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20.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다윗이 만난 하나님(행 13:21,22)

본문 : 사도행전 13장 21,22절, 사무엘기상 16장 5-13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곳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13장 21-22절을 보시겠습니다.

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키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모든 뜻을 성취하리라, 하시고

 

 

이제 사무엘상 16장 5절부터 13까지 보시겠습니다.

5 그가 이르되, 평화롭게 오느니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은즉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나와 함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자, 하고는 그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부르니라.

6 ¶ 그들이 오매 그가 엘리압을 보고 이르기를,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하였으나

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8 이에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매 그가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9 그때에 이새가 삼마를 지나가게 하매 그가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다시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니라.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이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들을 지키나이다, 하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우리가 앉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그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는데 이제 그는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겼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이 그니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시니라.

13 이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니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일어나서 라마로 가니라.

오늘 저는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길고 자세하게 그가 지나간 길과 행적이 기록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는 이 짧은 설교시간을 통하여 다윗의 생애를 모두 알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생애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주목하여 살펴봄으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었는가를 주의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으로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다음 아들이었던 셋으로부터 인류는 새롭게 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5대손인 에녹이 살았을 때부터 이미 세상은 극도로 타락하기 시작했고, 아담의 8대손 노아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호흡하는 생물을 홍수로 심판하셔야 할 만큼 타락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롭게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셨지만, 모든 인류가 한 곳에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흩으시고 많은 민족들의 구분과 경계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한 민족을 만들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통하여 결국 70명이라는 자손이 이집트로 들어갔고, 400년 만에 그들은 모세와 함께 약 200만이라는 엄청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함께 40년을 광야에서 이동하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은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민족들에게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재판관들을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가나안 민족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벌하시고, 또 다시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재판관들을 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수아 때로부터 대언자 사무엘 때까지 약 450년 동안 그들에게 재판관을 주셨습니다(행 13:20).

 

 

이제 재판관들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대언자 사무엘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도 다른 민족들과 같이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구분되게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왕국을 거부하고 다른 민족들과 같은 인간왕을 가지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크고 잘생기고 능력이 많은 용사를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모든 백성은 한번 사울을 보자마자 국왕 폐하를 외칠 만큼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사람들의 평가와 눈을 더 주의하는 왕이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제사장 외에는 결코 드려서는 안되는 제사를 전쟁이 두려워 떠나가는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스스로 진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민족의 왕과 모든 기름진 양과 소를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며 떠나갈 때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보다는 그래도 백성들이 보고 있으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양이라도 내달라고 요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는 자신의 경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지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 가족 안에서의 다윗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16장의 말씀이 등장하게 됩니다. 16장 1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어느 때까지 그를 위하여 애곡하려느냐? 기름을 네 뿔에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아들들을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주님은 아직 누구라고 정확하게 가르쳐주시지는 않고 다만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에 들어가니 모든 백성을 인도하던 대언자 사무엘의 방문에 모두들 놀라고 떨며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마을의 장로들이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평화롭게 오시나이까?" 사무엘은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릴 준비를 하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한번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온 민족을 재판하고 이끌던 장로 중의 장로, 대언자 사무엘이 마을에 방문하였습니다. 마치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한 것같이 베들레헴에서는 엄청난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의 장로들이 다 나와서 사무엘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은 특별히 "이새의 가족"을 지명하여 초청하였고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아들들 가운데 한 명에게 기름을 부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도 이 기름 부음을 받을 자가 사울을 대신한 왕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큰 파장이 올 것이기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기름을 붓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백성들도 묻는 것을 두려워해서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첫째 아들 엘리압이 사무엘 앞으로 옵니다. 이 엘리압은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용사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보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감탄하면서 기름 부을 준비를 합니다. 주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만약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러한 놀라운 말씀,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와 같은 말씀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섬겨온 사무엘조차 사람인지라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게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비나답, 삼마 이렇게 일곱 아들들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어떤 말씀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확인차 묻습니다. "네 자식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새가 대답한 뉘앙스를 잘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막내 녀석이 있는데, 그 놈은 양치고 있지요. 막내 녀석은 아직 이런 자리에 참석할 놈이 아니죠. 형들 다 왔으니 양이나 보고 있으라 시켰죠."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사무엘이 왔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줘야지, 그것도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초대한 잔치요 거룩한 자리인데, "너는 가서 양이나 쳐라."하고 부르지도 않았으니 다윗이 가족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안 봐도 뻔할 뻔 자입니다. 막내로서 형들의 수중을 들고 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하고 모든 아들들을 초청한 가족 행사 때에조차 따로 남겨져 양을 돌봐야하는... 아들이면서도 아들 같지 않은 대우를 받았던 다윗을 그려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새의 가족들을 특별히 초청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많은 베들레헴 주민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 작은 일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축제와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시끌벅적대고 있는 가운데 저 멀리 들판에는 혼자 남겨져 양을 보고 있는 다윗이 있습니다.

 

 

 

** 들판에서의 다윗

어찌보면 외롭고 쓸쓸하고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고 소외당하고 왕따를 당한 것 같은 한 소년이 양을 지키며 앉아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 나타난 말씀들을 통해 다윗이 어떤 모습으로 양들을 돌봤는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잠시 들판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내 일어나서는 하프를 타고 주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찬송시를 직접 지어서 노래를 붙여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금 양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한 마리 한 마리 어디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때 어디선가 곰 한 마리가 나타납니다. 양들이 흩어지고 다른 양치기 품꾼들은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곰은 어린양 한 마리를 움켜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와 돌팔매 기구를 가지고 추격합니다. 작은 양치기 소년과 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거대한 몸집의 곰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저 곰의 발톱과 이빨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고 내가 오직 아버지의 양들을 충성되게 지켜낼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소서."

 

 

어린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작은 양치기의 입에는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노래하는 찬양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라. 가족들 가운데서도 막내에 불과하고 양치기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내가 이렇게 양을 지키는 목자이듯이 주님은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목자시로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외쳤을 것입니다.

 

 

다윗은 날마다 주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며 모든 외로움과 쓸쓸함을 이겨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섭섭하고 허전하고 울적할 때마다 다시 주님께 나아가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주님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 속에 깊이 잠겨서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다윗을 누군가 부르고 있습니다.

 

 

"이봐, 다윗! 야! 내 말 안들려? 너 출세하겠더라? 지금 빨리 사무엘 대언자께서 너를 불러오라고 하셨어. 너가 오지 않으면 앉지도 않겠다고 서서 기다리신단 말야. 빨리 와봐."

이렇게 해서 다윗은 영문도 모른채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 위에 임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다윗과 골리앗

한편 사울 위에 있던 주의 영은 떠나가고 오히려 악한 영이 와서 사울을 괴롭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신하들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추천하여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이 괴로울 때에 하프를 타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괴로울 때마다 하프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그 소리를 들은 사울은 상쾌하게 되고 낫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크게 사랑한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병기 드는 자로 삼았습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벌어지자 사울은 다윗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다윗의 큰 형들 중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는 용사로서 전쟁을 하러 나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다윗은 다시 여전히 아버지의 양을 먹이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간 큰 아들들을 걱정하여서 다윗에게 음식을 주며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잘 있는 증거물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보냅니다. 왕 앞에서 하프를 타고 병기를 드는 역할까지 했던 다윗이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목동이요 심부름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한편 전쟁터에서는 골리앗이라고 하는 키가 약 3미터나 되는 거인 투사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입은 쇠 그물 옷은 놋 오천 세겔이라 하는데 이것은 대략 196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골리앗이 들고 있던 창은 베틀 채 같았고 그 창의 촉 무게만 해도 쇠 육백 세겔로 대략 20킬로그램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놋 투구와 어깨 사이의 놋 방패, 정강이가리개 등의 모든 무장을 합치면 이 골리앗은 수백 킬로그램의 무겁고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쟁에 능한 앨리트 신동 전사로서 블레셋의 영웅 중의 영웅이었습니다. 이 골리앗이 40일 동안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리치기를 모두가 전쟁할 필요 없이 한 사람만 나와서 자기와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전에 우리 서 목사님과 제가 좋아하던 삼국지 게임을 보면, 일기토라는 전쟁 옵션이 있는데 전쟁 중에 대장인 장수 두 명이 나와서 대표로 싸웁니다. 뒤에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 있더라도 대표 장수가 패하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골리앗은 지금 일기토를 해서 전쟁을 끝내자고 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 가운데 가장 키가 컸던 사울 조차 골리앗 앞에 서서는 작고 약해 보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골리앗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하였습니다.

 

 

22 다윗이 자기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자기 형들에게 이르러 문안하며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보라,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에서 가드 출신의 블레셋 사람 곧 이름이 골리앗이라 하는 투사가 올라와 똑같은 말들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이 말을 들은 다윗이 흥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느냐?"

이 말을 들은 엘리압이 다윗을 향해 분노를 발하며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그 양들을 네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왔도다."

 

 

막내 주제에 자기를 대신해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못마땅한데 지금 모두가 두려워 떠는 상태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다윗을 보고 흥분한 엘리압은 다윗을 향하여 무례하고 교만하다고 호통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향해 열심을 내다보면 사람들에게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들 안에서 말입니다. 너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 교만할 필요 없다, 너만 왜 유별나게 그러냐, 그러나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우리를 격려하는 소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의 내용처럼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다윗은 이 때 갑자기 믿음이 생겨서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 아니라 평소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구해내신 하나님을 평소 그대로 신뢰하며 동행하였고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45 이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도전한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이 날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게서 네 머리를 취하고 또 이 날 블레셋 사람들 군대의 사체를 공중의 날짐승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주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온 땅이 알게 하겠고

47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심을 이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시리라, 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는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께서는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만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만 사용하신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섬길 수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을 보십시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 맞는 것을 보시고 이 다윗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 없었으면 저기 저 시골에 가족들 중에서도 하찮게 여겨지는 작은 목동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놀라운 역사와 간증을 일으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좀 모자라고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이 아직 주님과 온전히 합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흥분해야 할 때 차분하려고 노력하고, 주님을 위해 잠잠하고 인내해야 할 때 앞서 나가 흥분하여 화를 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은 주님을 닮은 듯하여 주님께 가까이 나가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너무도 멀기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능력이 많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무식하고 둔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과 합해진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바로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 죄를 지은 다윗

이제 이야기를 많이 뛰어넘어서 다윗이 왕이 된 뒤에 일어난 사건 한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못지않게 너무나 유명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바로 다윗이 간음과 계획 살인이라는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군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서도 동침하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죄가 폭로될 것을 가리기 위하여 헷 족속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의 선봉으로 세워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과부가 된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음과 계획 살인은 율법에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이러한 죄를 위한 번제 헌물은 아예 항목이 없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위하여서는 도피성읍이라도 예비되어 있었지만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그 생명으로 죄 값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하는 자와 살인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 주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사울 왕은 간음이나 살인이 아니라 다만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제사를 본인이 직접 수행한 것과 모두 멸하라 하신 아말렉 족속 중 좋은 것들을 남겨놓은 죄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 더욱더 중한 죄를 지은 다윗은 어떻게 해서 계속해서 왕의 자리에 앉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의 보좌가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까지 얻게 되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다윗의 죄로 인하여 다윗의 집에서 간음과 살인과 반역이라는 일들로 다윗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범죄하기 이전과 같은 상태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까?

