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3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성령 안에서 걸으라(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걸으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앞으로 저에게 수요설교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저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전체적인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16,17절 성령 안에서 걸으라

오늘 우리에게 미약하면서도 강렬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깊은 마음속에서 가지는 간절한 원함은 바로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원은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먼 훗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이러한 열망이 더 커지고 더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말씀은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하나님의 영은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가 되므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럽고 천연적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생명과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결코 조화되거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욕심"이 동기가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적인 말들로 포장될지라도 여전히 육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떠한 원함이나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심과 성령의 원함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원함은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나의 유익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되 그분의 말씀이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스스로 옳게 보이는 사망의 길로 급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 가고, 멈추라고 할 때 멈추는 것이지만, 육신의 욕심은 유익이 있을 때 움직이고 손해가 있을 때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1928년 일본이 중국 만주에 침략하여 만주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일지사변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일지사변이 일어난 뒤 3개월 간의 전쟁을 통해서 중국은 많은 숫자의 탱크를 잃어버렸고 더 이상 일본군의 탱크와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제 중국군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군 탱크가 지나갈 때 숨어있던 저격수가 총 한발을 쏩니다. "팅" 총알은 탱크의 표면을 맞으면서 소리만 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한 발을 쏩니다. "팅" 역시 소리만 날 뿐입니다. 또 다시 얼마가 지나고 한 발을 쏩니다. "팅" 그런데 갑자기 탱크가 멈추더니 드디어 탱크의 운전수가 도대체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것인지 보기 위하여 탱크의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게 됩니다. 이때 탱크의 뚜껑을 겨누고 있던 저격수는 운전수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당깁니다. 탱크의 운전수는 총알이 날아오든 말든 신경쓸 것 없이 탱크 안에만 있으면 완전히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탱크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탱크의 뚜껑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게 됩니다. 죄와 세상과 사탄과 육신이 연합군이 되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육신의 욕심을 거스르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결단력이 강하고 신념이 굳센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결단이 약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성령 안에서 걷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 18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18절에 보시면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성령 안에서 걸으라." 18절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이 두 표현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종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사람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억지로 오 리를 동행해 주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십 리까지도 기쁘게 동행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감추고 억누르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외적인 말과 행동만을 조심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마음 속의 동기와 의도까지도 주의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교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겸손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법을 따지며 자신의 유익과 손해를 계산하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지치고 피곤하고 복잡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단순한 기쁨과 화평 속에 안식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아닌 많은 좋고 선한 것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몇 주전에 캐나다 동부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는 "안개 속의 숙녀호"라고 해서 배를 타고 폭포 앞까지 가는 관광코스가 있었습니다. 매표소 앞에 봤더니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서 "아이고 이거 한번 타는데 시간 다 가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행 가이드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가이드는 그곳에 일하는 사람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더니 모든 줄을 앞질러서 옆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없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은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가이드의 인도를 받아서 온 저와 다른 몇 분은 일반적인 규칙 아래 있지 않고 특별한 규칙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빨리 "안개 속의 숙녀호"란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까지 가서 시원한 폭포의 물안개를 맞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는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성령님이라는 가이드, 인도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할 때에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가게 되면 율법을 초월한 생명의 성령의 법, 자유의 법에 적용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걸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 19-21절 육신의 욕심의 결과

19절부터 보시면 여러 가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은 성적인 죄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잠을 자야하는 수면욕은 죄가 되지 않지만 질병이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하루 종일 자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하는 식욕도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남용하여 탐식할 때 죄가 됩니다. 성적인 죄악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서 욕심을 부리게 될 때 죄가 됩니다. 간음과 음행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16절에서는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는 모두 순간적인 육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더 좋고 중요한 것들을 버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특징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좋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며, 성령의 특징은 더 좋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20절에서는 "우상 숭배와 마술"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죄악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게 절에 가서 불상에게 직접 경배하지는 않지만 은밀한 우리 마음 속에 수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육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육신의 욕심과 탐심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또한 우상 숭배는 영적인 간음으로서 우리에게 늘 긍휼과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우상 숭배할 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여전히 섬기고 거기에 더하여 많은 축복을 줄 것 같은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지만 거기에 더하여 많은 좋은 것들을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욕심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우상들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우상들이 무가치해지고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0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그리고 21절에 "시기와 살인"의 죄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의 특징은 모두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과 연관해서 짓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증오가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경쟁하고 진노하고 다투고 폭동을 일으키며 파당을 짓고 시기하며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목록들 중에서 경쟁하고 다투고 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자주 범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간음이나 살인이나 우상 숭배와 같이 큼직하고 무거운 죄악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시기하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똑같이 육신의 욕심 가운데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 취함과 흥청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짓는 죄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배움이나 섬김을 가지지 않고 빈둥거리며 흥청대는 것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망치고 자멸시키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2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비결은 단 한가지인데 바로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육신의 욕심을 따라 다른 형제들을 시기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주님의 일들을 섬기는데 나의 육신의 욕심이 첨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오늘날 성령을 따르고 성령에게 심는 사람만이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둘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영존하는 생명은 영원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는가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았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많은 좋은 일들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푯대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사역이나 섬김도 우리의 욕심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섬기는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 해주고 나를 따르는 것을 바라는 것도 육신의 욕심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육신의 욕심으로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썩는 것이 되어 거두어질 것입니다.

** 22,23절 성령의 열매

22절부터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오늘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앞으로 설교를 하게 될 때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랑은 육신의 모조품이 아닌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공한 그리스도인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 입니다. 지식도 있고 열심도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으로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자녀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다스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사람들 가운데 화평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신의 열매는 불화와 경쟁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신 것같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참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참아주셨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문제가 많은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주님이 참으시는 것같이 나도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부드러움입니다. 우리에게 까다롭고 거친 모든 이들에 대하여도 우리는 어린양 같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볼 때 부드러움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는 사람은 거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며 걸림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부드럽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선함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악착같이 달려드는 태도는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처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스스로 보상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나에게 선하게 대하신 것같이 우리들도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데 이것 역시 육신의 열심이나 욕심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온유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겸손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 중 한가지는 우리가 교만하며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우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는 절제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특징이 욕심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육신의 특징이 급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육신은 답답한 상황을 못 견뎌 일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의 열매는 말과 행동을 절제하며 주님께 순종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울은 대언자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했으나 급하게 스스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급하게 왕이 되려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사울을 넘겨주신 기회가 왔을 때에도 절제하였습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고전 9:25).

오늘 우리의 원함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때에 그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는 이러한 열매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할례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은 교묘하게도 영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육신을 따르는 많은 믿는 이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율법을 강조하면서 할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육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성경을 인용할 수 있고 영적인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육신과 성령은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육신과 성령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게는 영적인 모양이 있지만, 성령님께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실제적인 순종과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너무나 명백해서 우리가 금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모든 뿌리가 욕심에 기초하며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하며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익과 손해를 크게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26절에 나온 것처럼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만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걸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심게 될 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존하는 생명과 영광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탱크 밖으로 나와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꾸 가이드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서 기웃기웃 거리며 다니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성령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살 때에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합니다. 아멘.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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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9 갈보리침례교회 오후예배  /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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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신 때에 거두리라(갈 6:7-9)

이승선

 

안녕하세요?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갈라디아서 6장 7-9절입니다.

 

속지 말라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에게 심는 자는 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심는 대로 거둔다

먼저 우리 함께 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속지 말라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온 우주와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세우셨는데그것은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가장 상식적인 말이면서도가장 기본적인 과학적 법칙입니다우리나라 속담에도 콩 심은데 콩 나고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이 있듯이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진리입니다음식을 꾸준히 많이 먹으면 살이 찌게 되고먹는 양을 꾸준히 줄이면 살이 빠지듯이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은 가장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주장하면서아메바를 심어도원숭이가 나올 수 있고원숭이를 심어도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백억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 지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속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왜냐하면 우리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려하고 하는 허황된 마음을 쉽게 가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며또 하나님께서도 심지 않은데서 거두게 하실 수도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심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성경은 먼저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과하나님은 조롱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심나

무엇인가를 심고 거둔다는 표현은 농사와 관련된 것이지만성경에서는 우리의 인생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어떠한 일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 바로 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나의 시간과 힘을 사용한 것에 따라 거두게 될 것입니다우리 함께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에게 심는 자는 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두 종류의 밭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첫 번째 밭은 육신이며두 번째 밭은 성령입니다성경은 두 종류의 밭과 그 밭으로부터 거두게 될 열매를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게 되고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육신의 길을 선택하고육신의 방법대로 나의 시간과 힘을 사용하게 되면우리는 반드시 썩는 것을 거두게 됩니다때로는 즉시로 그 결과를 거두기도 하지만또 때로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거두게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선택의 기로에서성령의 길을 선택하고성령님께 순종하며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드렸을 때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육신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때로 즉시 그 기쁨과 열매를 맛보기도 하고또 때로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놀라운 축복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는 것

여기서 우리 잠시 영존하는 생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둔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과연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먼저우리는 이 말씀이우리가 성령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 용서를 받고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며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성령에게 심을 수가 없고또 성령을 따르는 삶 자체를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둔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우리가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른 말씀들을 참조하여 보겠습니다먼저우리 함께 요한복음 10장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거니와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보시면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또한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에 기록된 생명을 얻게 한다.”는 말씀은 바로우리가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리고 그 다음으로 기록된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한다.”는 말씀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주님과의 동행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고 기뻐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 “영존하는 생명”, “영생” 또는 생명이라는 단어들을 볼 때에그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첫째는 지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며둘째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 주님과 동행하는 풍성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요한복음 17장 말씀도 보시겠습니다요한복음 17장 3절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생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요예수님께서 친히 영생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영생이란 바로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기록하는 영원한 생명은 먼저 시간적인 길이의 개념으로 영원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이제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록하는 영생은 시간적인 개념” 외에도 질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교제하는 것이고또 동행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인격적으로 만나고 교제하고 동행하면서 친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마치 가족들이오래된 친구들이 서로를 알고눈빛만으로도 통하는 것처럼그렇게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의 말씀들과 갈라디아서에서 읽었던 말씀을 조합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성령님에게서 영존하는 생명을 거둔다는 말씀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더 알게 되며더 가까이 교제하게 되고더 친밀히 동행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추가적으로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장차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누리게 될 영광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우리 함께 디모데전서 6장 17-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7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들에게 명하여 그들이 마음을 높이지 말고 확실치 않은 재물을 신뢰하지도 말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을 신뢰하게 하고

18 또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

19 또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위해 좋은 기초를 쌓게 할지니 이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붙들게 하려 함이라.

