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5.24.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 1:1)

본문 : 요한복음 1장 1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집중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을 더 알고자 하여 샅샅이 찾아보고 외우고 필기하고 정리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군사로서 또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종으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말씀의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갈급하고 목마르며 허기진 양으로서, 갓난아기로서 말씀을 대할 때는 한 말씀 한 말씀이 꿀처럼 달고 너무 맛있어서 한번 듣고 읽었던 말씀, 내 안에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꺼내서 되새김질을 하고 묵상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할까요? 학생처럼, 군사처럼, 종처럼, 또 양처럼, 갓난아기처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좀 더 집중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원래 설교를 훈련하면서 첫 번째, 두 번째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 것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우리 서 목사님께서 그렇게 배우는 것이 설교를 훈련하는 입장이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유익하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이름이 바로 "말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다 보면 17절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요?

 

1절을 보면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는 “그분께서”라고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분에 의해”라는 것은 바로 “그 말씀에 의하여”라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서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여전히 “그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5절은 그 분 안에, 즉 그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요, 빛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 나온 침례인 요한은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온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절에 다시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으며”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도 문맥을 따라 계속해서 “He”라고 불리는 “그분”은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11절에 자기 백성에게 오신 그 분도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14절에 드디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읽고 묵상하는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불리신 우리 주님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원래의 이름은 바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2절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이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세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 구절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문맥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나타난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과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영접한 사람들", "그 말씀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여기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말씀이신 주 예수님을 주목하여 볼 때 여기서 우리가 영접한 분의 이름이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말씀”이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에서는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가지셨던 이름, 주께서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신 이름 중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다섯 군데만 성경을 함께 찾아서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는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6절을 볼 때 물과 피로 오신 분, 즉 육신이 되어 오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 우리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언하는 분으로서 나타나실 때는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까요? 다만 지식으로, 명령으로, 법칙으로 대하기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을 대하듯이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더 알기 원하는 사모함은 우리의 호기심과 지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육신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친밀하게 알기 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는 다만 명령과 법칙을 대하면서 그 기준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태도여야 합니다.

 

 

2. 현재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한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육신이 되어 오시기 전까지 하늘에서 가지셨던 이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현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골로새서 1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2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비라는 것은 쉽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합니다. 26절을 보시면 이 신비는 여러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는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들, 곧 우리와 같이 더럽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오셔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29절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이 일을 위해 나도 내 속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그분의 활동에 따라 싸우며 수고하노라.”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속에는 "성령 충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수고와 애씀은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려고 풍선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압축기에 연결된 호스에서 버튼만 누르면 강력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바울 안에 계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섬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속에는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시고,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거하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 충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바로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그리스도는 이상한 느낌이나 감정이나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바로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유익을 다 발견하자면 평생을 묵상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은 것으로 여기신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절과 7절의 앞부분을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4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부분은 4절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거하시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말씀이 거하시는 것을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먼저 태초부터 하늘에 거하셨던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말씀으로 거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안에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던 주 예수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거절하는 것은 살아 계신 주 예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이러한 주 예수님을 더 알게 되기 원합니다.

 

 

3.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이름 또한 “말씀”이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분은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라. 그분은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느니라.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관이 있었으며 또 그분께 기록된 한 이름이 있었으나 그분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

 

이 부분은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식을 마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어린양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면, 이제 다시 오실 때에는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오셔서 온 땅을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때 주 예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과 1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

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명백히 드러내시며 모든 피조물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실 분의 이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오셔서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현재,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시며 심판하시고 우리를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내시는 분은 바로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결론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주 예수님의 이름,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기 전에 우리 주님의 이름은 바로 “말씀”이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접한 분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성히 거하기 원하십니다. 또 앞으로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곧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이며, 말씀을 무시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시인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이며,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알거나 모르는 지식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지키고 못 지키는 율법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태초부터 말씀이셨으며, 지금도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거하시고, 앞으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실 살아 계신 주 예수님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또 우리 각 지체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고 시끄러운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할 때 살아 계신 주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무슨 지식을 알고 무엇을 잘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예언에 정통했고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알았어도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많은 지식과 의로운 행실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역사와 공로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목표와 소망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친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한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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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3.수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마 11:28-30)

본문 : 마태복음 11장 28-30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이라고 잡아봤는데,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염려해독제 투"입니다.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고 나서, 같은 주제로 반복하여 여러 말씀들을 살펴보면 좀 더 분명하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기 때문에 지난 주일날과 동일한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언급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잃어버린 혼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안식과 쉼에 대해서 설명하고 초청할 때 자주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 시작하는 말

저는 지난 목, 금요일에 트레이닝을 잘 받고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석기시대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 낮에는 이사를 잘 마치고 처음으로 새벽 1시까지 식당에 있었습니다. 12시가 넘으니 손님이 딱 2테이블에만 있었습니다. 한 테이블에는 저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옆 테이블을 청소하면서 우연히 그 청년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몇 억을 벌었다더라, 이렇게 하면 돈이 잘 벌리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을 많이 보다가 이렇게 나름대로 진지하게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까를 생각하는 청년들을 만나니 생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든 설령 돈을 많이 벌다 할지라도 그 길에는 참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청년들은 옆에서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제가 더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서 자랑하시기를 온 땅에 그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신 욥은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욥 5:7)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이집트의 모든 영화를 누리고, 광야에서 한 평생을 보낸 하나님의 사람 모세, 12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기력이 쇠하거나 눈이 흐리지 않았던 모세는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시 90:10)라고 말했습니다.