 

 

대언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가난하여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 없던 그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자기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윗은 흥분하며 일어나서 그 사람을 반드시 죽어야 하며 반드시 네 배로 갚아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나단이 대답합니다. "왕이 그 사람이니이다."

 

 

자신의 죄가 발각되었을 때 사울왕은 백성의 눈을 의식하여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였지만, 다윗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에 따라 내게 긍휼을 베푸시며 주의 친절한 긍휼의 풍성함에 따라 내 범법들을 지워 주소서.

6 보소서, 주께서는 속 부분에 있는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나로 하여금 은밀한 부분에 있는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14 오 하나님이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그리하시면 내 혀가 주의 의를 크게 노래하리이다.

16 주께서는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것을 드렸으리이다. 주께서는 번제 헌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갔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러저러한 행위들이나 기름진 번제물들을 가지고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되게 돌이키고 깊은 속에서부터 통회하며 다시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완전하게 회복하였습니다.

 

 

호세아 대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호 6:6).

주님은 죄를 지으면 희생물을 가져오고, 기계적으로 자백하고, 번제 헌물을 가져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죄에게 정복당하여 종노릇하며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속마음이 하나님과 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 다윗이 만난 하나님

이번 주 중고등부 학생들과도 공부했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만날 때에만 참되게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혼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혼자 먹는 것은 맛이 없고,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가 있어도 혼자 극장에 찾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무리 좋은 관광지가 있어도 혼자서 찾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며 어울리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지내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외로움과 허전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실된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기들은 엄마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청년들은 친구들과 즐기는 쾌락으로, 장년들은 돈과 명예와 자식들의 성공으로, 노인들은 손주들의 애교와 사람들의 존경으로... 허기지고 오그라든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노력하지만 블랙홀 같이 끊임없이 빨아드리는 요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되지도 채워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자신으로만 만족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웠던 무식하고 볼품없던 한 양치기 소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살아 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마음과 마음의 진솔한 교제,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오늘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것을 하면 벌하고 저것을 하면 상주는 계산이 빠른 컴퓨터 시스템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오늘 나의 마음에 찾아오시고 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다윗이 만난 하나님,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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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6.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요 21:15-17)

본문 : 요한복음 21장 15-17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15 ¶ 이처럼 그들이 먹은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요한복음 21장

이번 주일에는 중고등부 학생들과 진화론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진화론 공부를 마치면서 잠시 성경에 대하여 기초적으로 알아야할 상식을 공부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은 무엇이냐? 바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그렇다면 신약의 처음 네 권은 무엇이냐?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성경의 순서와 찾는 법을 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이 사복음서 모든 곳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탕자의 비유와 같이 누가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영광스럽게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말씀과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여주시고 또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기록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며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과 함께 끝나는 듯하더니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복음서의 맥락대로라면 이쯤에서 "아멘." 한마디만 더 나오고 끝맺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뒤에 이어지는 21장에서 "이 일들 후에"라고 시작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만약 요한복음마저 이렇게 끝났다면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고,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비통하게 울었던 베드로, 이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 우리는 잠시 사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 베드로가 만난 주님을 우리도 만나보기 원합니다.

 

 

 

** 첫 번째 만남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번째 만남은 요한복음 1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옆에 서 있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루를 함께 머무르며 좋은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41,4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1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내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그가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매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인즉 게바라 불리리라, 하셨는데 게바는 번역하면 돌이라.

저에게는 공식적인, 법적인 이름, legal name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는 로빈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베드로 역시 이러한 식으로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어릴 적부터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새로 붙여주신 게바란 이름은 아람어, 수리아어로 돌이란 의미이고, 이것을 그리스말, 헬라말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자기 형제 안드레를 통하여 처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자마자 "너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이제는 너를 게바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돌이라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메튜헨리는 성질이 급하고 난폭했던 베드로에게 돌 같고 반석같이 굳건하고 차분한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라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붙여주신 것이 아닌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에 사도행전 4장 13절 말씀을 읽으면서 무식하고 못 배웠다는 의미에서 "돌"이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이제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에 대해 즉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것을 알게 되고” 아하, 머리가 돌 같은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비상한 사람이 되는구나.

 

 

또 다른 한 심리학을 전공한 성경교사는 여러 가지 심리학적인 구분을 따라 베드로를 볼 때 베드로는 때로는 행동파이면서도 잘 바뀌지 않는 고집 세고 굳건한 사람이므로 그 특징을 살려 돌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실 때도 세 번, 부인할 때도 세 번, 다시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도 세 번, 사도행전에서 환상을 보여줄 때도 세 번, 이렇게 세 번씩은 해줘야 변하는 돌 같은 사람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볼 때 베드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출신이었고, 뱃사람이었던 만큼 때론 아주 거칠고 아주 적극적인 행동파이면서도 때론 쉽게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침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가서 하루 밤을 지내며 대화를 나눌 만큼 진리에 갈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 아니면 확신이 가지 않았는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뒤에도 다시 고기잡는 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 두 번째 만남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의 두 번째 만남은 마가복음 1장(16절부터)과 마태복음 4장(18절부터)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6-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6 이제 그분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더라.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즉시 그들이 자기들의 그물들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기를 했지만 아직 계속해서 어부로서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을 초청하십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안드레는 요한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지만, 베드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하시니 일단 하던 일을 멈추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그들 역시 배 안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아버지와 품꾼들을 배 안에 남겨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든 사람이 그 말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왕과 같이 권위 있는 분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부정한 영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시니이다!" 소리칠 때에 그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회당에서 나오셔서는 안드레와 시몬의 집을 방문하셔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초청하셔서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또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기까지 베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어떠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을까요? 처음에 자기 형제 안드레가 오더니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해서 한번 가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상상했던 메시아의 모습은 너무 눈부시고 아름다워서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모습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생 바다 위에서 태양과 파도와 싸워온 자기 못지않게 햇 빛에 그을린 예수님을 볼 때 베드로는 실망을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너를 돌이라 부르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안드레에게 "메시아 맞아?"하고 반문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장모와 가족들을 부양할 책임을 가지고 다만 열심히 고기잡이를 할 뿐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사람을 그물로 낚을 수도 없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는 일단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놀라고, 부정한 영이 예수님을 가르켜 하나님의 거룩한 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며 놀라고, 예수님의 한 말씀에 부정한 영이 나가는 것을 보며 놀란 베드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베드로의 집에 방문하셔서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인가? 또 이분은 도대체 왜 무식한 어부에 불과하고 죄 많은 나에게 이렇게 찾아오시는가?"

 

 

 

** 세 번째 만남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지만 여전히 어부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 번째 만남을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들으려는 백성들을 갈릴리 바닷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시고 바다로 조금 나아가도록 청하셔서 바닷가에 서있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베드로의 성격상 한 마리라도 잡혀야 직성이 풀릴텐데 끝내 못 잡았으니 상당히 피곤하고 기분이 나쁜 상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배 안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고 건성건성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신다기 보다 왠지 모르게 베드로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일부로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셨고 시몬 베드로를 배에 태운 채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말씀을 다 마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자"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이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 5:5)

아마도 안드레가 같이 배 안에 있었고 저기 멀리에는 친구였던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물을 한번 던져서 끌어당기는데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이봐! 야고보! 요한! 좀 도와줘!" 야고보와 요한이 능숙하고 신속하게 배를 몰고 와서 함께 물고기를 잡아 올립니다.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도 베드로와 함께 밤새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물을 끌어올려 양쪽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우니 얼마나 무거웠던지 배가 가라앉으려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갑자기 무릎을 꿇습니다. "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까 떠나세요! 나는 주님을 대면하여 대화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사람 잘못보신거 아닙니까? 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어부일 뿐 아니라 뱃사람이라 거칠고 죄 많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뭐라고 응답하셨을까요? "알아, 너 죄인인거 다 알아. 그래서 내가 너를 찾아온거야. 용서해주고 고쳐주려고. 이제부터 너는 나와 함께 사람을 낚아 구원하는 어부가 되는거야."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오해하기 때문에 주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얼마나 죄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르는 두 가지를 알려주기 원하시는데, 한 가지는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우리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교만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거칠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악하고 어리석고 둔한 사람인지 모를 때에만 교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과 계시를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기 원하시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크게 감사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의 빛 가운데 더 가까이 나아가서 자신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를 본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크게 감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죄 많은 자인지를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므로 주님께 합당치 못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베드로는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아시고도 자신을 찾아주시고 제자로 불러주신 의아하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

우리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듯이 돌이란 이름을 가진 베드로는 뭐든지 아주 분명하게 알고서야 넘어가는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꼭 나중에 따로 찾아와서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질문하는 제자가 베드로였습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하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건너 제자들에게 올 때에 정말 주님이시라면 자신을 바다 위를 건너오도록 불러달라고 요청한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다음날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보고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언급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실 때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장막을 셋을 짓겠다고 말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우리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 떠나가고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질문하셨을 때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엘리야다, 침례자 요한이 부활한 것이다, 예레미야다" 말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확신에 차서 고백했던 제자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수업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서 집중하여 듣고 집에 가서는 예습복습을 철저히 하는 훌륭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였고 이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시고 왕이 되실 때에 자기도 열두 보좌 중 한자리를 맡아서 통치할 영광을 그리며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에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사모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꾸짖기까지 하면서 소리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호통을 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람의 아들이 배반을 당해 넘겨지실 것과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일으켜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큰 소리로 예수님을 만류할 수 없게 된 베드로는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하시려는 일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배반당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나만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도 실족하지도 않으리라. 주님이 죽으셔야 한다면 나도 같이 죽으리라." 아주 비장하게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들은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주여, 내가 주와 함께 감옥에도 죽는 데에도 갈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 날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안다는 것을 세 번 부인하리라."

 

 

 

** 베드로의 실패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모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셨고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집회장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사람들이 앉은 곳에 함께 앉았습니다. 어떤 하녀가 베드로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헛기침을 하며 "새벽날씨가 쌀쌀하지요?" 한마디 건넵니다. 하녀는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에이 이 여자가, 나는 그 사람 누군지도 몰라." 말하며 자리를 일어납니다.

