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8. 갈보리크리스천아카데미 화요일 채플설교 /로빈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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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선택하라(마 22:37-40)

이승선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마태복음 22장입니다마태복음 22장 37-4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39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이니라.

40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하시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큰 명령

여러분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어떤 말씀이 될까요우리는 바로 37절에서 그러한 문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는 이 명령을 가리켜서 첫째가는 큰 명령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또 두 번째 큰 명령으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40절 말씀을 보면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즉 모든 구약성경은 바로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이웃을 사랑하는 이 사랑의 명령이 모든 명령의 요약이며 대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해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또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에서는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단순히 착하게 살라든지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 같은 것은 볼 수 있지만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신을 찾기 힘듭니다저는 개인적으로 여태까지 그런 종교를 본 적이 없지만제가 모든 종교를 다 알아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아보기 힘들다고 표현한 것인데요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말한다면 사랑을 요구하는 다른 종교의 신은 없습니다.

 

그렇다면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계실까요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우리는 다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자신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심판과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나 대신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셨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생명을 다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부인 외에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그러나 그 남자가 자기의 아내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왜냐하면 그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선택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여러분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먼저 사랑은 관심입니다그리고 사랑은 희생입니다.만약 어떤 선생님이 학생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학생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학생에게 어떠한 희생도 하지 않는다면그 선생님은 학생을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지실제로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여러분이 친구에 대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관심도 없고희생도 없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하나님께 관심도 없고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거나 내려놓거나 희생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사랑은 선택이다.”라고 말씀드리기 원합니다아담은 하나님이 아닌 이브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였고그 결과는 자신과 이브를 모두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죄악이었습니다사울왕은 하나님이 아닌 재물과 자신의 명예를 사랑함으로 망하게 되었고대언자 엘리사의 종이었던 게하시는 돈을 사랑함으로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삼손은 블레셋 여자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잃어버렸고솔로몬은 많은 이방 아내들을 사랑함으로 우상숭배자가 되었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6장을 보시겠습니다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라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나 맘몬즉 돈 중에서 하나만 사랑하거나 하나만 섬길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오늘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오늘 여러분이 사랑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하나님입니까아니면 맘몬입니까?장차 여러분은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다 같이 디모데후서 3장 4절도 보시겠습니다.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성경은 하나님과 쾌락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둘 중 하나를 더 사랑하고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여러분은 하나님과 쾌락즉 즐거움이나 재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이번에는 요한일서 2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여기서 세상이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여러분에게 있어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9절도 보시겠습니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는 빛과 어둠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둠을 사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람들이 죄악 가운데 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그들이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은 빛과 어둠 중에서 무엇을 사랑하시겠습니까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요한복음 12장 43절을 보시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더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칭찬과 사람들의 칭찬 중에서 무엇을 더 사랑하십니까둘 중 한 가지 칭찬만 받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여러분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은 기분이 좋고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는 있지만그것이 결코 우리의 목표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우리의 동기와 목표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서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라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겠습니다요한복음 14장 23-24절을 보시겠습니다.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가 그와 함께 있게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들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것이 아니요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누군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그러나 누군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십니까여러분성경에 대한 태도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태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성경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누군가가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예수님을 사랑한다면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일 것입니다그렇다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요한복음 15장 12절입니다.

내 명령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여러분은 이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이 말씀의 내용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여러분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우리가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였을 때,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는 우리가 착하고 선하고 의롭고 잘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은 아무 한계가 없었습니다어느 정도까지는 용서해 주고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해 주고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아무 한계가 없이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명령을 주고 계십니다.

내 명령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돈보다사람들의 칭찬보다쾌락들보다세상보다죄악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그렇지 못하다면 오늘 한 가지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없다면 오늘 한 가지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한 가지를 과감히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지금 우리가 편 요한복음 15장 12절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사랑은 선택입니다오늘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설교 일시 : 2010.08.29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32-33)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6장입니다저는 오늘 함께 마태복음 6장의 전체적인 말씀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우선은 마태복음 6장 32절과 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32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나니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3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 저는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함께 찾아보고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오늘 말씀의 제목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1-4구제 은밀히 보시고 보상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전에 어떤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한 자매님이 어떻게 코란과 성경을 비교하며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또 많은 시련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어떻게 믿음의 생활을 하였는지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내가 감히 절대자인 신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표현이었습니다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절대자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사실인지 모릅니다홍길동은 아버지도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고 하는데우리 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이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절대자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얼마나 놀랍고 복된 사실인지 모릅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 1절부터 4절까지 한번 보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구제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보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구제할 때에 위선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처럼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오직 너는 구제할 때에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네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의 구제하는 일이 은밀한 중에 있게 하라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친히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우리의 모든 구제와 섬김을 보고 계시며나중에 드러나게 갚으시고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거나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또한 우리는 어떠한 보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늘 보고 계시며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또 우리의 모든 작은 섬김에도 보상을 주신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예수님 당시에도 형편이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는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크게 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키고 그 뒤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를 하였습니다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박수를 치며 구제를 한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주었을 것입니다오늘날에도 뉴스에서 불우이웃돕기나 자연재해성금모금을 하면 카메라에 더 오래그리고 잘 잡히려고 천천히 걸어 나와서봉투도 천천히 집어넣고사회자와 악수도 하고카메라를 향해서 얼굴도 돌려주는 그런 많은 부자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씀하시고또 이미 보상을 받은 것이므로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의를 주고 계십니다물론 우리가 누군가를 돕고 섬기고자 할 때 무슨 007 첩보 작전을 하듯이 정말 아무도 모르게완전히 비밀로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가까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수도 있고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1절에 나온 것처럼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도를 가지고사람들 앞에서 하지 아니하도록 주의해야 합니다왜냐하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중에 보시고 드러나게 갚아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받고 싶고인정을 받고 싶고영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너무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합니다전에 우리 허재준 어린이가 이런 적이 있습니다오전예배를 마치고 나서였던 것 같은데요재준이가 와서 엄마를 붙잡고 엄마엄마 저 이거 먹을거 있었는데 동생한테 양보했어요.잘했죠?”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러자 최경아 자매님께서 그래 잘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그러자 재준이는 아싸칭찬받았다~!” 이렇게 환호를 하였습니다이렇게 사람은 어릴 적부터 누구나 칭찬받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그래서 우리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많은 순간 칭찬을 끊임없이 해주어야 합니다잘한 것이 있을 때그 즉시노력과 과정을 중심으로구체적으로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가? - 바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시고인정해주시고칭찬해주시고격려해주시고보상해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배워야 하는데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부모님과 선생님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부모님과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서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우리의 삶과 성품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에게도 성장해 가는 가운데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참되게 영원한 칭찬과 인정과 영광으로 갚아주실 분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점차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성숙함을 길러주어야 합니다우리 어른들 또한 우리의 참된 보상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우리는 이 땅에서의 싸구려 칭찬과 인정과 영광을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겠습니다오직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칭찬과 보상만이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기 원합니다.

