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14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 /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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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신 하나님(요일 1:5)
이승선
안녕하세요?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1장 5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밝히 드러내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는 것이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빛이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책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한 단어, 한 단어 영감을 불어넣으셔서 기록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그 말씀을 기록한 사람의 특징까지도 온전하게 사용하셔서 조화롭게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기록한 성경 기록들을 보게 되면, 바울의 특징이 잘 베어져있어서 굉장히 논리적이고 단계적인 구조를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성경의 진리를 기록하면서, 구약성경의 예들을 제시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방식으로 설명을 하기도 하고, 모든 설명이 충분히 이루어진 뒤에는 결론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기록해 놓기도 하였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지금 읽은 요한일서의 경우는 어부 출신으로서,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순교를 당하였지만, 사도 요한은 늙어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계시록을 기록하고 나서 자연사한 것으로 역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기록은 논리적으로 복잡하지도 않고,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길게 주님과 알고 교제해온 장로답게, 깊은 진리를 짧고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주님을 믿은 자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된다는 진리를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음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또한 주님의 새 생명으로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죽은 자는 바로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죄에 대하여는 자유로운 자이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
이렇게 바울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단계적인 방식으로, 영적 진리를 로마서 6장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오늘 읽은 요한일서 본문에서 요한은 동일한 진리를 매우 단순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 우리가 만일 그분과 교제한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걸으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은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의 특징까지도 완전하게 사용하시고 조화를 이루셨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눌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단순한 표현의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씀을, 사도 바울의 방식처럼 조금 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서,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빛은 보여 준다
먼저 빛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바로 우리가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는 우리가 눈이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라는 말을 하였는데요. 이처럼 빛은 우리가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밤바다의 배를 위해서 등대의 불빛이 필요하고, 밤하늘의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활주로의 빛이 필요하고, 또 우리가 어두운 길을 걸을 때 가로등이나 손전등이 필요한 것처럼, 빛은 보기 위해 필요합니다.
빛은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게 해주고,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분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을 정확히 볼 수 있고, 우리가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13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빛을 주십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 되시고, 내 길에 빛이 되십니다(시 119:10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빛을 주시고 우리에게 명철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을 때, 무엇을 거절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붙잡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주의 말씀을 통해 빛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한 빛과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한 가지 특별한 점은 우리가 빛 자체를 정면으로 쳐다볼 때,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운전을 할 때, 나와 마주보는 차가 하이빔을 키고 운전을 한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또 우리가 태양 빛을 통해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직접 태양을 쳐다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찬란하고 밝은 빛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의 빛을 통해 다른 것들을 볼 수는 있지만, 아무도 그 분을 직접 쳐다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러분, 혹시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결코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은 생명을 준다
빛은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빛은 바로 생명을 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빛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햇빛은 식물과 곡식을 자라게 해주고, 또한 동물들은 식물과 곡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햇빛은 식물을 자라나게 할 뿐만 아니라, 직접 사람에게도 영양분을 주는데 그것은 바로 햇빛 비타민이라고 불리는 비타민 D라고 합니다. 자외선이 피부에 자극을 주면, 피부에서 스스로 비타민 D를 합성합니다. 비타민 D는 음식으로부터 칼슘을 흡수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직접 뼈와 치아를 형성하고, 근육을 구성하고, 혈당 조절, 고혈압 저하 등의 역할을 합니다. 건강하기 원하시면 햇빛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햇빛이 아예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빛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필수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 말씀 몇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펴지 않고, 그냥 들어주시면 됩니다.
먼저 시편 36편 9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으므로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빛을 보리이다.
또 요한복음 1장 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그리고 요한복음 8장 1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
햇빛이 우리의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듯이,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으로서 반드시 필요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시고,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빛과 생명에 대해 생각할 때, 한 가지 특별한 점은 빛이 반드시 생명을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죽이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살균 소독”이라고 부릅니다. 햇빛의 자외선은 살균 소독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인체에 해로운 세균들과 불순물을 제거해 줍니다. 사막에서 웅덩이에 고인 물을 발견했을 때, 투명한 물병에 담아 6시간 정도 햇빛을 받으면 60% 정도의 불순물을 정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햇빛이 60% 정도의 불순물을 제거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빛으로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시고, 우리가 깨끗하고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빛은 어둠(악)을 제거한다
빛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빛은 어둠을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햇빛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어둠을 제거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방에서 어둠을 몰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커튼을 활짝 열고 햇빛이 들어오게 하든지, 불을 켜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빛이 나타나는 그 자체로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심 그 자체로 모든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삶 속에서 죄를 끊으려고 노력해서 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죄는 자연히 끊어지고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히 채워진다면, 어둠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큰 방에서 촛불 하나와 같은 작은 빛은 어둠을 조금 몰아낼 수 있지만, 형광등과 같이 큰 빛은 어둠을 많이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 빛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채워져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빛이신 하나님으로 가득하기 원합니다.
