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5.03.02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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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딤후 3:13-17)


제목 :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본문 : 디모데후서 3장 13-17절
13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그 까닭은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전체를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13절부터 17절까지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저는 개인적으로 디모데전후서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 나온 것처럼 저도 디모데와 비슷하게 어린아이 때부터 성경 기록들을 배우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유언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청년 디모데를 위하여 쓰여진 것인데 특별히 청년인 저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성경의 영감성과 관련해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영감”이라는 단어가 단 2번 등장하는데, 한 곳은 욥기 32장 8절이고 또 한 곳은 바로 오늘의 본문인 16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론
마지막 날들의 위험함

먼저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또한 너는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그 까닭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타고난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기 때문이니 너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6 이는 이러한 부류 중에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가 미련한 여자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 이런 여자들은 죄들로 눌려 있고 여러 가지 욕심에 이끌려
7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날들에 믿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빼앗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자들을 고문하며 재산을 몰수하고 죽이는 그런 위험한 때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너무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곳에 열거된 모든 항목들이 바로 저와 이 세대에 정확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고 타고난 애정도 없으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고집이 세고 쾌락에 사로잡혀있는 이 시대의 흐름과 너무나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은 다만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욱 사랑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흉내를 내지만 그 안에 참된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만연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배우는 것 같지만 결코 진리를 참되게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는 세대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8절, 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이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이들도 진리를 거역하니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것같이 그들의 어리석음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임이라.

성경은 입술과 모양으로만 경건하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을 가리켜 진리를 거역하는 자요,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주님을 향하여 뜨거웠고 어떻게 주님을 잘 따랐는지와 상관없이 오늘 주님을 참되게 따르지 않는다면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말을 잘하고 얼마나 많은 지식정보를 가졌는가와 상관없이 이런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며 그 어리석음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리의 목적
10절부터 1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고 있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 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기록들을 참되게 배우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교리, 즉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심과 믿음의 원칙과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이 교리를 참되게 받고 영접한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책망을 받게 됩니다. 10절과 16절을 잘 비교하며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에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이 말씀을 10절과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교리를 참되게 받은 사람은 삶의 방식에 있어서 강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책망을 참되게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게 됩니다.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자신의 목적을 바로잡은 사람은 이제 의로 교육을 받습니다. 즉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 경건에 이르도록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을 거듭나게 하실 때 원래 계획하신 그 목적대로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다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바울과 같은 고난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성경은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고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여서 자주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참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완벽하게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하게 살고자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13절에 나온 것처럼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고 또 속임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항상 말씀을 배우니까,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면서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위험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
14절,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그 까닭은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15 또 어린아이 때부터 내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 각자에게,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서 “그러나 너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쾌락을 따라 갈지라도, 이 세상 모든 믿는 이들이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모양과 껍데기만 가질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경건하게 살고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의 의지와 결심과 노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건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위험한 때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9절에서 살펴본 어리석은 자처럼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있습니다. 이 성경 기록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살펴서 알고 또 이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굳게 붙잡는다면 이 말씀은 능히 우리를 지혜롭게 하여 이 타락하고 위선적인 시대에서 우리를 이끌어주고 구원해줄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
마지막으로 16절, 17절을 말씀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단 한번뿐인 짧은 인생 가운데 저의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가망도 없는 자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악착같이 붙드는 믿음으로 이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거대한 흐름에게 건짐을 받고 참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설교제목 그대로 “말씀으로 나를 이끄소서”입니다. 참으로 주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귀한 말씀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5.01.2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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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이기는 힘(마 4:4)

제목 : 시험을 이기는 힘
본문 :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4절 한 구절만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읽는다.) 오늘 저는 “시험을 이기는 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세 번 모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말에는 “삼세판”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승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험과 정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에 사용된 표현인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는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심으로 말미암아 능히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완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더 많이 알고 만나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본문
전반적인 설명

본문 1절은 “그때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장의 끝 부분과 이어지는 시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3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친히 음성을 내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마치 욥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고 자랑하시는 말씀을 하신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된 것과 같이, 마태복음 3장에서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이 끝난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에 낙담하거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사랑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시험이 임하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금보다 귀한 단련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통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시험을 통과하시고 앞으로 사역하는 모든 일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뒤에 주리시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광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또 스스로 마귀와 겨루어 볼 뜻을 품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싸움이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전쟁임을 명확히 보여주시고자 사십 일간의 금식을 통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힘을 약하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
3,4을 읽어보겠습니다. 
“3 그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하라, 하거늘 4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시험하는 자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불과 사십여 일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귀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어 시험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배도 고픈 이때에 너의 능력을 좀 사용하여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해보라.”하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침례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고 선포한바 있습니다(마 3:9).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이 돌들로 빵을 만들 수 없겠습니까? 마귀의 요구는 어떤 사악한 죄를 저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빵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움직인다.”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임의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살고 계심을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
5절에서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시로 올라가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6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이는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음이니라, 하매 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위험에 처하여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움직여서 예수님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해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예수님을 충동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시험에는 한가지 위력이 더해졌는데 그것은 마귀가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는 “모든 길에서”라는 단어를 “언제라도”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답변은 “또 기록된바”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시험에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특정 부분의 말씀만이 아닌 모든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에게 편하고 좋은 말씀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또 기록된바”라는 표현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 시험
8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8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 주며 9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매 10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 11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

성경의 대 주제는 왕국이며, 주인공은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머리이시며 왕이십니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사탄에게 넘어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되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죽음을 통과하여 영광으로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모두 통치하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 이전에 십자가를 견디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을 다스리는 마귀는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주고 그것을 순순히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음과 십자가를 통과할 필요 없이 쉽게 얻으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다만 딱 한번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얻으려했던 그 영광을 단 한 번의 타협으로 쉽게 가지라고 충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음이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다 이루실 때까지 가지신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친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므로 직접 무엇인가를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기록된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절대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아무것도 임의로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움직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이것은 대언자 누구를 통해 기록된 것을 성취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칼로 말고의 귀를 쳐서 베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마 26:53,5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 24:44,45)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경의 기록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다같이 읽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는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시내 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을 직접 듣고 너무나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가 대언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시내 산은 너무나 멀고 오늘날 그분은 직접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기록된바”, “또 기록된바”, “이는 기록된바”. 주님께서는 과거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들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심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해서입니까? 사십 일을 밤낮으로 굶어서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 지금 하나님께서 직접 입을 열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엄중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힘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소생시키고 오늘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주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4.07.3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금요설교훈련 / 로빈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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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 3:1) 

제목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본문 :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히 3:1).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절 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을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서론
모든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들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나신, 가장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는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깊이 생각하도록 우리를 지도해 주는 귀한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오늘 저는 많은 귀한 말씀들 가운데 한 구절인 히브리서 3장 1절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본론
거룩한 형제들아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를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라는 수식어와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모두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단어들입니다. 원래 우리의 호칭은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더럽고 가증한 자들아”,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잃어버린바된 죄인들아”, “진노의 자녀들아”, “불순종의 자녀들아”. 원래는 이렇게 불려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이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더럽고 추악한 죄로 찌들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하다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요 벌레에 불과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거룩한 형제들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을 보시면 “이는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났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더럽고 수치스러운 죄 가운데 거하던 우리들을 친히 거룩히 구별하시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저명하고 높은 사람들 앞에서 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모른 척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형제들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오늘의 본문은 또한 우리를 가리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들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했던 자들입니다(히 11:13,16). 우리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난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순례자”라는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제가 힘이 없고 어려울 때 날 기다리는 밝은 곳,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또 이 땅에서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는 귀한 찬송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거룩한 형제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형체가 없이 사라질 것들을 알고 믿으며, 오직 영원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길을 나선 나그네요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순례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치 존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크리스천”이 갖가지 장애물들을 통과하여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너무나 좋고 영광스럽지만, 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좁고 협소하며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 다만 어떤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거룩한 형제들이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란 다만 무엇으로부터 분리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여 순례의 길을 더욱 전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우리들은 마땅히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오늘의 본문에서 힘주어 권면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의 흐름과 이어지는 가운데 결론적으로 오늘의 권면이 등장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권면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힘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계속하여 하늘의 부르심에 깊이 참여하여 전진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는 무엇이십니까?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약의 첫 번째 사도가 있다면 열두 사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많은 무리들 가운데 제자들을 선별하시고,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명을 구별하여 사도로 파송하신 우리 주님 자신이 먼저 사도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최초의 사도이십니다. 그분은 높고 높은 영광이 가득한 하늘로부터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은 첫 번째 선교사이자 사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는 사도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7절에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추시며”라고 말씀하시고
2장 9절에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라고 말씀하시고
2장 10절 후반부에는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들을 통하여 완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라고 기록하시고
18절에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낮아지셨고 어떻게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반복하여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여 고난의 길에 들어선 우리들이 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하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저는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아프리카 가나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다투었던 간증이었습니다. “하나님 오히려 필리핀이나 태국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가나는 말라리아의 위험도 있고 생활도 너무 불편합니다. 이곳은 도대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같지가 않습니다. 가나만 말고 다른 나라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원래 하늘에서 살았다. 그런데 내가 나사렛에 와서 살았던거 너 기억하니? 내가 너를 구원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 알고 있니?” 그때 그 선교사님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님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분명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사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면, 과거에 그분은 대언자요 사도이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그분은 왕이요 통치자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레위의 혈통을 따른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히브리서 7장에서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포함한 히브리서 전체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계속해서 드려야만 하는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드린 한번의 제사로써 우리의 속죄사역을 완전히 완성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 안에서 앉을 수 없고 계속해서 서서 섬겨야 하는데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앞으로 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완전한 성막을 통하여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오직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히 9:11,12).
또한 히브리서 8장 1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말한 것들에 관한 요점은 이것이니 곧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라.”라고 요점정리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 4:15). 

