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6.11.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1세)
제목 :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시 23편)
본문 : 시편 23편


** 시작하는 말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매번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너무나 많은 교훈과 위로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시편 23편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시편 23편은 읽고 묵상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풍성한 것들이 넘쳐서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어떠한 것을 함께 나누면 좋을까를 고르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이 걸리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풍성한 말씀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이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께 이끌고 주님의 사랑에 다시 한 번 감격케 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23편을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다윗의 시)
1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분께서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3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행로들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4 참으로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저는 오늘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에 축복해 주시라고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시편 23편에 대한 간략한 설명
시편 23편은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성도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지고 사랑을 받았던 다윗의 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 말씀을 너무나 익숙하게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얼마 전 이 시편을 다시 한 번 묵상하고 되새기면서 많은 공급과 은혜를 누렸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많이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23편은 위치적으로 볼 때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시편 22편과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시편 24편을 전후에 두고, 그 사이에 놓여진 시편으로서 "거듭난 성도들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대주의적 관점으로 보자면, 시편 22편은 "초림", 23편은 "교회시대", 24편은 "재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는 교회시대의 특징 중 하나를 꼽고 있는데, 바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경 다른 곳들에서도 우리 주님을 가리켜 "혼들의 목자와 감독", "양들의 큰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으신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들이 그렇겠지만, 시편 23편은 더욱이 교회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완전히 적용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1절 -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절에서만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가 나의 목자가 아니라 바로 "주"가 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 또 주는 다른 누구누구의 목자가 아니라 바로 "나"의 목자이시라는 사실, 또 "주는 과거에 나의 목자셨던 분이 아니라 현재 나의 목자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나의 목자는 나를 만족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영어 킹제임스성경 표현은 "I shall not want"입니다. 이것은 다만 "부족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풍성하게 넘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내게 만족 넘치며"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만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서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완전히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족시키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와 원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시편 23편 앞에 있는 22편이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 어느 목자도 자신이 직접 어린 양이 되어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양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양에게 해로운 것, 양의 질병과 상태 등을 "표면적인" 관찰을 통하여 알아내지만, 우리의 목자는 "직접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이 우리의 마음과 어려움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목자는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 4:15).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참되게 동정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참되게 도우실 수 있는 능력 있으신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2,3절 간략한 설명
1절에서 "나를 만족케 하시는 목자"를 기록하였다면, 2,3절에서는 "나를 인도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내 혼을 소생시키시며 의의 길들로 나를 인도하시는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자를 오해하여 그 인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하신 목자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만 있다면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말라고 쫓아다니며 말려도, 기어코 목자와 함께 하길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자에 대해서 더욱 분명히 알기를 소망합니다.


** 4절 간략한 설명
4절에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나의 목자께서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망의 골짜기"와 같은 세상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탄식했던, "비참한 사망의 몸"안에 거하고 있으며,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마귀"를 대적하고 있고, 영혼들을 둘째 사망으로 이끄는 "이 악한 현 세상"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분명한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목자 그리스도께서 "나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며 여전히,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목자를 더욱 알아가기 원합니다.


