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30.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18
사랑과 두려움(삼상 18:15-16)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18장입니다. 사무엘기상 18장 15-16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5 그러므로 그가 매우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을 사울이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이 자기들 앞에서 나가고 들어왔으므로 그를 사랑하였더라.
저는 오늘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지혜롭게 행동하던 다윗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서로 반대의 감정을 가졌던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한 부류는 다윗을 사랑하였던 온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었고, 나머지 한 부류는 너무나 외롭게도 혼자서 다윗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였던 사울 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상 18장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반드시 한 부류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부류에 속할 것이고, 때로는 누군가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부류가 될 것이고, 또 때로는 다윗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받는 동시에, 미움도 받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함께 사무엘기상 18장 말씀을 통해서 사랑과 두려움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며, 또 누구를 어떻게 두려워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또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두려움,그리고 성령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두려움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 요나단
먼저 우리 함께 다윗을 가장 진실하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서 보시겠습니다. 사무엘기상 18장 1-4절 말씀입니다.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혼이 다윗의 혼과 밀착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혼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이 다윗을 데리고 가서 다시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니라.
3 그때에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혼같이 사랑하였으므로 그와 다윗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은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또 자기 옷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을 보고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얼마 전에 자신의 병기를 드는 청년과 단 둘이서, 이스라엘의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었던 용사였습니다. 요나단의 승리는 요나단 자신의 뛰어난 전술이나,싸움실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구원하시든지, 적은 사람으로 구원하시든지, 제약이 없으신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목숨을 건 전쟁에서 주님을 믿고 싸움에 임할 만큼, 놀라운 믿음의 용사였던 요나단은 다윗의 믿음을 한 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성경은 요나단의 혼이 다윗의 혼과 굳게 결합되었다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혼같이 사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혼같이 사랑하여서 사랑과 우정의 언약을 맺었고, 자기의 옷과 칼과 활과 띠도 다 주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출신배경이나, 용모나, 미래의 있을 일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았고, 오직 그의 믿음을 보고 사랑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왕족이었고, 다윗은 시골 양치기 소년에 불과하였습니다. 요나단이 어떤 신분의 격차에 대해서 따졌다면,둘은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나단이 어떤 지식적인 수준을 따졌다면, 다윗은 별반 배우지 못한 양치기 출신이었으므로, 둘이 친구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왕권을 이어받을 자였고, 다윗 역시나 백성들로부터 영웅이요 지도자로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계산하였더라면, 그는 다윗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경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오직 다윗의 믿음만을 보았고, 그를 자기 혼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23장 17절을 보시겠습니다.
곧 그가 그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너를 찾지 못하리라. 너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되리니 그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아시느니라, 하니라.
여기 보면 요나단이 심지어 자신의 왕권까지도 다윗에게 양보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나단에게는 자신의 유익이나 권리를 계산하거나 주장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요나단은 하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뜻 그대로를 원하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요나단처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향한 믿음 때문에, 그 믿음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자격이나 유익을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며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잠시 다윗의 편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신실하게 주님과 동행한 결과 왕자인 요나단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인기를 얻기 위해서 골리앗과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하나님께 순종한 결과로 요나단의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만 묵묵히 신실하게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격려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할 때, 그런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만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사랑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 여인들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상 18장으로 돌아오셔서 5-9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사울이 다윗을 보내는 곳마다 그가 가서 지혜롭게 행동하매 사울이 그를 세워 군사들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온 백성의 눈앞에서와 사울의 신하들의 눈앞에서 그가 인정을 받으니라.
6 그들이 돌아올 때 곧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살육하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에서 나아와 노래하고 춤추며 작은북과 악기를 가지고 기뻐하며 사울 왕을 맞이하더라.
7 여인들이 놀며 서로 화답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니라.