결론
우리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하여졌고 형제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가 다시 하늘의 거룩한 곳으로 가셔서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걷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친히 자신을 낮추시어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하신 우리의 사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실 수 있는, 그러나 완전히 승리하신 대제사장을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롭게 힘을 회복하여 전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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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4.04.2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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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해방하신 하나님(롬 8:1-4)


제목 :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
본문 :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4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심이라"(롬 8:1-4).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읽는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말씀은 너무나도 깊은 풍요로운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제가 조금 맛본 것을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이 7장의 흐름을 이어받아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간략히 살펴보면 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한가지 법칙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 21절 앞부분을 잠시 보시면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결국에는 나의 실질적인 지체들을 죄의 법에게로 사로 잡아가는 아주 강력한 법칙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낙망과 정죄 속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5절에서 놀라운 반전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오늘의 본문 8장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론
가장 무서운 정죄 -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오늘의 본문 1절 말씀에서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정죄”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원래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어서 하나님의 맹렬한 정죄와 심판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더럽고 가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만족하셨으며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정죄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소자인 마귀의 고소와 우리 자신의 정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정죄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의롭고 영적인 율법의 말씀을 이루고 살아내고자 분투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더욱 죄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행하고자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죄를 이길 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도 없었습니다. 의지와 결단과 노력으로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내 그는 이렇게 소리칩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내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러나? 도저히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나는 더욱 죄를 짓는구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을 만족케 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죄가 완전히 거두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보다 더욱 엄격하게 우리 자신을 정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죽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망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죄를 거절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야 마는, 죄의 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죄는 우리가 행한 행위들로 인한 것을 넘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야 마는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정죄입니다.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제 정죄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어쩌면 매우 자주 이러한 정죄 가운데 빠져듭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직접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내 안으로 들어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분 안에 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해방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 안에 머무른다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걷는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에 매여 맹렬한 정죄와 탄식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는다면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말씀은 바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에 주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나를 해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아멘!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
3절과 4절은 우리를 어떻게 자유케 하셨는지를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사역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정죄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7장 12,14절에 나온 것처럼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영적인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일점 일획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 안에서 율법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즉시 죄와 사망을 만나게 됩니다. 계속해서 이루고자 시도할수록 계속해서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를 성취하는 일은 육신이 연약하므로 할 수가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육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그 법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기 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결단하고 노력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용도 폐기하심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은 “아,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곧 내게 큰 권능을 주셔서 하게 하셨구나.”라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나 이런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마음 속 깊이 새기기를 원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육신을 완전히 폐기해 버리셨습니다. 육신을 수리하고 부축하고 개발시켜서 능히 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은 육신의 모양으로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은 온 인류의 육신을 대표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정죄받으실 때 그분은 나의 육신을 포함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용도 폐기될 때 나의 육신도 함께 용도 폐기되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신비여, 논쟁의 여지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지사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육체를 용도 폐기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모든 육체를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정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정죄받았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죄하는 우리 자신은 이미 주님과 함께 정죄받고 죽었으며 폐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육체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육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3절에서 주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하였다면, 4절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의 말씀은 “하셨느니라.”고 끝마치지만, 4절의 말씀은 “하려 하심이니라.”고 끝마치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은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실이며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4절에서는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육신으로부터,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이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고자 두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육신을 대표하여 정죄를 받으신 것이며, 하나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친히 그 일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거침이 되는 육체를 처리한 것이며, 이제는 권능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다 약하고 무능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절망과 정죄의 골짜기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나타나서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으로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비라면, 성령님의 동행하심은 은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은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권능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 속에서부터 원하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마음으로는 원하여도 실제로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결론
성령님을 따라 걷는 우리
이제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미세한 성령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주의하며 순종하여 걷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어떤 말이 붙어 있습니까?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는 다만 오순절날 성령님이 임하신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다만 성령님을 받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여 걷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또 다른 이름은 성령행전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온전히 걸어갔을 때 일어난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과 같은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데마는 성령님을 모시고도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사도바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님을 따라 걷는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기를 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친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역사를 성취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따라 걷는 믿음의 실재를 가지기 원합니다. 다시 한번 나를 해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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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2.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1세)
제목 : 성경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ible(요 5:39,40)
본문 : 요한복음 5장 39-40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장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 40절 두 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9 ¶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40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성경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ible)”입니다. 어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앞에 섰지만 저의 어떠함을 보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여 유익을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말씀에 기름 부어 주시고 저를 붙들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 생명의 검색엔진
오늘의 본문 39절은 “성경을 탐구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탐구하라”는 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Search”인데, 이것은 성경을 찾고 뒤지고 수색하고 추구하며 유심히 살펴보고 탐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두컴컴한 밤에 서치라이트를 환하게 비추어 구석구석을 살피듯이 우리는 성경을 향해 우리의 서치라이트를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이 아주 발달되어서 백과사전이나 책을 많이 뒤지지 않아도 웬만한 자료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와 정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이트를 보통 “서치엔진”, “검색엔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검색엔진”을 통하여 많은 전문지식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 목사님의 통풍에 관해서 잘 정리한 사이트를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와, 요즘에는 의사들이 보는 두꺼운 책을 뒤적이지 않아도 쉽게 이런 정보들을 구할 수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은 바로 주 예수님과 생명을 제공하는 검색엔진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인터넷의 검색엔진을 이용하듯이, 매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성경의 검색엔진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공해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바로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주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며, 주 예수님을 만나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생명이신 주 예수님
주 예수님께서는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또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주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바로 생명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요 6:48). 

