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7.10.3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http://robinbox.net


[#04]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모두 기쁨이라는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기쁨이 없고 걱정과 염려와 실망뿐이라면 우리는 살아갈 아무런 의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작은 기쁨이라도 있다면 그 기쁨으로 인하여 다른 많은 문제들을 쉽게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생활할 때 기쁨이라는 열매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러 종류의 기쁨들 사이에는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장난감을 선물 받고 기뻐하는 아이의 기쁨과 기뻐하는 자녀를 보며 기뻐하는 부모의 기쁨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또 한가지 기쁨의 특징이 있다면 기쁨의 차원이 높이 올라갈수록 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드컵 결승전을 하는데 3:0으로 이긴 팀은 그저 웃으며 기뻐할지 모르지만, 3:0으로 지던 상황에서 역전의 드라마를 일구어 우승을 이룬 팀은 눈물로 기뻐할 것입니다. 마라톤을 하는데 어릴 때부터 건강해서 금메달을 딴 선수와 그의 가족은 웃으며 기뻐할지 모르지만, 어려운 사고나 시련을 겪은 뒤에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와 그의 가족은 눈물로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본다면 우리는 그 기쁨이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최상의, 가장 높은 차원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열매로써 나타나는 기쁨을 맛본다면 그것은 잔잔한 감동에서 시작되어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주님께 기쁨의 찬송을 외치게 할 것입니다. 

다함께 오늘의 본문 16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육신에서 비롯된 기쁨과 성령 안에서 나온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기쁨은 자신의 욕심이 이루어진 것에 근거하지만, 성령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에 근거합니다. 육신의 기쁨은 자신의 행함에 근거하지만, 성령의 기쁨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근거합니다. 육신의 기쁨은 우리가 높아질 때 찾아오지만, 성령의 기쁨은 우리가 낮아질 때 넘쳐납니다. 육신의 기쁨은 일시적이고 환경에 따라 급변하지만, 성령의 기쁨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한 계속됩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는 기쁨은 나의 상태에 근거하거나, 환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위치한 최상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쁨을 가질 때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고, 환경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기쁨이 성령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설교의 구성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이고, 두 번째는 고난으로 인한 기쁨이고, 세 번째는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 두 번째 고난, 세 번째 교회입니다. 


1.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
첫 번째로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함께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보시겠습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9 참새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그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31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여기에 일 앗사리온에 팔리고 있는 두 마리의 참새가 있습니다. 한 마리씩은 팔지도 않고 두 마리 묶어서 일 앗사리온입니다. 일 앗사리온은 16분의 1 데나리온이고, 1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하루에 16 앗사리온을 번 일꾼은 그 중 일 앗사리온을 주고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습니다. 하루 품삯으로 모두 참새를 산다면 모두 32마리의 참새를 살 수가 있습니다. 

참새를 사고 파는 사람들은 아무도 참새를 긍휼히 여기거나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흔해빠지고 어디를 가든 널려있는 참새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치킨을 먹을 때 닭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이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참새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금요일 집에서 나오면서 참새가 떨어져 죽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참새를 보면서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복음서를 주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렇게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지만 서로 비교하면서 볼 때 우리는 더욱 깊이 있고 또 흥미로운 말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을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6절과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 참새 다섯 마리가 이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혀지지 아니하느니라.
7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이제 날씨가 점점 쌀쌀해 지고 있습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붕어빵입니다. 캐나다에서 붕어빵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다니는 서울침례신학교 건물 앞에도 붕어빵 아저씨가 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붕어빵을 살 때 어떤 곳은 세 마리 천원, 그리고 일곱 마리 2천원에 파는 곳이 있습니다. 2천원이면 여섯 마리여야 하는데 한 마리는 서비스로, 덤으로 주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 참새도 똑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참새 두 마리에 일 앗사리온이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다섯 마리에 이 앗사리온이라고 했습니다. 두 마리가 일 앗사리온이면 네 마리가 이 앗사리온이어야 하는데 여기에 한 마리가 덤으로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다섯 번째 참새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 이 참새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나마 앞의 네 마리는 값이 치러진, 가치가 인정된 행복한 참새들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다섯 번째, 아무런 값도 치러지지 않고 무가치하게 여겨진, 모두에게 잊혀지고 계산되어지지 않은, 서비스요 덤으로 팔려간 이 마지막 참새.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혀지지 아니하느니라."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때로는 이 다섯 번째 참새와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고, 기억해 주지 않고, 바라봐 주지 않고, 불러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우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외로움 속에 슬퍼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잊혀지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중하니라."

