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5.12.21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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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시 138:6-8)

제목 : 주의 손
본문 : 시편 138편 6-8절
6 주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이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오늘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시편 138편은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다"하는 말씀을 담고 있는 시편입니다. 시편 138편 6절에서 8절까지,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손"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지나고 있는데 이렇게 다친 것을 계기로 손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게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손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주의 손을 가까이 대하면서도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또 그것에 얼마나 감사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주의 손
우리는 성경에서 "주의 손"이라든지 "주의 오른손"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는 대부분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며, 구원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우리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을 붙잡는 것은 너무나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실 때 "주의 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손을 내밀어 이집트 한가운데서 행할 모든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뒤에야 그가 너희를 가게 하리라"(출 3:20).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모든 이적들이 하나님의 손을 내밀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통해 이러한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적을 주실 때에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고 모세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신 후에 "네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네 손을 네 품에 넣으라." 하셨을 때 모세의 손에 나병이 생겼고 다시 한번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니 그것이 처음의 손과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쟁을 할 때 모세가 손을 올리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배했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손이라는 단어만 주목해 보아도 성경에서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막대기는 죽어버린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모세의 손을 통해 살아있는 뱀이 되기도 하고, 이집트의 모든 풍요를 관장하는 여신이라 불리던 나일강을 피로 물든 죽음의 강으로 만들기도 하고, 거대한 홍해바다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늙고 기운이 빠진 모세, 마른 막대기와 같은 모세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다면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많은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사무엘의 평생동안 블레셋인들과 전쟁이 없었고,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엘리야는 아합의 수레를 앞질러 달려갔으며, 주의 손이 임하였을 때 욥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아 정금과 같이 연단되었고, 하나님의 손이 임하였을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타국의 통치자들로부터 긍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의 손으로 지으신 모든 창조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모든 역사들과 사도들 위에 임하신 주의 손의 권능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진리들로 인하여 전율할 것입니다. 

구원의 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28-30).

우리의 구원이 영원히 안전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의 팔로 붙잡아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 예수님의 손을 떠올릴 때 우리는 못 자국난 손을 기억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두 손을 보며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라 되라"(요 20:27).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님의 권능의 손은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영광과 사랑의 상처를 지닌 손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께 우리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은 또한 주 예수님 자신을 주의 팔이요, 주의 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이는 그가 주 앞에서..."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 여기는 "그가"라고 부른 주인공은 바로 "주의 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주의 팔"은 누구입니까? 권능과 능력의 주의 팔이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고운 모양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는 모습으로 이 땅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손과 주의 팔을 언급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주의 권능의 오른손이신 주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기 원합니다. 