오늘날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죄인이 새 생명을 얻고 거듭나기 위해서도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하며, 이미 생명을 얻어 그분의 양무리가 된 교회도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기 위하여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주 예수님 없이는 생명의 탄생도, 생명의 자라남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생명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합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주 예수님은 분명 우리의 생명을 풍성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안타깝게도 주님의 생명을 풍성히 얻고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은 생명을 풍성케 하려고 오셨지만 우리는 정작 그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생명으로 거하시지만 우리는 그 생명을 충만히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생명을 얻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상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주 예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하고 사모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풍성히 얻어 주 예수님처럼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애통하고 눈물도 흘리며 매번 새롭게 결심합니다. “오늘은 반드시 이 생명으로 살리라!”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생명을 풍성히 얻기 위해 주님 자신에게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실생활 가운데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너무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늘 생명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우리는 생명을 풍성히 얻기 위하여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 주님께 나아가는 것 - 성경을 탐구함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의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오늘날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주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셋째 하늘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진지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도 있고, 교회의 집회 가운데 나아와 주님의 임재를 찾을 수도 있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려고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본문 안에서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곧 “성경을 탐구하라”는 말씀과 하나임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에는 말씀에 기록된 약속을 붙잡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교회의 집회 가운데는 기록된 말씀의 선포가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데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 예수님께 생명이 있고, 성경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경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자라남은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서는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찾고 샅샅이 탐색하고 공부할 때 생명을 풍성히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풍성히 얻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기초요 믿음의 기초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사상과 말들로부터 벗어나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상고하지 않으면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탐구하지 않으면 결코 생명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루 10분 성경을 찾으면 그 만큼 성장하는 것이고, 하루 1시간 성경을 상고하면 그 만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되찾으라.”하셨고 “심는 대로 거둔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생명의 말씀에 시간을 투자할 때 우리는 그 만큼 생명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넘어지고 무능하고 실패하는데 있지 않고 주님과 멀어진 데에 있습니다. 주님과 멀어진 원인은 우리가 죄를 지은 것에 있지 않고,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말씀 앞에서 풀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성경을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다만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 않으셨고, “성경을 탐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편 77편 6절에서는 “밤에 부른 나의 노래를 기억하고 내 마음과 이야기하며 내 영이 부지런히 살펴 이르기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펴”라는 말씀의 영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탐구하라”는 단어와 같은 “Search”입니다. 탐구한다는 것은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을 탐구하라는 것은 다만 쭉쭉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머물러서 깊이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7장에서는 성경을 상고하는 한 무리, 베레아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자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12 그들 중의 많은 사람이 믿고 또 그리스 사람인 귀부인들과 남자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리하더라. (행 17:11,12). 
베레아 사람들은 다만 말씀을 전심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말들이 그런가 하여 매일 성경을 탐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가 오늘 본문과 같은 단어입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매일 성경을 탐구하고 그러한가 살폈습니다. 그 결과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매일 읽어나갈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묵상하고 찾아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지속되는 추구가 있을 때 그 결과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 생명 = 빛
요한복음 1장 4절
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생명이 자라난다는 것은 곧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이고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인식이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할 때 빛과 계시와 인식을 얻게 됩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 119:130).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취는 빛이 바로 우리의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우리가 빛을 얻을 때 생명을 더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는 것에 근거합니다. 모르는 사실을 믿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은 결단력과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온전히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모든 문제가 말씀에서 빛을 얻는 것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자라는 문제는 오직 빛과 계시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빛과 계시는 내 안을 들여다보고 나를 살피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을 탐구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찾고 탐구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빛과 계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빛과 계시를 얻을 때 생명을 풍성히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카톨릭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 수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죽임을 당하던 시대를 가리켜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시대를 우리는 “암흑시대”, “빛이 없는 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카톨릭은 일반인들에게는 성경을 금서로 정하였고, 오직 성직자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오직 로마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고자 하여도 당시에는 성경에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성경을 탐구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탐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가 가지는 참 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중심적인 역사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95개조 반박문을 드높이고 그의 용기를 칭송할지 모르겠지만 마틴 루터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보급한 것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자국의 모든 사람들이 빛과 계시를 얻을 수 있도록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 성경입니다. 암흑시대를 종결하는 찬란한 빛 가운데로 인류를 인도한 위대한 역사는 마틴 루터가 이룩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이룩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마틴 루터가 아닌 성경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암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의 면에서 보자면 황폐하고 메마른 시대라고 말할 수 있고, 빛의 면에서 보자면 암흑과 같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마귀는 사람들의 손에서 성경을 강제로 빼앗고 성경을 읽고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원수는 그보다 더 교묘하게 우리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있습니다. 세상의 분주한 소식들과 생활 속의 시끄러운 환경들로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전한 흑암 가운데로 빠질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풍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메마른 이유는 우리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서, 즉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에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간을 생명으로 여기고 사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명은 풍성해 질 수도 자라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자라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야위고 약해지고 황폐해져 갈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두컴컴한 흑암의 시대를 뚫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찬란하게 비춰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사명을 짊어져야 합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 5:39).
우리를 무겁게 하고 분주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 우리에게 주신 복 - 진리의 말씀, 진리의 영, 진리의 기둥과 터전
우리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원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이 생명을 풍성히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얻고자 하는 원함보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원함이 더 크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성경을 탐구하여 빛과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까이 다가서셔서 우리에게 풍성히 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빛과 계시를 풍성히 얻지 못하는 이유는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간절히 사모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과 생명을 풍성히 주시고자 주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바로 주 예수님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 말씀을 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넘치는 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경의 저자이신 진리의 영을 내주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말하는 “저자 직강”을 들을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진리의 기둥과 터전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안배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며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생명 얻기를 사모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히 복 주시며 풍성히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나는 부요하다”, “배부르다”하는 생활 태도입니다. 오, 주께서 우리에게 가난한 영을 허락하시고 갈급함을 허락하시기 원합니다. 


** 실제적인 변화
우리가 생명을 풍성히 얻고 믿음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실제적인 시간표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잠자는 시간이 바뀌어야하고, 우리의 일어나는 시간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게으르고 태만한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성경을 상고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며 형제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둘째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인용한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 말씀에 이어지는 6,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고
7 너는 그것들을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가 네 집에 앉을 때에든지, 길을 걸을 때에든지, 누울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을 말할 것이며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는 말씀을 마음속에 두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해 말하고,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 그 말씀들에 관해 말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기 위하여 시간을 따로 때어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바로 우리의 실제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의 시간동안 성경을 상고하고 있습니까? 하루에 얼마나 자주 성경 말씀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모였을 때 대화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어떠했을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성경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때 길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할 때만이 길을 얻고 생명을 얻고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으로 돌아갈 때 주 예수님을 만나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생활에 실제적인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 결론 - 성경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우리의 믿음 생활이 완전히 성경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패의 원인은 오직 성경에서 멀어진 데에 있습니다. 죄를 짓고 실패를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과 멀어진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생명을 추구한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을 상고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추구한다는 말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내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성경이며, 우리의 생명의 기초도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잠 8:17).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 주시기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gospels/43john/43john053940_backtothebible_20031022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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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0.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1세)
제목 : 우리가 구할 것(눅 12:29-34) 
본문 : 누가복음 12장 29-34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2장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9절부터 34절까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의심하는 마음도 갖지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민족들이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1 ¶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위하여 낡지 않는 가방들 곧 하늘들에서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예비하라. 거기서는 도둑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좀도 먹지 못하느니라.
34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저는 오늘 "우리가 구할 것"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이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잘 알려지고 익숙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으로 만들어진 찬송가들도 여럿이 있고, 우리가 기도회로 모였을 때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이 한 말씀을 붙잡고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인생의 푯대를 다시 한 번 분명케 해주는 귀한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 성령 안에서 누리는 왕국
오늘의 본문 29절에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며 의심하는 마음도 갖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31절에서는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은 성령님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린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앞장에 있는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날 누군가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따라 이생의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다면 그는 성령님의 임재와 동행하심과 충만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히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만 이 땅의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기 원합니다. 


** 재물에 대한 경고
누가복음 12장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13절을 보시겠습니다. 
¶ 무리 중의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 형제에게 말씀하사 그가 나와 상속 재산을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후에 나오는 누가복음 12장의 모든 구절들은 이 말 한마디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나누는 자로 삼았느냐?"고 반문하시며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15절에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라.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 소유물에 있지 아니하니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할 가장 좋은 것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물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 역시 오늘의 본문말씀과 같이 너무나 유명해서 아마 우리 중에 모르시는 분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고 이제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0절에 "너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네게서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는 이 비유를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사용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땅의 생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오늘 밤 당신이 죽는다면 이 세상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일이 헛되다는 것을 경고해 주기 위해서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만 좀 더 안락한 삶, 안정된 삶, 편안한 삶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먹을 것, 나의 입을 것, 나의 거할 처소, 나의 미래,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향해서 "너 어리석은 자야"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의 삶만을 바라보며 사는 죄인들도 어리석은 자이겠지만,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안개와 같이 짧은 이 땅의 삶만을 바라보며 산다면 그것은 얼마나 더욱 비참하고 어리석은 삶이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서 나온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은 22절부터 구구절절이 탄식하시는 가운데 말씀하고 계십니다. 24절에 "너희는 그 날짐승들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 26절에 "그런즉 너희가 가장 작은 그 일도 능히 행하지 못하거든 어찌하여 나머지 일들을 염려하느냐?", 28절에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이 모든 것은 세상 민족들이 구하나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늘날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민족들과 같이, 이방인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수많은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며,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며 오늘도 탄식하고 계십니다. "오 너 어리석은 자야",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애통하고 탄식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길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민족들과 같이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돌이키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버림받은 자처럼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을 돌이키기 원합니다. 


** 우리가 구할 것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해야 할 한 가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31 ¶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에게 참으로 기쁘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왕국"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그 가장 좋은 것을 구할 때 아버지는 참된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도 아들이 불량식품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고 쓸모없는 것을 구하기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가장 좋은 것을 구할 때 아버지는 기뻐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왕국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냥 억지로 손에 쥐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여야, 그것을 구하여야, 기뻐하며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한 사모함이 우리 마음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앞에서 이 하나님의 왕국을 일차적인 의미로써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이 하나님의 왕국은 다만 현재 우리가 영 안에서 누리는 주님과의 교제일 뿐만 아니라 장차 실제로 이 땅에 세워질 왕국에서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문맥에서 주님은 곧바로 주인과 청지기의 비유를 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3,44절을 보시겠습니다. 
43 그의 주인이 올 때에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도다.
44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을 치리자로 삼으리라.

