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8.12.17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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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길(딤후 2:22)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22절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22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우리
우리는 본래 우리 자신의 뜻과 유익만을 구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길이며, 거짓과 교만과 더러움으로 가득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도 없었고, 소망도 없었으며 영원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더러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비록 연약할지라도, 비록 자주 넘어질지라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뜻과 유익만을 구하는 길로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우리들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숨길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한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낸다고 생각했지만,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한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게 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받아서 읽고 있는 젊은이 역시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어리고 연약한 자를 부르셔서 영광의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게 하신 은혜에 감격해 하는 디모데라는 청년이 사도 바울의 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역시 주님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우리 갈보리침례교회가 이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격려하시고 온전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우리가 이제 우리 자신의 길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자 할 때 우리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늘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 중의 한가지가 바로 청년의 정욕입니다. 사도 바울은 혈기왕성한 디모데를 향해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년인 디모데에게만 정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는 육신의 정욕과 욕심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육신의 많은 정욕들 가운데 특별히 명예욕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갈라디아서 5장 2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갈 때에 우리에게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육신의 정욕 가운데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하기 원하고, 드러나기 원하고, 두각을 나타내기 원하고, 높여지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젊을수록 그러한 욕망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항상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놓고 논쟁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더 큰 자라고 누누이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고 가난하고 낮아지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라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도 더욱 낮아지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침례자 요한이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 4:30)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드러내고 높이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나, 교제를 나눌 때나, 간증을 할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시길 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는 않지만 주님이 보시는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 주님의 일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은 모르지만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칭찬하실 그 칭찬을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때론 오해하더라도, 사람들이 나쁘게 평가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주님을 잘 따라 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자신의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는 길이요,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참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의미가 없고,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참되게 평가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얻는 칭찬과 영광을 구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러한 모든 영광이 다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칭찬과 영광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실 그 날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낮아질 수 있고 더 쇠잔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만이 높여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이제, 잠시 순수한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마치 바다 속의 산호초가 그대로 보이는 맑은 바닷물같이 투명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이란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인 사람을 말합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예는 예라고 말하고, 아니오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모습 그대로, 조금 모자라면 모자란 모습 그대로, 연약하면 연약한 모습 그대로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이 곧 순수한 사람입니다. 순수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며 믿을 수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자신이 대하는 사람에 따라 말이나 행동이 바뀌지 않고 한결 같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어떤 숨은 의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다르고 뒤에서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은 순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나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게 될 때 우리는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순수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화려한 장식으로 자신을 두르고 있지만 실제로 생명의 열매를 맺은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가져다가 붙여놓은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장식품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한 참된 열매입니다.

다같이 야고보서 3장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러우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
세상의 지혜는 자신을 포장하고 속임수를 사용하지만, 위로부터 난 지혜는 순수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평화스럽고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게 될 때에 우리는 긴장을 풀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무엇인가 요구하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아니라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위선을 부리지 않습니다. 
높이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아첨을 하게 되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군림을 하려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차별하게 되고, 위선을 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은 정치인들을 볼 때 순수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순수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함께
우리가 우리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 말씀을 대할 때 가장 주의해서 새겨야 할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우리는 주님을 나 홀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형제 자매들과 함께 따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우리 주님은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까? 시간과 공간의 아무런 제약이 없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배가 고프기도 하시고, 피곤하여 잠들기도 하셨습니다. 
과거에 로마 카톨릭이 침례성도들을 맹렬히 박해하고 죽일 때에 사람을 벽 속에 가둬놓고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벽 속에 갇힌 사람은 무릎이나 허리를 굽힐 수도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 큰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야 했습니다. 나중에 한 성도가 갇혀 죽었던 감옥의 벽에서 작은 그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그림이었는데, 십자가의 동서남북에 이렇게 쓰여진 것입니다. "주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라고 각각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다같이 에베소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벽 속에 갇혀서 모든 활동에 큰 제한을 받은 이 성도는 그러한 환경 가운데 우리 주님의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깊고 높은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려고 얼마나 큰 제한을 감당하셨는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사람과 함께 하시고자 하늘의 영광을 떠나셨고 답답하고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한 디모데를 권면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형제들을 실족시키지 않고 형제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나와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어떻게 나 자신을 부인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것은 나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나 혼자 성경 읽고 찬송하고 기도할 때는 십자가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형제 자매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분 좋으면 조금 어울리고, 기분 나쁘면 홀로 분리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신 주님이 더럽고 천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는 그 누구와 함께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함께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따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다 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또 도전을 주고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번 조별모임에서 교제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함께 나누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교제란 무엇입니까?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경구절들만 서로 암송해서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 교제입니까? 서로 찬송가 가사나 설교 말씀을 나누는 것만이 성경적인 교제입니까? 마음에 가득한 어려움이나 불만을 전혀 말하지 않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말만 하는 것이 성격적인 교제입니까? 또는 지체들을 만날 때, 오늘 아침에 말씀보고 기도하셨어요?, 형식적으로 하신거 아니고 정말 은혜로운 시간이었나요?, 라고 물어보는 것이 성경적인 교제이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진실된 교제를 나누고 함께 하기 원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먼저 헛된 영광을 구하고 경쟁하며 시기하는 마음을 다 버려야 합니다. 또한 순수한 마음으로 꾸밈없이 서로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교제를 통해 안식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늘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주님을 따르도록 함께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세리들과 죄인들은 바리새인들 근처에도 갈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는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안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돌이키고 주님을 따르는 회개와 회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며, 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처럼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지금도 매운 음식을 먹으면 입에서도 괴롭지만, 머리에서 열이 나면서 머리를 긁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온 몸을 긁게 됩니다. 어릴 때는 김치를 먹어야 한다고 많이 혼났습니다. 너무 매워서 먹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억지로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커다란 배추김치를 손으로 들고 죽죽 찢어서 밥에다 싸서 한입 가득 물고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비록 내가 매워서 싫어하는 김치이지만 참 맛있게 보인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워치만 니라는 한 형제님은 이런 글을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말씀 읽고 기도하셨어요?"라고 물으면서 왜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하는지 주님과의 교제가 왜 중요한지, 왜 주님께 순종을 해야하는지 권면하고 설명해 주는 일도 귀한 일이지만, 그 형제 앞에서 김치를 죽죽 찢어서 먹음직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은 섬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한다는 권면을 받으면 "기도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 자매가 기도하면서 주님과 어떻게 만나고 교제했는지 간증을 하게 되면 우리는 "나도 저 형제처럼 기도하고 싶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 자신의 간증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저 사람이 만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한 간증을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위대한 순종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고, 그 간증을 듣는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순종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다는 갈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실패했다가 돌이킨 간증을 하는 이유는 그 간증을 듣는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나도 저 형제처럼 용기를 내서 다시 돌이키고 주님을 따라야겠구나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넘치는 풍성함을 흘려보내고 나누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빈손으로 온 지체들도 부담 없이 안식하며 격려 받고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은혜가 넘치는 지체도 더 큰 은혜로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고린도후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
온 우주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도 하시지 않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믿음을 지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 선택의 의지를 주셨고 결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사람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지옥에 가기로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많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 믿음이 큰 지체도 있고 연약한 지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믿음으로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고 지배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지체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함께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2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우리에게 함께 주를 부르는 지체들이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 문제가 많고 연약하지만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우리는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더 많이 부어져서 형제 자매들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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