 

 

5-8기도 들으시고필요를 아시며거룩하시고용서하시는 아버지

이제 5절부터 8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또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들을 아시며우리의 은밀한 기도에 드러나게 갚아주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꼭 들으시거나응답하셔야 할 아무 이유가 없으십니다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그 자체가 은혜이며 긍휼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매우 영적인 일이며또 우리 주님께 너무나 합당하고 선하고 귀한 일이지만우리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도로나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려는 의도로 하게 될 때에그것은 전혀 주님께 합당하지도 않고선하지도 않고귀하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리게 됩니다기도를 하느냐 안하느냐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왜 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사람들 앞에서 유창하고 뜨겁게 기도를 잘하고 나서 교만해지는 것보다더듬거리고 버벅대면서 기도를 잘 못하고 나서 겸손해 지고, “아 진짜 기도생활을 좀 해야겠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차라리 더 낫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십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왜냐하면 살아계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되고 의미 없는 말들을 주문처럼 외우거나또한 다른 사람이 써놓은 기도문을 읽는 것처럼 반복해서 되풀이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유창하고 멋진 말의 기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우리의 진실되고 온 마음이 쏟아지는 그러한 참된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얼마나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정성을 보이는가를 가지고 판단하시거나얼마나 큰 목소리로 기도하는가와 같이 겉모습을 보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나와서 온 마음을 터놓고 모든 것을 맡기고 내려놓으면서 아버지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9절부터 나오는 주기도문” 역시 이 기도문을 그대로 다 같이 모여서 외우고 반복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골방으로 들어가서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한 예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고 영광을 얻도록하나님의 왕국과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또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과 생활의 부분들을 늘 공급하여 주시도록또 날마다 넘어지고 실패하는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도록또 우리를 인도하여 주셔서 악에서 구해 주시도록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예를 보여주신 것입니다그리고 우리가 늘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먼저 보여주신 것같이우리도 다른 이들을 향해 따듯한 마음과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16-18금식 은밀히 보시고 갚아주시는 아버지

이제 16절에서 18절까지는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데역시 앞에서 살펴본 말씀들과 같이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말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보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금식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있다고킹제임스성경과 개역성경을 비교해보면 킹제임스성경에 금식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많이 나오고개역성경에는 금식이라는 말이 많이 빠져있는데정작 이 흠정역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금식을 잘 안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주님을 섬기는 많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금식하며 기도한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금식이란 내가 섬기고 나를 통제하는 하나님이 나의 배와 음식물이 아니라오직 하늘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고또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평생 금식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가연지 자매와의 결혼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금식해본 적이 한번 있습니다저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응답을 받았는데 자매가 자꾸 아니라고 거절을 해서제가 정말 교만했었고헌신되지 못했고잘못했다고 돌이키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금식해본 적이 있습니다밥을 아예 안 먹은 것은 아니고요신학교 다니는 얼마 기간 동안 점심과 저녁또는 저녁만 부분적으로 금식하면서 간절히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어쨌든 주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사랑스럽게 보셔서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고이렇게 결혼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정말 선하십니다아멘.

 

 

19-21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이제 19절부터 21절까지 보시겠습니다.

19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거기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며 거기서는 도둑이 뚫고 훔치느니라.

20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거기서는 좀이 먹지도 녹이 슬지도 않으며 거기서는 도둑이 뚫지도 훔치지도 못하느니라.

21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거기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그리스도인의 집에 도둑이 들 수가 있을까요없을까요좀이 먹고 녹이 스는 것처럼 당연히 도둑도 들 수가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오직 우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절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에게 보상할 것을 말씀하신 뒤에이렇게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보물이 하늘에 있는가 없는가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는가 없느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기를 원합니다.

 

 

22-24한 주인만 섬길 수 있다 단일한 눈

이제 22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22 몸의 등불은 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하되

23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라그런즉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둡게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라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하늘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우리의 눈이 단일하게 하늘의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섬길 때에 우리의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하여밝고 따듯하고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의 눈이 악하면 우리의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여어둡고 차갑고 불행할 것입니다우리의 눈이 하나님 조금 맘몬 조금 바라보게 될 때에우리의 사랑이 하나님 조금 맘몬 조금우리의 섬김이 하나님 조금 맘몬 조금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은 어둠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면 힘들다고 말씀한 것이 아니고그럴 수가 없다고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사람들로부터도 조금 영광을 받고하늘의 아버지로부터도 조금 보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많은 순간들 속에서 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그때마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닌 맘몬을 과감하게 거절하고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며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5-30염려 우리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

이제, 25절부터 2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너희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날짐승들을 보라그것들은 씨 뿌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시나니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에 일 큐빗을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씨 뿌리지도 아니하고거두지도 아니하며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는 공중의 날짐승도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러한 날짐승들보다 우리를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늘 많은 일에 염려하고 특히 먹고 살 문제로 염려하지만 우리의 염려는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이 세상에 아무도 염려함으로 키를 크게 할 수가 없습니다저도 연지 자매가 높은 구두를 신고 옆에 서게 되면 저보다 커지는데사실은 맨발로 서게 되면 제가 조금 더 크지만아무튼 키가 좀 더 컸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그러나 제가 소망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저는 키를 5cm도 키울 수가 없습니다한 5cm만 더 컸으면 좋겠는데할 수가 없습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뭘 먹고 살까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가 없습니다그러므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책임지실테니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미래에 대해서 아예 계획하지 말라거나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 메뉴를 고르지도 말라거나또는 씨 뿌리거나 거두는 일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해 주신 일을 신실하게 충성을 다해 수행하고나에게 주신 음식을 감사함으로 골고루 먹고또 생활하는 가운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우리를 돌보시는 하늘의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늘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제 28절부터 30절까지 보시겠습니다.

28 또 너희가 어찌 옷을 위해 염려하느냐들의 백합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그것들은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자기의 모든 영광 중에 있던 솔로몬도 이것들 중 하나와 같이 차려입지 못하였느니라.

30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아멘오늘 이 자리에도 벌거벗은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잘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던 하나님께서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입히신 하나님께서오늘 우리도 너무나 잘 입혀주고 계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늘 우리를 돌보시고 계십니다.

 

 

31-34가장 좋은 것과 더해지는 것

이제 31절부터 34절까지 저와 여러분이 번갈아서 읽어보겠습니다제가 먼저 31절을 읽겠습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우리가 무엇을 먹을까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우리가 무엇을 입을까하지 말라.

32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나니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33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그 날의 악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그 자체가 하늘 아버지의 긍휼이요사랑이며돌보심인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러한 구제와 섬김의 일들을 다 아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보시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를 모두 아십니다.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금식하며 신음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모두 아십니다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외면하고오해할지라도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시편 103편 13절과 14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같이 주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도다.

 

여러분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며우리의 모든 은밀한 구제와 섬김과 기도와 금식을 다 아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우리의 모든 감추어진 섬김을 하나도 빠짐없이 드러나게 보상하시고 갚아주실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정말 이러한 하늘 아버지를 믿고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리고 여기 33절에 말씀하신 것처럼오직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오직 첫째로 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10절에서도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하늘의 아버지께서 정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영원하신 아버지의 왕국입니다우리가 왜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의를 구해야 합니까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내 집 장만을 위해 노력하지만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많은 저택들이 있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위해 노력하지만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왕국에는 길 자체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고민하지만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왕국에는 달마다 새로운 과일이 열리고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흐르고 있습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웰빙이다유기농이다 고민하고 노력하지만우리 하늘 아버지가 계신 곳에는 슬픔도 아픔도 질병도 늙음도 없을 것입니다이제 아버지의 왕국에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날이 속히 임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생도 잠시이고이 땅에서의 영광도 잠시입니다이 땅에서의 재산은 좀이 먹고녹이 슬며 도둑도 들 수 있지만하늘의 보물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우리의 인생이 끝마쳐지는 날 우리는 영원한 아버지의 집에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그 때에 우리 인생의 짧은 순간들이 꿈처럼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고민하고염려하고걱정하고,속상하고잠도 설치고 했던 이 땅의 모든 문제들어려움들이 한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그 때 우리는 아마도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다시 살 수 있다면 이렇게 살텐데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을텐데...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정말 주고자 하시는 것우리가 첫째로 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또 우리 자신이 정말 얻고자 하는 것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정말 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이 땅에서 썩어지고 없어져버릴 잠깐의 것입니까아니면 하늘의 영원한 것입니까?

우리가 오직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의 그분의 의를 구하기 원합니다아버지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설교 일시 : 2010.04.25 / 설교 장소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28세

 

우리는 소금이다(마 5:13)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입니다마태복음 5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그 뒤에는 그것이 아무 쓸모없으므로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밑에 밟힐 뿐이니라.

 

오늘 저는 우리는 소금이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서론

오늘 저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너무나 친근하고 자주 이용되는 소금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나눠보고자 합니다또한 우리 자신이 소금이라는 사실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어떤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여기서 땅의 소금이 유대인을 가리키며지금 유대인이 제 맛을 잃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밟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설명하기도 하고그래서 그리스도인을 소금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교리적으로 과연 그것이 그러한가 성경을 깊이 공부해볼 필요가 있겠지만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이 말씀을 받아서 우리 자신을 소금으로 적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여기서 제자들을 향하여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까제자입니다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의 조건을 두 가지 뽑아보자면첫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아니하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또 두 번째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시니라.

