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1.26.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시험을 이기는 힘
본문 : 마태복음 4장 4절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4절 한 구절만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저는 “시험을 이기는 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세 번 모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말에는 “삼세판”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승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험과 정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에 사용된 표현인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는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심으로 말미암아 능히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완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더 많이 알고 만나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 본문 전반적인 설명
본문 1절은 “그때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장의 끝 부분과 이어지는 시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3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친히 음성을 내시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마치 욥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고 자랑하시는 말씀을 하신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된 것과 같이, 마태복음 3장에서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이 끝난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에 낙담하거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사랑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시험이 임하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금보다 귀한 단련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통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시험을 통과하시고 앞으로 사역하는 모든 일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사
2 밤낮으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고 그 뒤에 주리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광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또 스스로 마귀와 겨루어 볼 뜻을 품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싸움이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전쟁임을 명확히 보여주시고자 사십 일간의 금식을 통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힘을 약하게 하셨습니다.

 

** 첫 번째 시험
3,4을 읽어보겠습니다.
3 그 시험하는 자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 하거늘
4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시험하는 자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불과 사십여 일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귀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어 시험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배도 고픈 이때에 너의 능력을 좀 사용하여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해보라.”하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침례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고 선포한바 있습니다(마 3:9).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이 돌들로 빵을 만들 수 없겠습니까?

마귀의 요구는 어떤 사악한 죄를 저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빵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움직인다.”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임의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살고 계심을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 두 번째 시험
5절에서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이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거룩한 도시로 올라가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6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위험에 처하여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움직여서 예수님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해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예수님을 충동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시험에는 한 가지 위력이 더해졌는데 그것은 마귀가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는 “모든 길에서”라는 단어를 “언제라도”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답변은 “또 기록된바”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시험에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특정 부분의 말씀만이 아닌 모든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에게 편하고 좋은 말씀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또 기록된바”라는 표현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 세 번째 시험
8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8 마귀가 다시 그분을 데리고 심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그분께 보여 주며
9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매
10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여기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1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


성경의 대 주제는 왕국이며, 주인공은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머리이시며 왕이십니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사탄에게 넘어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되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죽음을 통과하여 영광으로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모두 통치하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 이전에 십자가를 견디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을 다스리는 마귀는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주고 그것을 순순히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음과 십자가를 통과할 필요 없이 쉽게 얻으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다만 딱 한번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얻으려했던 그 영광을 단 한 번의 타협으로 쉽게 가지라고 충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아, 너는 여기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다 이루실 때까지 가지신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친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므로 직접 무엇인가를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 기록된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절대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아무것도 임의로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움직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이것은 대언자 누구를 통해 기록된 것을 성취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칼로 말고의 귀를 쳐서 베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마 26:53,5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 24:44,45)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경의 기록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 결론
오늘 우리가 다 같이 읽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는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시내 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을 직접 듣고 너무나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가 대언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시내 산은 너무나 멀고 오늘날 그분은 직접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기록된바”, “또 기록된바”, “이는 기록된바”. 주님께서는 과거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들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심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해서입니까? 사십 일을 밤낮으로 굶어서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 지금 하나님께서 직접 입을 열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엄중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힘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소생시키고 오늘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주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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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가장 크신 주의 이름
본문 : 시편 138편 2절


오늘 저와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가장 크신 주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은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above"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주님의 모든 이름들보다 위에 있다고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호칭들, 닉네임, 또는 별명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만해도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름은 아니지만 주일학교 아이들은 저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교회 안에서는 다만 “형제”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아들아”하고 불리기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만 “친구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많은 호칭들이 저 한사람을 가리키면서도 각각 한 가지 특징들을 부각하여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15:15).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요 20:17).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너무나 중요한 표현들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호칭이 어떻게 죄인에서 의인으로, 불순종의 자녀들에서 순종의 자녀들로, 마귀의 자식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성경에 나타난 많은 주의 이름들
그러나 성경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름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 자신의 이름들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각각 주님의 어떠하신 특징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양, 반석, 방패, 망대, 요새, 전사, 주, 여호와,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 전능자, 위로자, 상담자, 영원하신 아버지, 부활의 첫 열매,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 목자, 참 포도나무, 부활, 생명, 길, 진리, 사랑, 생명의 빵, 임마누엘...

이러한 많은 이름들은 주님 한 분을 가리키면서도 각각의 단어가 서로 다른 면에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다만 미사여구나 장식을 위한 표현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잘 묘사해 주고 알려주는 귀한 단어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주님의 이름은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 전에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로 받은 사람의 아들이 되신 주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약에서 잃어버린 자를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다 같이 빌립보서 2장 6-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10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11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시키시고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토록 낮아지셨던, 그토록 비참하게 멸시를 받으셨던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시라 시인하여 영광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목을 곧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그 날에 예수님의 이름 앞에 완전히 굴복을 당하고 꺾임을 당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땅 아래, 곧 지옥에 있던 모든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하였던 자들도 그 날에는 수치 가운데 그분을 높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시라 시인하며 찬양한 우리들은 그 날에 수치를 당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분을 높이며 찬양할 것입니다.