또 당시 온 땅에서 지극히 지혜롭고 영광스러워서 저 멀리 동방의 시바 여왕이 찾아와 직접 대면해보기를 원했던 솔로몬 왕은 “1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것을 세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도시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도록 앉아 있으며 고통의 빵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처럼 그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그의 모든 날은 슬픔이며 그의 해산의 고통은 괴로움이니라. 참으로 그의 마음이 밤에 안식을 얻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우리의 인생이 고생과 수고로 가득 찼으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헤매며 사람들 속에서 허덕이고 또 죄의 짐에 눌려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잃어버린 혼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거센 풍랑 속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수고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힌 수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 우리의 문제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이후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 안식과 쉼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다지 큰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죄인들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여러분 예수님께로 나아와 쉼을 얻으십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당신이야말로 쉼이 필요한 것 같군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참 안식과 쉼을 주시는 주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본문인 28절의 말씀대로 다 주님의 초청에 임하여 영원한 안식과 쉼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는 28절까지만 읽고는 "아멘!"하고 성경을 덮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곧 이어지는 29절과 30절까지도 "아멘!"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9절에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 결과로 우리가 우리 혼에 쉼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멍에와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로부터 배운다면 우리는 우리 혼에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멍에와 우리 자신의 짐을 지고 수고하며 지치고 걱정과 염려 속에 메말라가면서도 너무나 쉽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지고자 하지 않는데서 발생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모르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외적으로 돈이 없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기초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복음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다만 지옥에서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티켓 한 장이 아닙니다. 다만 죄가 있었는데 용서해줬다는 사면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물건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 개인에게 구원자요,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의 중심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식과 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 면에서는 맞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안식을 주시는 주님 자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자신, 내게로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내 짐을 메며 나를 따르고 내게서 배우고 내게서 쉼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걱정과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지치고 눌려있고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염려와 무거운 짐들 속에서 지치고 수고한 우리에게 참 안식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영접한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으로부터 배울 수만 있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 온유와 겸손

오늘 우리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이나 요세푸스의 역사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아주 작고 주목받지 못한 도시였습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만큼 아주 볼품 없는 빈민촌에 불과했습니다. 나사렛의 목수들은 자기 목공소를 가질 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고, 나사렛 주민들도 가구를 구입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의 목수들은 망치하나와 못 통을 들고 "문짝 고치세요. 식탁 고치세요."하고 외치며 갈릴리 주변을 돌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오십 세가 조금 안된 것으로 보일 만큼 태양에 그을리고 볼품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날 성화같은데 나오는 금발머리의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

가족들에게는 배척받고 고향에서는 거부당하고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심을 하거나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삼십 대 초반인데 오십 대로 보인 것 때문에 충격을 받고 외모에 대해 걱정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머리 둘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로 완전히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또한 주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외부의 여러 가지 환경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많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이러한 주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예수님이 가진 화평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보통 우리는 성격이 부드럽고 잘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라는 성품은 사람의 성품이 아닌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천성적으로 아무리 온유해 보여도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온 열매가 아니라면 결코 참된 온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를 가리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한 것을 정죄하고, 또 모세만이 선지자가 아니라 아론과 미리암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고 하면서 모세를 시기하고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이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잠잠하였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온유한지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속으로는 화가 나고 불타는데 겉으로만 참은 것일까요?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인식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겸손과도 연결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다른 사람의 평가와 눈치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만을 주목하게 해줍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며 겸손하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를 누리며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의 무거운 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시험과 걱정거리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항해 중에 자꾸만 파도가 달려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의 초청에 더 잘 응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해서 더 무겁게 짓누르시거나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강하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치고 수고한 만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만큼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울 왕으로부터 늘 도망 다녀야 했던 다윗, 자기 아들로부터 배반을 당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셨다는 이유만으로 만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과 친밀하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화평이란 외부의 걱정거리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배우고 알게 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이 나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 때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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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마 18:1-6)

2006.03.0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4세)
제목 : 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
본문 : 마 18:1-6,10,14

오늘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 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하매
2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


또한 10절과 14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10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오늘은 아마도 제가 캐나다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기대가 되고 또 큰 복이 있었는데 이번에 하는 설교가 형제, 자매님들을 오랫동안 떠나기 전에 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까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3.1절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주님에 대해 설교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또 요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영광이라는 단어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 말씀을 준비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도 귀에도 마음에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어떤 것일까, 모세가 간절히 보기를 사모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 바울이 세상의 쓰레기와 같이 되면서도 그러한 모든 고난이 가벼운 것은 그 영광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들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지난 5년 동안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작은 부담에 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리 다같이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어떤 말씀을 나눌지 다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기름 부어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
우리나라는 요즘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전처럼 결혼을 하고 자녀들을 낳아서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라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더 커졌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과 교육비의 부담 때문에 점점 아이들을 낳지 않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주님께서는 우리교회를 넘치게 축복하셔서 시끌벅적하고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하니 무엇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참 막막했습니다. 설교원고도 새로 써보고 성경본문도 바꿔보고... 나름대로 끙끙대다가 우선 가볍게 우리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일학교의 주제가인 “갈보리 어린이”라는 찬송을 보면 3절 마지막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한가지 소원 주님의 사람되는 것 더 많이많이 자라나서 섬기고 싶어요.” 이제 6학년이 된 창원이가 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 하루는 창원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아요.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창원이 어머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창원이가 대답하기를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학교에 원수 같은 친구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우선 창원이가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사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에, 또 창원이가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작게나마 소원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또 그 문제로 나름대로 깊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로마서 5장 10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원수였을 때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더 깊이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작년 여름, 가을 즈음에 아이들에게 카드 붐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올 때마다 카드를 한 뭉치씩 가져오곤 했습니다. 카드에 그려진 그림은 용과 괴물과 악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빼앗기도 하고 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제 4학년에 올라간 재선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재선이의 어머니께서 재선이에게 사도행전 19장에 예수님을 믿은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용을 가진 은 오만 개 어치나 되는 책들을 모두 불태운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그 카드를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선이는 그 당시 울면서 그 카드를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재선이의 생일이 되었을 때 한 친구가 다시 그 카드를 한 뭉치 선물한 것입니다. 그 때 재선이는 조금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 그 카드를 버렸습니다. 재선이 어머니는 재선이에게 왜 좋아하는 그 카드를 버렸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재선이는 대답하기를 “카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가잖아요.” 하였습니다.

