에 보면 하나님께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르러서 이제 막 시원한 감이 없어지고 해가 막 뜨려할 때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해가 뜨고 그늘이 필요하기 시작한데 때마침 넝쿨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8절에 드디어 해가 뜹니다. 해가 뜰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또 뜨거운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요나 한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대한 폭풍에서부터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교제하시며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제 요나는 기진맥진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은 줄줄 흐르고 뜨거운 동풍에 숨은 팍팍 막히고 아주 짜증이 머리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요나는 발라당 누워서 "주님 죽여주세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내게 더 낫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9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요나가 응수합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대답으로 요나서는 끝마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하지도 아니하고 자라게 하지도 아니한 박 넝쿨 곧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불쌍히 여겼거든

11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이 넘고 또 많은 가축이 있는 저 큰 도시 니느웨를 내가 아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마무리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며, 사람과 함께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뭐가 대단하길래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토록 공을 들여가며 상대해 주십니까? 우주 저 멀리서 바라볼 때 한낮 점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이 뭐가 이쁘고 뭐가 잘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 주십니까?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송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퍼부어 주고 계십니다. 요나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우를 예비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시고,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작은 벌레를 예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요나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설득하시고 또 알려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만물의 통치자이심에도 불구하고, 먼지와 같고 티끌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땡깡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더라도 이해가 안되면 따지고 죽겠다고 드러눕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시며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고 용납하면서까지 우리와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진실한 친구보다 뛰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해를 주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살았습니다. 우리가 악하고 교묘하게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주님은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더욱 사랑해 주셨습니다. 누가 성령을 따르는 가운데 오래 참을 수 있습니까?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리 오래 참을지라도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답답하고 못마땅할 뿐이지만, 나를 오래 참아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낮아진 사람은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오늘도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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