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14. 갈보리침례교회 오후예배/로빈3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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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기상하 시리즈 #05
좋은 질문 나쁜 결론(삼상 4:1-3)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기상 4장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4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니라. 이제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옆에 진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을 쳤더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전열을 갖추니라. 그들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니 그들이 들에 있던 군대 중에서 사천 명가량을 죽이니라.
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이르되,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치셨느냐? 우리가 실로에서 주의 언약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오고 그것이 우리 가운데 올 때에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 하니라.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좋은 질문 나쁜 결론”입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것이 무엇인가? 왜 그런가?”라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저희 승연이도 요즘 말을 배우는데,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응 어떡하지?”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어른들도 질문을 많이 합니다. 특별히 안 좋은 일들이 자꾸 생겨나면 우리는 “왜 이래? 왜 이러는 거야?”라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요나를 태우고 다시스로 가던 배의 사람들도 갑작스런 풍랑이 왔을 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든 일에 질문을 던져보고, 의문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우연이란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또 허락하심을 믿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렇게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였습니다.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몰아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명령이고,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또 이 싸움은 갑작스럽게 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서로 진을 치고 전열을 갖추면서 준비하다가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첫 번째 전투에서 4천명의 군사들이 죽는 패배를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3절 말씀처럼 아주 좋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치셨느냐?”
그들은 훌륭하게도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읽어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훈련이 부족했다든지, 블레셋 사람들이 너무 잘 싸운다든지, 우리의 무기가 약하다든지 하는 원인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정확하게 “주께서 어찌하여”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자기 방법들을 찾아내려 하지 않고, 바로 주 하나님을 떠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매우 훌륭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학생들이 정말 때에 알맞은 좋은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고, 터무니없는 엉터리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이 좋은 질문을 할 때에는 정말 유익한 배움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때로는 제가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설명해주기보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 두세 번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답을 찾게 유도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와 같이 좋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작전 누가 세웠어? 지금 전쟁을 지휘한 대장이 누구야?”라고 묻지 않고,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치셨는가?”라고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의 뒷부분을 보시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실로에서 주의 언약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오고 그것이 우리 가운데 올 때에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
그들은 바로 주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할 때 주의 언약궤를 우리 가운데 가져오면 승리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언약궤를 가져온 뒤 2차전
이제 그들은 그러한 결론에 따라 주의 언약궤를 군대의 진영 가운데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상 4장 4-5절을 보시겠습니다.
4 이에 백성이 사람을 실로에 보내었으니 이것은 그들이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만군의 주의 언약 궤를 거기서 가져오고자 함이더라.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언약 궤와 함께 거기 있더라.
5 주의 언약 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다시 울리므로
이제 엘리의 두 아들이었던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군대의 진영 안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언약궤를 보고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이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과 용기에 가득한 외침이었습니다. 땅이 울릴 정도로 그들은 힘차게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비록 1차전에서 패배하였지만, 이제 2차전은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6-8절까지 말씀을 통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6 블레셋 사람들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의 진영에서 이같이 큰 소리로 외침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다가 주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닫고
7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기를, 하나님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며 두려워하였더라. 또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하였더라.
8 우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져 내리요? 이들은 광야에서 모든 재앙으로 이집트 사람들을 친 신들이니라.
하나님을 잘 몰라서,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하시려고 이집트에서 온갖 재앙을 내렸던 강력한 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군대 안에 들어왔으니 이제 그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9절을 보시겠습니다.
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마음을 강하게 하고 남자답게 행동하여 히브리 사람들이 너희에게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너희가 그들에게 종이 되지 아니하도록 하고 남자답게 행동하여 싸우라, 하니라.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남자답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종이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8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도 좋은 질문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져 내리요?”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정답은, “아무도 없다.”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9절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남자답게 죽음을 각오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좋은 질문에 나쁜 결론을 내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차전, 전투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함께 10-11절을 보시겠습니다.
10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매 이스라엘이 패하여 그들이 각각 자기 장막으로 도망하였으니 거기서 이스라엘의 보병 삼만 명이 쓰러졌으므로 거기에 심히 큰 살육이 있었더라.