재선이의 친구인 건주가 있습니다. 건주는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였는데, 마태복음 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씀을 읽은 건주는 정말 이 말씀이 진짜인지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건주에게는 한 친척형이 있는데 명절마다 그 형과 함께 노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평소에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먼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건주는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그 형과 만나서 놀게 해주세요.”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어느 날 건주가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할머니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형이 마침 그 집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명절도 아니었고 서로 시간을 맞춘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멀리 사는 그 친척형이 와있었던 것입니다. 건주의 어머니는 건주가 그렇게 기도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건주는 너무나 기쁘게 “제가 엄마한테도 말 안하고 정말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했는데 드러나게 응답해 주셨어요!”하면서 자랑하였습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주영이가 있습니다. 주영이는 불교를 믿는 외할머니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우 답답해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주영이는 손에 돌멩이 하나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내밀면서 “할머니, 할머니는 이런 돌한테 절을 한다는 말이에요?”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800년대 놀라운 부흥의 통로가 되었던 설교자 디엘 무디는 자신의 설교 이후에 한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아이가 헌신초청에 응답하여 앞에 나온 것을 보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한 사람 반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은 그 기도의 의미를 물었고, 디엘 무디는 대답하기를 “이 어른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많이 허비하여서 반밖에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이 아이는 아직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온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주보고 또 쉽게 지나치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깊고 진지한 생각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고자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한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어떻게 주님의 사람이 될까하는 고민이 있고, 카드가 너무나 좋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단호하게 버리려는 결심이 있고,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은밀히 기도하여 응답 받는 간증이 있고,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표현이 우리 눈에 유치해 보이고 우습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과 교제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가장 큰 자인지를 논쟁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이들을 잘 양육해서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실족시키고 길을 잃게 만드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실 정도로 주님은 우리 아이들을 앞길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 오늘날의 우상, 교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다니엘서에 예언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입니다(단 12:4).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물질과 쾌락 그리고 교육입니다. 이 세상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교육의 대열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모든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여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바로 사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시스템에 정복당하여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한 초등학생이 자살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학원을 조금만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육이라는 우상은 아이들을 바쁘고 지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안에도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영어를 잘 못하고, 수학을 못하고, 과학을 못하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것을 위해 돈을 쓰고 학원에도 보내지만, 자신의 자녀가 주님을 모르고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혼내기도 하고 답답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교회의 초등부 아이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한 달 동안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하거나 상식과 흥미를 위해 구입하는 책들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성경은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성경을 가져다 읽으라고 하는 것과 자기 소유의 성경,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기록된 내 성경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이들이 주님을 알아 가는 것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지 않습니까? 상식과 교양을 위하여 읽으라고 강요하는 책들은 너무나 많지만 성경을 읽으라고 말하는 소리는 너무나 작습니다.



**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오늘의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님은 어린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워놓고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바램일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 식어지리라”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심이 험악해졌다.”, “세상 살기 무서워졌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이 식어졌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대명사는 바로 부모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이 바로 사랑이 식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구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여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5년 간 아이들을 대하고 또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복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 라는 사실은 아이들이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옥이 있다는 것도 알뿐 아니라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뭔가 부족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아이 자신이 철저하게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죄인이라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아이들의 순수하고 열려있는 마음 속에도 복음이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나이를 먹는다고 자라나지도 않고, 몇 번의 성경공부로는 심어주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그를 사랑하는 자는 어릴 때에 그를 징계하느니라.”(잠 13:24).
“바로잡는 것을 아이에게 금하지 말라. 네가 그를 회초리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는 그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잠 23:13,14).

사랑이 식어진 오늘날은 자기 아이를 때리지 않습니다. 제 때에 징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배우지 못합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욕심을 부리고, 미워하고, 권위를 거슬러 마음대로 행동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얼마나 크게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죄인인지 인식할 수조차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철저하게 맞으면서 배운 아이들은 거짓말을 지적할 때 자신이 큰 죄인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다만 말로만 경고를 받고 타이르고 구슬리는 방식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그런 것을 별로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어떤 아이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혼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죄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할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으로 아이들을 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초리가 아이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지옥에서 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회초리를 아낀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며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현재 잘못된 것들을 고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더 멀리 본다면 그를 지옥에서 건지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제 때에,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잘못을 알려주고 징계하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구주 예수님을 찾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 아이들의 미래
우리 아이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아이들이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구원만 달랑 받고 자기 정욕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영원한 영광으로 기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목적이며 소망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이끌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저의 말을 듣고 배우기보다 저의 행동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따로 배우고,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만 적당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짓과 표정과 어조와 행동을 관찰하며 실제가 무엇인지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흡수하고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참되게 이끌 수가 없습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어른들은 눈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어머니께서 예배당에서 통성기도를 하시면서 아주 큰소리로 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보았는데, 그 때 저는 “엄마 왜 울어, 엄마 왜 울어, 울지마.” 하면서 마구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도 한 번씩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잘 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님들! 아이들 앞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많이 우십시오.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이야기를 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또 아이들에게 자기 전에 기도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지 삶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번 습관적으로 만나는 악세사리 같은 분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나를 인도하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 기도요청
원래 저는 다니엘,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의 자녀들, 소년 다윗, 디모데 이런 성경 인물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할 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또 아이들이 유치한 것을 가지고 웃고 좋아할 때 어떻게 같이 웃어줘야 하는지,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하면서 쉽게 업신여기고 간과하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수요기도회입니다. 저는 기도요청을 하러 올라왔습니다.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한 어린 형제가 그 동안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섬기면서 힘들고 지치고 실패하고 부끄러웠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대하고 섬기면서 주님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이없어하고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다가도 이 아이들보다 더 심한 나를 오래 참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섬길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아이들에게 오직 주님의 사랑과 진리만을 전달하고자 했을 때 나의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나의 마음상태와 관계없이 언제라도 아이들을 기쁘게 대해야하는 섬김의 위치는 때로 부담스럽고 힘든 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잠시 다른 위치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주님이 다시 부르시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함께 주님을 알아 가는 이 귀한 자리를 사모하며 돌아오기 원합니다. 아이들에게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여러 가지 핑계로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축복하셔서 많은 아이들을 주셨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섬길 지체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섬김의 자리를 사모하여 헌신하며 감당할 지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이 온전히 주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또 아이들을 이끌어주며 함께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선생님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9장 13,14절을 다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13 ¶ 그때에 사람들이 그분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실 것을 바라며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거늘
14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딤후 3:13-17)/로빈

2005.03.0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본문 :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전체를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13절부터 17절까지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오늘 저는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저는 개인적으로 디모데전후서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 나온 것처럼 저도 디모데와 비슷하게 어린아이 때부터 성경 기록들을 배우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유언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청년 디모데를 위하여 기록된 것인데 특별히 청년인 저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의 영감성과 관련해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영감”이라는 단어가 단 2번 등장하는데, 한 곳은 욥기 32장 8절이고 또 한 곳은 바로 오늘의 본문인 16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마지막 날들의 위험함
먼저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또한 이것을 알라. 즉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6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7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 믿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빼앗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자들을 고문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그런 위험한 때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너무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곳에 열거된 모든 항목들이 바로 저와 이 세대에 정확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고 타고난 애정도 없으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고집이 세고 쾌락에 사로잡혀있는 이 시대의 흐름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은 다만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욱 사랑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흉내를 내지만 그 안에 참된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만연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배우는 것 같지만 결코 진리를 참되게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는 세대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8절,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그런데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나니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리니 이는 저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라.


