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8.11.19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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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해의 4계절(딤후 2:15)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우리 교회는 지난 달 조별 모임에서 "성경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공부를 했었고, 지난 주 수요일과 주일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 또한 교회의 흐름에 맞춰서 성경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씀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기보다는 이미 우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들었고 또 잘 아시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이 좋은지, 방법적인 부분들을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경 이해의 4계절"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1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4계절이 있는데 이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4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나 1년 내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해야하는데, 말씀을 대하실 때마다 늘 기억하기 좋으시라고 제목을 이렇게 잡아보았습니다. 성경 이해의 4계절, 먼저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본문 설명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하나님께는 두 종류의 일꾼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일꾼이고, 한 종류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인정을 받고 어떤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할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부끄러울 것이 없도록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데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연지 자매를 사랑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제가 좋아하는 튀김을 사준 적이 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가 연지 자매를 사랑해서 기쁘게 해주려고 핸드폰 줄을 사줬는데 연지 자매는 핸드폰 줄이 거추장스럽다고 아예 하고 다니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데 있어서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방법이 소용이 없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의 기준에 우리가 맞춰야 합니다. 
모두가 잘 아시는 이사야 55장 8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사랑과 긍휼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그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인정하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온 우리의 인생 기간 동안 우리가 여러 가지 배움과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지식과 관념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생각은 고집할 것이 아니고, 과감하게 버리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미혹이 가득한 세상
오늘날 이 세상은 정말 미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짓 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진화론이라는 속임수도 있고, 이성주의나 인본주의와 같은 철학적인 속임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유론이나 풍유적 해석과 같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속임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혹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어떤 분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제 눈에도 글이 들어와서 보게 되었는데, 그 글에는 대략 이런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창조자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다. 우주는 당신의 편에 있고 당신은 우주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정도 읽고 눈을 감으면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창조자라고 하다니, 참 어리석은 말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그 책에 눈이 가게 되었는데 그 책에서는 놀랍게도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그러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강렬하게 우주를 향하여 선포하고, 또 그것을 이미 당신 자신의 것으로 의심하지 말고 믿으면 정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고,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으로 벅차오르도록 고무시키는 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제목을 보니 시크릿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비밀이란 뜻이죠? 요즘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네이버에서 시크릿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여러 가지 글 중에 이런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 이런 제목이 있었습니다. "시크릿이란 책 때문에 기독교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 책을 읽고 난 한 학생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점점 흔들리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면서 오히려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글을 읽고 기독교분들이 뭐라고 반박하시겠지만, 그것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관점이 아니겠냐고 적혀있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서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며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오늘날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힘든 마지막 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사탄의 미혹하는 역사가 너무나 광범위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지 말고 아직도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선포할지 모른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이해의 4계절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성경의 계시를 받기로 마음을 먹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눈을 감고 한 번에 성경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마침 마태복음 27장 5절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그 은들을 성전에 내던지고 떠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니라." 
그 남자는 이상한 구절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다시 조금 더 앞부분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 37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그 남자는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다시 한번 더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장 27절을 짚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그 남자가 어떻게 했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 일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 이해의 4계절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4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문자적 해석, 두 번째는 문법적 해석, 세 번째는 문화적 해석, 네 번째는 문맥적 해석입니다.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 해석입니다. 물론 성경을 공부하는데 꼭 이 4가지 원칙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원칙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이 4가지 중에서 생략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4가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어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이 4가지 원칙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오류와 속임수에 빠지고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기록된 말씀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달리 사람에게 말하고 글을 쓰는 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과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만약 성경을 읽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성경을 해석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경을 주신 의미가 전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분명한 말로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군가가 가르치고 해석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칠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면, 우리는 문자적으로 칠일 동안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칠일이 문자적인 칠일이 아니고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천년 동안 지상 왕국이 있을 것이라 말씀한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천년이란 기간 동안 지상에서 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천년이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고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 기록한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영적으로 오셨다고 가르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지옥은 문자적인 지옥을 의미하고, 성경에서 하늘이란 문자적인 하늘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과 미혹의 속임수들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단어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어지럽혔기 때문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서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되고,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내 생각을 추가하지 말고 문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법적 해석
또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반드시 언어의 문법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했는지, 과거 시제로써 이미 이루어진 일인지 아니면 미래 시제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인지, 단수인지 복수인지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한 예로 갈라디아서 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면서 "네 씨에게"라고 단수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바로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는 것은 "씨들에게"라고 복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씨에게"라고 단수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대충 읽고 넘어갈 것이 아니고 차분하게 또 분명하게 읽으며 이해해야 합니다.


