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딤후 2:15-21)/로빈


2002.12.18.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15-21절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16 그러나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커져서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가리라.

17 그들의 말은 궤양이 파먹듯이 먹을 터인데 그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잘못하였으니 곧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느니라.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초는 확고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며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 하는 글이 담긴 이 봉인이 있느니라.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저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잘 준비되어서 주님 오심이 정말 가까운 이때에 주님을 섬기는 자로써 발견되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저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얼마 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고 저도 잘 알고 있는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다시 펴보고 또 펴보고 하면서 정말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제가 발견한 은혜들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 말씀을 공부하라

“누가 주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때 우리는 곧바로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15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서 공부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하며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이 서신에서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 다음 장인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준비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본문 2장 18절에 나온 것처럼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사람들이 어떠한 진리에 관해서 정도를 벗어나서 말할 때 자신의 믿음이 뒤엎임을 당하고 혼란 속에 빠질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참된 진리는 온대간대 없고 사람의 말들과 전통과 거짓 교리들이 난무하는 이런 어두운 시대에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지키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 부끄럽지 않고 인정받는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더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시고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강조하려면 정말 시간이 부족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아군과 대적을 구분하지 못하며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의 명령과 대적의 혼란케 하는 말을 분별하지 못하는 군사와 같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규칙도 자신의 골대가 어디인지도 라인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운동선수와도 같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가라지가 무엇인지 잡초가 무엇인지 알곡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정말 기쁘게 하고 싶어도, 자신의 팀을 크나큰 승리로 이끌고 싶어도, 정말 좋은 곡식들로 풍성한 수확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먼저 아군과 대적을 구별할 줄 알아야하며 대장의 음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는 경기의 규칙과 규율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곡식을 거두기 전에 무엇이 알곡인지 무엇이 가라지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며 주님의 필요한 사역에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 큰 집 안에 있는 그릇들 -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의 차이

저는 오늘 이 말씀과 더불어 우리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다른 한 가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것은 먼저 저에게 많은 유익이 된 말씀이었고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2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자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 군대대장과 군사들, 목자와 양들, 참포도나무와 가지들, 주인과 종들, 모퉁이의 머릿돌과 산 돌들. 이렇듯 성경에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그릇들“로 묘사한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우리가 질그릇에 보배를 가진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는 주님이 사도바울을 가리켜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9장 22,23절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진노의 그릇들”이라 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는 남편들에게 아내된 자매를 “더 약한 그릇”으로서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20절에 나타난 큰 집, 이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많은 그릇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그릇들입니다. 이 집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지만 어떤 그릇들은 금과 은으로 되어있어 귀하고, 어떤 그릇들은 나무와 진흙으로 되어있어 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금과 은으로 되어있는 주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21절 말씀을 잠깐 보시면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귀한 그릇은 곧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한 그릇, 천한 그릇과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냥 나 혼자 식사할 때, 또는 가족끼리만 식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좀 천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일 년에 한두 번 쓰일까 말까하는 그릇을 귀한 그릇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을 말합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이것이 귀한 그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 사용하는가 또는 어쩌다 한두 번 사용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기에 합당한가 여부에 따라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이 나뉘는 것입니다. 

만약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천한 그릇이고 어쩌다 한두 번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면 아주 바쁘게 열정적으로 일생을 드려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한 사도바울 자신은 천한 그릇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형제나 자매를 보고 “아, 저 지체가 참으로 귀하다.”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형제나 자매의 은사와 재능을 보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저 형제는 참 귀한 은사가 있구나.”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한 지체의 간증을 듣고 “아, 저 자매는 주님 앞에 참 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하면서 귀히 여길 것입니다. 제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보배로운, 가장 귀한 보혈로 값 주고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영혼이라 하셨는데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 각자 각자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어떤 지체에게 두드러지게 뛰어난 은사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표현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안에 들어온 모든 그릇들이 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 그릇들이 다시 한 번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나뉘는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을 두신 분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하늘과 땅을 나누신 하나님께서 두신 구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귀한 그릇이고, 누가 천한 그릇입니까? 칼빈주의와 같이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가 귀한 그릇인지 어떻게 해야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성적으로 머리가 좋아서 말씀을 공부하는데 쏙쏙 잘 외우고 잘 이해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재능이 많아서 교회에 와보니까 이것저것 섬길 것도 많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말을 너무나 잘해서 복음도 잘 전하고 교제도 잘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인내심이 많아서 어떠한 화가 나는 일에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누가 귀한 그릇입니까?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두 번 읽기)

오늘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있는 모든 그릇들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아, 저 형제는 원래 귀한 그릇이야. 그리고 나는 그냥 원래 천한 그릇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 큰 집 안에서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없나 찾고 계십니다. 우리 같으면 필요한 그릇이 있을 때 직접 깨끗이 씻어서 쓰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릇인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각 집안에서 쓰이는 그릇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인 우리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직접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그릇들의 주인이시지만 아무 그릇이나 갖다가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깨끗하게 한 귀한 그릇만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한다면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귀한 그릇은 없으며 처음부터 천한 그릇은 없는 것입니다. 이 집안에 있는 그릇이라면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되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 귀한 그릇의 조건

21절을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고, 거룩하여지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여 지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귀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자신을 거룩케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곧 자신을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 첫 부분에서 함께 보았던 디모데후서 3:17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은 말이 지금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으로써 선한 일을 사모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 되고자 한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말씀을 공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식과 은사와 재능이 있으면 귀한 그릇으로써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지식에 능통하고 은사와 재능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는 기준, 귀한 그릇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 유일한 기준, 그것은 곧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로써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할수록 엄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아주 잘 공부해서 지식적으로 아주 뛰어난 위치에 있습니다. “아, 나는 이제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 또한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여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척척 펴서 보여주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는 말씀들을 다양하게 전할 수 있게 되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의 이 믿음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본문을 대할 때 한 가지 엄중한 것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인이 그릇인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를 더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끗함”, “정결함”, “거룩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성경에 정통하다 할지라도 은사와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천연적인 성품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학력이 아주 우수하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자기를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그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절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온 것처럼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 또 18절에 나온 것처럼 “진리에 관하여” 잘못한 말, 그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절 후반부에 나온 것처럼 “불법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22절에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것”, 23절에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3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항목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게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인 그릇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금과 은, 나무와 진흙

20,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온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연상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일한 것들을 쌓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믿음의 섬김들을 금, 은, 보석과 나무, 짚, 그루터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분이 나오고 있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들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성막에 쓰이는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와 긍휼의 자리, 그리고 성소 안에 있는 일곱 금 등잔대를 비롯하여 성막에 속한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은기명, 놋기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금으로 입혀지거나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불같은 시련을 통과한 믿음을 가리켜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흙보다 귀한 믿음, 나무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 우리는 믿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은 주님의 보혈에 대해 말할 때에도 금이나 은 같은 썩어질 것들도 구속된 것이 아니라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은 또한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보혈을 말할 때 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는 사람의 혼을 구속할 때 은 세겔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민수기 3장 47-49절, 레위기 27장 3,4절, 출애굽기 30장 13-1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2편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리켜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금과 은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과 은으로 된 귀한 그릇이 되려면 성막에 속한 금 기명들이 오직 주님께만 속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께만 속해야 합니다. 또한 불같은 시련을 당할 때에 믿음과 인내로 견뎌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속받은 자로써 구속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정화된 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와 진흙으로 된 그릇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무는 성경에서 “인간” 또는 “인성”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9장에서는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성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나무 또는 무화과나무로 비유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1편에서는 의로운 자를 가리켜서 강가에 심긴 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로마서 11장에서는 유대인들을 본래의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이방인들을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 여러 곳에서 나무를 사람으로 상징한 것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로 된 그릇이 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무로 된 그릇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들을 즐겨듣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천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육신적이고 인간적이며,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자아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이 처리되지 못한 지극히 인간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릇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사람의 말들보다, 나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중하게 여기는 그릇들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옛 성품들과 옛 습관들을 주님이 만지시고 고치고자 하실 때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온유함, 좋은 것 같이 보이는 성품들도 모두 처리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였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성품인 것 같지만, 때로 우리의 옛 성품에 속한 인내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담을 순종치 않고 견디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랑이란 성품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조차 인간적으로 덮어주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아주 잘 들어주는 성품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때로 그러한 성품은 정작 해야 할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부탁한 일들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천연적인 옛 성품들은 그것이 좋아 보이든 그렇지 않든 주님 앞에 다 처리 받고 오직 우리의 성품이 일곱 번 정화되어 나온 은과 같은 주님의 말씀, 금 사과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질그릇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있으신 분들은 여기에 “질그릇”이라는 단어에 “earth”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earth”라는 단어는 “진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지구”, “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진흙으로 된 그릇은 무엇이겠습니까? 땅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는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흙으로 된 그릇은 이 땅에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 정착하며 마음까지 세상에 내어 줘버린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소망을 천히 여기고 이 땅의 것들을 귀히 여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을 사용하실 수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이 천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우리는 이미 주님의 보혈로 구속받아 “거룩한 성도”들이 되었지만 우리 앞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걸어 가야할 거룩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쉽게 에워싸는 죄악들과 나를 이 땅에 눌러 붙게 만드는 모든 천한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 자신을 예비하는 사람은 곧 자기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곧 주님께 귀한 그릇인 것입니다. 


