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26.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로빈32세
사무엘기상하 시리즈 #14
주님과 동행해야 할 필요성(삼상 14:44-46)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14장입니다. 사무엘기상 14장 44-4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4 사울이 응답하되, 요나단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니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매
45 백성이 사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안에서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어야 하리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이다. 그가 이 날 하나님과 함께 일하였나이다, 하여 백성이 이렇게 요나단을 구출하므로 그가 죽지 아니하니라.
46 이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처소로 가니라.
저는 오늘 “주님과 동행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가 지금 읽은 사무엘기상 14장 44절의 말씀은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이 지금 자기의 아들인 요나단 왕자를 향하여 사형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니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 사울 왕은 자기 아들에게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요나단은 자기와 함께한 병기를 드는 한 청년과 함께, 오직 두 명이서,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를 가져온, 승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다 흩어져 떠나가고, 오직 600명만 남았던 상황에서, 벌벌 떨고 있던 백성들 가운데 담대하게 나아가 전쟁을 승리로 일으켰던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패배가 확실시 되었던 상황을 한 순간에 큰 승리로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사울 왕은 자기 아들에게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결론적인 한 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바로 사울 왕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요나단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울 왕 본인이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사무엘기상 14장 24절부터 46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과 동행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과 동행을 해야 하는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어떤 일들이 생기는가? 우리가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관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 내가 없어야 한다.
그럼 우리 함께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인지, 먼저 사무엘기상 14장 23절과 24절을 연결해서 보시겠습니다.
23 이와 같이 주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므로 전쟁이 벧아웬으로 넘어갔더라.
24 그 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니라.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저녁때까지 아무 음식이든지 먹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 원수를 갚으리로다, 하였으므로 백성 중 아무도 어떤 음식도 맛보지 못하니라.
23절에 보시면 주께서 그 날에 요나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패배가 확실했던 전쟁은 놀라운 승리로 바뀌었고, 도망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회복되고 돌이켜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 날 백성의 마음은 주님으로 인하여, 승리로 인하여 벅차오르는 감동과 감격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현장에서 체험하는 자가 되었기에, 그 기쁨과 놀라움에 매우 흥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에 보시면,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뻐하며 주를 찬양하고 경배하니라, 라고 되었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니라, 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어야 할 상황에, 장례식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사울 왕이 저녁때까지 아무도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맹세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크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했던 사울 왕이 도대체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과 동행하였더라면, 자기 자신이 감히 제사장만이 드려야 했던 헌물을 직접 드린 것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가 주님과 동행하였더라면, 자기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승리를 주신 주님을 겸손히 찬양하였을 것이며,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고, 여전히 육신 가운데 행하였습니다.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 원수를 갚으리로다”
사울 왕은 요나단의 믿음으로 인한 놀라운 승리에, 숟가락만 얹은 것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지만, 마치 자기 자신이 전쟁을 이끈 것처럼, 내가 내 원수들에게 원수를 갚으리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의 표시는, 바로 내가, 내가 등장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주께서 승리를 주셨지만, 사울은 내가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대적들과 싸우는 것이지만, 사울은 내 원수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과 잘 동행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나의 생활 속에 누가 중심이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 육신의 엄격함
사울 왕은 육신 가운데서 매우 엄격한 명령을 내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녁까지 어떤 음식도 먹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단순히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맹세하였습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육신의 또 다른 표현은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며,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엄격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육신이 영적인 겉모습과 모양을 가지게 될 때, 반드시 나타나는 표현 중 하나는 이러한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엄격함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타락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은 겉모습을 가졌지만, 그들의 특징을 보면,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며, 부자연스럽게 엄격하였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허약한 질병에 매였던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셨지만, 그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 사람과 함께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그들만의 이상한 해석으로 안식일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면서,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디모데전서 4장 1-5절을 보시겠습니다.
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는데
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3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4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하나도 없나니
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마귀들의 영들과 교리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3절에 보게 되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하면서, 거룩한 모양을 가진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 카톨릭이나 불교에서는 사제들이 혼인을 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혼인을 하지 않아야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육신을 하는 것보다, 채식을 하는 것이 더 성스럽고 고상한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창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표시는 겉모습이 아무리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자기 자신과 남을 얽어매어 묶어버리는 부자연스러운 엄격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육신의 표시는 정죄와 판단과 심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령의 표시는 사랑과 긍휼과 용서와 부드러움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느니라.”라는 야고보서 2장 13절 말씀처럼, 성령님이 이끄시는 거룩한 삶은, 율법과 원칙과 엄격한 기준과 판단과 심판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감당할 수 없이 넘치게 부어주시는 은혜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 요나단과 백성의 넘어짐
이제 우리 다시 사무엘기상 14장으로 돌아오셔서, 이야기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25-30절까지 보시겠습니다.
