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8.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하나님의 화평(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화평"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세 번째로 화평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화평은 영어 단어로 "peace"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말로 "평?quot;, "평강", "평화"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성경에서도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할 때 이 "평강"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열매인 "화평"과 같은 단어 "peace" 입니다. 우리가 찬송집도 피스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평화"라는 의미의 피스가 아니고, 찬송가 종이들을 조각조각 모았다고 해서 조각을 의미하는 "piece"인 것 같습니다.

 

 

** 화평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아무튼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화평"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는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창시자"(the author of peace)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국가의 통치자와 교회의 감독자와 가정의 아버지라는 권위가 세워졌고 그 질서대로 운영될 때 참된 화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여러 곳에서 화평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거스르고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아무리 똑똑할지라도, 성도들이 아무리 영적일지라도, 자녀들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자신들 위에 세워진 권위와 질서를 거스를 때 화평은 깨어지고 혼란만이 가득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평화의 통치자"(the Prince of Peac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왕국들이 연합하여 유엔을 세우고 세계 평화를 아무리 추구한다 할지라도 평화의 통치자인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왕이 되시기 전에는 결코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은 심판자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서 결단코 가질 수 없었던 화평을 주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또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과 같이 성령님의 열매가 바로 화평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모두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화평의 창시자이시며, 아들은 평화의 통치자이시며, 성령은 화평을 열매 맺는 원천이십니다.

 

 

**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화평"이라는 단어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영어로 "peacemakers" 라고 되어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고 우리가 그렇게 불려질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 가운데 화평을 만들어내고 평안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모두 화평을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사람들에게 화평을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화평의 모든 면을 다 살펴볼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화평을 누릴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기적으로 나 혼자만 평안하고 안락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하고 지치고 힘든 형제 자매들에게도 하나님의 화평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화평을 충분히 공급받고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화평"이라는 열매 자체가 아니라 "화평"의 열매를 맺으시는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알아가고 더 닮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주님과 같이 화평을 주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한테 그럴 수 있니? 니들이 그러고도 제자야? 베드로 어딨어? 네 이놈!"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참되게 따르게 된다면 우리도 우리를 배반하고 상처 준 이들에게 하나님의 화평과 축복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화평의 삼각대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우리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에서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제 손에 캠코더를 들고 모든 집회 순서를 다 찍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제 손이 자꾸만 조금씩 떨려서 화면이 흔들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손 떨림을 없애기 위해서 왼손으로 받쳐보기도 하고 했지만 자꾸만 떨려서 안정된 화면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캠코더를 올려놓을 수 있는 삼각대가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멋진 작품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들을 보면 항상 삼각대를 들고 다닙니다. 결혼식 사진사도 그렇고 사진방 사장님들도 모두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놓습니다. 축구 경기장에서도 기자들은 경기장 주위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멋진 사진을 담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진사라 할지라도 미세한 손 떨림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라는 카메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루어주신 멋진 광경들을 담으려고 할 때에도 우리의 손이 자꾸만 흔들려서 멋진 작품을 찍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화평의 삼각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삼각대 위에 놓고 찍으면 손 떨림이 없기 때문에 아주 멋진 작품 사진을 찍을 수가 있습니다.

 

이 화평의 삼각대는 모두 세 다리로 되어있는데 첫 번째 다리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 다리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다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세 다리가 온전히 세워질 때 우리는 화평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멋진 광경들을 담을 수 있고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말고도 더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기억하기 좋게 삼각대를 연상하면서 하나님의 화평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 - 믿음