** 거룩이란 주제에 대한 성경 전반적인 언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거룩한 책 성경에서는 “거룩”이란 주제에 대해서 아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다음에 있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계속해서 살펴볼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는 바로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주제가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땅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 수많은 거룩에 대한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이라는 주제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누누이 거룩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그룹들이 이사야서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서까지 계속해서 찬양하는 한 가지는 주님을 향해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는 이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것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고 “은혜가 풍성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도다.”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떠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대면할 때 가장 먼저 주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욥이 그러했고 이사야가 그러했고 사도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주님을 대할 때 두려워서 납작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내게 화가 있도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또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거니와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의를 줄곧 주장하던 욥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 

유월절날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나는 주님을 알아.”라고 말하는데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인식이 없다면 그는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아야 하며 그분이 또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는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그네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을 말할 때 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한없이 드러낸 일임을 말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기준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못 박으신 것은 우리에게는 사랑이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는 거룩에 대한 만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을 못 박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거룩이 그 아들을 못 박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뻐 찬양해야 하지만 한 면으로 우리는 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를 그의 거룩한 교제, 빛 가운데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참으로 불결한 입술을 가진 자가 주님의 보혈로 거룩케 되어 거룩하신 주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주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이 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세상이 생각하는 거룩과 그리스도인의 거룩의 차이점

우리가 거룩이란 주제를 생각하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거룩이 어디에 근거했는가 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경건을 말하고 거룩을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도 거룩하다고 말하고 저기 스님도 거룩하고 신부님도 거룩하고 수녀님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거룩,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고 추구하는 거룩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로 보자면 많은 부분 흡사하고 비슷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릅니다. 마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꽃이 진짜 꽃과 모양도 비슷하고 향수를 넣어 향기까지 똑같다 할지라도 그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 안에 새롭게 주어진 새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생명,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생명, 그 생명에서 우러나오는 거룩이야말로 참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함으로써 이루어진 거룩,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거룩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9절에서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라고 나온 것처럼 “주께 속한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다 같은 금일지라도 이집트에 속했을 때에는 우상이요, 세상이 될 수 있지만 성막에 속하였을 때에는 거룩한 기명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오직 주께만 속했을 때 참된 거룩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 성령 충만하지 못함, 곧 거룩하지 못함

오늘날 저 자신과 우리교회, 더 나아가서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거의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은 성경을 가지기 위해 직접 펜으로 필사하였고 각자가 성경을 한 권씩 가진다는 것을 꿈으로 가졌으나 우리는 모두 인쇄되고 잘 제본되어 나온 성경을 각자 한 권씩, 아니 여러 권씩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영적인 책들과 성경공부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다음 장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주님을 믿는다는 모양과 제도들이 있으나 실제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능력이 없는 시대, 실제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고, 성경을 부인하고 비평하는 이론들이 난무하며,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진리를 찾아 헤매이지만 찾지 못하고, 미혹하는 자들만이 가득한 정말 어둡고 어두운 최악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봐도 좀처럼 그 능력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700년대 후반, 18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찰스 피니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어떤 공장을 방문하였는데 그 공장에서 일하던 어떤 아주머니가 동료를 향해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찰스 피니는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연민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은 피니와 마주쳤고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더니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고 이내 큰소리로 울면서 자신의 죄악됨을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 공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의 회개를 시작으로 모두가 자신의 죄악들을 회개하였고 이내 그 공장은 한동안 찰스 피니가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교회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왜 이 시대에는 그러한 회개의 역사, 복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까? 저는 무슨 쳐다보기만 하면 다 거꾸러지는 이상한 미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몰고 다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족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과 능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삼손에게 성령님이 떠나가셨을 때 그에게는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속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시는 일은 없지만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다시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을 잃어버릴 때 우리에게서 능력이 떠나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이유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먼저 “구하면 주신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구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와 더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고전 3:16,17). 

우리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거룩하신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옛 습관들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며, 자신의 옛 성품들이 드러날 때 주님 앞에 철저히 버리지 않으며, 이 땅의 유혹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가올 때 단호히 물리치지 않고, 쉽게 에워싸고 자주 넘어지게 하는 죄악들을 주님의 거룩하신 관점으로 철저히 미워하고 심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거룩하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미지근한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습관들을 철저하게 미워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세상과 타협하는 마음을 철저히 돌이키지 않는 죄악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할 때 주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시며 능력으로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부흥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 마무리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을 찾고 계십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하며 선한 일을 위하여 잘 예비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주님 앞에 쓰임 받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저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저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원하였고 이러한 마음을 교회에 나누고자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혹여나 주제넘게 한 말이 있다면 주님께서 보혈로 덮어주시기를 원하고 오직 우리 마음 속에 능력 있는 주님의 말씀만이 남기를 원합니다.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들 보다 귀한 주님의 말씀,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과 같은 거룩한 말씀, 이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성장시키며 돕고 인도하고 세우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사야를 정결케 한 제단의 숯불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주님의 보혈이 있음을 찬양합니다. 제단 숯불로 정결케 된 이사야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한번 드리심으로 거룩케 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귀하게 쓰시는 그릇으로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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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행실(렘 17:10)/로빈


2002.10.09.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마음과 행실

본문 : 예레미야 17장 10절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마음과 행실“입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전에 제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쳤던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심판자이신 하나님 등등 여러 가지 하나님의 특성들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두 가지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시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각 사람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잠시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씀만큼 강조되어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신구약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대하 19:7) 그런즉 이제 주의 두려움을 너희 위에 두고 조심하여 그 일을 행하라. 주 우리 하나님께는 불법도 없고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는 것도 없으며 뇌물을 받는 것도 없느니라, 하니라.

(삼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성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문제를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5장에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것들을 열거하시면서, 이러한 악한 것들이 속에서부터 나와 그 사람을 더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는 삶의 문제들이 마음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열심을 다하여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명들 중에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것을 주목하십니다. 우리의 어떠한 선행이나 봉사나 노력을 주의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드렸는가를 관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시려고 뜻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사울보다 능력과 자질이 뛰어나서 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키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모든 뜻을 성취하리라, 하시고 (행 13:21,22).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속을 시험하시며 자신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 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이 내 길들을 지키게 할지니

마음을 살피고 속을 시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 각자에게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갚으시는 하나님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 17장 10절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고 속을 시험하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을 심판하시며 갚으시고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심판과 저주로 갚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자가 된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과 통치권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는 분이심을 마땅히 믿어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상하시고 갚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 무엇을 보시며 무엇으로 갚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단지 한번 들여다보시고 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을 시험하시고 우리에게 갚아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고 속을 시험하시되, 갚으실 때에는 그 사람의 드러난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면 마음에 무엇을 품었는가를 보고 갚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양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실 때에는 우리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후 5:10)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졌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때에는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으로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가 자기의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외양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과,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조화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 세 구절만 보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전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곧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속과 마음을 살피시는 동시에 각자의 행위에 따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 25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부당한 일로 인하여 보응을 받으리니 거기에는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각자 자신의 행한 것에 따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으시고 보상하시고 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에 관하여 기록된 말씀들은 살펴보면 심판은 각자의 행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보시는 분이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속에 있는 마음을 보시면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판단하시고 갚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행실을 하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게 되어있고, 마음에 가득한 것이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행실에 따라 갚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시기 원합니다. 


