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6.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16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삼상 16:7)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16장입니다. 사무엘기상 16장 7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저는 오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똑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먼저 재미있는 질문을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카드 3장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카드에는 각각 원숭이 사진, 판다(팬더) 사진, 그리고 바나나 사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3장의 카드에서 어울리는 카드 2장을 골라서 짝을 지으라고 한다면, 과연 여러분은 어떤 카드를 뽑으시겠습니까?
이러한 물음에 대부분의 동양 사람들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뽑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원숭이가 바나나를 잘 먹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양 사람들은 원숭이와 판다를 뽑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원숭이와 판다는 동물이고, 바나나는 과일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처럼 사람들이 어떠한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관점이 너무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똑같은 사람이라도, 똑같은 상황과 환경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관점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의 관점이 다르고, 또 부모님과 자녀의 관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주께서 보시는 관점과 사람이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보는 관점이 다를 때,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관점이 다를 때, 그것은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라는 잠언 14장 12절과 16장 25절에서 똑같이 2번이나 반복된 말씀처럼, 사람의 관점은 그것이 아무리 옳게 보여도,결국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육신의 관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사무엘기상 16장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라는 주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관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남편과 아내가, 부모님과 자녀들이, 형제자매가 어떻게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을 따를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우리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 이미, 어느 때까지
우리 먼저 사무엘기상 16장 1-3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어느 때까지 그를 위하여 애곡하려느냐? 기름을 네 뿔에 채우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그것을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매 주께서 이르시되,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다, 하고
3 이새를 희생물 드리는 일에 청하라. 네가 행할 일을 내가 네게 보여 주리니 너는 내가 네게 지명하는 자에게 나를 위해 기름을 부을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더 이상 사울 왕을 위해 애곡하지 말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자에게 하나님을 위해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우리가 1절에 있는 두 단어를 주목해서 보기 원합니다. 바로 “이미”라는 단어와 “어느 때까지”라는 단어입니다. 성도님들 각자 성경에 “이미”와 “어느 때까지”라는 말에 동그라미로 표시해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을 통치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어느 때까지 그를 위하여 애곡하려느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우리의 관점이 날마다 매순간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영어로 보시면 “seeing”, “보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거절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것을 사무엘이 보면서, 언제까지 애통하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주 반복되는 일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어느 때까지“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과거가 아니라, 오늘 새롭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겉으로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을지라도, 늘 새롭습니다. 어제까지 말썽을 피웠던 학생이라도 오늘 아침 새롭게 사랑스럽고, 어제까지 실패하고 넘어졌던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오늘 아침 새롭게 은혜로 강건하여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이 오늘 아침 파라오의 왕좌에 앉을 수 있는 것이고, 어제까지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이 오늘 아침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침까지 메대 페르시아의 총리였던 다니엘이 그날 밤 사자 굴에 던져질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어젯밤에 사자 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이 다시 오늘 아침 총리의 자리에 복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교수대에 달릴 뻔했던 모르드개가 오늘 아침 왕의 의복을 입고, 왕의 반지를 끼고, 왕의 말을 타고 백성들 앞에 행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제의 인도하심은 어제까지이고, 오늘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오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 나를 위해
또 우리는 1절 말씀 뒷부분에 “나를 위해”라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내가 나를 위해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한 왕을 예비하였느니라.” “어느 때까지 사울을 위해 애곡하려느냐? 이제 나를 위해 가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 한 왕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3절에서도 “나를 위해”라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너는 내가 네게 지명하는 자에게 나를 위해 기름을 부을지니라.”
사무엘은 여전히 사울 왕을 위해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기름을 부어서 왕이 되라고 했던 사람인데.”, “그래도 불쌍하지 않은가.” 또 사무엘은 2절 말씀처럼,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울 왕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임을 보아야 합니다. 이제 이 시점에서 진정 사울 왕을 위하는 것은, 사울이 원로처럼 대우를 받을지라도, 일선에서는 이스라엘을 이끄는 왕권을 내려놓고,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는 것도 더 이상 사울 왕이 아니라, 다윗 왕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맑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첫째로 위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손해와 이익을 계산하고, 나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조차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가장 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들을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분은,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 이새의 아들들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16장 4,5절을 보시겠습니다.