 

 

자리를 떠나 현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또 다른 사람이 "너도 그들과 한패지."라고 묻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난 아니야." 이제 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지 궁금하고 걱정되던 베드로, 또 두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충격을 받은 베드로, 지금 베드로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초조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아주 자신 있게 단언하면서 말합니다. "너 갈릴리 사람이고 또 말투도 들어보니까 딱 예수님과 한패 맞잖아!" "아 진짜 내가 맹세한다 맹세해! 내 말이 틀리면 내가 저주받는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 "꼬끼오"

 

 

누가복음 22장 말씀 60-62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60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가 아직 말할 때에 즉시 수탉이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62 나가서 비통하게 우니라.

이때 주님은 어떠한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셨을까요? "너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해?"하면서 째려보셨을까요? "거봐 내 말이 맞았지? 역시 넌 안돼."하면서 비웃는 눈빛으로 보셨을까요? "그래도 널 가장 믿었는데, 실망이야 베드로"하는 실망의 눈빛이었을까요?

 

 

베드로와 마주친 주님의 눈빛은 여느 때와 똑같이 베드로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온유한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고,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돌이킨 뒤에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과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렇게 죄 많고 자격이 없던 나를 불러주셨던 주님인데, 내가 이렇게 저주하며 맹세하며 예수님을 배반하다니! 나는 정말 더럽고 가증한 사람이로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죄인이로구나. 이 세상 그 누가 나만큼 죄인일 수 있을까! 이제 주님을 다시 볼 수 없을거야. 난 더 이상 제자가 될 자격이 없어." 주님이 알고 계셨던 베드로의 모습을 베드로는 이제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 부활하신 주님

이제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려고 준비했던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갈릴리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자기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베드로를 위하여 특별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라고 하시며 베드로를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이 소식을 들은 요한과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와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평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특별히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의 믿음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특별히 무대를 설정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 만나기는 했으나 예수님이 안 계신 지금 딱히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던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너도나도 덩달아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너무 오랜만에 그물을 던진 것인지 밤새도록 잡아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이제 아침이 되었고 바닷가에 한 사람이 서있습니다. "이보시오, 물고기 좀 잡았소이까?" "못 잡았는데요?!" "배 오른편에 던져보시오!"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주님인 것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 외치자 그물을 끌어올리던 베드로는 어부의 덧옷을 걸치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배 위로 끌어올리기를 포기하고 배와 그물을 함께 바닷가로 끌고 옵니다. 밤새 고기를 못 잡았다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잡은 상황은 베드로가 주님 앞에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하며 엎드릴 때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세 번째 만났을 때 벌어진 일인데, 지금 이 일 역시 부활하신 주님과 세 번째로 만나는 상황입니다. 이번에도 주님은 똑같은 무대를 설정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생쥐같이 추운 새벽바다에 흠뻑 젖은 베드로는 물고기와 빵이 놓여있는 숯불과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숯불을 바라보는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던 날 밤에 앉아서 불을 쬐던 모습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느라 고생한 제자들과 함께 빵과 생선을 구워 배불리 먹여주십니다.

 

 

이제 주님이 말문을 여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부르셨던 그 이름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만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 나의 부족함, 나의 문제,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다가도 누군가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넘어질지 어떻게 실패할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참되게 만나게 된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이 죄냐 아니냐, 큰 죄냐, 어디까지 지켜야하는 의무이냐를 따지고 계산하는 차원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베드로를 먼저 찾아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매순간 방문하십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많은 물고기로 채워질 수 없듯이 오늘의 우리의 삶도 주님 외에 그 무엇으로도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사랑하신 주님, 실패하고 넘어져도 여전히 변함없이 찾아와 주시는 주님을 더 많이 만나기 원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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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2.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바울이 만난 하나님(행 17:22-28)

본문 : 사도행전 17장 22-28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22 ¶ 그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23 내가 지나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글이 있는 제단을 발견하였나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라.

26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27 이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28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라. 너희의 시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도 이르되, 우리 또한 그분의 후손이라, 하였나니

오늘 저는 “바울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에 오게 된 사도바울은 이 도시가 온통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고 너무나 애통해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이르러서 사도바울은 마르스 언덕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경배하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말씀이 구원받지 않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하나님, 또는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던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오늘 이렇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사도바울 역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자신이 먼저 만나고 알게 된 하나님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게 된 하나님, 바울이 만났던 하나님을 우리도 알게 되기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저번에 함께 아브라함 이야기를 살펴본 것과 같이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겉에서 바울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고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 바울이 자라난 배경

먼저 우리는 바울이 참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오해했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이 직접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21장 37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얻어맞고 있을 때 로마군의 한 총대장이 와서 바울을 구출하며 나눈 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37 바울이 성채 안으로 끌려 들어갈 때에 총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해도 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네가 그리스말을 하느냐?

38 너는 이전에 소동을 일으켜 살인자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간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니냐? 하거늘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 출신의 유대인으로 결코 미천하지 않은 도시의 시민이니 간청하건대 내가 백성에게 말하도록 허락하라, 하매

 

 

사도바울은 자신의 출생지에 대하여, 결코 미천하지 않은,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다소라는 도시는 뛰어난 철학자들을 배출하여 지적 문화의 일대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다소 출신의 많은 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로마에 가서 많은 지식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다소는 길리기아 평야에서 나오는 아마, 염소털, 모직물 등의 특산물로 인해서 부유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들거나 천막을 제조하는 수공업이 잘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결코 미천하지 않은 길리기아의 다소 시라고 말할 때는 별 볼일 없는 작은 도시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아주 발달된 도시인 다소 시"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22장 1절부터 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사람들아, 형제들아, 아버지들아, 내가 이제 너희에게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2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그들이 듣고 더욱 잠잠하거늘 그가 이르되,)

3 진실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의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으되 이 도시에서 가말리엘의 발밑에서 자라며 조상들의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가르침을 받았고 이 날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을 향해 열심이었노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말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말에도 능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히브리말을 잘한 정도가 아니라 다소 출신이면서도 어릴 적부터 예루살렘으로 와서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아주 뛰어난 율법박사 밑에서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교육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또 한 장 넘겨서 24절부터 2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4 총대장이 그를 성채 안으로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그들이 무슨 까닭으로 그에게 소리 지르는지 알려고 그를 채찍질해서 심문하라고 명하니라.

25 그들이 가죽 끈으로 그를 묶으니 바울이 곁에 서 있던 백부장에게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인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하는 것이 법에 맞느냐? 하매

26 백부장이 그 말을 듣고 총대장에게 가서 전하여 이르되, 대장님이 행하시는 일에 주의하소서.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이니이다, 하니

27 이에 총대장이 와서 그에게 이르되, 내게 말하라. 네가 로마 사람이냐? 하매 그가 이르되, 그러하다, 하거늘

28 총대장이 응답하되,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이 자유를 얻었노라, 하니 바울이 이르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자니라, 하니라.

29 이에 그를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즉시 그에게서 물러가고 총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을 알고는 자기가 그를 결박하였으므로 두려워하니라.

총대장은 로마 시민이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다른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

5 나는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에 관한 한 교회를 핍박하였고 율법에 있는 의에 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가지고 사도바울이 성장한 가정환경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쉽게 말해 자수성가하신 분들입니다. 바울의 부모님이 살고 있던 시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계를 제패한 철의 로마제국이 유대민족을 압제하며 억압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를 얻고자 수많은 피를 뿌렸습니다. 몇몇 동족들은 세리가 되고,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자기 삶을 안락하게 꾸려나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왔던 바울의 부모님은 결코 그러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대 땅 어느 곳에 살고 있던 바울의 부모님은 로마의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다소 시로 이사를 갑니다. 떠듬거리는 그리스말로 정보를 알아보며 새로운 땅에 정착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로마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하지 못하는 치열한 사투와도 같았습니다. 때로는 유대인 동족들로부터 민족을 배반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밤낮 쉼 없이 천막을 깁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악당 같은 세리들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내 바울의 부모님은 많은 돈을 들여 로마 시민권을 사게 되었고, 이제 로마 시민으로서 당당하게 가정을 세워나갔을 것입니다. 자, 이제 바울이 태어납니다. 바울의 부모님은 베냐민 지파로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그 위대한 왕의 이름으로 따라 자신의 아들을 "사울"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부모님이 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아들 사울이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주었고, 당시 다소 시에서 배울 수 있었던 철학과 헬라의 모든 발전된 문화와 지식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조기유학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가말리엘이라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모를리 없는 랍비 중의 랍비 밑에서 높은 학비를 지불하며 철저하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울의 아버지는 바울에게 지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혼자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천막 깁는 기술까지 가르쳤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을 가지고 대략 이렇게 그림을 그려볼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 성장하였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수성가하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고 요구 당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랍비 중의 랍비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서도 늘 높은 기준을 제시받으며 그것을 이루고자 치열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 해내면 모두가 나를 칭찬해 줄거야. 여기까지 해내면 모두가 나를 인정해 줄거야."

 

 

그러나 이렇게 요구받고 성취해내고 또 다시 요구를 받는 사도바울의 삶에서는 어떠한 쉼도 안식도 만족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사회적 신분으로 보나 학벌로 보나 그 무엇으로 보아도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었던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유명하고 촉망받는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다시 사람들의 기대라고 이름 지어진 더욱더 높고 무거운 요구에 억눌려 그것을 이겨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년 사울이 지금까지 알아온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위대하셔서 그 기준을 맞춰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든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에 의로 말하자면 흠이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따라가도 만족시켜 드리기 힘든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무한히 요구하시는 하나님, 끝없는 기준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 바울의 회심

사울은 어느새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앞장서 있습니다.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치열하게 따라갔던 사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섭고 엄격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죽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고문을 해서라도 그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도록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당신을 섬기고 내 모든 것을 드리는데 나는 왜 만족이 없을까요? 왜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할까요?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누구보다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했던 사울의 마음 속에는 누구보다 큰 공허와 메마름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거짓 증인들 때문에 잡혀 와서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사울은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러한 자들은 다 죽이는 것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하였고 공회에 앉아있던 모든 자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다가 분을 참지 못해 그를 도시 밖으로 끌고가 내 던지며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던 스데반은 죽는 그 순간에도 흐트러짐 없이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모든 증인들은 하나같이 촉망받는 공회의 젊은이 사울 앞에 옷을 모아둡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얼굴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스데반이 죽으면서 외친 말은 더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맞다면 그는 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으로 벌할 것을 기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는 그렇게 죽는 순간에서조차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었는가?"