** 섬김이 없는 마음은 헛되다.

우리는 보통 “나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 쉽게 아멘 할 수 있습니다. “맞아, 나는 마음은 있어.”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또는 “지금 섬기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실제적인 준비들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 내가 실제로 주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은 내 마음을 아셔.”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때는 자신의 실제적인 행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섬기기 원하는 마음을 한번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생각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으로는 주님을 섬기기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마음만으로는 주님 앞에 보상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랑이 표출될 것입니다. 누군가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벌써 어느 곳에서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원하는 마음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실제적인 섬김이 없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구나.”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주님을 섬기겠다는 그의 마음은 매를 맞고 돌에 맞고 파선을 당하고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을 비롯한 수많은 어려움들을 뚫고 그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가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 가만히 앉아서 마음만으로 주님을 섬기고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나는 실제적인 섬김은 없지만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시고 나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마귀에게 속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실제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공허한 말들을 제거하기 원합니다. 섬김의 실제가 없으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실패도 안하고 넘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간음도 했고 살인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이키고 회복하여서 주님을 계속해서 따랐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죄가 하나도 없고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여서 주님을 필요로 하며 사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든, 또는 뭐라고 하지 않든 간에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음은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섬김들이 없다면 이 시간에 그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돌아보기 원합니다. 


** 두 가지 속이는 것

마음과 행실, 주께서는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 실제로 우리의 몸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섬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나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속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마음은 없으면서도 몇 가지 일들을 형식적으로 해내고 있다고 해서 나는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속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치우치기를 잘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도 원하시고 몸도 원하십니다. 마음만의 드림도 부족하고 몸만의 드림도 부족합니다. 마음이 가득하다하면서 실제적인 섬김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도 모순이며, 몸을 드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으나 마음이 다른데 가있다면 그것도 헛될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적인 섬김이 없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어떠한 섬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섬김이라고 모두 다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섬김은 미워하시며 역겨워 하십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주님의 그러한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희생제물로 주님께 드렸지만 주님은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사 1:11)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예물들을 주님 앞에 가져왔지만 주께서는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사 1:1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사 1:13)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다른데 가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다른데 가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형식적으로 가져오는 예물들과 희생제물들과 엄숙한 집회들까지도 가증하게 여기시며 견딜 수 없어하시고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우상들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사람의 수공물이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죽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형식적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가져다 드리면 만족해하는 분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악은 무엇입니까? 그 중 한 가지는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을 만큼 그들을 사랑하시고 참된 길로 이끌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분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라고 말씀하시면서 까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들이 실족할 만큼이나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선은 하나님을 속이려드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7 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대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7,8).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술에 속는 분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아부하듯이 “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고 기뻐하시는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입술로 그렇게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입술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까? 정작 마음속에는 세상과 재물과 스포츠와 나의 유익만 가득 차 있으면서 입술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기도회로 모였고 몸은 모두 이 자리에 앉아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물은 우리 주님 자신이길 원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가의 고백이 우리 입술로 만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까? 집회 시에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에 실제적인 드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기 원한다는 고백을 하였다면 그것을 열매로 입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자신이 굳이 입증하려 하지 않아도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우리를 죄악과 저주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시면서 높고 높으신 보좌 위에 앉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노라.“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아,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하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적으로 주님 앞에 섬기는 것이 없으면서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한다면 그것만큼 주님을 조롱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적인 드림이 없다는 것은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정말 마음은 있는데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마음은 있는데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지금처럼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러 세상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편했기 때문에 주님을 잘 섬겼던 것이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영적인 서적들도 부족하고 어찌 보면 교리적인 지식들도 우리보다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흥의 역사들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참된 마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만약 육상선수가 되고 싶은 소년이 있다면 계속해서 달리기 연습을 할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권유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소년이라면 누가 말려도 계속해서 연습할 것입니다. 자신을 더욱더 철저한 훈련 가운데 두며 피나는 연습을 꾸준히 지속할 것입니다. 그 소년이 선천적으로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하려는 그의 마음과 열망이 언젠가는 그를 육상선수로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과 열망은 그를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달리도록 만들 것이며 계속해서 자신을 훈련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목사님이 또는 앞선 형제님들이, 달려라 달려라해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형제, 섬겨야지.”, “자매, 이 일 좀 해봐.”라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섬길 일들을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선천적으로 어떠한 일들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열망이 나를 가만있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먹고 싶은 음식이 앞에 차려져 있는데 먹지는 않으면서 “나는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제의받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서 “나는 그 일을 하기 원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사람이 정말 마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기회가 없어서도 아니요,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대학을 나온 인재들도 취직을 잘 하지 못할 만큼 취직하기가 어려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언제나 누구든지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조건은 한 가지, 그가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디모데전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께 감사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께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직분을 맡은 것을 부담스럽거나 거북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 사도바울은 정말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직분을 맡기시기 전에 한 가지 보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은 무엇입니까?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에서 ”선하고 신실한 종아“,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말씀을 볼 때 신실함과 게으름이 반대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어떠한 것을 꾸준히 지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신실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직분을 줄테니까 앞으로 신실해야 해.“라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직분을 주시기 전부터 그가 신실한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은 어떠한 직분, 어떠한 일이 주어지기 전부터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부지런하게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도바울이 주님의 일에 신실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마음 안의 열망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품은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부지런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꾸준히 부지런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러했기에 주님께서 그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주님을 더욱 섬기기 원하였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뭐라고 부르는지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누가 주셨습니까? 바울 안에 원래 능력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직분과 함께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열망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열심을 해고 부지런하고 신실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직분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주님의 일을 맡아서 섬기는 것은 나의 능력과 관계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주님의 일을 결코 만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오직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마음입니다. 오직 나의 마음입니다. 능력의 부족, 지식의 부족 그 어떠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을 공부하고 갖추고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양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장과 용모와 재능과 특기를 주의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 마무리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제가 처음 설교를 준비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받는 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주님 앞에서의 섬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로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더 되새기고 준비하면서 마음 없이 몸을 드려 섬기는 것 또한 헛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분명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가 자기가 행한 것들을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행함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위선적으로 억지로 주님을 섬기고 나서, 섬겼다고 말하는 그러한 섬김에는 보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던 이사야 1장 말씀과 같이 그것들을 미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되 그 행위의 동기와 의도 또한 살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마음과 행위가 따로 갈 수 없습니다. 마음만의 드림, 마음만의 헌신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 마음 없는 섬김, 마음 없는 봉사 또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마음을 드렸다면 몸도 같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자신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땅에는 이미 종교적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 의무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 율법적으로 믿음생활 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것들에 신물이 나셨고 역겨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시험하시며 참으로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해드릴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 실제적인 몸을 드려 섬기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온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 없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않기 원합니다. 많은 말들로 유창하게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를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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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의 순종(창 16:1-10)/로빈


2002.08.07.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위치 안의 순종

본문 : 창세기 16장 1절-10절

1 그런데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 그녀에게 한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집트 사람이요,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더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주께서 나를 막으사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하녀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말미암아 아이들을 얻을까 하나이다,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하녀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한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이 지난 뒤였더라.

4 ¶ 그가 하갈에게 들어가니 그녀가 수태하니라.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므로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하는 부당한 일을 당신이 당하기 원하나이다. 내가 내 하녀를 주어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나를 멸시하니 나와 당신 사이에서 주께서 판단하시리이다, 하니라.

6 그러나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그녀를 학대하니 하갈이 그녀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니라.

7 ¶ 주의 천사가 광야의 물 샘 옆에서 곧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옆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8 이르되,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하매

9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하고

10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니라.

내일은 수련회 날입니다.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세 번이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속으로 준비한 본문과 주제로 설교하려다가 수련회 전날인 만큼 수련회를 준비하는 설교를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준비하는 것은 좀 무리인 듯싶어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제가 이미 한번 받았고 누렸던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위치 안의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 설교가 우리들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데 부축이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본문 설명 

