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딤후 2:15-21)/로빈


2002.12.18.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15-21절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16 그러나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커져서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가리라.

17 그들의 말은 궤양이 파먹듯이 먹을 터인데 그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잘못하였으니 곧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느니라.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초는 확고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며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 하는 글이 담긴 이 봉인이 있느니라.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저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잘 준비되어서 주님 오심이 정말 가까운 이때에 주님을 섬기는 자로써 발견되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저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얼마 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고 저도 잘 알고 있는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다시 펴보고 또 펴보고 하면서 정말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제가 발견한 은혜들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 말씀을 공부하라

“누가 주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때 우리는 곧바로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15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서 공부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하며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이 서신에서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 다음 장인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준비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본문 2장 18절에 나온 것처럼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사람들이 어떠한 진리에 관해서 정도를 벗어나서 말할 때 자신의 믿음이 뒤엎임을 당하고 혼란 속에 빠질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참된 진리는 온대간대 없고 사람의 말들과 전통과 거짓 교리들이 난무하는 이런 어두운 시대에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지키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 부끄럽지 않고 인정받는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더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시고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강조하려면 정말 시간이 부족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아군과 대적을 구분하지 못하며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의 명령과 대적의 혼란케 하는 말을 분별하지 못하는 군사와 같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규칙도 자신의 골대가 어디인지도 라인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운동선수와도 같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가라지가 무엇인지 잡초가 무엇인지 알곡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정말 기쁘게 하고 싶어도, 자신의 팀을 크나큰 승리로 이끌고 싶어도, 정말 좋은 곡식들로 풍성한 수확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먼저 아군과 대적을 구별할 줄 알아야하며 대장의 음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는 경기의 규칙과 규율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곡식을 거두기 전에 무엇이 알곡인지 무엇이 가라지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며 주님의 필요한 사역에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 큰 집 안에 있는 그릇들 -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의 차이

저는 오늘 이 말씀과 더불어 우리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다른 한 가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것은 먼저 저에게 많은 유익이 된 말씀이었고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2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자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 군대대장과 군사들, 목자와 양들, 참포도나무와 가지들, 주인과 종들, 모퉁이의 머릿돌과 산 돌들. 이렇듯 성경에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그릇들“로 묘사한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우리가 질그릇에 보배를 가진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는 주님이 사도바울을 가리켜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9장 22,23절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진노의 그릇들”이라 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는 남편들에게 아내된 자매를 “더 약한 그릇”으로서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20절에 나타난 큰 집, 이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많은 그릇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그릇들입니다. 이 집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지만 어떤 그릇들은 금과 은으로 되어있어 귀하고, 어떤 그릇들은 나무와 진흙으로 되어있어 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금과 은으로 되어있는 주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21절 말씀을 잠깐 보시면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귀한 그릇은 곧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한 그릇, 천한 그릇과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냥 나 혼자 식사할 때, 또는 가족끼리만 식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좀 천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일 년에 한두 번 쓰일까 말까하는 그릇을 귀한 그릇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을 말합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이것이 귀한 그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 사용하는가 또는 어쩌다 한두 번 사용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기에 합당한가 여부에 따라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이 나뉘는 것입니다. 

만약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천한 그릇이고 어쩌다 한두 번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면 아주 바쁘게 열정적으로 일생을 드려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한 사도바울 자신은 천한 그릇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형제나 자매를 보고 “아, 저 지체가 참으로 귀하다.”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형제나 자매의 은사와 재능을 보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저 형제는 참 귀한 은사가 있구나.”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한 지체의 간증을 듣고 “아, 저 자매는 주님 앞에 참 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하면서 귀히 여길 것입니다. 제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보배로운, 가장 귀한 보혈로 값 주고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영혼이라 하셨는데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 각자 각자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어떤 지체에게 두드러지게 뛰어난 은사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표현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안에 들어온 모든 그릇들이 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 그릇들이 다시 한 번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나뉘는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을 두신 분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하늘과 땅을 나누신 하나님께서 두신 구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귀한 그릇이고, 누가 천한 그릇입니까? 칼빈주의와 같이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가 귀한 그릇인지 어떻게 해야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성적으로 머리가 좋아서 말씀을 공부하는데 쏙쏙 잘 외우고 잘 이해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재능이 많아서 교회에 와보니까 이것저것 섬길 것도 많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말을 너무나 잘해서 복음도 잘 전하고 교제도 잘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인내심이 많아서 어떠한 화가 나는 일에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누가 귀한 그릇입니까?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두 번 읽기)

오늘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있는 모든 그릇들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아, 저 형제는 원래 귀한 그릇이야. 그리고 나는 그냥 원래 천한 그릇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 큰 집 안에서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없나 찾고 계십니다. 우리 같으면 필요한 그릇이 있을 때 직접 깨끗이 씻어서 쓰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릇인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각 집안에서 쓰이는 그릇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인 우리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직접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그릇들의 주인이시지만 아무 그릇이나 갖다가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깨끗하게 한 귀한 그릇만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한다면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귀한 그릇은 없으며 처음부터 천한 그릇은 없는 것입니다. 이 집안에 있는 그릇이라면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되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 귀한 그릇의 조건