11 또한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결과는 이스라엘의 참패였습니다. 1차전에서는 4천명이 전사하였는데, 이제 2차전에는 무려 삼만 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이 굳게 믿었던 하나님의 언약궤는 오히려 빼앗겨 버렸고, 제사장으로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 역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엘리 제사장은 이 소식을 들을 때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으면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라고 지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에서 떠나게 만들었을까요? 과연 무엇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블레셋에게 참패하게 하였을까요? 그들은 좋은 질문을 던졌는데, 어찌하여 나쁜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우리 함께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미신적인 믿음
우리는 먼저 그들의 믿음이 매우 미신적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궤를 도깨비 방망이나, 승리의 부적인 것처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만 있으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사무엘상 2장 34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다 한 날에 죽으리니 그들에게 닥칠 이 일이 네게 표적이 되리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한 날에 죽을 것이라는 예고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제사장직으로부터 마땅히 쫓겨났어야 하지만, 그들은 버젓이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무엘상 3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불법으로 인하여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리라고 그에게 말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들들이 스스로를 더럽혔으나 그가 그들을 억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직접 엘리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엘리의 집을, 그 아들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은 여전히 주의 제사장으로 세웠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오자, 마치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미신적인 믿음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생활 중에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 장식품을 소지하고 있으면, 자기가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톨릭을 믿는 운동선수들은 경기에 나가면서 십자가 성호를 그리면, 좋은 결과를 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동차에 성경책을 두면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헌금을 많이 내면,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 집회를 잘 참석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스케줄을 가지면 모든 일들을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정복해야 하는 어떤 대상을 마치 여리고 성처럼, 실제로 하루에 한 바퀴씩 일곱 바퀴를 돌면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은, 좋은 질문에 대한 나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원하심
우리 함께 호세아 6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시리라. 그분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리라.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받고, 징계를 받을 때 이와 같이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의 일들에 열심을 내는 것이 축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외적인 무엇인가를 바꾸고 더한다하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이 변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언제나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바른 결론입니다.
우리 함께 6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
여기서 긍휼이라는 것은 마음에 속한 것이고, 희생물이라는 것은 외적인 제사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것은 내적인 것이고, 번제 헌물이라는 것은 겉모습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이고 외적인 모양새보다, 긍휼과 하나님을 아는 참된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만약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치셨는가?”라는 질문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다.”라고 바른 결론을 내리고, 하나님 앞에 참되게 돌이켰다면, 언약궤를 가져오는 일이 없어도 그들은 대승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돌이킴 없이 겉에 보이는 모양새만 갖추고자하는 나쁜 결론으로, 더 비참한 패배를 맛보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사야 29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고 그들이 사람들의 훈계로 가르침을 받아 나를 두려워하는도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인 것입니다. 입의 말로는 누구나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누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지?”라는 의문을 가질 때, “방법이 잘못되었어.”라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내가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반드시 점검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오해 금지
우리 잠시 함께 요한복음 9장을 보시겠습니다. 1-3절입니다.
1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2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그가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
3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
한 가지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은 다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면서, 죄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한 경우는 죄 때문이 맞습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자의 경우는 죄 때문이 아니라,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어찌하여”라고 질문을 할 때, “하나님께 가까이 이끄시기 위하여”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이 죄 때문이라면, 우리는 정말 마음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더욱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가까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씀
이제 다시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이렇게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쁜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함께 사무엘상 3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주를 섬겼는데 그때에는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열린 환상이 전혀 없었더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엘리 제사장 시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열린 환상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성경말씀이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을 통하여 자신을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성경말씀이 완전히 기록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환상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성경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주의 말씀이 희귀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미신적인 신앙생활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바로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무엘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부흥하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우리 함께 사무엘상 3장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다시 실로에서 나타나셨으니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자신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생겨나는 많은 좋은 질문들에 대해서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진로를 결정해야 할까? 나의 자녀를 어떻게 인도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삶속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좋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진로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라는 질문보다는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이 더 좋은 질문입니다.
“나는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이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이 더 좋습니다.
“난 왜 이러지?”라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격 없는 내가 무엇에 순종하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이 더 좋습니다.
“저 형제는 왜 저러지?”보다, “주님께서는 내가 저 형제를 어떻게 섬기기를 원하실까?”가 더 좋은 질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좋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질문할 때, 바른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길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꿈은 뭐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해 계획하신 나의 사명은 무엇일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좋은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좋은 질문을 했다면, 나쁜 결론이 아니라 좋은 결론을 내야합니다. 우리가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사무엘에게 주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기 원하십니다. 입술의 고백이 아닌, 참된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희생 헌물이 아닌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한 원인에 대하여 좋은 질문을 던졌지만, 나쁜 결론을 내었기 때문에, 너무나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처음 4천명의 군사들이 쓰러진 것을 통해, 잘 배울 수가 있었는데, 잘 배웠어야 하는데, 그들은 결국 3만 명의 군사들을 더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제사장의 가정이 다 죽게 되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빼앗기면서,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내렸던 나쁜 결론은 너무나 미신적인 것이었고,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겉모습을 조금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쁜 결론을 내리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 주의 말씀이 너무나 희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서부터 정직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의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좋은 질문, 좋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시편 119편 130절을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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