본문에서 하갈은 이집트인 여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자신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였습니다. 파라오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집에 큰 역병들로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밝혀내십니다. 그때 파라오는 아브람에게 화를 내며 아브람을 내어 쫓습니다. 하갈은 아마 이때 아브람과 함께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하갈은 아마 사래를 파라오의 집에 데려올 때부터 사래를 시중들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갈이 이집트에 있는 많은 여종들 중에서도 파라오의 집에서 일하였던 것을 보면 굉장히 잘나가던 여종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어쨌든 하갈은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나오면서 사래의 종으로 같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자식을 갖고 싶어 했던지 아브람에게 가서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내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아내로 삼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예상했던 것처럼 하갈은 임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래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하갈이 그녀의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래는 화가 나서 아브람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라고 대답합니다. 사래는 그 말을 듣고 하갈에게 심하게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여종들에게는 시키지 않는 굳은 일을 시키고 힘든 일을 많이 심하게 시켰을 것입니다. 하갈은 견디다 못해 도망을 나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갈은 매우매우 억울합니다. 아니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여종으로 잘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래라는 여자가 나타나더니, 자신의 주인 파라오는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고 자신은 그녀의 여종이 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사래라는 여자가, 함께 온 아브람이라는 남자의 아내라는 것이 밝혀지더니 자신은 사래의 여종이 되어 이집트에서 함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사래의 여종으로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아주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이상한 여자의 여종이 되어야 하는가? 난 이집트에 남았어야 했어. 계속해서 같이 지내다보니 사래는 임신도 못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마음속으로 사래를 계속해서 멸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래가 하갈을 자신의 남편 아브람의 아내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임신하였고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자 드러내놓고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래는 아브람에게 불평하고 아브람은 사래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이제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멸시의 대한 진노를 하갈에게 퍼붓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하갈은 도망가면서 흐느껴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뒤엉킨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 또는 사래에 대한 억울한 마음 등이 뒤엉켜 비참하게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하갈을 부릅니다.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주님은 그녀를 부를 때 “오 불쌍한 하갈아”, “오 사랑하는 하갈아”, “복 받은 여인 하갈아”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부르실 때 “사래의 하녀 하갈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많고 많은 수식어 중에 “사래의 하녀”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갈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러자 하갈은 대답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성경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한마디로 대답하지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 앞에서 울부짖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주님 제 처지를 좀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임신도 못하는 제 여주인 사래가 자기를 대신해서 자식을 낳아달라고 하길래 그렇게 하였더니 이제는 저를 시기해서 저를 박대하지 뭡니까!? 그래서 저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이때 주의 천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오 상처받은 영혼 하갈아, 위로를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의 나쁜 여주인 사래에게 경고하리라.” 이렇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먼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하갈에게 주실 축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위로인 것입니다.


** 우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 순종 

성경은 순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교회를 방문하였던 조 윌리암 형제님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순종”이라고 말할 만큼 성경은 순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최종권위이며 우리는 이 권위아래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이시요 권위자들 중의 권위자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서부터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수많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롬 5:19)


하나님께서 순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조차 하나님은 순종, 불순종의 여부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살후 1: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지옥에서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많은 죄들을 지어서도 아니요, 많은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많은 선한 일들을 많이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기에 순종, 불순종의 문제로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시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아 보이고 영적으로 보이는 일도 순종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은 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각 제사를 드리는 방법들, 그에 따른 제물의 종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어떠해야 하는 지와 같은 것들을 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순종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큼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 15:22,23)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신구약에 걸쳐서 순종에 대해서 참으로 강조하며 또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위치 안에서 하는 순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주관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질서체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의 위치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 모두의 위치를 친히 안배하셨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위치와 자녀의 위치, 부부사이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위치, 교회 안에서는 감독과 성도들의 위치, 또 세상에서는 왕들과 권세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위치를 모두 안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능력별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가를 살피고 순종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인가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위치 안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저 형제님은 뭐가 어때”, “우리 부모님는 뭐가 어때”, “내 남편은 뭐가 어때”하며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그 권위자가 나에게 와서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우리는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위치는 그 사람보다 낮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그 사람보다 높아져서 그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과도 같습니다. 사래를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하갈에게는 사래에게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님 앞에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발견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위치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위에 있는 권위도, 또 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주님께서 안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는 잘 순종하겠는데,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렵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겠는데 보이는 형제들은 어렵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요일 4:20)

이것은 순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노라.” 하면서 자기 권위자에게 거역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권위자에게 거역하면서 어떻게 본적이 없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의 순종의 본 

우리는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가 완벽한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인가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나에게 권위자로 안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나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순종의 본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 절기가 끝나서 돌아올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르셨으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행자들 중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하룻길을 간 뒤 예수님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는데, 예수님은 박사들 가운데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다가가 어린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까? “아! 아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여인이여 당신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은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십니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내려가심으로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순종의 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과는 비교도 안되는 지혜와 명철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위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능력과 지혜로 치자면 그들은 예수님과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무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그 자리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순종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자가 지식이 있는가 능력이 있는가를 실수가 없는 사람인가를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우리를 그 위치로 안배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갈에게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 교만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한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하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로 답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도 그러했고, 우리의 경우도 자주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순종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요,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많은 경우,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권위자를 멸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꺾이지 않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위치는 낮지만 우리의 마음은 높아졌기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갈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녀의 여주인을 멸시하였습니다. 자신은 임신하였고 자신의 여주인은 임신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높아진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갈은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은 떼어놓을 수 없고, 교만과 거역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가 불순종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가 거역하지 않을리 만무한 것입니다. 

누가 구원받지 못합니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으나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겸손과 순종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겸손이 가면 순종이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의 문제로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약 4:6,7) 

겸손과 복종이라는 단어가 함께 이어져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젊은 사람들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너희가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오늘날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자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일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권위자를 나와 비교하고 판단하는 악한 습관을 버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온전히 낮아질 때 우리는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먼저이다

저는 오늘 순종에 대해 말하면서 한 가지 순서를 올바르게 하고 넘어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주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천사가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너의 권위자에게 복종하라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진리를 반대하는 권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나의 남편이 진리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권위자인 남편이,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떠나시오.”한다고 해서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신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다 같이 사도행전 5장 27-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 그들이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그들에게 물어

28 이르되, 너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보라, 너희가 너희 교리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또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도다, 하니라.

29 ¶ 이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유대인들 사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반 제사장들도 권위가 있는데, 대제사장이라면 더욱 높은 권세자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엄하게 명령한 것을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놓고 거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는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거리에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전파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누군가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가 누구일지라도 대항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절대 한발자국도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한발자국이라도 물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수많은 순교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베드로와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교황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떠한 권세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한 순교자가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성경에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는가? 너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거역하는가?” 왕은 그 순교자의 믿음을 포기시키려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나의 믿음을 부인할 수 없고, 왕께 순종하기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이요 그 다음은 다른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 결론

오늘 이러한 말씀이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순종이라는 부분을 각인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능력 많고 지식이 뛰어난 엘리트 같은 그리스도인보다 무식한 종같이 시키는 대로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의견과 권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권위의 말씀이 떨어질 때 입을 다물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절대적으로 순종하였기에 주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 앞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자들로 세우신 자들에게 복종하기 원합니다. 그들을 거역함은 우리를 그 위치 안에 두신 하나님을 거역함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높아진 마음들이 낮추어지기 원하고, 나의 권위자를 비교 판단하는 모든 악한 죄악들이 철저히 버려지기 원하고, 오직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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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인 믿음(수 24:14-18)/로빈


2002.05.2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이승선(20세)

제목 : 독립적인 믿음

본문 : 여호수아 24장 14-18절

14 ¶ 그러므로 이제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주를 섬기라.

15 만일 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나쁘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거하고 있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

16 백성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주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하리니

17 주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시고 우리 눈앞에서 그 큰 표적들을 행하시며 우리가 지나온 모든 길에서와 우리가 통과한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우리를 보존하신 바로 그분이시니이다.

18 주께서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나이다. 그런즉 우리도 주를 섬기리니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니라.

저와 같이 어리고 자격 없는 자를 세우셔서 교회에 무언가를 더할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온전히 주님의 말씀만 선포되기 원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독립적인 믿음’입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독립”과 “연합”

우리는 오늘 주님을 따르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길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 영광의 길, 복음의 길, 헌신의 길, 믿음의 길, 생명의 길, 사랑의 길, 섬김의 길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이 길이 교회의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길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이요, 형제 자매들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격려하면서 가야하는 길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데, 특히 “독립적인”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교회의 길이요 지체들과 함께 가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독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독립”과 “연합” 우리는 이 두 가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만을 강조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합”만을 강조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독립”과 “연합” 이 두 가지 모두를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성경지식을 추구하고 은사도 뛰어나다 할지라도 형제들과 함께 할 줄 모른다면 그는 고린도 교회와 같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함께 잘 연합하고 섞인다 할지라도 각자가 주님 앞에 믿음이 없고, 저 형제가 섬기니까 나도 섬기고 저 형제가 무엇을 말하니까 나도 무조건 동일하게 말한다면 그것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립”과 “연합” 이라는 이 두 가지 진리는 모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오늘 “독립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의 이 말씀이 교회의 진리를 약화시키거나 가리지 않기를 원하고, 오히려 잘 균형을 이루어서 우리 모두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우리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말씀이 떨어지면 무조건 복종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신이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진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격은 마귀도 지배할 수 없고, 하나님도 지배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만약 인간의 인격을 마귀가 지배할 수 있었다면 마귀는 이브를 유혹하여 속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그 의지를 지배하여서 먹도록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격을 지배하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그렇지 못하게 막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서 도저히 인간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히려 선택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의 “전적타락”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자기 믿음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믿음과 상관없이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교리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독립적인 인격으로 창조되었으며 우리 모두가 독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우리 각자의 믿음을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습니다. 