21절을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고, 거룩하여지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여 지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귀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자신을 거룩케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곧 자신을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 첫 부분에서 함께 보았던 디모데후서 3:17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은 말이 지금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으로써 선한 일을 사모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 되고자 한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말씀을 공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식과 은사와 재능이 있으면 귀한 그릇으로써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지식에 능통하고 은사와 재능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는 기준, 귀한 그릇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 유일한 기준, 그것은 곧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로써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할수록 엄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아주 잘 공부해서 지식적으로 아주 뛰어난 위치에 있습니다. “아, 나는 이제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 또한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여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척척 펴서 보여주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는 말씀들을 다양하게 전할 수 있게 되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의 이 믿음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본문을 대할 때 한 가지 엄중한 것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인이 그릇인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를 더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끗함”, “정결함”, “거룩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성경에 정통하다 할지라도 은사와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천연적인 성품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학력이 아주 우수하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자기를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그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절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온 것처럼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 또 18절에 나온 것처럼 “진리에 관하여” 잘못한 말, 그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절 후반부에 나온 것처럼 “불법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22절에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것”, 23절에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3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항목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게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인 그릇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금과 은, 나무와 진흙

20,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온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연상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일한 것들을 쌓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믿음의 섬김들을 금, 은, 보석과 나무, 짚, 그루터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분이 나오고 있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들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성막에 쓰이는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와 긍휼의 자리, 그리고 성소 안에 있는 일곱 금 등잔대를 비롯하여 성막에 속한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은기명, 놋기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금으로 입혀지거나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불같은 시련을 통과한 믿음을 가리켜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흙보다 귀한 믿음, 나무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 우리는 믿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은 주님의 보혈에 대해 말할 때에도 금이나 은 같은 썩어질 것들도 구속된 것이 아니라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은 또한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보혈을 말할 때 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는 사람의 혼을 구속할 때 은 세겔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민수기 3장 47-49절, 레위기 27장 3,4절, 출애굽기 30장 13-1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2편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리켜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금과 은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과 은으로 된 귀한 그릇이 되려면 성막에 속한 금 기명들이 오직 주님께만 속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께만 속해야 합니다. 또한 불같은 시련을 당할 때에 믿음과 인내로 견뎌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속받은 자로써 구속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정화된 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와 진흙으로 된 그릇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무는 성경에서 “인간” 또는 “인성”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9장에서는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성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나무 또는 무화과나무로 비유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1편에서는 의로운 자를 가리켜서 강가에 심긴 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로마서 11장에서는 유대인들을 본래의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이방인들을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 여러 곳에서 나무를 사람으로 상징한 것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로 된 그릇이 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무로 된 그릇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들을 즐겨듣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천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육신적이고 인간적이며,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자아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이 처리되지 못한 지극히 인간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릇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사람의 말들보다, 나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중하게 여기는 그릇들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옛 성품들과 옛 습관들을 주님이 만지시고 고치고자 하실 때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온유함, 좋은 것 같이 보이는 성품들도 모두 처리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였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성품인 것 같지만, 때로 우리의 옛 성품에 속한 인내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담을 순종치 않고 견디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랑이란 성품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조차 인간적으로 덮어주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아주 잘 들어주는 성품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때로 그러한 성품은 정작 해야 할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부탁한 일들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천연적인 옛 성품들은 그것이 좋아 보이든 그렇지 않든 주님 앞에 다 처리 받고 오직 우리의 성품이 일곱 번 정화되어 나온 은과 같은 주님의 말씀, 금 사과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질그릇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있으신 분들은 여기에 “질그릇”이라는 단어에 “earth”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earth”라는 단어는 “진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지구”, “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진흙으로 된 그릇은 무엇이겠습니까? 땅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는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흙으로 된 그릇은 이 땅에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 정착하며 마음까지 세상에 내어 줘버린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소망을 천히 여기고 이 땅의 것들을 귀히 여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을 사용하실 수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이 천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우리는 이미 주님의 보혈로 구속받아 “거룩한 성도”들이 되었지만 우리 앞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걸어 가야할 거룩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쉽게 에워싸는 죄악들과 나를 이 땅에 눌러 붙게 만드는 모든 천한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 자신을 예비하는 사람은 곧 자기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곧 주님께 귀한 그릇인 것입니다. 