"오 너희 어리석은 자들아,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부디 이 땅의 천하고 하찮은 것들을 구하지 말고 영원한 왕국과 통치를 구하라. 내가 진실을 말하노니, 주인이 그 사람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스릴 자로 삼으리라. 너희에게 그 왕국을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참된 기쁨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방인들이었을 때에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장차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며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들어 이 세상을 한번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한번 바라보고, 우리 앞에 놓인 인생길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안개와 같이 짧고 보잘 것 없는 삶에 소망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고 허무한 것입니다. 여기에 저보다 연장하신 모든 형제님들도 그렇게 고백하실 것입니다. 야곱도 파라오 앞에서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 순례 길의 햇수의 날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삶의 햇수의 날이 얼마 안 되고 험악하였으며 내 조상들이 순례하던 때에 그들이 누린 삶의 햇수의 날에 미치지는 못하나이다." 130세가 된 야곱조차 "내 생애의 세월이 짧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짧고 허무한 삶 속에서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며 구하며 수고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들은 참되게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며, 영원에 속한 것이며,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마음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왕국을 구하는 자의 삶
그렇다면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다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의 왕국을 주십시오..”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에는 “값없이”, “원하기만 하면”,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국을 받는 문제는 다릅니다. “하나님, 왕국을 주십시오. 아멘.”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왕국이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주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어떠한 경고도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것도 다 구하고 왕국도 덤으로 구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둘 중 하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지도 말고 마음에 의심하지도 말라.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이와 같은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있는 마태복음 6장에서도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존중하고 다른 쪽을 업신여기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오늘의 실제적인 필요에 대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중심적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다면, 그는 재물을 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존중하던 것들을 업신여겨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3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위하여 낡지 않는 가방들 곧 하늘들에서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예비하라. 거기서는 도둑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좀도 먹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유일한 방법,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여 해어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다면 그는 가진 것을 팔아서 다른 영혼들을 섬길 것입니다. 가진 것을 얼마나 포기하느냐가 바로 하나님의 왕국을 얼마나 구하는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많이 버린 자에게 많이 보상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많이 버린 자가 가장 많이 하나님의 왕국을 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11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이것들을 피하고...
18 또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
19 또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 이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하려 함이라. (딤전 6장)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손실로 여기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이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있던 어떤 사람들이 재물 때문에 믿음에서 떠나고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삶입니까? 조금 더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소유하는 것입니까? 조금 더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어지지 않는 돈주머니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잃어버리는 삶을 사는 자들, 정리하는 삶을 사는 자들,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한 가지를 오늘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며 너희 자신을 위하여 낡지 않는 가방들 곧 하늘들에서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예비하라.”


**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고
“너희가 가진 것을 팔아서 구제하라.”
는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재물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다 내어놓고 가난한 성도들과 모두 함께 사용한 것처럼, 구제하는 일을 위하여 일곱 집사를 세운 것처럼 구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이 세상의 자원봉사단체들이나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단체들과 같이 행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자선 사업가들과 같이 계속하여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가진 무거운 것들을 모두 처리하고 주님을 전폭적으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완전히 순종한 한 사람을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키프로스 지방 출신의 요세라 하는 레위 사람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그것을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라.)
바나바라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가진 토지를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나바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다시 돈을 벌러 떠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자신의 토지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은 바나바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이렇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여 가진 것을 팔아 구제하라는 말씀을 온전히 순종한 바나바에게 주님께서는 놀라운 섬김의 기회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내게 따로 구별해 놓으라.”하나님께 따로 구별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치 레위인들이 오직 성막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따로 구별된 것처럼, 바나바와 사울은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따로 구별되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는 자는 이생의 일들에 얽매일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오직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려 둔 베드로의 이 고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담대하게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주여! 보십시오. 우리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나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재판하리라.”
우리가 만약 이 세상에서의 안락과 재물을 모두 버려두고 오직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거니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장차 이 땅에 임할 왕국에서 우리에게 심판과 통치와 다스리는 놀라운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길에 실제가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다 버리고 따르기 원합니다.”라는 고백은 이제 족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보소서, 주여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외에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나이다.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이제는 다 손실로 여기나이다. 나의 명예, 나의 장래, 나의 재물, 나의 야망, 나의 자랑... 이 모든 것은 세상의 민족들이 구하는 것이니이다. 오, 주여! 우리는 오직 주님 자신을 얻기 원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결론 - 적은 무리야, 두려워 말라.
저는 이 한번뿐인 인생을 참으로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의 인생은 정말 허무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길을 따르려고 할 때 저의 장래와 경제적인 압박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제적으로 이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주저함과 두려움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을 하시면서 사랑어린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한 사람, 개인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은 양 무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작고 연약한 무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꼭 우리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우리의 부단한 결단과 헌신도 필요하겠지만, 다만 그것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사랑어린 음성으로 우리에게 위로하시는 주님께서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적은 무리로 모였습니다. 나 혼자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놀라운 왕국과 영광을 사모하며 함께 따르고자 하는 동료들, 지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 속에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1,32절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31 ¶ 오히려 너희는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양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왕국을 너희에게 주시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시느니라.
주님이 우리 모두를 복 주시기 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nt/gospels/42luke/42luke122934_ourprayer_20030820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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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딤후 2:15-21)/로빈


2002.12.18.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본문 : 디모데후서 2장 15-21절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16 그러나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을 피하라. 그것들은 커져서 더 경건치 아니함으로 가리라.

17 그들의 말은 궤양이 파먹듯이 먹을 터인데 그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잘못하였으니 곧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느니라.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초는 확고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 하며 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 하는 글이 담긴 이 봉인이 있느니라.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저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잘 준비되어서 주님 오심이 정말 가까운 이때에 주님을 섬기는 자로써 발견되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또한 저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얼마 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고 저도 잘 알고 있는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다시 펴보고 또 펴보고 하면서 정말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제가 발견한 은혜들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 말씀을 공부하라

“누가 주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때 우리는 곧바로 오늘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15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서 공부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하며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이 서신에서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여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로 다음 장인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준비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본문 2장 18절에 나온 것처럼 후메내오와 빌레도 같은 사람들이 어떠한 진리에 관해서 정도를 벗어나서 말할 때 자신의 믿음이 뒤엎임을 당하고 혼란 속에 빠질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참된 진리는 온대간대 없고 사람의 말들과 전통과 거짓 교리들이 난무하는 이런 어두운 시대에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지키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 부끄럽지 않고 인정받는 일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더 진리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시고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강조하려면 정말 시간이 부족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아군과 대적을 구분하지 못하며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의 명령과 대적의 혼란케 하는 말을 분별하지 못하는 군사와 같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규칙도 자신의 골대가 어디인지도 라인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운동선수와도 같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가라지가 무엇인지 잡초가 무엇인지 알곡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정말 기쁘게 하고 싶어도, 자신의 팀을 크나큰 승리로 이끌고 싶어도, 정말 좋은 곡식들로 풍성한 수확을 얻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먼저 아군과 대적을 구별할 줄 알아야하며 대장의 음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는 경기의 규칙과 규율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는 곡식을 거두기 전에 무엇이 알곡인지 무엇이 가라지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며 주님의 필요한 사역에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 큰 집 안에 있는 그릇들 -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의 차이

저는 오늘 이 말씀과 더불어 우리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다른 한 가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것은 먼저 저에게 많은 유익이 된 말씀이었고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2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자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 군대대장과 군사들, 목자와 양들, 참포도나무와 가지들, 주인과 종들, 모퉁이의 머릿돌과 산 돌들. 이렇듯 성경에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주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그릇들“로 묘사한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우리가 질그릇에 보배를 가진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서는 주님이 사도바울을 가리켜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9장 22,23절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진노의 그릇들”이라 말하고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켜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는 남편들에게 아내된 자매를 “더 약한 그릇”으로서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긍휼의 그릇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20절에 나타난 큰 집, 이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많은 그릇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그릇들입니다. 이 집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지만 어떤 그릇들은 금과 은으로 되어있어 귀하고, 어떤 그릇들은 나무와 진흙으로 되어있어 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금과 은으로 되어있는 주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21절 말씀을 잠깐 보시면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귀한 그릇은 곧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한 그릇, 천한 그릇과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냥 나 혼자 식사할 때, 또는 가족끼리만 식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좀 천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일 년에 한두 번 쓰일까 말까하는 그릇을 귀한 그릇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쓸 수 있는 그릇을 말합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 이것이 귀한 그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주 사용하는가 또는 어쩌다 한두 번 사용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하기에 합당한가 여부에 따라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이 나뉘는 것입니다. 