성경은 입술과 모양으로만 경건하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을 가리켜 진리를 거역하는 자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주님을 향하여 뜨거웠고 어떻게 주님을 잘 따랐는지와 상관없이 오늘 주님을 참되게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얼마나 많은 지식정보를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이런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며 그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 교리의 목적
10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았으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 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유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기록들을 참되게 배우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교리, 즉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심과 믿음의 원칙과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이 교리를 참되게 받고 영접한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10절과 16절을 잘 비교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에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이 말씀을 10절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리를 참되게 받은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강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책망을 참되게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게 됩니다.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은 사람은 이제 의로 교육을 받습니다. 즉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 경건에 이르도록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을 거듭나게 하실 때 원래 계획하신 그 목적대로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바울과 같은 고난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성경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고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여서 자주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완벽하게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13절에 나온 것처럼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고 또 속임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항상 말씀을 배우니까,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면서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위험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
14절,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 각자에게,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서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쾌락을 따라 갈지라도, 이 세상 모든 믿는 이들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모양과 껍데기만 가질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의 의지와 결심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건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위험한 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9절에서 살펴본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있습니다. 이 성경 기록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살펴서 알고 또 이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굳게 붙잡는다면 이 말씀은 능히 우리를 지혜롭게 하여 이 타락하고 위선적인 시대에서 우리를 이끌어주고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마지막으로 16절, 17절을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단 한번뿐인 짧은 인생 가운데 저의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가망도 없는 자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악착같이 붙드는 믿음으로 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거대한 흐름에게 건짐을 받고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설교제목 그대로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입니다. 참으로 주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귀한 말씀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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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6.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3세)

제목 : 시험을 이기는 힘
본문 : 마태복음 4장 4절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4절 한 구절만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저는 “시험을 이기는 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세 번 모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말에는 “삼세판”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승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험과 정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에 사용된 표현인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는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심으로 말미암아 능히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완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더 많이 알고 만나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 본문 전반적인 설명
본문 1절은 “그때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장의 끝 부분과 이어지는 시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3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친히 음성을 내시기를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마치 욥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고 자랑하시는 말씀을 하신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된 것과 같이, 마태복음 3장에서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이 끝난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에 낙담하거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사랑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시험이 임하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금보다 귀한 단련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통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시험을 통과하시고 앞으로 사역하는 모든 일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사
2 밤낮으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고 그 뒤에 주리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광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또 스스로 마귀와 겨루어 볼 뜻을 품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싸움이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전쟁임을 명확히 보여주시고자 사십 일간의 금식을 통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힘을 약하게 하셨습니다.

 

** 첫 번째 시험
3,4을 읽어보겠습니다.
3 그 시험하는 자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 하거늘
4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시험하는 자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불과 사십여 일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귀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어 시험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배도 고픈 이때에 너의 능력을 좀 사용하여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해보라.”하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침례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고 선포한바 있습니다(마 3:9).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이 돌들로 빵을 만들 수 없겠습니까?

마귀의 요구는 어떤 사악한 죄를 저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빵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움직인다.”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임의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살고 계심을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 두 번째 시험
5절에서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이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거룩한 도시로 올라가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6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위험에 처하여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움직여서 예수님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해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예수님을 충동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시험에는 한 가지 위력이 더해졌는데 그것은 마귀가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는 “모든 길에서”라는 단어를 “언제라도”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답변은 “또 기록된바”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시험에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특정 부분의 말씀만이 아닌 모든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에게 편하고 좋은 말씀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또 기록된바”라는 표현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 세 번째 시험
8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8 마귀가 다시 그분을 데리고 심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그분께 보여 주며
9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매
10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여기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1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


성경의 대 주제는 왕국이며, 주인공은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머리이시며 왕이십니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사탄에게 넘어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되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죽음을 통과하여 영광으로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모두 통치하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 이전에 십자가를 견디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을 다스리는 마귀는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주고 그것을 순순히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음과 십자가를 통과할 필요 없이 쉽게 얻으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다만 딱 한번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얻으려했던 그 영광을 단 한 번의 타협으로 쉽게 가지라고 충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아, 너는 여기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다 이루실 때까지 가지신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친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므로 직접 무엇인가를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 기록된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절대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아무것도 임의로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움직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이것은 대언자 누구를 통해 기록된 것을 성취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칼로 말고의 귀를 쳐서 베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마 26:53,5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 24:44,45)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경의 기록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 결론
오늘 우리가 다 같이 읽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는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시내 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을 직접 듣고 너무나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가 대언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시내 산은 너무나 멀고 오늘날 그분은 직접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기록된바”, “또 기록된바”, “이는 기록된바”. 주님께서는 과거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들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심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해서입니까? 사십 일을 밤낮으로 굶어서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 지금 하나님께서 직접 입을 열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엄중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힘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소생시키고 오늘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주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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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30.금 갈보리침례교회 금요설교훈련 / 이승선(22세)