 

**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신 이름 - 주의 말씀
그런데 오늘 함께 살펴본 시편 말씀에서는 주의 모든 이름들 위에 “주의 말씀”을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다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또는 기록되어 글로 적혀있는 말씀이라고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말씀”이라는 주의 이름에 대하여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들 중에서 가장 큰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가지셨던 이름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가지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때 나타내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잠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서신들 중에서 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물과 피로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 육체를 입고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언하실 때에는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계심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역시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주님을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보시면 계속해서 "그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절에 “그분께서”, 3절에 “그분에 의해”, “그분 없이”, 4절에 “그분 안에”, 10절에 “그분께서”, “그분에 의해”, 11절에 “그분께서”, “그분을”, 12절에 “그분을”, “그분의 이름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흐름에 따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절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그 이름, “예수님”을 떠올리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본문을 살펴본다면 “그분의 이름”은 문맥에 따라 일차적으로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함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 1:23).

이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심판하시며 전쟁을 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의 이름은 신실하신 이요 참되신 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16절에 보시면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왕들의 왕, 주들의 주라고 기록된 한 이름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그분의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12,13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나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여전히 가지고 계실 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 결론 -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은 틀린 것이 없는 완전하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알려고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이상한 믿음과 삶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만 지침서나 설명서가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참고서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잘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액세서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누리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배움과 위로를 얻고 책망을 받고 바로잡히고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들 중에서 주께서 가장 높고 크게 하신 이름이 바로 “주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바로 “주의 말씀”을 높이고 찬양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순간 동안 말씀을 가까이 하고 떠올리며 생각하며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님을 만나며 생각하며 사랑하는지가 판가름 될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우리들이 생명을 더 풍성히 얻기 위하여 날마다 영접하고 마음에 품어야할 주님의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날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읽고 탐구하며 연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더 사랑하며 찬양하며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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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30.금 갈보리침례교회 금요설교훈련 / 이승선(22세)

제목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본문 : 히브리서 3장 1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절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 서론
모든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들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나신, 가장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는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도록 우리를 지도해 주는 귀한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오늘 저는 많은 귀한 말씀들 가운데 한 구절인 히브리서 3장 1절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 거룩한 형제들아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를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수식어와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모두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단어들입니다. 원래 우리의 호칭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더럽고 가증한 자들아”,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아”, “진노의 자녀들아”, “불순종의 자녀들아”. 원래는 이렇게 불려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이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더럽고 추악한 죄로 찌들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하다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요 벌레에 불과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을 보시면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더럽고 수치스러운 죄 가운데 거하던 우리들을 친히 거룩히 구별하시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저명하고 높은 사람들 앞에서 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모른 척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형제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오늘의 본문은 또한 우리를 가리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들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했던 자들입니다(히 11:13,16). 우리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순례자”라는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힘이 없고 어려울 때 날 기다리는 밝은 곳,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또 이 땅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형체가 없이 사라질 것들을 알고 믿으며, 오직 영원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길을 나선 나그네요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순례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크리스천”이 갖가지 장애물들을 통과하여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너무나 좋고 영광스럽지만, 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좁고 협소하며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 다만 어떤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거룩한 형제들이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란 다만 무엇으로부터 분리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여 순례의 길을 더욱 전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우리들은 마땅히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오늘의 본문에서 힘주어 권면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의 흐름과 이어지는 가운데 결론적으로 오늘의 권면이 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권면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힘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계속하여 하늘의 부르심에 깊이 참여하여 전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는 무엇이십니까?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약의 첫 번째 사도가 있다면 열두 사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많은 무리들 가운데 제자들을 선별하시고,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을 구별하여 사도로 파송하신 우리 주님 자신이 먼저 사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최초의 사도이십니다. 그분은 높고 높은 영광이 가득한 하늘로부터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첫 번째 선교사이자 사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사도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7절에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라고 말씀하시고
2장 9절에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라고 말씀하시고
2장 10절 후반부에는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라고 기록하시고
18절에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고 어떻게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반복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여 고난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이 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저는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아프리카 가나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다투었던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 오히려 필리핀이나 태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가나는 말라리아의 위험도 있고 생활도 너무 불편합니다. 이곳은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같지가 않습니다. 가나만 말고 다른 나라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원래 하늘에서 살았다. 그런데 내가 나사렛에 와서 살았던 거 너 기억하니? 내가 너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 알고 있니?” 그때 그 선교사님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님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분명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면, 과거에 그분은 대언자요 사도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그분은 왕이요 통치자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레위의 혈통을 따른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히브리서 7장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포함한 히브리서 전체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계속해서 드려야만 하는 헌물을, 자신의 몸으로 드린 한 번의 헌물로써 우리의 속죄사역을 완전히 완성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 안에서 앉을 수 없고 계속해서 서서 섬겨야 하는데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히 9:11,12).