제가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저같이 어리고 문제도 많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한 청년이 앞에 나와서 감히 설교를 한다고 했을 때이렇게 앉아서 들어주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으시는 우리 형제 자매님들을 볼 때저는 우리 형제 자매님들이 정말 주님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또 저를 너무나 사랑해주셔서 이렇게 들어주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땅의 소금이 되도록 노력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그냥 단순하게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정체는 무엇입니까우리는 땅의 소금입니다한번 저를 따라서 오늘의 제목을 말해보실까요? “우리는 소금이다.” 우리는 소금입니다우리 자신이 소금이 되려고 선택하거나 결단하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이 우리는 이미 땅의 소금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나눠보겠습니다.

 

 

생명에 반드시 필요한 소금

잘 아시는 레위기 17장 14절 말씀에서는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니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그래서 우리의 몸에 있는 피는 우리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피는 0.9%가 염분으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1%도 아니고 0.9%의 아주 적은 소금 성분인데이 소금 성분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거나 땀을 흘리면 짠 맛이 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이 피 속의 소금 성분이 사람의 몸속에서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소화를 돕고 위장 기능을 강화시키고심장과 신장 기능까지도 강화시킨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을 살지 않습니까그 어머니 뱃속에 있는 양수가 바닷물과 아주 흡사하다고 합니다말하자면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10개월 동안 소금물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란 사람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우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 뱃속에 소금이 있었고또한 우리의 피 속에도 지금 소금이 흐르고 있습니다소금은 우리의 생명과도 같습니다소금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를 가리켜 소금이라 하셨습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우리는 이 땅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고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우리 자신의 잘나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땅의 소금입니다우리는 모두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과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은 이 땅에서 소금으로써의 삶입니다소금은 사람이 탄생할 때 어머니 양수 속에서그리고 생명을 유지할 때 사람의 피 속에서 생명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사람의 피 속의 소금 성분은 0.9%의 아주 적은 양이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은 세상에서 볼 때내가 속한 어떤 직장이나단체에서 볼 때 1%도 안 되는 0.9% 같은 아주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역할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유지시키는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에 넣으신 목적이 있습니다우리는 그 자리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우리는 소금입니다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생명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생명이 없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통로가 될 수도 있고또한 이미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형제 자매들 속에서 더욱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우리의 역할은 1%도 안 되는 작은 것 같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그러므로 나의 역할이 작다고 위축되거나 낙심하지 말고, “나 하나쯤 뭐 없어도 그만 아니겠어?”라고 생각하지 말고우리의 위치에서 나에게 주어진 작은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패를 막는데 반드시 필요한 소금

또한 소금은 부패를 막아줍니다여러분 사과 좋아하시죠저는 초록색 사과를 정말 좋아하는데요우리 귀한 자매님께서 종종 지체들을 위해 맛있는 사과를 깎아주시고 어떤 예배나 모임순서가 끝난 뒤에 꺼내주시는데요보통 사과는 깎아놓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누렇게 변합니다그런데 우리 자매님들께서 주신 그 사과를 보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누렇게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조금 더 오래 버팁니다자매님들 그 비법이 뭐죠바로 소금물에 담갔다가 꺼내는 것입니다특별히 전기나 냉장고가 없었던 옛날에는 소금이 음식물의 부패를 막기 위해 필수적이었다고 합니다또한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바로 바닷물 속에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세상의 온갖 더러운 물들이 다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로 소금 때문에 바다는 썩지 않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레위기 2장에서는 음식헌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요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음식헌물에 대하여 명령을 주시면서 반드시 소금을 빠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레위기 2장 13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첫 열매의 봉헌물에 소금을 칠 것이니라너는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 네 음식 헌물에서 빠지지 않게 할지니 너는 네 모든 헌물과 함께 소금을 드릴지니라.” 또한 이 소금과 함께 드린 음식 헌물에 대하여 레위기 2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음식 헌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 될지니 그것은 불로 예비하는 의 헌물 중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헌물 중에 가장 거룩한 것은 바로 소금과 함께 드리는 음식 헌물입니다여기서 지극히라는 표현은 영어로 “most”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최상급으로 가장 높은 것을 의미합니다. “more"하면 비교급으로 조금 더 높은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최상급이 사용되고 있습니다소금의 하얀색은 또한 정결함을 의미하고부패를 방지하는 성분 또한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땅의 소금입니다우리는 이 땅에서 악을 억제하고 순수함과 거룩함을 유지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장차 휴거가 일어나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게 될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정말 말 그대로 대환란이 시작될 것입니다우리 자신이 대단하고 거룩해서가 아니라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삶이 주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조금 더 깨끗해지고어제보다 조금 더 정결해지고조금 더 순수해지고주님을 닮은 거룩함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맛을 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소금

또한 소금은 맛을 내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저는 어쩌다 한 번씩 김을 그냥 먹는데요참기름 맛도 나지만 주로 소금 맛으로 먹습니다아마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도 그런 것 같은데점심시간에 보면 밥이랑 김만 가져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그러다가 저한테 걸리면 이제 억지로 다른 반찬도 조금씩 가져가기도 하는데요아무튼 소금은 맛있습니다.

우리 이재용 집사님께서 호두과자를 아주 맛있게 잘 만드시는데제가 한번 여쭤봤더니 호두과자에도 소금이 반드시 들어간다고 합니다또한 어떤 빵이든지 밀가루 반죽에 소금이 반드시 들어간다고 합니다.

욥기에도 보시면 소금이야기가 나옵니다바로 욥기 6장 6절인데요, “맛없는 것을 소금도 없이 먹을 수 있겠느냐달걀의 흰자위가 무슨 맛이 있겠느냐?라고 말합니다욥이 계란 후라이를 좋아했는지삶은 계란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계란 흰자를 먹을 때 소금을 찍어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금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맛있습니다사람들이 우리를 대할 때 맛을 느낍니다그 맛이 무슨 맛일까요?

마가복음 9장 50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짠맛을 잃으면 너희가 무엇으로 그것의 맛을 내리요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소금의 맛은 말하자면화목의 맛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4장 말씀은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골로새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가 있게 하라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바를 알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소금의 맛은 무엇일까요말하자면 은혜의 맛입니다.

보통 세상에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협하거나 경고할 때 이런 말을 씁니다. “너 맛 좀 볼래?” 또는 니가 인생의 쓴 맛을 좀 봐야 알겠지?” 이런 표현들을 사용합니다이런 맛들은 다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쓴 맛들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부인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우리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동의 맛은 바로 화목의 맛그리고 은혜의 맛인 것입니다사람들이 우리를 대할 때 화목을 느낄 수 있고 은혜를 느낄 수 있을 때우리는 맛을 잃지 않은 소금으로써의 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방에서는 사해 부근의 암염이라고 하는 원석들로부터 소금을 얻었다고 합니다이 암염을 물에 넣었다 빼는 것을 반복하면서 원석에 들어있는 소금을 다 녹여서 빼낸다고 합니다나중에는 이 암염 원석에서 소금기가 다 빠져나가고 흙이나 석회석 성분만 남는다고 합니다이것이 바로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또한 이스라엘 지방은 날씨가 무덥기 때문에 가축들이 일사병에 걸려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그래서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 소금을 먹이는데가축들이 풀을 뜯는 곳에 이 암염 덩어리들을 뿌려놓는다고 합니다그러면 가축들이 암염을 핥아먹으면서 소금을 섭취하는데이렇게 소금기가 다 빠져나간 원석들은 구멍이 뻥뻥 뚫린 돌뼈다귀 같은 모양이 된다고 합니다그래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과 짐승들의 발에 밟히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소금으로써 가져야 하는 맛이 무엇일까요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져야할 맛으로 화목의 맛과 은혜의 맛을 말씀하십니다사람들이 우리를 대할 때 화목을 느끼고 은혜를 느낀다면 우리는 소금의 맛을 충실하게 나타낸 것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이 우리를 대할 때 경직되거나 부담을 느낀다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 자신의 쓴 맛을 나타낸 것입니다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서 오직 우리의 맛이 아닌 주님의 선하심을 사람들이 맛보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소금은 갈증을 일으킨다