여러분 오늘 아침 머리를 감으시면서 몇 개의 머리털이 빠졌는지 세어보신 분 혹시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큰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시는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5 여인이 자기의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16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이 계속해서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사 49:15,16).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잘것없이 여겨지고 다섯 번째 참새처럼 사랑 받지 못한 것 같은 우리를 손바닥에 못 자국으로 새기시고 절대 잊지 않으시며 여전히 우리를 광대하고 세심한 손으로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또한 슬퍼하지 말라.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오늘 우리의 기쁨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돌보심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우리가 좀 못나고 모자랄지라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고 동행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며 원동력입니다. 


2. 고난으로 인한 기쁨
이제 두 번째로 고난을 통한 기쁨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이며, 두 번째는 고난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향해 가져야할 목표는 자녀의 행복이 아닌, 자녀의 성숙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목표로 삼을 때, 자녀는 나약해지고, 버릇이 없어지며, 책임감도 없어지기가 쉽습니다. 자녀의 행복을 목표로 삼은 부모는 자녀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며, 모든 필요한 것을 착착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자녀의 성숙을 목표로 삼은 부모는 자녀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잘 조절하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잠시 거두기도 합니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며 세심하게 돌보고 계신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우리의 성숙을 목표로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축복과 행복이지만, 그러한 축복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성숙의 그릇을 먼저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재벌가인 아버지라고 해서 무턱대고 중학생인 아들에게 아파트나 자동차를 선물할 수 없듯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도 무턱대고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 원하고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때때로 어떠한 환경들은 우리를 속이는 마귀의 역사일 수 있는데, 이러할 때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어려운 환경들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참새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러한 어려운 환경이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릇을 넓히시고 더 큰 축복을 담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에게 닥친 상황과 환경에 근거하지 않고, 그러한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 때 주님은 좋고 평탄한 환경들로 자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시지만, 우리가 조금씩 주님을 따르게 될 때 주님은 우리가 따라올 수 있는 만큼,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인내하시는 가운데, 자상하게 우리를 성숙의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환경은 다 주님의 사랑의 돌보심입니다. 

다같이 히브리서 12장을 보시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또한 자녀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권면의 말씀을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7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8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9 또한 우리에게 있던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로잡아도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우리가 더욱 복종하고 이로써 살아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10 진실로 그들은 며칠 동안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이제 어떤 징계도 그 당시에는 기쁘게 보이지 아니하고 슬프게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

참새를 돌보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더욱 귀하게 보시며 우리를 섬세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친 많은 어려움과 고난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로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환경은 우리의 성숙하지 못한 점들을 사랑으로 바로잡으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혼내고 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로서 주어지는 고난과 어려움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생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는 자녀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고 우리는 이러한 징계를 통하여 단련되어서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베드로전서 4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가 넘치는 기쁨으로 또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느니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

우리의 삶에 불같은 시련이 닥칠 때, 우리는 자주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어려운 환경은 우리를 단련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더욱 성숙한 자녀로 만들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운 환경이 올 때 우리는 육신을 따르지 말고 성령님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닥친 징계와 시련의 목적입니다. 주님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괴롭히시려는 악한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련 가운데 주님께 철저히 순종할 때에 우리 마음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영광의 기쁨이 넘쳐날 것입니다. 

한 장 넘겨서 베드로전서 5장 6절과 7절을 보시겠습니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하나님의 강한 손이 우리를 억누를 때, 불같은 시련이 닥치고 어려운 환경이 우리를 억누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저항하여 벗어 던지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며 주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이 올 때 하나님이 나를 정말 돌보시는가 염려하지 말고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한 손으로 누르고 계신 것은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만 정금 같은 우리의 믿음이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작품을 가장 주의하여 살피는 때는 도자기가 불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입니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불 속에서 꺼낼 때만이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가 있기 떄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고 있다면 그 시간은 내 인생의 그 어떤 시간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주시하여 바라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 주여, 그러나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오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환경을 보지말고 하나님의 강한 손을 보아야 합니다. 환경을 볼 때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 다섯 번째 참새마저 잊지 않으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숙이라는 그릇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기쁨의 한계가 넓어질 것입니다. 