또한 히브리서 8장 1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말한 것들에 관한 요점은 이것이니 곧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이라.”라고 요점정리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 4:15).


** 결론
우리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하여졌고 형제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가 다시 하늘의 거룩한 곳으로 가셔서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걷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친히 자신을 낮추시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우리의 사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실 수 있는, 그러나 완전히 승리하신 대제사장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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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2세)

제목 :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
본문 : 로마서 8장 1-4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4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깊은 풍요로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제가 조금 맛본 것을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이 7장의 흐름을 이어받아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한 가지 법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 21절 앞부분을 잠시 보시면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실질적인 지체들을 죄의 법에게로 사로 잡아가는 아주 강력한 법칙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낙망과 정죄 속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5절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오늘의 본문 8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가장 무서운 정죄 -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오늘의 본문 1절 말씀에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정죄”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어서 하나님의 맹렬한 정죄와 심판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더럽고 가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으며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정죄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소자인 마귀의 고소와 우리 자신의 정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정죄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의롭고 영적인 율법의 말씀을 이루고 살아내고자 분투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더욱 죄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행하고자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없었습니다.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내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내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나? 도저히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나는 더욱 죄를 짓는구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가 완전히 거두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보다 더욱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를 거절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야 마는, 죄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는 우리가 행한 행위들로 인한 것을 넘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야 마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정죄입니다. 


**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어쩌면 매우 자주 이러한 정죄 가운데 빠져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직접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 안에 머무른다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맹렬한 정죄와 탄식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면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말씀은 바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에 주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아멘!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
3절과 4절은 우리를 어떻게 자유하게 하셨는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사역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정죄 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7장 12,14절에 나온 것처럼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 안에서 율법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즉시 죄와 사망을 만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루고자 시도할수록 계속해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성취하는 일은 육신이 연약하므로 할 수가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육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 법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결단하고 노력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 육신을 용도 폐기하심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아,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곧 내게 큰 권능을 주셔서 하게 하셨구나.”라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육신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셨습니다. 육신을 수리하고 부축하고 개발시켜서 능히 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육신의 모양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은 온 인류의 육신을 대표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정죄 받으실 때 그분은 나의 육신을 포함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용도 폐기될 때 나의 육신도 함께 용도 폐기되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 3:16)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육체를 용도 폐기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모든 육체를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정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정죄 받았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죄하는 우리 자신은 이미 주님과 함께 정죄 받고 죽었으며 폐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육체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육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3절에서 주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하였다면, 4절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은 “하셨느니라.”고 끝마치지만, 4절의 말씀은 “하려 하심이니라.”고 끝마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실이며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4절에서는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육신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고자 두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육신을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신 것이며, 하나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친히 그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거침이 되는 육체를 처리한 것이며, 이제는 권능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약하고 무능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절망과 정죄의 골짜기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나타나서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비라면, 성령님의 동행하심은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은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원하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음으로는 원하여도 실제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결론 - 성령님을 따라 걷는 우리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미세한 성령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주의하며 순종하여 걷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어떤 말이 붙어 있습니까?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다만 오순절 날 성령님이 임하신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다만 성령님을 받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여 걷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또 다른 이름은 성령행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온전히 걸어갔을 때 일어난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과 같은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데마는 성령님을 모시고도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사도바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님을 따라 걷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기를 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걷는 믿음의 실재를 가지기 원합니다. 다시 한 번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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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못 이루는 밤

과분한 환송회, 아이들과의 마지막 숨바꼭질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습니다. 알람시계를 잘 맞추고 나서 자려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색했던 이 방이 이제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루하루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길게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2주가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이곳의 모든 분들을 떠나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이 머리 속에서 스쳐지나갔습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또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일들을 해야할지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주여 저의 모든 여정을 형통하게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발걸음도 붙들어 주옵소서..."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 또 다시 감격 그리고 감사

아침 7시, 몽골의 하늘은 아직도 컴컴했습니다. 밖의 온도는 영하 5-7도라고 합니다. 조용히 허 형제님과 나갈 것을 예상하였는데 많은 자매님들과 일본 형제님들이 집 앞까지 나오셔서 잘 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근이, 경이, 주한이, 영산이는 공항까지 함께 가주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친절히 대하여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제가 머물렀던 건물이 있는 공장지대가 눈에 스쳤습니다. "주여, 저는 이들에게 준 것이 없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곳의 모든 분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그리움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음에 또 만날 날을 기다리며...





