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9.04.15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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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을 무너뜨리는 겸손(벧전 5:5-9)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5장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본문 : 베드로전서 5장
5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8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겪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오늘 저는 “사탄을 무너뜨리는 겸손”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지난 주 말씀과의 연관성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지난 주 수요일과 이번 주일에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지난 주 수요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또 마태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고,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수요일날 어떠한 죄인이라도 주님께 나아갈 수 있고, 이 세상 그 무엇도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는,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주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주님께 나아가서 은혜를 얻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용서하실 수 있지만, 자신에게는 용서받을 죄가 없다고 말하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용서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베드로전서 5장 5절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일날에는 사도 바울이 점치는 사탄의 영에 사로잡힌 한 소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은 속이고 미혹해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사탄의 역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더욱 치열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사탄을 무너뜨리는 겸손”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제가 오늘 많은 성경 말씀을 읽어드릴텐데 다 찾지 마시고 제가 같이 보시자고 하는 부분만 같이 펴서 봐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사람들아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전서 5장 5절의 말씀은 “젊은 사람들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다 있겠지만, 젊은 사람들의 특징을 한 가지 뽑아본다면, 그것은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처럼,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자신의 업적을 드높이고자 하는 명예욕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인 야망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성공을 해보고자 하는 마음은 없어졌을지라도,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영적인 야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시간만 나면 우리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따졌습니다.
장로에게, 다 서로에게 복종하라
특별히 오늘의 말씀은 먼저 장로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성경에서는 장로라는 말이 나오고, 감독이라는 말이 나오고, 또한 목자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없었던 지역 교회가 신약시대에 새롭게 등장하면서 성도들에게 교회의 질서와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목자의 직분에 대해서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용어였던 장로와, 당시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감독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갈보리침례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구정민 목사님께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 서로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가운데 우열을 따지지 말고 다 서로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겸손으로 옷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6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겸손에 대한 보상으로 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할 때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겸손할 때 높아진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또한 7절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겸손하면서 생기는 많은 불이익과 손해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는 겸손한 사람보다는 교만한 사람이 더 권리를 찾고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며, 또한 모든 것을 정확하고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며, 겸손한 자를 반드시 높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
이제 8절에서는 우리에게 마귀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 여기서 우리는 교만과 겸손, 그리고 사탄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복종, 교만, 겸손에 대해서 설명하시다가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흐름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과 7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하시느니라.
7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여기서도 동일하게, 교만과 겸손과 복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경고를 주시고 계십니다. 10절에는 베드로전서와 동일하게, 주의 눈앞에서 스스로 겸손한 자를 주님께서 직접 높이실 것임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또한 11절에서는 서로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시며, 16절에서는 스스로 자랑하는 기쁨에 대해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탄의 역사 - 사람을 교만케 함
우리는 여기서 잠시 사탄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질서정연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자연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처음으로 무너뜨린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은 교만으로 인하여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이고자 했고, 그 결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까지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시작이 교만이었기 때문에, 사탄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는 교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거부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부자들이 구원받기 힘들다고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의 마음이 물질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많은 학자들과 박사들은 많은 지식으로 인해 우쭐하고 교만해져서 어리석게 선포되는 복음의 진리를 우습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많은 종교적 열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필요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지식이든,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든,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고, 그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욥기 41장 34절에서는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고린도후서 11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처음에 뱀이 이브를 속일 때에, 이브의 무엇을 자극하였습니까? 선악과가 사실은 정말 맛있는 과일이라고 속이면서 입맛을 자극하였나요? 뱀은 이브에게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의 눈이 열려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며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교만을 부추겼고, 이브는 선악과가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보였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담의 범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디모데전서 2장 14절에서는 이브는 뱀에게 속았지만 아담은 속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뱀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성경은 이 아담의 죄에 대해서 “불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서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속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한 것도 아니었고, 정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죄는 교만이며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고, 권위에 대항하며, 불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서는 “멸망에 앞서 교만이 나가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라고 기록하고, 또한 잠언18장 12절에서도 “멸망에 앞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이 있고 명예에 앞서 겸손이 있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도둑과 같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멸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케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는 스스로 넘어지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이 사람으로부터 가장 먼저 빼앗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사탄이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겸손한 마음을 빼앗게 된다면, 그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교만하게 되어 예수님을 거절하게 될 것이고, 사탄이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서 겸손한 마음을 빼앗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역사 - 속임수
그렇다면, 사탄은 어떻게 우리에게서 겸손을 빼앗고 교만케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 같이 고린도후서 11장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