캐나다에서 이번에 위암 수술을 받기 위해 오신 장 형제님께서는 위암 선고를 받고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님 그래도 내가 교회도 다니고 나름대로 주님 믿는다고 했는데 왜 복은 안주시고 이런 병을 주셨습니까, 하면서 원망이 들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나 같은 사람과는 멀리 계실 것 같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손을 나를 만지고 계시다고 느껴져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나님께서 몇 번에 걸쳐 신호를 주셨는데 내가 그 순간만 슬쩍슬쩍 넘어갔었다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셔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 인생에 개입해 주셨다고. 사랑의 하나님,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3.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
이제 마지막으로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한 기쁨, 두 번째는 고난으로 인한 기쁨, 이제 세 번째 형제 자매들로 인한 기쁨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베드로전서 5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위에 8절에 나오는 마귀를 대적하라.)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므로 우리 곁에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을 함께 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형제들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힘이 없고 위로가 필요할 때 눈을 돌려 옆의 형제 자매들을 보십시오. 우리 형제들이 나와 동일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주님을 사모하며 함께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해와 비방과 모든 시련 속에서 함께 주님을 소망하며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극진히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들 곧 나의 기쁨이요 왕관인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굳게 서라."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과 2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환희의 관이 무엇이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 앞에 있을 바로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 받은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형제의 고난이 오늘 나의 고난이 되고, 한 형제의 기쁨이 오늘 나의 기쁨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홀로 믿음의 길을 가야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할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라고 우리를 이렇게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어렵고 복잡할 때에도 나와 동일하게 복잡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 여전히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우리 형제 자매님들을 생각할 때 많은 위로가 되고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지체들과 한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주님께 순종하고자 이렇게 달려가는 형제 자매들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기초합니다. 완전 버려지고 계산되지 않은 것 같은 다섯 번째 참새조차도 잊지 않으시며 모두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귀히 여기시며 섬세한 손길로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며 기쁨의 감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많은 나를 여전히 잊지 아니하시고 돌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승리나, 우리의 성공에 있지 않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근거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은 고난에 기초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대우하시는 증거입니다. 불같은 시련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성숙시키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돌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강한 손 아래서 겸손히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가며 성숙할 때마다 우리의 그릇은 넓어지고 더욱 큰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우리는 환경을 보며 낙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실 작품을 기대하며 다만 순종하는 가운데 기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쁨은 우리 옆에 형제 자매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각자 모습도 다르고 생활도 다르지만 모두가 주님을 따르고자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주님께 전진하는 것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됩니다. 한 형제의 일어섬과 돌이킴이 우리에게는 큰 감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를 감상하며 기뻐하고 서로 격려하며 더욱 뜨겁게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귀한 형제 자매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죄와 허물로 영원히 멸망 가운데 슬퍼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귀한 기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으로 동행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설교 일시 : 2007.09.2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http://robinbox.net


[#03]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가장 먼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담도록 만들어진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데도 자꾸만 이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서 만족을 찾기 때문에 여전히 굶주려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로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으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가득 채워져야 함을 또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말씀의 제목을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다른 모든 이방 종교들도 사랑을 외치고, 교회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은 단지 간절하고 뜨겁고 담대한 사랑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써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사랑의 열매는 다만 겉에서 보기에 뜨겁고 간절한 사랑이 아닌 깊은 속에서부터 성령을 통하여 나온 사랑입니다. 


성령을 통한 사랑의 특징
오늘의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사랑의 특징은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온 사랑의 특징은 욕심이 섞여있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아무런 계산이나 조건이 없지만, 육신의 사랑에는 요구가 있고 원하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이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면서 뭔가를 계산하고 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육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한 육신의 사랑은 결코 사랑을 하는 우리나 사랑을 받는 대상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온 사랑은 결국 우리도 힘들게 하고 상대방도 힘들게 합니다. 육신의 사랑은 우리도 상처 입히고 상대방도 상처 입힙니다. 육신의 사랑 안에는 욕심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욕심이 얼마나 영적으로 선하게 포장되어 있느냐와 상관없이 욕심이 들어간 사랑은 성령의 사랑이 아닙니다. 육신의 사랑은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질투와 증오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랑이 성령 안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성령의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상대를 지치게 만들지만 성령의 사랑은 상대를 안식하게 합니다. 육신의 사랑은 감정적이며 한시적이지만 성령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은 성령 안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는 길은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길이 아니라, 할 수 없는 나를 십자가에 넘겨드리고 성령 안에서 걷는 삶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흘려내는 길입니다. 

이제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사랑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랑이며 율법으로 억지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율법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해야한다"는 너무나 옳고 합당한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을 알고 있지만 잘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이 법을 지키고자 할 때 우리는 육신을 따라 걷게 됩니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해야한다"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사랑은 자연스러우며 평강이 흐르지만 율법 아래에서 나오는 사랑은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나오는 사랑은 힘이 들지 않지만 율법 아래에서 나오는 사랑은 사랑을 하는 우리를 더욱 메마르게 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사랑은 높은 표준의 사랑을 이루고서도 여전히 겸손하지만 율법을 달성하여 사랑을 이룬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성령의 사랑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해도 은혜 가운데 감사하지만 율법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실패할 때 크게 낙담합니다. 성령의 사랑은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여전히 사랑하지만 율법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상처를 받고 미워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길은 "사랑을 해야한다"는 법을 지키는데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눈 딱 감고 못마땅한 사람을 한번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길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히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랑의 말씀들 가운데 3가지 부분을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주 예수님의 사랑이고, 세 번째는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먼저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혹시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으로 나온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창세기 22장입니다. 한번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백 세가 되어서 얻은 유일한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알고 계셨는데도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시고 잔인하시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과 헌신, 이러한 내려놓음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이삭을 사랑했지만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했다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입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은 잘 생각해보지 않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 헌물로 바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 사건을 신약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 "사랑"과 연결하여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번 신약에서 가장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입니다.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나타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을 번제 헌물로 드리는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 헌물로 드리는 실체를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삭을 바칠 때 아팠던 그 만큼 하나님의 마음도 아팠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을 향한 사랑의 마음만큼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삭이 말합니다.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 헌물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그리고 신약을 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동정한 만큼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아들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들을 위해 아들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크고 작은 조건들과 요구들로 나에게 짐을 지울 때에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이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나의 결심과 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흘러서 넘치는 그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사모합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
이제 두 번째로 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안위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인정이나 긍휼이 있거든"
빌립보서 2장 말씀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데 이것은 1장의 문맥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1장 뒷부분의 문맥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사랑과 겸손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나 성령의 열매들을 추구하거든" 