오른손을 다치고 
이처럼 우리는 성경의 곳곳에서 주의 손을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어떻습니까? 성경에서는 주의 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떻게 주의 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제가 오른손을 다치고 약 6주가 되어가고 있는데 지금은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젓가락질도 하루 3번씩 꼬박꼬박 연습을 하니 지금은 밥풀도 집고 라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 해졌습니다. 
전에는 몰랐습니다. 오른손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손을 다치고 나서 집에 돌아온 뒤 처음 저녁식사를 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숟가락질도 젓가락질도 모두가 생소한 왼손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추하나를 풀고 끼워 넣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세수할 때, 양치할 때... 기본적으로 생활하는 모든 것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던 열쇠와 핸드폰이 모두 왼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물건을 사기 위하여 지갑에서 돈을 꺼낼 때에도,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붙잡을 때에도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차라리 왼손이 다쳤더라면 조금 덜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저는 문득 마태복음 6장에,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저의 오른손은 저 자신도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우 크고 작은 일들에 수고를 해왔습니다. 왼손으로 그 동안 오른손이 해왔던 많은 일을 해나가면서 오른손이 어떤 힘든 일을 해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조금 하다가 손에 쥐가 나려고 한 적도 있었고, 단추 하나를 끼지 못해 몇 분이 걸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말 왼손으로서는 오른손의 수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제로 못 자국난 주님의 손을 볼 수는 없지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손의 역할을 감당하는 지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각각 몸 안에 두셨느니라"(고전 12:18). 우리 중 누구는 눈의 역할을 감당하고 우리 중 누구는 발의 역할을 감당하며 우리 중 누구는 손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지체들을 섬기고 있든지 우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손길은 바로 교회 안에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책망하시며 징계하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안아주시며 품어주시는 주님의 손, 때로는 우리를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주님의 손,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손은 오늘날 우리 지체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주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처럼 오해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많은 지체들을 통하여 우리를 돌보시며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손길이 교회와 상관없이 임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께 긍휼을 얻고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으로 부르셔서 몸을 이루는 한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떠나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려는 모순 가운데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간과하며 쉽게 지나치는 형제 자매들의 미소와 관심이 곧 우리와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만 왼손과 같이 그저 섬김을 받는 생활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오른손이 얼마나 큰 수고를 감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손이 다친 이후로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거나 해야할 일을 발견할 때마다 저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오른손에 발동이 걸리는 바람에 의지적으로 그것을 멈추는 일을 하면서 오른손이 얼마나 부지런히 일을 해왔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왼손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오른손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오른손이고 왼손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대로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왼손과 같이 알게 모르게 섬김을 받기만 하던 지체가 이제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지체들을 위해 주님의 일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오른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왼손인 사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에 붙들린 사람의 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붙들린 한 사람이 지은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힘입어 골리앗을 쓰러트린 이 소년, 죄를 범하고는 자신에게 제시된 세 가지 형벌 가운데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손에 떨어져 벌을 받고자 했던 이 사람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손을 많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6 주는 높이 계실지라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는 멀리서도 아시는도다.
7 내가 고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생시키시고 주의 손을 내미사 내 원수들의 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 주께서 나에 관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리이다. 오 주여, 주의 긍휼이 영원토록 지속되오니 주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손에 붙들린 다윗은 겸손하게 주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주의 손을 붙들었으며, 주의 손이 자신을 완전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은 위풍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아닌 겸손하게 긍휼을 구하며 주의 오른손을 힘입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손에 붙들린 마른 막대기가 놀라운 기적들을 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우리의 가련한 인생은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마무리하는 말
여러분 옆에 형제 자매들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길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주님의 손을 발견하지 못하여 낙담하거나 불평하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오른손과 같이 묵묵히 수고하는 지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왼손인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나를 위해 오른손의 역할을 끊임없이 해온 지체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주님의 손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한 지체들로 인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또 내가 오른손으로서 섬겨야할 지체들을 발견한다면 그것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그 지체들이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을 하나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훗날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것들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왼손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다만 오른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임했던 인자하고 긍휼히 풍성한 주의 손을 기억하며 묵상하며 되새기며 오늘 내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손으로서 어떻게 섬겨야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 지체들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35 이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으며 병들었을 때에 찾아와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내게 왔음이니라.
37 이에 그 의로운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어느 때에 주께서 나그네가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
39 혹은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라,
40 그러면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손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일시 : 2005.01.12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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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크신 주의 이름(시 138:2)

제목 : 가장 크신 주의 이름
본문 : 시편 138편 2절
2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와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음이니이다.

오늘 저와 함께 살펴볼 주님의 말씀은 시편 138편 2절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가장 크신 주의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시간을 사용해 주시도록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은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above"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주님의 모든 이름들보다 위에 있다고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호칭들, 닉네임, 또는 별명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만해도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주민등록상으로 “이현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회와 친척들과 가족들이 부르는 “이승선”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고, 인터넷 상에서 또는 용산침례교회의 루이스 목사님이나 헤더, 제시와 같은 외국 친구들을 위한 “로빈”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름은 아니지만 주일학교 아이들은 저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교회 안에서는 다만 “형제”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집에서는 “아들아”하고 불리기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다만 “친구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러한 많은 호칭들이 저 한사람을 가리키면서도 각각 한가지 특징들을 부각하여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의 문제는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겠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 15:15).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습니다(요 20:17).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너무나 중요한 표현들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호칭이 어떻게 죄인에서 의인으로, 불순종의 자녀들에서 순종의 자녀들로, 마귀의 자식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론
성경에 나타난 많은 주의 이름들