만약 자주 사용하는 그릇은 천한 그릇이고 어쩌다 한두 번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면 아주 바쁘게 열정적으로 일생을 드려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한 사도바울 자신은 천한 그릇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귀한 그릇은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형제나 자매를 보고 “아, 저 지체가 참으로 귀하다.”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형제나 자매의 은사와 재능을 보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저 형제는 참 귀한 은사가 있구나.”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한 지체의 간증을 듣고 “아, 저 자매는 주님 앞에 참 귀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하면서 귀히 여길 것입니다. 제가 담대히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보배로운, 가장 귀한 보혈로 값 주고 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한 영혼이라 하셨는데 여기 모여 있는 우리들 각자 각자의 가치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어떤 지체에게 두드러지게 뛰어난 은사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표현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안에 들어온 모든 그릇들이 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 그릇들이 다시 한 번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으로 나뉘는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을 두신 분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하늘과 땅을 나누신 하나님께서 두신 구분입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귀한 그릇이고, 누가 천한 그릇입니까? 칼빈주의와 같이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가 귀한 그릇인지 어떻게 해야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성적으로 머리가 좋아서 말씀을 공부하는데 쏙쏙 잘 외우고 잘 이해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재능이 많아서 교회에 와보니까 이것저것 섬길 것도 많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말을 너무나 잘해서 복음도 잘 전하고 교제도 잘하고 그런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천성적으로 인내심이 많아서 어떠한 화가 나는 일에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귀한 그릇입니까? 누가 귀한 그릇입니까?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두 번 읽기)

오늘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있는 모든 그릇들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아, 저 형제는 원래 귀한 그릇이야. 그리고 나는 그냥 원래 천한 그릇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 큰 집 안에서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없나 찾고 계십니다. 우리 같으면 필요한 그릇이 있을 때 직접 깨끗이 씻어서 쓰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릇인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각 집안에서 쓰이는 그릇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릇인 우리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직접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그릇들의 주인이시지만 아무 그릇이나 갖다가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깨끗하게 한 귀한 그릇만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한다면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귀한 그릇은 없으며 처음부터 천한 그릇은 없는 것입니다. 이 집안에 있는 그릇이라면 누구나 귀한 그릇이 되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 귀한 그릇의 조건

21절을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고, 거룩하여지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여 지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귀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자신을 거룩케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곧 자신을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 첫 부분에서 함께 보았던 디모데후서 3:17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은 말이 지금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곧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으로써 선한 일을 사모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예비 되고자 한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말씀을 공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식과 은사와 재능이 있으면 귀한 그릇으로써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 지식에 능통하고 은사와 재능이 풍부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는 기준, 귀한 그릇으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 유일한 기준, 그것은 곧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로써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할수록 엄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아주 잘 공부해서 지식적으로 아주 뛰어난 위치에 있습니다. “아, 나는 이제 주님께 인정받는 일꾼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 또한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여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척척 펴서 보여주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는 말씀들을 다양하게 전할 수 있게 되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의 이 믿음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본문을 대할 때 한 가지 엄중한 것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인이 그릇인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를 더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끗함”, “정결함”, “거룩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성경에 정통하다 할지라도 은사와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천연적인 성품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학력이 아주 우수하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자기를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그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21절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절에 나온 것처럼 “속되고 헛된 말장난들”, 또 18절에 나온 것처럼 “진리에 관하여” 잘못한 말, 그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뒤집어엎”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절 후반부에 나온 것처럼 “불법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22절에 “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것”, 23절에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3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항목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게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인 그릇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금과 은, 나무와 진흙

20,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 그러나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어떤 것들은 존귀에 이르고 어떤 것들은 수치에 이르나니

21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온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연상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일한 것들을 쌓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믿음의 섬김들을 금, 은, 보석과 나무, 짚, 그루터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분이 나오고 있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들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성막에 쓰이는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와 긍휼의 자리, 그리고 성소 안에 있는 일곱 금 등잔대를 비롯하여 성막에 속한 대부분의 기명들이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은기명, 놋기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금으로 입혀지거나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불같은 시련을 통과한 믿음을 가리켜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흙보다 귀한 믿음, 나무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금보다 귀한 믿음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 우리는 믿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은 주님의 보혈에 대해 말할 때에도 금이나 은 같은 썩어질 것들도 구속된 것이 아니라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은 또한 구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보혈을 말할 때 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는 사람의 혼을 구속할 때 은 세겔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민수기 3장 47-49절, 레위기 27장 3,4절, 출애굽기 30장 13-1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2편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리켜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금과 은은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금과 은으로 된 귀한 그릇이 되려면 성막에 속한 금 기명들이 오직 주님께만 속했던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께만 속해야 합니다. 또한 불같은 시련을 당할 때에 믿음과 인내로 견뎌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구속받은 자로써 구속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정화된 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무와 진흙으로 된 그릇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무는 성경에서 “인간” 또는 “인성”을 상징합니다. 사사기 9장에서는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성경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나무 또는 무화과나무로 비유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1편에서는 의로운 자를 가리켜서 강가에 심긴 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로마서 11장에서는 유대인들을 본래의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이방인들을 야생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 여러 곳에서 나무를 사람으로 상징한 것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로 된 그릇이 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무로 된 그릇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들을 즐겨듣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천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육신적이고 인간적이며,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자아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이 처리되지 못한 지극히 인간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릇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사람의 말들보다, 나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중하게 여기는 그릇들이 되기 원합니다. 나의 옛 성품들과 옛 습관들을 주님이 만지시고 고치고자 하실 때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려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온유함, 좋은 것 같이 보이는 성품들도 모두 처리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였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성품인 것 같지만, 때로 우리의 옛 성품에 속한 인내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담을 순종치 않고 견디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랑이란 성품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조차 인간적으로 덮어주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아주 잘 들어주는 성품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때로 그러한 성품은 정작 해야 할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부탁한 일들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천연적인 옛 성품들은 그것이 좋아 보이든 그렇지 않든 주님 앞에 다 처리 받고 오직 우리의 성품이 일곱 번 정화되어 나온 은과 같은 주님의 말씀, 금 사과와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질그릇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어 킹제임스성경이 있으신 분들은 여기에 “질그릇”이라는 단어에 “earth”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earth”라는 단어는 “진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지구”, “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진흙으로 된 그릇은 무엇이겠습니까? 땅에 속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로서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는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흙으로 된 그릇은 이 땅에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 정착하며 마음까지 세상에 내어 줘버린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소망을 천히 여기고 이 땅의 것들을 귀히 여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을 사용하실 수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릇이 천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존귀에 이르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리라.”

우리는 이미 주님의 보혈로 구속받아 “거룩한 성도”들이 되었지만 우리 앞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걸어 가야할 거룩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옛 성품과 천연적인 기질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쉽게 에워싸는 죄악들과 나를 이 땅에 눌러 붙게 만드는 모든 천한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고자 자신을 예비하는 사람은 곧 자기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곧 주님께 귀한 그릇인 것입니다. 


** 거룩이란 주제에 대한 성경 전반적인 언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거룩한 책 성경에서는 “거룩”이란 주제에 대해서 아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다음에 있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계속해서 살펴볼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는 바로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의 주제가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땅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 수많은 거룩에 대한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이라는 주제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누누이 거룩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그룹들이 이사야서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서까지 계속해서 찬양하는 한 가지는 주님을 향해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는 이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것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 긍휼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고 “은혜가 풍성하시도다.”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도다.”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떠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대면할 때 가장 먼저 주님의 거룩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욥이 그러했고 이사야가 그러했고 사도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주님을 대할 때 두려워서 납작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내게 화가 있도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또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거니와 내 눈이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도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의를 줄곧 주장하던 욥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 

유월절날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던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나는 주님을 알아.”라고 말하는데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인식이 없다면 그는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아야 하며 그분이 또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는 그분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나그네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을 말할 때 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한없이 드러낸 일임을 말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기준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보여주는 것임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못 박으신 것은 우리에게는 사랑이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는 거룩에 대한 만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을 못 박았지만 또한 하나님의 거룩이 그 아들을 못 박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뻐 찬양해야 하지만 한 면으로 우리는 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와 교제하시려고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를 그의 거룩한 교제, 빛 가운데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참으로 불결한 입술을 가진 자가 주님의 보혈로 거룩케 되어 거룩하신 주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주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이 돌려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세상이 생각하는 거룩과 그리스도인의 거룩의 차이점

우리가 거룩이란 주제를 생각하면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거룩이 어디에 근거했는가 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경건을 말하고 거룩을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도 거룩하다고 말하고 저기 스님도 거룩하고 신부님도 거룩하고 수녀님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거룩,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고 추구하는 거룩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로 보자면 많은 부분 흡사하고 비슷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릅니다. 마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꽃이 진짜 꽃과 모양도 비슷하고 향수를 넣어 향기까지 똑같다 할지라도 그 본질적으로는 다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 안에 새롭게 주어진 새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생명,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생명, 그 생명에서 우러나오는 거룩이야말로 참 거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함으로써 이루어진 거룩,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거룩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9절에서 “주께서 자신의 백성인 자들을 아시느니라”라고 나온 것처럼 “주께 속한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다 같은 금일지라도 이집트에 속했을 때에는 우상이요, 세상이 될 수 있지만 성막에 속하였을 때에는 거룩한 기명이 되었듯이 우리들도 오직 주께만 속했을 때 참된 거룩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 성령 충만하지 못함, 곧 거룩하지 못함