4 사무엘이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그 고을의 장로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떨며 이르되,당신이 평화롭게 오시나이까? 하니
5 그가 이르되, 평화롭게 오느니라. 내가 주께 희생물을 드리러 왔은즉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나와 함께 희생물을 드리러 가자, 하고는 그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그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청하니라.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베들레헴에 가서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청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사무엘이 오는 것이 심판을 위함인지, 평화를 위함인지 모르기 때문에 떨면서 맞이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모든 아들들을 희생물 드리는 일에 초청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6-11절을 보시겠습니다.
6 그들이 오매 그가 엘리압을 보고 이르기를,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참으로 그분 앞에 있도다, 하였으나
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8 이에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매 그가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9 그때에 이새가 삼마를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 사람도 주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다시 이새가 자기의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니라.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이들이 다 여기 있느냐? 하니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보소서, 그가 양들을 지키나이다, 하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에 오기 전까지 우리가 앉지 아니하리라, 하니
사무엘은 이새의 첫 번째 아들이었던 엘리압을 보고, 주의 기름 부음 받을 자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용모가 뛰어나고, 사울 왕처럼 키가 큰 사람으로 백성들 앞에 나설만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울 왕을 선택하신 이유는 키가 컸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새는 첫째인 엘리압, 둘째인 아비나답, 그리고 셋째인 삼마와 나머지 아들들까지 7명의 아들들을 모두 사무엘 앞에 보였지만 아무도 주께서 택하신 자가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정말 모든 아들들이 다 모였는지를 물었고, 이새는 막내가 남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막내였던 다윗은 지금 혼자 들판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자 재판관이었던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한 것은 어찌보면 정말 이새의 가족의 큰 행사입니다. 더군다나 아들들 중에서 누군가를 뽑아서 세울 목적을 가지고 온 것이므로, 집안에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새의 관점에서 다윗은 사무엘에게 택함을 받을,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을 가능성이 제로, 0%,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너는 양을 보고 있거라, 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의 관점에서는 엘리압이 주께서 택하신 자였고, 이새의 관점에서는 막내는 주께서 택하실 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람의 관점, 육신의 관점은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한 평생을 주님과 동행해온 사람인데, 그 관점이 하나님과 달랐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 이새는 8명의 아들들을 너무나 잘 알고 그들을 지금껏 잘 양육해 온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의 관점이 하나님과 달랐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는 이사야 55장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쉽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말씀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능성을 100%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혀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고, 우리가 가능성이 0%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길이라고,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손히, 어제까지 100%였던 일 조차도, 오늘 다시 새롭게 물으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말합니다. “내 자식은 내가 압니다.” 그러나 저는 18살 때부터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그리고 중고등부, 대안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10년 이상 많은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보아왔지만,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진짜 모습을 모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에 대한 어떤 말을 들으면 나의 자녀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부모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여기에 나타난 이새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아들을 부르러 오셨는데, 나의 이 아들은 부르실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면서, 아예 제외시켜놓는 부모님이 없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를 선교사로, 목회자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의 놀라운 일꾼으로 쓰시기를 원하시는데, 내 자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 내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지식도 많고, 정보도 많고, 경험도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을 필요도 없이 나 스스로 해석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의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것이 옳다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그 무엇조차도 주님 앞에 다시 내려놓고, 틀릴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겸손히 여쭙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이제 우리 함께 12, 13절을 보시겠습니다.
12 그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는데 이제 그는 혈색이 좋으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보기에 잘생겼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이 그니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시니라.
13 이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니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시니라. 이에 사무엘이 일어나서 라마로 가니라.
12절은 어찌보면 우리가 혼란스럽게 볼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겉모습을 안 보신다고 하더니, 결국 다윗이 훈남이었다는 소리가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혈색이 좋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고, 또 보기에 잘생겼다는 말씀은 다만 다윗에 대한 묘사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유로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신 것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 잘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아름다운 용모는 어찌보면 전쟁을 이끄는 전사나 왕으로서는 오히려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잠시 사무엘기상 17장 4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그를 업신여겼으니 이는 그가 단지 소년이며 혈색이 좋고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더라.