또한 소금의 한 가지 특징은 갈증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음식을 짜게 먹으면 계속 물이 먹힙니다제가 얼마 전에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를 보게 되었는데요. “세상의 이런 일이의 기자가 우리 반에 이상한 아이가 있어요.”라는 제보를 받고 한 초등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대여섯 명의 어린 아이들이 기자를 반갑게 맞았는데기자가 도대체 어떤 아이가 어떻게 이상하니?”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다 같이 떡볶이를 사달라고 하였습니다그래서 이제 같이 가서 떡볶이와 오뎅을 맛있는 먹는 중에 다시 기자가 물었습니다. “혹시 이 중에 그 이상한 친구가 있느냐” 물었더니 아이들이 한 친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얘 좀 보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그 아이는 삶은 계란을 까서 먹고 있었는데계란을 까서 소금이 담긴 접시에 굴려가면서마치 인절미에 콩가루 바르듯이 소금을 발라서 먹는 것이었습니다.그 아이는 짠맛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간장도 그냥 마시고새우젓도 큰 뭉치로 집어서 꿀꺽꿀꺽 삼켰습니다.그러면 소금의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도대체 왜 계란에 소금을 그렇게 발라서 먹느냐는 질문에 그 아이는 사람들이 놀란 모습으로 쳐다보는게 재미있고또 바삭바삭 소금이 씹히는 질감이 좋아서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나중에 그 아이의 집에 가서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을 인상 깊게 들었는데요바로 그 아이가 하루에 물을 1.5리터 병으로 두세 병씩을 마신다 것이었습니다비록 혀로는 짠 맛을 느끼지 못했지만 몸은 갈증을 일으켰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소금은 갈증을 일으킵니다우리는 소금입니다우리가 주님과 밀착하여 주님을 따르는 성령 충만 가운데 있다면사람들은 우리를 대할 때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느꼈던 갈증과 같이,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부담이나 짐을 주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보통 아이들이 어떤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할 때어른들은 그 아이 앞에서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줍니다그러면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 음식을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한번 먹어보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앞에 나와서 큰 소리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라고 외칠 때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할 것입니다. “맞아하나님을 사랑해야지다른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앞에 나와서 아주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저는 결코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 너무나 더럽고 추하고 이기적인 사람인데이러한 저를 하나님이 사랑해 주셨습니다저도 너무나 부끄럽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주님 외에 정말 모든 것이 아무 가치가 없음을 주님이 알려주시기 원합니라이 어리석은 저를 일깨워주시고이 무능한 저를 붙잡아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긍휼히 여겨주시기 원합니다.”라고 마음으로 고백할 때우리는 마음에서부터 나도 저 형제처럼저 자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소금은 갈증을 일으킵니다우리는 소금입니다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우리가 맛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우리 자신이 먼저 늘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고주님과 가까이 동행하게 될 때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닌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사람들이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 때에 주님을 향한 사모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소금은 녹아 없어진다.

또한 소금의 한 가지 특징은 녹아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소금이 음식물에 들어가게 될 때 소금은 자기 형체를 잃어버리고 녹아서 음식물 속에 완전히 스며들게 됩니다소금의 형체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소금의 맛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영혼들을 섬길 때또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때에 우리는 소금과 같이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나의 판단과 나의 스타일과 나의 선호도와 나의 모든 것이 다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우리가 없어지고 완전히 음식물에 스며들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화목의 맛은혜의 맛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한 알을 밀알이 되셔서 죽으셨을 때에 많은 밀알을 열매로 거두게 된 것같이우리 자신의 육신도 완전히 십자가에 넘겨질 때에 비로소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영혼들과 형제 자매들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너희는 (복수땅의 소금이로되

마지막으로 한 부분만 더 보시겠습니다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예수님께서는 여기 모인 제자들 모두를 묶어서 복수로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우리 각자가 소금이 아니라 우리가 모여서 소금인 것입니다내가 소금이 아니고 우리가 소금입니다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 연약하고 부족합니다우리 각자는 너무나 자주 넘어지고 실패합니다그러나 우리가 교회 함께 모일 때에 우리는 힘차고 온전합니다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고 힘을 얻습니다우리는 소금입니다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서로 뜨겁게 사랑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소금의 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소금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몸속에 존재하는 0.9%의 아주 미약한 소금 성분과도 같습니다비록 적은 양의 소금이라도 할지라도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마찬가지로 우리의 역할이 작고 보잘 것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필요한 곳에 두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하고 나태하게 있지 말고 힘차게 일어나서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작은 일에 신실해야 합니다.

 

또한 소금은 주님의 거룩함을 보여줍니다우리가 주님과 겸손히 동행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정결하고 거룩해 질 것입니다.

 

또한 소금은 화목의 맛과 은혜의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영혼들과 형제 자매들 가운데 화목하고 은혜가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소금은 갈증을 일으킵니다우리는 이러한 소금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가지도록 자극하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라가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소금은 녹아 없어집니다자기의 형체를 다 버리고 오직 음식물 속에 스며들어 하나가 됩니다이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선하심만을 드러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형제들과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예수님께서는 복수로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 각자가 소금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모여서 소금입니다주님이 주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우리가 더욱 알게 되기 원합니다주님께서 주신 형제 자매님들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기 원합니다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축복해주시기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설교 일시 : 2010.04.09 / 설교 장소 서울침례신학교 설교학 10분 설교/로빈28세

 

내게 배우라(마 11:28-30)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장입니다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너희는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30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하시니라.

 

오늘 저는 내게 배우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서론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위하여 이렇게 밤늦은 시간까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주님의 참된 일꾼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하는 것이 무엇일까요우리는 어떤 사역자의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준비하고 있습니까?

누가 어떤 질문을 해도 성경을 그 자리에서 척척 펴서 보여주고 해설해 줄 수 있는 뛰어난 말씀의 사역자가 될 수도 있고또 놀라운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눈물과 감동으로 주님 앞에 이끌어 오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또한 형제자매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동역하는 놀라운 기도의 사역자가 될 수도 있고많은 귀한 찬송을 통해 지체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찬양의 사역자가 될 수도 있으며주옥같은 글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바른 진리를 보급하는 문서 사역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모습의 사역자들을 묶어서 한가지로 길을 정해보자면예수님을 닮은예수님 같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어떠한 인상또는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사람들이 나를 볼 때, “저 형제는 참 똑똑하다,저 형제는 참 말을 잘한다.”라고 느끼는 특징들이 있습니다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미지는 무엇일까요예수님을 믿는 않는 영혼들이나형제자매들이 우리를 볼 때에, “내가 예수님이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저 사람은 진짜 예수님 같다저 형제는 저런 면은 주님을 닮았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우리에게 그것보다 큰 기쁨과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의 소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봐주는 것이 소원이 아니죠정말 우리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또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바로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우리의 삶에 나만의 독특하고 더러운 냄새가 아니라오직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뿜어져 나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가 어떠한 사역자가 되기에 앞서서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생을 드려 가야할 길이 아니겠습니까?

 

 

본론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예수님께서는 나는 전능하고 권위가 있으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나는 지혜롭고 명철하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바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오늘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원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은 바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오늘의 본문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너희는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여러분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저 같은 경우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을 때곧 마음이 무겁고 피곤할 때 짜증을 잘 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피곤하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즐거워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평소에 아무리 예의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며 지친 경우에는 신경이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전에 훈련소에서 야간행군을 했었는데요처음에 출발할 때는 다들 서로를 독려하고 응원을 외치는 분위기였습니다그 중에서 앞부분에 서서 걷는 키 작은 친구가 있었는데, 10분마다 힘내자” 이렇게 외치면 뒤에서 따라가는 동료들이 힘내자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그런데 1시간 정도 걷고 나서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그 작은 친구가 또 다시 힘내자라고 외치는데맞장구치는 소리가 점점 없어지더니 나중에는 그 친구에게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입 다물고 그냥 걷자짜증난다.” 함께 파이팅을 외치던 동료들이 무슨 이유로 짜증을 냈을까요,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하고 지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그러한 사람들은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며신경이 날카롭고 상처 주는 말들을 쉽게 내뱉는 거칠고 부담스러운 사람들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다 불러주셔서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여 주셨기에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어리석게 행하는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감히 안식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긴장하지 않습니다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주님을 대적하였을 때원수 되었을 때에 조차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셨습니다.

