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2.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17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삼상 17:48-52)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17장입니다. 사무엘기상 17장 48-52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48 그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나오며 다윗을 맞으러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맞으러 군대 쪽으로 빨리 달려가면서
49 손을 자루에 넣어 거기서 돌을 꺼내 돌팔매기구로 그것을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의 이마에 박혀 그가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지니라.
50 다윗이 이와 같이 돌팔매 기구와 돌로 그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 블레셋 사람을 쳐서 죽였으나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51 그러므로 다윗이 달려가 그 블레셋 사람을 밟고 서서 그의 칼을 잡고 그 칼집에서 그것을 빼내어 그것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투사가 죽은 것을 보고 도망하므로
52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네가 골짜기와 에그론 성문들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으로 가는 길 곧 가드와 에그론에 이르는 길에서 쓰러졌더라.
저는 오늘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우연을 신봉하는 사람들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우상 신이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단어들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돈과 재물이 오늘날의 우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교육이나 과학, 쾌락과 즐거움, 스포츠, 영화, 인터넷, 스마트폰 역시도 오늘날 우상이라 불릴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연”이라는 단어를 우상의 한 종류로 떠올려보았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바로“우연”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었던, 아무것도 없었던 때에, 우연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이 우주가 생겨나게 되었고, 어느 날 우연히 지구상에 단세포 생물이 출현을 하였고, 또 생명체는 우연히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진화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화론을 믿는 과학자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신의 이름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그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진화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자면 “우연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우연”이라는 신은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즐겨 만드는 여러 이야기에서도 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초능력을 가진 어떤 주인공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게 되면, 주인공이 꾸준한 어떤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연한 사건이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놀라운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무협 이야기를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주인공이 우연한 사건을 통해 순식간에 무림의 고수가 되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연히 어떤 것을 발견하면서 해피 엔딩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만들고,또 보고 듣고 즐기면서, “나에게도 우연한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라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연”이라는 신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기도 하고, 로또복권 당첨을 통해 많은 돈을 주기도 하며, 또 행복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21세기 최첨단 과학 시대에도 사람들은 오늘의 운세를 즐겨보고, 타로카드나, 손금이나,여러 가지 모양의 점괘를 여전히 주의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연을 믿고 우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놀랍고 새로운 큰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침례신앙을 가졌던 근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는 “하나님을 향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인도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주님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 새롭게 걸어갈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까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우리에게 새롭게 생겨나는 일들은, 과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과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저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인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사무엘기상 17장의 말씀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의 승리에 대해서 많이 우리가 들을 수가 있기 때문에, 조금 색다른 각도에서 한 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가, 또 새로운 길이 열릴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오늘의 말씀에서3가지 요점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보편적인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먼저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전쟁을 위하여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서 키가 약 3미터 가량 되는 거인 골리앗이 나와서 장수끼리 모든 전쟁을 결정짓는 일기토 전투를 신청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놋 투구를 썼고, 쇠 그물 옷으로 무장하였는데, 그 옷의 무게만 놋 오천 세겔, 약 57kg 정도 되었습니다. 다리에는 놋으로 된 정강이가리개가 있었고, 어깨 사이에는 놋 방패가 있었습니다. 그의 창촉의 무게는 육백 세겔, 약 7kg 정도 되었습니다.
사울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는 키가 큰 사람이었지만, 골리앗 앞에서는 매우 작은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 사람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지만, 군사들의 사기는 점점 더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17장 15-18절을 보시겠습니다.
15 다윗은 갔다가 사울에게서 돌아와 베들레헴에서 자기 아버지의 양들을 먹이더라.
16 그 블레셋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사십 일을 가까이 와서 자기를 보이더라.