그러나 성경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이름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 자신의 이름들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각각 주님의 어떠하신 특징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양, 반석, 방패, 망대, 요새, 전사, 주, 여호와,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 전능자, 위로자, 상담자, 영원하신 아버지, 부활의 첫 열매,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 목자, 참 포도나무, 부활, 생명, 길, 진리, 사랑, 생명의 빵, 임마누엘... 
이러한 많은 이름들은 주님 한 분을 가리키면서도 각각의 단어가 서로 다른 면에서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이러한 주님의 이름들은 다만 미사여구나 장식을 위한 표현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잘 묘사해 주고 알려주는 귀한 단어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주님의 이름은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 전에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로 받은 사람의 아들이 되신 주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신약에서 잃어버린 자를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셨습니다. 
다같이 빌립보서 2장 6-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11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시키시고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토록 낮아지셨던, 그토록 비참하게 멸시를 받으셨던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시라 시인하여 영광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목을 곧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는 그 날에 예수님의 이름 앞에 완전히 굴복을 당하고 꺾임을 당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땅 아래, 곧 지옥에 있던 모든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하였던 자들도 그 날에는 수치 가운데 그분을 높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시라 시인하며 찬양한 우리들은 그 날에 수치를 당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분을 높이며 찬양할 것입니다.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신 이름 - 주의 말씀
그런데 오늘 함께 살펴본 시편 말씀에서는 주의 모든 이름들 위에 “주의 말씀”을 크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다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또는 기록되어 글로 적혀있는 말씀이라고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말씀”이라는 주의 이름에 대하여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들 중에서 가장 큰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가지셨던 이름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가지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때 나타내실 이름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잠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서신들 중에서 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일서 5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지 아니하시고 물과 피로 오셨느니라. 증언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그 까닭은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 이는 하늘에 증언하시는 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물과 피로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로, 육체를 입고 오신 주님의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주님께서 하늘에서 증언하실 때에는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계심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역시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주님을 기록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보시면 계속해서 “그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절에 “그분께서”, 3절에 “그분에 의해”, “그분 없이”, 4절에 “그분 안에”, 10절에 “그분께서”, “그분에 의해”, 11절에 “그분께서”, “그분을”, 12절에 “그분을”, “그분의 이름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흐름에 따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 때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절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라고 했을 때 우리는 말씀이신 주님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그 이름, “예수님”을 떠올리며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본문을 살펴본다면 “그분의 이름”은 문맥에 따라 일차적으로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영접함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 1:23). 

이제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 말이라, 그 위에 타신 이는 신실하신 이, 참되신 이라 일컬음을 받나니 그분께서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심판하시며 전쟁을 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의 이름은 신실하신 이요 참되신 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16절에 보시면 “그분의 옷과 넓적다리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니, 왕들의 왕, 주들의 주, 라 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그분의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입니다. 12,13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2 그분의 눈을 불꽃 같고 그분의 머리 위에는 많은 왕관이 있으며 또 그분께서 기록된 한 이름을 가지고 계시되 그분밖에는 그것을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음을 받더라.”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여전히 가지고 계실 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은 틀린 것이 없는 완전하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알려고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이상한 믿음과 삶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만 지침서나 설명서가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참고서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잘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악세사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누리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배움과 위로를 얻고 책망을 받고 바로잡히고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통로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들 중에서 주께서 가장 높고 크게 하신 이름이 바로 “주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바로 “주의 말씀”을 높이고 찬양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순간을 들여 말씀을 가까이 하고 떠올리며 생각하며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주님을 만나며 생각하며 사랑하는지가 판가름 될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우리들이 생명을 더 풍성히 얻기 위하여 날마다 영접하고 마음에 품어야할 주님의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오늘날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을 읽고 탐구하며 연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더 사랑하며 찬양하며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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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일시 : 2004.12.15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 로빈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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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빛과 등불(시 119:105)