 

제임스 낙스라는 목사님께서는 성령의 열매 중에서 온유에 대해 설명하면서온유를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돌을 들어 벽에 던지면 벽은 상처를 입으면서 돌을 튕겨냅니다또한 유리병을 들어 벽에 던지면 벽은 유리병을 산산조각 내버립니다그러나 돌을 들어 호수에 던지면 호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잔잔하게 흐릅니다온유는 마치 이와 같습니다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비방을 하고 상처를 줄지라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잔잔한 강같이 모든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서 지적하는 사람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긴장하게 됩니다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연스럽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안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예수님께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오늘의 본문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장면입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배우기 원하십니까전천년주의적 종말론교회의 시작간극이론뱁티스트 브라이드, TR이냐 영킹이냐 등등우리에게는 많은 신학적인 이슈들이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십니다오늘 우리가 다른 신학적인 많은 지식들을 배우기에 앞서서또는 다른 지식적인 부분들을 다 배운 후에라도 그 무엇보다 힘써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예수님께서 직접 내게로 와서 내게 배우라.”라고 언급하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배우지 못한다면우리의 바른 지식과 놀라운 재능과 은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정말 많은 지식을 가지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한 학자들을 봅니다또 정말 설교를 잘하고 사람들을 감화 감동시키는 놀라운 설교자들을 봅니다그러나 그들이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는가그들이 정녕 온유하고 겸손한가를 볼 때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우리는 어떻습니까우리는 어떤 사역자로 준비되기 원합니까우리가 또 한명의 그저 그런 신학자또 한명의 일반적인 목회자가 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우리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께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 가서 배우려하지 말고내 안에 살아계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가지신 마음이 무엇입니까다함께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번갈아서 교독하겠습니다제가 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예수님은 누구십니까하나님이십니다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는 7절에 나온 것처럼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셨고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이러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기 원합니다누가 참된 사역자인가의 여부는 지식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물론 바른 성경적 지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그러나 바른 지식 그 자체는 우리를 참된 사역자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된 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원한다면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고명성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습니다종이 되면 될수록 좋고사람들이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자처럼 여기고 무시할수록 좋습니다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러한 것을 염려하지도 연연하지도 않습니다주님의 사역자가 되기 원하는 모든 형제들은 마음속에 있는 영적 야망을 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넘겨야합니다내가 놀라운 사역을 일으켜서 위대한 사역자가 한번 되어보겠다고 하는 그런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를 다 십자가로 처리해야합니다침례 요한이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해야 합니다오늘 우리가 가려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쇠하는 길입니다온유와 겸손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며 낮아지는 길입니다무명한 자가 되는 길이며 스스로 종이 되는 길입니다.

 

 

마무리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예수님의 마음은 종의 마음이며 온유와 겸손의 마음입니다이러한 마음은 지식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또한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온유는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성품입니다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있을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우리가 주님과 떨어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온유할 수 없습니다우리가 온유하신 주님께 꼭 붙어 동행하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의 온유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참된 사역자는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입니다온유하려고 노력해서 되지 않고 겸손하려고 노력해서 되지 않습니다우리는 날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모든 수고와 짐을 내려놓고 안식해야 합니다그리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도 늘 가득하기 원합니다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고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나타나기를 원합니다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8.08.2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6세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마 20:28)


본문 : 마태복음 20장 28절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0장 28절 한 구절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뒷부분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어리석고 탐욕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즉 몸값으로 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자기 생명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사망과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주 예수님의 몸값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믿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목적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듯이,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사시는 목적 또한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며 사람들을 죄와 지옥으로부터 건져내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몸값으로 주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손과 발과 입술과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의 앞부분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에, 비록 육체적으로 이 땅에 살고 계시지는 않지만 믿는 우리들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실 때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오늘의 본문과 같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우리가 만약 참으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린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교회와 잃어버린 많은 영혼들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가지는 바로 섬기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다함께 누가복음 10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부터 4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38절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8 이제 그들이 갈 때에 그분께서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하는 어떤 여자가 그분을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니라.
39 그녀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더니 그녀도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으나
40 마르다는 섬기는 일이 많아 괴로워하더라. 그녀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섬기게 내버려 두는 것을 주께서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런즉 그녀에게 명하사 그녀가 나를 돕게 하소서, 하거늘
41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 마리아는 그 좋은 부분을 택하였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김봉중 집사님께서 여름수련회 기간에 이 말씀으로 귀한 은혜를 나누셨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비록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서 mp3를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분주하게 섬기는 것보다 조용히 십자가 앞에 머물러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느끼고 배우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가 바로 섬김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이 마르다와 마리아 말씀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분들이 이 말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잘못 적용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면서 마음을 어려워하거나,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김봉중 집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각자의 마음이 많은 일로 분주하기보다 십자가 앞에 머물러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우리의 내적이고 영적인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결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덜 영적이고,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더욱더 영적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만약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육신적인 것이라면 가장 많이 수고하고 날마다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 사도 바울, 많은 일로 수고하고 염려한 사도 바울은 가장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적용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주님의 말씀을 펴고 주님과 교제할 것이고, 그 뒤에 여전히 주님과 동행하면서 많은 주님의 일들을 넘치게 섬기며 하루를 살아갈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적용한 사람은 바쁘고 분주한 시간에도 역시 마음 속에서 주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교회 모든 자매님들이 마리아처럼 되겠다고 식사당번을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 교회 모든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주일 오전성경공부 시간이나 수련회 때에 마리아처럼 되겠다고 아이들을 내팽개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42절에 나온 것처럼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라는 말씀을 붙잡고 "오직 말씀 듣는 한 가지만 필요하니까 난 마르다처럼 분주하지 않을거야."라고 하면서 아무도 섬기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영적인 이기심을 변호해서는 안됩니다. 섬김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고 나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인데, 그것은 주님이 있으라 하신 그곳에서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수련회에 가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형제 자매들의 간증도 못 듣고, 교제도 못하고, 말씀도 못 듣지만 주님이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은 그곳에서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전에 아기 돌보기에 들어온 한 자매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캠코더를 연결해서 TV로 집회를 틀어주었는데, 그 자매님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내팽개치고 오히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말씀에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 아이들이 있던 장소는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집회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 자매님의 영적 열망으로 인해 아이들은 계속 혼나고 힘들어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전혀 마리아답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은 자신이 아기 돌보기 하는 시간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아기 돌보기도 하면서 말씀도 들으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한 것이고, 마리아의 문제는 한 가지를 선택하여 온전한 마음으로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주님이 있으라 하신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원함과 유익을 계산하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그 한 가지를 온전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실제 삶 - 가정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섬기러 오시고 자기 자신을 주려고 오신 것처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면 우리도 다른 이들을 섬기며 우리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노력을 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심지어 형제를 위해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추구하고 있는데 잘 안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 실제적인 모습들을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갑자기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나타났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고, 또 멀어졌던 형제 자매와 화해하고 새롭게 다가서는 것도 그 열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 나타나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면서 가정이라는 주제를 초점으로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요즘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새롭게 보고 있는데 참 재밌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부터 아담과 이브를 통하여 시작된 최초의 가정을 볼 수 있고, 가인과 아벨의 형제간의 시기와 살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남편 아브라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순종하는 아내 사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남편에게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게 하고는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다시 남편에게 불평하는 아내 사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생명을 포기하며 순종하는 아들 이삭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야곱을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에서를 축복하려는 남편 이삭과 너무나 영적이어서 스스로 꾀를 부려 야곱을 축복하려고 작전을 꾸미는 아내 리브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축복을 얻으려고 시기하고 다투는 쌍둥이 형제를 볼 수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자식을 편애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가정의 분열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언급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정에 대한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곧 섬기는 삶인데, 바로 우리의 각 가정을 섬기는 삶입니다.