만약 사탄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흉악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면, 모든 사람이 즉시 마귀를 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너무나 친근하고 따스한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사탄은 거짓말의 아비요, 속임수의 대가입니다. 사탄이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도 사탄을 가리켜서 “그 큰 용 즉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속임수는 마치 장기나 체스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아버지와 장기를 많이 뒀는데요. 아버지가 차, 포를 떼고 시작해도 매번 졌던 기억이 납니다. 장기는 일방적으로 공격하거나 수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의 장기 말을 먹어나가는 것입니다. 내 말을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장군을 먹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때로는 과감하게 나의 말을 미끼로 내어주면서 하나씩 상대방의 말을 먹어나가야 합니다. 장기가 재미있는 것은 상대방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서로 앉아서 다 보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이 나의 좋은 말을 먹기 위해, 미끼를 내놓는 그 순간을 뻔히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속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물러주기도 하고 봐주기도 하는데요, 상대방이 실수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의 말을 공짜로 먹도록 내어주는 것처럼 보일 때, 더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의 속임수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말씀보고, 기도하고, 주님을 열심히 섬기며 일하는 가운데서도 속을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장기판 위에서 우리가 더 이상 주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주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에게 많은 미끼들을 주면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잠시 사탄이 주는 많은 속임수 가운데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탄의 역사 - 속임수: 1) 많은 섬김과 체험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첫 번째 무기의 이름은 돈이나 쾌락이 아니고, “많은 섬김과 체험”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교만의 덫에 걸리게 하기 위하여 많은 섬김과 체험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넘치게 섬기고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생활 속에서 많은 간증과 체험이 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섬기고, 넘치게 섬겨야 하며, 주님과 동행하면서 많은 영적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섬김과 체험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고, 우리를 주님께로 더 가깝게 이끌어 주며,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방해를 다 이기고 주님을 선택하여 섬기기 시작할 때, 마귀는 포기하지 않고 작전을 변경하여 우리로 하여금 많은 넘치는 섬김을 갖도록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인, 베스트셀러 천로역정을 기록한, 존 번연 목사님께서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예배를 다 마치고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목사님 오늘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고 놀라웠습니다.”라고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존 번연 목사님은 그 사람들의 말을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여러분 그것을 굳이 내게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강대상에서 내려올 때 이미 마귀가 내 옆에서 그렇게 속삭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 마귀는 우리 옆에서 속삭이면서 우리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처음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주님 만에 모든 것을 하셨다고 고백하던 우리의 마음이, 어느새 나 자체가 영적이고 거룩한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마귀 덫에 걸렸음을 인식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음 섬김과 체험을 가진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의 역사 - 속임수: 2) 많은 영적 모양
두 번째로 마귀가 사용하는 무기는 “많은 영적 모양”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종교들이 있고, 그 종교들의 예식을 보면 대단히 엄숙하고 거룩한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많은 영적 모양으로 믿는 이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 가장 위험한 것은, 속에 있는 믿음이 자라나기 전에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로, “오늘 제가 성경을 읽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오늘 제가 말씀을 보는 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너무 가까웠고 주님의 은혜를 깊이 누렸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중에 무엇이 더 영적으로 보입니까? 저는 지금 두 번째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표현자체가 교만한 것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겉에 드러난 표현이 아니라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형제 자매들의 칭찬이 많은 경우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은 오히려 우리를 교만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망하게 하기 원한다면 그를 끊임없이 칭찬하라.”
우리에게 매일 말씀보고 기도하는 생활이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매번 말씀보고 기도할 때마다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형식적으로 말씀보고 기도하는 모양만 가진다면, 일주일에 세 번 금식하면서 교만했던 바리새인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보고 기도하면서 참으로 주님과 만나고 교제한다면 우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했던 세리처럼 은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 없이 가지는 모든 영적인 말과 모양은 우리를 교만하고 높아지게 만듭니다. 과거의 한 청교도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에조차 교만이 틈타고 있고, 그러므로 나에게는 매순간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느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영적 모양을 가지고 교만한 것보다, 차라리 육신적인 상태에서 겸손히 주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이 안전합니다. 주님은 놀라운 말과 영적인 삶을 가진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사탄의 역사 - 속임수: 3) 많은 영적 지식
마귀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첫 번째 무기는 “많은 섬김과 체험”이며, 두 번째 무기는 “많은 영적 모양”입니다. 마귀의 세 번째 무기는 바로 “많은 영적 지식”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리를 아는 영적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귀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겠지만, 우리가 주님을 알기 시작할 때는 작전을 바꿔서 오히려 “많은 영적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28장 3절에서는 사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보라,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그들이 네게 숨길 수 있는 은밀한 일이 없나니” 사탄은 솔로몬보다, 다니엘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자들보다 많은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풍성한 영적 지식을 제공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영적 지식을 알게 될 때에 마귀의 덫에 걸릴 수 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8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부터 3절까지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2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
3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우리에게 지식이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우쭐대게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아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참되게 알고, 예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우쭐하거나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이신 주님을 떠나 지식으로 나아가게 될 때 우리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의 길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점점 낮아지는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으며,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길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나, 많은 믿는 사람들에게서나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고,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점점 더 낮아지는 길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이 날까지 세상의 오물같이 되고 모든 것의 찌꺼기가 되었노라”(고전 4:13).
또한 침례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빌립보서 2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오늘 우리의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며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명한 자가 되면 될수록, 낮은 자가 되면 될수록 하늘에서 보상이 클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순종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너는 정말 영적인 그리스도인이야.”라고 교만을 부추길 때, 우리는 “나는 십자가에서 폐기처분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모든 것이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마 18:4).
많은 놀라운 사역을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영적 지식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그 겸손에 대한 보상으로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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