** 믿음의 “출발” “여정” “결말”

우리는 구원받을 때 믿음으로 받았고, 이 믿음은 독립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저의 부모님이 믿어서 제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저의 부모님이 믿어서는 저의 부모님이 구원받은 것이고, 저는 제가 믿어서 제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나의 가족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의 가족들 각자가 믿어서 그들 각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처음 주님을 믿을 때부터 “독립적인 믿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교회에 믿음이 뛰어난 형제가 있고 주님을 열정적으로 잘 따르는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 형제에게서 귀한 도전을 받을 수 있고, 그 형제로 인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나의 성경 읽기를 대신할 수 없고, 나의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복음전파를 대신해 줄 수 없고 나의 섬김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나 대신 찬송해 줄 수도 없습니다. 즉, 나의 믿음 생활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도움을 받고 섬기며 부축하지만 결국에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각자의 독립적인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끝나고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때에도 우리는 독립적으로 주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내 옆에 있는 친한 형제가 나를 대변해 줄 수 없고 나 자신이 나의 믿음으로 내가 섬긴 것들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고후 5:10)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데, 그 믿음의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독립적인 믿음으로 걷는 길입니다. 구원도 각자의 믿음으로 받은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도 각자의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고, 주님 앞에 결산할 때에도 각자가 믿음으로 섬김 것들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 독립적인 믿음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죽을 날을 곧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유언과 같은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참으로 귀한 믿음의 고백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하매”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고백이 귀하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이 고백이 귀하다고 느껴질까?” 여러분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괜히 멋있는 말 같아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고백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찌하든지 나는 주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는 독립적인 믿음이 발견되기에 귀하다고 느꼈습니다.


현재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은 하수 건너편에서 또 이집트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또 이스라엘이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들도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나의 조상들이 누구를 섬겼는가, 혹은 나의 이웃들이 누구를 섬기는가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피를 나눈 형제들, 즉 자신과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를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조차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희 조상이 섬기던 신들이거나 너희가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의 신들이든 간에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너희가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주를 섬기리라.”


우리의 믿음에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른 누가 어찌하든지 상관없이 나만은 단일하게 주님을 섬기겠다는 확고하고도 독립적인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지속적인 믿음의 행사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 독립적인 믿음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을 때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결정하여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수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믿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버립니다. 자신을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이라든가 교회의 목사님이라든가 믿음이 뛰어난 친구 등에게 자신의 믿음을 맡겨버립니다. 뭔가 어려운 일이 있고 혼란스러운 일이 생기면 자신이 직접 주님께 나아가기보다 그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을 참으로 잘못배우는 것입니다.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들이 나쁜 조언을 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많은 좋은 조언들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참으로 안정되게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 때 그는 방황하게 됩니다. 그 스스로 주님을 찾는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심하게 요동칠 것입니다.


오히려 조금은 독단적으로 보이고 불안해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이 어릴 때부터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주님을 따라온 사람은 그 자신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들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굳건하게 길을 갈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형제자매들의 조언과 권면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낮아진 자세와 들을 귀를 가지고 다른 지체들의 사랑어린 권면과 조언을 잘 들을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장한 형제가 말했다고 무조건 따라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많은 조언들을 듣고 나서 나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내가 나의 믿음으로 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체들이 말해준 조언들과 똑같은 결정을 내리더라도 나 자신의 믿음으로 확증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독립적인 믿음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을 가지되 독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사람을 보고 따르는 요소가 있는지를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나와 형제자매들이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보고 걷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를 때 결국 같은 길을 올바로 걷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을 보고 걷는다면 같은 길을 갈 수는 있어도 한사람이 잘못가면 다 같이 잘못 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의 믿음의 고백은 지금 갑자기 뛰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훨씬 이전부터 이 믿음을 길러왔습니다. 여호수아는 젊은 시절에 가나안 땅의 정탐꾼으로 파송된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해 총 열두 명의 사람들이 정탐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열 명의 사람들이 악한 보고를 하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일어나서 온 백성을 향해 외쳤습니다. “8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이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양식이니라. 그들의 방어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민 14:8-9)

그때 온 회중이 일어나 흙먼지를 날리며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주의 영광이 회중의 성막에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남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구출 받게 됩니다. 이것이 젊은 시절 여호수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전부터 독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지긋이 들어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 그의 온 생애가 어떠했는지를 한마디로 보여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이 어릴 때부터 우리 자신의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굳건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 모세를 따르던 백성들과 하나님을 따르던 여호수아

이제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 죽을 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양 무리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서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라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어떠한 마음을 가지시겠습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모세 곁에서 모세의 믿음을 보고 배웠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의 믿음의 보고 여호수아를 자신 곁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지금 죽음을 앞둔 것처럼 모세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는 여호수아를 불러서 용기를 돋워주었습니다. 

7 ¶ 또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그에게 이르되, 마음을 강하게 하고 크게 용기를 내라. 네가 반드시 이 백성과 함께 주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상속하게 하리라.

8 주 그분께서 너보다 앞서 가시고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하니라. (신 31:7,8).


모세는 자신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여호수아를 불러서 이렇게 백성 앞에서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고 힘을 돋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에게는 백성들 앞에서 힘을 돋워줄 만한 이렇다 할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양무리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갈 영적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라면 어떠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이제 여호수아가 죽으면 이스라엘은 목자가 없는 양같이 흩어질 것이 여호수아의 눈앞에는 선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모세를 회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참으로 독립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할 때에도 모세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할 때에도 모세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 독립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은 찬양을 터뜨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셔서 그들로 마른땅을 걷게 하시고 이집트의 병거들을 물에 빠뜨리심으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터뜨렸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터뜨렸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좋던 믿음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을 잘 따르던 백성들의 믿음이 급속도로 타락한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였지만 실제로 그들은 모세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모세에게 의존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사라지면 믿음도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떤 사람에게 의존되어 있다면 그 어떤 사람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믿음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어떤 사람에게도 의존되지 아니하고 독립적으로 하나님께만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견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여호수아는 정말 양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서 있습니다. 모세가 잠깐 산에 올라가서 지체한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황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때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있었습니다. “진영에서 전쟁하는 소리가 나나이다.” 여호수아가 말하자, 모세가 대답합니다. “그것은 승리하여 외치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요, 패배하여 부르짖는 자들의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자들의 소리로다.” 모세와 대화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는데 내려와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터뜨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앞에서 뛰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여호수아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앞에서 뛰놀다니!


모세가 잠시만 사라졌어도 방황하는 백성들인데, 이제 여호수아 자신이 후계자가 없이 죽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여러분 이 말씀은 모세가 말했던 것과는 좀 다른 말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굳게 붙들고”(신 13:4).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한 길은 하나였습니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받은 독특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따라야 한다는 그 한 가지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상들을 섬기든지 주를 섬기든지 너희가 마음대로 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무조건 주를 섬겨야 한다. 내가 죽어도 너희들 제발 주를 떠나지 마라.”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수아는 “너희 조상이 섬기던 신들이거나 너희가 거하는 땅의 아모리인의 신들이든 간에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각자각자의 믿음의 고백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 누군가를 인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음의 길을 걷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믿음을 돕고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독립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저 또한 많이 부족하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양육해 본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에는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고 교회로까지 인도된 친구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열심히 말씀을 가르쳐주며 섬겼습니다. 잘 때마다 그 친구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기도하고 학교가 끝나면 매일같이 집으로 데려와 성경도 같이 읽고,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알고 있던 진리들을 가르쳐준 기억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예배가 끝난 뒤에 함께 복음을 전하러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주 큰 부분을 잘못하였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친구들의 믿음을 주관하려고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성경을 더 열심히 읽었으면 좋겠고 교회를 더 열심히 나왔으면 좋겠고 복음을 잘 전했으면 좋겠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가 마구 앞서서 친구들을 끌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그 친구들의 믿음이 성장해 가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엇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면 친구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잘 모르니까 그냥 니가 하는 대로 할게.” 저는 그것도 매우 좋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친구들에게 제시한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올바른 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자신의 믿음은 저버린 채 저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비록 그 친구들은 올바르게 행하였지만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들과 자주 연락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종종 연락을 시도하였지만 그 친구들은 하나님을 잊어 버린지 오래였습니다. 구원받은 것 맞나 하고 확인하면 구원받은 간증은 제대로 나오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 일을 생각하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주님께 인도할 때 성장이 비록 더디고 느릴지라도 그 사람이 직접 주님 앞에 믿음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 읽고 안 읽고 보다 중요한 것은 왜 읽느냐 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나의 눈치를 보고 읽는다면 내가 사라지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성경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구절을 읽더라도 자신이 주님 앞에 믿음으로 읽도록 도와준다면 그는 내가 사라져도 말씀을 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인도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 (고후 1:24)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 우리 각자는 우리 각자의 믿음으로 서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사도 바울이라 할지라도 주관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관할 수 없습니다. 마귀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로 주관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주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독립적인 것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 또한 독립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주님 앞에 인도할 때 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때 말씀을 강력하게 전달할 줄도 알아야 하고 강하게 권면하고 책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자신도 이스라엘 백성에서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고 말하기 전에 “주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만은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어떠한 강한 말 때문에 그 사람이 바뀌어 행동의 변화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자체로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변화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단지 나의 말로 인한 변화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은 결과인지를 명확히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 결론