제목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본문 : 히브리서 3장 1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절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 서론
모든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들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나신, 가장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는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도록 우리를 지도해 주는 귀한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오늘 저는 많은 귀한 말씀들 가운데 한 구절인 히브리서 3장 1절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 거룩한 형제들아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를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수식어와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모두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단어들입니다. 원래 우리의 호칭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더럽고 가증한 자들아”,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아”, “진노의 자녀들아”, “불순종의 자녀들아”. 원래는 이렇게 불려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이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더럽고 추악한 죄로 찌들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하다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요 벌레에 불과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을 보시면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더럽고 수치스러운 죄 가운데 거하던 우리들을 친히 거룩히 구별하시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저명하고 높은 사람들 앞에서 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모른 척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형제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오늘의 본문은 또한 우리를 가리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들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했던 자들입니다(히 11:13,16). 우리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순례자”라는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힘이 없고 어려울 때 날 기다리는 밝은 곳,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또 이 땅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형체가 없이 사라질 것들을 알고 믿으며, 오직 영원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길을 나선 나그네요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순례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크리스천”이 갖가지 장애물들을 통과하여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너무나 좋고 영광스럽지만, 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좁고 협소하며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 다만 어떤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거룩한 형제들이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란 다만 무엇으로부터 분리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여 순례의 길을 더욱 전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우리들은 마땅히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오늘의 본문에서 힘주어 권면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의 흐름과 이어지는 가운데 결론적으로 오늘의 권면이 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권면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힘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계속하여 하늘의 부르심에 깊이 참여하여 전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는 무엇이십니까?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약의 첫 번째 사도가 있다면 열두 사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많은 무리들 가운데 제자들을 선별하시고,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을 구별하여 사도로 파송하신 우리 주님 자신이 먼저 사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최초의 사도이십니다. 그분은 높고 높은 영광이 가득한 하늘로부터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첫 번째 선교사이자 사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사도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7절에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라고 말씀하시고
2장 9절에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라고 말씀하시고
2장 10절 후반부에는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해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라고 기록하시고
18절에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고 어떻게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반복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여 고난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이 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저는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아프리카 가나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다투었던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 오히려 필리핀이나 태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가나는 말라리아의 위험도 있고 생활도 너무 불편합니다. 이곳은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같지가 않습니다. 가나만 말고 다른 나라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원래 하늘에서 살았다. 그런데 내가 나사렛에 와서 살았던 거 너 기억하니? 내가 너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 알고 있니?” 그때 그 선교사님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님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분명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면, 과거에 그분은 대언자요 사도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그분은 왕이요 통치자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레위의 혈통을 따른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히브리서 7장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포함한 히브리서 전체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계속해서 드려야만 하는 헌물을, 자신의 몸으로 드린 한 번의 헌물로써 우리의 속죄사역을 완전히 완성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 안에서 앉을 수 없고 계속해서 서서 섬겨야 하는데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히 9:11,12).

또한 히브리서 8장 1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말한 것들에 관한 요점은 이것이니 곧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것이라.”라고 요점정리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 4:15).


** 결론
우리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하여졌고 형제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가 다시 하늘의 거룩한 곳으로 가셔서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걷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친히 자신을 낮추시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우리의 사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실 수 있는, 그러나 완전히 승리하신 대제사장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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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2세)

제목 :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
본문 : 로마서 8장 1-4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4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도 깊은 풍요로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제가 조금 맛본 것을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이 7장의 흐름을 이어받아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한 가지 법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 21절 앞부분을 잠시 보시면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실질적인 지체들을 죄의 법에게로 사로 잡아가는 아주 강력한 법칙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낙망과 정죄 속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5절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오늘의 본문 8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가장 무서운 정죄 -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오늘의 본문 1절 말씀에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정죄”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어서 하나님의 맹렬한 정죄와 심판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더럽고 가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으며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정죄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소자인 마귀의 고소와 우리 자신의 정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정죄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의롭고 영적인 율법의 말씀을 이루고 살아내고자 분투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더욱 죄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행하고자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없었습니다.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내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내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나? 도저히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나는 더욱 죄를 짓는구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가 완전히 거두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보다 더욱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를 거절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야 마는, 죄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는 우리가 행한 행위들로 인한 것을 넘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야 마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정죄입니다. 


**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어쩌면 매우 자주 이러한 정죄 가운데 빠져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직접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 안에 머무른다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맹렬한 정죄와 탄식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면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말씀은 바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에 주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아멘!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
3절과 4절은 우리를 어떻게 자유하게 하셨는지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사역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정죄 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7장 12,14절에 나온 것처럼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 안에서 율법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즉시 죄와 사망을 만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루고자 시도할수록 계속해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성취하는 일은 육신이 연약하므로 할 수가 없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육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 법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결단하고 노력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 육신을 용도 폐기하심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아,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곧 내게 큰 권능을 주셔서 하게 하셨구나.”라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육신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셨습니다. 육신을 수리하고 부축하고 개발시켜서 능히 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육신의 모양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은 온 인류의 육신을 대표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정죄 받으실 때 그분은 나의 육신을 포함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용도 폐기될 때 나의 육신도 함께 용도 폐기되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 3:16)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육체를 용도 폐기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모든 육체를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정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정죄 받았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죄하는 우리 자신은 이미 주님과 함께 정죄 받고 죽었으며 폐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육체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육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3절에서 주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하였다면, 4절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은 “하셨느니라.”고 끝마치지만, 4절의 말씀은 “하려 하심이니라.”고 끝마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실이며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4절에서는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육신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고자 두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육신을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신 것이며, 하나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친히 그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거침이 되는 육체를 처리한 것이며, 이제는 권능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약하고 무능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절망과 정죄의 골짜기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나타나서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비라면, 성령님의 동행하심은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은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원하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음으로는 원하여도 실제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우리를 위해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결론 - 성령님을 따라 걷는 우리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미세한 성령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주의하며 순종하여 걷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어떤 말이 붙어 있습니까?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다만 오순절 날 성령님이 임하신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다만 성령님을 받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여 걷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또 다른 이름은 성령행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온전히 걸어갔을 때 일어난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과 같은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데마는 성령님을 모시고도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사도바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님을 따라 걷는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기를 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걷는 믿음의 실재를 가지기 원합니다. 다시 한 번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복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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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로빈


2001년 어느 날 - 첫 번째 설교훈련 / 이승선(19세)


제목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본문구절 -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 저는 오늘

저는 오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해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잠깐 기도하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멀고도 험한, 그렇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또 어떤 사람들은 명예와 권력이 바로 인생의 열쇠이며 길이라고들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이고, 뭐고, 즐기면서 사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복된 길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정말, 한번뿐인 인생,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많은 생각들과 많은 계획들을 합니다. 