+ 5시간만 자고 일어난 7살 영산이

저학년 아이들의 성경공부 시간입니다. 아이들은 성경공부를 하기 전에 잠시 탱탱볼 축구를 합니다. 축구를 하고 잠시 영산이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제 몇 시에 잤느냐고 물으니 1시에 잤다고 대답을 합니다. 써오는 숙제와 외우는 숙제를 하느라고 1시까지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6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다른 가족들은 다 자는데 혼자서 1시까지 숙제를 열심히 한 것입니다. 영산이의 책임감과 성실함에 놀랐습니다. 7살 아이가 어머니의 감시(?)가 없이도 자신의 숙제를 책임지고 해낸 것입니다. 물론 숙제를 하지 않을 경우 벌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곳의 아이들은 자신에게 약간 벅찬감이 있는 모든 숙제를 해내고 있습니다. 확실히 모든 것이 훈련에 달려있습니다. 


+ 허 형제님과 농장을 방문하다

오전 8시 30분, 허 형제님과 함께 농장에 방문하였습니다. 차를 타고 약 30분 가량을 달렸습니다. 12만평의 넓은 농장이 나왔습니다. 비닐하우스가 많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겨울이라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몇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았습니다. 현재는 중국이 고향인 몽골인 가족이 머물면서 관리를 한다고 합니다. 원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되고 전도도 몇 번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곳 주변에는 소나 닭을 키우는 곳이 있어서 비료를 구하기가 쉽다고 합니다. 소와 닭의 분을 잘 섞어서 한 비닐하우스에 넣어두면 잘 발효가 된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중국인 농사꾼은 현재 중국으로 돌아가서 쉬고 계시다고 합니다. 나중에 일본인 형제님들이 성경번역을 완료하고 다 돌아가면 이곳 농장에 집을 짓고 살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소나 양도 키우면서 먹는 것을 직접 해결하는 것도 해볼 계획이라고 하십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현재 한국에서는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뭔가 대단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올 것처럼 기대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허 형제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냥 하면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제는 "방법과 모델이 없는 것"이지만 진짜 문제는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을 집에서 교육하는 것이든 전도를 하는 것이든 모두 방법에 길이 있지 않고 몸을 드려서 하는 데에 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생한 것은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직접 고생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는 좋은 모델과 방법을 찾지만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다가 힘들면 "이것은 원래 힘든 일이야."하고 또 도전하지 않고 "방법이 잘못되었나보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하면서 그만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산 갈보리교회가 전도하는 일이든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든 다만 시작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전도하는 일은 최대한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노아의 방주 연극 리허설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시던 러시아 선생님께서 건강상의 문제로 3개월간 쉬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부터 새로운 러시아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오늘은 러시아 선생님이 가시기 전에 아이들의 노아의 방주를 보고 싶다고 하셨나 봅니다. 아이들이 모두 다목적실에 모여서 노아의 방주 연극을 하였습니다. 옷도 실제로 하는 것처럼 꾸며 입었습니다. 모두들 대사의 막힘이 없이 유창하게 잘 하였습니다. 이제 이 아이들을 오랫동안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너무나 과분했던 환송회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이곳의 모든 분들이 모였습니다. 아이들은 정장을 입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빙 둘러앉았습니다. 오늘의 파티는 저를 환송하는 것과 이번에 새로 태어난 아기를 축하하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먼저 남자아이들이 일어났습니다. 종이에 한 글자씩 적어서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입영 축하드립니다!"라고 쓰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나이로 태어나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 번은 원래 곡으로 불렀고, 한 번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가사를 바꾸어서 불렀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제 여자아이들이 일어났습니다. 축복송을 불러주었습니다. 모두들 너무나 사랑스럽고 고마웠습니다.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아이들은 러시아어, 몽골어, 중국어, 영어, 한국어로 노래를 몇 곡 더 불렀습니다. 아이들의 노래가 끝난 후 아이스크림과 케익을 먹었습니다. 저는 근이 어머니께 부탁한 초코렛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원래는 제 돈으로 사야하는데 달러로 바꿔온 것이 모자라서 근이 어머니께서 사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혜였습니다. 아이들은 초코렛을 너무나 좋아하며 받았습니다. 뭐라도 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초코렛을 받으며 "아저씨! 마지막으로 숨바꼭질해요!"라고 말합니다. 내일은 몽골의 독립기념일이라 수업을 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오늘 늦게까지 놀 수 있다며 꼭 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도 흔쾌히 하자고 하였습니다. 



+ 마지막 숨바꼭질

파티를 마치고 모든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위해 모였습니다. 주용이는 열이 나고 아파서 누워있었습니다.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숨바꼭질을 시작하기 전에 한나가 와서 사진과 편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영이 예진이 소라가 또 편지를 주었습니다. 하나같이 "뭔가 드리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어요.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받아주세요."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나중에 방으로 돌아와서 편지를 읽는데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이기에 이런 감동을 주십니까...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꼭 기도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주여 이 사랑스러운 모든 아이들의 인생을 완전히 얻으셔서 장차 임할 왕국에서 다스리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귀한 아이들과 함께 놀아줄 수 있고 기쁨을 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아쉬운 숨바꼭질을 끝내고 헤어졌습니다. 주님이 또 허락하시면 나중에 또 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아이들과 전도도 나가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이 글을 적으며 이곳의 계신 분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저를 보면 미소를 지어주시던 분들... 또 이것저것 물어보시며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 또 여러 가지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 분들... 무엇보다 매일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시고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주신 허 형제님과 자매님...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들...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한국의 성도님들이 그리웠지만 이제 막상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그리워집니다. 주여, 이 모든 분들을 축복하시고 또 축복하소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또 사랑합니다.