 

여기 19절에서 영원한 생명을 붙든다는 것은 바로 영원한 영광과 보상을 놓치지 않고 꼭 잡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께 심어서 영존하는 생명을 거둔다는 말씀은 바로이미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우리 믿는 자들이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더 가까이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장차 다가올 주님의 왕국에서는 영원한 영광과 보상도 굳게 붙들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육신으로부터 거두게 되는 썩는 것은 당장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기쁨과 유익을 줄 수 있지만결국에는 썩어져 없어져버리는 것이며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반면에 성령님으로부터 거두게 될 영존하는 생명은 바로 영원히 누리게 될 영광과 기쁨과 유익인 것입니다.

 

 

씨앗보다 많은 열매

우리 다시 갈라디아서 6장으로 돌아가셔서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성경은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성령에게 심었다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바로 우리가 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거두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우리가 하나의 씨앗을 심었다 할지라도 수십 배의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처럼우리는 우리가 심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형제에게 대접한 찬 물 한 잔까지도 기억하셔서 놀랍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아무리 작은 순종이라 할지라도아무리 작은 선택이라 할지라도아무리 짧은 시간과 작은 힘을 드린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은 것에 대해서 크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50, 80년의 인생과 고난을 영원한 영광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한 달란트를 한 도시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우리가 오늘 육신의 즐거움이나 원함을 거절하고주님께 심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놀랍게 거두게 될 열매와 보상을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치지 말지니

우리 함께 9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라고 정하였는데요오늘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이 말씀만은 꼭 기억하기를 원합니다주님께서는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정하신 때에 반드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은 치열한 영적 전쟁입니다또한 믿음의 삶은 마라톤과 같은 기나긴 경주입니다믿음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치지 않고 기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훈련소에 있을 때 배웠던 군가 중에 최후의 5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숨 막히는 고통도 뼈를 깎는 아픔도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라.

우리가 물러나면 모두가 쓰러져최후의 5분에 승리는 달렸다.

적군이 두 손 들고 항복할 때까지최후의 5분이다끝까지 싸워라.”

 

전쟁의 승패는 최후의 5분까지바로 끝까지 버티는데 있다는 내용의 노래입니다전쟁의 승패는 바로 최후의 5분에 달렸다는 것입니다축구경기에서도 처음 5분과 마지막 5분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요이와 같이 치열한 영적 전쟁터인 믿음의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한두 번 큰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지치거나 기진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진정한 승리는 아예 죄를 짓지 않거나아예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넘어지고 실패하였을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서는 것입니다영적 전쟁의 승리는 기진하고 않고포기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우리 함께 에베소서 6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악한 날에 능히 버티어 내고 모든 일을 행한 뒤에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목적은 바로 서기 위한 것입니다.

악한 날에 잘 버티어 낼 뿐만 아니라모든 놀라운 순종과 섬김의 일들을 행할 뿐만 아니라그 뒤에 서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믿음의 삶 속에서 진정한 승리는 바로 서 있는 것입니다포기하지 않고낙심하지 않고지치지 않고기진하지 않고주저 않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치열한 영적 전쟁일 뿐만 아니라또한 마라톤과 같은 경주입니다마라톤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한순간 빠르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달리는 것입니다우리 함께 히브리서 1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히브리서 12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죄인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이처럼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너희 생각 속에서 지치고 기진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인내로 달리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한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믿음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도 안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넘어지지 않고 잘 달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더 중요한 것은 바로 넘어진 뒤에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죄가 우리를 얽어매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것입니다또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기쁘게 견디신 것처럼우리도 반드시 거두게 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에서는 특별히 우리가 생각 속에서 지치고 기진한다는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우리가 많은 경우 지치고 기진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육신의 생각을 붙들기 때문입니다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나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라는 로마서 말씀처럼우리가 지치고 기진하는 것은 실제 어떤 일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 생각 때문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우리는 말씀 안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리

우리는 오늘 오전에 요셉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요셉은 감옥에서 잔 맡은 자를 섬기고그에게 꿈을 해석해 주면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지만잔 맡은 자는 감옥에서 나가자마자 요셉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그리고 그 뒤로 2년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는 것이고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였다는 것이며자신이 꾼 꿈에 대해 말한 것이고또 보디발의 집에서는 주인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거절한 것입니다어찌 보면 요셉은 잘 행하는 가운데 너무나 부당하고 억울하게 고통을 당했습니다요셉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못된 사람들이 많고그들은 다 잘 살아가고 있었는데요셉은 잘 행하는 가운데 너무나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함께 시편 105편 17-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7 그분께서 한 사람을 그들보다 앞서 보내셨으니 곧 요셉이라그가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들이 그의 발을 족쇄로 상하게 하고 그를 쇠 안에 넣어 두되

19 그분의 말씀이 임하기까지 그리하였도다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잘 행하는 가운데 고난과 시련을 주신 것은 그를 더 크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단련하신 것이었습니다요셉에게는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지만그것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요셉을 높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감옥에서부터 파라오의 왕좌까지 한 순간에 높이셨습니다바로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주의 말씀이 임하실 때에완전히 낮아지고 단련되었던 요셉을 즉시 높이시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우리가 오늘 잘 행하는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고난을 당하고마음이 어렵고시련을 당한다면우리는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더 크게 사용하시려고 단련하시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그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치지 말고기진하지 말고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우리에게 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다 함께 갈라디아서 6오늘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7-9절입니다.

속지 말라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에게 심는 자는 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성경은 우리에게 속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사탄이 우리에게 속살일 때나는 안 되는 놈이라고나는 가망이 없다고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고나는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없다고나는 그냥 포기해야 한다고우리에게 속삭일 때속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성경 외에 다른 말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다만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에게 심는 자는 잠시의 쾌락이나 만족을 거둘 수 있겠지만반드시 곧 썩어져 버릴 것들을 거두게 될 것이지만,성령에게 심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육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 심는 삶을 살게 된다면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주님을 더 알게 되고더 친밀한 교제를 가지게 될 것이며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는 영원한 통치의 영광을 붙잡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고 기진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왜냐하면 정하신 때에 반드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심고 수고하는 것이 당장 좋은 결과로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기를 원합니다농부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수고하며잡초와 해충과 거센 비바람을 견뎌내어 끝에는 열매를 추수하는 것처럼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마십시오포기하지 마십시오넘어졌다 할지라도 또 다시 일어나십시오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도상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단 번에 모든 것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격려하시고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2.03.13.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화요일 채플설교 /로빈30세

http://robinbox.net

 

하나님의 때(시간)(갈 6:9)

이승선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9절입니다.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시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거두리라

여러분오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아멘.

 

인생은 농사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사람이 무엇이든지 심으면 그대로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를 농사를 짓는 것으로 표현하자면많이 심는 사람이 많이 거둔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우리나라 속담에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은 우리가 잘 행한다면그리고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않는다면정하신 때에 우리의 잘한 것에 맞는 좋은 결과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농부가 씨를 뿌리자마자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오랜 인내와 수고의 기간이 필요한 것처럼우리의 인생에서도 수고와 인내의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오늘 여러분이 잘 행하고 있는데좋은 결과가 없는 것 같다면포기하지 말고 더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넘치는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될 것입니다열매를 거두는 때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요셉은 그곳에서 잘 행하였지만오해를 받고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요셉은 감옥에서도 잘 행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돕고 섬겼습니다.특별히 파라오의 잔 맡은 자를 섬겼지만잔 맡은 책임자는 감옥에서 나간 뒤에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요셉은 계속해서 잘 행하는 가운데 있었지만그 결과는 더 힘들고 어려울 뿐이었습니다그러나 요셉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그가 끝까지 인내하고 수고한 결과 그는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파라오의 반지를 끼고 파라오의 왕좌에 앉아 온 세상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발명가 에디슨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고 말했습니다또한 성공은 단지 실패의 한 발자국 앞에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군대에서는 최후의 5분에 승리가 달렸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오늘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말지니 우리가 기진하지 아니하면 정하신 때에 거두리라.” 아멘.

 

 

다윗의 인내

지난주에 우리는 다윗이 기록한 시편을 통해 용기를 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는데요오늘은 우리가 다윗의 인내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여러분다윗이 무슨 직업 출신인지 아십니까다윗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이새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였습니다다윗은 막내였는데자기 집안에서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일들이 생겨나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부을 것을 사무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사무엘은 이새의 집 안에 있는 아들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아 기름을 부으려고 찾아왔습니다사무엘은 정확히 누구에게 기름을 부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이새의 모든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그리고 첫째부터 모든 아들들을 살펴보았지만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에 이새에게 질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아이들이 다 여기 있느냐?” 그러자이새가 대답하였습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보소서그가 양들을 지키나이다.” 다윗은 사무엘이라는 이스라엘 온 민족의 지도자가 방문한 가족의 큰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들에서 양떼를 돌보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사무엘이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그리고 다윗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였습니다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은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다시 양을 돌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형들은 사울 왕을 따라 전쟁에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지만 다윗은 평소처럼 양을 치는 목자의 일을 하였습니다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러 형들을 찾아갔다가 골리앗이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다윗은 그때가 기회다 싶어 골리앗과 싸우기를 자청하였고,역시나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사람으로서골리앗을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이스라엘의 여인들은 노래를 만들어 이렇게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이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사람이 되었고심지어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이제 다윗은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으로서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그러나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그는 수십 년 동안 산과 숲과 동굴을 떠돌며 도망치는 방랑자요,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추격하였습니다사람들은 다윗이 가는 곳마다 다윗의 위치를 사울 왕에게 고발하였습니다다윗의 인생은 목숨을 건 도망의 시간들로 가득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잡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왜냐하면 그것은 반역이며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다윗은 잘 행하는 가운데 지치지 않았고낙심하지 않았습니다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였습니다.