 

 

스데반의 천사와 같은 얼굴은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겉으로는 아무 열매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이 사울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의 요구와 율법의 기준과 사람들의 칭찬과 기대로 인하여 너무나 억눌리고 메마르고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더욱 강하게 일어서고자 다마스쿠스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다 잡아올 수 있도록 편지를 요청합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는 안돼. 사울! 여태까지 잘 해왔잖아! 그러한 평안 따위는 다 잊어버려. 나는 사람을 섬기는게 아니라 끝없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려면 더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수밖에 없는거야. 스데반 그 사람은 자기 맘대로 사니까 평안해 보인 것 뿐이야. 흔들릴 필요 없어."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가운데 태양 빛보다 더욱 밝은 한 줄기 빛이 사울 위에 둘러 비춥니다. 사울은 즉시 눈이 멀어 땅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그가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울은 만약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자기는 즉결 심판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예수님은 사울에게 "너 이놈, 내가 보자보자 하니까 아주 끝이 없구나. 다마스쿠스까지 가서 내게 반역하려느냐?"하면서 혼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울을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너는 지금 가시 채를 걷어차고 있구나. 걷어차는 네 발이 더 아프지 않느냐? 사울아 너가 그렇게 길을 가면 갈수록 너의 마음에 더 큰 갈급함이 있고 메마름이 있구나."하시며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 바울이 만난 하나님

이렇게 해서 바울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17장 24-27절을 보시겠습니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이라.

26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27 이것은 그들이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그분은 우리 각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하니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은 책상에서 공부해서 알아낸 하나님이 아닙니다. 직접 바울에게 방문하시고 만나주시고 교제하여 주셔서 알게 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지금 바울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참되게 만난 하나님은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알아오던 하나님, 알지 못하는 신으로서의 하나님은 엄격하고 늘 요구하며 높은 기준에 이를 때까지 다그치고 책망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풍족하신 하나님,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전에 알던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멀리 계셔서 감히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두려운 분이었으나, 바울이 새롭게 만난 하나님은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두 눈을 다 감고 더듬어서라도 찾기 원하면 만나주시고 발견되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15 이것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1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 안에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

 

 

또 디모데후서에서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나도 이 일들로 고난을 당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알며 또 내가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 맡긴 것을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노라.

 

 

우리는 오늘 어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떠한 모습과 상관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날마다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엄격하고 무서운 주인과 같이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고 맡기지 않는 곳에서 찾고자 하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이 만나고 알게된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요, 오래 참으심의 하나님이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채워주시는 풍성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을 더 만나고 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따라 영향을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손해를 당하셔서 분노하시고, 또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분을 섬기면 도움을 받아 기뻐하시는 그러한 하나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한 행동이 그분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욥기 35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5 하늘들을 바라보고 살펴보라. 그대보다 더 높은 구름들을 바라보라.

6 그대가 죄를 지은들 그분을 대적하여 무슨 일을 하겠느냐? 혹은 그대의 범법이 많다 한들 그대가 그분께 무슨 일을 하겠느냐?

7 그대가 의로운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겠느냐? 혹은 그분께서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그대의 사악함은 그대 같은 사람이나 해칠 것이요, 그대의 의는 사람의 아들이나 유익하게 하리라.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며 스스로 만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시며 무엇을 요구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좋은 것들을 더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자하며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친밀하고도 깊은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입니까?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복음도 전파하고 교회에서 성도들도 섬겨야하고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수고는 요구받고 기준을 제시받아서 힘겹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과 더 친밀한 교제로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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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모르면 누릴 수 없는 선물들(고전 12:1,12-17)

본문 : 고린도전서 12장 1절, 12-27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입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2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다음으로 12-27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2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요 여러 지체이니라.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16 만일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아니한다, 하면 이런 이유로 그것이 몸에 속하지 아니하느냐?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냐?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곧 그것들 각각을 몸 안에 두셨느니라.

19 만일 그것들이 다 한 지체라면 몸은 어디 있느냐?

20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많은 지체이나 그럼에도 오직 한 몸이라.

21 눈이 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며 또 머리가 발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그 지체들이 더욱 더 필요하고

23 또한 우리가 덜 귀한 것으로 여기는 몸의 그 지체들 곧 이것들에게 우리가 귀한 것을 더 풍성히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은 아름다운 것을 더 풍성히 얻나니

24 우리의 아름다운 부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몸을 다 같이 고르게 하사 부족한 그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풍성히 주셨으니

25 이것은 몸 안에 분쟁이 없게 하고 오직 지체들이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26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존귀를 얻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과 함께 기뻐하느니라.

27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

오늘 저는 "모르면 누릴 수 없는 선물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우리교회는 현재 "교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올 준비를 하면서 여러 홈페이지를 돌아다녀 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나가서 외국 친구들을 사귀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유학생이 중국, 일본, 캐나다, 멕시코 등등 여러 나라의 룸메이트들과 함께 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다같이 모여서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서로 자기 나라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친구들이 갑자기 가만히 듣고 있던 이 유학생에게 "한국에 대해서도 자랑해 보라"고 물었습니다. 이 유학생은 88올림픽, 2002월드컵 외에는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자기 자신을 보며 부끄러워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누군가가 자기 나라, 자기 민족, 또는 자기 학교, 자기 집안과 같이 자기 자신이 속해있는 단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그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를 모르고, 우리가 어떤 교회의 모습을 이루려하는지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크고 중요한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이 "교회"라는 주제 또한 너무나 크고 방대해서 한 두 번의 설교로는 다 설명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대표해서 "교회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 교회라는 주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하나님, 교회는 언제부터 계획하신 건가요? 이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 또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좀 그러니까 그냥 모아 놓으신거죠?"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를 보여주시며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계획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의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여 이 세상에 비춰주는 교회의 모습을 저 우주의 태양 빛을 반사하여 지구 위에 비추는 달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에베소서를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교회에 대한 놀라운 말씀들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림을, 저 오래 전에 아담이 이브를 얻기 위해 죽음의 잠을 통과했던 것으로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지어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은 이브의 죄를 씻거나, 이브를 구원하기 위해서 잠든 것이 아니라 오직 이브를 얻기 위해서 죽음의 잠을 통과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면으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우리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짊어지시려고 죽으셨지만, 그 뿐만 아니라 아담이 이브를 얻기 위해 죽음의 잠을 통과한 것처럼,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얻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은 빨리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당신을 구원하신 주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 너무 재밌는게 많아서 빨리 가기는 아쉽지요?"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을 보여주며 "내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자살을 하여서라도 주님께 가는 것이 훨씬 좋지만, 나는 지금 교회를 위해 이 땅에 남아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원래 주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당신을 부르셨는데, 아무래도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야 되니까 교회를 세워서 사람들을 모은 것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여주며 "아닙니다. 나는 나 스스로 천막을 만들어 생활을 유지하며, 그렇게 번 돈을 교회를 위해 다 소비할지라도 나는 교회를 세워야만 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아주 많은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목자를 따르는 양떼와 같고,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는 군대와 같으며, 신랑을 기다리는 순결한 신부 같고, 태양 빛을 받아 비추는 달과 같으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과 같고, 진리를 지탱하고 떠받치는 기둥과 같고, 약하고 병든 자들이 치유 받는 병원과 같으며,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 일깨움을 받고 배우는 학교와 같고, 부모 없는 고아같이 방황하며 헤매는 자들을 돌보는 아버지 집과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터뷰에 대답하신 것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만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또 사도 바울이 인터뷰에 대답한 것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만큼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이 땅에 살아남아 있는 목적이라고 말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의 장자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음식과 바꾸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 있는 교회를 알지 못한다면 당장 눈앞에 직면한 나의 정당성과 나의 만족을 얻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다 희생해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나는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하셨지만 각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알고 믿음으로 영접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영적 선물들을 주셨지만 우리는 그 영적 선물들에 과하여 듣고 알고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영적 선물들"이란 바로 "은사들"을 말합니다. 4절부터 11절까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 이제 선물은 여러 가지나 같은 성령이시고

5 직무는 다르나 같은 주시며

6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이 계시되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병 고치는 선물들을,

10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타언어들 통역함을 주셨으나

11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는 아주 여러 가지의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선물들, 기적들, 대언함, 영들 분별함, 여러 종류의 타언어들, 타언들 통역함 등등 많은 종류의 선물들, 은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러한 성경 말씀을 읽으면 "영적 선물들에 관해 모르면 안된다고 했어"하면서 이 은사들의 항목에 대해서 집중하여 공부하려고 했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선물들... 이렇게 세어보니 항목들이 모두 9개구나. 로마서 12장에는 또 다른 항목들이 나왔는데 겹치는게 뭐뭐 있고 다른 것이 뭐뭐 있나 한번 찾아보자. 일단 여기에 나온 지혜의 말씀을 풀이해 보자면 영적으로 말씀을 잘 적용하여 지혜와 훈계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은사가 아닐까, 지식의 말씀이란 진리의 지식을 교리적으로 말씀을 잘 나누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믿음이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본적으로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그런 은사가 아닐까, 병 고치는 은사들은 초기 사도들 시대에는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진 은사이고... 등등등" 하면서 이 은사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암기하고 나면 영적 선물들에 관하여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공부가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선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를 향해서 "영적 은사들"에 관하여 알아야 한다고 말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4절부터 7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4 이제 선물은 여러 가지나 같은 성령이시고

5 직무는 다르나 같은 주시며

6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이 계시되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11-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이 모든 것은 같은 그 한 성령께서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 몸은 하나이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니라.