어느덧 나이가 들고, 가정도 꾸리고, 재산도 어느 정도 모았고, 자녀들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 분가한 시점이 되면, 사람들은 이만하면 좋은 길로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난 과거를 매우 후회하면서 “그때 그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닌데”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여러분이 걸어온 인생길에 만족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후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여러분의 지나온 인생길에 이름을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젊으신 분들은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미래의 인생길에 이름을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돈의 길? 명예의 길? 권력의 길? 쾌락의 길?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름을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봉사의 길? 사랑의 길? 한번 붙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여러분과 한시도 끊임없이 동행했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아니,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과 떼어놓을 수 없는 그런 사이입니다.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줄곧 여러분과 동행해 온 친구입니다. 나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쑥쑥 튀어나와서 나의 인생길을 장식해 놓은 그것!

그것의 이름은 바로 죄악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길에 대해서 정직하게 이름을 붙이신다면 ‘죄악의 길’이라고 붙일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사실이 아닙니까? 무엇을 바라보든, 무엇을 생각하든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입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죄악의 길에 머물러 있는 이상 여러분은 언젠가 그 죄악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인생길에 이런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다 같이 잠언 14장 12절 말씀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사망의 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 나가는 길을 걸어왔다 할지라도 또는 그런 길을 계획하고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끝은 사망의 길로 끝날 것입니다. 자, 주의해서 말씀을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읽는다.) 예, 그 끝은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코, 그 끝이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끝은 사망이 아니라, 사망의 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죽음 뒤에 무엇인가 이어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사람들에게, 바로 여러분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사망의 길인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히 9:27) 

죽음의 길 뒤에는 심판의 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뒤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걸어왔던 길은 죄악의 길이요, 그 끝은 죽음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길 다음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이 지금 가고 있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태까지 걸어왔던 그 길,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서 있던 그 길, 곧 죄악의 길이요, 죽음의 길, 파멸과 멸망의 길인 그곳에서 반드시 벗어나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길로 곧장 간다면 지금은 아무리 좋아 보일지라도 영원한 불의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라는 새로운 길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 어떤 사람들은 이슬람교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수억만 가지의 서로 다른 종교들을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서로 다른 길이라고. 서로 길은 다르지만, 결국은 한곳으로 통한다고들 말합니다. 서로 방법들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내가 바로 길이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하고, 도덕적이며, 존경받는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가고 있는 길이 선행의 길이요, 봉사의 길이요, 종교적 열심의 길이요, 미덕의 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럴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죄인에 불과한 우리들이, 죄악에 찌든 우리들이, 죄를 처벌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죄를 정결케 하시는 보배로운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 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죄인인 우리들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어주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의 죄악의 길, 사망의 길,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제시하신 그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만든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끝까지 자기의 길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을 거부하고서야 어떻게 그분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사 55:7)

죄악에 찌들어서 여태까지 걸어왔던 그 길에서, 그 죄악의 길, 자기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하면 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자신이 말하는 바를 진리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타당한 이유들이나 증거들로 설명하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바로 자기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얼마 전 제가 한 모슬렘교도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수많은 종교들을 연구하고,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상들과 가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다 사실 곧, 진리가 아니라 그중 하나만이 진실이며, 진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질문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 많은 사상들과 종교들 중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까?”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리입니까? 불교에서는 자비와 미덕을 베푸는 것을 통해 극락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주교에서는 미사와 고백성사라는 것을 통해, 또 여러 가지 다른 많은 선한 봉사들을 통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아프리카 어떤 종교는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죽음 뒤의 심판을 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또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양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죄를 해결해 보려고 길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슬렘교도 역시 어릴 때부터 그 종교를 배우며 자라났지만, 그 종교는 그로 하여금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도록 만들었습니다. 진짜 진리, 그것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습니다. 과연 무엇을 통해 나의 죄를 씻을 수 있는가? 과연 무엇이, 나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줄 것인가?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는 어디 있는가? 이렇게 질문들을 던지고 있을 때,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이분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란 분은 누구시길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옛날, 인도에 썬다 씽이라는 복음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힌두교 신자였으나,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헌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한 신학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신학자가 썬다 씽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썬다 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도덕적 기준이나 교훈에 관한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그 신학자는 웃으면서, 그것 말고 다른 사상적인 차이점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썬다 씽의 대답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수억만 가지 종교가 있더라도 모든 종교가 요구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바로,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선행과 고행과 봉사와 눈물과 결심으로! 나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사람이든 또는 아무리 형편없고 죄악에 찌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 중 과연 무엇이 진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진시황제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진시황제는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있었습니다. 부와 권력, 명예와 쾌락!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흠모할 만한 좋은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자신의 죽음과 함께 끝나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불로초’라는, 먹으면 영원히 산다는 전설의 풀을 찾으러 신하들을 이리 저리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것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도 자신의 생명을 돈과 바꾸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순간의 쾌락과 바꾸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명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약 4:14)


우리의 생명은 안개와 같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시황제는 이점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현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풀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여러분도 진시황제와 같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입니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명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죄악된 생명이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생명이 여러분의 생명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악된 생명을 대신해서 희생할, 죄 없으신 한 분의 생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생명을 소유하신 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곧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존경할 만한 많은 말들을 남겼습니다. 말뿐 아니라 그의 삶 또한 존경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참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왜 죽었습니까? 그 역시 수많은 훌륭한 명언들과 좋은 말들을 남겼습니다. 아주 강직하고, 간사함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그 끝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 역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죽으셨습니까? 그분은 도대체 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까?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우리 죄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 (마 20:28). 