제목 : 나의 빛과 등불
본문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Thy word is a lamp unto my feet, and a light unto my path.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19편 105절 한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을 다 찾으셨으면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읽는다.) 오늘 저는 “나의 빛과 등불”이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에 기름부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의 본문인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은 이제 갓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암송해야할 구절이 무엇이냐 했을 때 첫 번째로 손꼽히는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요, 믿음생활의 기초원리요, 평생 잊지 말아야할 좌우명과도 같은 중요하고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인생을 언급할 때 우리는 자주 “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과거를 언급할 때는 “지나온 길”이라고 표현하며, 미래를 언급할 때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는 의미로 “진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은 구원받지 않은 인생에 대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사 53:6上)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잃어버린 자들에게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사 55:7上)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 14:12, 16:25)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니라. 주가 말하노라”(사 55:8下)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길을 잃고 헤매며 각각 자기의 길로 갔다가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리고 길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구절인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은 참으로 거듭난 우리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본론
인생 길의 빛과 등불이 되는 주의 말씀

우리가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았다면 성경에서 “빛”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중요하게 사용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요”(요일 1:5)라고 말씀하시고,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빛의 자녀들”(엡 5:8)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주님과 우리가 나누는 교제를 가리켜 “빛 가운데의 사귐”(요일 1:7)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무장을 가리켜서 “빛의 갑옷”(롬 13:12)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탄은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고후 11:14)로 가장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나가는 과정 가운데 주의 말씀의 빛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짙은 흑암과도 같아서 아무리 그것을 예상하고 예측할지라도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우리의 발걸음을 한발한발 비춰주는 등불과도 같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헛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축복되고 의미 있는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의 말씀을 발 앞에 비춰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 말씀의 빛을 발 앞에 두어야 합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대할 때 “아멘”하며 자신의 빛과 등불이 주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지식과 자신의 관념과 자신의 판단으로 길을 선택하여 걸어갑니다. 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식이 많고 믿음이 좋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가르침을 자신의 빛과 등불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나의 앞길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주의 말씀을 주의하고 있습니까? 주위 환경과 나의 상황과 다른 사람들의 말을 고려하기 전에 참으로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지식으로 길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의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시겠습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더라.”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큰 자는 없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마 11:11).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언자들 중의 가장 큰 대언자요(눅 7:28),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로 나아와 자신의 길을 묻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세리들이 와서 “선생님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묻자, “너희에게 정해 준 것 이상으로 거두지 말라”고 충고하였고, 군사들도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물으니 “아무도 폭행하지 말고 아무도 거짓으로 고소하지 말며 너희가 받는 급료로 만족하라”라고 말해주었습니다(눅 3:12-14).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침례자 요한을 보며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할 정도로 그는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해 증언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더라.” 성경은 단호하게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들 중에 가장 큰 자요, 가장 큰 대언자였던 침례자 요한 조차도 “그는 이 빛이 아니요”라고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사람의 말과 가르침도 우리 길의 빛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놀라운 사도들도 다만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일 뿐이며, 그들 역시 이 빛을 주의하며 길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무엇입니까?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의 길에 유일한 빛이 되시는 주의 말씀을 우리 생활 가운데 더 가까이 하기 원합니다.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
베드로후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 13절에서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 참으로 내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에 너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여 일깨우는 것이 합당한 줄로 생각하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바와 같이 내가 머지않아 반드시 이 장막을 벗어야 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15 또한 내가 떠나간 뒤에도 너희가 항상 이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애쓰리니” 

성경에서 장막은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장막을 벗는다는 말과 떠나간다는 말을 번갈아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머지않아 반드시 이 장막을 벗고 주님께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내가 이 장막에 있는 동안에, 그리고 내가 떠나간 뒤에도 항상 너희가 이것들을 기억하도록 일깨우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부터 18절에서는 베드로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그 까닭은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오심을 알게 할 때에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들을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위엄을 눈으로 본 자들이니라. 17 그 까닭은 뛰어난 영광으로부터 이러한 음성이 그분께 나서 이르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이니라. 18 이 음성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나온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친 말씀들이 거짓이 아니요 교묘히 꾸며 낸 이야기도 아니라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귀로 들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어떠한 영광으로 오실 것인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체험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꿈과 환상을 보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들은 놀라운 경험을 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베드로처럼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며 증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 베드로의 결론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19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속에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사도 베드로는 결코 자신의 체험을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길에 유일한 빛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온 한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상황을 판단하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환경을 주의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말씀을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심지어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도 듣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던 베드로가 말하기를,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주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한가지 항목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말씀을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시듯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결론
실제적인 시간사용