2절과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 너희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일치하여 내 기쁨을 성취하라.
3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족들과 또한 교회의 지체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한마음으로 일치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다툼이 일어나고 교만이 있을 때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되며 겸손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못마땅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과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을 고쳐주시라고 기도하면서 그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없고 겸손이 없는 우리들을 먼저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 사랑하고 겸손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문맥은 사랑과 겸손으로 복음의 삶을 사신 우리 주 예수님을 모범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들을 사랑하신 주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과 높은 지위를 다 버리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을 냄새나는 말구유에 태어나게 했으며 비천한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게 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머리를 둘 곳조차 없게 하였고 해가 지도록 설교하여 몹시 피곤한 때에도 병든 자들이 몰려오면 한명씩 일일이 안수하여 고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데려다가 왕을 삼고자 할 때 자리를 피하여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들에게로 향하는 것이었고, 주님의 사랑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겸손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던 무지한 군중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었으며,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랑과 겸손을 날마다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자. 헛된 영광, 육신의 욕심, 미래의 야망 다 버리고 나와 함께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자.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기 원합니다. 


바울의 사랑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사랑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고린도전서 8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고린도교회에서는 우상들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이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러 교회들에게 이러한 문제의 혼란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우리가 추석 때 친척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와 비슷합니다. 

4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 명확합니다. 우상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반 음식과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어도 더 낫지 아니하고 먹지 않아도 더 못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으나 안 먹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지식이 없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의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한 번 신전에 제물로 드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는 믿음이 좋은 형제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고기를 사다 먹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을 성결케 하여 주시고 이것을 먹고 제 몸이 더욱 건강해서 주님을 더 열심히 섬기게 하여주옵소서." 그러나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약한 형제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실족합니다. "어떻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그 고기는 분명 부정한 것이다. 저 형제는 죄를 짓고 있다." 또 어떤 약한 형제들은 "믿음 좋은 형제도 먹으니까 나도 먹어도 되겠지."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 사람을 따라 행동하므로 믿음이 망가집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올바른 지식을 가진 형제들은 우쭐해서 그렇지 못한 형제들을 무시한 채 고기를 먹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 자체는 하나님께 죄가 아니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다는 것에서는 죄가 되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12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사도 바울의 행동의 원칙은 어떤 것이 맞냐 틀리냐가 아니었고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 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형제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무엇이 옳습니까? 고기를 먹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 잘못되었습니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만약 반드시 고기를 먹으라는 순종의 문제라면 우리는 뒤로 물러설 수 없지만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권리와 자유의 문제라면 우리는 충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정당함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형제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형제 자매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우쭐하고 있다면 우리는 2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만을 가진 고린도 성도들은 우쭐대며 다른 형제들을 개의치 않았지만, 지식과 사랑을 함께 가진 사도 바울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랑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꾸려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육신 안에서 지식에 의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잘못된 것만 고치는 길을 가고 있지 않고 형제를 위해 기꺼이 나의 옳고 그름도 내려놓는 길을 가야 합니다. 


정리
우리는 오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를 번제 헌물로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울은 형제를 위해 자신의 정당함과 권리마저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옳고 그름으로 대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셨다면 우리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한없이 부어졌기에 오늘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 참아주셨고 지금도 오래 참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따라올 수 있는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한 가지씩 알려주시며 한 걸음씩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빚진 자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보십시오.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는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요구하고 판단하라고 함께 길을 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 부어진 그 넘치는 사랑으로 더 뜨겁게 사랑하라고 우리를 함께 가게 하셨습니다. 서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7.08.29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http://robinbox.net