** 거룩이란 주제에 대한 성경 전반적인 언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거룩한 책 성경에서는 “거룩”이란 주제에 대해서 아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다음에 있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계속해서 살펴볼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는 바로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주제가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땅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 수많은 거룩에 대한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이라는 주제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누누이 거룩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그룹들이 이사야서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서까지 계속해서 찬양하는 한 가지는 주님을 향해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는 이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것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고 “은혜가 풍성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도다.”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떠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대면할 때 가장 먼저 주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욥이 그러했고 이사야가 그러했고 사도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주님을 대할 때 두려워서 납작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내게 화가 있도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또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거니와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의를 줄곧 주장하던 욥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 

유월절날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나는 주님을 알아.”라고 말하는데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인식이 없다면 그는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아야 하며 그분이 또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는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그네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을 말할 때 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한없이 드러낸 일임을 말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기준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못 박으신 것은 우리에게는 사랑이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는 거룩에 대한 만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을 못 박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거룩이 그 아들을 못 박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뻐 찬양해야 하지만 한 면으로 우리는 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를 그의 거룩한 교제, 빛 가운데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참으로 불결한 입술을 가진 자가 주님의 보혈로 거룩케 되어 거룩하신 주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주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이 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세상이 생각하는 거룩과 그리스도인의 거룩의 차이점

우리가 거룩이란 주제를 생각하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거룩이 어디에 근거했는가 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경건을 말하고 거룩을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도 거룩하다고 말하고 저기 스님도 거룩하고 신부님도 거룩하고 수녀님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거룩,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고 추구하는 거룩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로 보자면 많은 부분 흡사하고 비슷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릅니다. 마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꽃이 진짜 꽃과 모양도 비슷하고 향수를 넣어 향기까지 똑같다 할지라도 그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 안에 새롭게 주어진 새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생명,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생명, 그 생명에서 우러나오는 거룩이야말로 참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함으로써 이루어진 거룩,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거룩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9절에서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라고 나온 것처럼 “주께 속한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다 같은 금일지라도 이집트에 속했을 때에는 우상이요, 세상이 될 수 있지만 성막에 속하였을 때에는 거룩한 기명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오직 주께만 속했을 때 참된 거룩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 성령 충만하지 못함, 곧 거룩하지 못함

오늘날 저 자신과 우리교회, 더 나아가서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거의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은 성경을 가지기 위해 직접 펜으로 필사하였고 각자가 성경을 한 권씩 가진다는 것을 꿈으로 가졌으나 우리는 모두 인쇄되고 잘 제본되어 나온 성경을 각자 한 권씩, 아니 여러 권씩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영적인 책들과 성경공부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다음 장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주님을 믿는다는 모양과 제도들이 있으나 실제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능력이 없는 시대, 실제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고, 성경을 부인하고 비평하는 이론들이 난무하며,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진리를 찾아 헤매이지만 찾지 못하고, 미혹하는 자들만이 가득한 정말 어둡고 어두운 최악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봐도 좀처럼 그 능력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700년대 후반, 18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찰스 피니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어떤 공장을 방문하였는데 그 공장에서 일하던 어떤 아주머니가 동료를 향해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찰스 피니는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연민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은 피니와 마주쳤고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더니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고 이내 큰소리로 울면서 자신의 죄악됨을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 공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의 회개를 시작으로 모두가 자신의 죄악들을 회개하였고 이내 그 공장은 한동안 찰스 피니가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교회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왜 이 시대에는 그러한 회개의 역사, 복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까? 저는 무슨 쳐다보기만 하면 다 거꾸러지는 이상한 미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몰고 다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족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과 능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삼손에게 성령님이 떠나가셨을 때 그에게는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속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시는 일은 없지만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다시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을 잃어버릴 때 우리에게서 능력이 떠나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이유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먼저 “구하면 주신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구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와 더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고전 3:16,17). 

우리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거룩하신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옛 습관들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며, 자신의 옛 성품들이 드러날 때 주님 앞에 철저히 버리지 않으며, 이 땅의 유혹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가올 때 단호히 물리치지 않고, 쉽게 에워싸고 자주 넘어지게 하는 죄악들을 주님의 거룩하신 관점으로 철저히 미워하고 심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거룩하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미지근한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습관들을 철저하게 미워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세상과 타협하는 마음을 철저히 돌이키지 않는 죄악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할 때 주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시며 능력으로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부흥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 마무리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을 찾고 계십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하며 선한 일을 위하여 잘 예비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주님 앞에 쓰임 받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저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저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원하였고 이러한 마음을 교회에 나누고자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혹여나 주제넘게 한 말이 있다면 주님께서 보혈로 덮어주시기를 원하고 오직 우리 마음 속에 능력 있는 주님의 말씀만이 남기를 원합니다.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들 보다 귀한 주님의 말씀,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과 같은 거룩한 말씀, 이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성장시키며 돕고 인도하고 세우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사야를 정결케 한 제단의 숯불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주님의 보혈이 있음을 찬양합니다. 제단 숯불로 정결케 된 이사야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한번 드리심으로 거룩케 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귀하게 쓰시는 그릇으로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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