저는 오늘 독립적인 믿음에 대해서 부족하나마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저는 “믿음은 독립적인 것입니다.”하고 말하겠습니다. 두 가지로 말해보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누군가의 믿음생활을 도우려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한 몇 가지 귀한 것들을 함께 살펴본 후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여호수아는 “이 날” 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날”, “This day”, 이날, 즉 오늘 택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선택은 결코 미뤄질 수 없습니다. “주님 제가 한 오년 동안만 세상을 섬기고 그 뒤에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섬길 자를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성도님들께 이 도전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섬길 자를 오늘 여러분이 택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돈이든지 명예이든지 쾌락이든지 권력이든지 간에 여러분이 섬길 자를 오늘 여러분이 각자의 믿음으로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 말을 할 때 어떠한 마음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는 마음이겠습니까? 무시하는 마음이겠습니까? 여호수아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과 함께 주를 섬기기 위해 자원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 앞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푼네의 아들 갈렙이 서 있습니다.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 여호수아 자신과 유일하게 선한 보고를 하였던 동역자 갈렙이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는 고백을 할 때 여호수아의 눈은 갈렙을 향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갈렙 너도 그렇지? 너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라고 마음속으로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갈렙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합니다. “우리도 주를 섬기리니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와 같은 응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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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 받는 법(딤전 4:1-6)/로빈


2002.02.20.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양육 받는 법

본문 : 디모데전서 4장 1-6절

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3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4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나니

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

6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오늘 설교의 제목을 ‘양육받는 법’입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필요한 두 가지 - 말씀과 말씀을 믿는 믿음

모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양육받기를 원하고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을 줄 믿습니다. 저 자신도 많이 성장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주님 앞에 빨리 성장하여서 주님을 열정적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자라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은 시간이 지난다고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지 몇 십 년이 지났어도 어린아이 상태일 수가 있고, 구원받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어도 장성한 분량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적 생명이 성장하는 데에는 어떠한 과정과 법칙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그것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어떠한 말씀들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가장 먼저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또 로마서 10장 17절 말씀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 믿음의 기초요 근거이며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원동력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먹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질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좋은 교리의 말씀들을 들었다면 단지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취해야 합니다. ‘말씀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실과 바늘처럼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믿음에서 떠나는 것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을 버리고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에서 떠나는 것은 말씀에서 떠나고 것이고 믿음을 가지는 말씀을 취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우리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강조하고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고 들었고 읽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에서는 네가 따르던 믿음, 그리고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씀과 믿음에 더불어 갖추어야 할 “한 가지”

여러분, 그러나 오늘 저는 단지 말씀과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서도 말씀과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이것들과 더불어 한 가지를 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한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성장하고 양육 받는 받는데 있어서, 말씀 그리고 말씀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한 가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제가 6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자세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조금 색다르다고 느끼시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볼 때는 이렇게 적혀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자신이 이런 것들을 깨우침 받는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혹은,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준다면, 형제들은 네가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깨우침을 받는 것은 형제들인데, 양육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은 ‘너’, 즉 디모데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 떠나고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면서 수많은 것들을 혼란시키는 때에 디모데가 그러한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준다면 형제들이 양육을 받고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겠지만, 오늘의 본문은 형제들을 깨우치는 디모데 자신이 양육을 받고 디모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양육 받는 법”인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깨우쳐주면 형제들이 깨우침을 받고 형제들이 성장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디모데 자신이 양육을 받고 디모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깨우쳐 준다면 디모데 자신이 그가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깨우치는 것을 멈춘다면 그의 성장도 멈출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주님 앞에서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귀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성장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깨어있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옆에 있는 지체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따르는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 관심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이, 내가 뭘 알아야 가르치지...”

“나부터 성장을 해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저는 이러한 생각들이 완전히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데 남을 가르칠 수 없고 자신이 하나도 성장하지도 않았는데 남을 성장시킬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품고 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제시한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자라나고 양육 받는 데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은 시간이 흐른다고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단지 설교를 많이 듣고 단지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고 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먹은 말씀을 가지고 형제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한 말씀을 먹었다면 그 한 말씀으로 형제들을 섬겨야 합니다. 성경 한 구절로 은혜를 누렸다면 그 한 구절 지체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러할 때 내가 먹은 말씀과 믿음이 나를 양육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이것은 조건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다만 은혜로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육 받는 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준다면” 이것이 바로 조건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양육 받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준다면 우리 자신이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지도 오래되었고 성경 지식도 적지 않은데 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그 자신만을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영적 성장, 자기 자신만의 성결, 자기 자신만의 배움만을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성장한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주님이 쓰시기에는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만을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관심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마땅히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나 자신의 영적 성장과 배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양육받는 법인 것입니다. 다른 영혼들을 관심하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도 식어져 버리고 죽은 자와 같이 깊은 잠에 들게 될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아무리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 해도 그는 곳 영적 침체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한 형제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대부분 들으셨을 것입니다. 다른 영혼들을 돌보고 열심히 섬기시던 한 형제님이 그 일을 다 놓게 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제님은 엄청난 영적 침체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가정예배도 드려보고 나름대로 추구도 하였지만 마음속의 곤고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 형제님은 ‘내가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몇몇 형제님들과 교제를 가지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 이제 다시 영혼들을 살리는 일 해야겠습니다. 사실 저 다른 영혼들에게 별로 관심 없습니다. 저 자신이 살아야겠습니다. 계속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저 다시 복음 들고 나가려고 합니다. 다른 영혼들 섬기려고 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양육 받는 법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일 뿐 아니라 다른 한 형제님들 통해서도 입증된 명백한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영혼들을 살리지 않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죽어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영혼들을 일깨우지 않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잠들어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깨어있지 못합니까? 언제 상태가 안 좋아집니까? 모든 관심이 나 자신에게 집중될 때입니다. ‘나는 깨어있어야지.’, ‘나는 성장해야지.’, ‘나는 기도도 열심히 해야지.’, ‘왜 아무도 나를 관심해 주지 않지?’, ‘나’, ‘나’ 우리의 생각이 온통 ‘나’로 휩싸여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악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공격하기 가장 좋은 상태이며, 넘어지기 가장 좋은 상태이고, 실족하기 가장 좋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의 섬김이 필요한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만 바라보고 눈을 돌려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단번에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 디모데전서 4장 전체가 말하는 주제

디모데전서 4장은 계속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4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라.


사도 바울은 지금 13절에서 자신이 디모데에게 갈 때까지 전념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읽는 것, 권고하는 것, 교리 이 세 가지에 전념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읽는 것과 교리가 먹는 것이라 한다면 권고하는 것은 먹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읽는 것과 교리에 전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공부해야 하며 건전한 교리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꾸준히 전념해야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단지 읽는 것과 교리에 전념할 뿐 아니라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이에 반드시 권고하는 것도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사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 모두에게 보내신 편지이기도 합니다. 디모데와 같은 사역자만 권고하고, 우리는 읽는 것과 교리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과 먹은 말씀으로 지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 가운데 거하라. 네가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리라.