+ 영산이의 생일선물

오늘은 허 형제님의 셋째 아들인 형우의 생일입니다. 형우는 이곳에 온지 1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오면서부터 생일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몽골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인 셈입니다. 어제는 형우 어머니께서 시장에서 케익을 사오셨습니다. 은이는 아침부터 케익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합니다. 원래는 아이들 생일마다 전체적으로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져서 가족끼리 파티를 한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영산이가 형우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봉지에 카드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카드는 영산이가 직접 만든 것이었습니다. 고양이 얼굴을 그려서 그 위에 색칠을 하였습니다. 얼굴을 펼치면 안에 편지글이 들어있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정성이 들어가 있는 카드였습니다. "형우형 생일 축하해. 형우형이 있어서 참 좋아. 영산이가"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선물을 뜯어보니 과자였습니다. 형우는 그 자리에서 뜯어서 모두 먹었습니다. 작은 선물이었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형우의 생일파티가 있습니다. 



+ 오전 내내 성경 읽기

오늘 오전에는 평소와 같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너무 바쁜 나머지 성경을 마음껏 읽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곳에서는 오전마다 성경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사무엘상하를 읽었습니다. 한나, 엘리 제사장, 사무엘, 사울, 다윗, 요나단, 암논, 압살롭, 요압, 므비보셋 등을 보면서 주님 앞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 울란바타르 전도

오늘도 역시 울란바타르 전도에 따라갔습니다. 계속해서 따라다닌 결과 몇 마디를 외우게 되었습니다. 가장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복음을 전할 때 처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북흄씩 부텔승 장훙보르닉 훙"이라는 말입니다. 그림이 창세기와 관련된 그림이어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의미로 대충 짐작하였습니다. 나중에 허 형제님께서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십니다."라는 의미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약 6-7집정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 것 같습니다. 담배를 피면서 복음을 듣는 할아버지, 자다가 일어나서 복음을 듣는 아주머니, 빨래를 하다가 복음을 듣는 아주머니, 게임을 하다가 중단하고 복음을 듣는 꼬마아이, TV를 보다가 복음을 듣는 여학생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주여, 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소서. 


+ 형우의 생일파티

오늘은 형우가 일년 내내 기다려온 생일날입니다. 아침부터 기분이 너무나 좋았던 형우는 드디어 기쁨이 최고조로 올랐습니다. 러시아방에 가보니 풍선과 그림으로 형우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식이 멋지게 치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직접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카드들을 모아서 작은 책처럼 엮어준 선물도 있습니다. 형우의 책상 위에 가보니 초코렛과 과자가 쌓여있습니다. 저도 어제 백화점에서 산 말의 모형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형우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이기 때문에 모두들 신경을 많이 써 준 것 같습니다. 오늘의 저녁식사는 치킨이었습니다. 형우 뿐만 아니라 경이와 은이도 흥분하였습니다. 형우 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치킨이었습니다. 굉장히 맛있고 큰 치킨이었습니다. 허 형제님께서 식사기도를 하실 때, "이제 형우가 한 살 더 먹은 만큼 더욱 성숙하고 부모님과 선생님께 순종하고, 형과 동생과 친구들을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녁식사 후에 가족들이 모여 평소와 같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몇몇 친구들을 불러왔습니다. 이제 케익을 자르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상위에는 케익과 직접 만드신 젤리와 바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젤리와 같은 것을 사기가 어렵기 때문에 거의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드신다고 합니다. 만두, 떡, 치킨, 젤리, 도우넛 등등을 모두 직접 만드십니다. 모두들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익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이들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 누가누구 동생이야?

이곳에는 허 형제님과 같이 고아들을 입양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몇몇 아이들은 형, 누나와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누가누구 동생인지 너무나 헷갈렸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해서 가족관계를 파악하였습니다. 아이들 모두 밝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저도 나이가 더 든 뒤에 기회가 된다면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여 양육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전에 허 형제님께서 보여주신 일본 형제님들이 출판하시는 잡지에서 자녀가 22명이나 되는 한 할아버지에 대해서 소개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폴 브로만 할아버지였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낳은 자녀가 약 1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입양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모두 집에서 가르쳤는데 모두들 주님의 제자로 잘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학교에 보내지 말고 집에서 가르칠 수 있다는 도전을 주는 글을 연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자녀를 양육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적어놓으셨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주님께서는 과부들의 하나님이시요, 아비 없는 자들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그러한 실제를 하나씩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받은 깊은 인상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이 버려놓은 아이를 입양하여 주님의 제자로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오전교제모임

오늘도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모든 분들이 둘러앉았습니다. 함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이번 주 수요일에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허 형제님께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하셔서 그 동안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표했습니다. 또 이곳의 사랑스러운 모든 아이들이 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화요일 밤에 파티를 열어주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음만으로도 너무 감사했습니다. 모든 광고가 끝나고 중국어로 말하시는 분들은 모두 위층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허 형제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간증을 몽골어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본 할아버지께서 아이들을 주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허 형제님께서 한국말로 통역해 주셨습니다. 