다함께 누가복음 1장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침례 요한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느니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그리고 16절과 17절은 침례 요한의 사역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6 이스라엘 자손 중의 많은 이들을 주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영과 권능으로 그분보다 앞서가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며 주를 위하여 예비된 한 백성을 준비하리라.

여기서 보면 침례 요한의 사역 중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주 그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자를 의인의 지혜로 돌아오게 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침례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돌아온 아버지들의 마음은 자녀들에게로, 각 가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과 회복된 사람들의 마음이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침례 요한의 사역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또 한 면에서는 가정회복 사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어떻게 섬기는가?
다함께 골로새서 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과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3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줄 아나니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주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은 어떤 특정한 일을 하는 삶이라기 보다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은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도 물론 포함되지만, 그것만이 주님을 섬기는 삶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는 모든 우리의 생활 속의 일들이 주님을 섬기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일들이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8절로 올라가서 22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8 아내들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
19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주를 매우 기쁘게 하느니라.
21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지니 그들이 낙담할까 염려하노라.
22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우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꼭 교회에 나와서 무슨 일을 섬기거나 캄보디아, 아프리카에 가서만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골로새서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주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우리의 삶 자체가 주님을 섬기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나의 선호도와 나의 주장이 모두 못 박혀 죽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원함만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나온 것처럼, 아내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은 무엇입니까? 남편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는 말을 목사님이나 영적인 다른 형제가 하는 말보다 더 중요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그렇게 순종하며 따르듯이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의 부족함으로 인해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여전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다른 형제들과 비교하지 말고, 권위를 거슬러 의견을 주장하지 말고, 질서 가운데 순종하고 남편을 지혜롭게 돕는 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19절에 나온 것처럼, 남편에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무엇입니까? 아내에게 무조건 입다물고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에게 상냥하고 젠틀하게 대하는 것 이상으로 아내에게 자상하게 대해주어야 합니다.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지말고 대접받고 섬김을 받으려 하지말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아내는 주님을 섬기는데 조수처럼 따라다니면서 뒷바라지하는 종이 아니고 남편이 섬기고 양육해야 할 사역의 대상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한국적이고 유교적인 남편상을 버려야 합니다. 원래 남편은 이런거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다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남편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고 돌보시는가를 배우면서 아내를 아끼고 돌봐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며, 주님을 섬기는 실제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조언자요 돕는 자로 주셨기 때문에 아내가 조언할 때 겸손하게 듣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면서 물리치지 말고 잘 들어주고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20절에 나온 것처럼,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와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가정 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저도 자녀된 자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께 긍휼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자녀들은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방 정리를 하고, 일찍 자고,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쁘다고 방에 들어가서 자기 할 일만 하지말고 거실에 나와서 부모님과 대화하며 하루에 있었던 일들과 소식들을 나누고 교제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21절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고 그것으로 그들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또 피곤하고 귀찮을 때에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아이들과 대화하며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함께 동화책을 봐주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귀찮다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바로잡고, 또 잘했을 때 온 마음으로 칭찬해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아버지상을 찾아야 합니다. 한국적이고 유교적인 아버지관을 다 버려야 합니다. 원래 아버지는 이런거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념을 다 버리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서 아이들을 섬세하게 사랑하고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합당하게 아버지의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저는 주일학교, 중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부모님에 대해 노여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듣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녀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 이끌어주어야 할 귀한 영혼임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양육해야 합니다.

또한, 어머니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려운 지체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교제하는 것도 귀한 섬김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있어서 가장 큰 섬김은 쉬운 말로 밥하고 빨래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할 때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한다면 주님은 그러한 일상 속의 섬김을 하나도 잊지 않고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어떤 맛있는 음식을 해줄까, 어떤 영향식을 해줄까 찾고 공부하고 연습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올 때에 아이들에게 가장 깨끗한 옷을 입혀주고 하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우리 가족이 오늘 얼마나 귀한 분을 만나러 가는지 알려 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교제모임을 한다고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방치해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엄마를 빼앗아 갔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주님을 경배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주님을 인식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칭찬과 관심에 항상 굶주려 있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훈련시키고 만드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완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세상적인 지식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 안 간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여기면서 교회 안 간다고 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두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잘 이끌 수 있도록 주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또한 22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처한 위치에는 항상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요령을 피우고 빈둥거리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려고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일해야 하며, 그러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며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무리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란 주님을 섬기는 삶이고, 주님을 섬기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주님이 주신 위치 가운데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자녀로서, 또 직장에서는 일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각자가 맡은 일에 사람에게 하듯이 눈치를 보면서 눈가림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듯이 신실하고 충성되게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리켜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6.05.03 / 설교 장소 : 밴쿠버 그레이스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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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마 11:28-30)


제목 :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
마태복음 11장 28-30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이라고 잡아봤는데,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염려해독제 투"입니다.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고 나서, 같은 주제로 반복하여 여러 말씀들을 살펴보면 좀더 분명하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기 때문에 지난 주일날과 동일한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마태복음 11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 언급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잃어버린 혼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안식과 쉼에 대해서 설명하고 초청할 때 자주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시작하는 말
저는 지난 목, 금요일에 트레이닝을 잘 받고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석기시대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월요일 낮에는 이사를 잘 마치고 처음으로 새벽 1시까지 식당에 있었습니다. 12시가 넘으니 손님이 딱 2테이블에만 있었습니다. 한 테이블에는 저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옆 테이블을 청소하면서 우연히 그 청년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몇 억을 벌었다더라, 이렇게 하면 돈이 잘 벌리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을 많이 보다가 이렇게 나름대로 진지하게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까를 생각하는 청년들을 만나니 생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돈을 벌면서 살아가든 설령 돈을 많이 벌다 할지라도 그 길에는 참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청년들은 옆에서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제가 더 불쌍해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일까요? 

하나님께서 사탄 앞에서 자랑하시기를 온 땅에 그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신 욥은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욥 5:7)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이집트의 모든 영화를 누리고, 광야에서 한 평생을 보낸 하나님의 사람 모세, 12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기력이 쇠하거나 눈이 흐리지 않았던 모세는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어도 그 연수의 힘은 수고와 슬픔이니, 그것이 곧 끊어지면 우리가 멀리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당시 온 땅에서 지극히 지혜롭고 영광스러워서 저 멀리 동방의 시바 여왕이 찾아와 직접 대면해보기를 원했던 솔로몬 왕은 (시 127:1,2) 『주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시면 집을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읍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밤 늦도록 자지 않고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전 1:8) 『만물은 수고로 가득 찼으나 사람이 그것을 표현할 수 없으니,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도다.』(전 2:23)『이는 그의 모든 날들이 슬픔이며 그의 수고로운 비탄이요, 정녕,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함이니 이것도 또한 헛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우리의 인생이 고생과 수고로 가득찼으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헤매며 사람들 속에서 허덕이고 또 죄의 짐에 눌려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잃어버린 혼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거센 풍랑 속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수고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힌 수많은 영혼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이후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 안식과 쉼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다지 큰 영향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한가득 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죄인들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여러분 예수님께로 나아와 쉼을 얻으십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당신이야말로 쉼이 필요한 것 같군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참 안식과 쉼을 주시는 주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본문인 28절의 말씀대로 다 주님의 초청에 임하여 영원한 안식과 쉼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문제는 28절까지만 읽고는 "아멘!"하고 성경을 덮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곧 이어지는 29절과 30절까지도 "아멘!"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29절에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 결과로 우리가 우리 혼에 쉼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주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멍에와 짐을 지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로부터 배운다면 우리는 우리 혼에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멍에와 우리 자신의 짐을 지고 수고하며 지치고 걱정과 염려 속에 메말라가면서도 너무나 쉽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지고자 하지 않는데서 발생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모르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외적으로 돈이 없거나 무엇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기초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복음을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다만 지옥에서 하늘나라로 옮겨지는 티켓 한 장이 아닙니다. 다만 죄가 있었는데 용서해줬다는 사면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물건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 개인에게 구원자요,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요일 5:12)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의 중심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안식과 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 면에서는 맞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안식을 주시는 주님 자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자신, 내게로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내 짐을 메며 나를 따르고 내게서 배우고 내게서 쉼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걱정과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지치고 눌려있고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염려와 무거운 짐들 속에서 지치고 수고한 우리에게 참 안식을 가르쳐 주시려고 오늘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영접한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으로부터 배울 수만 있다면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 14:27)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겨 두나니 나의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온유와 겸손
오늘 우리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렛이란 마을은 구약이나 요세푸스의 역사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아주 작고 주목받지 못한 도시였습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할 만큼 아주 볼품 없는 빈민촌에 불과했습니다. 나사렛의 목수들은 자기 목공소를 가질 만큼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고, 나사렛 주민들도 가구를 구입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의 목수들은 망치하나와 못 통을 들고 "문짝 고치세요. 식탁 고치세요."하고 외치며 갈릴리 주변을 돌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실 때 "네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지만 겉으로 보이기에는 오십 세가 조금 안된 것으로 보일 만큼 태양에 그을리고 볼품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날 성화같은데 나오는 금발머리의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사 53:2)『이는 그가 그 앞에서 연한 싹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이며, 그는 모양도 장엄함도 없으시니 우리가 볼 때에 그를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음이라.』

