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3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성령 안에서 걸으라(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걸으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앞으로 저에게 수요설교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저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전체적인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16,17절 성령 안에서 걸으라

오늘 우리에게 미약하면서도 강렬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깊은 마음속에서 가지는 간절한 원함은 바로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원은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먼 훗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이러한 열망이 더 커지고 더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말씀은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하나님의 영은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가 되므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럽고 천연적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생명과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결코 조화되거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욕심"이 동기가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적인 말들로 포장될지라도 여전히 육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떠한 원함이나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심과 성령의 원함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원함은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나의 유익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되 그분의 말씀이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스스로 옳게 보이는 사망의 길로 급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 가고, 멈추라고 할 때 멈추는 것이지만, 육신의 욕심은 유익이 있을 때 움직이고 손해가 있을 때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1928년 일본이 중국 만주에 침략하여 만주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일지사변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일지사변이 일어난 뒤 3개월 간의 전쟁을 통해서 중국은 많은 숫자의 탱크를 잃어버렸고 더 이상 일본군의 탱크와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제 중국군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군 탱크가 지나갈 때 숨어있던 저격수가 총 한발을 쏩니다. "팅" 총알은 탱크의 표면을 맞으면서 소리만 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한 발을 쏩니다. "팅" 역시 소리만 날 뿐입니다. 또 다시 얼마가 지나고 한 발을 쏩니다. "팅" 그런데 갑자기 탱크가 멈추더니 드디어 탱크의 운전수가 도대체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것인지 보기 위하여 탱크의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게 됩니다. 이때 탱크의 뚜껑을 겨누고 있던 저격수는 운전수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당깁니다. 탱크의 운전수는 총알이 날아오든 말든 신경쓸 것 없이 탱크 안에만 있으면 완전히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탱크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탱크의 뚜껑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게 됩니다. 죄와 세상과 사탄과 육신이 연합군이 되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육신의 욕심을 거스르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결단력이 강하고 신념이 굳센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결단이 약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성령 안에서 걷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 18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18절에 보시면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성령 안에서 걸으라." 18절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이 두 표현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종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사람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억지로 오 리를 동행해 주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십 리까지도 기쁘게 동행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감추고 억누르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외적인 말과 행동만을 조심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마음 속의 동기와 의도까지도 주의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교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겸손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법을 따지며 자신의 유익과 손해를 계산하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지치고 피곤하고 복잡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단순한 기쁨과 화평 속에 안식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아닌 많은 좋고 선한 것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몇 주전에 캐나다 동부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는 "안개 속의 숙녀호"라고 해서 배를 타고 폭포 앞까지 가는 관광코스가 있었습니다. 매표소 앞에 봤더니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서 "아이고 이거 한번 타는데 시간 다 가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행 가이드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가이드는 그곳에 일하는 사람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더니 모든 줄을 앞질러서 옆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없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은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가이드의 인도를 받아서 온 저와 다른 몇 분은 일반적인 규칙 아래 있지 않고 특별한 규칙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빨리 "안개 속의 숙녀호"란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까지 가서 시원한 폭포의 물안개를 맞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는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성령님이라는 가이드, 인도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할 때에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가게 되면 율법을 초월한 생명의 성령의 법, 자유의 법에 적용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걸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 19-21절 육신의 욕심의 결과

19절부터 보시면 여러 가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은 성적인 죄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잠을 자야하는 수면욕은 죄가 되지 않지만 질병이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하루 종일 자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하는 식욕도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남용하여 탐식할 때 죄가 됩니다. 성적인 죄악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서 욕심을 부리게 될 때 죄가 됩니다. 간음과 음행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16절에서는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는 모두 순간적인 육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더 좋고 중요한 것들을 버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특징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좋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며, 성령의 특징은 더 좋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20절에서는 "우상 숭배와 마술"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죄악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게 절에 가서 불상에게 직접 경배하지는 않지만 은밀한 우리 마음 속에 수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육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육신의 욕심과 탐심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또한 우상 숭배는 영적인 간음으로서 우리에게 늘 긍휼과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우상 숭배할 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여전히 섬기고 거기에 더하여 많은 축복을 줄 것 같은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지만 거기에 더하여 많은 좋은 것들을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욕심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우상들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우상들이 무가치해지고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0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그리고 21절에 "시기와 살인"의 죄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의 특징은 모두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과 연관해서 짓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증오가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경쟁하고 진노하고 다투고 폭동을 일으키며 파당을 짓고 시기하며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목록들 중에서 경쟁하고 다투고 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자주 범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간음이나 살인이나 우상 숭배와 같이 큼직하고 무거운 죄악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시기하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똑같이 육신의 욕심 가운데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 취함과 흥청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짓는 죄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배움이나 섬김을 가지지 않고 빈둥거리며 흥청대는 것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망치고 자멸시키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2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비결은 단 한가지인데 바로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육신의 욕심을 따라 다른 형제들을 시기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주님의 일들을 섬기는데 나의 육신의 욕심이 첨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오늘날 성령을 따르고 성령에게 심는 사람만이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둘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영존하는 생명은 영원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는가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았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많은 좋은 일들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푯대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사역이나 섬김도 우리의 욕심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섬기는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 해주고 나를 따르는 것을 바라는 것도 육신의 욕심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육신의 욕심으로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썩는 것이 되어 거두어질 것입니다.

** 22,23절 성령의 열매

22절부터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오늘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앞으로 설교를 하게 될 때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랑은 육신의 모조품이 아닌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공한 그리스도인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 입니다. 지식도 있고 열심도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으로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자녀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다스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사람들 가운데 화평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신의 열매는 불화와 경쟁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신 것같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참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참아주셨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문제가 많은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주님이 참으시는 것같이 나도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부드러움입니다. 우리에게 까다롭고 거친 모든 이들에 대하여도 우리는 어린양 같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볼 때 부드러움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는 사람은 거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며 걸림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부드럽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선함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악착같이 달려드는 태도는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처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스스로 보상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나에게 선하게 대하신 것같이 우리들도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데 이것 역시 육신의 열심이나 욕심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온유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겸손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 중 한가지는 우리가 교만하며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우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는 절제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특징이 욕심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육신의 특징이 급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육신은 답답한 상황을 못 견뎌 일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의 열매는 말과 행동을 절제하며 주님께 순종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울은 대언자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했으나 급하게 스스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급하게 왕이 되려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사울을 넘겨주신 기회가 왔을 때에도 절제하였습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고전 9:25).

오늘 우리의 원함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때에 그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는 이러한 열매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할례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은 교묘하게도 영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육신을 따르는 많은 믿는 이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율법을 강조하면서 할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육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성경을 인용할 수 있고 영적인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육신과 성령은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육신과 성령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게는 영적인 모양이 있지만, 성령님께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실제적인 순종과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너무나 명백해서 우리가 금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모든 뿌리가 욕심에 기초하며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하며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익과 손해를 크게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26절에 나온 것처럼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만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걸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심게 될 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존하는 생명과 영광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탱크 밖으로 나와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꾸 가이드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서 기웃기웃 거리며 다니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성령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살 때에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pauline/48galatians/48galatians051626_1walkinthespirit_20070731_robin.html

티스토리 https://robinlee.tistory.com/241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gloryever/49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robin1611/222077025034

네이버 카페 https://cafe.naver.com/robinbox/6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