말씀을 주의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루에 10분 성경을 펼쳐서 읽는 것입니까? 매주일 예배당에 모여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까? 정치가들은 많은 신문과 사설를 매일 읽고 생각하며 정리합니다. 주식투자가들은 많은 경제분석과 세계동향을 순간순간 살피며 주의합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이러한 일들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정치계에서 어떠한 처신을 해야할지, 앞으로 세계경제의 흐름을 잘 파악해서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할지를 알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 합니까? 우리의 발걸음을 어디로 향하며 우리의 길을 어떻게 정해야 합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날마다 읽고 매순간 묵상하며 샅샅이 찾고 기억하며 탐구하고 연구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헤매며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하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주의를 기울이며 살펴야할 1순위가 있다면 바로 주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의 말씀을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고백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2003.06.1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1세)
제목 :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시 23편)
본문 : 시편 23편


** 시작하는 말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매번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너무나 많은 교훈과 위로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시편 23편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시편 23편은 읽고 묵상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풍성한 것들이 넘쳐서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어떠한 것을 함께 나누면 좋을까를 고르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풍성한 말씀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이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께 이끌고 주님의 사랑에 다시 한 번 감격케 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23편을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다윗의 시)
1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분께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3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행로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4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저는 오늘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에 축복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시편 23편에 대한 간략한 설명
시편 23편은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성도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지고 사랑을 받았던 다윗의 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 말씀을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 이 시편을 다시 한 번 묵상하고 되새기면서 많은 공급과 은혜를 누렸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많이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23편은 위치적으로 볼 때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시편 22편과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시편 24편을 전후에 두고, 그 사이에 놓여진 시편으로서 "거듭난 성도들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대주의적 관점으로 보자면, 시편 22편은 "초림", 23편은 "교회시대", 24편은 "재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교회시대의 특징 중 하나를 꼽고 있는데, 바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경 다른 곳들에서도 우리 주님을 가리켜 "혼들의 목자와 감독", "양들의 큰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으신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들이 그렇겠지만, 시편 23편은 더욱이 교회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완전히 적용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1절 -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절에서만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가 나의 목자가 아니라 바로 "주"가 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 또 주는 다른 누구누구의 목자가 아니라 바로 "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 또 "주는 과거에 나의 목자셨던 분이 아니라 현재 나의 목자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나의 목자는 나를 만족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영어 킹제임스성경 표현은 "I shall not want"입니다. 이것은 다만 "부족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풍성하게 넘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내게 만족 넘치며"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만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서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완전히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족시키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와 원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시편 23편 앞에 있는 22편이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 어느 목자도 자신이 직접 어린 양이 되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양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양에게 해로운 것, 양의 질병과 상태 등을 "표면적인" 관찰을 통하여 알아내지만, 우리의 목자는 "직접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어려움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목자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 4:15).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참되게 동정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참되게 도우실 수 있는 능력 있으신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2,3절 간략한 설명
1절에서 "나를 만족케 하시는 목자"를 기록하였다면, 2,3절에서는 "나를 인도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혼을 소생시키시며 의의 길들로 나를 인도하시는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자를 오해하여 그 인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하신 목자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만 있다면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말라고 쫓아다니며 말려도, 기어코 목자와 함께 하길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자에 대해서 더욱 분명히 알기를 소망합니다.


** 4절 간략한 설명
4절에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나의 목자께서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세상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탄식했던, "비참한 사망의 몸"안에 거하고 있으며,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마귀"를 대적하고 있고, 영혼들을 둘째 사망으로 이끄는 "이 악한 현 세상"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분명한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목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며 여전히,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목자를 더욱 알아가기 원합니다.