가족들에게는 배척받고 고향에서는 거부당하고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심을 하거나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삼십 대 초반인데 오십 대로 보인 것 때문에 충격을 받고 외모에 대해 걱정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머리 둘 곳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로 완전히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또한 주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외부의 여러 가지 환경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걱정이 많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알아갈수록, 그리고 이러한 주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예수님이 가진 화평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보통 우리는 성격이 부드럽고 잘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유라는 성품은 사람의 성품이 아닌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천성적으로 아무리 온유해 보여도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온 열매가 아니라면 결코 참된 온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모세를 가리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한 것을 정죄하고, 또 모세만이 선지자가 아니라 아론과 미리암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고 하면서 모세를 시기하고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이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잠잠하였습니다. 자신을 변호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온유한지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속으로는 화가 나고 불타는데 겉으로만 참은 것일까요?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인식입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겸손과도 연결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다른 사람의 평가와 눈치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만을 주목하게 해줍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며 겸손하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를 누리며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입하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의 무거운 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시험과 걱정거리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항해 중에 자꾸만 파도가 달려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의 초청에 더 잘 응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해서 더 무겁게 짓누르시거나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걱정과 염려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강하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치고 수고한 만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만큼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울 왕으로부터 늘 도망 다녀야 했던 다윗, 자기 아들로부터 배반을 당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셨다는 이유만으로 만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과 친밀하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화평이란 외부의 걱정거리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배우고 알게 될 때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이 나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 때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6.03.0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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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마 18:1-6,10,14) 

제목 : 아이들을 부르시는 주님
본문 : 마 18:1-6,10,14
1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하매 
2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
10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오늘은 아마도 제가 캐나다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기대가 되고 또 큰 축복이 있었는데 이번에 하는 설교가 형제, 자매님들을 오랫동안 떠나기 전에 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까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3ㆍ1절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주님에 대해 설교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또 요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영광이라는 단어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 말씀을 준비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도 귀에도 마음에도 들어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어떤 것일까, 모세가 간절히 보기를 사모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 바울이 세상의 쓰레기와 같이 되면서도 그러한 모든 고난이 가벼운 것은 그 영광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 영광이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들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지난 5년 동안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작은 부담에 대해 나눠보고자 합니다. 우리 다같이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어떤 말씀을 나눌지 다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기름 부어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
우리나라는 요즘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예전처럼 결혼을 하고 자녀들을 낳아서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라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더 커졌습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과 교육비의 부담 때문에 점점 아이들을 낳지 않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주님께서는 우리교회를 넘치게 축복하셔서 시끌벅적하고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하니 무엇부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참 막막했습니다. 설교원고도 새로 써보고 성경본문도 바꿔보고... 나름대로 끙끙대다가 우선 가볍게 우리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일학교의 주제가인 "갈보리 어린이"라는 찬송을 보면 3절 마지막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한가지 소원 주님의 사람되는 것 더 많이많이 자라나서 섬기고 싶어요." 이제 6학년이 된 창원이가 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인데, 하루는 창원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아요.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창원이 어머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창원이가 대답하기를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학교에 원수 같은 친구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우선 창원이가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사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에, 또 창원이가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작게나마 소원으로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또 그 문제로 나름대로 깊이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로마서 5장 10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원수였을 때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더 깊이 알게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작년 여름, 가을 즈음에 아이들에게 카드 붐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올 때마다 카드를 한 뭉치씩 가져오곤 했습니다. 카드에 그려진 그림은 용과 괴물과 악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빼앗기도 하고 버리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이제 4학년에 올라간 재선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재선이의 어머니께서 재선이에게 사도행전 19장에 예수님을 믿은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용을 가진 은 오만 개 어치나 되는 책들을 모두 불태운 장면을 보여주시면서 그 카드를 버려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선이는 그 당시 울면서 그 카드를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재선이의 생일이 되었을 때 한 친구가 다시 그 카드를 한 뭉치 선물한 것입니다. 그 때 재선이는 조금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 그 카드를 버렸습니다. 재선이 어머니는 재선이에게 왜 좋아하는 그 카드를 버렸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재선이는 대답하기를 "카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가잖아요." 하였습니다. 

재선이의 친구인 건주가 있습니다. 건주는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고 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하였는데, 마태복음 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씀을 읽은 건주는 정말 이 말씀이 진짜인지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건주에게는 한 친척형이 있는데 명절마다 그 형과 함께 노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평소에는 쉽게 만날 수 없는 먼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건주는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그 형과 만나서 놀게 해주세요."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어느 날 건주가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할머니 댁에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형이 마침 그 집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명절도 아니었고 서로 시간을 맞춘 것도 아닌데 놀랍게도 멀리 사는 그 친척형이 와있었던 것입니다. 건주의 어머니는 건주가 그렇게 기도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건주는 너무나 기쁘게 "제가 엄마한테도 말 안하고 정말 은밀히 하나님께만 기도했는데 드러나게 응답해 주셨어요!"하면서 자랑하였습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주영이가 있습니다. 주영이는 불교를 믿는 외할머니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우 답답해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주영이는 손에 돌멩이 하나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내밀면서 "할머니, 할머니는 이런 돌한테 절을 한다는 말이에요?"하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800년대 놀라운 부흥의 통로가 되었던 설교자 디엘 무디는 자신의 설교 이후에 한 명의 어른과 한 명의 아이가 헌신초청에 응답하여 앞에 나온 것을 보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한 사람 반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은 그 기도의 의미를 물었고, 디엘 무디는 대답하기를 "이 어른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많이 허비하여서 반밖에 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이 아이는 아직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온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매주보고 또 쉽게 지나치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우리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깊고 진지한 생각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고자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한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어떻게 주님의 사람이 될까하는 고민이 있고, 카드가 너무나 좋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단호하게 버리려는 결심이 있고,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은밀히 기도하여 응답 받는 간증이 있고,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표현이 우리 눈에 유치해 보이고 우습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과 교제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가장 큰 자인지를 논쟁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이들을 잘 양육해서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실족시키고 길을 잃게 만드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실 정도로 주님은 우리 아이들을 앞길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오늘날의 우상, 교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다니엘서에 예언된 것과 같이 지식이 증가한 시대입니다(단 12:4).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우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물질과 쾌락 그리고 교육입니다. 이 세상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교육의 대열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모든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여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바로 사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시스템에 정복당하여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한 초등학생이 자살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학원을 조금만 다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육이라는 우상은 아이들을 바쁘고 지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세상의 흐름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정 안에도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영어를 잘 못하고, 수학을 못하고, 과학을 못하면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것을 위해 돈을 쓰고 학원에도 보내지만, 자신의 자녀가 주님을 모르고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면 혼내기도 하고 답답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우리교회의 초등부 아이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한달 동안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하거나 상식과 흥미를 위해 구입하는 책들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성경은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성경을 가져다 읽으라고 하는 것과 자기 소유의 성경,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기록된 내 성경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이들이 주님을 알아 가는 것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지 않습니까? 상식과 교양을 위하여 읽으라고 강요하는 책들은 너무나 많지만 성경을 읽으라고 말하는 소리는 너무나 작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오늘의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님은 어린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워놓고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바램일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특징 가운데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 식어지리라"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심이 험악해졌다.", "세상 살기 무서워졌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이 식어졌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대명사는 바로 부모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지막 날들의 특징이 바로 사랑이 식어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구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하여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아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5년 간 아이들을 대하고 또 복음을 전하면서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복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다 라는 사실은 아이들이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옥이 있다는 것도 알뿐 아니라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뭔가 부족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아이 자신이 철저하게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죄인이라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아이들의 순수하고 열려있는 마음 속에도 복음이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나이를 먹는다고 자라나지도 않고, 몇 번의 성경공부로는 심어주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제 때에 징계하느니라"(잠 13:24). 
"아이를 징계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 이는 네가 그를 회초리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할 것임이라. 너는 그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잠 23:14). 