 

다윗의 인내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 부으시던 때 정하셨던 대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다윗은 하나님의 때에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다함께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베드로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사람들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더 높은 지위더 높은 평가더 높은 자리를 향해 올라가려고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지금 읽은 베드로전서 5장 6절 말씀처럼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스스로 겸손해야 합니다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우리가 스스로 겸손하게 되면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높이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스스로 높이지려고 하면 낮아질 것이고스스로 낮아지려고 하면 하나님에 의해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 했을 때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내가 잘한 일과 비교하면서 나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그러나 그러한 행동의 결과는 나 자신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더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여러분계속 잘 행하는 가운데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할지라도 끊임없이 수고하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잔 맡은 자가 자기를 꺼내주기를 기다렸지만잔 맡은 자는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그러나 2년 뒤에 파라오가 꿈을 꾸게 되면서잔 맡은 자는 그제서야 요셉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단지 요셉을 감옥에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그를 온 세상의 통치자로 세우시려고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요셉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다함께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오해할까 염려합니다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우리를 몰라주고 인정해 주지 않을까 염려합니다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무엇인가 조금 다르게 말하거나 억울하게 말하면 크게 반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그러한 모든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나의 모든 수고를 아시며나의 억울함을 아시고나의 모든 고통과 인내를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여러분 부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상을 주시려고 준비하시는 그 일을 스스로 망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맛있는 밥이 만들어지려면 압력밥솥에서 뜸이 들고 완성될 때까지 뚜껑을 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맛있는 과일이 만들어지려면 과일이 다 익기 전에 먼저 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멋진 도자기를 만들려면 도자기가 화로에서 완성되기 전에 꺼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여러분이 어떤 일을 잘 했을 때나중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크게 칭찬을 해주려고 마음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러나 때로 여러분이 너무 자랑하고 싶은 나머지 그 일을 스스로 나서서 자랑하게 될 때친구들의 반응에서부터 별로 효과도 없을뿐더러선생님도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했던 것처럼 크게 칭찬을 해 줄 수가 없게 되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라.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저는 만약 여러분이 우리학교에 오지 않았다면 조금 더 편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말투나 표정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 지적을 받거나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숙제도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만약 여러분이 우리학교에 오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크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나는 왜 이렇게 교만할까나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을까나는 왜 이렇게 엉망일까?” 이러한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정말 즐겁게 살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여러분용기를 내고 지치지 마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인생에서 절대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다함께 히브리서 12장을 보시겠습니다. 1-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믿음의 경주자가 된 우리에게는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앞서 믿음의 경주를 달렸던 요셉다윗사무엘다니엘베드로와 같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우리를 얽어매는 많은 어리석은 생각들죄악들을 떨쳐버리고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달리기 원합니다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여러분을 변화시켜주시고높여주시고열매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여러분이 포기하려는 그 바로 앞에 승리가 있고성취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7.1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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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은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제가 캐나다에서 돌아오자마자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 작년 7월인데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이 정말 이 말씀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를 많이 열매 맺기를 바랬는데, 지금 돌아보니 너무 부족해서 아쉬운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1년을 어떻게 보낸건가 한숨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사시는 삶을 조금씩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마지막 항목인 “절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성령의 열매 - 절제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절제”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 바깥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것이라면, 절제는 내 안에서부터 나오는 원함과 요구를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중에서 얼마나 절제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과 가까이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잠을 자고 싶다고 24시간 잠만 잘 수는 없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고 하루 종일 먹을 수는 없습니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소식이 있어도 다 알 수 없고, 말하고 싶은 사실이 있어도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볼 수 없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나의 원함과 요구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기를 내가 배웠노니 내가 비천하게 되는 것도 알고 풍부하게 되는 것도 알아 어디에서나 모든 일에서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당하는 것을 배웠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없지만, 절제를 배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대로 만족하는 법, 곧 절제를 배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절제는 모든 성령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어떤 지식을 깨달아서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고프고 궁핍한 환경 속에만 오래 있었다고 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절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또한 실제로 많은 환경들이 다가올 때 주님의 제한하시는 손길을 믿고 받아들이면서 절제를 배우게 됩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단순히 절제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25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26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기려고 애쓰는 자가 주의해야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법대로, 규칙대로 달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일에서 절제하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 김용국 형제님께서 농구 선수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 선수들은 콜라 같은 탄산음료와 쵸코렛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시합을 앞두었을 때는 몸의 컨디션을 잘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자는 시간을 철저하게 통제한다고 합니다. 선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보다 코치의 제한을 받아서 움직이게 되고, 그러한 통제를 잘 따른 선수들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제를 잘 따르지 않아서 컨디션 조절도 실패하고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선수들은 벤치에 앉거나 교체를 당하여 시합에서 버림을 받게 됩니다.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기간에 우리나라의 대표 골키퍼는 김병지 선수였습니다. 김병지 선수는 골키퍼지만 한 번씩 골을 스스로 몰고 나가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김병지 선수는 또 그렇게 공을 몰고 나갔습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아시죠? 김병지 선수는 좋은 감각과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을 받아 월드컵 경기에 단 한 경기도 출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주자요 이기려고 애쓰는 자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경주자로서 자신을 절제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을 얻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주님이 언제나 사용하시는 선발 선수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늘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제하지 않는 죄
사도 바울은 가아사랴의 총독이었던 벨릭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귀족이었던 벨릭스의 절제되지 못한 방탕한 삶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맹렬하게 지적하면서 다가올 심판에 대해 설명하였고 벨릭스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 무절제한 삶이 나오게 되고,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절제하는 삶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무절제한 육신의 삶은 욕심을 부리며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 우리는 주님이 주신 환경 속에 만족하고 안식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육신 안에서 사는 사람은 거침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행동하지만,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말과 행동에 주님의 통제를 받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혀를 억제하여 복종시키고, 눈을 억제하여 복종시키고, 손과 발을 억제하여 복종시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말을 절제함
우리 삶 속에 절제가 필요한 실제적인 영역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우리의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절제가 필요하고 주님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에 있어서 주님의 통제를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의 빛을 가리는 무서운 일을 하게 됩니다.

다함께 잠언 11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은밀한 일들을 드러내나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문제를 숨기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말의 문제가 곧 영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실한 영을 지닌 자는 신실한 입을 지닌 사람입니다. 옛날이야기 중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처럼, 우리의 입술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 입에 병이 날 정도로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실수에 대해서 우스운 이야기처럼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은 주님 앞에 합당치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다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부모님은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긍휼히 여기고 용납하며, 문제가 있다면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도 당장 실수한 형제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긍휼을 입은 부족한 사람임을 인식하고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또 바로 옆에 잠언 12장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 
절제되지 못한 혀는 톡 쏘는 것 같고, 칼로 찌르는 것처럼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혀는 꼭 필요한 아픈 말을 할지라도 건강하게 세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정말 성령의 열매 9가지 항목이 하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말을 할 때에 우리에게는 절제도 있어야 하고, 또 사랑도 있어야 하고, 온유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항목들은 우리가 머리로 계산하고 일일이 주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주님과 동행할 때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에 대해서 한 구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26장 20절부터 22절입니다. 
20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불이 꺼지는 것같이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없는 곳에서는 다툼이 그치느니라.
21 타는 숯불에 숯을 더하는 것과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같이 논쟁하기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22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들은 상처들과 같아서 뱃속의 가장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야고보서에서도 우리의 혀를 불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소문을 내는 자가 불을 일으키는 나무와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2절의 말씀은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잘 간직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지체들의 어떤 소식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할 때 그 말이 돌고 돌아서 그 지체의 뒤통수를 때리게 될 때 지체들에게 뱃속의 가장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악의를 가지고 하지 않은 말이라 할지라도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말을 절제할 수 없게 되고, 우리는 의도치 않게 사랑하는 가족과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고 슬픔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또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감정을 절제함
우리의 삶에 주님의 통제가 필요한 또 한가지 실제적인 영역은 바로 우리의 감정입니다. 우리의 감정에는 주님의 통제가 필요합니다.

잠언 16장 32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분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영을 다스리는 자는 도시를 취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감정의 문제가 곧 영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가장 통제되지 못하는 곳은 우리의 가정 안에서입니다. 교회에서 모일 때는 모두가 천사 같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긴장이 풀어지고 쉽게 육신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가를 보려면 가정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남편은 쉽게 아내에게 화를 내고, 아내는 쉽게 남편에게 불평하고,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쉽게 화를 내고, 자녀들은 쉽게 부모님에게 짜증을 냅니다. 우리가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냥하고 부드러운지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의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주님의 통제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겨야할 사람들은 저 멀리 아프리카에 있지 않고 우리의 가정 안에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되 사라가 자신을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는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모든 일에서 순종한 것처럼 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되 밥을 먹이고 공부를 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시간을 드려 아이와 다정하게 대화하고 놀아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들은 마땅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내려놓고 부모님의 일을 돕고 섬기며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통제가 가장 필요한 장소는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실제가 우리의 가정 안에서 나타나기 원합니다.


마지막 시대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무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방탕함이며 불평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하여, 또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가지기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말씀에서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사람들이 자신의 입과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고하며 살아가지만 성경의 진리대로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입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고, 사람들의 눈은 더 현란하고 재미있고 자극적인 영상들을 보고자하고, 사람들의 귀는 더 신나고 감미로운 음악을 듣고, 또 뛰어나고 깊은 지식들을 듣고자 하지만 결코 채워지지도 않고 만족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돈으로 보고, 의사들은 환자들을 돈으로 보며, 목사들은 성도들을 돈으로 계산하는 타락하고 사악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무절제와 방탕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 아이들은 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발산하라는 사탄의 메시지를 들으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고집이 세며 자기 원하는 것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절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마지막 때의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1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우리는 너무나 노골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절제를 잃어버렸습니다. 말에도 거침이 없고 감정에도 거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또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합니까?


주님을 바라보며 만족함
다함께 디모데전서 6장을 보시겠습니다. 6절부터 1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절제의 또 다른 표현은 만족입니다. 만족이 있을 때 함께 오는 것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우리가 무절제하고 방탕한 이 시대의 흐름에 쓸려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약함이 있는 남편을 주신을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부족함이 있는 아내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 자녀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부모님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환경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나에게 이런 제한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때로 저에게 엄청난 돈이 있어서 주님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수백억의 돈을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건물도 크게 짓고, 출판사도 하나 만들어서 복음 책자도 최고급으로 엄청나게 찍어서 우리나라 모든 곳에 뿌리고, 선교사들과 주님께 헌신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후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그렇게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그러한 돈을 가지게 되었을 때 여전히 주님께 신실하고 또 절제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집에서 과일이나 음료수를 먹는 일에도 잘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큰돈을 저에게 맡기실 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재정적인 어려움도 주님의 통제입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사람의 의지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육신 안에서 살게 되고 사역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후보 선수가 되어 벤치에 앉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힘들고 어려운 주님의 제한하심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늘 자신의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키며 주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되 만족하면서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허락하신 만큼 걸어가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제한하실 때 멈추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원함을 억제하고 복종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수십 개씩 사줄 수 있어도, 한 번에 한 개로 제한하는 이유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온 세상을 다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온 세상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신의 생명과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더욱 성숙케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제한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보상
우리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지옥훈련을 받는 그 기간만을 생각한다면 아무도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수들은 우승과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감독이 어떻게 힘들게 훈련을 시킨다 할지라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서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선수들은 썩어질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억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 절제하고 주님의 모든 제한하심과 통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베드로전서 5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과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하나님의 강한 손은 우리를 누르고 제한하시는 손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안 된다고 막으시는 주님의 통제하시는 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답답한 환경이 하나님의 통제하시는 강한 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억제하고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제와 만족으로 이끄실 때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믿음의 경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더 얻으려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보고 듣는다 할지라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절제를 가르치십니다. 때로는 궁핍하게 때로는 풍성하게, 때로는 답답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ㅌ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통제를 잘 따르느냐에 따라 우리는 선발 선수도 될 수 있고 후보 선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신실하게 법대로 잘 달렸느냐에 따라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6.18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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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마태복음 11:28-30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두 군데입니다. 먼저 우리가 항상 찾아보는 갈라디아서 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그리고 또 한 곳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입니다. (읽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8번째 열매인 "온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말씀,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하고 초청하신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온유와 겸손
오늘은 성령의 열매 중에서 8번째인 온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저는 전에 성령의 열매 중에서 왜 겸손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온유와 겸손이 아주 밀접하고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하고 함께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온유와 겸손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이 없는 온유함이 있을 수 없고, 온유함이 없는 겸손이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온유에 대해서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는 "온유는 마치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과 같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은 그 위에 날카로운 돌을 던지면 그대로 받아들여 흘려보낸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저에게 많은 묵상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귀하고 좋은 물건이 다른 것과 부딪힐 때 상처를 받거나 깨지게 됩니다. 그러나 잔잔하게 흐르는 거대한 강물은 그 어떤 외적인 것으로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목이 마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하루를 살더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고 싶은데 저는 너무 더럽고 추해서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성경은 직접 이 생수의 강들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누구든지 목마른 자가 주님께 나아와 마시게 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누구든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올 때, 주님께서는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 생명의 성령의 거대한 강물을 흘려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메마를 때 우리는 온유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작은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고 있다면 사람들이 돌을 던질지라도 다 받아내고 흘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으로 가득한가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부르셨고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주신 안식이 가득할 때 우리는 사람들을 향해 온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마르고 무거운 짐을 지며 수고할 때에 우리는 결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이 넘치고 부드럽고 온유할 수 없습니다. 