먼저 우리가 영적 선물들에 관해서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은 영적 선물들의 종류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다양한 선물을 주신 성령님, 주님, 하나님은 하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7절에 나온 것처럼 이렇게 각 사람에게 다양한 선물들을 주신 이유는 바로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11절을 보면 성령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선물들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이렇게 다양한 선물들을 가진 우리 한 명 한 명의 각 지체들이 모여서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각 개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27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 우리가 각각 떨어졌을 때는 한 지체이지만 다 같이 모였을 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지금 이 서신을 직접 받아서 읽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아주 뛰어난 지체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한 명 한 명 살펴볼 때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성경 지식이 아주 뛰어났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아주 열정적이었으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몹시 사모하였고, 여러 가지 필요한 일들을 능력 있게 처리하며 주님을 섬길 만한 은사와 재능을 가진 지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경쟁하며 자기를 높이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들이 주님이 주신 영적 선물들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판단하였고, 이제 우리가 읽은 12장에 이르러서는 영적 선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한 몸에 속한 지체들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지체는 눈의 역할을 하여 잘 볼 수 있고, 어떤 지체는 손의 기능을 하여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자매님은 귀의 역할을 하여 다른 이들의 고민을 잘 들어 줄 수도 있고, 또 어떤 형제님은 입의 역할을 하여 필요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기능들을 선물로 주신 목적이 바로 전체 몸 안에 속해 있는 지체들 모두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가령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잘 설명하는 형제님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제님에게 그러한 은사, 그러한 재능을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형제님에게 그러한 기능을 주신 목적은 스스로를 높이고 우쭐하며 잘 설명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섬기고 돕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 찬송을 아주 아름답게 부르는 자매님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매님에게 그러한 목소리와 재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다른 지체들 가운데는 음치도 있고 목소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매님에게 그러한 기능을 주신 목적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선물로 받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뽐내고 자랑하며 노래 못하는 지체들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러한 목소리로 주님을 찬양할 때 다른 지체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유익을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형제님은 꼼꼼하고 세심하여서 다른 지체들이 실수로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담대하여서 모두가 걱정하고 주저할 때 앞장서서 전진해 나가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다른 지체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동안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하는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표현과 나타남이 어떤 형태일 지라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러한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발의 기능을 주셨다면 나는 그 기능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교회에서 열심히 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눈의 기능을 받은 지체를 정죄하면서 "너는 맨날 눈만 꿈뻑꿈뻑 거리고 쳐다보기만 하면서 직접 걷는 법을 전혀 못 배웠구나!"라고 호통을 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의 기능을 하는 지체는 "자기는 맨날 엉뚱한 방향으로 쓸데없이 걸어다니면서, 제대로 볼 줄이나 아느냐!?"하고 반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한 지체에 불과하며, 우리는 이미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나를 높이고 다른 지체들을 업신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 다른 지체의 장점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몸 안의 모든 지체가 눈일 필요가 없고, 모든 지체가 손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기능들을 선물로 주신 것은 그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며 주님을 섬기도록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없는 다른 기능들을 다른 지체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그 지체로 하여금 나를 돕고 섬기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면에서 나는 섬김을 받고 그 선물들로 인하여 감사하며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기능은 몸을 위한 것이고, 다른 지체에게 있는 기능이 또한 교회를 위한 것이므로 우리 모두는 각자 지체로서 받은 선물들을 가지고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갑자기 그 동안 하던 일을 다 청산하고 하루 종일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 밀림 속에 들어가서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일이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지만 꼭 그렇게 크고 놀라운 일들 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속하게 하신 지역교회 안에서 한 명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입의 기능을 주셨다면 나는 입의 기능을 받은 그대로 역할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으면서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고 섬길 수 있도록 선물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공급받고 채움 받을 수 있도록 다른 지체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전에 저는 공익근무를 하면서 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때 사무실에서 작은 커피자판기를 새것으로 바꾸면서 그 전에 쓰던 커피자판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커피자판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달라고 해서 공짜로 얻어온 적이 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시청까지 오셔서 자판기를 받아 가셨고 깨끗이 씻고 작동이 잘 되는지 테스트를 해서 예배당에 잘 배치해 두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그런 일을 좋아하고 또 잘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토요일 날 모임을 가졌는데, 들어오는 성도님들마다 커피자판기를 보면서 어디서 났느냐고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또 다른 형제님이 서 계십니다. 그 형제님은 엔지니어이신데, 무엇을 설명하고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일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 형제님은 아예 커피자판기 옆에 서서 들어오는 성도님들이 궁금해 할 때마다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면서 전혀 짜증을 내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아주 즐겁게 모든 지체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 이거요, 승선형제가 시청에서 얻어온 거에요. 사무실에서 커피자판기를 새걸로 바꾸는데 이걸 어디에 처리할지 고민하는 걸 얻어왔다고 하더라구요. 커피 한번 드셔보세요. 여기 옆에 설탕이랑 프림 따로 있는데 더 넣어드세요."

 

주님을 섬기는 일은 어떤 거창하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상하실 섬김이란 뭔가 특별하고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속한 교회 안에서, 내가 오늘 속한 몸 안에서, 하나의 지체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해내며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며 보상하실 섬김인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이며, 내가 지체라면 나는 이미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선물은 한 면에서 내가 하나의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기능이고, 또 한 면에서는 다른 지체들이 가진 다양한 기능들이 또한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각자가 받은 선물을 조금씩 가지고 다 모였을 때 우리는 한 몸으로서 모든 기능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눈 혼자서는 보는 것만 할 수 있지만, 눈이 몸에 붙어있기 때문에 눈은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가 몸을 건강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데 한가지씩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여 주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선물들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선물들을 보며 서로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감사하고 누리며 섬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정말 기뻐하시는 교회로 발견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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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창 22:15-18)

본문 : 창세기 22장 15-18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15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간증과 함께 전했던 말씀인데, 먼저 저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되었고 또 한국에 갈보리 형제자매님들도 인상 깊게 들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기 와서도 이 말씀을 나누고 싶었었는데 오늘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아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창세기 22장 15절부터 1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15 ¶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였노라. 곧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즉 네 유일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서론

저는 한국의 갈보리침례교회에 있었을 때 약 5년가량, 어린이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말씀을 준비할 때는 가능하면 재미있게 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준비하게 되고 또 성경을 읽을 때 더 깊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보려고 시도하곤 했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자료들과 또 지혜를 주셔서 그렇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이 부분만을 다루지 않고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면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하던 것처럼 약간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성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재밌게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아브라함의 부족함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중에 하나였고 매우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사는 큰 가족 공동체 안에 있었고, 나름대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많은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라는 큰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성품을 조금 엿보자면, 그는 매우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면 아내를 버리거나 다른 아내를 얻어서 자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평생 자기 아내인 사라만을 사랑하고 아끼는 강직하고 자상하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봐, 저 양반 정말 좋은 사람인데 아들이 없는게 흠이야. 아들만 있으면 딱일텐데." 아브라함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캐나다에 보내놓고 아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저도 부모님만큼 그리워하진 못할지라도 부모님이 그립고, 또 가끔씩 갈보리교회에서 올려주는 찬양과 간증 mp3를 들으면 성도님들 얼굴이 아른아른 떠오르면서 그리운 마음이 커지곤 합니다. 우리는 정들고 사랑했던 누군가와 멀어지면 이렇게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누구와 떨어지고 그리워하기 이전부터, 원래 가지고 있는 허전함, 외로움, 상실감, 상처, 버림받은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별하고 잃어버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지게 된 허전함과 외로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무엇이든 이뤄보려고 몰두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실된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또 대가족 가운데서 시끌벅적하게 살았지만, 그 마음에 허전함이란 것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나에게 아들만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텐데. 내 인생이 더 이상 허전하지 않을텐데."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허전함을 허락하십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이 백 명의 자식을 낳고 또 여러 해를 살아 그의 햇수의 날들이 많을지라도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또 그가 묻히지도 못하면 내가 말하건대 유산된 자가 그보다 나으니라.”(전 6:3).

아브라함이 겉으로 백 명의 아들을 가진다 해도 그의 내면에 있는 그의 혼이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면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유산된 아기보다 못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이러한 갈증이 있습니다. "내가 아들만 가진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참되게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 자기 자신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고, 너의 자손에게 줄 땅이 있으니, 너의 씨에게 복을 줄 테니 너는 먼저 너가 정을 붙이고 사랑하며 관계하고 붙잡고 집착하던 모든 것, 너의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서 나오라."

 

지금 아브라함은 현재의 상태에서 아들만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만족할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아들을 줄테니 우선 그 만족하던 모든 상황을 떠나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이 많은 아브라함은 쉽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친구들과 정을 떼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가족들과는 정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가 죽기까지 머뭇머뭇하며 떠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죽은 형제인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나옵니다. 롯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으니 여차하면 조카인 롯을 자기 아들로 삼기 위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자,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는 제 고향과 친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나와 정들었던 사람들을 떠나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심이었어요.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하던지... 그렇지만 저에게 아들만 있다면 행복해 질거라 생각해서 꾹 참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제 아들을 주세요!"

 

 

** 위기와 은혜

이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때 바로 아들을 주셨다면 창세기는 10장 이상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는커녕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고 뭐고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물도 많고 곡식도 많았던 이집트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집트에 들어가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는 사람도 많고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사람도 많았는데, 이제 새로운 문명지 이집트에 들어가려니 막상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꾸미고 한평생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온 아내 사라를 파라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아무래도 파라오가 아름다운 사라를 보고 자기를 죽일 것이고 빼앗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졌고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살길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파라오에게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아들 하나 얻으려고 그 먼 길을 떠나왔고, 이제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데, 한평생 지조 있게 지켜온 아내마저 빼앗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신세입니까? 신이난 파라오는 사라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들과 종들을 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라리 아들 없이 그냥 고향에서 살 걸. 롯을 그냥 아들로 삼고 메소포타미아에 있을걸. 한평생을 정직하고 강직하게 살아온 내가 무서운 거짓말로 아내를 팔아 넘기고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 이제 내 인생은 끝이야... 아,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무엇이든 하실 수 있거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아들을 주신다던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길래 누가 너 롯을 데리고 나오래? 내가 고향과 친족을 다 떠나라고 했지? 왜 롯을 데리고 나왔어? 롯도 친족이야, 아니야?"하면서 다그쳐 묻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가나안 땅에 있으라고 했지 언제 이집트에 내려가라고 했어! 기근이 든거는 시험이야, 시험, 그 정도도 통과할 믿음이 없느냐? 너가 다 망쳐놓았으니 이제 너가 알아서 살아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 그리고 아내를 팔아 넘기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넌 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죄 값을 치르고 멸망하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세기 12장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12장 17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하여 파라오와 그의 집에 큰 재앙들로 재앙을 내리시매

거짓말은 누가 했습니까? 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네,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상상해 오던 하나님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고 강력하고 무서운 분이어서 한 가지 실수만 하더라도 책잡고 심판하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되 조건 없이 한없이 사랑하시며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를 신실하게 선하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전함과 버림받은 마음을 그러한 하나님 자신으로 채워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파라오는 아브라함 때문에 큰 재앙을 당했지만 아브라함을 감옥에 넣거나 해치지 않고 오히려 무사히 그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이상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다 망쳐놓은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잘못은 아브라함이 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여태까지 자기가 아들처럼 데리고 온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롯과 분리

창세기 13장 9절을 보십시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하니라.

이상한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떤 경우에도 롯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허전함과 상실감을 채워줄 수 있는 아들과 같은 유일한 존재인데 어떻게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양을 더 줬으면 줬지, 손해를 봤으면 봤지, 어떻게 아들 같은 조카를 떠나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아브라함은 이제 롯이 없어도 그렇게 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롯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노니 내게서 갈라서라. 나는 너가 나에게서 떠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버리라고 강요하시고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오해가 풀리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족한 만큼 우리의 허전함을 채워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끼고 다녔던 롯을 떠나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하나님,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 우리도 경험하기 원합니다.