오늘날 저 자신과 우리교회, 더 나아가서는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거의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은 성경을 가지기 위해 직접 펜으로 필사하였고 각자가 성경을 한 권씩 가진다는 것을 꿈으로 가졌으나 우리는 모두 인쇄되고 잘 제본되어 나온 성경을 각자 한 권씩, 아니 여러 권씩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영적인 책들과 성경공부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 우리의 문제는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다음 장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주님을 믿는다는 모양과 제도들이 있으나 실제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능력이 없는 시대, 실제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고, 성경을 부인하고 비평하는 이론들이 난무하며,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진리를 찾아 헤매이지만 찾지 못하고, 미혹하는 자들만이 가득한 정말 어둡고 어두운 최악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봐도 좀처럼 그 능력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1700년대 후반, 1800년대 초반에 살았던 찰스 피니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어떤 공장을 방문하였는데 그 공장에서 일하던 어떤 아주머니가 동료를 향해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찰스 피니는 고개를 돌려 그 여인을 연민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녀의 눈은 피니와 마주쳤고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더니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고 이내 큰소리로 울면서 자신의 죄악됨을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 공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의 회개를 시작으로 모두가 자신의 죄악들을 회개하였고 이내 그 공장은 한동안 찰스 피니가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교회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왜 이 시대에는 그러한 회개의 역사, 복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까? 저는 무슨 쳐다보기만 하면 다 거꾸러지는 이상한 미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몰고 다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족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과 능력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삼손에게 성령님이 떠나가셨을 때 그에게는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구속의 날까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에게서 떠나가시는 일은 없지만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충만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다시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함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을 잃어버릴 때 우리에게서 능력이 떠나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 이유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먼저 “구하면 주신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구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와 더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고전 3:16,17). 

우리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거룩하신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옛 습관들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며, 자신의 옛 성품들이 드러날 때 주님 앞에 철저히 버리지 않으며, 이 땅의 유혹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가올 때 단호히 물리치지 않고, 쉽게 에워싸고 자주 넘어지게 하는 죄악들을 주님의 거룩하신 관점으로 철저히 미워하고 심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거룩하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미지근한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옛 습관들을 철저하게 미워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세상과 타협하는 마음을 철저히 돌이키지 않는 죄악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할 때 주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시며 능력으로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부흥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 마무리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을 찾고 계십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하며 선한 일을 위하여 잘 예비된 그릇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모두가 주님 앞에 쓰임 받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저는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그릇”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저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원하였고 이러한 마음을 교회에 나누고자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혹여나 주제넘게 한 말이 있다면 주님께서 보혈로 덮어주시기를 원하고 오직 우리 마음 속에 능력 있는 주님의 말씀만이 남기를 원합니다.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들 보다 귀한 주님의 말씀,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과 같은 거룩한 말씀, 이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성장시키며 돕고 인도하고 세우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사야를 정결케 한 제단의 숯불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다시 한 번 주님의 보혈이 있음을 찬양합니다. 제단 숯불로 정결케 된 이사야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한번 드리심으로 거룩케 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귀하게 쓰시는 그릇으로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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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 받는 법(딤전 4:1-6)/로빈


2002.02.20.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양육 받는 법

본문 : 디모데전서 4장 1-6절

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3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4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나니

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

6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오늘 설교의 제목을 ‘양육받는 법’입니다.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필요한 두 가지 - 말씀과 말씀을 믿는 믿음

모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양육받기를 원하고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을 줄 믿습니다. 저 자신도 많이 성장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주님 앞에 빨리 성장하여서 주님을 열정적으로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자라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은 시간이 지난다고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지 몇 십 년이 지났어도 어린아이 상태일 수가 있고, 구원받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어도 장성한 분량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적 생명이 성장하는 데에는 어떠한 과정과 법칙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그것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어떠한 말씀들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가장 먼저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또 로마서 10장 17절 말씀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 믿음의 기초요 근거이며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원동력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먹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질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좋은 교리의 말씀들을 들었다면 단지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취해야 합니다. ‘말씀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실과 바늘처럼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믿음에서 떠나는 것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을 버리고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에서 떠나는 것은 말씀에서 떠나고 것이고 믿음을 가지는 말씀을 취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우리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강조하고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고 들었고 읽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에서는 네가 따르던 믿음, 그리고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씀과 믿음에 더불어 갖추어야 할 “한 가지”

여러분, 그러나 오늘 저는 단지 말씀과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서도 말씀과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이것들과 더불어 한 가지를 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한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성장하고 양육 받는 받는데 있어서, 말씀 그리고 말씀을 믿는 믿음과 더불어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한 가지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제가 6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자세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이 조금 색다르다고 느끼시지 못하셨습니까? 

제가 볼 때는 이렇게 적혀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자신이 이런 것들을 깨우침 받는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혹은,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준다면, 형제들은 네가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깨우침을 받는 것은 형제들인데, 양육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은 ‘너’, 즉 디모데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 떠나고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면서 수많은 것들을 혼란시키는 때에 디모데가 그러한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준다면 형제들이 양육을 받고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겠지만, 오늘의 본문은 형제들을 깨우치는 디모데 자신이 양육을 받고 디모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양육 받는 법”인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깨우쳐주면 형제들이 깨우침을 받고 형제들이 성장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디모데 자신이 양육을 받고 디모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깨우쳐 준다면 디모데 자신이 그가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깨우치는 것을 멈춘다면 그의 성장도 멈출 것입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주님 앞에서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귀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성장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깨어있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옆에 있는 지체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따르는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따르던 믿음과 좋은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 관심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이, 내가 뭘 알아야 가르치지...”

“나부터 성장을 해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저는 이러한 생각들이 완전히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데 남을 가르칠 수 없고 자신이 하나도 성장하지도 않았는데 남을 성장시킬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이러한 생각을 계속해서 품고 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제시한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생명이 자라나고 양육 받는 데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은 시간이 흐른다고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단지 설교를 많이 듣고 단지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고 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먹은 말씀을 가지고 형제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한 말씀을 먹었다면 그 한 말씀으로 형제들을 섬겨야 합니다. 성경 한 구절로 은혜를 누렸다면 그 한 구절 지체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러할 때 내가 먹은 말씀과 믿음이 나를 양육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

이것은 조건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다만 은혜로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육 받는 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준다면” 이것이 바로 조건입니다. 우리 각자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양육 받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깨우쳐 준다면 우리 자신이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지도 오래되었고 성경 지식도 적지 않은데 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그 자신만을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영적 성장, 자기 자신만의 성결, 자기 자신만의 배움만을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성장한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주님이 쓰시기에는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만을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관심하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마땅히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나 자신의 영적 성장과 배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양육받는 법인 것입니다. 다른 영혼들을 관심하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도 식어져 버리고 죽은 자와 같이 깊은 잠에 들게 될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아무리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 해도 그는 곳 영적 침체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한 형제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대부분 들으셨을 것입니다. 다른 영혼들을 돌보고 열심히 섬기시던 한 형제님이 그 일을 다 놓게 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제님은 엄청난 영적 침체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가정예배도 드려보고 나름대로 추구도 하였지만 마음속의 곤고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 형제님은 ‘내가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몇몇 형제님들과 교제를 가지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 이제 다시 영혼들을 살리는 일 해야겠습니다. 사실 저 다른 영혼들에게 별로 관심 없습니다. 저 자신이 살아야겠습니다. 계속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저 다시 복음 들고 나가려고 합니다. 다른 영혼들 섬기려고 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양육 받는 법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일 뿐 아니라 다른 한 형제님들 통해서도 입증된 명백한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영혼들을 살리지 않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죽어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영혼들을 일깨우지 않는다면 여러분 자신이 잠들어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깨어있지 못합니까? 언제 상태가 안 좋아집니까? 모든 관심이 나 자신에게 집중될 때입니다. ‘나는 깨어있어야지.’, ‘나는 성장해야지.’, ‘나는 기도도 열심히 해야지.’, ‘왜 아무도 나를 관심해 주지 않지?’, ‘나’, ‘나’ 우리의 생각이 온통 ‘나’로 휩싸여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악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공격하기 가장 좋은 상태이며, 넘어지기 가장 좋은 상태이고, 실족하기 가장 좋은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나의 섬김이 필요한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만 바라보고 눈을 돌려 영혼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단번에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 디모데전서 4장 전체가 말하는 주제

디모데전서 4장은 계속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4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라.


사도 바울은 지금 13절에서 자신이 디모데에게 갈 때까지 전념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읽는 것, 권고하는 것, 교리 이 세 가지에 전념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읽는 것과 교리가 먹는 것이라 한다면 권고하는 것은 먹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우리는 읽는 것과 교리에 전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공부해야 하며 건전한 교리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꾸준히 전념해야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단지 읽는 것과 교리에 전념할 뿐 아니라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이에 반드시 권고하는 것도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사역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 모두에게 보내신 편지이기도 합니다. 디모데와 같은 사역자만 권고하고, 우리는 읽는 것과 교리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과 먹은 말씀으로 지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 가운데 거하라. 네가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리라.