[#02]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의 마음(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온 세상의 외침 - 사랑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탱크와 같은 성령 안에서 걸을 때만이 안전할 수 있고, 가이드와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만이 율법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로 언급되는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아홉 가지로 언급된 성령의 열매가 모두 중요하지만 특별히 첫 번째로 언급된 이 사랑이라는 주제는 너무나 크고 중요합니다. 이 사랑의 열매에 대하여는 앞으로 한두 번 정도 더 나눠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몰랐던 뭔가 심오하고 난해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마음에 "맞아 사랑해야지"하는 머리에서부터 비롯된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마음 깊은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주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불러일으켜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저는 캐나다에 있을 때 석기시대라는 삼겹살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웨이터 일을 해보니까 좋은 점이 가끔 까다로운 손님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정신적인 노동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일하는 내내 서있어야 하고 계속 음식을 가져다주어야 하기 때문에 다리는 좀 피곤하지만, 일하면서 때로는 설교구상도 할 수 있고, 때로는 장래에 대한 계획도 세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손님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들을 수도 있고 일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 식당에서는 한국 유행가를 계속 틀어놓았는데, 평소에 유행가를 듣지 않던 저에게는 또 다른 경험이 되었습니다. 유행가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담고 있는 노래인데, 그 노래의 가사들을 가만히 들어보니 대부분의 노래가 바로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신나고 경쾌한 노래들도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의 노래들이 "충족되지 않는 사랑",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현재의 상처받은 마음", "잃어버린 마음에서 비롯된 공허함과 허전함"을 주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노래들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손님들을 대해보니 그들 모두가 사랑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이 무엇을 주문하고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져줄 때 손님들이 아주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단골손님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해주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기억해주고 그에 맞춰서 서비스를 해주면 사람들이 아주 즐거워합니다. 그리도 팁도 더 많이 줍니다. 다른 자리에 음식을 전해주고 지나가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무엇이 필요하겠구나 생각을 하고 가져다주면 자신들이 미리 말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딱 가져다주는 서비스에 손님들이 감동을 합니다. 

이 세상은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들도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밴쿠버에서나 한국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들의 굶주린 마음을 만족케 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만족하지 못하고 상처만 주고받습니다. 


사랑 받기 위해 창조된 사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제 핸드폰 벨소리가 이 노래로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손수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으로 모든 것을 조성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산과 바다에서부터 시작하여 작은 한 송이 꽃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누리고 즐기며 안식할 수 있는 장엄하고도 섬세한 모든 환경을 설계하시고 제작하셨습니다. 
그 뒤에 사람을 만드시되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요구하고 짐을 지우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홀로 만족하시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주고 또 주기 위하여 사람이란 존재를 자신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질그릇과 같아서 상처받기 쉽고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곰이나 늑대 같은 단단한 가죽이나 따듯한 털도 없고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독수리와 같이 높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도 없고, 독수리의 눈처럼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거나 땅 위의 작은 토끼나 쥐가 움직이는 것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올빼미나 부엉이같이 밤에 볼 수 있는 눈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낙타와 같이 갈증을 견딜만한 물혹도 없고, 카멜레온과 같이 자기를 숨길 수 있는 보호색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모두 너무나 연약해서 쉽게 상처받고 깨지는 연약한 그릇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동물들에게 제각각 뛰어난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에게는 그러한 능력을 종합적으로 주시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이란 존재를 이토록 약하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던 것입니까? 