이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죽어 갔습니다. 단지 많은 훌륭한 말들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이 분은 바로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분이 생명을 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죄 없으신 그분, 진리 자체이신 그분이 여러분의 생명을 대신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만 되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구주, 즉 구원자이십니다. 여러분의 죄악된 생명을 대신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생명 자체가 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 같이 성경 요한복음 10장 18절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빼앗을 자고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죽으실 만한 어떤 악한 일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자신을 변명하지도,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단지 너무 선한 사람 이어서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목적은 죄악에 찌든 우리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를 잇는 길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들에게 진리가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분의 목적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악된 생명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분은 죽은 뒤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이 만약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죽어서 썩어버렸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생명을 다시 얻을 권세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 마무리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악된 길에서 벗어나기 원하신다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참된 진리를 찾으신다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신다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고, 여러분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대로 죽음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말릴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리가 아닌 거짓에 계속 머무르고자 한다면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죽음의 길에서 죄악된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이미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서 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길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은 이미 진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를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은 이미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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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6.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로빈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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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먼저 사랑하신 분(요일 4:19)

 

이승선

 

우리 다함께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4장입니다요한일서 4장 19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날 먼저 사랑하신 분입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너무나 간단합니다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고그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오늘 선생님은 우리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과 이 단순하고도 뜻 깊은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오늘의 말씀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고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과연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그리고 우리도 과연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볼 것입니다먼저 우리 함께 요한일서 4장 1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아멘성경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사람은 정말 자기중심적이고이기적인 존재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사람조차도 사랑을 할 때가 있는데그것은 상대방에 나를 먼저 사랑해 줄 때입니다우리 함께 누가복음 6장 32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느니라.

성경은 너무나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우리가 얼마나 훌륭한가우리가 얼마나 의로운가의 문제가 아닙니다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는 바로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 사랑을ㄹ 받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면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한다면무엇인가 결심을 하기 이전에과연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는가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우리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면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십자가의 사랑

우리 함께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성경은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지만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지만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는 전 세계에 단 9대 밖에 없는 람보르기니 베네노 로드스터라고 합니다최고 속력354km/h까지 낼 수 있는 이 차는 우리나라 돈으로 약 50억 원이나 된다고 합니다여러분우리가 만약 장난을 치다가 이 자동차에 흠집을 내거나사고를 내서 심하게 손상을 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우리가 평생 일해서 갚아보려고 할지라도아마 문짝 하나조차 교환해 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그런데 만약 그 차의 주인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면,그리고 수십억 원이나 되는 수리비를 스스로 지불하였다면우리는 아마 평생을 고마워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생각해 보십시오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화해 헌물을 내어주셨습니다우리가 평생을 일해서 갚아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영원히 지옥에서 죄 값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갚을 수가 없는 그 죄의 값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 값으로 스스로 지불하시고우리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창세기 22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일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이르시되, 아브라함하시니 그가 이르되보소서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때그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친구 간의 사랑을 언급하지 않고바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아브라함의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하나님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하실까등등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시겠습니다.

보라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하시니라.

우리는 바로 이 구절에서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볼 수가 있습니다여기서도 또한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 헌물로 드려야 했던,아브라함의 아프고 찢어지는 마음은 다름 아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던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음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하늘을 두루마리 삼고바다를 잉크 삼고나무들을 붓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찬송가 가사처럼우리는 너무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오늘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래하시는 하나님

이제 우리 함께 구약성경 스바냐 3:17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한가운데 계시는 주 네 하나님은 능하신 이시니 그분께서 구원하시고 너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고 친히 사랑하시는 가운에 안식하시며 너로 인해 노래를 부르고 기뻐하시리라하리라.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또 우리 각자 각자로 인하여 기뻐하시고즐거워하시고사랑하시는 중에 안식하시며심지어 바로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시면서 기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여러분하나님께서 기뻐서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아마도 선생님이 승연이나호윤이를 앉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비슷할 것입니다하루의 일과가 아무리 바쁘고 힘들었다 할지라도선생님이 승연이호윤이를 보는 순간 기뻐하고 노래가 나옵니다왜 그렇습니까사랑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다름 아닌 바로 나를 사랑하셔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사랑하시는 중에 노래를 부르십니다더럽고 죄 많고 자격 없는 바로 나를이러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여러분이러한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무덤덤하게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의 다양한 예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고느낄 수 있는 아주 다양한 예를 들어주시고 계십니다우리 한 번 그것을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이사야 49장 15-16절을 보시겠습니다.

15 여인이 자기의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16 보라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이 계속해서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갓난아기를 낳은 엄마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북한에서 자기 딸을 백 원에 팔아서그 백 원으로 마지막으로 자기 딸에게 밀가루 빵을 사주면서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손바닥에 못 자국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크게 새기셨습니다우리가 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완전한 몸을 입게 될 때우리 주님께서는 여전히 손에 못 자국을 간직하고 계실 것입니다모두가 완전한 몸을 입을 때에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히 상처 난 몸을 입고 계실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 함께 이사야 62장 5절도 보시겠습니다.

청년이 처녀와 결혼하는 것 같이 네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여러분결혼식장에 가보셨을 것입니다저는 결혼식에서 주로 신부가 그 동안 키워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신랑은 눈물을 흘리기보다 매우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신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은 너무나 많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설명해 주십니다또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친구의 깊은 우정과 사랑의 관계로 말씀해 주십니다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시는 선한 목자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산과 골짜기를 다니는 목자의 모습으로 설명해 주십니다탕자를 기다리다가 저 멀리 그림자가 겨우 보였을 때,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달려가서 목을 끌어 앉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우리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하나님께서는 약하고 어리석고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살고 있습니다우리 함께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3장 18-19절을 보시겠습니다.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뛰어난 것인지 알게 되고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세상은 우리에게 해 준 것이 하나도 없고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하나님보다세상을 사랑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그 원인과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우리가 아직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2014.04.18.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채플설교 /로빈3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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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오늘 뿐이다(약 4:14-17)

 

이승선

 

우리 다함께 일어나서 하나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야고보서 4장입니다야고보서 4장 14-17절입니다.

14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너희 생명이 무엇이냐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15 그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며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하여야 하나

16 이제 너희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니 그러한 기쁨은 다 악한 것이니라.