저는 비록 공익출신이지만, 그래도 한 달 동안은 가장 추운 12월 겨울에 26사단 불무리 신병교육소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기간 동안 딱 한번 야간 행군을 했습니다. 모두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에 나섰습니다. 무거운 배낭도 매고 총도 들고 열심히 줄을 맞춰 걸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으쌰으쌰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이제 모두들 점점 지치게 되었을 때 함께 훈련을 받던 한 동료가 "힘내자"하고 외쳤습니다. 그때 모두들 다시 힘을 내며 "힘내자"하고 화답하면서 열심히 걸어갔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고 다들 많이 지쳐갔습니다. 그 친구는 계속해서 한 번씩 "힘내자"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다른 친구들이 "야, 조용히 좀 해"하고 신경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이 빠지고 지쳐있을 때는 힘내자고 외치는 그 소리마저 귀찮고 짜증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온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나아가 안식을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제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우리에게 져야할 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는 많은 짐을 지고 수고할지라도 장차 하늘에 가서는 영광 중에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짐을 질뿐만 아니라 연약한 다른 사람의 짐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서 짐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권능과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께서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하시고 많은 짐을 지고 계시면서 몸도 마음도 피곤하신데, 주님께서 그 짐을 다 제거해 주셔서 목사직을 내려놓게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되죠. 우리 형제들이 어서 일어나고 모두 주님께 나아가서 안식을 얻고 힘을 얻어서 함께 교회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동역하며 수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29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주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배울 때 우리는 우리 혼을 위한 안식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서 한번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강남 출신도 아니고 나사렛 출신입니다. 당시에 나사렛이란 마을은 아주 볼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란 사람은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만큼 무시당하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탄생은 왕의 마을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의 삶은 나사렛에서 더 길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나사렛의 목수들은 자기 목공소를 가질 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고, 나사렛 주민들도 가구를 구입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의 목수들은 망치 하나와 못 통을 들고 "문짝 고치세요. 식탁 고치세요."하고 외치면서 갈릴리 주변 마을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오십 세가 조금 안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20살이 안 되었을 때 한 대학교 캠퍼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당시에 캐쥬얼 마이를 입고 성경을 들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한창 전하는 중에 한 학생이 "선배님은 어쩌구저쩌구"하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훨씬 더 어린데, 아마도 그분은 신입생이었고, 저를 기독교 동아리를 홍보하는 선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경우가 심합니다. 예수님은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셨고, 33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젊은 예수님을 보고 아직 50세가 못된 사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화가들이 그리는 금발의 꽃미남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비천하고 어리석은, 그리고 더럽고 추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의 대표로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심판 받고자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은 강하고 거대한 나무가 아니라 연한 초목과 같았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볼품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 자신의 환경을 선택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냄새나고 더러운 말구유에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태양에 검게 그을렸고, 사람들이 볼 때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모습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면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이기적이고 교만한 제 안에, 너무나 거칠고 날카로운 제 안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시며, 놀라운 신비입니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모세
우리는 구약성경에서도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다는 평가를 받은 모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민수기 12장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민수기 12장 1절부터 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
3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주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4 주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구약성경의 기록들이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 모세는 요셉과 함께 정말 놀라운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모세가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 거절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세가 40년 뒤에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받아들였고, 모세는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이스라엘이 주님을 메시아로 영접할 것이고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모세는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말 놀라운 예표로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로 대표되는 교회를 신부 삼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깊은 의미를 모르는 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비방하는 2절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는 비난은 표면적인 것이고, 사실은 교만함 가운데 자신들을 높이고자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들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모세의 누나였던 미리암은 홍해를 건널 때에 여대언자로서 이스라엘을 향해 주의 말씀을 대언하고 또 여인들을 이끌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또한 모세의 형 아론은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모세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율법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그 말 자체에는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이 틀렸고, 그들은 반역하고 교만한 영으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잠언 16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깨끗하여도 주는 영들을 다시느니라." 
미리암과 아론의 말이 자기들의 눈에는 얼마나 옳고 깨끗하였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을 달아보셨습니다. 

우리는 민수기 12장 2절의 뒷부분에서 놀라운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온유함 가운데 대할 수 있는 근거는 주께서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주께서 그 말을 들으시며 그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이신 주 예수님이 계시고, 온 우주에서 가장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민수기 12장 전체를 다 읽어보면 모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13절에서 단 한번 입을 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직접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고 다만 주님 앞에서 잠잠하였습니다. 모세는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대적하고 비난하였던 미리암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민수기 12장 3절에 나온 것처럼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며 자신의 아내를 손가락질 할 때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이 너무나 밉고 화가 나는데 겨우겨우 참고 있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순간 모세는 오래 전 미디안 광야에서 보냈던 40년의 기간을 기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줄 알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지내던 40년의 기간은 모세를 겸손케 하고 온유하게 만드는 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왕궁에서 이집트의 왕자로서 모든 부귀와 영화를 다 누리던 모세는 40년 간 장인의 양들을 돌보는 고된 일을 하였습니다. 냄새나는 양들의 털을 깎고 똥을 치우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양들을 몰고 나가서 풀을 찾아 물을 찾아다니고, 이리가 오면 양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다치고 또 때로는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양을 빼앗기고 하면서 그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무능한 사람인지를 알아갔을 것입니다. 

모세가 미리암과 아론의 말에 화를 내지 않은 까닭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당신들의 말이 다 맞습니다. 나는 백성을 인도할 자격이 없는 자요,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당신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셨고 당신들도 위대한 주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말처럼 정말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말도 느리고 혀도 둔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부르셨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모세의 마음 속에는 잔잔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겸손은 노력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무능한 사람인지를 보여주실 때 저절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책임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시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거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와 목적은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을 통과하면서 우리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는 수고하게 하시고 또 무거운 짐도 지게 하시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하시기 위함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멍에와 짐도 제대로 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짐을 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겁게 에워싸는 모든 죄와 세상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헌신하여 주님의 멍에와 주님의 짐을 지고자 할 때 우리는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손을 대는 것마다 다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지식으로 배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순간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동행할 때 주님께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우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안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자신이 옳고 정당한 것을 주장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지고,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피곤합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이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바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비방하는 그 어떤 말보다 자기 자신이 더 천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포장할 필요도 없고, 꾸밀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선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분수에 넘치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겸손과 온유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고 선포하는 것이 저에게도 계기가 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또 실제로 이러한 겸손과 온유를 배울 수 있도록 가르쳐주시기 원합니다. 


마무리
온유와 겸손은 사람의 육신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매순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도록 할 때에 우리는 겸손과 온유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다 불러주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다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어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메마른 목을 축이고 우리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통해 다른 메마른 이들에게도 물을 공급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의 지친 혼에 안식을 얻고 아직도 안식을 얻지 못한 다른 많은 연약한 이들의 짐을 함께 지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신 길은 더러운 말구유의 길이고, 비천한 나사렛의 길이며,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종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모세가 지나간 길은 이집트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린 광야의 길이요, 비방을 받되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교회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잘 가르치는 사람은 많은데,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모양은 있지만 그 능력은 없습니다. 제가 그러하고 많은 사람들이 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멍에를 지고 주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배우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복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4.1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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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성경 위에 세워진 믿음(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경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중요성)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느덧 끝이 보입니다. 오늘은 "믿음"에 대하여 살펴볼텐데, 앞으로 믿음과 온유와 절제, 이렇게 3가지 항목만이 남아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어야 할 자세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나타내시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은 믿음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처럼 세상에서는 돈이 돈을 낳고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게 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가 더욱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시작으로 하여 우리에게 더욱더 큰 믿음을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장은 1절부터 40절까지 한 장 전체가 믿음이라는 주제로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스스로 모든 것을 가진 분이시기에 사람이 무슨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 손해나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거나 슬프시게 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한 가지 방법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자신이 계시는 것과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기도회로 모인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만약 날짜가 되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나온 분이 계시다면, 지금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을 열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상태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라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않은 상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다만 안타까운 상태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히브리서 3장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 있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아니하도록 조심하라." 믿지 아니하는 마음은 바로 악한 마음입니다. 심지어 로마서 14장 23절에서는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이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악한 마음이며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대단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아담이라는 문을 통해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고, 죄라는 문을 통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문을 만드셨고 누구나 그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 하면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하면 사람이 영원히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고 하는 문제를 사람의 믿음에 맡기실 정도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지만, 최종적인 구원의 여부는 사람의 믿음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멸망할 죄인들이었지만,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새 생명은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인생은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우리 하나님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지만, 이제 주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구원받을 때 한번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돈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기분대로 사는 것도 아니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이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음이며, 믿음이 없는 상태는 악하고 죄를 짓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사람이 구원을 받는 문제까지도 사람의 믿음에 맡겨놓으셨고,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중요하고 믿음을 가져야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알겠는데, 그러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믿음이 무엇인지 여러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살펴보면 "믿음"이 곧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하나님,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신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의 판단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지식도 경험도 부족하여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경험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받아들이지 않고 판단하고 걸러서 듣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11장 8절에 의하면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옥의 존재를 믿고 세상 사람들이 다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복음 선포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존재를 믿고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섬김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다 드리며 순종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 24절부터 26절을 통하여 "믿음"이 "거절하고 선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25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또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그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느니라."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모세에게 부와 명예를 보장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죄의 쾌락들을 즐기기를 거절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고난 받기를 자처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보입니까? 미쳤습니까? 아닙니다. 이집트의 쓰레기 같은 보화들보다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것이 훨씬 더 크고 값지다는 것을 모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말 계시고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죄의 쾌락들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바로 세상을 거절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을 이어받아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2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자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에게는 우리를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할 때 바통을 넘겨주듯이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전달받았습니다.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같은 구약의 성도들로부터 시작하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바울에 이르는 신약의 성도들, 그리고 현재 2008년에 이르기까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 온 인생을 드리며 살아온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성도들이 가져왔던 믿음의 바통을 이제 우리들이 이어받았습니다. 과거에 믿음의 경주를 달렸던 우리의 선배들은 이제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되어 우리를 둘러싸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장과 광화문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던 우렁차고 가슴벅찬 응원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더욱더 영광스럽고 웅장한 응원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시며 그 수치를 멸시하셨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멸시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영원히 통치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파도가 어떤지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유행이 무엇인지, 트랜드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약한 사람인지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 - 믿음이 없다
우리는 먼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았고, 또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순종하는 것이고, 세상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며,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돈이 없고, 생활이 피곤하고,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이러한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맞습니까? 저에게도 문제는 신학교 공부도 해야하고(이번 주에 시험기간입니다), 공부는 해야겠는데 머리는 안 돌아가고, 또 중고등부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잘 나오지도 않고, 열심히 준비해서 말씀을 전해도 별 반응이 없고, 앞으로 결혼하려면 돈도 벌어야겠고, 서울침례신학교 졸업하면 미국에 PCC도 가야겠고, 또 무엇보다 저에게 있어서 큰 문제는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텐데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따듯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각자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앞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쌓여있습니다. 한숨이 푹푹 나오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무거운 짐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우리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책임지려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근심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돈 걱정, 자식걱정, 진로걱정.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진행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을 그만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며, 세상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며, 주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믿음을 성숙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안배하심입니다. 우리는 문제 가운데 빠져서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지말고 먼저 믿음을 배우려고 해야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상황 속에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환경을 바꾸고, 문제를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도망 다니는 중에 두 번이나 사울을 직접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했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고 안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조급하게 달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다리며 하나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자라나는 원칙 - 하나님의 말씀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해야 더 자라나고 더 커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좋은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다같이 로마서 10장 1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