+ 분주한(?) 아이들

모든 교제모임이 끝나고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상과 의자를 배치하고 여자아이들은 음식을 가져다 나릅니다. 모든 식사를 맛있게 끝마친 뒤에는 뒷정리까지 도맡아 합니다. 남자아이들은 상과 의자를 창고로 가져갑니다. 여자아이들은 빗자루와 걸레로 바닥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대견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 근이와 박물관 관람


근이와 함께 박물관을 관람하였습니다. 역사 박물관은 오늘 마침 쉬는 날이어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대신 자연 박물관에 가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동물들이 박제로 되어있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여러 가지 벌레들과 공룡화석이었습니다.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큰 메뚜기가 있었습니다. 사막에 사는 몽골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을 때 그 메뚜기를 잡아서 먹는다고 합니다. 잡자마자 꼬리부분을 뜯어내고 쭉 빨아먹는다고 합니다. 징그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벌레방에는 다양한 종류의 벌레들을 박제로 만들어 놓았고 심지어는 벼룩까지 있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공룡화석도 보았는데 몽골에서는 이러한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진짜 뼈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선물 구입

근이 어머니께는 초코렛을 이미 부탁하였습니다. 이곳 아이들에게 줄 초코렛과 우리교회 아이들에게 줄 초코렛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근이와 백화점으로 갔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사람이 세운 백화점이 있는데 시설이 너무나 좋다고 합니다. 오늘은 원래 있던 몽골 백화점으로 갔습니다. 이 백화점은 한국사람이 세운 백화점 때문에 많은 위협(?)을 받다가 시설을 새것으로 교체하였다고 합니다. 근이의 도움으로 한국에 가져갈 선물들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이에게 햄버거나 맛있는 것 먹고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극구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곳 아이들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샀습니다. 확실히 우리나라보다는 가격이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근이와 함께 잘 돌아왔습니다. 


+ 아이들과 탱탱볼 축구

집으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어제 보던 비디오를 이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고 함께 맛있게 먹었습니다. 비디오를 다 보고 나서 아이들이 함께 놀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과 다목적실에서 함께 축구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주한이와 영산이만 하였지만 나중에는 더 많은 아이들이 함께 했습니다. 다목적실이 비좁을 정도로 북적북적 거리며 즐겁게(?) 공을 찼습니다. 이제 이 아이들과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벌써 정이 많이 들어버렸습니다. 주여, 이 아이들을 모두 축복하소서. 


+ 오늘도 어김없이 청소를

아이들은 정확하게 5시 30분이 되자 청소를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합니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걸레로 닦습니다. 책상과 의자 하나하나 다 닦습니다. 책상 속까지 다 닦습니다. 도중에 장난도 치지만 매우 열심히 청소합니다.

+ 몽골 도서관 방문

오늘은 영어 선생님과 근이와 다영이와 몽골 도서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립 도서관을 방문하였고 두 번째에는 시립 도서관을 방문하였습니다. 방문하는 곳마다 회원카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오늘은 카드를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잘 부탁을 해서 도서관 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돌아다니는 내내 근이와 다영이가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한국아이들이 영어와 몽골어로 통역을 하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도서관을 간 이유는 영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만한 더 좋은 자료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울란바타르 시내중심의 구경도 잘 했습니다. 정부종합청사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부청사는 수흐바타르 광장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수흐라는 영웅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몽골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킨 장군이라고 합니다. 울란바타르는 빨간 영웅이라는 의미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도서관마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도서관의 책들은 주로 매우 낡은 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구열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많은 젊은 학생들이 도서관에 앉아 빌린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피자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울란바타르 도시 중심에는 피자집도 있었습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How many people?(몇 사람 오셨어요?)"라고 묻길래 한국말로 "네 사람이요."했더니 아주 반가워합니다. 피자 가격은 한국보다는 약간 싸지만 몽골에서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입니다. 일반인들 월급이 우리나라 돈으로 10-20만원인데 피자는 만원이 넘었습니다. 아무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근이와 다영이는 돌아가서 동생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먹더군요. 다영이는 계속해서 케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확실히 원어민이 옆에 있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 아이들과 함께 본 DVD 영화

다목적실에는 컴퓨터가 있습니다. 이 컴퓨터에는 아이들에게 유익한 영화를 보여줄 수 있도록 DVD플레이어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곳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이야기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찰리라는 가난한 주인공 아이가 초코렛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신기한 공장에 들어가게 되어 펼쳐지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골든 티켓"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 티켓은 전세계에 오직 5장밖에 없습니다. 차례로 티켓을 찾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결국에는 가난한 찰리가 우연히 "골든 티켓"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이곳 아이들은 벌써 책을 읽어서 이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책과 영화 모두 영어로만 되어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영화를 보면서 엄청 빠른 대사들을 다 알아듣습니다. 