성경은 ‘이 일들을 계속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은 바로 이어지는 말씀처럼 무엇인가를 말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함으로써 나 자신과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게 될 그러한 일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같은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깨우치는 것, 권고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 먹었고 누렸던 말씀, 건전한 교리의 말씀들을 나눌 때에 먼저 나 자신이 구원받고,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구원은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거짓 교리의 풍조 그리고 실생활 가운데 닥치는 모든 죄의 유혹과 올무로부터 놓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깨우치고 권고하는 일에 전념할 때 우리의 말을 듣는 지체들도 도움을 입겠지만, 우리 자신 또한 실생활 가운데 닥치는 모든 환란과 유혹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 순서 바로 잡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서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성장을 많이 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고는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없음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먹는 것과 먹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기만 해서도 안 되고, 먹은 말씀도 없는데 함부로 말해내서도 안됩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왕창 배우고 많이 먹고 나서 그때부터 사람들을 이것저것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으로 섬길 때 그 한 말씀이 참으로 내 것이 되고 나는 한 단계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 한 말씀을 먹었다면 그 한 말씀으로 섬길 때 나는 또 한 단계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읽는 것이라는 한 걸음과 권고하는 것이라는 한 걸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걸음으로는 공급받는 것이요, 한 걸음으로는 공급하는 것입니다. 공급을 받기만 해서도 안되고 공급을 하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두 다리를 가지고 걸어야 합니다. 이것들 중 한 가지만 추구한다면 한 다리로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내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디모데전서 4장을 통해 살펴본 양육받는 법입니다. 


** 나의 간증

마지막으로 저의 간증을 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근협 형제를 구령하고 나서 양육의 부담을 가지고 근협 형제를 섬기기 원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저의 믿음은 너무나 연약하였습니다. 주일날 말씀을 들을 때는 힘이 나고 다시 한 번 주님께 몸을 드리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실패하면서 다시 낙담하고 쓰러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신앙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고 쉽게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근협 형제를 섬기면서 넘어질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낙담하고 넘어졌을 때에라도 근협 형제를 주님 앞에 잘 세워야 한다는 마음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책을 읽어도 이전보다 더 간절하였습니다. 무엇이라도 더 찾아내어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면 교제할 때 설명하고 또 설명하면서 저 자신도 잘 모르던 부분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믿음은 점차 견고해지고 넘어져도 금방 회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근협 형제가 공장으로 일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에서 혼자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다른 많은 책들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았을 때 말씀을 읽을 때의 깨달음이나 감격이 근협 형제를 섬길 때보다 많이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기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장 내가 공급해야 할 대상이 없어진 탓인지 점차 그 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영적 생활도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안 읽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건성으로 듣는 것도 아닌데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지. 깨어있어야지.’하면서도 점점 그렇게 되었습니다. 평소보다 성경도 더 많이 읽어보고 영적인 책들도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마음의 곤고함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함께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들으면 눈물도 나고 다시 돌이키기도 하였지만 좀처럼 회복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형제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 다음날 있을 어린이 주일학교 모임 때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순간 갈등을 하였습니다. 안 한다고 하면 영적으로 안 좋은 것이 확 드러날 것 같고, 그렇다고 해보겠다는 마음도 자신감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하겠다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주님, 주님은 저의 상태와 능력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일을 저에게 맡기신 것은 능력도 주시겠다는 것임을 제가 믿습니다. 주님 모세가 든 막대기는 다른 막대기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그 막대기는 나일 강도 피로 만들었고 홍해도 갈랐습니다. 주님 이런 마른 막대기 같은 저도 주님의 손에 들려진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능력 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하고 저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을 전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말씀을 준비하고 전한 저 자신이 가장 먼저 세움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전하려고 하였지만, 저는 아이들이 그 말씀을 얼마나 소화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한 주 두 주 말씀을 전하면서 저 자신이 주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준비할 때 전하기 이틀 전부터 준비하였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 증거할 말씀은 저의 한 주간의 묵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참으로 말씀 안에서 놀라운 보화들을 찾게 되었고 말씀을 먹는 맛과 기쁨을 다시 새롭게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발견한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양육 받는 법”

나의 관심을 돌려 다른 영혼들을 돌보기 시작할 때 다른 영혼들도 세움을 입겠지만, 정작 가장 큰 세움을 받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만 하던 섬김이 나중에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축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요청되는 섬김의 손길들을 부담스럽다고 거절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지라도 여러분이 그 한순간을 이기고 주님 앞에 순종함으로써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다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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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사랑과 하나됨(고전 1:4-10)/로빈


2001.12.19.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19세)

제목 : 형제사랑과 하나됨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4-10절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5 너희가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되었으니

6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증언이 너희 안에서 굳게 세워진 바와 같도다.

7 이로써 너희가 어떤 선물에서도 뒤쳐지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

8 그분께서 또한 너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가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10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오늘 저는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치 우리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며 우리 각자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인 것처럼 말씀을 대하기 원합니다. 


** 바울의 감사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하나님께 고린도 교회를 향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나의 하나님께 항상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의 내용이 4절부터 7절까지 나옵니다.


4절부터 7절까지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5 너희가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되었으니

6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증언이 너희 안에서 굳게 세워진 바와 같도다.

7 이로써 너희가 어떤 선물에서도 뒤쳐지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

고린도 교회로 인한 감사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해져서 그리스도의 증거가 확고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교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기까지 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는 정말 놀라운 교회입니다.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확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경 지식에 있어서 매우 부요하였기 때문에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거가 확고하였고 흔들리지 않았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굳게 붙잡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갈라디아의 교회들과 달리 다른 복음과 거짓 형제들의 미혹하는 말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각자 각자가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해서 그리스도의 증거를 확고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음으로 인하여 감사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재능 있고 각각의 은사를 가진 형제자매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곳곳에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일에 적합한 은사들을 가진 지체들이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님을 섬기기에 참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교회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지식과 은사에만 부요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이 땅에 정착하지 아니하며, 타국인이요 순례자로써 살았던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볼 때에 어떠한 마음을 가지십니까? 우리 교회도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하며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고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교회! 우리는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 바울의 한 가지 권면 - 온전히 함께 연합하라

만약 여러분이 사도 바울이라면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게 어떠한 권면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게 무엇을 더 적으시겠습니까? 

“뭐 잘 하고 있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있나? 뭐 지식도 부요하고, 아무 은사에도 부족하지 않고 거기다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까지... 뭐 완벽하구만.”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의 권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바울은 10절에서 “하나 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고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개개인이 뛰어났던 교회였습니다. 각자 각자가 성경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각자 각자가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각자 각자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라는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육신적이라고 말합니다. 

1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사도 바울은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한 한 교회를 가리켜 육신적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는 한 교회를 향해 어린 아기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한 교회를 가리켜 너희가 너무 육신적이어서 도저히 영적인 사람을 대하듯 말 할 수가 없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안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경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은사를 가졌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가가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지식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은사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은사란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에 관해서는 너무도 중요해서 어떻게 강조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어떠한 위로도 소망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형제사랑과 하나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육신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식은 무엇입니까? 단지 그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 입니까? 단지 얼마나 많은 은사들을 가졌는가 입니까? 단지 얼마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가 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식은 “형제사랑과 하나됨”인 것입니다. 


** 데살로니가 교회와의 비교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그러니까 삼 주간에 걸쳐 말씀을 전한 결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형제들에 의해서 베레아로 보내지게 됩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삼 주간의 말씀 전파로 세워진 아주 어린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지식에 부요하다는 칭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3주 만에 세워진 교회인지라 많은 지식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은사 면에서도 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성도들로 모여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7)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어린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삼 주간의 말씀전파로 갑작스럽게 세워진 교회가 그 지역에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어리고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직접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형제의 사랑에 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서로 사랑할 것을 너희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면에서도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겠지만 바울은 특별히 “형제사랑”에 대한 부분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형제사랑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쓸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미 하나님께 몸소 배워 서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와 대조됩니까? 고린도 교회는 모든 말과 지식에 부요하며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육신적이라고 책망을 받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3주 만에 세워진 아주 어리고 미약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대조적으로 만든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형제사랑”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었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형제사랑”에 관하여 바울이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인 교회와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된 교회의 명백한 차이점인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과 분열” 그리고 “형제사랑과 하나됨” 이 두 가지가 육신적인 교회와 본이 되는 교회는 나눈 것입니다. 


** 진리의 지식, 은사, 주님의 다시 오심의 목적 - 교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정말 알아야 할 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사랑과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소중함이었습니다. 