소년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골리앗은 다윗의 겉모습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이 싸움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풋내기, 곱상하게 생긴 꼬맹이 정도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누구보다 담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골리앗의 겉모습에 압도되었을 때, 다윗은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강력하게 나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목사님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은 골리앗이 저렇게 크니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라는 관점에서 골리앗을 바라보았고, 다윗은 골리앗이 저렇게 크니 어떻게 조약돌을 못 맞출 수가 있을까, 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사무엘이 아무 설명 없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부터 사울을 대신하여 왕이 될 것이니...”하는 등의 아무런 설명 없이 기름을 붓고 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는 세 가지 직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사장, 대언자,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레위 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였기 때문에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대언자와 왕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사울이 이미 왕으로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어쩌면 자신이 대언자로 부르심을 받았겠거니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르시고 택하신 이유와 기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무엘기상 16장 안에서 많은 것을 찾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순종하는 아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모든 아들들을 초청한 사무엘의 초청 가운데, 모든 아들들 중에서 오직 자기만 제외되는 상황에서도 순종하여 들판에서 양들을 지키는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만 들판에 남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슬쩍 다른데로 사라져 방황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사람을 보냈을 때, 정확히 그 자리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 아버지가 뒤늦게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렀을 때, 들판에 남으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오라가라하냐면서, 들판에서 고집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성품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순종하는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양을 돌보는 그 일 자체는 어찌보면 영적인 일이거나, 거룩한 일이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양을 돌보는 일은 하나님과 별로 관계가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들판에 양치기 소년이 수십 명, 수백 명이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양치기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중에서 다윗이야말로 주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양치기 소년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 사울 왕과의 만남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16장 16-18절을 보시겠습니다.
16 이제 우리 주는 왕 앞에 있는 왕의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솜씨 있게 하프를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 악한 영이 왕에게 임할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하니
17 사울이 자기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제 나를 위해 하프를 잘 타는 사람을 구해 내게로 데려오라, 하니라.
18 그때에 신하들 중에서 한 사람이 응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보니 그는 솜씨 있게 하프를 탈 줄 알고 또 강하고 용맹한 자요, 전사요, 일에 분별력이 있으며 단정한 자니이다.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시나이다, 하더라.
사울은 육신의 삶을 지속한 결과, 주의 영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대신 악한 영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하프를 잘 타는 사람을 구해 연주를 하게하고, 주님을 찬송하게 하여, 마음의 평안을 구해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사울의 신하들 가운데 다윗을 아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신하의 이름조차도 알 수 없지만, 이 신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볼 수 있는 자였습니다. 볼품없는 양치기 소년에 불과했던 다윗을 보고, 그는 솜씨 있게 하프를 탈 줄 알고, 강하고 용맹한 자요, 전사요, 일에 분별력이 있으며 단정한 자며,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고 정확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단지 한 명의 양치기로 가벼이 본 것이 아니라, 눈여겨보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 속에서, 또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천국에 가서 만나보고 교제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21-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를 드는 자로 삼고
22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이 내 앞에 서게 하라. 그가 내 눈앞에서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23 하나님에게서 온 그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할 때에 다윗이 하프를 취하여 손으로 타니 이에 사울이 상쾌하게 되고 나았으며 그 악한 영이 그에게서 떠나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을 따라 걷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사망의 길들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보아도 되고,안보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길이냐, 사망의 길이냐 하는 너무나 절실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눈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과거에, 어제까지 보았던 대로 보지 않고, 오늘 주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보기 위하여 우리는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경험하고 판단하는 대로 보지 않고, 나를 초월하시는 주님이 보시는 그대로 보기 위하여 날마다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 23,24절을 보시겠습니다.
23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에게서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양을 돌보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일이었습니다.
학생에게 공부하는 일은 주님께서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실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직업의 일은 주님을 섬기는 일일 수가 있습니다. 아내에게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집안일은 그 자체가 영적이고 거룩한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겉모습은 마음속에서부터 나올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가 더욱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오늘 우리가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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