첫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 같이 빌립보서 4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욥 5:7)하신 욥기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 에는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다양한 염려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와 걱정거리들이 우리를 방문할 때 우리는 평안을 잃어버리고 걱정하며 어려워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이 금새 해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토록 약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오늘 걱정과 염려가 있으신 분은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야 하기 때문에 먼저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에게 호흡할 수 있는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걸을 수 있는 건강한 다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하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 죄 많고 고생 많은 세상에서 저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신 그 크신 사랑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오늘 저를 부르신다면 이 모든 문제들이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릴 때 오늘 저에게 닥친 이 어려움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함을 고백합니다. 저 같이 부족한 자에게 구원을 받고 함께 주님을 섬기는 가족들과 교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염려와 어려움이 닥칠 때 그 걱정에 사로잡혀 고통 받지 마시고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렇게 감사로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의 모든 환경이 주님의 선하신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제게 닥친 어려움이 주님의 사랑과 긍휼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주신 이 환경 가운데 제가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발견하게 해주세요. 주님 저에게 이러이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선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 주세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도 아니고 "그리하면 모두 응답해 주시리라"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고 우리의 생각은 요새와 같습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걱정과 염려의 불화살을 쏘아서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님께 감사와 간구의 기도를 할 때에 주님은 즉시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을 내리셔서 걱정과 염려를 물리치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종결되고 마무리 되어서 화평을 갖는 것이 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하나님의 화평은 아무리 큰 문제가 내 앞에 버티고 있을지라도 누릴 수 있는 놀라운 것입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사람의 이해로는 알 수 없는 이상하고도 신기한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잘 훈련받은 군사들이 황제의 궁을 철통같이 호위하고 지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걱정과 염려로부터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화평은 바깥의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이 찾아오지만 우리가 언제라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평강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2.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함 - 순종

화평의 삼각대의 두 번째 다리는 순종입니다. 바로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려면 먼저 육신의 욕심을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강이 없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에게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진 것들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가지고자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기하고 욕심을 부리는 마음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어른들은 그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고 은밀하게 또는 매우 영적이고 선하게 포장하는 법을 터득했을 뿐 욕심이 없는 고차원적인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욕심"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lust"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 성경에서 "정욕"이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욕심과 정욕은 모두 육신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전쟁과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너희의 정욕들로부터 나지 아니하느냐?" 우리에게서 화평이 깨어지고, 마음에 평강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다툼이 있고 전쟁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나의 속에서부터 나오는 욕심과 정욕 때문임을 성경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화평이 없는 이유는 바깥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은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 육신을 못 박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로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못 박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구절은 못 박혔다고 말하지 않고 못 박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의지를 사용하여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매순간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든, 일의 성취에 대한 욕심이든 우리가 어떠한 욕심에 이끌려 행동하게 될 때 우리는 길을 잃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질서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아내는 남편에게, 성도들은 목자에게, 국민들은 법과 권세자들에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반대되지 않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질서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원하는 바와 욕심이 일어날 때 우리는 거역하게 되고 하나님의 평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의 근원의 육신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비롯된 일은 욕심에 근거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일은 순종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화평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질서와 위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3.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함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이제 마지막 다리입니다. 화평의 삼각대를 세우는 마지막 다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26절을 보시면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은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에 이어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시기하며 분쟁합니다. 누군가 나의 수고와 노력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불안정하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고 나쁘게 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고 평안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나를 은근슬쩍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자 하고 나를 변호하고 정당하게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심으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지식과 학력과 사회적 지위와 인맥과 자신의 경험과 경력,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육신의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헛된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피곤하며 지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 하니라." 가장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때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땅에서는 평화도 우리들을 향한 선하신 뜻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는지 어떻게 오해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고들은 몇 가지 제한된 사실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서 "아, 저 사람은 이래서 틀렸고 그래서 나는 맞아. 아, 저 사람은 저게 문제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더 옳아"하는 생각 역시도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하며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화평을 공급하며 존중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보다 영적이고, 내가 누구보다 앞서있고 하는 것은 다 헛된 영광에 불과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평가하시는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께서만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나의 정당함과 억울한 사정을 모두 아시고 나의 수고와 헌신을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간직하셨다가, 장차 영원한 왕국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영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겸손할수록 좋고 낮을수록 좋습니다. 나의 입술은 나를 정당화하지 않을수록 좋고 나를 자랑하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컵은 언제 떨어져 깨질지 모르지만 바닥까지 낮아져 바닥에 놓인 컵은 더 이상 떨어져 깨질 위험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평안할 수 있습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이라는 카메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멋진 풍경들을 온전히 담아 누리고자 할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화평의 삼각대입니다. 이 화평의 삼각대는 말 그대로 세 다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다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순종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편안히 안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언제나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기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아무런 염려 없이 평강 가운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의 주관자와 책임자는 주님이시고 나는 다만 종으로서 순종하기 때문에 내가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면 우리는 평강 가운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용서받은 죄인들일 뿐이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화평의 삼각대가 우리 안에 온전히 세워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 인생에서 그려나가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멋진 광경을 온전히 담아 누리는 멋지고 행복한 카메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은혜와 평강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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