25 그 땅의 모든 사람이 숲에 들어갔는데 땅에 꿀이 있었으며
26 백성이 숲으로 들어갈 때에, 보라, 꿀이 떨어지더라. 그러나 맹세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자기 손을 입에 대지 아니하니라.
27 그러나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더라. 그러므로 그가 자기 손에 든 막대기 끝을 내밀어 벌집에 그것을 담그고 자기 손을 입에 대니 그의 눈이 밝아졌더라.
28 그때에 백성 중에서 한 사람이 응답하며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맹세로 백성에게 엄히 명하여 이르시기를, 이 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으므로 백성이 기진하였나이다, 하니
29 이에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가 그 땅을 괴롭게 하였도다. 청하건대 내가 이 꿀을 조금 맛보았으므로 내 눈이 이와 같이 밝아진 것을 보라.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자기들의 원수들에게서 자기들이 노략하여 얻은 것을 마음껏 먹었더라면 얼마나 더 그리하였겠느냐? 이제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 더 큰 살육이 있지 아니하였겠느냐? 하니라.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큰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여, 기운이 빠지고 고통을 당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숲에서 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침을 삼키면서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아버지의 맹세를 듣지 못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꿀을 먹고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 중의 한 사람이 사울 왕의 맹세에 대하여 요나단에게 귀띔해 주었고, 요나단은 이 상황을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는지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내가 개인적으로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옳고 영적인 것 같은 어떠한 엄격한 기준들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가두고, 요구하고, 얽매어 묶으면서 고통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말처럼, 사울 왕이 백성들에게 마음껏 먹게 하였더라면, 이스라엘은 더 큰 승리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마치 패배를 한 것처럼, 기운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31-32절을 보시겠습니다.
31 그 날에 그들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이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백성이 심히 기진하였더라.
32 백성이 노략한 물건으로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고 땅에서 잡아 그것들을 피째 먹었더라.
백성들은 심히 기진한 가운데 겨우겨우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며 전쟁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 중에 있었기 때문에, 승리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투를 마친 백성들이, 너무나 기진한 나머지 노략물을 피째 먹는 일이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불을 피워서 고기를 구울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짐승처럼,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잡아서 날고기를 뜯어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배고픔으로 인하여 이렇게 품위 없고 질서 없는, 짐승과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신명기 12장 23-25절을 보시겠습니다.
23 오직 확실하게 너는 그 피를 먹지 말라. 피는 생명이니 네가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라.
24 너는 피를 먹지 말고 그것을 물같이 땅에 쏟을지니라.
25 너는 피를 먹지 말라. 이로써 네가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면 너와 네 뒤를 이을 네 자손들이 잘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결코 피를 고기와 함께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피가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피를 음료처럼 마시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고기를 요리하지 않고,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노략물을 피째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다시 사무엘기상으로 돌아오셔서, 14장 33-34절을 보시겠습니다.
33 그때에 그들이 사울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피째 먹어 주께 죄를 짓나이다, 하니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죄를 지었도다. 이 날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34 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가운데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말하기를, 각 사람이 자기 소와 자기 양을 이리로 내게로 끌어다가 여기에서 그것들을 잡아 먹되 피째 먹어서 주께 죄를 짓지 말라, 하매 그 밤에 온 백성이 각각 자기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사울은 뒤늦게 백성들을 만류하면서, 백성들에게 고기를 요리해서 먹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육신 가운데 행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환경을 제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여기서 자기 자신이 직접 피째 먹지 않았으므로, 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고기를 피째 먹은 것은 백성들이므로, 백성들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본다면, 연약한 백성을 이렇게 죄악으로 이끈 것은 사울 왕 자신이었습니다. 본인이 정말 그렇게 주님 앞에 승리를 원한다면, 혼자서 조용히 금식할 것이지, 사울은 그것은 백성들에게 강요함으로, 결국 백성들을 피째 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족들, 형제자매들을 고통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짓는 환경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 요나단의 위기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14장 36, 37절을 보시겠습니다.