성경은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나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누가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며, 누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겨듣고 묵상하며 암송하고 탐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훌륭한 성경교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영적인 사람의 삶이 성경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뛰어나고 경건한 사람의 체험이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논리정연하게 보이는 과학과 철학 이론들이 성경보다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말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사람의 말을 신뢰한다면,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이 변하게 될 때 우리의 믿음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면, 성경이 일점일획도 변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 또한 변치 않고, 더욱더 견고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두고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지옥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과 기준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옥이 없이는 구원도 없고, 심판이 없이는 은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사랑과 은혜의 주제들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경 기록을 우리에게 영감으로 주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리를 따지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사랑하고 섬겼는지를 보시지, 얼마나 교리를 잘 지켰는지 묻지도 않으실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러한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고 어떻게 보면 맞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우승하려고 애써도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관을 얻지 못하며"(딤후 2:5). 하나님께서는 규칙대로, 말씀대로, 성경의 교리와 가르침대로 달렸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과거에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할 때, 하나님의 교리, 하나님의 방법대로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의 자손들이 어깨로 옮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수레에 싣고 소들이 끌고 가게 하였습니다. 땅이 울퉁불퉁 하였기 때문에 언약궤가 이리저리 흔들렸는데, 마침내 결정적으로 수레가 너무 기울어져 궤가 넘어질 뻔 했습니다. 옆에서 궤를 보고 있던 충성스러운 웃사가 주의 궤가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내밀어 언약궤를 만졌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웃사는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의 자손들도 언약궤에 달린 고리에 손잡이를 끼워서만 들 수 있었던 그 궤를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웃사의 마음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웃사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비뚤어진 상태에서 겉으로만 말씀을 지키는 것도 온전하지 않은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은 더욱더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해서 모든 비성경적인 것들을 다 덮어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규칙대로 달렸는지를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회계보고는 졸업식이 아닙니다. 졸업식에서는 시상식만 있지만, 회계보고에서는 책망도 있고, 해명하고 대답해야 할 것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나 전할 때, "너무 딱딱한가, 너무 메마른가, 좀 더 은혜롭고 사랑이 흐르는게 좋은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진리의 말씀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며 일점일획도 빠질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시며, 교회는 어떠한 교단이나 정부 단체 위에나 아래에 소속될 수 없고 오직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오직 목사와 집사이며 이것은 한 가정의 머리가 된 형제들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제사장, 즉 만인제사장이며, 성경은 어떠한 성직자 계급 제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과 확신은 오직 진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뜨거운 감정이나 느낌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데에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정체된 것 같을때, 믿음이 더 성장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
오늘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성령의 열매인 "믿음"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악한 마음이며 죄를 짓는 상태입니다. 믿음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듣기가 좋든지 나쁘든지, 나의 생각과 같든지 다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나를 부인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격주로 오후예배 후에 복음을 전하러 나가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시간이 널널하고 별로 바쁘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나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우리 모두가 참여해야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거절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세상이 싫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어나서 세상을 거절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상황을 바라보거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나의 어떠함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떻게 어렵든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평가하든지, 내가 어떻게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바라보지 않고,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많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환경을 바꾸고, 어떤 상황에서 벗어버리는데 우리에게 길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운 믿음을 갖는 데에 우리에게 길이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너무나 불안하여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지만 우리가 영원치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믿음을 세울 때 우리는 말씀을 힘입어 견고하며 신실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은 믿음을 열매로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위로자요, 또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진리 가운데 우리를 이끄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기억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며 산다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갈 길은 오직 성경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우리에게 다른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그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 우리의 판단과 상상은 다 허망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오직 성경 위에 세워진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의 기분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어떤 말도 나를 움직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힘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2.2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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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우리의 신분(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신분"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벌써 여섯 번째 항목인 "선함"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선함"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보면 "Goodness"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하면 좋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도 이 단어를 "선하다"라는 의미와 "좋다"라는 의미로 모두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인 선한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가리켜 선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울 왕은 다윗을 향하여 "나는 너에게 악을 행하였지만 너는 나에게 선으로 갚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삼상 24:19). 또한 로마서 2장 4절에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대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성령의 열매 가운데 모든 항목이 그랬지만 특히 이 "선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19:16) 로마서 3장 12절에서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라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가 성경에서 선하다는 표현을 찾을 때마다 대부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시편 34편 8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선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은 지식으로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란다.", "아 하나님은 선한 분이구나." 이렇게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선하시다는 것은 우리가 각자가 직접 맛볼 때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누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정말 선한 분이라는 것을 맛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알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실 것이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고 가장 선한 것을 주실 것이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집과 오해를 풀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고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안돼"라는 말입니다. 아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이것저것 만지고 다니는데 만약 아이가 전기 콘센트를 만지려고 한다면 엄마는 얼른 달려가면서 "안돼"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하고 바둥바둥 달리기 시작할 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차도로 달려나가기도 합니다. 그때 부모님은 얼른 아이를 낚아채며 "안돼"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기도회 전에 제가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선일이, 선빈이가 들어왔고 제가 컵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조수현 자매님께 "엄마 저도 컵라면 먹을래요."라고 말했지만, 자매님은 "안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뒤에 교회 1층에 있는 짜장면 집에 짜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선빈이는 짜장면보다 컵라면을 더 먹고 싶었지만 엄마를 따라 짜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자매님이 아이들에게 컵라면을 주지 않고 짜장면을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쉽습니다. 짜장면이 더 좋은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안돼"라고 말하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해야할 일은 부모님이 나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시고자함이 아니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만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컵라면을 "안돼"라고 말씀하시고, "짜장면 먹으러 가자"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육신의 욕심을 내려 넣고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날마다 맛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 컵라면이 너무 먹고 싶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안돼"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가장 좋고 선한 것임을 인정하고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선하다는 표현이 우리 주 예수님께도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선한 목자인가 하면 바로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만큼 선한 목자이십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0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노라.
15 아버지께서 나를 알 듯이 내가 아버지를 아노니 나는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친히 길을 잃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멸망당할 죄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목자들을 보면 혼자서 일하지 않고 많은 경우 양치기 개가 함께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양떼의 목자들이 하나의 큰 공동 울타리를 두고 양들을 함께 보관했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어 양떼를 몰고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기 위해서 목자들은 울타리로 오게 되고, 문지기는 목자를 알아보고 울타리 문을 열어줍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섞여있는 많은 양떼 가운데 자신의 양들을 불러냅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신의 양들만을 인도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목자가 앞장을 서고 양들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양떼의 뒤에는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따라옵니다. 보통 이 양치기 개들은 양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양들이 목자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잘못된 길로 가지는 않는지를 살피며 목자를 도와줍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도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마리 양치기 개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편 23편 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의 평생에 우리 뒤를 따르며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있는 두 마리의 개는 바로 선하심과 긍휼입니다. 

만약 이 개들의 이름이 심판과 공의였다면 우리는 목자를 떠나 다른 길로 가는 즉시 물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선한 목자이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를 따르는 양치기 개가 선하심과 긍휼인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선하게 대하시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망가뜨리고 무너뜨린 것을 주님은 언제나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덮어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우리를 계속 인도해오고 계십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분
이제 이러한 선한 아버지 하나님과 선한 목자를 가진 우리들이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기에 오늘 우리는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 예수님의 생명을 영접한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은 피조물들이지만, 우리가 주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에베소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선한 행위와 구원의 관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선한 행위는 구원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해서 구원을 받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 선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요, 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은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고 구원을 통한 선한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구원을 받아야만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작품입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는 우리들은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작품들입니다. 