** 5,6절 간략한 설명
5절에서는 원수들의 면전에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고,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시는 목자를 기록하고 있고, 6절에서는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가 승리하고, 주님 앞에서 잘 살 때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생애 동안",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며 함께 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많으신 주님을 더욱 알아가며 참되게 따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식탁을 마련하시는 목자
저는 오늘 이 풍성한 시편 23편의 말씀들 중에서 5절의 앞부분을 주목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5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원수들을 대적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 나를 무겁게 에워싸는 죄들, 또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는 나의 자아와 육체, 또 마지막 원수인 사망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시는 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요한계시록의 이 구절은 내 안으로 영접한 주님과 함께 먹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구원초청 할 때에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고 거듭난 이후, 실제로 나의 목자와 함께 먹고 누린 경험은 별로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원수의 공격이 올 때 직접 나가서 대적하여 싸우다가 패배하고 넘어진 경험은 많이 있지만,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버젓이 식탁에 앉아 나의 목자와 교제하며 먹고 마신 적은 너무나 적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편의 이 말씀은 우리가 사면으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고달픈 환경 가운데 있을 때에조차 주님과 식탁에 앉아서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먹고 잔잔한 물가에서 마셨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푸른 초장에서는 사면이 푸른 초장이고, 잔잔한 물가에서는 사면이 잔잔하겠지만, 5절에서의 식탁은 사면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식탁은 내가 내 안으로 영접한 나의 목자가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식탁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다만 앉아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내 안에 거하시는 목자
이 식탁은 우리 "안에" 마련된 것이기에 외적인 어떠한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면에서 고난이 닥치고, 사면에서 원수들이 둘러싸도 내 안에서 나의 목자와 함께 풍성한 만찬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어떠한 경험과 마음으로 이 고백을 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한 가지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이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6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
27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 1:26,27).
외적인 수많은 상황들이 나를 짓누르고 힘들게 할지라도 내가 여전히 식탁에 앉아 만찬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식탁을 마련하신 나의 목자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목자가 내 안에 거하신다는 이 신비는 "내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신 목자"를 직접 경험하고 고백한 다윗에게조차 감추어졌던 영광스런 소망의 신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식탁은 "우리 안에" 풍성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친히 어린양이 되셨고, 나를 위해 친히 생명을 내어놓으신, 나를 참되게 동정하시며 도우실 수 있는,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선한 목자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는 다만 높고 높은 하늘에서 이렇게 저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와 동행하며 교제하기 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 우리는 왜 풍성한 식탁의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많은 경우 이러한 풍성한 식탁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는 분명히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데, 어찌하여 우리는 원수들의 면전에 있을 때 평안한 식탁에서 주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 중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때 자주 사용하지만, 이 시간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주님은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누구든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목자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식탁을 마련하시며 우리와 함께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 문을 통해 들어가는 자는 양들의 목자니라.
3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들을 이름으로 불러 그것들을 밖으로 인도하느니라. (요 10:2,3).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다른 길로 넘어오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마음 문을 통해 들어오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풍성한 교제를 누릴 수 없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소위 라오디게아 교회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 3:20)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원수들이 사면을 둘러싼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목자가 계속해서 두드리시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도 문을 곧잘 열지 않는 것입니다.


**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목자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나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완전히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며 교제하기 원하셔서 나와 같은 위치인 "어린양"의 위치를 통과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와 교제하시기 위하여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나의 목자는 나와 교제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또한 원수들의 면전에서조차 나와 교제하시려고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엡 3:9).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감추어져 왔던 "신비에 참여하는 것"가 무엇인지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었던 이방인들인 우리가, 행함이 없이 다만 우리의 목자의 보혈로 인하여 베풀어진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되어 한 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마다 값없이 누릴 수 있는, 그분의 양이 된 자들이 누리는 특권 중의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면서까지 우리와 교제를 가지기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목자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신 것은 다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우리를 그분과의 풍성한 교제의 식탁으로 초대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역사로 인하여 사슬에 묶인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어서까지 발길이 닫는 곳마다 은혜의 말씀을 전파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알기 원합니다.


** 마무리
저는 오늘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는 목자에 대해서 잠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목자는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감시하고 괴롭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의 양털도 아니고, 나의 고기도 아니요, 나의 가죽도 아닙니다. 나의 목자가 양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는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목자는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처음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도 문을 두드리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는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고 풍성한 식탁의 교제로 부르시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날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이유는 나의 목자에게 문을 열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주님과의 풍성한 식탁에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다만 나의 목자에게 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신 선한 목자,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에서도 여전히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셨던 목자, 나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신실하신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고 그분과의 놀라운 신비의 교제를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글은 아래 주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랜섬웨어 2번 당하니 백업이 철저해지네요! ^^
로빈박스 http://robinbox.net/ot/poetic/19psalm/19psalms23_christmyshepherd_20030611_robi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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