이곳의 아이들은 초코렛이나 아이스크림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흥분하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주인공이 신기한 초코렛 공장에 들어갔을 때 사방에 초코렛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좋겠다.", "아- 나도 먹고 싶다."를 연발했습니다. 제가 가진 돈을 다 털어서라도 초코렛을 듬뿍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께서 더욱 풍성한 영광으로 갚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주여, 이 모든 아이들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소서. 


+ 아저씨 숨바꼭질하고 놀아요

이제는 아이들이 저와 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습니다. 큰 건물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재미있는 놀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숨으면서 킥킥대며 웃기도 하고,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다니고 하면서 아이들과 더욱 친해졌습니다. 갈수록 아이들이 더욱 사랑스럽습니다. 

오늘은 놀이 도중에 주용이와 영산이가 싸웠습니다. 주용이가 술래를 하다가 숨어있던 영산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제 서로 달려와서 먼저 문기둥 옆의 벽을 치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주용이가 먼저 치면 다음차례에 영산이가 술래가 되는 것이고, 영산이가 먼저 치면 주용이가 다시 한번 더 술래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벽을 쳤기 때문에 주용이는 반드시 영산이를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둘이서 달리다가 기둥 거의 앞에까지 와서 서로 붙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산이가 먼저 와서 기둥을 쳤습니다. 주용이는 영산이에게 화를 냈습니다. 옆에 있던 소라가(영산이 누나) 영산을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주용이는 그 상황이 너무나 분했는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나 이제 안 놀아!"하면서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저마다 "주용이가 먼저 잡았어!", "소라는 동생이라고 영산이 편 들지마!.", "주용아 울지 마." 등등 시끄럽게 소리쳤습니다. 제가 주용이와 영산이를 불렀습니다. 

"둘 다 서로 잡았지?"

"네"

"빨리 달려올 것만 생각하다가 서로 잡은 거지?"

"네"

"그럼 누구한테 잘못이 있는 거야?"

"저요." 

영산이가 대답합니다. 주용이도 덩달아 대답합니다. 변명이나 상황설명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럼 서로 잘못했으니 서로 사과해."

"미안해."

"이제 서로 악수해."

"이제 서로 안아 줘."

아이들의 얼굴에 쑥스러운 웃음이 폈습니다. 옆에 있던 소라가 장난 섞인 말로, "영산아 꼭 껴안고 뽀뽀해 줘!"라고 말합니다. 아이들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있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립니다. 또다시 재미있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습니다. 



+ 교회에 대한 그리움

얼마 전까지는 아주 잘 잤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잠을 자면서도 자꾸만 교회가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은 잘 계신지, 주일학교는 잘 진행되며 아이들은 모두 잘 있는지, 사무실에서 일하시는 자매님들 어려움은 없으신지, 문서팀 훈련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청년1부 지체들은 모두 잘 있는지, 교통사고가 나셨다는 이재성 형제님과 이병창 형제님...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꽤나 긴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여, 주님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붙들어 주옵소서. 


+ 그린시티(Green City) 방문

오늘 오전에는 이곳 형제님들께서 운영하시는 식료품 회사를 다녀왔습니다. 이 식료품 회사는 주로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하기(철도로) 때문에 철도청 건물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약 30분 정도 걸었습니다. 간밤에 또 눈이 내렸는지 온 땅이 눈으로 덮여있습니다. "뿌드득뿌드득" 눈을 밟으며 한참을 걸었습니다. 발이 푹푹 빠집니다. 평생에 눈을 이렇게 밟아볼 기회가 또 있을까하는 생각에 열심히 밟았습니다. 바람은 차고 매서웠습니다. 길을 걸으며 허 형제님께서 사업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도팀(교회) 인원이 약 100명일 경우, 50명은 직장을 다니고 50명은 전도하러 다니면 좋아요. 사업을 벌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지요. 직장을 다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어요.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지면 자꾸만 전도하는 형제들을 끌어다가 일을 돕게 만들어요. '이번 고비만 넘기자.'라고 말하지만 고비는 계속 오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일단 전도팀을 먼저 구성해서 내보내고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직장을 구하는게 좋아요. '사업을 잘해서 성공하면 그것으로 주님 섬기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거예요. '주님 섬기지 않겠다.'라는 말을 잘 포장해서 말하는 것뿐이에요. 사업은 먼저 전도부터 하고 나머지는 직장을 다니다가 그 팀원 가운데 사업을 할 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그 때 시작해도 늦지 않아요. 사업을 할 때 좋은 점은 우선 시간이 융통성이 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팀원 내에 직장을 구하는 사람을 도울 때도 좋지요. 또 아이들에게 어떤 일을 가르칠 때도 도움이 되어요. 사업이 잘 될 경우에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므로 그에 따른 유익도 생기지요."