여러분 혹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출생의 문학가인데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던 중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인생에 대한 공허함을 느끼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톨스토이란 사람이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삶의 공허함을 느낀 한 문학가가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이윽고 명작 중의 명작이라 불리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무엇으로 산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저도 예전에 과연 뭐라고 말했는지 궁금해서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놀랍게도 이 작가는 여러 단편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돈이 없고 몸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존파였는지 막가파였는지 모르겠지만 극악무도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그 사람들이 기자들 앞에서 외친 말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사회가 우릴 버렸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았다는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잔인한 사람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과 같지 못하고 일그러진 부분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사랑으로 온전케 되지 못한 면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격에 문제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이 사랑 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고, 누군가 성격이 좋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잘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나마 사랑을 좀 더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자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열매 중 사랑이라는 주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열매라는 것은 생명의 활동을 통하여 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밖에서 모양을 만들어 달아놓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무리 화려하고 눈부시다 할지라도 그것은 생명의 활동을 통하여 나온 열매가 아니므로 모두 가짜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을지라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나온 열매여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이 사랑을 모조해서 달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열심을 따라 사랑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망치고 다른 형제를 망치며 영혼들을 망치게 될 뿐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까? 긍휼을 받아본 사람이 그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결심이 부족하고 성경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한없이 넘쳐흘러서 우리를 주체할 수 없도록 전율시키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도록 이끄시는 그 사랑의 권능을 아직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다른 이에게 물을 줄 수 없고, 굶주린 사람이 다른 이에게 음식을 양보할 수 없듯이 우리가 아직 사랑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가 나오려면 우리 안에 먼저 사랑이 가득가득 넘쳐흘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서 그러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전히 굶주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랑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찬송가 기억하십니까?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땐 나는 만족하였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린 가운데 서로에게 사랑을 요구하며 살아갑니다. 관심 받고 싶고, 칭찬 듣고 싶고, 대우 받고 싶고, 존중 받고 싶어서 자기를 으스대며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를 개발시키고 피곤하게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갑니다. 너무 과시하면 또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때문에 적당히 과시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자기를 낮추는 아주 치열하게 밀고 당기는 피곤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서로가 사랑에 굶주린 존재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만족시킬 수 없고 피곤하게만 만들뿐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들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랑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여전히 사람들 가운데서 찾는 한 우리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제가 오늘 함께 나누기 원하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찾고 원하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사랑에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계산하고 판단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 같으면서도 깊은 속에서는 나의 영광과 칭찬과 유익을 계산하지는 않았습니까? 나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부모님과 형제들과 친구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무관심하게 상처 주는 말을 쉽게 내뱉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힘들어하는지는 개의치 않으면서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만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매순간순간마다 마음으로, 눈빛으로, 입술로 짓는 모든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간증
저는 외아들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에도 스스로 외로움을 많이 탔습니다. 성격은 뭐든 내 생각에 옳은 대로 해야 하고 고집도 셌기 때문에 어릴 때는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주로 동네에서 내 말을 잘 따라주는 동생들과 어울리며 골목대장 역할을 했습니다. 해가 지면 다들 집에서 형제들과 노는데 저는 혼자서 집에 앉아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엄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친구를 사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반에서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습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들은 저마다 공부 잘하는 애들끼리 어울리고, 축구 좋아하는 애들끼리 어울리고, 만화 그리는 애들끼리 어울리고, 컴퓨터 게임하는 애들끼리 어울렸습니다. 저는 담배피고 싸움하는 애들을 제외하곤 가능한 모든 아이들과 다 어울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연필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빌려주고 어떤 분야든 두각을 나타내야만 아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고 도움 요청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했습니다. 물론 그 나이 때 그런 계산을 다 해서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볼 때 저의 마음에는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들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에서도 저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설교도 잘하고 뭔가 두각을 나타내야만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열심을 냈습니다. 물론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도 있었지만 육신의 여러 가지 계산이 섞여있었음을 주님이 아십니다. 칭찬을 듣고 격려를 들을 땐 무엇보다 기뻤고 마음에 만족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실한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맡기면 믿음직하게 해내는 형제, 똘똘하고 지혜로운 형제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제 작년 공익근무를 하면서 저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일이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시청에서는 공무원들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시간에는 집에 앉아서 쉴 수 있는 날이 없었습니다. 주일학교 책임자에, 청년부 회장에, 교회 홈페이지와 녹음 담당을 하고, 수요일엔 격주마다 설교를 하고, 토요일엔 교회 청소와 주보 만들기까지 하면서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에 비협조적인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은사가 많은 형제니 훌륭한 형제니 하는 칭찬도 더 이상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아니 주님 이거 너무한거 아닙니까?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됩니까? 사람들 칭찬 다 필요 없습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다들 일 시킬 때만 나 부르고 아주 짜증납니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뭘 힘들어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다가 일 시킬 때만 전화하고 내가 무슨 일하는 머신입니까? 내가 만약에 아무 능력도 없고 일도 못하면 아예 신경도 안 쓸거면서 일 시키려고 전화해서 괜히 미안하니까 안부 한마디 묻는거 아주 그냥 짜증납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온 그 길의 결과는 제가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시청에서 막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교회 안에서는 최소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조차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있는 힘껏 꽉꽉 누르고 지냈지만 시청에서는 함부로 행동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불합리하면 직원들하고도 싸우고 계장님한테도 대들었습니다. 마치 건들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상태였습니다. 마음속에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마음과 외로움이 죄책감과 뒤엉켜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인생이 허무해지고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을 내고 모든 희생을 감수했는데 내게 돌아오는 것은 더 많은 일들과 책임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습니다. 왕따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고 모든 의욕은 상실되었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슬픔과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나도 원래 이기적인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보여주겠다고, 다른 사람 도움도 필요 없고 다시는 나도 누구든 안도울거라고, 내가 얼마나 외로움을 잘 참고 혼자 잘 사는지 보여주겠다고 내가 모두를 왕따 시키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해주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셨습니다. 생활 중에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분의 손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인도하시며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그 전부터 진행되던 어떤 일들과 만나면서 퍼즐과 같이 맞춰지고 모든 어려움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해결되는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손길 앞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모든 인생과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들려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망나니같이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는 더욱 부드럽고 따듯한 손길로 저를 품어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마음을 강하게 먹고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데요? 왜 못살게 굴다가 잘해주는데요? 이제 와서 잘해주면 뭐 바뀌나요?" 따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상처받기도 싫고 실망하기도 싫어서 이를 악물고 굳게 닫아버린 저의 마음에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왜 이런 나를 사랑하냐고요! 나 좀 내버려 두세요!"하고 외치던 저의 마음은 이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못난 놈까지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성실하려고 사랑받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날 사랑하신다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나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까지도 그대로 사랑하신거라고. 하나님의 사랑엔 조건이나 제한이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시작하신 사랑이라고.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이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사랑받고 안식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다 나처럼 사랑받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군가의 모가 나고 잘못된 행동 뒤에는 사랑의 굶주림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결핍증에 걸려있습니다. 세상의 노래와 영화와 유행을 따라가며 허기진 마음을 채워보고자 치열하게 달려가지만 결국 얻는 것은 더 큰 수고와 공허함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많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높고 깊어서 우리가 평생을 마시고 누린다 할지라도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충분히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분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며 우리가 더욱 주님께 이끌리기를 원합니다. 아멘.