또한 디도서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종착점이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구속을 받고 정결함을 받은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의 백성과 신분이 다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 백성들도 바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 백성들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바쁘고 열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 땅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왕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지옥에 떨어질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형제들과 교제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하기 위해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일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금 더 돈을 벌고,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무엇을 성취하려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으로서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함입니다. 영원히 남게될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하여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요일 2:17).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우리의 신분은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변화되었고 우리도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고자 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육신입니다. 다함께 로마서 7장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과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19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우리의 육신은 모두 죄의 법에 매여있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또 우리의 육신은 사망의 법에 매여있어서 선한 일을 하는데는 완전히 무능합니다. 죽은 사람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사망의 법에 매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익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의 법에 매여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데는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의 비참한 삶에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욱 강력한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셔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만유 인력의 법칙에 따라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있지만, 공중의 새들은 자신들의 생명의 법을 따라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만유 인력의 법칙에 매여 항상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셔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도록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서 마땅히 주님의 일들에 열심을 내야 하지만 그 능력의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사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만이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하여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욕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주님을 따르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욕심내는 좋은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맛보고 알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한 독특한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선한 것을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같이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과 19절입니다. 
"18 아들 이모데야, 전에 너에 관하여 주어진 대언들에 따라 내가 네게 이 책무를 주노니 곧 너는 그것들을 힘입어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자들이 그것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선한 두 가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선한 싸움과 선한 양심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양심은 예수님의 피로써 정결하게 되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깨끗해 졌습니다(히 9:14). 또한 로마서에 따르면 우리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9:1). 우리가 언제나 담대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이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파선된 배는 다시 항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고치고 보수해서 다시 항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시간이 많이 허비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일들을 넘치게 감당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막아서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양심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면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킨다면 그것은 선한 양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 아래 있고 사람마다 가진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한결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주의하며 눈치를 살피지 말고 모두가 각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의 양심대로 걸어야 합니다. 선한 행위를 위해 창조된 우리들은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드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양심의 문제를 매우 엄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하여 기록하면서 양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8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상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일반 고기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형제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상에 올랐던 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형제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자신들의 양심에서 먹으면 안될 것 같은 걸림이 있었음에도 다른 형제들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서 먹었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먹은 형제들의 양심은 깨끗했지만, 다른 형제들을 따라서 먹은 형제들의 양심은 더러워졌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먹은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문제가 없었지만, 양심을 거슬러 먹은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고 행하지 말고, 나의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다른 형제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나의 양심이 반대하는 일을 나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양심에 문제가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양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주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양심을 붙들 때에 우리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
이제 우리는 선한 싸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지적할 때 우리 안에는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는 항상 육신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로 관람객이 되지 말고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는 말은 이러한 싸움에서 아무것도 하지말고 손을 놓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그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고백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육신의 욕심과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앞부분에 보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5절부터 1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6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자하는 육신의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게 될 때 우리는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스스로를 망치게 됩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붙들고 12절 말씀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싸움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우리는 적극적인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함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위한 독특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고 하늘에 속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신분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함께 "우리의 신분"이라는 제목으로, 성령의 열매인 선함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의 신분을 뒤바꾼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이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이 나타났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 잃은 우리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이며,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불물을 가리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으며, 우리가 참으로 선을 행하기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도리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비참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늘 일하시며 동행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의 것들을 조금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릴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선하신 하나님을 따라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매순간 주님을 선택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1.23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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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주의 부드러움(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의 부드러움"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아홉 가지 성품으로 표현된 성령의 열매 가운데 벌써 다섯 번째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성품은 바로 "부드러움"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성품과는 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저는 주로 차갑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오늘 이 주제로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기 원합니다. 

이 부드러움이란 단어를 영어로 보시면 "gentleness"라고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신사 숙녀 여러분" 할 때 신사가 바로 젠틀맨인데,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gentle"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신사"라고 할 때는 홀을 꽂아 끼우는 띠를 의미하는 "띠 신"자와, "선비 사"자가 합쳐서 홀을 꽂아 끼우는 띠를 띠는 옷을 입는 상류계층, 즉 교양 있고 잘 배우고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어에서 "젠틀맨"이라고 할 때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제임스 낙스(James Knox)라는 한 성경교사는 부드러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드러움(gentle)"이란 단어의 뜻은 친절(kind)하다는 것이고, 친구처럼(friendly) 대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은 또한 온유하고(meek), 온화하며(moderate), 엄하지 않고(not severe), 과격하지 않으며(not violent) 오히려 예의 바르다(courteous)는 뜻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후서에서 경고한 바와 같이 아주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1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특별히 우리는 3절 뒷부분에 있는 "사나우며"라는 표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사랑하며 교만하며 사나워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이 없어지고 마음은 강팍해지고 점점 차가워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는 사납고 이기적이며 주님의 성품인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열매맺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 이삭
성경에 나타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이 매우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하나님을 따라 걸어온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당함과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상처와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그대로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로서 자신의 아버지는 너무나 늙고 힘이 없었지만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부릅니다. "이삭아, 이삭아,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 번제 헌물을 드리러 가야한다." 이삭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른 두 청년과 함께 번제 헌물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합니다. 이틀의 여정을 지나 셋째 날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두 청년을 남겨두고 이삭에게 번제 헌물에 쓸 나무를 등에 지웁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손에는 불과 칼이 들려있고, 아버지의 표정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쉽게 무엇을 묻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삭이 어렵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실 것이다." 그리고 산에 도착한 아버지는 이삭과 함께 제단을 쌓아 올립니다. 제단 손질을 마치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의 손과 발을 묶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삭이 이때에 만약 20세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120세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삭이 아버지를 뿌리치고자 했다면, 달아나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젊음과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정말 어린양같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아마도 이삭은 이렇게 고백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내가 번제 헌물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내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이 모자란 자도 헌물로 받아주신다면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에서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에게 생명을 바치기까지 순종하는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은 새로운 가장으로서 가정을 인도했습니다. 당시에 광야에서 순례자로서 유목생활을 하였던 이삭에게는 우물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지만 갑자기 나타난 그랄의 목자들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냥 주고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을 팠을 때 또 다시 다툼이 일어나자 우물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물을 팠을 때 다툼이 일어나지 않자, "이제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은즉 그 땅에서 우리가 다산하리라."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삭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싸움을 걸고 우물을 빼앗았던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며 거칠게 나설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따라 부드러움 가운데 걸을 때 주님은 우리의 원수들과도 화목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들 - 요셉
이제 요셉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요셉은 10명의 배다른 형을 가진 막내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으면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막내였던 요셉을 너무나 사랑했고, 또 이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요셉의 나이는 17세. 꿈도 많고 미래도 창창한 젊은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려고 형들을 찾아갔던 요셉은 형들의 습격을 받고 옷이 발가벗겨지며 구덩이 던져졌다가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은 충격과 공포로 휩싸였을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상처와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들의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과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 형들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예의 신분이 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노예가 된 요셉은 억울해 하면서 복수를 꿈꾸지 않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부리는 자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맡겨진 모든 일을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호위대장인 보디발의 온 집안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에도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걸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분노하여 거짓으로 요셉에게 누명을 씌웠고, 질투의 영에 사로잡힌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억울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라고 말했는데, 요셉 또한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고 감옥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였습니다. 요셉은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잘 받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감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하루는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와 잔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슬프기에 물어보았더니, 그들이 각각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이 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꿈이나 환상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있던 당시는 창세기조차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요셉의 해석과 같이 빵 굽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잔 맡은 자는 직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잔 맡은 자는 직위가 회복되면 자신의 억울함을 기억하고 빼내어 달라는 요셉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파라오는 무시무시한 꿈을 꾸게 되고, 잔 맡은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요셉을 파라오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여 앞으로 7년 간의 풍년과 7년 간의 흉년이 있을 터이니 지혜로운 자로 하여금 7년의 풍년에 식량을 잘 비축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고, 파라오는 요셉을 총독으로 세워 온 이집트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7년의 풍년이 지나고 7년의 흉년이 임하는 동안, 저 멀리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도 기근으로 인해 식량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제 요셉의 형들은 먹을 것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갑니다. 이제 요셉의 눈앞에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이 제 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그들에게 복수할 만한 큰 권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창세기 45장 7절과 8절을 보시겠습니다. 
7 하나님께서 큰 구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을 위해 후손을 땅에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이제 나를 여기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분께서 나를 파라오에게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그의 온 집의 주가 되게 하셨으며 또 온 이집트 땅의 치리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또한 창세기 50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를 다 마치자,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합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5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요셉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같은 우리를 위해 친히 모든 슬픔과 고통을 감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며 친절히 대하십니다. 요셉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장 나에게 어려운 일이 벌어질지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부당하게 대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부드러움을 붙잡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말로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의 부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 다윗
마지막으로 다윗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도 정말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대언자 사무엘이 와서 이새의 집의 모든 아들을 초청하여 주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였을 때 아예 제껴진 막내아들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우와 아버지 대언자 사무엘이 우리 집을 다 초청했다고요? 아들들 다 오라고 했다구요?", "다윗아 너는 형들하고 아빠 다녀올 동안 가서 양 돌보고 있어라."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다윗은 아마 울면서 초원으로 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아버지도 형들도 저를 불러주지 않고 저는 무가치한 아들이요 소외당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여전히 이렇게 못난 저의 목자시지요? 저는 주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요."하면서 주님께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음이 가난하고 그래서 더욱 주님을 갈망하는 어린 소년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픔이 있고 서운함이 있고 상처가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가장 선하신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드럽고 친절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십니다. 
이러한 아픔 뒤에,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다윗에게는 골리앗을 향한 큰 승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향한 어떠한 잘못도 악의도 없었지만 너무나 억울하게도 광야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잡히기만 하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긴박한 도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시편 18편을 보시겠습니다. 18편 맨 처음에 보시면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악장에게 준 주의 종 다윗의 시,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니라. 그가 이르되,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9절부터 보시겠습니다. 
29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나의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나이다. 
30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정제되었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
31 주 외에 누가 하나님이리요?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리요?
32 이 하나님은 곧 능력으로 내게 띠를 두르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3 그분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나를 높은 곳들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36 주께서 내 밑의 발 디딜 곳을 넓히사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35절 뒷부분에 보면 주의 부드러움이, 주님의 gentleness가 다윗을 크고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완전한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상처 주고 원수처럼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조차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사무엘하 16장을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16장 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보라, 거기서 사울의 집에 속한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오니 그는 게라의 아들이요, 그의 이름은 시므이더라. 그가 앞으로 나오면서 올 때에 계속해서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니 그때에 온 백성과 모든 용사들은 왕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너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8 주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빠졌느니라, 하니라.
9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10 왕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그런즉 누가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겠느냐? 하고
11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보라, 내 속 중심에서 난 내 아들이 내 생명을 찾거늘 이제 이 베냐민 족속은 얼마나 더 그리하랴?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 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12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가 그의 맞은편에서 산비탈로 따라가며 그가 갈 때에 그를 저주하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이 모습은 마치 성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가시는 주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을 따라오면서, 사실이 아닌 것들로 모함하고 저주하는 시므이에게 조차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집에 큰 친절을 베풀었지만, 사울의 자손인 시므이는 다윗을 원수로 여기고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우리도 때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친절을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원망하고 대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건방지고 오만한 말과 마음을 부드럽게 품어주셨습니다. 