먼저 사무실을 방문하였습니다. 사무실은 상당히 넓었습니다. 컴퓨터가 약 다섯 대 정도 있었고, 두 분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한 여자 분은 몽골 국립대학원을 나오셨는데, 일본어와 러시아어를 잘 하신다고 합니다. 한 달에 우리나라 돈으로 약 30만원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고를 방문하였습니다. 창고는 엄청나게 컸습니다. 여러 가지 스낵과 라면 등 식료품을 쌓아두었습니다. 허 형제님께서 경리실, 냉동실, 제품견본실 등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함께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1999년도에 허 형제님께서 처음 사업을 시작하시고 기본적인 틀을 다 잡아놓으셨다고 합니다. 당시에 몽골에는 슈퍼나 가게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몽골 곳곳에 슈퍼가 생겨나고 그에 맞춰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는 회사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을 사업을 확장하는데 사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모든 전도팀 가정이 생활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돈으로 해결하고 계십니다. 사업의 규모가 모든 전도팀의 생활을 다 책임질 수 있을 정도까지 커질 때까지는 계속 확장을 하실 계획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한 중국인 형제님과 또 다른 형제님이 맡아서 운영을 하고 계십니다. 허 형제님께서는 아이들 전체 훈육과 전도하는 일로 2선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전체적인 계획을 잡는 일에만 신경을 쓰신다고 합니다. 11월말에는 형제님들이 모여서 이 사업을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지 회의를 하신다고 합니다. 만약 다시 허 형제님께서 맡게 되시면 상당히 많은 것을 다시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중국사람들에게는 거짓말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통기한이 지난 것도 날짜를 바꿔서 팔기도 한다고 합니다. 현재 운영을 맡고 계신 중국 형제님도 그렇게 하신다고 합니다. 중국의 문화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이해해주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회의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오해가 생기면 크게 틀어지고 싸움만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은 곧 권위이고 능력이지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돈이 필요해요. 이것을 적절히 잘 이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해요.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길을 간다면 주님이 잘 인도해 주셔요."



+ 울란바타르 전도

오늘도 어제와 같이 허 형제님과 태웅 형제님, 일본 할아버지와 제가 전도를 나갔습니다. 태웅 형제님과 제가 한 팀을 이루고, 허 형제님과 일본 할아버지가 한 팀을 이뤘습니다. 일본 할아버지는 너무나 추운 날씨에도 매일 전도에 따라나가십니다. 몽골어를 못하셔서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없음에도 매일 나가십니다. 다만 함께 가서 기도로 동역하십니다. 너무나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태웅 형제님은 목도리도, 장갑도 없이 복음을 전하러 다닙니다. 다만 귀를 덮는 모자 하나만 쓰고 있습니다. 저는 모자에 장갑에 목도리까지 다 챙겨갔습니다. 처음 나갈 때는 2시경이기 때문에 그리 춥지 않습니다. 그러나 4시가 지나면서부터 엄청나게 추워집니다. 목도리를 꺼내서 두르고 싶었지만 태웅 형제님을 보니 차마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추위에 떨지언정 나 혼자만 따듯할 수는 없다고 느꼈습니다. 주여, 추운 날씨에 전도하는 우리 형제님들의 건강을 지켜주소서. 




+ 초코렛 때문에 싸움이 나다

예진이가 경이에게 초코렛을 주었다고 합니다. 형우는 그것을 알고 너무나 먹고 싶어하였습니다. 경이는 아주 조금 떼어주고 나머지는 혼자서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식사시간에 계속 그것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경이 어머니께서 "형우도 많이 주고 근이 형도 주고 은이도 주고 진이도 주고 다 나눠먹어야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이는 이윽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울지 마."라는 몇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억울했는지 계속 웁니다. 허 형제님께서는 "저쪽에 가서 울고 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이는 계속 그 자리에서 훌쩍입니다. 그러다가 "저 문 앞에 가서 무릎꿇고 손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두툼한 매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형우도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매 맞는 소리가 나고 아이들이 우는소리가 들립니다. 혼나는 소리가 납니다. 잠시 후에 둘 다 나왔습니다. 이제 경이는 초코렛을 가지고 욕심부리지 않습니다. 

아이를 단지 쥐어박으면서 초코렛을 빼앗아서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들어서 마음이 변화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나중에 경이는 직접 초코렛을 나눠주었습니다. 즉시 행동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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