 

 

** 방패이신 하나님

다 같이 창세기 15장을 보시겠습니다.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 이 일들 뒤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이 지내오며 내 집의 청지기는 다마스쿠스에서 온 이 엘리에셀이니이다, 하고

이 말씀은 아브람이 롯을 떠나보낸 뒤에, 롯이 거하던 소돔 땅에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롯을 구출해 온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전쟁은 가나안의 네 왕국과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이 벌인 것인데, 네 왕국 연합이 소돔을 포함한 다섯 왕국의 연합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훈련받은 종 318명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치고 롯을 구출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도와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들이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내가 너의 방패고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란다. 내가 너에게 정말 주려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나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주 하나님이여,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는 아이가 없사오며" 아브라함의 관심은 변함 없이 온통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약속하시고 또 짐승을 쪼갠 가운데를 혼자서 가로질러 가심으로 피의 언약까지 맺어주셨습니다.

 

 

** 또 실패

75세 때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10년 간 아들을 기다렸어도 얻지를 못했습니다. 답답해하던 아내 사라가 여종인 하갈을 아내로 주어서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고 99세 때 다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꿔주시고 할례의 언약을 주시면서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너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 하는 "이삭"이라 지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 번 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는 사라도 장막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으면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심정도 이랬을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10년 동안 기다렸다가 기다려도 안되니까 이스마엘을 낳고 지금 또 이스마엘이 13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들 소리하십니까? 그냥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주세요." 이 말은 이미 이스마엘이 다 컸다는 소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13살이 되면 성인식을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을 하나 주십니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파라오가 아비멜렉으로 바뀐 것 말고는 창세기 12장에 나왔던 내용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사라를 자기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속이고서 아비멜렉에게 넘겨줍니다. 사실 이 상황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마지막으로 정말 아들을 주시기 위해서 가장 기초적이고 쉬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75세 때 가나안 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나님께서 입학시험으로 주셨던 것인데, 이제 졸업할 때가 되어서 졸업시험으로 어려운거 안하시고 1학년 때 봤던 시험 그대로 내셨습니다. 그런데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75세 때 써냈던 답안지 그대로 적었습니다. 24년 동안 아브라함이 변했습니까? 믿음이 충만하고 굳세어지고 승리를 해야 될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1학년 때 봤던 시험문제를 아직까지 못 푸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하면 총 12년이고, 대학교 4년 석사 박사를 6년 잡아서 다 더해도 22년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24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믿음에 관한한 이제 박사학위를 딸만한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봤던 아주 기초적인 시험을 또 틀리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그래도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고향도 떠나왔고 롯도 내보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도 아들을 주실래야 주실 수가 없겠구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엎드려서 웃기나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이스마엘이나 낳더니만 이제는 가장 초보적인 시험에서 또 넘어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포기하실거야. 이 멍청이, 구제불능, 난 정말 가망이 없는 사람이구나. 나이만 먹었지 믿음이 하나도 안 자랐어. 이제는 사라도 완전히 잃어버린거야."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브라함이 아닌 아비멜렉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다 같이 창세기 2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찾아오셨고 또 주께서 친히 이르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수태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 정한 때에 늙은 나이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하나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인지 우리의 실패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항상 오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은 올바르고 흠이 없는 사람만 사랑하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패도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더 이상 상대해 주지 않으실거야."하면서 오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러한 오해를 풀어주기 원하십니다.

 

로마서 4장 22-2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23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이제 그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24 우리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을 믿을진대 그것을 의로 인정받을 우리도 위한 것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가 믿음이 좋았으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거야. 아 내가 얼마나 큰 결단으로 하나님을 따랐던지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을 주셨어야 마땅하지, 암."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는 이삭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 믿음의 시험

이제 우리는 우리가 처음 읽었던 창세기 22장에 이르렀습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줄 산들 중의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정말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도 아시고, 그가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게 보일 정도로 이상한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번제 헌물이란 것은 그를 칼로 찌르고 조각조각 잘라서 하나님 앞에 불태우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우상 신들도 그렇게 무서운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준비합니다. 아침 일찍 월드컵을 보려고 일어난 젊은이들처럼 일찍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준비물을 챙겨 모리아 땅으로 출발합니다. 얼마 전가지만 해도 초등학교 1학년 때 봤던 시험마저 틀렸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100점 만점을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걸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희생을 하고 헌신을 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옆에 아브라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 원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잠자리에 누운 아브라함은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시 밖에 나가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 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끌벅적하게 정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살았지만 너무나 허전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기근이 든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에 갔다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망칠 뻔한 무시무시한 거짓말을 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나오게 해주신 이상한 하나님을 떠올려 봅니다.

 

롯을 떠나보내고, 이스마엘을 낳고, 아비멜렉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라를 빼앗길 뻔한 모든 순간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아브라함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서 허전한 줄만 알았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고 만족하게 된 것을 발견합니다.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 헌물로 드릴지라도 여태까지 나에게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고자 다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귓가에는 "내가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너무나 행복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큰 결단과 희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한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만족했고 믿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쁘게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16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자신을 걸고 맹세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얻고 완전히 만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실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우리의 만족

오늘 우리의 마음이 허전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분주하게 세상의 여러 가지를 찾고 주목하고 집착하고 붙잡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찬사를 받아도,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다 짊어져도, 또는 아브라함의 소원이었던 것처럼 백 명의 자식을 가질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우리의 힘을 다 허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참되게 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서 55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오호 목마른 모든 자들아, 너희는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와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며 포도즙과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빵이 아닌 것을 위해 돈을 허비하느냐? 또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 내 말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라. 또 너희는 좋은 것을 먹고 너희 혼으로 하여금 스스로 기름진 것을 기뻐하게 할지어다.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베푼 확실한 긍휼이니라.

우리는 긍휼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번 만나지 말고 매순간 만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으로 완전히 만족될 때까지 그분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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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 1:1)

본문 : 요한복음 1장 1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집중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을 더 알고자 하여 샅샅이 찾아보고 외우고 필기하고 정리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군사로서 또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종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의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갈급하고 목마르며 허기진 양으로서, 갓난아기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꿀처럼 달고 너무 맛있어서 한번 듣고 읽었던 말씀, 내 안에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묵상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할까요? 학생처럼, 군사처럼, 종처럼, 또 양처럼, 갓난아기처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원래 설교를 훈련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 것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우리 서 목사님께서 그렇게 배우는 것이 설교를 훈련하는 입장이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유익하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바로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요?

 

1절을 보면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는 “그분께서”라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분에 의해”라는 것은 바로 “그 말씀에 의하여”라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서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그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5절은 그 분 안에, 즉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요, 빛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 나온 침례인 요한은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온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에 다시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도 문맥을 따라 계속해서 “He”라고 불리는 “그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11절에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분도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드디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읽고 묵상하는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불리신 우리 주님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원래의 이름은 바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 구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문맥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나타난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과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 "그 말씀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여기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여기서 우리가 영접한 분의 이름이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말씀”이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에서는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이름, 주께서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이름 중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다섯 군데만 성경을 함께 찾아서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6절을 볼 때 물과 피로 오신 분, 즉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언하는 분으로서 나타나실 때는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요? 다만 지식으로, 명령으로, 법칙으로 대하기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대하듯이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더 알기 원하는 사모함은 우리의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알기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는 다만 명령과 법칙을 대하면서 그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2. 현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한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까지 하늘에서 가지셨던 이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골로새서 1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2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비라는 것은 쉽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합니다. 26절을 보시면 이 신비는 여러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 곧 우리와 같이 더럽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29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이 일을 위해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그분의 활동에 따라 싸우며 수고하노라.”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속에는 "성령 충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수고와 애씀은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려고 풍선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압축기에 연결된 호스에서 버튼만 누르면 강력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바울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섬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속에는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거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바로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그리스도는 이상한 느낌이나 감정이나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바로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유익을 다 발견하자면 평생을 묵상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신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절과 7절의 앞부분을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4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은 4절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거하시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말씀이 거하시는 것을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태초부터 하늘에 거하셨던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안에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주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살아 계신 주 예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러한 주 예수님을 더 알게 되기 원합니다.

 

 

3.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이름 또한 “말씀”이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나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이 부분은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을 마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면,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오셔서 온 땅을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때 주 예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과 1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명백히 드러내시며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실 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시고 우리를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내시는 분은 바로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주 예수님의 이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에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접한 분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 원하십니다. 또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곧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이며, 말씀을 무시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시인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이며,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알거나 모르는 지식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키고 못 지키는 율법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태초부터 말씀이셨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거하시고, 앞으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실 살아 계신 주 예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또 우리 각 지체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살아 계신 주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무슨 지식을 알고 무엇을 잘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예언에 정통했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알았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많은 지식과 의로운 행실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역사와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목표와 소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친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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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3.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마 11:28-30)

본문 : 마태복음 11장 28-30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이라고 잡아봤는데,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염려해독제 투"입니다.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고 나서, 같은 주제로 반복하여 여러 말씀들을 살펴보면 좀 더 분명하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기 때문에 지난 주일날과 동일한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언급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잃어버린 혼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안식과 쉼에 대해서 설명하고 초청할 때 자주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 시작하는 말

저는 지난 목, 금요일에 트레이닝을 잘 받고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석기시대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 낮에는 이사를 잘 마치고 처음으로 새벽 1시까지 식당에 있었습니다. 12시가 넘으니 손님이 딱 2테이블에만 있었습니다. 한 테이블에는 저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옆 테이블을 청소하면서 우연히 그 청년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몇 억을 벌었다더라, 이렇게 하면 돈이 잘 벌리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을 많이 보다가 이렇게 나름대로 진지하게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까를 생각하는 청년들을 만나니 생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든 설령 돈을 많이 벌다 할지라도 그 길에는 참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청년들은 옆에서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제가 더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서 자랑하시기를 온 땅에 그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신 욥은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욥 5:7)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이집트의 모든 영화를 누리고, 광야에서 한 평생을 보낸 하나님의 사람 모세, 12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기력이 쇠하거나 눈이 흐리지 않았던 모세는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시 90:10)라고 말했습니다.