이제 전쟁이 마무리되고 다윗 왕이 다시 성으로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다같이 사무엘하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6절부터 보시면,
16 바후림에 있던 베냐민 족속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하고 사울의 집의 종 시바도 자기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과 함께 요르단을 지나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 왕의 집안사람들을 건너가게 하며 또 왕이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게 하려고 나룻배가 건너가니라. 왕이 요르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 왕께 이르되, 내 주께서는 불법을 내게로 돌리지 마옵소서. 또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왕의 종이 그릇되게 행한 것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내가 죄를 지은 줄을 왕의 종이 아나이다. 그러므로, 보소서, 이 날 요셉의 온 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와서 내려가 내 주 왕을 맞이하나이다, 하였으나
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응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이 일로 인해 그가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매
22 다윗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이 날 나의 대적이 되려 하느냐? 이 날 이스라엘 안에서 사람을 죽여야 하겠느냐? 내가 이 날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느냐? 하고
23 그런 까닭에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오늘 우리는 시므이를 죽이려 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비새는 정당하고 올바른 권리를 말하였지만 그것은 결코 주의 부드러움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욕하고 저주하며 상처 준 시므이에게 복수하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모든 권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부드러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고 관대한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상처 주고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조차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삭과 요셉과 다윗은 모두 우리 주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수염을 뽑히시고, 버림받고, 거부되셨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우리를 위하여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비천하게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친절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드러움과 친절함으로 대하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주님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우리를 주님이 변함 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인도하시고, 우리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제멋대로인 우리들에게 여전히 친절하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친절하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의 부드러움을 힘입어 오늘 용서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용서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교만한 저에게 친절하신 것처럼, 저도 친절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저에게 관대하신 것처럼, 저도 관대하기 원합니다. 
제가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부드러움과 친절하심이 저를 통해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도록 주님께 저 자신을 온전히 의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12.2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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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오래 참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서는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언제가는 벌을 내리기 위하여 벼르고 벼르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가 전제된 상태에서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이 기다리기를 돌아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고 계십니다. 또한 이미 구원을 받은 우리가 주님을 떠나 죄 가운데 방황할 때에도 주님은 오래 참으심 가운데 우리를 긍휼로 대하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인데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연수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홍수를 내리시기까지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는 낳을 때에 에녹을 통하여 300년 간 홍수의 심판을 경고하셨고, 므두셀라가 죽기 120년 전부터는 방주를 만들며 말씀을 선포한 노아를 통하여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고, 동물들이 짝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신기한 광경이 벌어진 이후에도 일주일을 더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성경은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저와 함께 재미있는 요나 이야기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오래 참으시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요나서 4장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요나를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요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께 까불고 대들었던 대언자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요나가 고래 뱃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땅의 심장 속에 3일 낮과 밤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요나보다 위대한 이가 여기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요나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구약의 인물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에 요나가 들어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제가 요나서에서 가장 재밌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입니다. 요나는 뭔가 건방진 태도로 하나님께 따지고 대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요나에게 이해시키고 한 마음이 되길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다소 거칠고 과격한 사람이었지만 또 한면에서는 아주 꾸밈이 없고 진솔 담백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는 요나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면서 요나를 오래 참으시며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니느웨로 가라
이제 요나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들의 사악함이 내 앞에 이르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는 나중에 요나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3일 동안 걸어야 다 돌 수 있을 만큼 큰 도시였고,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만 해도 십 이만 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사악함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시고 요나를 통하여 경고를 주셔서 니느웨가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하여 부정할 때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반드시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주 예수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신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님이 약속을 더디게 이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들에게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당할 수치를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니느웨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니느웨 사람들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언자 요나를 그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3절을 보시면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기 위해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요나는 일어나서 욥바로 가더니 엉뚱하게 다른 곳으로 가려고 배를 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잠시 성경 뒤에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뒤에 부록에 보시면 지도 12번 분단 왕국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해(지중해)라고 된 곳 오른편에 욥바의 위치가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지도 13번을 보면 주황색으로 아시리아 글자 위에 니느웨를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과 가까이 있긴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니느웨로 갈 때는 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라는 니느웨와 정반대되는 곳으로 떠나려고 욥바로 가서 배를 탄 것입니다. 다시스라는 곳은 현재 없는 지명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스페인의 어떤 도시이거나, 사도 바울이 태어났던 다소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있습니다. 가라고 하셨는데 다만 안가고 버틴 것이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반대방향으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요나서 4장을 보면 더 자세히 나오겠지만, 요나는 당시에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다스린 나라였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큰 도시였던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해서 용서를 받느니 차라리 멸망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부르셨고 보내셨는지를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 가운데 이미 용서함을 전제로 니느웨 백성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려 하심을 알고 있었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모두 받아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절대 경고하지 않기로 작정하였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그들이 모두 멸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아마 우리가 요나였다 하더라도 비슷한 결정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를 압제한 일본 사람들을 위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한다면 기꺼이 가려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를 바꿔서라도 니느웨로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열고 음성을 내시거나 주의 천사로서 나타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니느웨 백성들에게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요나에게 먼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집불통 반역적인 요나를 용서를 전제로 오래 참고 계십니다. 


오 잠자는 자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절하고 반대로 나아가는 요나를 돌이키시기 위해 바다에 큰 폭풍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말씀에 불복종한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설득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십니다. 큰 폭풍으로 인하여 배가 부서질 지경이 되자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종교적인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현실적인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온 배가 난리법석입니다. 이때 유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 있었다면 유서를 써서 유리병에 담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고있는 요나는 고집스런 얼굴을 하고는 배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눈을 꾹 감고 잠을 잡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 저는 죽어도 니느웨 못 갑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알아서 하세요. 우리 민족의 원수들인데 어떻게 회개해서 살으라고 합니까? 다 멸망하게 내버려두세요." 

선장이 배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또 무거운 짐이 있으면 바다에 던지려고 배의 밑바닥까지 내려왔다가 요나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 잠자는 자여, 어찌 된 일이냐? 일어나 네 하나님을 부르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면 우리가 망하지 아니하리라." 선장은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애써 잠을 자고 있는 요나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이제 선원들이 모여서 누구 때문에 이런 폭풍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습니다. 많은 경우 비나 눈이나 폭풍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현상이지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가 들거나 배탈이 나면 춥게 다니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이지 죄를 짓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무조건 우리의 죄와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이렇게 요나와 같이 자신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환경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과 성령님의 음성을 통하여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 문제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는데도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은 여기 나온 것처럼 이방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아주 분명하게 요나를 지적하십니다.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고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집니다. "네 직업이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네 나라는 어디냐? 너는 어느 나라 백성이냐?"
9절에서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으로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주 곧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 하노라."


고래를 예비하신 하나님
요나는 자신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대로 배를 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폭풍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우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원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마저 사용하셔서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나는 아마도 이 순간에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이렇게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는 바다에 빠져 죽겠습니다. 죽어도 저는 니느웨 안갑니다."

이제 요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요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요나와 한 마음을 갖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큼직한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고기를 고래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류인 물고기냐, 포유류인 고래냐를 가지고 따지고 고래상어나 청상아리다 많은 추측들을 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물고기가 무슨 종류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제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며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뱃속에 있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폭풍우를 예비하셨고 또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아주 다양한 것들을 예비해 주십니다. 
요나는 고래뱃속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나서 2장 1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의 이러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을 돌이키고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희생물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10절에 보시면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다시 니느웨로
이제 3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3절에 보면 "이에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니라. 이제 니느웨는 사흘 길을 다닐 만큼 심히 큰 도시더라." 이제 드디어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최소한 3일을 돌아야 다 다닐 만큼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4절에 나온 것처럼 하루 동안만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아주 지멋대로인 대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니느웨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한 바퀴는 돌아야 할 것 같은데, 요나는 하루만 대충 돌면서 저주를 퍼붓고는 도시 밖으로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이키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 그 더러운 죄 때문에 이제 사십 일 뒤에는 다 망해버릴거니까 그리들 알어!", "이 저주받은 것들아, 니들 얼마나 가증한 죄를 지었는지 이제 사십 일 뒤에는 그냥 하늘에 불이 떨어지든 땅이 뒤집히든 다 죽을거니까 그리들 알아!" 아마 이런 저주의 뉘앙스로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요나야 사흘 길을 다녀야 니느웨에 다 말씀을 전하는데 하루만 하고 나오면 어떡하니?"
"아우 그래도 전했잖아요. 저도 더 이상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멋대로 대언자 요나에게 조차 오래 참으십니다. 

놀랍게도 요나가 하루 만 선포하고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앗시리아 왕에게까지 전해졌고 앗시리아의 왕은 짐승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의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며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돌이킨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이에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며 그들 중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으니"라고 말하고 9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돌아서시고 뜻을 돌이키사 자신의 맹렬한 분노에서 떠나심으로 우리가 멸망하지 아니할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한 것을 보시고 재앙을 철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실 뿐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셔서 누구든지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요나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이제 겉으로 보자면 요나의 사역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고, 바울과 사도들은 수십 년을 복음을 전하러 다녔어도 이렇게 요나처럼 수많은 사람을 한번에 회개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 요나는 하루만에 어린이만 십이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를 왕으로부터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체다 회개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설교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서는 이렇게 성공적인 사역과 함께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4장 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1 그러나 요나가 그 일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매우 분노하여
2 주께 기도하며 이르되, 오 주여, 간구하오니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내 말이 이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사 재앙에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니이다.

이런 멋진 고백을 감사의 눈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면서 하는 이 고집불통 요나를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에게 조차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친절은 우리가 잘나고 착하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럽고 가증한 죄악 가운데 묶여있을 때에조차, 우리가 거칠고 교만하며 어리석을 때에조차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는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3절에 "오 주여, 그러므로 이제 주께 간청하건대 내게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더 낫나이다, 하니라."
요나는 보면 볼수록 아주 웃기는 대언자입니다. "하나님 거봐요. 내가 이 원수 같은 놈들 그냥 멸망시킬려고 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해 줄지 알았다니까요. 아무리 우리 민족이 죄를 지었어도 이렇게 잔인하고 더러운 놈들을 용서해 주다니요. 저는 분해서 못 살겠습니다."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주님이라면 "아우 진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가 시키면 하는거지, 진짜 말많네. 죽고싶어? 그럼 니 소원대로 그냥 죽어버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요나의 마음을 얻고 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요나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도시가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멸망하는 장면을 만끽하기 위하여 도시의 동쪽 편에 앉아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사십 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거짓말하지 마옵소서. 이제 삼십 구일 남았나이다. 삼십 구일 되면 정말 니느웨를 무너뜨리소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소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소서. 저 원수들을 제발 좀 멸망시키소서."
아주 건방지지만 그러나 진솔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6절에 "주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위로 올라가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 넝쿨이 그의 머리 위에서 그늘이 되게 하여 그를 고통에서 건지려 하심이었더라. 이에 요나가 그 박 넝쿨을 심히 기뻐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 볕에서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요나를 위해 박 넝쿨을 예비해 주셨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에, 우리 하나님은 정말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야 니가 뭘 잘했다고 자꾸 고집이야, 아 이거 진짜 웃긴 녀석이네."하면서 숲 속에서 곰이나 사자를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단순한 요나는 그늘이 생겨서 너무 좋아하면서 계속 도시를 지켜봤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삼십 팔일 남았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이루소서. 우리 민족의 원수를 나의 눈앞에서 멸망케 하옵소서. 믿슙니다. 아멘!"