** 5,6절 간략한 설명
5절에서는 원수들의 면전에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고,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시는 목자를 기록하고 있고, 6절에서는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가 승리하고, 주님 앞에서 잘 살 때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며 함께 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많으신 주님을 더욱 알아가며 참되게 따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식탁을 마련하시는 목자
저는 오늘 이 풍성한 시편 23편의 말씀들 중에서 5절의 앞부분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5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원수들을 대적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 나를 무겁게 에워싸는 죄들, 또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는 나의 자아와 육체, 또 마지막 원수인 사망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요한계시록의 이 구절은 내 안으로 영접한 주님과 함께 먹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구원초청 할 때에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고 거듭난 이후, 실제로 나의 목자와 함께 먹고 누린 경험은 별로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원수의 공격이 올 때 직접 나가서 대적하여 싸우다가 패배하고 넘어진 경험은 많이 있지만,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버젓이 식탁에 앉아 나의 목자와 교제하며 먹고 마신 적은 너무나 적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사면으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고달픈 환경 가운데 있을 때에조차 주님과 식탁에 앉아서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마셨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푸른 초장에서는 사면이 푸른 초장이고, 잔잔한 물가에서는 사면이 잔잔하겠지만, 5절에서의 식탁은 사면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식탁은 내가 내 안으로 영접한 나의 목자가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식탁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다만 앉아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목자
이 식탁은 우리 "안에" 마련된 것이기에 외적인 어떠한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면에서 고난이 닥치고, 사면에서 원수들이 둘러싸도 내 안에서 나의 목자와 함께 풍성한 만찬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어떠한 경험과 마음으로 이 고백을 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한 가지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이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6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
27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 1:26,27).
외적인 수많은 상황들이 나를 짓누르고 힘들게 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식탁에 앉아 만찬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식탁을 마련하신 나의 목자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목자가 내 안에 거하신다는 이 신비는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신 목자"를 직접 경험하고 고백한 다윗에게조차 감추어졌던 영광스런 소망의 신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식탁은 "우리 안에" 풍성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친히 어린양이 되셨고, 나를 위해 친히 생명을 내어놓으신, 나를 참되게 동정하시며 도우실 수 있는,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선한 목자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는 다만 높고 높은 하늘에서 이렇게 저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와 동행하며 교제하기 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 우리는 왜 풍성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많은 경우 이러한 풍성한 식탁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는 분명히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원수들의 면전에 있을 때 평안한 식탁에서 주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자주 사용하지만, 이 시간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주님은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누구든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목자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식탁을 마련하시며 우리와 함께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 문을 통해 들어가는 자는 양들의 목자니라.
3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들을 이름으로 불러 그것들을 밖으로 인도하느니라. (요 10:2,3).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다른 길로 넘어오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마음 문을 통해 들어오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없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소위 라오디게아 교회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원수들이 사면을 둘러싼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목자가 계속해서 두드리시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도 문을 곧잘 열지 않는 것입니다.


**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목자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나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완전히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며 교제하기 원하셔서 나와 같은 위치인 "어린양"의 위치를 통과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와 교제하시기 위하여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나의 목자는 나와 교제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또한 원수들의 면전에서조차 나와 교제하시려고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엡 3:9).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감추어져 왔던 "신비에 참여하는 것"가 무엇인지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었던 이방인들인 우리가, 행함이 없이 다만 우리의 목자의 보혈로 인하여 베풀어진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되어 한 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마다 값없이 누릴 수 있는, 그분의 양이 된 자들이 누리는 특권 중의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와 교제를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신 것은 다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과의 풍성한 교제의 식탁으로 초대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역사로 인하여 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서까지 발길이 닫는 곳마다 은혜의 말씀을 전파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알기 원합니다.


** 마무리
저는 오늘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목자는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감시하고 괴롭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의 양털도 아니고, 나의 고기도 아니요, 나의 가죽도 아닙니다. 나의 목자가 양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는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처음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도 문을 두드리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는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고 풍성한 식탁의 교제로 부르시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날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이유는 나의 목자에게 문을 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과의 풍성한 식탁에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다만 나의 목자에게 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신 선한 목자,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셨던 목자, 나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신실하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고 그분과의 놀라운 신비의 교제를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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