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일시 : 2009.05.20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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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부르심(신 6:5)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입니다.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본문 : 신명기 6장
5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저는 “사랑의 부르심”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얼마 전부터 오늘 읽은 본문 말씀과 함께 몇 가지 질문이 계속해서 제 마음 속에 떠올랐습니다. “나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적당히 사랑하는 모양을 가지고 꼭 지켜야 하는 의무만을 지키고 있는가?” 수요일날 어떤 말씀을 나누는 것이 좋을까 고민할 때마다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이 아시잖아요.”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을 다하여”라는 이 짧고 단순한 표현을 통해 제 자신이 너무나 합당치 못한 사람임을 알았고, 그 때문에 이 말씀을 회피하고 부담이 조금 덜 되는 다른 주제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 주일날 주보를 펼쳤는데, 공교롭게도 이번 달 암송구절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마가복음 12장 30절이었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니 이것이 첫째 명령이니라.”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마음은 다른 곳에 분산되어 있던 저를 다시금 온전한 사랑의 교제로 불러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사랑하라는 요구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많은 우상 신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믿고 경배하는 대상을 향해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신은 우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많은 신들은 사람에게 제물을 바라고 지극 정성을 바라는지 모르지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참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 많은 신들이 사람에게 재물과 부와 명예를 준다고 약속하지만, 참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참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고 계십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가 되시고, 또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첫 번째 명령은 바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첫 번째이며 가장 큰 명령이 되었는가를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전능자이시며 절대자이십니다.욥기 35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6 그대가 죄를 지은들 그분을 대적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 혹은 그대의 범죄가 많다 한들 그대가 그분께 무슨 일을 하느냐?
7 그대가 의로운들 그분께 무엇을 드리느냐? 혹은 그분께서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느냐?
8 그대의 사악함은 그대 같은 사람이나 해칠 것이요, 그대의 의는 사람의 아들이나 유익하게 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초월해 계신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줄 수 있으며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향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무런 부족함도 없으시고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으시는 초월자요 전능자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고 계십니까?
저는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수많은 아가씨들에게 저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지 자매에게는 저를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선배이든 후배이든 동기이든 다른 어떤 남자와도 단 둘이서 식사해서는 안되고, 단 둘이서 만나지도 말 것을 요구합니다.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저와 동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연지 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다른 자매의 싸이월드를 방문해서 글을 남기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나 일을 더 신경 쓰고 주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쉬운 질문이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까? 다른 어떤 우상 신도 섬기지 말고 절하지도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쉬운 질문이죠?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값없이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라는 요구를 할 필요가 전혀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전혀 사랑 받을 만하지 못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여전히 사랑 받을 만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변화되거나 또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넘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자신의 유익만을 계산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속마음을 감추면서 조금 더 선하고 좋은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치장하며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과도 적당히 계산하고 거래하는 관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더럽고 추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다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도 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또한 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가득 부어져서 차갑고 메마른 우리 마음이 소생되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형식적인 겉치레 사랑이 아닌 마음을 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으며,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아도 초코렛을 주고 장난감을 주면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한번 찬송 드리고, 한번 기도드리고,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 시간에 앉아있는 그런 겉모습만으로는 결코 만족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래도 이만큼 헌금하고, 이만큼 봉사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전부 다 주신 것처럼 우리의 온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분산되어 있습니까? 손에 잡히지 않는 미래의 일들을 계획하거나 걱정하고 있습니까? 내 영역 밖에 있는 세상의 것들을 동경하거나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까?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허영을 쫓아 방황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이 세상 것들로 채울 수 없습니다. 전도서 말씀처럼 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며 입은 먹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전 1:8, 6:7). 우리 마음 안에 온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재하실 때만이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분의 양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노래하며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변함없는 사랑의 교제로 부르시는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 1) 말씀
이제 조금 실제적인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오늘의 본문인 신명기 6장 6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6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고
7 그것들을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가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을 말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들을 네 손에 매어 표적으로 삼고 네 눈 사이에 두어 이마의 표로 삼으며
9 또 네 집의 기둥과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두고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걸어갈 때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 그 말씀들에 관해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중 어떤 주제의 대화를 가장 많이 하는가를 보면 우리가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에서도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뭔가 위대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일상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상의 삶 가운데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집회 가운데 주시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수요기도회, 주일 오전성경공부,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의 모든 모임을 다 사모하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급해 하고 즐거워합니다.