36 사울이 이르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내려가서 동틀 때까지 그들을 노략하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하니 그들이 이르되, 무엇이든지 왕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소서, 하니라. 그때에 제사장이 이르되, 우리가 여기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하매
37 사울이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되,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시겠나이까? 하였으나 그분께서 그 날에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제 사울은 밤새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서 아침까지 그들을 멸하자고 백성들을 이끄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어떻게 보면 낮에는 먹지도 못하게 하고, 이제 밤에도 잠도 못 자게 하는 것입니다. 사울 곁에 있던 한 제사장이 너무나 힘이 들었는지, 마음이 안 좋았는지, 하나님께 여쭤보자고 제안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내려갈 것인지를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함께 38-39절을 보시겠습니다.
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백성의 모든 우두머리들아, 여기로 가까이 오라. 이 날 이 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살펴보라.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 죄가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온 백성 가운데서 그에게 대답하는 자가 하나도 없더라.
사울은 백성 가운데 죄가 있다고 판단하고, 반드시 그 죄를 찾아내어 죽이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그러나 한 번 따져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죄가 없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사울 왕은 제사장도 아니면서,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 의식을 진행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은 피째 먹었습니다. 지금 사울을 포함한 온 백성이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다 어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 한 사람을 잡아서 처단해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42-44절을 보시겠습니다.
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제비를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43 그때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고하라, 하니 요나단이 그에게 고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든 막대기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보소서, 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거늘
44 사울이 응답하되, 요나단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니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매
사울 왕은 제비뽑기를 하면서, 결국 요나단의 죄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숲속에서 꿀을 조금 맛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요나단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결국 사랑하는 자녀를 내 손으로 망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지체들을 내 손으로 상처 주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울 왕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서, 자기가 정한 법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하고 있고,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가져온 위대한 용사를 친히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편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의 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치 블레셋 사람들의 편과도 같습니다. 요나단이 죽은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게 되면, 박수를 치며 즐거워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사탄에게 즐거움을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대적 마귀가 기뻐할 일들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혜를 가질 수가 없고, 정상적인 생각조차 할 수가 없게 되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 전투의 종결
이제 우리 함께 45-46절을 보시겠습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안에서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어야 하리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이다. 그가 이 날 하나님과 함께 일하였나이다, 하여 백성이 이렇게 요나단을 구출하므로 그가 죽지 아니하니라.
46 이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처소로 가니라.
사울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요나단을 죽이고자 하였지만,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막아서서 요나단을 구출하였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울 왕은 자기 아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아무도 말려주지 않았다면,그는 정말 자기 손으로 모든 것을 망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어리석고 육신 충만한 사울에게도,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이 늘 따르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 46절에 보면, 사울은 더 이상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지 않고 군대를 해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중단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 왕이 어리석은 맹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백성은 처음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음식을 먹고 위로와 격려를 얻은 뒤에, 블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기진하게 되었고, 피째 먹음으로 죄를 짓게 되었고, 주님께 물었을 때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고, 요나단을 죽일 번 하였고, 맹세를 깨면서 힘들게 요나단을 구출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해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 함께 마지막 52절을 보시겠습니다.
사울의 평생 동안 블레셋 사람들과 심한 싸움이 있었으며 사울이 강한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를 자기에게로 데려왔더라.
그 결과는 사울이 평생 동안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다가오는 한 번 한 번의 문제들에서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육신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평생 동안 길을 돌아서 가야할지도 모릅니다. 한 순간에 통과할 수 있는 길을 한 달, 1년 동안 더 고통스럽게 통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 결론
우리는 오늘 “주님과 동행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제목으로, 사무엘기상 14장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울 왕이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육신 가운데 자기 스스로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진행한 결과, 모든 일들이 망쳐지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굶주려 힘들게 만들었고, 피째 먹는 죄를 짓도록 환경을 제공하였으며, 자기 아들을 죽일 번 하였고, 완전한 승리를 놓쳐버렸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액세서리 장식품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주님과 동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풍성히 공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형제자매들을 소생하게 될 것이고, 완전한 패배를 승리로 바꿔놓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과 동행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함께 미가서 6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오 사람아, 그분께서 선한 것을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승리와 복을 풍성히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사울 왕이 아니라, 요나단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고, 기적의 승리를 가져온 요나단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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