8 사울이 심히 노하고 그 말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르되, 그들이 다윗에게는 수만을 돌리고 내게는 수천만 돌리니 왕국 외에 그가 더 얻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고
9 그 날 이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우리는 여기서 다윗을 사랑했던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온 백성과 사울의 신하들의 눈앞에서 인정을 받았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7절에서 우리는 특별히 이스라엘 여인들의 노래를 볼 수가 있는데, 그들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군사들을 맞이하면서, 사울과 다윗을 언급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이들은 진심으로 다윗을 귀하게 여겼고,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노래 때문에 다윗은 곤경에 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편파적이고, 분파적이며, 차별을 두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인들이 별다른 의도를 가지지는 않았다할지라도, 그들은 의도 없이 사울과 다윗을 비교함으로써, 사울 왕에게 상처를 주고 자극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순수하게 보이는 사랑일지라도 그것이 육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 넘겨져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십자가로 가지 마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였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고 책망을 받았던 것처럼, 인간적인 사랑, 인본주의적인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내가 사랑한다고 여기는 그 사람을 결국 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육신의 천연적인 본성만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냉철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녀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자녀들을 향해 가장 좋은 것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괴롭게 만들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들은 다윗을 드높이고, 다윗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윗에게 크나큰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이 노래 한 마디가 사울 왕의 귀에 들어갔을 때, 다윗은 죽음과 한 발자국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위태로운 상태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잠언 27장 21절을 보시겠습니다.
도가니로 은을, 용광로로 금을 시험하듯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는데,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칭찬을 통해서 하십니다. 다윗은 시골의 양치기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온 백성의 영웅이 되었지만, 칭찬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하게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기억하면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18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니이까? 이스라엘 안에서 내 삶이나 내 아버지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라.
또한 23절도 보시겠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그 말들을 다윗의 귀에 말하매 다윗이 이르되,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너희에게는 가벼운 일로 보이느냐? 나는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이라, 하니라.
이처럼 다윗은 칭찬의 시험을 잘 통과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대하여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칭찬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다윗은 양치기 소년이었을 때나, 전쟁 영웅이었을 때나, 자기 자신을 하찮은 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로부터 환심을 사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동정이나 도움이나 칭찬을 받으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든, 비난하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평가이며, 주님의 칭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부모님들께서는 자녀들을 넘치게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말씀은 칭찬과 격려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넘치게 칭찬하시는 분이심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엄격하게 통제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면서, 즉시 순종할 것만을 강요하고, 잘못했을 때 불같이 혼내는 하나님만 보여주지 마시고, 아이가 어렵지만 순종하고자 하였을 때, 너무나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칭찬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이가 자만할까, 교만할까 걱정하지 마시고, 잘한 것이 있다면 넘치게 칭찬해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고,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칭찬을 받아서 교만해 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 교만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 아무것도 아닌 모습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자연히 겸손해지고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어떤 그림을 그려놓고, “엄마, 이거 보세요.” 한다면 바쁘시더라도, “잘 그렸구나.”라는 결과에 대해서, 또 더 나아가 “열심히 그렸구나.” 하면서 노력과 과정에 대해 많이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시 사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칭찬을 잘 통과하였지만, 사울왕은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시기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사울왕의 마음은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거기에 얽매인 고통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왕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기를 부르셔서 왕으로 세워주시고, 주님을 위해 수천의 블레셋 사람들을 쓰러뜨리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나는 겨우 수천인데, 다윗은 수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분노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인들이 다윗을 더 높이 노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울을 깎아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인들은 다소 부주의하였지만, 사울 왕이 죽인 자가 수천이라고, 사울왕도 역시 포함시켜서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과 자신을 비교한 것에 주목하면서, 시기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걷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볼 때에, 사람들과 비교하여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최종적인 평가는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기에, 우리가 오늘도 주님 앞에서 걷기를 원합니다.
** 사울
지금까지 우리는 요나단과 여인들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사울의 두려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18장 10-12절을 보시겠습니다.
10 그 다음 날 하나님으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하매 그가 집의 한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 다윗이 다른 때와 같이 손으로 하프를 켜더라. 사울의 손에 창이 있었으므로
11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내가 창으로 다윗을 쳐서 벽에 박으리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 주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하니라.