* 설교 일시 : 2007.07.3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5세

http://robinbox.net


[#01] 성령 안에서 걸으라(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16-26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간증으로 시간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짧게 하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 안에서 걸으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앞으로 저에게 수요설교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저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전체적인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16,17절 성령 안에서 걸으라
오늘 우리에게 미약하면서도 강렬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깊은 마음 속에서 가지는 간절한 원함은 바로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소원은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먼 훗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이러한 열망이 더 커지고 더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의 말씀은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하나님의 영은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가 되므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럽고 천연적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생명과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결코 조화되거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육신의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욕심"이 동기가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적인 말들로 포장될지라도 여전히 육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떠한 원함이나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심과 성령의 원함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원함은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나의 유익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하나님께 맡기지 아니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되 그분의 말씀이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육신의 욕심은 스스로 옳게 보이는 사망의 길로 급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원함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할 때 가고, 멈추라고 할 때 멈추는 것이지만, 육신의 욕심은 유익이 있을 때 움직이고 손해가 있을 때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1928년 일본이 중국 만주에 침략하여 만주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일지사변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태평양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일지사변이 일어난 뒤 3개월 간의 전쟁을 통해서 중국은 많은 숫자의 탱크를 잃어버렸고 더 이상 일본군의 탱크와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제 중국군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군 탱크가 지나갈 때 숨어있던 저격수가 총 한발을 쏩니다. "팅" 총알은 탱크의 표면을 맞으면서 소리만 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한 발을 쏩니다. "팅" 역시 소리만 날 뿐입니다. 또 다시 얼마가 지나고 한 발을 쏩니다. "팅" 그런데 갑자기 탱크가 멈추더니 드디어 탱크의 운전수가 도대체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것인지 보기 위하여 탱크의 뚜껑을 열고 머리를 내밀게 됩니다. 이때 탱크의 뚜껑을 겨누고 있던 저격수는 운전수의 머리를 향하여 총을 당깁니다. 탱크의 운전수는 총알이 날아오든 말든 신경쓸 것 없이 탱크 안에만 있으면 완전히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탱크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탱크의 뚜껑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순간 우리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게 됩니다. 죄와 세상과 사탄과 육신이 연합군이 되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누가 육신의 욕심을 거스르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결단력이 강하고 신념이 굳센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결단이 약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성령 안에서 걷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18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18절에 보시면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할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성령 안에서 걸으라." 18절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이 두 표현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종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사람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억지로 오 리를 동행해 주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형제를 위해 십 리까지도 기쁘게 동행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을 감추고 억누르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외적인 말과 행동만을 조심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마음 속의 동기와 의도까지도 주의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교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겸손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법을 따지며 자신의 유익과 손해를 계산하지만,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지치고 피곤하고 복잡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단순한 기쁨과 화평 속에 안식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고민하지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죄가 아닌 많은 좋고 선한 것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제가 한국에 오기 몇 주전에 캐나다 동부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는 "안개 속의 숙녀호"라고 해서 배를 타고 폭포 앞까지 가는 관광코스가 있었습니다. 매표소 앞에 봤더니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어서 "아이고 이거 한번 타는데 시간 다 가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여행 가이드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가이드는 그곳에 일하는 사람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더니 모든 줄을 앞질러서 옆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없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은 모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가이드의 인도를 받아서 온 저와 다른 몇 분은 일반적인 규칙 아래 있지 않고 특별한 규칙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빨리 "안개 속의 숙녀호"란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앞까지 가서 시원한 폭포의 물안개를 맞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인 길을 가는 와중에도 우리에게는 성령님이라는 가이드, 인도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할 때에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지만,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가게 되면 율법을 초월한 생명의 성령의 법, 자유의 법에 적용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걸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19-21절 육신의 욕심의 결과
19절부터 보시면 여러 가지 육신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은 성적인 죄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잠을 자야하는 수면욕은 죄가 되지 않지만 질병이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하루 종일 자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하는 식욕도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남용하여 탐식할 때 죄가 됩니다. 성적인 죄악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범위를 벗어나서 욕심을 부리게 될 때 죄가 됩니다. 간음과 음행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16절에서는 "이것은 음행하는 자나 혹은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먹을 것 한 조각을 위해 장자권을 판 에서는 모두 순간적인 육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더 좋고 중요한 것들을 버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특징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좋은 것만을 바라는 것이며, 성령의 특징은 더 좋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20절에서는 "우상 숭배와 마술"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죄악으로 분류됩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게 절에 가서 불상에게 직접 경배하지는 않지만 은밀한 우리 마음 속에 수많은 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육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육신의 욕심과 탐심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또한 우상 숭배는 영적인 간음으로서 우리에게 늘 긍휼과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우상 숭배할 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여전히 섬기고 거기에 더하여 많은 축복을 줄 것 같은 우상들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지만 거기에 더하여 많은 좋은 것들을 함께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육신의 욕심이며 우상 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의 많은 좋은 우상들을 버릴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자연스럽게 세상의 우상들이 무가치해지고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20절을 계속해서 보시면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그리고 21절에 "시기와 살인"의 죄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의 특징은 모두 혼자서는 지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과 연관해서 짓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욕심이 있기 때문에 증오가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경쟁하고 진노하고 다투고 폭동을 일으키며 파당을 짓고 시기하며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목록들 중에서 경쟁하고 다투고 시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자주 범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간음이나 살인이나 우상 숭배와 같이 큼직하고 무거운 죄악들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만 시기하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똑같이 육신의 욕심 가운데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 취함과 흥청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짓는 죄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배움이나 섬김을 가지지 않고 빈둥거리며 흥청대는 것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망치고 자멸시키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21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는 비결은 단 한가지인데 바로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육신의 욕심을 따라 다른 형제들을 시기하며 경쟁하는 가운데 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주님의 일들을 섬기는데 나의 육신의 욕심이 첨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신에게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는 것을 거두되 성령에게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두리라." 
오늘날 성령을 따르고 성령에게 심는 사람만이 성령으로부터 영존하는 생명을 거둘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영존하는 생명은 영원한 영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는가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았는지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많은 좋은 일들을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푯대는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사역이나 섬김도 우리의 욕심으로 가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섬기는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 해주고 나를 따르는 것을 바라는 것도 육신의 욕심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육신의 욕심으로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썩는 것이 되어 거두어질 것입니다. 