성경은 ‘이 일들을 계속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은 바로 이어지는 말씀처럼 무엇인가를 말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함으로써 나 자신과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게 될 그러한 일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같은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깨우치는 것, 권고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 먹었고 누렸던 말씀, 건전한 교리의 말씀들을 나눌 때에 먼저 나 자신이 구원받고,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구원은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거짓 교리의 풍조 그리고 실생활 가운데 닥치는 모든 죄의 유혹과 올무로부터 놓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깨우치고 권고하는 일에 전념할 때 우리의 말을 듣는 지체들도 도움을 입겠지만, 우리 자신 또한 실생활 가운데 닥치는 모든 환란과 유혹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 순서 바로 잡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서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성장을 많이 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섬기지 않고는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없음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먹는 것과 먹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기만 해서도 안 되고, 먹은 말씀도 없는데 함부로 말해내서도 안됩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왕창 배우고 많이 먹고 나서 그때부터 사람들을 이것저것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으로 섬길 때 그 한 말씀이 참으로 내 것이 되고 나는 한 단계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 한 말씀을 먹었다면 그 한 말씀으로 섬길 때 나는 또 한 단계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읽는 것이라는 한 걸음과 권고하는 것이라는 한 걸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걸음으로는 공급받는 것이요, 한 걸음으로는 공급하는 것입니다. 공급을 받기만 해서도 안되고 공급을 하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두 다리를 가지고 걸어야 합니다. 이것들 중 한 가지만 추구한다면 한 다리로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내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디모데전서 4장을 통해 살펴본 양육받는 법입니다. 


** 나의 간증

마지막으로 저의 간증을 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근협 형제를 구령하고 나서 양육의 부담을 가지고 근협 형제를 섬기기 원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저의 믿음은 너무나 연약하였습니다. 주일날 말씀을 들을 때는 힘이 나고 다시 한 번 주님께 몸을 드리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실패하면서 다시 낙담하고 쓰러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신앙생활이 계속 되었습니다.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고 쉽게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근협 형제를 섬기면서 넘어질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낙담하고 넘어졌을 때에라도 근협 형제를 주님 앞에 잘 세워야 한다는 마음이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책을 읽어도 이전보다 더 간절하였습니다. 무엇이라도 더 찾아내어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면 교제할 때 설명하고 또 설명하면서 저 자신도 잘 모르던 부분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믿음은 점차 견고해지고 넘어져도 금방 회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근협 형제가 공장으로 일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에서 혼자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다른 많은 책들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았을 때 말씀을 읽을 때의 깨달음이나 감격이 근협 형제를 섬길 때보다 많이 줄어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기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장 내가 공급해야 할 대상이 없어진 탓인지 점차 그 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영적 생활도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안 읽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건성으로 듣는 것도 아닌데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지. 깨어있어야지.’하면서도 점점 그렇게 되었습니다. 평소보다 성경도 더 많이 읽어보고 영적인 책들도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마음의 곤고함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함께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들으면 눈물도 나고 다시 돌이키기도 하였지만 좀처럼 회복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형제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 다음날 있을 어린이 주일학교 모임 때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순간 갈등을 하였습니다. 안 한다고 하면 영적으로 안 좋은 것이 확 드러날 것 같고, 그렇다고 해보겠다는 마음도 자신감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하겠다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주님, 주님은 저의 상태와 능력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일을 저에게 맡기신 것은 능력도 주시겠다는 것임을 제가 믿습니다. 주님 모세가 든 막대기는 다른 막대기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그 막대기는 나일 강도 피로 만들었고 홍해도 갈랐습니다. 주님 이런 마른 막대기 같은 저도 주님의 손에 들려진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능력 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하고 저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을 전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말씀을 준비하고 전한 저 자신이 가장 먼저 세움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전하려고 하였지만, 저는 아이들이 그 말씀을 얼마나 소화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한 주 두 주 말씀을 전하면서 저 자신이 주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준비할 때 전하기 이틀 전부터 준비하였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 증거할 말씀은 저의 한 주간의 묵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참으로 말씀 안에서 놀라운 보화들을 찾게 되었고 말씀을 먹는 맛과 기쁨을 다시 새롭게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발견한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양육 받는 법”

나의 관심을 돌려 다른 영혼들을 돌보기 시작할 때 다른 영혼들도 세움을 입겠지만, 정작 가장 큰 세움을 받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만 하던 섬김이 나중에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축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요청되는 섬김의 손길들을 부담스럽다고 거절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지라도 여러분이 그 한순간을 이기고 주님 앞에 순종함으로써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다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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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사랑과 하나됨(고전 1:4-10)/로빈


2001.12.19.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19세)

제목 : 형제사랑과 하나됨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4-10절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5 너희가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되었으니

6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증언이 너희 안에서 굳게 세워진 바와 같도다.

7 이로써 너희가 어떤 선물에서도 뒤쳐지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

8 그분께서 또한 너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가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

10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오늘 저는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대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치 우리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며 우리 각자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인 것처럼 말씀을 대하기 원합니다. 


** 바울의 감사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하나님께 고린도 교회를 향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나의 하나님께 항상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의 내용이 4절부터 7절까지 나옵니다.


4절부터 7절까지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항상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5 너희가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되었으니

6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증언이 너희 안에서 굳게 세워진 바와 같도다.

7 이로써 너희가 어떤 선물에서도 뒤쳐지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나니

고린도 교회로 인한 감사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모든 일, 곧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해져서 그리스도의 증거가 확고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교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기까지 보았을 때 고린도 교회는 정말 놀라운 교회입니다.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확고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경 지식에 있어서 매우 부요하였기 때문에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거가 확고하였고 흔들리지 않았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굳게 붙잡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갈라디아의 교회들과 달리 다른 복음과 거짓 형제들의 미혹하는 말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각자 각자가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해서 그리스도의 증거를 확고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음으로 인하여 감사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재능 있고 각각의 은사를 가진 형제자매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곳곳에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일에 적합한 은사들을 가진 지체들이 많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님을 섬기기에 참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교회였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지식과 은사에만 부요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이 땅에 정착하지 아니하며, 타국인이요 순례자로써 살았던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볼 때에 어떠한 마음을 가지십니까? 우리 교회도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하며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고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교회! 우리는 이러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 바울의 한 가지 권면 - 온전히 함께 연합하라

만약 여러분이 사도 바울이라면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게 어떠한 권면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게 무엇을 더 적으시겠습니까? 

“뭐 잘 하고 있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있나? 뭐 지식도 부요하고, 아무 은사에도 부족하지 않고 거기다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까지... 뭐 완벽하구만.”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의 권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바울은 10절에서 “하나 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고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개개인이 뛰어났던 교회였습니다. 각자 각자가 성경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각자 각자가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각자 각자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라는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육신적이라고 말합니다. 

1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능히 못하기 때문이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사도 바울은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부요한 한 교회를 가리켜 육신적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는 한 교회를 향해 어린 아기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한 교회를 가리켜 너희가 너무 육신적이어서 도저히 영적인 사람을 대하듯 말 할 수가 없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안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표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경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은사를 가졌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가가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지식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은사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은사란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에 관해서는 너무도 중요해서 어떻게 강조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어떠한 위로도 소망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형제사랑과 하나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육신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식은 무엇입니까? 단지 그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 입니까? 단지 얼마나 많은 은사들을 가졌는가 입니까? 단지 얼마나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가 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식은 “형제사랑과 하나됨”인 것입니다. 


** 데살로니가 교회와의 비교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그러니까 삼 주간에 걸쳐 말씀을 전한 결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형제들에 의해서 베레아로 보내지게 됩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삼 주간의 말씀 전파로 세워진 아주 어린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모든 지식에 부요하다는 칭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3주 만에 세워진 교회인지라 많은 지식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은사 면에서도 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없어 보이는 평범한 성도들로 모여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7)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어린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는 칭찬을 들은 것입니다. 삼 주간의 말씀전파로 갑작스럽게 세워진 교회가 그 지역에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어리고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직접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9절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형제의 사랑에 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서로 사랑할 것을 너희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면에서도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겠지만 바울은 특별히 “형제사랑”에 대한 부분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형제사랑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쓸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미 하나님께 몸소 배워 서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고린도 교회와 대조됩니까? 고린도 교회는 모든 말과 지식에 부요하며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육신적이라고 책망을 받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3주 만에 세워진 아주 어리고 미약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대조적으로 만든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형제사랑”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었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형제사랑”에 관하여 바울이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인 교회와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된 교회의 명백한 차이점인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과 분열” 그리고 “형제사랑과 하나됨” 이 두 가지가 육신적인 교회와 본이 되는 교회는 나눈 것입니다. 