사울의 두려움은 증오와 살인으로까지 발전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대적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고, 그를 위해 하프를 연주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전쟁에 앞장서는 최고의 충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를 두려워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17절도 보시겠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보라. 내가 그녀를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스럽게 되고 주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라. 이는 사울이 말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그에게 대리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사울은 자신의 딸을 미끼로 삼아, 다윗에게 왕의 사위라는 명예와 신분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다윗을 더욱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25절도 보시겠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런 지참금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들을 보복하기 위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 하라, 하니라.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다윗을 쓰러뜨리려고 생각하였더라.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다윗을 죽이고자 생각하였지만, 사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함께 28, 2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8 주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며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는 것을 사울이 보고 알았으므로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여 계속해서 다윗의 원수가 되니라.
결국 다윗은 사울의 딸 중에 미갈과 결혼하였고,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주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과 자신의 딸인 미갈과 모든 백성들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다윗을 더욱 두려워하며 스스로 더욱 다윗의 원수가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누군가와 원수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에게 어떠한 해를 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윗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울을 대적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다윗을 두려워하였고, 미워하였고, 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육신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 원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해하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말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서로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갈등을 가지는 이유는, 내가 육신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 결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자주 실수하고 넘어지는 사람인 것처럼, 나의 지체들도 그렇게 연약할 뿐입니다. 내가 그래도 용서하고 주님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의 형제자매들도 다 나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사울 왕처럼, 나 자신의 권리와 유익을 따진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고자 하고, 내가 대우받고자 하고, 내가 존중을 받고자 한다면, 나의 무엇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함께 요한일서 4장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
성경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완전한 사랑으로 다윗과 화평을 누렸고,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주님의 사람인 다윗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오직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있었기에,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이러한 이기적인 자기 사랑과 두려움으로부터 건져내기를 원하시고, 해방시켜 자유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함께 디모데후서 1장 7절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어떠한 권능도, 사랑도, 건전한 생각도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권능으로 일하시며, 사랑으로 일하시며, 마땅히 생각할 바를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 안에서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중단하고, 차단하고, 끊어버려야 합니다. 수많은 추측과 계산과 상상을 멈춰야 합니다. 사울은 자기만의 생각 속에서 다윗을 두려워하였고, 원수로 삼았습니다. 사울이 주님과 동행하였더라면, 다윗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을 것이고, 자기에게 주신 든든한 선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렸을 것입니다. 사울은 언젠가 자연스럽게 다윗에게 왕좌를 물려주면서, 사울 자신도 안락하고 평안하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사랑하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육신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육신의 생각들을 우리는 다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시 십자가로 나아가 죽음으로 넘겨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지옥에 떨어졌어야 마땅했던 자임을 다시 주님 앞에 인정하면서, 오직 은혜로 살고 있는 자임을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성령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두려움의 영이 아닌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 가운데 행복하고 평안하며 담대한 삶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만 주님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함
우리 마지막으로 시편 34편을 보시겠습니다. 시편 34편 7-9절을 보시겠습니다.
7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는도다.
8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9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성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또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오직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공포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사울 왕은 백성들의 평가와 평판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의 평가를 주의하고,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되지만,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주님의 평가를 주의하고, 주님의 눈치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람들의 칭찬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칭찬만을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상 18장의 말씀을 통해서 사랑과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요나단처럼 형제를 온전히 사랑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인들처럼 편파적인 육신의 사랑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울처럼 육신의 생각 속에서 스스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다윗처럼 주님을 따르면서 사랑을 받기도 하고, 또 때로는 오해와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무엘기상 18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든 모습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이라고 하였을 때, 우리는 과연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가 오직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 옆에 주신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연약하고 실수도 많지만, 내 옆에 선물로 주신 형제자매들을 누리고 감사하면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요나단처럼, 주님과 같은 온전한 관점에서 사랑하고 아끼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가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될 때 우리는 올무에 걸리게 될 것이고,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둘러 진치시고, 건져내시며,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한 걸음, 우리를 주님 앞에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이 오직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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