17 이새가 자기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이제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일 에바와 이 빵 열 개를 가지고 진영으로 달려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인 대장에게 주며 네 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증거물을 가져오라, 하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첫 번째 요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진로는 일상적인 순종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열린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양들을 먹이는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 앞에 불려가서 하프를 타기도 하였고, 형들을 따라 전쟁에 잠시 따라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5절 말씀처럼, 다윗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와서 평소처럼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15절 말씀에 소제목을 달아본다면, 아버지께 순종하는 일상적인 다윗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다윗의 새로운 진로를 열어주는 그 블레셋 사람, 바로 골리앗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다윗이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무려 40일을 이스라엘 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에 소제목을 달아본다면, 새로운 진로이자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인 골리앗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18절 말씀을 보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전쟁에 나간 형들이 무사한지 소식을 가져오라는 심부름이었습니다. 이 말씀에도 소제목을 달아본다면, 15절과 똑같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일상적인 다윗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함께 15절과 16절과 그리고 17-18절 말씀이 어떻게 샌드위치처럼 서로 포개져 있는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인 16절의 골리앗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일상적인 다윗의 삶이라고 하는 15절과 17-18절 말씀 사이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고, 특별한 뜻을 보여주시는가, 바로 일상적인 삶 가운데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매일의 길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특별하고 분명한 진로와 뜻과 인도하심을 구한다면, 우리는 이미 밝히 드러나고 알려진,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다윗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지 않았다면, 그는 골리앗이라는 새롭고 특별한 인도하심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만약 감옥에서 생활하던 일상적인 삶 가운데 파라오의 잔 맡은 자와 빵 맡은 자를 섬기지 않았더라면, 그는 파라오의 왕좌에 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장인의 양떼를 성실하게 먹이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불타는 가시덤불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고, 기드온이 숨어서라도 밀을 타작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주의 천사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길은 평상시 주님을 따르는 생활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속에서 이미 나에게 드러나고 보여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인도하심을 자연스럽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미 나에게 보여주신 뜻에 순종하지 않는데, 갑자기 특별한 뜻으로 부르시거나, 갑자기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믿는 우연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환경과 일들 가운데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신실하게 감당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자 할 때, 언제 어디서든 주님과 동행하고자 할 때, 바로 그때, 우리는 그러한 순종의 삶 가운데 주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자연스럽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22-23절을 보시겠습니다.
22 다윗이 자기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자기 형들에게 문안하며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보라,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에서 가드 출신의 블레셋 사람 곧 이름이 골리앗이라 하는 투사가 올라와 똑같은 말들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다윗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의 조롱하는 외침을 다윗으로 하여금 듣도록 인도하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사람들의 평가와 비난
이제 우리 함께 두 번째 요점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2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그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 그의 맏형 엘리압이 들었으므로 엘리압의 분노가 다윗을 향해 타오르매 그가 이르되,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그 양들을 네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왔도다, 하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첫째 형인 엘리압이 다윗에게 크게 분노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골리앗이 외치는 말을 듣고, 26절과 같이 말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26절의 뒷부분을 보시면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하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가 두려워하여 벌벌 떠는 가운데, 다윗이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모습은 매우 얄밉게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특별히 그의 형인 엘리압은 자기 눈앞에서 막내 주제인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였기에 더욱더 미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목숨이 달린 전쟁이고, 매우 신중하게 싸워야 하는데, 교만하고 무례하게 함부로 말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함께 33절도 보시겠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며 그와 싸울 수 없나니 너는 단지 소년이나 그는 어려서부터 전사이니라, 하거늘
다윗이 사울 왕에게 찾아가서 자기가 싸우겠다고 말하자, 사울 왕은 다윗이 그와 싸울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영어로 보시면, 너는 소년에 불과하지만, 골리앗은 소년 시절부터 전사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요점으로, 사람들의 방해와 반대 가운데,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방해한 사람은 다윗의 가족, 바로 다윗의 형이었고, 그 다음 방해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게 될 때, 모두가 찬성하고 축하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길에는 언제든지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크게든 작게든 방해하고 반대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교만하고 무례하다는, 어찌 보면 매우 영적인 책망과 같은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능성이 없다는 말로 권면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너는 소년이지만, 그는 소년 시절부터 전사라는, 어찌 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상황 설명으로 방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들이 방해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이스라엘의 왕처럼 매우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말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책망을 하듯이 방해를 할 수도 있고, 때로는 타이르듯이 다정하게 방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모든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첫 번째 요점에서 살펴본 것처럼, 평소 나에게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될 때, 오늘 나에게, 지금 나에게 특별히 임한 하나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길을 갈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라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할 때,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서 함께하고 격려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치 요나단의 병기를 드는 청년이, 내가 당신과 함께한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내 옆의 형제자매들이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함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엘리압은 막내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해서 다윗을 방해하였습니다. 사울은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가지고 다윗을 방해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감정이나, 인간적인 경험과 관점은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도하심까지도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다윗과 같이 언제든지 새롭게 길을 인도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할 때, 그것을 같은 마음으로 격려하고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3. 시험해 본 것
이제 우리 함께 마지막 세 번째 요점을 살펴보시겠습니다. 우리 함께 34-37절을 보시겠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이 자기 아버지의 양들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어린양을 움켜 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것의 입에서 그것을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서 내게 대항하면 내가 그것의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서 죽였나이다.