22,23절 성령의 열매
22절부터는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오늘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앞으로 설교를 하게 될 때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사랑은 육신의 모조품이 아닌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공한 그리스도인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 입니다. 지식도 있고 열심도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으로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자녀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다스림 받아야 하며 우리의 생활은 사람들 가운데 화평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신의 열매는 불화와 경쟁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화평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신 것같이 오래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참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참아주셨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문제가 많은 사람에 대하여 여전히 주님이 참으시는 것같이 나도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부드러움입니다. 우리에게 까다롭고 거친 모든 이들에 대하여도 우리는 어린양 같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볼 때 부드러움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는 사람은 거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다른 지체들에게 상처를 주며 걸림을 가지게 하는 것은 부드럽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선함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하여 악착같이 달려드는 태도는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상처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스스로 보상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나에게 선하게 대하신 것같이 우리들도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믿음이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데 이것 역시 육신의 열심이나 욕심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걸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는 온유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와서 나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것은 겸손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유 중 한가지는 우리가 교만하며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우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열매는 절제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특징이 욕심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입니다. 육신의 특징이 급하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열매는 절제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육신은 답답한 상황을 못 견뎌 일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의 열매는 말과 행동을 절제하며 주님께 순종하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울은 대언자 사무엘이 기다리라고 했으나 급하게 스스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급하게 왕이 되려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사울을 넘겨주신 기회가 왔을 때에도 절제하였습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고전 9:25). 

오늘 우리의 원함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의 왕국이 임할 때에 그 왕국을 상속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는 이러한 열매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정리
정리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할례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육신의 욕심은 교묘하게도 영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육신을 따르는 많은 믿는 이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율법을 강조하면서 할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육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성경을 인용할 수 있고 영적인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육신과 성령은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육신과 성령을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게는 영적인 모양이 있지만, 성령님께는 영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말과 행동으로 모양을 만들어 내지만,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실제적인 순종과 능력이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너무나 명백해서 우리가 금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는 모든 뿌리가 욕심에 기초하며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하며 모든 것을 보상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익과 손해를 크게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26절에 나온 것처럼 헛된 영광을 구하며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만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걸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으로 심게 될 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존하는 생명과 영광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탱크 밖으로 나와서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때문에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꾸 가이드를 따라가지 않고 혼자서 기웃기웃 거리며 다니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성령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살 때에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율법 아래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원합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