사랑이 식어진 오늘날은 자기 아이를 때리지 않습니다. 제 때에 징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배우지 못합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욕심을 부리고, 미워하고, 권위를 거슬러 마음대로 행동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얼마나 크게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죄인인지 인식할 수조차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철저하게 맞으면서 배운 아이들은 거짓말을 지적할 때 자신이 큰 죄인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다만 말로만 경고를 받고 타이르고 구슬리는 방식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그런 것을 별로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어떤 아이가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혼을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죄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할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으로 아이들을 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초리가 아이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지옥에서 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회초리를 아낀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며 멸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현재 잘못된 것들을 고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더 멀리 본다면 그를 지옥에서 건지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제 때에, 알맞은 때에 아이들의 잘못을 알려주고 징계하는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구주 예수님을 찾도록 인도해 줄 것입니다. 

아이들의 미래
우리 아이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아이들이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구원만 달랑 받고 자기 정욕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영원한 영광으로 기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목적이며 소망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이끌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저의 말을 듣고 배우기보다 저의 행동을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따로 배우고, 실제로는 어느 선까지만 적당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손짓과 표정과 어조와 행동을 관찰하며 실제가 무엇인지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흡수하고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참되게 이끌 수가 없습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어른들은 눈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우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어머니께서 예배당에서 통성기도를 하시면서 아주 큰소리로 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보았는데, 그 때 저는 "엄마 왜 울어, 엄마 왜 울어, 울지마." 하면서 마구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씩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잘 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님들! 아이들 앞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많이 우십시오.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이야기를 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또 아이들에게 자기 전에 기도해주면서 많이 우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진지하게 믿고 따르는지 삶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번 습관적으로 만나는 악세사리 같은 분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나를 인도하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기도요청
원래 저는 다니엘,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의 자녀들, 소년 다윗, 디모데 이런 성경 인물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뚱딴지같은 소리를 할 때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또 아이들이 유치한 것을 가지고 웃고 좋아할 때 어떻게 같이 웃어줘야 하는지,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하면서 쉽게 업신여기고 간과하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수요기도회입니다. 저는 기도요청을 하러 올라왔습니다.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닌 한 어린 형제가 그 동안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섬기면서 힘들고 지치고 실패하고 부끄러웠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대하고 섬기면서 주님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이없어하고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다가도 이 아이들보다 더 심한 나를 오래 참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섬길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아이들에게 오직 주님의 사랑과 진리만을 전달하고자 했을 때 나의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나의 마음상태와 관계없이 언제라도 아이들을 기쁘게 대해야하는 섬김의 위치는 때로 부담스럽고 힘든 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귀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잠시 다른 위치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주님이 다시 부르시면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함께 주님을 알아 가는 이 귀한 자리를 사모하며 돌아오기 원합니다. 아이들에게 더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여러 가지 핑계로 해주지 못하고 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많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교회를 축복하셔서 많은 아이들을 주셨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섬길 지체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섬김의 자리를 사모하여 헌신하며 감당할 지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인생이 온전히 주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또 아이들을 이끌어주며 함께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선생님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9장 13,14절을 다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그 까닭은 하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시고"

* 설교 일시 : 2005.01.2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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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이기는 힘(마 4:4)

제목 : 시험을 이기는 힘
본문 :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4장 4절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모두 살펴볼 것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4절 한 구절만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읽는다.) 오늘 저는 “시험을 이기는 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세 번 모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말에는 “삼세판”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승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험과 정욕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에 사용된 표현인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는 것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심으로 말미암아 능히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완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더 많이 알고 만나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본문
전반적인 설명

본문 1절은 “그때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장의 끝 부분과 이어지는 시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3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친히 음성을 내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마치 욥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고 자랑하시는 말씀을 하신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된 것과 같이, 마태복음 3장에서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이 끝난 직후에 마귀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에 낙담하거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사랑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시험이 임하였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금보다 귀한 단련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통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시험을 통과하시고 앞으로 사역하는 모든 일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한 뒤에 주리시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광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또 스스로 마귀와 겨루어 볼 뜻을 품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싸움이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적인 전쟁임을 명확히 보여주시고자 사십 일간의 금식을 통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힘을 약하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
3,4을 읽어보겠습니다. 
“3 그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하라, 하거늘 4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시험하는 자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불과 사십여 일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 마귀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빗대어 시험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배도 고픈 이때에 너의 능력을 좀 사용하여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해보라.”하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침례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고 선포한바 있습니다(마 3:9).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이 돌들로 빵을 만들 수 없겠습니까? 마귀의 요구는 어떤 사악한 죄를 저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돌들에게 명령하여 빵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빵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움직인다.”하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임의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살고 계심을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
5절에서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시로 올라가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6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이는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음이니라, 하매 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위험에 처하여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움직여서 예수님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해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예수님을 충동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시험에는 한가지 위력이 더해졌는데 그것은 마귀가 시편 91편의 말씀을 인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는 “모든 길에서”라는 단어를 “언제라도”라는 단어로 바꾸어 사용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답변은 “또 기록된바”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시험에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특정 부분의 말씀만이 아닌 모든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에게 편하고 좋은 말씀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또 기록된바”라는 표현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 시험
8절부터 11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8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 주며 9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매 10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음이니라, 하시더라. 11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

성경의 대 주제는 왕국이며, 주인공은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님은 모든 만물의 머리이시며 왕이십니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자기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사탄에게 넘어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되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죽음을 통과하여 영광으로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이 세상의 왕국들을 모두 통치하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 이전에 십자가를 견디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이 악한 현 세상을 다스리는 마귀는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주고 그것을 순순히 넘겨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음과 십자가를 통과할 필요 없이 쉽게 얻으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다만 딱 한번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얻으려했던 그 영광을 단 한 번의 타협으로 쉽게 가지라고 충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아, 여기서 물러가라. 이는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음이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다 이루실 때까지 가지신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친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므로 직접 무엇인가를 말씀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기록된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절대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아무것도 임의로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움직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이것은 대언자 누구를 통해 기록된 것을 성취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칼로 말고의 귀를 쳐서 베어버린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마 26:53,5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 24:44,45)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경의 기록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가 다같이 읽은 마태복음 4장 4절에서는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나와서 시내 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을 직접 듣고 너무나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가 대언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시내 산은 너무나 멀고 오늘날 그분은 직접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기록된바”, “또 기록된바”, “이는 기록된바”. 주님께서는 과거에 기록된 성경의 말씀들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심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해서입니까? 사십 일을 밤낮으로 굶어서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대할 때에 지금 하나님께서 직접 입을 열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엄중하게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힘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소생시키고 오늘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주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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