또 당시 온 땅에서 지극히 지혜롭고 영광스러워서 저 멀리 동방의 시바 여왕이 찾아와 직접 대면해보기를 원했던 솔로몬 왕은 “1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것을 세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도시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도록 앉아 있으며 고통의 빵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처럼 그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그의 모든 날은 슬픔이며 그의 해산의 고통은 괴로움이니라. 참으로 그의 마음이 밤에 안식을 얻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우리의 인생이 고생과 수고로 가득 찼으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헤매며 사람들 속에서 허덕이고 또 죄의 짐에 눌려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잃어버린 혼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거센 풍랑 속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수고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힌 수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 우리의 문제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이후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 안식과 쉼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다지 큰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죄인들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여러분 예수님께로 나아와 쉼을 얻으십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당신이야말로 쉼이 필요한 것 같군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참 안식과 쉼을 주시는 주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본문인 28절의 말씀대로 다 주님의 초청에 임하여 영원한 안식과 쉼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는 28절까지만 읽고는 "아멘!"하고 성경을 덮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곧 이어지는 29절과 30절까지도 "아멘!"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9절에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 결과로 우리가 우리 혼에 쉼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멍에와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로부터 배운다면 우리는 우리 혼에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멍에와 우리 자신의 짐을 지고 수고하며 지치고 걱정과 염려 속에 메말라가면서도 너무나 쉽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지고자 하지 않는데서 발생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모르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외적으로 돈이 없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기초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복음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다만 지옥에서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티켓 한 장이 아닙니다. 다만 죄가 있었는데 용서해줬다는 사면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물건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 개인에게 구원자요,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의 중심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식과 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 면에서는 맞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안식을 주시는 주님 자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자신, 내게로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내 짐을 메며 나를 따르고 내게서 배우고 내게서 쉼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걱정과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지치고 눌려있고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염려와 무거운 짐들 속에서 지치고 수고한 우리에게 참 안식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영접한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으로부터 배울 수만 있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 온유와 겸손

오늘 우리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이나 요세푸스의 역사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아주 작고 주목받지 못한 도시였습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만큼 아주 볼품 없는 빈민촌에 불과했습니다. 나사렛의 목수들은 자기 목공소를 가질 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고, 나사렛 주민들도 가구를 구입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의 목수들은 망치하나와 못 통을 들고 "문짝 고치세요. 식탁 고치세요."하고 외치며 갈릴리 주변을 돌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오십 세가 조금 안된 것으로 보일 만큼 태양에 그을리고 볼품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날 성화같은데 나오는 금발머리의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

가족들에게는 배척받고 고향에서는 거부당하고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심을 하거나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삼십 대 초반인데 오십 대로 보인 것 때문에 충격을 받고 외모에 대해 걱정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머리 둘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로 완전히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또한 주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외부의 여러 가지 환경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많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이러한 주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예수님이 가진 화평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보통 우리는 성격이 부드럽고 잘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라는 성품은 사람의 성품이 아닌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천성적으로 아무리 온유해 보여도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온 열매가 아니라면 결코 참된 온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를 가리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한 것을 정죄하고, 또 모세만이 선지자가 아니라 아론과 미리암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고 하면서 모세를 시기하고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이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잠잠하였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온유한지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속으로는 화가 나고 불타는데 겉으로만 참은 것일까요?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인식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겸손과도 연결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다른 사람의 평가와 눈치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만을 주목하게 해줍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며 겸손하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를 누리며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의 무거운 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시험과 걱정거리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항해 중에 자꾸만 파도가 달려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의 초청에 더 잘 응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해서 더 무겁게 짓누르시거나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강하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치고 수고한 만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만큼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울 왕으로부터 늘 도망 다녀야 했던 다윗, 자기 아들로부터 배반을 당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셨다는 이유만으로 만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과 친밀하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화평이란 외부의 걱정거리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배우고 알게 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이 나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 때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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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마 18:1-6)

2006.03.0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
본문 : 마 18:1-6,10,14

오늘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 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하매
2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


또한 10절과 14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0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오늘은 아마도 제가 캐나다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기대가 되고 또 큰 복이 있었는데 이번에 하는 설교가 형제, 자매님들을 오랫동안 떠나기 전에 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까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3.1절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주님에 대해 설교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또 요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영광이라는 단어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 말씀을 준비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도 귀에도 마음에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어떤 것일까, 모세가 간절히 보기를 사모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 바울이 세상의 쓰레기와 같이 되면서도 그러한 모든 고난이 가벼운 것은 그 영광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들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지난 5년 동안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작은 부담에 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리 다같이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어떤 말씀을 나눌지 다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기름 부어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
우리나라는 요즘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전처럼 결혼을 하고 자녀들을 낳아서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라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더 커졌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과 교육비의 부담 때문에 점점 아이들을 낳지 않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주님께서는 우리교회를 넘치게 축복하셔서 시끌벅적하고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하니 무엇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참 막막했습니다. 설교원고도 새로 써보고 성경본문도 바꿔보고... 나름대로 끙끙대다가 우선 가볍게 우리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일학교의 주제가인 “갈보리 어린이”라는 찬송을 보면 3절 마지막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한가지 소원 주님의 사람되는 것 더 많이많이 자라나서 섬기고 싶어요.” 이제 6학년이 된 창원이가 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 하루는 창원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아요.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창원이 어머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창원이가 대답하기를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학교에 원수 같은 친구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우선 창원이가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사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에, 또 창원이가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작게나마 소원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또 그 문제로 나름대로 깊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로마서 5장 10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원수였을 때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더 깊이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작년 여름, 가을 즈음에 아이들에게 카드 붐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올 때마다 카드를 한 뭉치씩 가져오곤 했습니다. 카드에 그려진 그림은 용과 괴물과 악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빼앗기도 하고 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제 4학년에 올라간 재선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재선이의 어머니께서 재선이에게 사도행전 19장에 예수님을 믿은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용을 가진 은 오만 개 어치나 되는 책들을 모두 불태운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그 카드를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선이는 그 당시 울면서 그 카드를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재선이의 생일이 되었을 때 한 친구가 다시 그 카드를 한 뭉치 선물한 것입니다. 그 때 재선이는 조금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 그 카드를 버렸습니다. 재선이 어머니는 재선이에게 왜 좋아하는 그 카드를 버렸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재선이는 대답하기를 “카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가잖아요.” 하였습니다.

재선이의 친구인 건주가 있습니다. 건주는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였는데, 마태복음 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씀을 읽은 건주는 정말 이 말씀이 진짜인지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건주에게는 한 친척형이 있는데 명절마다 그 형과 함께 노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평소에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먼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건주는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그 형과 만나서 놀게 해주세요.”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어느 날 건주가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할머니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형이 마침 그 집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명절도 아니었고 서로 시간을 맞춘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멀리 사는 그 친척형이 와있었던 것입니다. 건주의 어머니는 건주가 그렇게 기도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건주는 너무나 기쁘게 “제가 엄마한테도 말 안하고 정말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했는데 드러나게 응답해 주셨어요!”하면서 자랑하였습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주영이가 있습니다. 주영이는 불교를 믿는 외할머니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우 답답해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주영이는 손에 돌멩이 하나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내밀면서 “할머니, 할머니는 이런 돌한테 절을 한다는 말이에요?”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800년대 놀라운 부흥의 통로가 되었던 설교자 디엘 무디는 자신의 설교 이후에 한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아이가 헌신초청에 응답하여 앞에 나온 것을 보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한 사람 반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은 그 기도의 의미를 물었고, 디엘 무디는 대답하기를 “이 어른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많이 허비하여서 반밖에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이 아이는 아직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온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주보고 또 쉽게 지나치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깊고 진지한 생각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고자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한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어떻게 주님의 사람이 될까하는 고민이 있고, 카드가 너무나 좋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단호하게 버리려는 결심이 있고,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은밀히 기도하여 응답 받는 간증이 있고,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표현이 우리 눈에 유치해 보이고 우습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과 교제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가장 큰 자인지를 논쟁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이들을 잘 양육해서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실족시키고 길을 잃게 만드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실 정도로 주님은 우리 아이들을 앞길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 오늘날의 우상, 교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다니엘서에 예언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입니다(단 12:4).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물질과 쾌락 그리고 교육입니다. 이 세상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교육의 대열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모든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여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바로 사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시스템에 정복당하여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한 초등학생이 자살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학원을 조금만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육이라는 우상은 아이들을 바쁘고 지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안에도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영어를 잘 못하고, 수학을 못하고, 과학을 못하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것을 위해 돈을 쓰고 학원에도 보내지만, 자신의 자녀가 주님을 모르고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혼내기도 하고 답답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교회의 초등부 아이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한 달 동안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하거나 상식과 흥미를 위해 구입하는 책들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성경은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성경을 가져다 읽으라고 하는 것과 자기 소유의 성경,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기록된 내 성경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이들이 주님을 알아 가는 것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지 않습니까? 상식과 교양을 위하여 읽으라고 강요하는 책들은 너무나 많지만 성경을 읽으라고 말하는 소리는 너무나 작습니다.



**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오늘의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님은 어린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워놓고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바램일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 식어지리라”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심이 험악해졌다.”, “세상 살기 무서워졌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이 식어졌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대명사는 바로 부모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이 바로 사랑이 식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구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여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5년 간 아이들을 대하고 또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복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 라는 사실은 아이들이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옥이 있다는 것도 알뿐 아니라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뭔가 부족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아이 자신이 철저하게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죄인이라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아이들의 순수하고 열려있는 마음 속에도 복음이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나이를 먹는다고 자라나지도 않고, 몇 번의 성경공부로는 심어주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그를 사랑하는 자는 어릴 때에 그를 징계하느니라.”(잠 13:24).
“바로잡는 것을 아이에게 금하지 말라. 네가 그를 회초리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는 그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잠 23:13,14).