17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곧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느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직 오늘 뿐이다입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여러분 모두며칠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 소식에 대해 들으셨을 것입니다바로 세월호가 침몰한 사고였습니다.수학여행을 가던 많은 학생들이 사고를 당했고제주도로 이사를 가던 가족도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다른 사람을 먼저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정말 비극적인 사고이고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함께 다시 한 번 1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너희 생명이 무엇이냐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성경은 우리의 인생우리의 생명에 대하여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수증기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내일 있을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에게는 오직 오늘 뿐입니다오직 지금 뿐입니다우리가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기대한다 할지라도우리에게 있는 시간은 오직 오늘 뿐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15절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너희가 마땅히 말하기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며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하여야 하나

우리는 주께서 원하셔야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고하루를 더 살 수도 있습니다. 1시간을 더 살든지하루를 더 살든지주께서 원하셔야 우리가 살 수 있고이것이나 저것이나 무엇인가를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통해 하루를 더 살게 된 우리들그리고 미래의 꿈을 꾸며 진로를 준비하는 우리 학생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오늘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우리 함께 누가복음 12장 16-21절을 보시겠습니다.

16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여 이르시되어떤 부자의 땅이 풍성하게 열매를 내매

17 그가 속으로 생각하여 이르되내 열매를 쌓아 둘 곳이 내게 없으니 어찌할까하고

18 또 이르되내가 이렇게 하리라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거기에 내 모든 열매와 물건을 쌓아 두고

19 또 내 혼에게 말하기를혼아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하리라하였느니라.

20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너 어리석은 자여이 밤에 네게서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는 이와 같으니라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어떤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풍성한 열매를 거두어 더욱 부자가 되었습니다수확한 곡식을 다 쌓아놓을 창고 공간도 없었습니다부자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을 행복한 계획을 세우면서여러 해 동안 잘 먹고 잘 살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날 밤에 그의 생명을 가져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그 부자를 향해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부자가 그 동안 예비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더 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그러나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오직 오늘 뿐이었습니다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오늘도 우리는 많은 것을 계획하고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갑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우리가 내일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오늘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다면하나님을 대적하며 산다면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나에게 해당되지도 않는 미래의 일들을 마치 나의 소유인 것처럼허상을 붙잡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우리의 인생이 끝나게 될 때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우리는 육신 안에서 허비하였던 시간들에 대하여 눈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왜 나는 찬양을 부르는 그 시간에마음을 온전히 모아서 주님을 찬양하지 않았던가왜 그 때 나는 찬양을 부르는 시늉만 하면서옆 사람과 대화를 하였던가왜 나는 찬양을 부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다른 계획을 그리고 있었던가왜 나는 그 때 부모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지 않았을까지금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나는 그게 뭐라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마음을 빼앗겼던가?

 

우리가 오늘 붙들고 추구하는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우리가 다 내려놓기를 원합니다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하루라고 하였을 때그것이 무가치한 것이라면우리가 버리기를 원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과 우리의 생각을 더욱 성숙하게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모세의 지혜

우리 함께 모세의 시편인시편 90편을 보시겠습니다시편 90편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모세 자신은 120년까지 장수한 사람이었지만그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연수를 칠십 년이나강건하면 팔십 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인생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고어느새 우리는 먼지처럼 날아가 버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주님이 없는 인생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언제는 이것이 너무나 좋아보여서이것에 마음을 쓰고 수고하였다가그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것을 내버리고 또 다른 것을 향해 마음을 쓰고 수고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그 모든 것들이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어릴 적에여러 가지 장난감들을 너무나 좋아했습니다언제는 팽이치기를 하면서남들이 가지고 있는 비싸고 멋진 팽이를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다음에는 구슬치기를 하면서남들만큼 한 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구슬을 많이 가지고 싶었습니다또 그 다음에는 친구들이 가진 변신 로봇을 부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그러한 물건들이 그렇게 마음을 쓸 만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지금 선생님에게는 팽이도 필요 없고,구슬도 필요 없고변신 로봇도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세상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바라고 원했던 것들을 돌이켜보면서쓴 웃음을 지을지도 모릅니다그게 뭐라고내가 그렇게 안달을 하였을까우리 함께 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우리에게 우리의 날수 세는 것을 가르치사 우리가 지혜에 이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쓰게 하소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우리의 날수를 셀 수 있도록 가르쳐주셔서우리의 마음이 지혜를 가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오직 오늘 뿐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우리는 신중하게 될 것이고지혜에 이르도록 마음을 쓰게 될 것입니다.

과연 오늘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지혜로울까똑같이 축구를 하더라도이기기 위하여 악을 쓰고친구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아니면 친구들을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오늘의 축구를 마지막으로 내가 친구들과 작별을 하게 된다면?

오늘 점심시간이 친구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라면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점심을 먹을까나만 더 먹겠다고 욕심을 부릴까흘린 것을 남이 치워야 한다고 말다툼을 하고 있을까여러분정말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면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것입니다.

 

 

오직 오늘

이제 우리 함께 히브리서 3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가운데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강퍅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하라

성경은 우리가 오직 오늘이라 불리는 때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우리 가운데 아무도 죄의 속임수를 통해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에게는 날마다 말씀이 필요하고날마다 새롭게 주님과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왜 그렇습니까우리는 내일 있을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 나 알 수 없네하루 하루에 사네.”라는 찬송처럼우리는 하루살이같이오직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리석게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지금까지 내가 게으르게 살았다 할지라도오늘 우리는 부지런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어제까지 내가 거짓된 삶을 살아왔다 할지라도오늘만큼은 정직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여태까지 내가 참을성이 없이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할지라도이제부터는 주님과 함께 새롭게 되어용서하고 오래참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어리석게 아직 나의 것이 아닌 미래를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우리는 미래를 준비하고예비하고계획해야 할 것이지만오늘의 한걸음이 모아져서자연스럽게 미래가 되는 것이기에우리는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미래에 주님의 일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우리가 오늘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포기하고기꺼이 손해를 당하고용서하고사랑하지 않는데어떻게 미래에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5장 16-18절을 보시겠습니다.

16 시간을 되찾으라날들이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간을 되찾으라는 것은대가를 지불하고시간을 구입하라는 것입니다우리는 무엇을 주고 시간을 구입할 수 있습니까우리는 빈둥거리는 시간노는 시간을 지불하고말씀을 공부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우리는 때로 잠자는 시간을 포기하고의미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시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우리가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또 우리가 언제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간을 가장 절약할 수 있는 방법으로성령 충만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우리가 육신 가운데 머무를 때우리는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우리가 정말 오늘 하루를 가치있게 살기를 원한다면우리는 오직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오늘도 주님께서 주신 귀한 하루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서의미 있고 가치 있게 보내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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