7절에 보면 하나님께 그 다음 날 아침이 이르러서 이제 막 시원한 감이 없어지고 해가 막 뜨려할 때 벌레 한 마리를 예비하사 박 넝쿨을 시들게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해가 뜨고 그늘이 필요하기 시작한데 때마침 넝쿨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더니 8절에 드디어 해가 뜹니다. 해가 뜰 때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또 뜨거운 해가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요나 한 사람을 위해 예비하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거대한 폭풍에서부터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교제하시며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긍휼의 마음을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자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이제 요나는 기진맥진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땀은 줄줄 흐르고 뜨거운 동풍에 숨은 팍팍 막히고 아주 짜증이 머리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요나는 발라당 누워서 "주님 죽여주세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내게 더 낫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9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박 넝쿨로 인하여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요나가 응수합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마지막 대답으로 요나서는 끝마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0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하지도 아니하고 자라게 하지도 아니한 박 넝쿨 곧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 그 박 넝쿨을 불쌍히 여겼거든
11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이 넘고 또 많은 가축이 있는 저 큰 도시 니느웨를 내가 아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마무리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사람과 교제하기 원하시며, 사람과 함께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뭐가 대단하길래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토록 공을 들여가며 상대해 주십니까? 우주 저 멀리서 바라볼 때 한낮 점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이 뭐가 이쁘고 뭐가 잘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관대하게 대해 주십니까?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송가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이 없는 놀라운 사랑을 퍼부어 주고 계십니다. 요나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우를 예비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시고,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작은 벌레를 예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요나에게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요나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설득하시고 또 알려주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만물의 통치자이심에도 불구하고, 먼지와 같고 티끌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을 한없이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땡깡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더라도 이해가 안되면 따지고 죽겠다고 드러눕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시며 은혜와 긍휼로 대하시고 용납하면서까지 우리와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주님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지 않으십니까? 이러한 주님이시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진실한 친구보다 뛰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해를 주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살았습니다. 우리가 악하고 교묘하게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주님은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더욱 사랑해 주셨습니다. 누가 성령을 따르는 가운데 오래 참을 수 있습니까? 바로 나를 향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리 오래 참을지라도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답답하고 못마땅할 뿐이지만, 나를 오래 참아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낮아진 사람은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오늘도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11.28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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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하나님의 화평(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화평"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세 번째로 화평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화평은 영어 단어로 "peace"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말로 "평?quot;, "평강", "평화"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성경에서도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할 때 이 "평강"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열매인 "화평"과 같은 단어 "peace" 입니다. 우리가 찬송집도 피스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평화"라는 의미의 피스가 아니고, 찬송가 종이들을 조각조각 모았다고 해서 조각을 의미하는 "piece"인 것 같습니다. 


화평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아무튼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화평"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서는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창시자"(the author of peace)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국가의 통치자와 교회의 감독자와 가정의 아버지라는 권위가 세워졌고 그 질서대로 운영될 때 참된 화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여러 곳에서 화평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거스르고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아무리 똑똑할지라도, 성도들이 아무리 영적일지라도, 자녀들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자신들 위에 세워진 권위와 질서를 거스를 때 화평은 깨어지고 혼란만이 가득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평화의 통치자"(the Prince of Peac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왕국들이 연합하여 유엔을 세우고 세계 평화를 아무리 추구한다 할지라도 평화의 통치자인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왕이 되시기 전에는 결코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은 심판자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서 결단코 가질 수 없었던 화평을 주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또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과 같이 성령님의 열매가 바로 화평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모두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화평의 창시자이시며, 아들은 평화의 통치자이시며, 성령은 화평을 열매맺는 원천이십니다.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화평"이라는 단어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영어로 "peacemakers" 라고 되어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고 우리가 그렇게 불려질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 가운데 화평을 만들어내고 평안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모두 화평을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사람들에게 화평을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화평의 모든 면을 다 살펴볼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화평을 누릴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기적으로 나 혼자만 평안하고 안락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하고 지치고 힘든 형제 자매들에게도 하나님의 화평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화평을 충분히 공급받고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화평"이라는 열매 자체가 아니라 "화평"의 열매를 맺으시는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알아가고 더 닮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주님과 같이 화평을 주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한테 그럴 수 있니? 니들이 그러고도 제자야? 베드로 어딨어? 네 이놈!"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 참되게 따르게 된다면 우리도 우리를 배반하고 상처 준 이들에게 하나님의 화평과 축복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평의 삼각대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우리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에서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제 손에 캠코더를 들고 모든 집회 순서를 다 찍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제 손이 자꾸만 조금씩 떨려서 화면이 흔들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손 떨림을 없애기 위해서 왼손으로 받쳐보기도 하고 했지만 자꾸만 떨려서 안정된 화면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캠코더를 올려놓을 수 있는 삼각대가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멋진 작품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들을 보면 항상 삼각대를 들고 다닙니다. 결혼식 사진사도 그렇고 사진방 사장님들도 모두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놓습니다. 축구 경기장에서도 기자들은 경기장 주위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멋진 사진을 담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진사라 할지라도 미세한 손 떨림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라는 카메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이루어주신 멋진 광경들을 담으려고 할 때에도 우리의 손이 자꾸만 흔들려서 멋진 작품을 찍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화평의 삼각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삼각대 위에 놓고 찍으면 손 떨림이 없기 때문에 아주 멋진 작품 사진을 찍을 수가 있습니다. 이 화평의 삼각대는 모두 세 다리로 되어있는데 첫 번째 다리는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입니다. 두 번째 다리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다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세 다리가 온전히 세워질 때 우리는 화평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멋진 광경들을 담을 수 있고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말고도 더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기억하기 좋게 삼각대를 연상하면서 하나님의 화평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 - 믿음
첫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 같이 빌립보서 4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욥 5:7)하신 욥기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 에는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아주 다양한 염려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와 걱정거리들이 우리를 방문할 때 우리는 평안을 잃어버리고 걱정하며 어려워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이 금새 해결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이유는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토록 약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오늘 걱정과 염려가 있으신 분은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야 하기 때문에 먼저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에게 호흡할 수 있는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와 걸을 수 있는 건강한 다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하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 죄 많고 고생 많은 세상에서 저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신 그 크신 사랑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오늘 저를 부르신다면 이 모든 문제들이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베푸신 은혜를 헤아릴 때 오늘 저에게 닥친 이 어려움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함을 고백합니다. 저 같이 부족한 자에게 구원을 받고 함께 주님을 섬기는 가족들과 교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염려와 어려움이 닥칠 때 그 걱정에 사로잡혀 고통 받지 마시고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이렇게 감사로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의 모든 환경이 주님의 선하신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제게 닥친 어려움이 주님의 사랑과 긍휼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주신 이 환경 가운데 제가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발견하게 해주세요. 주님 저에게 이러이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선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 주세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도 아니고 "그리하면 모두 응답해 주시리라"도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고 우리의 생각은 요새와 같습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걱정과 염려의 불화살을 쏘아서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가 주님께 감사와 간구의 기도를 할 때에 주님은 즉시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을 내리셔서 걱정과 염려를 물리치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상황이 종결되고 마무리 되어서 화평을 갖는 것이 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하나님의 화평은 아무리 큰 문제가 내 앞에 버티고 있을지라도 누릴 수 있는 놀라운 것입니다.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사람의 이해로는 알 수 없는 이상하고도 신기한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잘 훈련받은 군사들이 황제의 궁을 철통같이 호위하고 지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걱정과 염려로부터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화평은 바깥의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이 찾아오지만 우리가 언제라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평강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2.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함 - 순종
화평의 삼각대의 두 번째 다리는 순종입니다. 바로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려면 먼저 육신의 욕심을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강이 없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에게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진 것들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가지고자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시기하고 욕심을 부리는 마음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어른들은 그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고 은밀하게 또는 매우 영적이고 선하게 포장하는 법을 터득했을 뿐 욕심이 없는 고차원적인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욕심"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lust"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 성경에서 "정욕"이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욕심과 정욕은 모두 육신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전쟁과 싸움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너희의 정욕들로부터 나지 아니하느냐?" 우리에게서 화평이 깨어지고, 마음에 평강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다툼이 있고 전쟁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나의 속에서부터 나오는 욕심과 정욕 때문임을 성경은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화평이 없는 이유는 바깥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은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로 육신을 못 박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로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못 박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구절은 못 박혔다고 말하지 않고 못 박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의지를 사용하여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매순간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든, 일의 성취에 대한 욕심이든 우리가 어떠한 욕심에 이끌려 행동하게 될 때 우리는 길을 잃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질서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아내는 남편에게, 성도들은 목자에게, 국민들은 법과 권세자들에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반대되지 않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질서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원하는 바와 욕심이 일어날 때 우리는 거역하게 되고 하나님의 평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의 근원의 육신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비롯된 일은 욕심에 근거하지만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일은 순종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화평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질서와 위치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3.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함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이제 마지막 다리입니다. 화평의 삼각대를 세우는 마지막 다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26절을 보시면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은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에 이어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시기하며 분쟁합니다. 누군가 나의 수고와 노력을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불안정하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고 나쁘게 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고 평안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우리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나를 은근슬쩍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자 하고 나를 변호하고 정당하게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심으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지식과 학력과 사회적 지위와 인맥과 자신의 경험과 경력, 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육신의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헛된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피곤하며 지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로다, 하니라." 가장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때 땅에서는 평화와 사람들을 향한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땅에서는 평화도 우리들을 향한 선하신 뜻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고자 한다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는지 어떻게 오해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고들은 몇 가지 제한된 사실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면서 "아, 저 사람은 이래서 틀렸고 그래서 나는 맞아. 아, 저 사람은 저게 문제고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더 옳아"하는 생각 역시도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하며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화평을 공급하며 존중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보다 영적이고, 내가 누구보다 앞서있고 하는 것은 다 헛된 영광에 불과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평가하시는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께서만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나의 정당함과 억울한 사정을 모두 아시고 나의 수고와 헌신을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간직하셨다가, 장차 영원한 왕국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되갚아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영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겸손할수록 좋고 낮을수록 좋습니다. 나의 입술은 나를 정당화하지 않을수록 좋고 나를 자랑하지 않을수록 좋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컵은 언제 떨어져 깨질지 모르지만 바닥까지 낮아져 바닥에 놓인 컵은 더 이상 떨어져 깨질 위험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평안할 수 있습니다. 


정리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화평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이라는 카메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멋진 풍경들을 온전히 담아 누리고자 할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화평의 삼각대입니다. 이 화평의 삼각대는 말 그대로 세 다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다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순종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편안히 안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언제나 육신의 욕심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기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아무런 염려 없이 평강 가운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의 주관자와 책임자는 주님이시고 나는 다만 종으로서 순종하기 때문에 내가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면 우리는 평강 가운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용서받은 죄인들일 뿐이고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평안하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화평의 삼각대가 우리 안에 온전히 세워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 인생에서 그려나가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멋진 광경을 온전히 담아 누리는 멋지고 행복한 카메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은혜와 평강이 항상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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