** 진리의 지식, 은사, 주님의 다시 오심의 목적 - 교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정말 알아야 할 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사랑과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소중함이었습니다. 


** 진리의 지식

진리의 지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나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나의 잘난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을 판단하기 위함입니까? 나보다 무식한 자들과 분리하기 위함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실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 귀중한 복음을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얻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귀중한 진리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진리의 지식은 주님의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것이며 지체들을 돌아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귀하고 귀한 진리의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 은사

고린도 교회는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정작 그 은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은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나의 재능을 자랑하기 위한 것입니까? 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까? 나보다 무능력한 사람들과 분리하기 위함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한 지체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전체는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 은사가 왜 주어진 것인지를 깨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읽지는 않겠습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시간을 내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은사의 목적을 알았다면 그들은 시기하고 다투고 분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은사를 가진 것은 내 옆의 지체를 세우기 위함이며 내 옆의 지체가 나에게 없는 은사를 가진 것은 나를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히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최상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는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시간을 내셔서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옆의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 주님의 다시 오심

고린도 교회는 각 성도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신랑은 누구이며 신부는 누구입니까? 신랑은 우리 주님이며 신부는 교회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진실로 기다린다면 그는 자신을 정결케 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돌아볼 것입니다. 나 자신의 마음을 예비할 뿐만 아니라 지체들의 마음도 돌아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히 10:25). 주님의 다시 오시는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과 은사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란?

그렇다면 형제사랑과 하나됨이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


형제사랑은 무엇입니까? 단지 나의 생각을 접는 것입니까? 단지 입으로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단지 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입을 다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것을 말하고 분열이 없으려면 생각이 같아져야 합니다. 마음과 의견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인 것입니다. 


** 어떻게 하면 형제사랑에 이를 수 있는가? -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됨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그냥 열심히 하면 됩니까? 무조건 내 생각을 버리고 형제들의 생각에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사랑과 하나됨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니라.


사도 바울은 온전히 함께 연합하라고 말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뉘시느냐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질책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보십니까? 갑자기 바울이 편지의 흐름을 바꿔서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대해서 적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에게 하나 되는 비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뭔가 심오하고 깊은 듯한 지식을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치 유대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능력있는 은사들을 찾고 마치 헬라인들처럼 뭔가 심오하고 깊은 듯한 성경 진리를 알고자 하지만 정작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치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는 것처럼, 진리의 지식과 능력 있는 은사들을 갈망하였고 부족함이 없이 가졌다는 칭찬을 받았으나 그 근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능력과 지혜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진리의 지식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능력 있는 은사들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나의 지식, 나의 은사가 모두 주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의 입에서는 주님을 자랑하는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29-3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별과 구속이 되셨으니

31 이것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형제사랑이 없고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형제사랑이 없고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서로 높아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지식과 은사를 자랑하며 자신을 높이려 하기 때문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며 우리에게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주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우리가 인식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하나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입을 열어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찬양한다면 우리는 하나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교회에 형제사랑이 넘치며 모든 지체들이 하나 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마무리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1장 전체에 걸쳐서 형제사랑과 하나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말과 지식에 부요하며 아무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아주 귀한 교회였지만 형제사랑이 없고 시기와 다툼과 분열로 인해서 육신적이며 어린아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삼주 만에 세워진 어린 교회였지만 형제사랑으로 인하여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두 교회를 비교해 봄으로써 형제사랑과 하나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성경 지식과 은사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의 초점이 교회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사랑과 하나됨에 반드시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형제사랑과 하나됨을 온전히 이루려면 우리는 우리의 주장과 자랑을 내려놓고 주님을 자랑하고 높여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의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로부터 여러 가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칭찬은 각 성도들이 성경 지식에 뛰어난 교회, 역량 있고 젊은 일꾼들이 모인 교회, 복음에 열정적인 교회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교회가 주님 앞에서 참된 형제사랑으로 하나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믿는 자들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을 계기로 형제사랑과 하나됨의 중요성을 더욱더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주님 앞에 기도하며 진력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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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제사장(고후 5:15)/로빈


2001.10.17.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19세)

제목 : 만인제사장

본문 :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5)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저는 ‘만인제사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분께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심판자이십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선한 자에게 보상하고 악한 자에게 징벌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바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만물을 친히 만드셨고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며 운행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같이 기쁨과 슬픔, 가엾음과 분노를 느끼시는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어떤 사람이 금붕어를 기르기 위하여 어항에 돌과 흙, 물풀과 물레방아 그리고 물을 준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지구를 만드시고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들, 산과 들, 풀과 나무들, 모든 동식물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교제하기 원하셨고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고 그분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우리와 같이 기쁨과 슬픔, 가엾음과 분노를 느끼시는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를 다 제거해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다시 만드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분의 선택을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입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스스로 자족하시며 홀로 지혜로우시며 영광가운데 거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요 10:18)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사람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실 때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선택의 의지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중요한 구원의 문제조차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으셨나 모든 사람을 강제로, 억지로 구원받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을 위하여 사는 문제도 동일함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문제와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거나 생명이 많이 성장한 특정 그리스도인들만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아니, 섬겨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주님을 영접한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여태까지 나에게 아무도 이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


여러분 중에도 처음 구원받았을 때 이런 생각을 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믿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받기 원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누구든지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섬길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문제를 강제로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강제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 삶의 목적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위하여 살고, 어떤 사람들은 가족들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출세하기 위하여 살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왜 사는 지도 모르고 살고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지금 바로 하늘나라에 간다면 죄도 더 이상 안 짓고 실패하거나 넘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다시는 내 옆의 형제자매를 미워하게 되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성경 지식들을 깨닫게 될 것이며 주님을 대면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눈물과 고통과 슬픔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들은 왜 지금 바로 하늘에 가지 않고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목적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단지 실패하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죄를 안 짓고 세상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단지 성경을 공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땐 주님의 모든 뜻을 헤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들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라고 말씀한 구절에서도 우리가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섬기기 위하여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은 단지 교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에 가면 더욱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온전한 사랑으로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제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먼 길을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함께 연합하고 교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지 누리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이끌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교제를 통해 공급받고 깨달은 것으로 주님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준비를 잘 갖춘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많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있다면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믿음 생활의 필수요소 - 섬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기지 않을 때 그의 믿음은 흔들리게 됩니다. 목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멈출 때 그의 성장은 멈추게 됩니다. 그의 믿음의 진보는 멈추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더 분발해야할 이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섬길 때 배움이 있고 공급이 있으며 믿음이 견고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견고하기 원하십니까?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굳게 서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것은 단지 사도바울의 권면일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굳게 서고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바로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하고 있는 그때 우리는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그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견고하기 원하십니까? 주님의 일을 넘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말씀과 기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섬김’ 또한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고 알고 누렸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참으로 깊은 기도로 나아가서 주님과 교제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난다면 그것 또한 무익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주님 앞에 판단 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얼마나 많은 말씀을 깨달았나 입니까? 단지 얼마나 기도로 주님과 교제했는가 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우리가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려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를 판단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데에 원동력과 같은 것입니다. 힘을 공급받고 나서 그 힘을 주님 섬기는 데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일어나기 원합니다. 


** 만인제사장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영적인 제물을 드리고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모두는 제사장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사역자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주님의 종이요 일꾼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다 같이 베드로전서 2장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돌들이며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건물을 짓는 데는 돌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벽돌 한두 개 가지고는 건물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돌들입니다. 어떤 돌도 죽어있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지체가 주님 앞에서 받은 생명을 가지고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앞에서 섬기는 한 두 명의 형제자매들로는 교회가 온전히 건축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일어나서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살아 있는 돌들이며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 그분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데 주저함이 있으신 형제자매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용기를 갖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 각자 각자가 섬기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섬길 수 있는 은혜와 기회와 자격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일을 잘 처리하는 그리스도인보다 주님 섬기고자하는 갈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주님은 오늘날 재능이 많은 그리스도인보다 주님 섬기고자하는 갈망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서투르고 잘 못할지라도 주님 섬기고자하는 마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고 물었을 때 레위의 아들들이 나아왔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이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주여, 참으로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이오나 주의 편에 서기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주님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기 원합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일어나기 원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주님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기 원합니다. 


** 마무리

지금 이슬람 국가들에는 자살테러범들이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들이 믿는 알라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헌신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주님을 위해 목숨은커녕 1시간도 내어드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의 일이 넘쳐나는 데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일꾼을 찾으시는데 나태하게 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먼저 우리 모두가 일어나야 합니다. 먼저 우리 교회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일어나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일어나서 주님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야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을 일깨워야 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의 일은 넘쳐나고 일꾼은 부족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눈을 들어 주님의 갈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담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일꾼을 찾으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제로 섬기게 하지 않으십니다. 자원하는 사람의 섬김을 기뻐 받으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저 또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위해 저 자신을 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조용히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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