믿음의 부모님은 자녀들이 빛 가운데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자녀들의 방에 있는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에 연결된 인터넷은 부모님 모르게 세상을 마음대로 접할 수 있는 어둠의 통로입니다. 자녀들이 방문을 닫고 인터넷을 쓸 수 있는 환경은, 자녀들의 방안에 성범죄자나 잔인한 살인자나 노숙자를 합숙시키는 것과 같습니다.우리는 자녀들이 인터넷을 사용하더라도, 어둠 가운데서가 아니라 빛 가운데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개적인 장소인 거실에 컴퓨터를 놓아야 합니다. 스마트폰 역시 사주실 때, 부모님이 언제나 열어볼 수 있도록 공개하는 조건으로 사주시든지, 아니면 정말 전화기로만 사용하도록 인터넷 기능을 차단시켜놓아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어둠의 환경을 다 제공해놓고서는, 자녀들이 왜 이럴까 걱정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생활하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 19-2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이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염려하여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자녀들이 방문을 닫고 폐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춘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염려하여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빛이신 하나님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심지어 자녀들의 방문을 닫거나 잠글 수 없도록 아예 문까지 떼어버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의 모든 것을 다 감시하고 간섭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정말 우리의 자녀들의 믿음과 인격을 파괴시킬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기 원합니다. 빛은 그 자체로 어둠을 몰아낸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빛은 따듯하다
빛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포근하고 따듯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서는 빛을 불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빛이 열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햇빛을 받으면 몸이 따듯해지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뜨겁다는 표현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성경 기록들을 열어 설명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눅 24:32). 또한 에바브라 디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한다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골 4:12).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면한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벧전 1:22, 4:8).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특징은 차갑지 않고, 따듯하고 뜨겁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뜨겁고, 기도할 때 뜨겁고, 또 형제자매들과 교제하고 섬길 때에 뜨겁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차갑고 미지근하다면 우리에게 오늘 주님이 필요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히 거하실 때, 우리는 뜨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 없이 차갑다 할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기도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만나 교제할 때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따듯하고 포근하고 뜨거운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빛은 신사적이다
빛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빛이 신사적이라는 것입니다. 빛은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커튼 하나로 완전히 차단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눈꺼풀을 닫아, 눈을 감아버리기만 하면, 금새 캄캄하게 되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은 결코 무엇인가를 부수고 강제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햇빛이 온 땅을 비추고 있다할지라도 커튼으로 창문을 다 막고 눈까지 감아버린다면 완전히 어두울 수 있는 것처럼, 빛은 어떠한 곳이라도 결코 억지로 들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처럼 빛이신 하나님은 신사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각자의 자유를 가지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옥에 가느냐 천국에 가느냐 하는 너무나 중요한 구원의 문제를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두셨습니다. 바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나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이 복음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돈이 많은 부자들만 구원받을 수 있도록, 헌금 얼마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젊고 힘세고 건강한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어렵고 힘든 일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조건으로,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어려운 문제를 풀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햇빛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로써 모든 사람의 모든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다만 마음으로 주님을 믿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제시하셨습니다.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믿음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일을 결코 강제적으로 진행하시지 않고, 우리의 선택에 맡기셨습니다.
한 서커스장에서 묘기를 부리던 코끼리가 갑자기 폭주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코끼리는 조련사를 공격하고는 관람객들을 향해 달려들다가, 서커스장 밖으로 탈출하여 자동차와 사람들을 공격하였습니다. 한 순간에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폭주한 코끼리 한 마리가 그 주변 지역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코끼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폭주한 코끼리 한 마리도 그렇게 공포스러운데, 하나님은 과연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겠습니까?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빛이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공포스럽게 강제적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으시고, 신사적으로 이끄십니다. 마음의 커튼을 활짝 열면 들어오시고, 커튼을 닫으면 들어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며 따르기 원합니다.
빛은 신호를 준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빛이 가진 특징은 바로, 빛이 신호를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 예배당에 오면서, 신호등을 하나이상 마주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빨간불은 정지, 초록불은 통행을 의미하는 것처럼, 빛은 의미와 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의 빛에도 신호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정지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에게 계속 전진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호를 위반하게 되면 벌금을 물거나, 위험한 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의 빛을 벗어나게 될 때 위험을 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신호를 위반하게 될 때, 말씀의 빛은 먼저 우리의 깊은 양심 속에서 신호를 보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눈치 채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개인적으로 빛을 비추시고 신호를 주십니다. 만약 그때 우리가 그 신호를 위반하게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신호를 주십니다. 그때에도 우리가 위반하게 되면, 점점 많은 사람들을 통해 신호를 주실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끝까지 위반하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큰 어려움과 위험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빨간불이 들어왔다면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걸을 때, 신호를 절대적으로 지켜야 안전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걸을 때 가장 안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이 올 수 있고, 시련이 올 수도 있지만, 우리가 말씀 안에 있다면 그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때로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왔던 용광로 같은 시련이 올 수 있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것 같은 위험이 올 수도 있지만, 말씀 안에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안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보아야 할 신호가 있다면, 그곳이 이제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신호입니다. 마치 기차역에서 노란불이 들어오고, 기차가 온다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이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너무나 가깝다는 신호를 우리는 세상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도, 지구의 생태계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말하고, 양심적인 세상 사람들도 사회의 범죄들을 보면서 말세, 즉 세상의 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입에서까지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신호를 매일 매순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신호는 주님의 사랑하는 신부인 교회에게, 사모하는 신랑이 오고 있으니 자신을 예비하고 단장하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는 주님의 군대인 교회에게 총사령관이 오고 있으니 군기를 잡고 있으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는 주님의 종인 우리들에게 주인이 오고 있으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는 주님과 멀리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순간만큼은 주님께 가까이 오라고 준비를 재촉하는 신호입니다.
정리
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빛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있게 하여주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생명이 되어주시고, 모든 어둠을 제거하여 주시고, 또한 따듯함과 뜨거움을 주시고, 신사적으로 우리를 방문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 신호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빛이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충만히 거하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악하고 어두운 이 세상에 살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찬란하게 빛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땅에 소금이며 또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빛이 없지만,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을 통해, 주님의 빛을 찬란히 비추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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