36 당신의 종이 사자와 곰을 죽였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게 도전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도 그 짐승들 가운데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신 주 그분께서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하니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주님과 동행하였던 일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외치는 말을 듣고 감정적이거나 순간적인 충동으로, 육신의 격한 감정으로 싸우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평소에 양들을 돌보며 주님과 동행하면서, 양들을 지켜냈던 믿음의 걸음들을 바탕으로, 지금 이스라엘의 양들을 골리앗이라는 사자나 곰 같은 짐승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하고자 하는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쟁이라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리적인 면에서는 그가 날마다 양치기 생활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시험하고 검증하였던 일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38-40절도 보시겠습니다.
38 사울이 자기 갑옷으로 다윗을 무장시키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워 주며 또 쇠 그물 옷으로 그를 무장시키매
39 다윗이 그의 칼을 그의 갑옷 위에 차고는 그것을 시험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들을 시험해 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들을 입고 갈 수 없나이다, 하고 그것들을 벗고는
40 손에 자기의 지팡이를 들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자기가 지닌 목자의 자루 곧 짐 보따리에 그것들을 넣고 손에 자기의 돌팔매 기구를 가지고 그 블레셋 사람에게로 가까이 나아가니라.
다윗의 경험담을 들은 사울왕은 즉시 자신의 갑옷과 투구와 칼을 주어서 다윗을 무장시켰습니다. 사울이 가진 장비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최고의 품질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시험해 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시험하고 검증하였던 조약돌과 돌팔매 기구를 가지고 나아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가, 세 번째 마지막 요점으로, 평소 믿음의 걸음 가운데 시험되고 검증된 것들 안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는 새로운 길이고, 새로운 종류의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익숙하게 믿음 안에서 시험되고 검증된 방식으로 안전하게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완전히 새로운 길이라 할지라도, 인도하심을 받는 원리적인 면에서는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던 그 발걸음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갑옷과 무기는 매우 좋은 것이었지만, 다윗에게는 시험해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고 또 사용하는 장비를 가지고 다윗을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평소 다윗의 믿음의 걸음을 통해 오직 다윗에게만 시험되고 입증된 것들을 통하여 다윗을 새로운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길을 걷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누가 갑옷을 사용했으니까, 다윗이 조약돌을 사용했으니까, 기드온이 항아리를 사용했으니까, 요나단은 단 둘이서만 전쟁을 했으니까,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조용히 돌았으니까, 하는 겉으로 보이는 어떤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인도하시고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 그분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에 대해 듣고 배울 수 있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추천하는 방법이 나에게 항상 효과적으로 역사하지는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개별적으로 주님을 따르면서 시험하고 검증해온 믿음의 발걸음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맞는 새로운 일을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매일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며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일상적인 순종의 삶 가운데 골리앗이라는 특별한 인도하심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께 순종하고자 할 때, 그에게는 형으로부터의 비난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왕으로부터 안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울 왕으로부터 아직 그가 시험해 본 적이 없는 좋은 장비를 제시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평소에 주님을 따르면서 걸었던 시험되고 검증된 방식대로, 전혀 새로운 싸움을 직면하였고,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바로 이 일을 통하여 다윗은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작은 양치기 소년에서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이로다.”하는 노래의 주인공이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 우리는 첫 번째로 이미 나에게 분명히 보여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매일 매순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의 방해와 비난이 있을 수 있음을 마음에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다른 사람의 인도하심을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개인적으로 동행하면서, 시험되고 검증된 믿음의 발걸음을 지속하며 걷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길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신실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주님을 따르고, 오늘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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