문화적 해석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원칙은 바로 문화적 해석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인류의 역사 가운데 기록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원전 1500년 전에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기원 후 90년 사도 요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약 1600여년의 기간을 흘러오면서 40여명의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자들의 모든 인간적인 특징을 사용하시면서도 아무런 오류가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록할 수 없는 놀라운 책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왕이나 의사, 서기관, 제사장과 같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농부나 어부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로운 때에 살면서 성경을 기록했고,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 나고 포로로 잡혀갈 때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우리는 그 당시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가 현대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보다는 먼저 그 당시에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중요합니다. 구약의 대언서라면 그 대언서를 읽는 구약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알아야하고, 신약의 서신서라면 그 서신서를 읽는 교회가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 동일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 3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마치신 후에 "일어나라. 우리가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15장에서는 겟세마네로 가는 길 가운데 포도원을 지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포도나무를 가리키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니"하시면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각 효과와 함께 위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6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서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불"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지옥"을 연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구원을 잃어버려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당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포도원을 지나면서 제자들은 버려진 가지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불이 붙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쓸모없는 가지들을 모아서 불로 태웠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 그대로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처럼 버려져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쓸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 중에 아무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이해한 사람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다만, 불타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저렇게 쓸모없이 버려지는구나, 하고 이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두 아시지만 우리에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또 성령님께서는 역사적인 어떤 사실이나 배경에 대해서 우리에게 조명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적인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의 도움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많은 선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선물들은 바로 신실한 성경 학자들이고 그들이 남긴 많은 연구 자료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항상 틀릴 수 있고, 성경은 사람의 해석대로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책을 참고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다른 부분은 버리고, 성경과 합하는 부분은 받아들여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맥적 해석
또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우리를 보호해 주는 마지막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맥적 해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 어떤 단어나 문구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14편을 보시겠습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 이 말만 떼어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의 어떤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구절 전체를 읽어보아야 합니다. 또 그 구절의 앞뒤에 어떤 말씀이 어떤 주제로 흐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장의 전체적인 흐름도 보아야하고, 때로는 그 책 자체의 주제와 배경을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또한 성경 전체의 조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24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날 수많은 이단들이 이 말씀을 사용해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아닌, 행위로 받는 구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라고, 누가 구원을 받느냐고, 끝까지 견디는 자가 아니냐고 주장하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이해의 4계절을 떠올려야 합니다.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 해석을 해야합니다.

먼저 우리는 "끝까지"라는 단어와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끝까지"라는 단어가 우리의 인생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기간의 끝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환경이나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 보면 제자들이 세상 끝의 표적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시는 4절에서 바로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속이는 자들이 얼마나 대범한지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쓰여진 말씀을 가지고 속이고 있습니다. 마치 요즘 우체국이나 은행을 가장해서 전화를 하는 사기꾼들과 비슷합니다. 실제로는 자기들이 사기꾼이면서 당신이 사기를 당했으니 신상정보를 제공해서 잘 해결하자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이 고통의 시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14절에 보면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면 끝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맥 가운데서 시작이과 끝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소한 "끝까지" 견딘다고 했을 때는 어떤 고통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21절에 보시면 이 고통의 기간은 바로 "큰 환난", 즉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전무후무한 대환란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16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20절에 보면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대환란을 피하여 도망하고 도피하는 유대인을 향한 실제적인 구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대환란이라는 주제가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적인 조화를 살펴야 합니다.

구약 성경 요엘서 2장 32절에서도 이것과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 주가 말한 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구출이 있으며 또 주가 부를 남은 자들에게도 구출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우리가 행위로 믿음을 타협하지 않고 지켜서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고, 대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이 끝까지 견디고 산으로 도망할 때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출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
마지막으로 베드로후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절부터 2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6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려 줄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나니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17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하늘로부터 나온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들은 것이니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20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21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은 교묘히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므로 아주 확실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오직 3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재림 때의 모습을 보여주신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짓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예 대사도 없습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그 놀라운 광경 가운데 직접 말을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직접 들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도 직접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날마다 간증하고 책도 쓰고 세계방방곡곡을 돌아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본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내가 귀로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다."라고 유언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이해하는 만큼 우리의 믿음은 더 자라날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온전하게 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 문화적, 문맥적으로 읽고 이해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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