특별히 7절 말씀에서는,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이며, 부지런히 가르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귀를 세상의 가치관과 음악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세상의 소리에 귀를 여는 만큼 믿음이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여는 만큼 믿음이 자라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모님은 집에 앉았을 때에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하며,수요기도회,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까지 가능하면 모든 시간 집회에 참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자녀들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영어나 수학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모님이 먼저 믿어야 합니다. 교회에 있어야 될 시간에 학원에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주일날 교회에 한 시간 나왔다가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의 양심이 스스로 알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으셨고, 집에서나, 길에서나, 누울 때나, 일어날 때나, 집 문기둥에 말씀을 기록해 놓고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의 어떠한 체험이나 감정이나 느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교육이나 사회적 성공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순종해온 귀하고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가장 가치 있게 드높이고 사랑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높은 우선순위에 놓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의와 왕국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순종하며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 2) 형제 자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한 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오늘날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마태복음 25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내게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 왔느니라, 하니
37 이에 그 의로운 자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하였나이까?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가 되신 것을 보고 받아들였나이까?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께 옷을 입혔나이까?
39 혹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께 갔나이까? 하리라.
40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하고
이 말씀은 양과 염소로 비유된 민족들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한 가지 원리에 주목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그대로 주님 자신에게 한 것으로 여기고 보상해 주시고 계심을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가장 작은 형제 자매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배고픈 형제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음식으로 섬기는 것이며, 아픈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문제가 많은 형제 자매들을 돕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손해를 끼치는 형제 자매들을 용납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만 계산하고 따지는 형제 자매들에게 대가없이 주고 또 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게 말하는 형제 자매들의 말을 주의하여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주님을 섬기는 것은 뭔가 거창하고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내 옆에 있는 볼품 없는 형제 한 명에게 대하는 것이 주님께 하는 것임을 주님께서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누가 왕국을 상속받습니까? 작은 형제에게 물 한 잔, 빵 한 조각 건내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외되고 어려운 형제들에게 먼저 찾아가서 작은 관심을 표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섬기고 싶은데 기회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작은 형제 자매에게 먼저 다가가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부각되고 나타내지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내 마음에 맞는 “좋은 형제 자매들”도 있지만, 또 나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 “나쁜 형제 자매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얼굴만 봐도 좋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리들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생각하는 주파수가 너무나 다른 형제 자매들을 대할 때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영적인 책들만 보면서 믿음 생활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굉장히 영적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속이 좁고 유치하고 치사한 사람인지가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게 될 때 내가 얼마나 말에 실수가 많고 교만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인지가 밝히 보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교회가 없었다면 “점잖고 정숙한 나”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것이고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와 다른 형제 자매가 있음을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런 어려운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제 자매들의 어리석은 말을 들을 때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답답해합니다. “어쩜 저걸 그렇게 모를까. 진짜 바보 아니냐.”라고 생각하면서 미워하고 정죄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는 이미 다 멸망했을 것입니다.우리가 다른 형제 자매들과 다르기 때문에 서로 불편한데, 하나님은 우리와 얼마나 다르십니까? 이사야 55장 8절과 9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람마다 나쁜 모습은 감추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나쁜 모습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춘 모든 은밀한 죄까지도 다 보시며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조건도 없고 한계치도 없는 무한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나아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 같은 더러운 죄인들도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하게 될 때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해야지 결심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가 먼저 주님의 사람을 흠뻑 받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많은 형제 자매들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은 씻은 여인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많은 죄를 용서받았느니라. 이는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적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많아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많이 용서받은 만큼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용서받는다는 것은 죄를 더 많이 지어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본질이 하나님과 얼마나 다르고 죄악된지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가 받은 사랑의 용서가 얼마나 더 큰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날마다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각자 고질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쳐보고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잘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낙담도 하고 절망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답답해하시고 못마땅하게 여기셨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결심할 때 우리가 또 실패하고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받아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더러움과 연약함을 보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초월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도 문제가 많은 형제 자매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지만, 많은 것을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합니다. 우리가 아직 많이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적게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죄인이라고 정죄한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나는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이지, 결코 실제로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어떠한 사랑과 용서를 받았는지 보여주시기 원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원합니다.
정리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다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온 마음을 원하십니다. 형식적인 종교 형식과 겉치레가 아닌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들이 나에게 잘 대해주고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넘칠 때 우리도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이 내 안에 감당할 수 없이 넘쳐날 때 우리도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의 사랑을 가득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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