** 진리의 지식

진리의 지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나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나의 잘난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기 위함입니까? 나보다 무식한 자들과 분리하기 위함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실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 귀중한 복음을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얻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귀중한 진리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진리의 지식은 주님의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것이며 지체들을 돌아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귀하고 귀한 진리의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 은사

고린도 교회는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정작 그 은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은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나의 재능을 자랑하기 위한 것입니까? 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까? 나보다 무능력한 사람들과 분리하기 위함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한 지체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전체는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 은사가 왜 주어진 것인지를 깨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읽지는 않겠습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시간을 내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은사의 목적을 알았다면 그들은 시기하고 다투고 분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은사를 가진 것은 내 옆의 지체를 세우기 위함이며 내 옆의 지체가 나에게 없는 은사를 가진 것은 나를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히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최상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는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시간을 내셔서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옆의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 주님의 다시 오심

고린도 교회는 각 성도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신랑은 누구이며 신부는 누구입니까? 신랑은 우리 주님이며 신부는 교회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진실로 기다린다면 그는 자신을 정결케 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돌아볼 것입니다. 나 자신의 마음을 예비할 뿐만 아니라 지체들의 마음도 돌아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히 10:25). 주님의 다시 오시는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과 은사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란?

그렇다면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형제사랑은 무엇입니까? 단지 나의 생각을 접는 것입니까? 단지 입으로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단지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입을 다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것을 말하고 분열이 없으려면 생각이 같아져야 합니다. 마음과 의견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인 것입니다. 


** 어떻게 하면 형제사랑에 이를 수 있는가? -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됨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그냥 열심히 하면 됩니까? 무조건 내 생각을 버리고 형제들의 생각에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사랑과 하나됨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니라.


사도 바울은 온전히 함께 연합하라고 말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뉘시느냐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질책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보십니까? 갑자기 바울이 편지의 흐름을 바꿔서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대해서 적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게 하나 되는 비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뭔가 심오하고 깊은 듯한 지식을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치 유대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능력있는 은사들을 찾고 마치 헬라인들처럼 뭔가 심오하고 깊은 듯한 성경 진리를 알고자 하지만 정작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치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는 것처럼, 진리의 지식과 능력 있는 은사들을 갈망하였고 부족함이 없이 가졌다는 칭찬을 받았으나 그 근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능력과 지혜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진리의 지식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능력 있는 은사들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나의 지식, 나의 은사가 모두 주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입에서는 주님을 자랑하는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29-3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

31 이것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형제사랑이 없고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형제사랑이 없고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식과 은사를 자랑하며 자신을 높이려 하기 때문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며 우리에게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주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우리가 인식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하나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입을 열어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찬양한다면 우리는 하나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교회에 형제사랑이 넘치며 모든 지체들이 하나 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마무리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1장 전체에 걸쳐서 형제사랑과 하나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말과 지식에 부요하며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아주 귀한 교회였지만 형제사랑이 없고 시기와 다툼과 분열로 인해서 육신적이며 어린아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삼주 만에 세워진 어린 교회였지만 형제사랑으로 인하여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두 교회를 비교해 봄으로써 형제사랑과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성경 지식과 은사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의 초점이 교회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사랑과 하나됨에 반드시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형제사랑과 하나됨을 온전히 이루려면 우리는 우리의 주장과 자랑을 내려놓고 주님을 자랑하고 높여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의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로부터 여러 가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칭찬은 각 성도들이 성경 지식에 뛰어난 교회, 역량 있고 젊은 일꾼들이 모인 교회, 복음에 열정적인 교회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교회가 주님 앞에서 참된 형제사랑으로 하나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믿는 자들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을 계기로 형제사랑과 하나됨의 중요성을 더욱더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주님 앞에 기도하며 진력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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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제사장(고후 5:15)/로빈


2001.10.17.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19세)

제목 : 만인제사장

본문 :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5)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저는 ‘만인제사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분께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심판자이십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선한 자에게 보상하고 악한 자에게 징벌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바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만물을 친히 만드셨고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며 운행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같이 기쁨과 슬픔, 가엾음과 분노를 느끼시는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어떤 사람이 금붕어를 기르기 위하여 어항에 돌과 흙, 물풀과 물레방아 그리고 물을 준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지구를 만드시고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들, 산과 들, 풀과 나무들, 모든 동식물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교제하기 원하셨고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고 그분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우리와 같이 기쁨과 슬픔, 가엾음과 분노를 느끼시는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다 제거해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다시 만드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분의 선택을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스스로 자족하시며 홀로 지혜로우시며 영광가운데 거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요 10:18)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사람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실 때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선택의 의지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중요한 구원의 문제조차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으셨나 모든 사람을 강제로, 억지로 구원받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을 위하여 사는 문제도 동일함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문제와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거나 생명이 많이 성장한 특정 그리스도인들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아니, 섬겨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주님을 영접한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여태까지 나에게 아무도 이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


여러분 중에도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이런 생각을 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믿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받기 원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누구든지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섬길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문제를 강제로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강제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 삶의 목적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위하여 살고,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출세하기 위하여 살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왜 사는 지도 모르고 살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하늘나라에 간다면 죄도 더 이상 안 짓고 실패하거나 넘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다시는 내 옆의 형제자매를 미워하게 되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성경 지식들을 깨닫게 될 것이며 주님을 대면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들은 왜 지금 바로 하늘에 가지 않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목적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단지 실패하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죄를 안 짓고 세상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단지 성경을 공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땐 주님의 모든 뜻을 헤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들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라고 말씀한 구절에서도 우리가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섬기기 위하여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은 단지 교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에 가면 더욱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온전한 사랑으로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먼 길을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함께 연합하고 교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지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교제를 통해 공급받고 깨달은 것으로 주님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준비를 잘 갖춘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많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있다면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 생활의 필수요소 - 섬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기지 않을 때 그의 믿음은 흔들리게 됩니다. 목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멈출 때 그의 성장은 멈추게 됩니다. 그의 믿음의 진보는 멈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더 분발해야할 이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길 때 배움이 있고 공급이 있으며 믿음이 견고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견고하기 원하십니까?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굳게 서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것은 단지 사도바울의 권면일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굳게 서고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바로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하고 있는 그때 우리는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그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견고하기 원하십니까?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말씀과 기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섬김’ 또한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고 알고 누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참으로 깊은 기도로 나아가서 주님과 교제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 또한 무익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주님 앞에 판단 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얼마나 많은 말씀을 깨달았나 입니까? 단지 얼마나 기도로 주님과 교제했는가 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우리가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려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를 판단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에 원동력과 같은 것입니다. 힘을 공급받고 나서 그 힘을 주님 섬기는 데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일어나기 원합니다. 


** 만인제사장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영적인 제물을 드리고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모두는 제사장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사역자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의 종이요 일꾼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다 같이 베드로전서 2장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돌들이며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건물을 짓는 데는 돌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벽돌 한두 개 가지고는 건물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돌들입니다. 어떤 돌도 죽어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지체가 주님 앞에서 받은 생명을 가지고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앞에서 섬기는 한 두 명의 형제자매들로는 교회가 온전히 건축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일어나서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살아 있는 돌들이며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 그분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 주저함이 있으신 형제자매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용기를 갖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 각자 각자가 섬기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섬길 수 있는 은혜와 기회와 자격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일을 잘 처리하는 그리스도인보다 주님 섬기고자하는 갈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주님은 오늘날 재능이 많은 그리스도인보다 주님 섬기고자하는 갈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서투르고 잘 못할지라도 주님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고 물었을 때 레위의 아들들이 나아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이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주여, 참으로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이오나 주의 편에 서기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기 원합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일어나기 원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주님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기 원합니다. 


** 마무리

지금 이슬람 국가들에는 자살테러범들이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들이 믿는 알라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헌신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주님을 위해 목숨은커녕 1시간도 내어드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의 일이 넘쳐나는 데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일꾼을 찾으시는데 나태하게 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먼저 우리 모두가 일어나야 합니다. 먼저 우리 교회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일어나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일어나서 주님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을 일깨워야 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의 일은 넘쳐나고 일꾼은 부족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눈을 들어 주님의 갈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담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일꾼을 찾으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제로 섬기게 하지 않으십니다. 자원하는 사람의 섬김을 기뻐 받으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저 또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위해 저 자신을 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조용히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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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로빈입니다!

나야나 랜섬웨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티스토리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의 데이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여기저기 뿌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여기저기 뿌려놓을 생각입니다...^^

 

앞으로 다양한 자료를 통해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라고

무엇보다 저 자신을 위한 정보들과 추억들도 모아놓고자 합니다.

이곳에 들러주신 모든 분들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2017년 6월 16일 금요일 오전 1시 10분경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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