사랑이 식어진 오늘날은 자기 아이를 때리지 않습니다. 제 때에 징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배우지 못합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욕심을 부리고, 미워하고, 권위를 거슬러 마음대로 행동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얼마나 크게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죄인인지 인식할 수조차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철저하게 맞으면서 배운 아이들은 거짓말을 지적할 때 자신이 큰 죄인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다만 말로만 경고를 받고 타이르고 구슬리는 방식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그런 것을 별로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어떤 아이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혼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죄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할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으로 아이들을 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초리가 아이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지옥에서 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회초리를 아낀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며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현재 잘못된 것들을 고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더 멀리 본다면 그를 지옥에서 건지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제 때에,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잘못을 알려주고 징계하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구주 예수님을 찾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 아이들의 미래
우리 아이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아이들이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구원만 달랑 받고 자기 정욕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영원한 영광으로 기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목적이며 소망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이끌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저의 말을 듣고 배우기보다 저의 행동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따로 배우고,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만 적당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짓과 표정과 어조와 행동을 관찰하며 실제가 무엇인지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흡수하고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참되게 이끌 수가 없습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어른들은 눈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어머니께서 예배당에서 통성기도를 하시면서 아주 큰소리로 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보았는데, 그 때 저는 “엄마 왜 울어, 엄마 왜 울어, 울지마.” 하면서 마구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도 한 번씩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잘 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님들! 아이들 앞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많이 우십시오.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이야기를 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또 아이들에게 자기 전에 기도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지 삶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번 습관적으로 만나는 악세사리 같은 분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나를 인도하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기도요청
원래 저는 다니엘,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의 자녀들, 소년 다윗, 디모데 이런 성경 인물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할 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또 아이들이 유치한 것을 가지고 웃고 좋아할 때 어떻게 같이 웃어줘야 하는지,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하면서 쉽게 업신여기고 간과하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수요기도회입니다. 저는 기도요청을 하러 올라왔습니다.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한 어린 형제가 그 동안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섬기면서 힘들고 지치고 실패하고 부끄러웠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대하고 섬기면서 주님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이없어하고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다가도 이 아이들보다 더 심한 나를 오래 참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섬길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아이들에게 오직 주님의 사랑과 진리만을 전달하고자 했을 때 나의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나의 마음상태와 관계없이 언제라도 아이들을 기쁘게 대해야하는 섬김의 위치는 때로 부담스럽고 힘든 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잠시 다른 위치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주님이 다시 부르시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함께 주님을 알아 가는 이 귀한 자리를 사모하며 돌아오기 원합니다. 아이들에게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여러 가지 핑계로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축복하셔서 많은 아이들을 주셨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섬길 지체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섬김의 자리를 사모하여 헌신하며 감당할 지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이 온전히 주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또 아이들을 이끌어주며 함께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선생님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9장 13,14절을 다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13 ¶ 그때에 사람들이 그분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실 것을 바라며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거늘
14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주의 손(시 138:6-8)

2005.12.2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주의 손
본문 : 시편 138편 6-8절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시편 138편은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다”하는 말씀을 담고 있는 시편입니다.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6 주께서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은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버리지 마옵소서.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손”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지나고 있는데 이렇게 다친 것을 계기로 손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손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주의 손을 가까이 대하면서도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또 그것에 얼마나 감사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주의 손
우리는 성경에서 “주의 손”이라든지 “주의 오른손”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는 대부분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며,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붙잡는 것은 너무나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실 때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이집트 한가운데서 행할 나의 모든 이적들로 그 나라를 치리니 그 뒤에야 그가 너희를 가게 하리라.”(출 3:20).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모든 이적들이 하나님의 손을 내밀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통해 이러한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적을 주실 때에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고 모세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신 후에 “네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셨을 때 모세의 손에 나병이 생겼고 다시 한번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니 그것이 처음의 손과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쟁을 할 때 모세가 손을 올리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배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손이라는 단어만 주목해 보아도 성경에서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막대기는 죽어버린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모세의 손을 통해 살아있는 뱀이 되기도 하고, 이집트의 모든 풍요를 관장하는 여신이라 불리던 나일강을 피로 물든 죽음의 강으로 만들기도 하고, 거대한 홍해바다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늙고 기운이 빠진 모세, 마른 막대기와 같은 모세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다면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많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사무엘의 평생 동안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없었고,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엘리야는 아합의 수레를 앞질러 달려갔으며,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욥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 정금과 같이 연단되었고, 하나님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타국의 통치자들로부터 긍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 지으신 모든 창조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모든 역사들과 사도들 위에 임하신 주의 손의 권능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진리들로 인하여 전율할 것입니다.


** 구원의 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28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29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능히 그들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30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라.”
(요 10:28-30).

우리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의 팔로 붙잡아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 예수님의 손을 떠올릴 때 우리는 못 자국 난 손을 기억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으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님의 권능의 손은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영광과 사랑의 상처를 지닌 손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께 우리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주 예수님 자신을 주의 팔이요, 주의 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이는 그가 주 앞에서...”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여기는 “그가”라고 부른 주인공은 바로 “주의 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주의 팔”은 누구입니까? 권능과 능력의 주의 팔이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고운 모양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는 모습으로 이 땅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과 주의 팔을 언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주의 권능의 오른손이신 주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기 원합니다.


** 오른손을 다치고
5절에서는 원수들의 면전에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고,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시는 목자를 기록하고 있고, 6절에서는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가 승리하고, 주님 앞에서 잘 살 때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며 함께 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많으신 주님을 더욱 알아가며 참되게 따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식탁을 마련하시는 목자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주의 손을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어떻습니까? 성경에서는 주의 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떻게 주의 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되어가고 있는데 지금은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젓가락질도 하루 3번씩 꼬박꼬박 연습을 하니 지금은 밥풀도 집고 라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해졌습니다.

전에는 몰랐습니다. 오른손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손을 다치고 나서 집에 돌아온 뒤 처음 저녁식사를 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숟가락질도 젓가락질도 모두가 생소한 왼손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추하나를 풀고 끼워 넣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수할 때, 양치할 때... 기본적으로 생활하는 모든 것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던 열쇠와 핸드폰이 모두 왼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물건을 사기 위하여 지갑에서 돈을 꺼낼 때에도,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붙잡을 때에도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차라리 왼손이 다쳤더라면 조금 덜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문득 마태복음 6장에,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네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의 오른손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우 크고 작은 일들에 수고를 해왔습니다. 왼손으로 그 동안 오른손이 해왔던 많은 일을 해나가면서 오른손이 어떤 힘든 일을 해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조금 하다가 손에 쥐가 나려고 한 적도 있었고, 단추 하나를 끼지 못해 몇 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말 왼손으로서는 오른손의 수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못 자국 난 주님의 손을 볼 수는 없지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손의 역할을 감당하는 지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곧 그것들 각각을 몸 안에 두셨느니라”(고전 12:18).
우리 중 누구는 눈의 역할을 감당하고 우리 중 누구는 발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 중 누구는 손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지체들을 섬기고 있든지 우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손길은 바로 교회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책망하시며 징계하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안아주시며 품어주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손은 오늘날 우리 지체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주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처럼 오해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많은 지체들을 통하여 우리를 돌보시며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손길이 교회와 상관없이 임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께 긍휼을 얻고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으로 부르셔서 몸을 이루는 한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떠나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려는 모순 가운데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간과하며 쉽게 지나치는 형제자매들의 미소와 관심이 곧 우리와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만 왼손과 같이 그저 섬김을 받는 생활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오른손이 얼마나 큰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손이 다친 이후로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거나 해야 할 일을 발견할 때마다 저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오른손에 발동이 걸리는 바람에 의지적으로 그것을 멈추는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을 해왔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왼손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오른손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오른손이고 왼손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대로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왼손과 같이 알게 모르게 섬김을 받기만 하던 지체가 이제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지체들을 위해 주님의 일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오른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왼손인 사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손에 붙들린 사람의 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린 한 사람이 지은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힘입어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 소년, 죄를 범하고는 자신에게 제시된 세 가지 형벌 가운데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손에 떨어져 벌을 받고자 했던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손을 많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6 주께서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은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손에 붙들린 다윗은 겸손하게 주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주의 손을 붙들었으며, 주의 손이 자신을 완전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은 위풍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아닌 겸손하게 긍휼을 구하며 주의 오른손을 힘입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마른 막대기가 놀라운 기적들을 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우리의 가련한 인생은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 마무리하는 말
여러분 옆에 형제자매들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길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주님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여 낙담하거나 불평하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수고하는 지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왼손인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나를 위해 오른손의 역할을 끊임없이 해온 지체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주님의 손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한 지체들로 인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또 내가 오른손으로서 섬겨야할 지체들을 발견한다면 그것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그 지체들이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을 하나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훗날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왼손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다만 오른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임했던 인자하고 긍휼히 풍성한 주의 손을 기억하며 묵상하며 되새기며 오늘 내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손으로서 어떻게 섬겨야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 지체들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함께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4-40절까지 보시겠습니다.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세상의 창건 이후로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내게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 왔느니라, 하리니
37 그때에 그 의로운 자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하였나이까?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가 되신 것을 보고 받아들였나이까?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께 옷을 입혔나이까?
39 혹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께 갔나이까? 하리라.
40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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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딤후 3:13-17)/로빈

2005.03.0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본문 :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전체를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13절부터 17절까지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오늘 저는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저는 개인적으로 디모데전후서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 나온 것처럼 저도 디모데와 비슷하게 어린아이 때부터 성경 기록들을 배우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유언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청년 디모데를 위하여 기록된 것인데 특별히 청년인 저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의 영감성과 관련해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영감”이라는 단어가 단 2번 등장하는데, 한 곳은 욥기 32장 8절이고 또 한 곳은 바로 오늘의 본문인 16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마지막 날들의 위험함
먼저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또한 이것을 알라. 즉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6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7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 믿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빼앗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자들을 고문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그런 위험한 때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너무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곳에 열거된 모든 항목들이 바로 저와 이 세대에 정확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고 타고난 애정도 없으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고집이 세고 쾌락에 사로잡혀있는 이 시대의 흐름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은 다만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욱 사랑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흉내를 내지만 그 안에 참된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만연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배우는 것 같지만 결코 진리를 참되게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는 세대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8절,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그런데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나니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리니 이는 저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


성경은 입술과 모양으로만 경건하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을 가리켜 진리를 거역하는 자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주님을 향하여 뜨거웠고 어떻게 주님을 잘 따랐는지와 상관없이 오늘 주님을 참되게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얼마나 많은 지식정보를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이런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며 그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 교리의 목적
10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았으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 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기록들을 참되게 배우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교리, 즉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심과 믿음의 원칙과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이 교리를 참되게 받고 영접한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10절과 16절을 잘 비교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에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이 말씀을 10절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리를 참되게 받은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강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책망을 참되게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게 됩니다.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은 사람은 이제 의로 교육을 받습니다. 즉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 경건에 이르도록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을 거듭나게 하실 때 원래 계획하신 그 목적대로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바울과 같은 고난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성경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고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여서 자주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완벽하게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13절에 나온 것처럼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고 또 속임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항상 말씀을 배우니까,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면서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위험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
14절,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 각자에게,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서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쾌락을 따라 갈지라도, 이 세상 모든 믿는 이들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모양과 껍데기만 가질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의 의지와 결심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건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위험한 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9절에서 살펴본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있습니다. 이 성경 기록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살펴서 알고 또 이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굳게 붙잡는다면 이 말씀은 능히 우리를 지혜롭게 하여 이 타락하고 위선적인 시대에서 우리를 이끌어주고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마지막으로 16절, 17절을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단 한번뿐인 짧은 인생 가운데 저의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가망도 없는 자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악착같이 붙드는 믿음으로 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거대한 흐름에게 건짐을 받고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설교제목 그대로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입니다. 참으로 주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귀한 말씀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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